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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대 졸업 40주년 기념 여행을 마치고
김 영 애
뉘엿뉘엿 물드는 남편의 머리 빛깔을 보며 문득 저녁노을 같은 쓸쓸함이 느껴져 온다. 하지만 슬픔과 기쁨은 하나의 감성에서 생겨나 둘이 아닌 것처럼, 아쉬움의 끝자락에는 또 다른 새 시작이 있으리라 스스로를 위로한다.
깊어가는 가을여행은 동행한 모든 동문들의 마음을 붉고 노랗게 물들였다. 기다림으로, 만남의 기쁨으로, 나눔의 정겨움으로 마음들은 빨간 단풍잎이 되었다 노란 은행잎이 되며 바람결에 출렁거렸다. 얼마나 아름다운 향연이었던가. 온 천지의 화면이 계절 빛으로 물든 가을 수채화 속에서 단풍같이 붉게 물든 가슴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풍요로운 가을과 하나가 되는 축제였다. 칠박팔일 동안 모교를 방문하고 낯익은 어머니 땅의 흙냄새를 밟으며 도란도란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공을 잊은 채 황홀했었다. 서로의 지나온 삶을 되새기며 모든 것에 감사하는 뜻 깊은 외출이었다.
남편이 의과대학을 졸업한 지 벌써 사십 년이 지났으니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 푸른 산이 변하듯 동창들의 검은 머리칼은 어느덧 진주 빛이 되고 얼굴은 주름으로 깊어졌다. 청빛 가슴에 품은 열정 하나로 거친 세상의 물결을 헤쳐 온 끝에 생긴 영롱한 진주, 팽팽히 감긴 바이올린 현 같았던 젊은 시절엔 오히려 여유가 없었을까. 얼굴 굽이굽이마다에 생긴 주름은 어느새 너그러운 이해의 길이 되고 다리가 되어 이웃과의 힘든 세상마저도 그 길을 통해 쉽게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풍요로운 길인가. 아픈 이나 삶에 지친 이들이 잠시 머물며 쉬어갈 수 있는 여유로운 인생행로이다.
우리 일행은 첫날 한국과 미주의 졸업생들이 모두 모여 성대한 만찬회를 가졌고, 그리고 다음 날 서울을 출발해 꿈에도 그리던 뜻 깊은 여행을 떠났다. 앞에는 이원택 동문이 기행문을 썼고 필자는 통영에서부터 인상 깊은 곳을 적어 나갔다. 혹시 겹치는 부분이 있어도 두 사람의 눈이 다름에 깊은 이해 있기를 바란다.
- 통영
일행은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에 들렀다.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에 올라 문득 왜구를 무찌른 이순신 장군이 되어 본다. 한없이 평화로운 주변의 섬들로 적을 유인한 뒤 그것을 공격의 무기로 쓸 줄 알았던 장군은 불세출의 대단한 전략가였다. 거제도와 한산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통영은 산과 바다와 해안도로가 하나가 되어 푸른 보자기 같은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역사 속에 남았던 싸움의 흔적이나 장군의 충정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는지 이국적인 바다 풍경이 더없이 평화롭다. 청빛 물빛은 예와 그대로인데 세월은 여울 치는 잔물결 따라 어디로 흘러간 것인지…….
- 외도
안개 뒤섞인 해풍에 몸을 묻으며 외도 여행길에 오른다. 외도는 말 그대로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정도(正道) 옆에 색다르게 나 있는 길, 그래서 더 호기심이 생기고 새로워 보이는 섬은 이름 때문인지 깊은 인상으로 남는다. ‘외도’는 ‘내도’ 옆에 다소곳이 몸을 틀고서 보석 같은 푸른 바다에 싸여 막힌 곳 없이 사방이 시원하게 뚫려 있다. 부드러운 토파즈 빛 바다를 배경으로 입구에는 늘 푸른 소나무들이 섬을 열고 있다. 소나무는 날카로운 침엽수인데도 부드러운 모차르트 곡의 음률처럼 그 몸매들이 우아하게 다듬어져 있다. 상상의 나라에라도 초대된 양 나무는 송이버섯 모양이었다가 커다란 코끼리로 변했다가 힘차게 하늘로 틀임 하는 용이 되며 끝없이 변신한다. 싱그러운 초록으로 단아하게 정리된 섬 주변은 태초의 몸짓으로 속삭이는 푸른 바다 물결까지 더해 더없이 화려하다. 그래서이리라, 동기 일행들은 사진들을 찍으려 여기저기에서 멋진 포즈를 잡는다. 섬은 아직도 외도를 세운 이의 꿈을 가슴에 얹고 새로운 상상의 날개를 바람결에 펼치며 자연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 거제도의 섬들
햇볕이 쏟아지는 아침, 거제도에서 해금강으로 향하는 배에 일행은 몸을 실었다. 거제도는 남해에서 두 번째로 큰 섬이다. 거제도에서 출발해 초록 물결의 발자국들은 줄줄이 이어져 골짜기바위, 십자바위, 신랑바위, 부인바위, 코뿔소바위, 사자바위, 선녀바위를 차례로 지난다. 언제부터 바위들은 바다와 동거를 시작했을까. 사람들이 붙여준 전설 같은 이름표를 달고 바위들은 망망한 바다에서 한없이 침묵하고 있다. 자신의 가슴 안에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바다는 끝없는 파도와 잔물결의 흔들림 속에서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쩌면 짙푸른 바다는 끝없이 흔들렸기에 오히려 깊은 내면을 지켜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찰나도 쉬지 않는 바다는 우리네의 삶을 닮았다. 번뇌 같은 잔물결들이 수만 개의 자국을 내며 망망한 바다를 끝없이 표류하건만, 살아있음에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일 게다.
