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길준은 1856년 기계 유씨(杞溪 兪氏) 가문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기계 유씨는 조선 후기 노론의 유력가문으로 이른바 ‘대명의리론(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고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는)’이 주된 경향이었습니다(노대환, “조선 후기 杞溪 兪門의 정치활동과 학풍”, 역사와 담론, 제43집, 호서사학회, 2006, 139-178쪽). 그렇다면 유길준은 기존의 기계 유씨 본류에서 벗어나 개화파의 선구가 되었으니 특별한 비약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유길준에게는 형 희준, 누나, 동생 성준, 누이 동생이 있었습니다. 조부가 군수, 부친이 동부승지 등 벼슬과 학문을 하였으나 살림은 넉넉지 못하였습니다.
1865년 조부가 사망하고, 1866년 병인양요가 발생하면서 서양인이 서울에도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유길준 가족은 서울 부근 광주로 낙향하였고, 유길준은 동네의 서당에서 글을 배웠습니다. 1869년 서울로 돌아와서는 학식이 높았던 외조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습니다. 1870년 만14세에 경주 김씨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이후 유길준은 기계 유씨 일가 유만주(兪萬柱)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유만주는 앞서 보았듯이 보수적인 노론의 전통을 따라 서양의 사설(邪說)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한 쇄국론자에 가까웠습니다(노대환, 앞의 글, 170쪽). 그런데 유길준은 특이하게도 얼마 뒤에 박규수 문하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광린은 유길준이 유만주 문하에서 공부할 때에도 이미 마음은 박규수 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박규수(朴珪壽)는 주지하듯이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서 선대로부터 최고의 문장과 실학을 전수받았고, 또 고종과 흥선대원군 시대 도승지와 우의정 등 중책을 맡았으며, 특히 서세동점의 시대 문호개방의 방략에 부심하였으며, 그리하여 이후 개화파의 인사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김윤식, 유길준이 모두 그의 사랑방에서 수학하였으니, 그는 참으로 구한말 조선의 북극성과 같은 존재였다고 하겠습니다.
박규수는 유길준의 문장을 보고 비범한 능력을 칭찬하며 중국 청나라 위원(魏源)이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주면서 이런 책도 읽어 보아야 한다고 권하였다고 합니다. 위원의 해국도지는 서양 침탈의 시기 중국의 선각자인 임칙서(林則徐)가 아편전쟁의 책임을 지고 유배를 떠나며 위원에게 대신 편찬을 당부한 책으로 세계의 역사와 지리를 소개하고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의 국가 방어의 방략을 다룬 책입니다. 이후로 유길준은 과거시험을 위한 공부를 중단하고 우리의 실학 그리고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 서양의 기술 문물을 도입하여 국력을 키우자는 운동)에 대한 서적을 탐독하였다고 합니다(이광린, 앞의 책, 11쪽).
유길준은 박규수 문하에서 개화파 선배들과 교류하였고, 특히 김옥균과 친하였습니다. 김옥균의 부인이 유씨로서 유길준의 고모뻘이었고, 다섯 살이 위였던 김옥균은 유길준을 동생처럼 대했다고 합니다.
또한 주목할 부분으로 유길준과 민영익의 친분입니다. 주지하듯이 민영익은 고종의 왕비 민비의 전폭적 신임을 받으며 구한말 정국의 중심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민영익은 14세 소년 시절 유길준보다 4세 아래였으나, 앞서 보았듯이 유만주 문하에서 유길준과 같이 수학했던 것입니다(노대환, 민영익의 삶과 정치활동, 한국사상사학 제18권, 한국 사상사학회, 2002, 468쪽). 민영익은 이듬 해 민비의 오빠 민승호가 사망하면서 민비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고(그러니까 민비의 조카가 되고), 18세가 되던 해 1877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바로 정국의 실세로 부상하게 됩니다. 민영익은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과 같은 대외 개방 정책을 중요시 여겼으며,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파 인물들을 중용하였고, 일본에 신사유람단 파견 그리고 미국과의 수교 등에 앞장섰습니다.
민영익은 어린 시절 동문 수학 친구인 유길준에게 같이 과거에 응시하여 국사를 도모하자는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길준은 새 시대 과거 시험은 백해무익이라고 판단하였고, 그에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이광린, 앞의 책, 13쪽). 유길준은 소시 적부터 이렇게 단호하고 결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길준과 민영익의 우정은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881년 조선은 일본의 신문물을 견학하기 위하여 ‘신사 유람단(紳士遊覽團; 지금은 조사시찰단 朝士視察團이라고 부름)’을 파견하였습니다. 12명의 관리와 수행원, 역관, 하인 등 60여명을 파견하였습니다. 여기서 관리 어윤중 산하에 유길준, 유정수, 윤치호가 수행원으로 함께 가게 됩니다. 참고로 유정수는 유길준의 매형이었습니다. 신사유람단은 김옥균 등 개화파가 추진하고 민영익의 지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길준, 유정수, 윤치호는 수행원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일본 유학이 목적이었습니다. 유길준과 유정수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였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일본 문명 개화의 대표 지식인이었고, 경응의숙은 그가 연 일본 최초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길준 등이 경의의숙에 유학한 것은 한국 최초의 유학이었으며, 일본으로서도 최초의 외국 유학생 수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를 통해 근대 학문을 배우고자 하였고, 후쿠자와 유키치 또한 유길준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일본 유학 당시 유길준은 25세로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열심히 공부하였고, 발군의 성취를 보였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국민 계몽을 위하여 언론 활동을 중시하였고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간하였습니다. 유길준은 일본 유학 1년 만에 훌륭한 논설을 게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후쿠자와 유키치는 다음과 같이 극찬을 하였습니다.
“다음의 일편은 당시 경응의숙의 생도 조선국 귀족 유길준씨가 보내 온 것이다. 씨는 작년 6월 여기 의숙에 들어와 일본어를 배우고 아직 1년이 되지 않았는데도 학업이 크게 전진하여 작문 담화 등 거의 지장이 없을 정도까지 되었다. 필경 씨는 영재(穎才: 빼어난 인재)이고 열심히 공부하였기 때문이라 할 것이지만, 같은 문화권 때문에 편리한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일본인이 중국 조선 등의 말을 배우는 데에 조선인이 일본어를 배우는 것과 같은 편리가 있을 것이나 우리 나라에서 아직 그런 사람이 드문 것은 유감이라고 말해야 되겠다. 지금 유씨 스스로 쓴 기고문에 한 글자로 첨삭하지 않고 게재하여 제군들에게 일람토록 하련다”(후쿠자와 유키지, 지지신보 1882년 4월 21일, 이광린, 앞의 글, 19-20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