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의 아들 감상문>
당신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양한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를 좋아하게 된 순간을 돌아보면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추체험(追體驗)에서 비롯되는 강렬한 기억 때문이 그 이유였다 생각한다. 두시간 남짓한 시간, 영화는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삶을 살아보게 하여 사유의 지평을 넓혀준다. <사울의 아들>은 홀로코스트라는 참상을 이러한 영화적 추체험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표현한다.
영화는 결코 그 어떠한 참상도 명료히 보여주지 않는다. 카메라는 끊임없이 사울의 표정만을 좇을 뿐이며, 좁은 화면비를 통해 관객들을 러닝타임 내내 사울의 시점 속에 가둔다(이충직, 김지현, 2018). 이 같이 얕은 시야심도와 4:3의 화면비, 사울의 불안과 공포를 표현하듯 흔들리는 카메라를 통해 나타나는 사울의 시점 외에는 다른 상황을 보기 어렵다는 특징을 이용하여 관객의 시야를 일부 차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관객은 더이상 전지적 시점의 관객이 아닌, 비로소 사울의 입장이 된다.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제한된 연출이 만든 빈 틈은 관객들의 상상력으로 재현되고, 관객들의 내면을 영화에 동원하게 된다.
이와 같은 연출을 통해 관객은 홀로코스트 속 존더코만도라는 특수한 입장을 이해하며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게 된다. 존더코만도는 유대인임에도 수용소 속에서 벌어지는 대학살의 희생자들을 처리하며 죽음을 유예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 대가로 그들은 다른 수감자들보다는 나은 수준의 잠자리와 음식 등을 제공받았다.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역할에 놓인 셈이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아우슈비츠 생존자로 자신의 경험을 글로써 증언한 작가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를 겪지 않은 이상, 그들에 대해 어떠한 윤리적 판단도 내릴 수 없다 말하였다. <사울의 아들>은 재현의 충실성을 통한 인류사적 반성과 윤리적 판단의 유보라는 두 가치 사이, 그 어떠한 곳에도 치우치지 않았다. 영화는 그저 극한의 상황에서 죽음마저 유보된 비인간적 상태의 사울을 그릴 뿐이다.
사울은 존더코만도로서 인간성을 박탈당했다. 목숨을 담보로 인간성을 내놓았으며 종국엔 죽음도 인간성도 상실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때 그는 소년의 숨소리를 듣는다. 금새 멎은 그의 숨에 사울은 다시금 삶의 의미를 갈구한다. 그가 진정 사울의 아들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울은 그 소년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해주고자 랍비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그 또한 결국 좌절되고 시신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사울에게 다른 존더코만도는 “죽은 자를 위해 산자들을 버리다니”라 질책한다. 이에 사울은 “우린 이미 죽었어”라 답한다.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다. 그저 살아있기에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의미’를 갈구한다. 사울에게 있어 인간다울 수 있는 의미,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소년을 인간답게 보내주는 것이었다. 인간다운 죽음인 것이다. 다른 존더코만도들에게 있어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은 봉기를 통해 자유를 되찾는 것이었다. 인간다운 삶인 것이다. 사울의 시선을 좇지 않았다면 자칫 대의를 절망시킨 사울의 선택을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사울을 느꼈고, 그렇기에 그를 비난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답고자 처절히 몸부림 쳤다. 아우슈비츠라는 참혹한 상황 속에서 민족의 말살, 나아가 인간성의 말살을 강요받는 중에도 인간답기 위해 노력한 그들의 절실함은 감히 판단할 수 없다.
영화의 끝, 사울은 소년을 보며 웃는다. 소년은 숲으로 도망친다. 소년은 마치 참상을 마주한 관객과 같다. 소년은 그 참상을 기억할 증인이 된다. 프리모 레비는 증언을 강조했다(이소영, 2016). 홀로코스트는 결코 특수한 사건이 아니었다. 시대적 혼란 속 집단적 광기는 “악의 평범성”을 만들어냈고 보편적인 인간은 악마와 같은 존재로 변모했다. 때문에 우리는 이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를 증언하며 기억해야만 한다. 역사적 비극을 다룬 영화는 주로 다양한 인물의 시점에서 이를 생생히 보여주려하며 우리에게 이처럼 비극적인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교훈 내지 울림을 주려한다. <사울의 아들> 이후, 이러한 방식에 다시금 질문을 던지고 싶다. 역사를 재현하는 영화의 역할은 과연 죽음의 역사를 ‘전시’하고 ‘판단’하는 것인가? 이는 진정 그들을 존중하는 일인가. 우리는 그들이 실재(實在)하였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들은 결코 소설 속, 영화 속 존재가 아닌,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내려서는 안되며, 역사적 비극을 생생히 기억하고 반성하며, 경계해야 한다.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는 더욱 다양해진 잣대로 서로를 이분법적으로 구분 짓고, 혐오한다. 물론 민족 대학살이 실제 자행된 당시의 역사와는 비할 바 없지만, 우리의 대척점에 서있는 이들은 우리의 내면에서 죽은 이와 다름 없다. 보다 내밀하고, 개인화된 홀로코스트가 보편화된 사회 속, 우리는 끊임없이 성찰하며 역사의 반복을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
<논제 제언>
1. ‘재현’의 윤리는 어디까지인 것일까? 우리는 어디까지 봐야만 하고 보지 말아야만 하는 것인가?
2. 인간다움이란 본질적으로 관계와 관련한 것인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인가?