- 십자바위
일행을 태운 배는 은물결 부서지는 해금강 십자바위에 닿았다. 태초부터 출렁이던 바닷물과 굳은 바위의 우정은 얼마나 깊었을까. 짙푸른 바닷물은 십자바위 가운데에 하늘 문을 내어놓고는 쉬지 않고 넘나든다. 아마도 저렇게 단단한 바위조차 부드러운 바닷물에는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출렁대는 물결 속에 배가 십자바위에 가까워지자 선장은 벌어진 바위 사이로 아찔하게 배를 밀어 넣는다. 경이로움과 함께 바위 옆의 일행은 출렁이는 푸른 물결이 되어 아름다운 십자바위를 넘실댄다. 어느새 하늘빛 물은 바위와 하나가 되고 일행은 바다의 한 부분이 되었다.
- 영주 부석사
부석사로 떠나는 날이다. 너른 언덕길에는 가을로 물든 은행나무가 한창이다. 나무는 청빛 하늘을 노란색으로 칠하다 기어코는 땅까지 온통 노랗게 물들여 버렸다. 쏟아지는 해가 나무를 비추자 잎들은 문득 바람에 펄럭이는 금빛 나비 떼로 변신한다. 마치 사십 년 만의 동창들의 해후를 축복이라도 하듯 나뭇잎들은 축제라도 펼치려나 보다. 같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는 변할 수 없는 끈끈한 학연, 동창들의 행복한 웃음이 은행잎 사이로 퍼지며 황금빛 선이 우정의 프리즘 광선으로 반짝인다.
일행은 가파르게 깎아지른 계단을 올라 부석사 대웅전에 닿았다. 아마도 셀 수 없는 번뇌의 계단을 올라야만 힘든 부처의 길에 도달할 수 있나 보다. 숨 가쁜 바람 따라 고개를 오르자 법당 안의 부처님이 미소를 지으신다. 자신이 부처임을 모를 뿐 모든 이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으니, 범부의 평범한 미소 속에 부처의 미소가 있을 것이다. 쉬지 않고 깨어 있으라는 처마 끝의 목어가 말없이 가르침을 전해준다.
- 단양팔경
단양 팔경의 물빛은 연두색 물감을 타 놓은 듯 청신하다. 살아 움직이는 영혼 같은 안개가 갈색 땅과 푸른 하늘 사이를 가득 메워 버린다. 안개를 배경으로 이끼 앉은 검은 바위와 꼿꼿한 소나무가 선비의 기상을 드러내며 청록색 물과 함께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낸다. 청산을 안고 흩어지는 흰 물살들을 보면 세파의 작은 걱정들은 어느새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우람하던 청산도 세월 따라 그 허리를 낮추는데 마음에 맺힌 그 무엇이 얼마나 중요하단 말인가. 어머니 자연의 품 안에는 언제나 가르침이 담겨 있다.
일행이 탄 배가 방향을 바꾸자 석회석으로 된 동굴이 멀리 모습을 드러낸다. 끊임없이 뱃전을 찰랑대며 물소리를 토해내는 남한강을 따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단양팔경의 단상들은 자연이 빚은 또 하나의 예술품이다. 깎아지른 바위와 초록빛 산과 에메랄드 물빛이 운치 있게 짜 맞춰진 절경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먼 하늘과 손을 잡은 물 위의 기암괴석을 바라보며 애달픈 두향의 이야기를 듣는다. 단양군수 이황과 관기 두향의 사랑 이야기이다. 못다 이룬 사랑을 죽음으로 끝맺은 절절한 두향의 무덤, 매화를 사랑했던 두 사람은 매화 같은 의지로 눈보라치는 찬바람 속에서 매화꽃 사랑을 하였나 보다. 두향의 끊을 수 없는 연민은 생(生)과 사(死)를 초월하였고 그 연정은 시공을 뛰어넘었다. 두향은 죽었지만 그녀의 혼은 듣는 이의 가슴에서 애처롭게 피어난다. 못다 핀 사랑은 언제나 영혼의 미라로 사람들의 가슴에서 영원토록 보존되나 보다.
