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게으르니
김 하경 선생님이
먼저 글을 올려놓으셨네요...ㅎㅎ
시간나는 대로
짬짬이 글 올리겠습니다.
------------------------------

‘거세된 희망’을 읽고
1.
책에도 인연이 있나보다. 내가 맨 처음 ‘거세된 희망’에 대해서 들은 것은 ‘아름다운 재단’의 책임자로부터였다. 그는 참여연대와 아름다운 재단 공동 기획으로 마련했다면서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인 하월곡동 사람들의 삶을 기록해 주면 좋겠다는 제의를 했다. 하월곡동은 나에게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대학교 다닐 때 그 높고 가파른, 그러면서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걸어 다니며 사람들이 어떻게 사나 기웃거렸던 생각이 나고 집집마다 유인물을 넣었던 생각도 났다. 그러다가 잡혀서 맨 처음 유치장 신세를 진 곳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외삼촌집이 그곳에 있어서 밥도 얻어먹고 잠도 잤던 생각도 났다. 나는 외가댁을 가 본적이 없었다. 엄마형제분들은 다 단명을 하고 엄마 혼자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내가 다니는 대학교 관리실에 외삼촌이 일하고 있다는 말을 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외가댁 식구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다. 외삼촌은 주름은 많았지만 맑고 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자식들이 단명을 하니 의붓자식을 하나들였던 것이다. 외삼촌은 간질병을 잃고 있는 아들과 외숙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외삼촌 집을 처음 갔을 때도 간질에 좋다던 천둥오리를 솥에 삶고 계셨다.
마지막 공간 작업이 막 끝났을때라 많이 지쳐 있었지만 나는 흔쾌히 기록을 하겠다고 승낙을 하였다. 아름다운 재단 책임자는 기록의 형태는 ‘거세된 희망’(개마고원)에 나오는 글의 형태를 취할 것이니 그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 분들의 삶을 기록해 드리고 싶었다. 그 책임자가 한달간 하월곡동에서 천막을 치고 함께 생활을 해야한다고 했다.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나는 그렇게 할 수는 없었지만 매일 오전과 주말을 이용하여 기록을 해 드리기로 했다. 그런데 기록은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천막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은 하월곡동 마을 주민들이 아니고 하루나 이틀 아니면 며칠씩 와서 빈곤 체험하는 일반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이 하월곡동 사람들처럼 생활하면서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을 기록하는 것이 내가 주로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월곡동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 주가 아니었다. 빈곤 체험하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긴 했지만 (최저생계비 산출할 수 있는 근거로 사용됨, 그 효과가 얼마나 있는지 의심스럽지만)그것은 내가 원하는 기록이 아니었고 그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결국 나는 그 작업을 포기했고 ‘거세된 희망’도 나에게서 잊혀졌다. 그런데 이번에 비정규직기록 작업하면서 나는 다시 그 책을 만났다. 우리는 만나고야 말 운명이었던 것이다. 책에도 운명이 있었던 것이다.
2.
첫 번째 내가 ‘거세된 희망’을 읽으면서 느꼈던 불편함은 시선이었다. 하층계급에 연민을 가진 타 상위 계층의 사람이(지식인) 직접 그들의 생활을 체험 하면서 기록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하층사람들의 삶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함으로써 그 고통스런 삶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면서 글을 읽게 했다. 즉, 직접적인 타격을 받을 수 있는 현실적인 고통과의 거리를 확보함으로써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하면서 글을 대하고 생각하게 했다. 그것은 좋은 일인가? 나는 고민한다.
사람들의 현실적인 삶이 고통스럽다면 고통의 깊이만큼 사회는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현실을 견디는 힘도, 제도도, 정치도 생기지. 다른 한편에서는 거리두기가 없다면 현실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는 현실의 문제는 있는 그대로 견뎌야 한다는, 전자에 더 마음이 끌리고 의미를 더 두는 것 같다. 현실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고통이 어디로부터 연유되었는지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여유가 없어 주위동료와 가족들에게 또는 자기 자신에게 공격을 돌릴 수가 있다. 시선이 좋고 많은 것을 생각하는, 문제의 근본에 다가갈 수 있는 지식인의 글은 그들의 삶을 더 잘 표현해 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거세된 희망’은 상대적 거리를 두고 있지만 일단 성공한 듯 보인다. 폴리 토인비, 그녀의 실제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말들이 ‘낮은 임금’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많이 해소시켜주고 있다.
3.