<시 감상문>
우리는 잔학한 범죄에 대하여 분노한다. 범죄자를 엄정히 처벌해야 한다 소리 높여 말한다. 그렇다면 형벌은 우리 사회를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자신의 소설 <공허한 십자가>에서 사형과 같은 강경한 형벌에 대해 이는 마치 “공허한 십자가”와 같다고 말한다. 죄에 대한 복수심에서 비롯된 가혹한 처벌은 이를 이행할지라도 여전히 피해자의 고통은 잔존하는 형식적인 속죄에 불과하며, 사회적으로 정의라 포장되지만 결국엔 모두에게 고통만이 남는 공허한 행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대가는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사회가 상처로부터 한 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가해자의 시점에서 ‘진정한’ 속죄(贖罪)의 방향성을, ‘시’라는 형식을 빌려 우리에게 대답한다.
영화 속 미자는 “멋쟁이 할머니”로 그려진다. 그녀는 아름다움을 동경한다. 하늘을 우러러보고 나무를 우러러보며 아름다움에 닿고자 한다. 그런 그녀에게 ‘시’란 그런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움을 좇아보아도 시상은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김용택 시인은 사물을 진정으로 들여다보라고 말한다. 사과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당최 그 말을 알 수가 없던 그녀는 사과를 깎아먹는다. 그녀에게 사과는 깎아먹어야 하는 ‘대상’일 뿐이다. 그녀는 다시금 시상이 찾아오지 않는다 토로한다. 그러자 시인은 시상은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가서 사정을 해야만 나타나는 것이라 한다. 그녀는 시상을 위해 꽃을 보고, 나무를 본다. 자연을 관찰한다. 자연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는 써지지 않는다. 그렇게 아름다움을 갈구하던 미자는 손자 종욱의 사건을 알게 되었고, 치매 판정을 받으며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그녀의 마음 속 고통이 자리하게 된다. 이는 비로소 미자가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우러러보는 것이 아닌, 자신의 곁에 있는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의사는 알츠하이머에 대해 먼저 명사를 잊고, 이후 동사를 잊게 되는 병이라 말한다. 명사는 우리가 자의적으로 이름 붙인 무언가이다. 어떠한 존재 혹은 사물을 명사로 부름으로써 우리는 그것을 그 명사라는 경계에 한해서 생각하게 된다. 때문에 명사를 잊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존재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미자는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본질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미자는 희진의 고통을 뒷밟으며 그녀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이를 통해 미자는 그녀의 고통을 진정으로 느끼게 된다. 피해자에 대한 타자성이 내포되는 속죄는 속죄가 아닌 성찰 혹은 자기 반성에 가깝다 생각한다. 피해자는 그 순간에도 타자로서 존재하며, 여전히 주체는 피의자이기 때문이다. 피의자는 그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성할 뿐이다. 결국 피해자의 고통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미자가 아네스에 대한 애도 미사를 듣는 것이 아닌, 미자 자신이 아네스가 되어 아네스의 노래를 부를 때 그녀는 비로소 한 발 나아가, 희진의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고, 속죄에 다가선다. ‘속죄’라는 명사의 틀 안에서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고통 그 자체를 내면화하여, 타자성을 배제한 채 대면할 때 비로소 진정한 속죄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고통을 마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같이 처절한 고통 속에서 그녀는 시를 쓴다. 아름다움에서 시가 비롯된다 생각한 이전과 달리, 그녀는 고통과 병존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깨우치게 된다. 아름다움을 우러러볼 때 미자는 세상을 진정으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고통을 마주할 때, 비로소 그녀는 세상을 진정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고,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시를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이지만, 그중 미자의 고통을 들여다봐주는 이는 아름다운 시를 모욕한다고 생각했던 경찰 뿐이었다. 현실을 알기에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움은 홀로 고고히 존재하는 이상향이 아니다.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존재가 될 때, 고통과 나란히 비로소 현실에서 재현되는 가치인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시는 사장된 문학에 가깝다. 더이상 사람들은 시를 낭송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는 우리로 하여금 타자성을 잊게 해주는 매체라 생각한다. 언어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언어라는 통로를 통해 소통하지만, 이는 우리의 감각과 생각을 결코 전부 전달하지 못한다. 시는 다르다. 시는 단어를 끝없이 해체하고, 해체하여 본질만을 남겨둔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그것이 인간이든, 사물이든, 자연이든, 그 무엇이든 간에 그것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 그렇기에 감독은 타자성이 배제된 후에야 가능한 진정한 속죄의 길을, 타자성을 배제시킬 수 있는 방법인 시를 통해 마련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즉, 시는 현실과 괴리된 아름다움을 좇는 허황된 문학이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 언어라는 근원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고자 한 인류 역사적 노력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인간은 함께하기에 존재할 수 있지만 함께이기에 고통받기도 한다. 함께하는 모든 인간이 존엄한 존재임을 우리는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나’라는 실체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우리는 현실의 고통 하 매몰되어 종종 이 사실을 잊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곤 한다. 하지만 사유하는 존재인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고통을 감내하고, ‘나’라는 실체의 한계에서 벗어나, 타자성을 내려놓고 생각해야만 한다. 그때 인간은 비로소 성장할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가 함께이기에 고통받음에도 함께로서 존재하는 이유이다.
<논제 제언>
1. 시의 정의와 그 의미는 무엇인가?
2. 타자에 대한 몰입을 통한 자아의 발견을 고찰한다면, 본질적으로 이는 이기적인 것인가 이타적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