와타나베 선생은 평소 학생들의 일거일동에 대해 너무 까다롭게 따지고 엄격하게 대하고 하여 학생들이 매우 싫어했고 이른바 "악질"선생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에 상급학년 또래 학생 일곱 명이 뜻을 모아 한번 골탕을 먹여주자며 거사를 모의 했다.
와타나베 선생 집은 새동네에 있었는데 지금의 감만우체국 못 미쳐 시장통 근처였다.
모일 모시, 거사를 약속한 날 밤. 와타나베 선생 집 근처에 모인 일곱 학생들은 와타나베 선생이 소등하고 잠자리에 들어 가는 시간에 맞추어 미리 준비해 둔 인분 덩어리가 가득 담긴 깡통을 하나씩 들고 각자 맡은 위치에서 창문과 현관 사방 외벽을 향해 세차게 뿌리고 도망쳤다. 창문과 사방 벽에 일곱 통의 인분 덩어리가 철썩 철썩 달라 붙고 흘러 내리고 하여 와타나베 선생 집은 그야말로 똥 칠갑이 되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그 까다로운 와타나베 선생이 우거지 상을 한 채 창문과 벽에다 연신 물을 끼얹으며 독이 올라 씩씩 거렸고 숨어서 지켜보던 일곱 학생들은 희희낙락하며 쾌재를 불렀다. 와타나베 선생 집 바로 위쪽에 한 학생의 시집간 누나가 살고 있어 자초지종을 지켜보았는데 계속 씻어 내어도 오물이 땅 바닥에 스며들고 하수구에 쌓여 냄새가 근 일주일 넘도록 사방에 진동 했다고 한다.
그 때의 일곱 학생은 박상규 박상환 박선출 김무태 김종근 김상석 김영화 등 이었는데 주로 1927-1930년생의 토박이들로써 오래 전 모두 작고 하였다. 특히 박선출 씨는 6.25 참전 용사로 무공 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