이 책의 저자 폴리토인비는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 직업을 직접 체험하면서 생생하게 그들의 생활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받은 낮은 임금이 왜 부당한가를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증명해 주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쓸고 간 영국의 상황 속에서 낮은 임금을 받은 노동자들의 삶을 다루고 있어 우리 작업에 좋은 시선들을 많이 던져주고 있다. 제빵공장 노동자, 학교 급식소 조리원, 병원 간병인, 텔레마케팅노동자 등은 그녀가 일한 직업들이다. 그녀의 글은 알게 모르게 매스컴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우리들이 매스컴들이 해석해놓은 방식대로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상황에서 구체적인 현실을 아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잘 알려주고 있다. 낮은 임금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인식도 그런 편견 속에 놓여있다.
무엇보다 저임금을 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노동이 저평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환자들을 돌보고, 학생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고, 사람들에게 빵을 만들어 주는 노동이 왜 기자나 정치인 노동보다 사회적으로 저평가 되어야 하는가, 그녀는 묻고 있다. 그녀는 그들의 노동이 사회 속에서 낮게 평가되어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더 깊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런 저평가 속에는 ‘누군가를 보살피고, 청소하고, 요리하고, 아이를 키우는 소위 여성들의 능력이 저평가 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이것이 저임금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또 그녀는 여러 가지 일을 경험하는 동안 인종도 저임금의 상징이라고 했다. 마치 한국적인 상황에서 외국노동자, 장애인, 성적소수자, 여성들이 저임금의 상징인 것처럼 말이다.
놀랍게도 런던에는 경제학자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노동시장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세계에서는 건전한 경쟁을 통해 임금이 저절로 상승되는 노동시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의 부는 예전보다 크게 상승했는데 제빵노동자가 받은 임금은 과거보다 오히려 낮은 수준이었다.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다. (신자유주의적 경제체제에서 상층계급의 이윤이 늘어나는 속도로 하층계급의 소득은 줄어든다, ‘화이트칼라의 위기’) 급여가 너무 낮아 아무리 오랜 시간을 일해도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다. 상류층과 하류층간의 소득격차가 벌어지면서 사회적 상승이동은 돌연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이제 하층민은 하층민의 운명이 따로 있고 그들은 그들의 운명이 따로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기본적인 공정성이다. 임금은 노동의 가치와 존엄성을 반영해야 한다. 저임금은 곧 저평가를 의미한다. 저임금노동에는 ‘음모섞인 민주주의’가 있었다.
저임금 노동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게 없다. 단지 돈이 조금 없을 뿐이다.
‘사람들은 (학교 급식소)주방일이 싫다고 떠났고 매기와 윌머는 그들이 외면한 곳에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떠난다는 건 그 일이 하찮다는 뜻이었고 때로는 그곳 사람들의 마음도 하찮다는 뜻이었다. 그들의 고된 노동을 인정하지 않았고 인간으로 대접하지도 않았다. 결국 이들의 성의와 전문성과 헌신은 가치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이들의 노동이 저평가되면서 임금도 작아지고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 직장의 이동율이 잦았다. 또 한편으로는 ‘병원 칼릴리온에서 일을 해봐야 앞으로 이곳에서 더 나은 일을 할 가망성은 전혀 없었다’처럼 구세대적인 기득권 세력 때문에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능력에 훨씬 못 미치는 일을 강요받고 있었다.
그녀는 ‘질투심도 탐욕도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부족만큼 사회를 좀 먹지 않는다’며 낮은 임금자에 대한 사회적인 무관심을 질타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들이 저임금을 받는다는 이유로 저평가되었고 그로 인해 서로 단결했다. 저임금노동자들의 형제애 앞에서는 중산층의 말투도 의미가 없었다’며 저임금노동자들 사이의 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런던은 즐거움이나 선택의 여지가 별로없는 비참하고 지루하며 빈곤한 도시였다.’로 그녀는 자신을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확산되면서 한국사회에서는 건강한 구성원으로서의 임금노동자와는 차별되는 ‘새로운 노동빈민’이 형성되고 있다. 광범위하게 ‘신빈곤층’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삶은 급격히 퇴보하고 있으며 국제금융자본이 자신을 존립시키는데 새로운 희생층이 되고 있다.
2005년 4월 15일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담에는 글자체를 크게 만들어주세요
김순천님, 르포문학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 기다립니다
<말해요, 찬드라> 같은 경우가 제게는 그런 책이었어요..제가 빗겨간 그 책을 다시 만났지요.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르포문학교실로 바쁘시겠네요. 김선생님 강의를 새로이 들어봐야 할 터인데. 틈 나는 대로 좋은 글 많이 보여주세요......^^
르포문학교실 꼭 듣고 싶은데...여의치가 않네요...잘 읽었습니다.
해마다 열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ㅎㅎ
좋은 글 좀더 봤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