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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의 고발로 급제를 빼앗긴 임유(林濡)
이 세상을 살면서 친하게 지내야 사람도 많지만 결코 인연을 맺지 말아야 할 사람도 있다. 내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오히려 피해만 주는 사람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모르고 지내는 편이 좋다. 그런데 그게 어디 내 마음 먹은 대로 되던가.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알게 되어 사기도 당하고 애꿎은 마누라와 자식 고생시키는 일이 어디 한 두 사람만의 일이던가.
이번 글의 주인공인 임유라는 자는 문과 급제의 영광을 안았다가 불과 며칠 만에 반납해야만 했던, 그것도 동료의 고발로 그 급제를 포기하여야만 했던 불행의 주인공이었다. 만약 그 동료만 없었다면 임유의 이름은, 오늘날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명단에 버젓이 올라 있었을 것이다. 임유로서는 그 동료가 결코 만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었던 셈이다.
물론 임유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임유가 아무런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동료가 임유를 고발한 것은 아니었다. 응시해서는 안 되는 시험에, 그러니까 처음부터 응시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던 시험에 거주지를 속이고 응시하였으니 처벌을 받아도 달리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만약 동료가 임유의 그 잘못을 발설하지만 않았다면 임유의 급제는 전혀 문제될 일이 없었다.
임유의 동료란 임유와 함께 같은 문과에 응시했던 조명환. 조명환이 임유를 고발한 이유는 자신은 낙방하고 임유만 급제한 데 대해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명환의 행동도 조금은 떳떳해 보이지 않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유야 어째튼 임유로서는 조명환 때문에 조금은 억울한 일을 겪은 셈이다. 자신의 급제가 취소되었다는 말을 들은 순간, 임유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그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자.
임유와 조명환이 응시했던 문과는 현종 6년(1665)에 치러진 을사온양정시(乙巳溫陽庭試)였다. 이 시험은 현종이 자신의 눈병과 다리 부스럼을 치료하기 위해 溫陽溫泉을 찾게 된 일 때문에 마련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어느 지방을 행차하게 되면 가끔 그 지방민을 위로해 준다는 의미에서 문과를 개설하곤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외방별시였다. 그 중 온양에서 개설된 온양별시는 모두가 왕의 온천행과 관련이 있었다.
현종이 자신의 온양 행차 때 문과를 치렀으면 좋겠다는 뜻을 비친 때는 현종 6년 4월 15일이었다. 어가(御駕)가 도성(都城)을 떠나기 이틀 전의 일이었는데, 이 날 현종은 자신의 온양 행차를 맞이하여 온양과 온양이 속한 충청도의 유생을 위무(慰撫)하기 위한 문과가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신료들 역시 이를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현종은 온양별시를 마련토록 하면서 중요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번의 온양별시에는 오직 충청도에 거주하는 유생만 응시자격을 부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만약 충청도 외의 다른 도(道)에 거주하는 유생이 자신의 지시를 어기고 응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혹여라도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비록 급제를 한다 하더라도 결코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렇게 해야만 온양별시를 마련한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물론 현종의 이러한 지시가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외방별시 때면 으레 그러하였다. 전주별시도 그랬고 평안별시도 그랬다. 그런가하면 인천의 강화도에서 치러졌던 외방별시에서도 그러한 면이 있었다. 오직 강화와 교동 그리고 김포나 통진 등 강화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유생에게만 응시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야만이 외방별시가 실시된 지역에 거주하는 유생들의 마음을 위로하겠다는, 다시 말해서 외방별시를 마련하게 된 본래의 취지를 최대한 살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종이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 온천을 찾게 된 것을 계기로 개설한 온양별시의 문호를 오직 충청도 유생에게만 개방한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러면 온양별시를 치른 날은 언제였는가. 어가가 온양에 도착하고서 며칠 지나지 않은 현종 6년 4월 29일이었다. 그러나 시험을 이처럼 촉박하게 진행하였다고 해서 지원자가 적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이미 사전에 공지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왕의 온천행이 있으면 으레 외방별시가 치러진다는 점을 온양이나 충청도의 유생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기록이 없어 이번 온양별시에 얼마나 많은 유생들이 몰렸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무리 적어도 천 명은 훨씬 넘었으리라 짐작된다. 시험장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온양 객사 앞마당이 얼마나 북적거렸을 지 상상이 되고도 남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할 사항이 있다. 