- 경주
경주 토함산에 자리 잡은 불국사는 현세의 어머니를 위한 지극한 사모의 정을 예술로 빚어낸 김대성의 걸작품이다. 동해의 햇살이 제일 먼저 와 닿는 석굴암, 불국사의 상징인 안양문, 범영루, 자하문과 돌 주추, 돌단계의 조화로운 풍경을 보며 옛 선인의 예술적 감각에 감탄한다. 절 마당에는 눈에 익은 석가탑, 다보탑이 세월의 풍상을 이기고 다정하게 서 있다. 신라인들은 어찌 그리도 돌을 잘 다루었는지……. 석굴암의 기품 있는 부처며 우아하고 부드러운 십일면 관음보살상은 마치 밀가루를 반죽해 빚어 놓은 듯하다. 엷은 바람결에도 흔들릴 듯한 관음보살 옷깃 사이의 손은 중생의 고뇌를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다. 사면이 짙푸른 산으로 둘러싸인 경주는 천년의 역사만큼이나 고고한 기품이 살아 숨 쉬는 고장이다. 사색하는 푸른 학같이 함부로 범접하기 힘든 그 무엇이 경주에는 은은히 서려 있다.
- 안동
안동 하회마을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마을이다. 이 마을은 풍산 류씨가 육백여 년 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집성촌이며, 와가와 초가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된 곳이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선생이 살던 곳이다. 수령이 육백 년이 된 삼신당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마을의 집들이 강을 향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마을 이름을 하회라고 한 것은 낙동강이 마을을 태극 형상으로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연화부수형의 명당으로 이미 조선 시대부터 제일 살기 좋은 곳이었다. 일행은 류성룡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을 방문하고 삼신당의 느티나무를 둘러보았다. 나지막하게 다정한 울타리와 황톳빛 길 그리고 가지런한 기와지붕을 돌며 일행 모두는 옛 조선 시대의 양반과 그 정경부인이 된 듯했다.
- 부석사 무량수전
진한 가을해 때문인지 부끄러운 가지에서 시작해 온몸이 빨갛게 달아오르다 땅까지 붉게 물들인 단풍을 밟으며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오른다. 무량수전은 기둥이 특이한 배흘림 양식을 하고 있다. 둔탁한 기둥의 무거움을 줄여 보려고 선조들은 나무 윗부분을 특이하게 다듬었다. 고색이 창연한 단청은 세월만큼이나 빛이 바랬다. 기둥이 초라하게 벗겨졌음에도 가식이 없는 진실처럼 왠지 푸근하고 편안하다. 일행은 다시 길을 나선다.
길을 걸으면 이름 모를 나무들은 여기저기에서 다른 빛으로 계절을 채색한다. 푸른 소나무와 헤픈 아줌마같이 여러 색의 옷을 한 몸에 걸친 주황빛 나무, 참한 갈맷빛 나무, 빨간 단풍, 가을이면 할머니가 되는 백발의 갈대들이 바람결에 흔들린다. 세상 사람들이 삶의 길을 걷듯, 서로 다른 나무들도 삶의 길을 걷는다. 나무들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며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 나뭇잎 색깔마다에 개성을 드러내는 나무들은 같은 길에 있지만 서로를 소유하려 하지 않고 시샘하지 않으며 자연의 순리에 자신을 맡긴다. 가을은 서로 다른 자연의 동행 길을 볼 수 있기에 아름다운 것일까. 익어가는 가을 아래 여러 빛의 나무들은 화려한 수채화를 그리다가는 지우며, 겨울을 맞이하려고 비우는 연습을 한다.
서울에서 출발해서 부여, 정읍, 담양, 순천, 통영, 거제, 경주, 대구, 안동, 단양, 평창, 이천을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서부에서 시작하여 남부를 걸쳐 동부까지 조선 팔도를 모두 섭렵한 것이다.
인생은 한순간의 꿈이고 여행이라고 했던가. 의대 사십 주년 졸업생들은 푸른 동심 하나로 칠박팔일의 꿈의 인생을 같이 동행한 것이다. 이렇게 행복한 꿈이 어디 또 있을까. 삶의 찌꺼기 같은 잡티와 오점을 모두 삭제해 만든 한 장의 멋진 사진이라고나 할까. 피곤도 했지만 마냥 행복했던 동창 일행은 다시 만날 그 날을 다시 기약하며 정든 둥지를 향해 길을 떠난다.
이번 여행에 참석하신 강태수, 김광식, 김일영, 김영철, 김창구, 배성호, 이원택, 오동환, 오상현, 장문석, 조병선, 최영철, 하준영, 황동하 님들과 그 사모님들 그리고 행사에 참석하신 김유식, 고기영, 온기철 님들과 그 사모님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따뜻한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