위 온양별시에 몰려 든 사람들 모두가 진정으로 시험을 치르겠다고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저 생색내기 위해 온 자도 있었고 또는 경험을 해 보기 위해 온 자들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부모님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나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이런 자들은 으레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았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이 유족 온양별시 때만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온양 이외 지역에서 치러진 외방별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식년시나 증광시 또는 별시의 제 1차 시험 그리고 정시와 알성시의 경우는 더 심했다. 식년시와 증광시 그리고 별시의 2차 시험 혹은 3차 시험에는 오직 1차 시험 합격자 혹은 2차 시험 합격자만이 입장할 수 있었으므로 시험장이 혼잡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 시험장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한편 조선시대 외방별시는 그 진행 방식은 시대마다 또 시험마다 차이가 있었다. 조선초기의 경우 왕이 행차하여 주관하는 시험은 반드시 1차 시험인 초시와 최종 시험인 전시 등 두 번을 치르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중 초시는 왕이 現地에 오기 전에 마치고 전시만 왕이 참석했다. 하지만 왕이 참석하지 않고 중신을 보내어 실시하도록 한 시험은 단 한 번만의 시험으로 최종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외방별시의 이러한 진행 방식은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가 되면 변화를 맞는 듯하다. 왕이 직접 시험에 참관하거나 혹은 참관하지 않거나에 관계없이 또는 궁에서 중신(重臣)을 보내 치르는 시험이건 따지지 않고 외방별시라면 모두가 단 한 차례 시험만으로 급제자를 선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번 온양별시는 위 4월 29일에 실시한 시험이 최종 시험이 된다.
이번 온양별시는 물론 현종의 친림(親臨) 하에 치러졌다. 당시 현종이 온양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시험은 아침부터 시작되었으며 하늘도 쾌청하였고 또 초여름이라 더위 같은 것은 없었다. 장소가 비좁아 응시생들이 서로 가깝게 앉아 야 한다는 점만 빼고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듯하다.
시험은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험을 다 마친 후에는 응시생들의 시험지가 곧바로 채점관들에게 전달되었고 곧 그에 대한 채점이 시작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식년시나 증광시 혹은 별시의 제 1차 시험으로서 외방에서 치른 향시(鄕試)였다면, 응시생이 작성한 답안지가 아니라 그 내용을 그대로 붉은 글씨로 옮겨 적은 역서지(易書紙)를 채점하였겠지만 외방별시에서는 그러한 역서가 없었으므로 응시생의 답안지를 직접 채점하도록 되어 있었다.
채점은 몇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그리고 최종 급제자가 결정된 때는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족히 천 여 장은 되었을 법한 답안지를 불과 몇 시간 만에 다 살펴보았다는 점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되지 않는 대목이지만, 어쨌든 시관들은 가장 훌륭한 답안지를 작성했다고 판단되는 여섯 사람의 이름과 그들에 관한 간단한 이력을 적은 방목(榜目)을, 그들이 작성한 답안지와 함께 왕에게 올렸다.
채점관들이 급제자를 여섯 사람으로 결정한 것은 물론 시험을 보기 전에 이미 왕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외방별시의 선발 인원은 시험 때마다 왕의 지시에 따르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번에는 충청남도에서 세 사람, 충청북도에서 세 사람을 뽑도록 하였다. 급제자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면 한 쪽의 응시생들이 서운해 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 조처였다. 흔히들 조선시대 문과에서의 지역 할당 내지는 지역 안배가 식년시나 증광시 그것도 위 두 시험의 초시 때에서만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별시나 정시에서도 또는 식년시나 증광시의 2차 시험인 복시에서도 지역의 안배는 반드시 고려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별도의 글을 통하여 설명해 주도록 하겠다.
아무튼 채점을 마친 후 시관들은 급제를 줄 여서 사람의 이름과 이력을 적은 방목을 왕에게 올렸는데 현종은 그 내용을 보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 여섯 사람 중에 온양출신 유생들이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시험이 자신의 온양 행차와 관련하여 개설한 시험이었다는 점을, 급제자 중 온양출신 유생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어야 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야만 시험을 마련하게 된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가 있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자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급제를 주기로 한 자들 중에서 일부의 급제를 취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면 낙방자들의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은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에 현종은 온양 출신 유생을 추가로 선발하기로 하고, 시관들로 하여금 낙방자들 중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받은 자들, 그러니까 차점자(次點者)들의 답안지를 모두 가져오도록 하였다.
현종의 지시에 따라 시관들이 가져 온 답안지는 모두 다섯 장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영문인가. 참으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차점자 다섯 사람 모두가 온양 출신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지만 아무튼 답안지를 본 현종은 고민에 빠지고 만다. 같은 성적을 취득한 이들 중에서 누구는 빼고 누구만 급제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현종은 다섯 사람 모두에게 급제를 주라는 파격적인 지시를 내리게 된다. 급제자가 모두 열 명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세조대를 제외하고는 지금껏 그 어떤 외방별시에서도 10명 이상을 선발한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세조 6년(1460)의 庚辰平壤別試 22명, 세조 10년(1464)의 온양별시 13명, 세조 12년(1466)의 고성별시에서 18명을 선발한 이후 200여 년 동안 외방별시의 급제자 수는 으레 4명에서 6명 사이였을 뿐이었다. 10명을 선발한다면 그것은 파격이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에 온양까지 어가를 따라 왔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와 대제학 김수항(金壽恒) 등이 추가로 5명에게 급제를 주는 점에 대해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자 현종도 두 손을 들고 만다. 당초 계획을 번복하여 다섯 사람 중 조이병(趙爾炳), 선약태(宣若奉), 임유(林濡)만 구제해 주고, 급제를 받지 못하게 된 조명한(趙鳴漢)과 신한선(申翰宣)에게는 급제 대신 참봉직(參奉職)을 제수하는 방침을 세우게 된다. 아마도 조명한과 신한선의 성적이 조이병 등 세 사람에 비해 조금 낮았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이 취해진 듯하다.
추가로 급제를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조이병, 선약태, 임유 등 세 사람이 얼마나 좋아했을지는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일 년에 고작해야 33명, 그러니까 조선 전체 인구를 1000만 명으로 잡았을 때 그 중 0.0003%만이 급제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문과에, 그것도 추가로 또 왕의 은총에 의해 어사화를 쓰게 되었으니 그 기쁨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기쁨은 오직 저들 세 사람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껏 그들을 지켜보았던 친지와 가족 더 나아가 같은 고을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같은 크기와 무게의 기쁨이 느껴졌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저들 세 사람과 달리 구제받지 못한 조명한과 신한선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말할 필요도 없이 아쉬움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문과에 급제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였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였던가. 급제를 받지 못하는 대신 참봉에 제수되었던 조명한은 그 깊은 아쉬움을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선비로서는 조금 마땅치 못한 행동을 취하고 만다. 다른 사람 때문에 자신이 급제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고 판단한 조명한은 이번 온양별시 급제자들이 遊街를 마치는 시점이 되자 자신이 직접 상소를 올려 “임유가 함경도 길주출신인데 호적을 위조하여 이번 온양정시에 응시하였다”는 사실을 고하였던 것이다. 조명한이 만약 급제를 받았다면 그러한 상소는 결코 올리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조명환이 임유의 거주지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둘 사이에 혹 평소 친분이 있었는지 등은 전혀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임유가 이번 온양별시에 응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의심이ㅡ 여지가 없다. 이번 온양별시를 개설하면서 현종의 이번 시험의 문호는 오직 충청도에 살고 있는 유생에게만 개방하겠다는 엄명을 내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임유의 급제가 취소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임유는 이후로도 복과(復科), 즉 다시 급제를 받는 혜택을 받지 못한다. 문과 급제라는 평생의 소원이 조명한의 고발로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었다. 그로서는 자신의 허물을 들추어 낸 조명한이 한 없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그러나 조명환도 역시 그 고발건으로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효릉참봉으로 제수된 지 불과 며칠 만에 파직되고 만 것이었다. 동료와의 의리를 배반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으리라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교사회 의리를 배반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거주지를 속이고 응시하였다가 급제자 취소된 임유나 또는 그 사실을 고발한 죄로 말미암아 관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임유 두 사람은 정말 만나서는 아니 될 사이가 아니었을까 한다.
한편 실추되었던 임유의 명예는 그의 아들 임주국(林柱國)에 의해 어느 정도 되살려지는 듯했다. 임주국은 아버지가 낙방의 고배를 마셨던 것과 종류의 시험에 급제함으로써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었다. 숙종 43년(1717)의 온양정시가 바로 임주국이 급제를 한 시험이었는데, 임주국이 온양정시에 응시한 것도 아버지의 일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이 임주국마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발거처분 당하는 아픔을 겪는다. 온양으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호적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다만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임주국은 얼마 후 복과, 즉 다시 급제를 인정받게 되는데, 아무튼 임유와 임주국의 일은 부자(父子)가 모두 발거처분 당하는 결코 흔치 않은 일을 경험한다.
(임유의 아들 임주국의 방목 기록 이미지 넣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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