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조선 뜻풀이
(<성서조선> 75호, 1935. 4)
<현대어 해역>
성서와 조선
옛사람도 책 속에 천 종의 곡식이 있다고 하여 좋은 논밭보다 책이 고귀한 이유를 말한 것처럼, 책이 귀한 것이라면 책 중의 책인 성서는 가장 고귀한 책이다.
이는 우리의 편견이 아니라 성서 자신이 증명하고 세계역사가 보증하는 바이다. 인도의 쉼라(Shimla)는 피서지 중에서 최고이고 이탈리아의 리비에라(Riviera) 지방은 피한지 중의 낙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계절 내내 백년이라도 일하며 먹고 살아가기에야 조선보다 더 좋은 곳이 지구 위에 다시 있으랴? 비록 백두산이 없었다 하고 금강산이 생기지 않았다 하여도, 그래도 조선은 다시 없는 조선이다. 물론 내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세상에 제일 좋은 것은 성서와 조선. 그러므로 성서와 조선.
성서를 조선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은 한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 싶으나 사람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어떤 이는 음악을 조선에 주며, 어떤 이는 문학을 주며, 어떤 이는 예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관을 씌울 것이나,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뼈대를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 같은 기독교라도 어떤 이는 기도생활로 법열의 경지에 이를 것을 주창하며, 어떤 이는 영적 체험의 신비한 세계를 역설하며, 어떤 이는 신학 지식의 조직적 체계를 중시하나, 우리는 오직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 더 좋은 것을 조선에 주려는 이는 주라. 우리는 다만 성서를 주고자 작은 힘이나마 다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
과학 지식의 바탕 위에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려는 ‘과학조선’ 운동도 시대에 적절하며,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한 농민으로 하여금 덴마크식 ‘농업조선’을 중흥하려는 시도도 시대의 요구에 적합하다. 그밖에도 신도시를 중심으로 한 ‘상공업조선’이나, 시대의 거센 물결인 ‘공산조선’ 등등이 다 그 진심과 성실에서 나온 것이라면 해로울 것이 없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풀의 꽃과 같고 아침 이슬과 같아서, 오늘 있었으나 내일에는 그 자취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 비바람에 부서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외형의 조선의 밑바닥에 영구한 기반을 넣어야 할 것이니 그 지하의 기초 공사가 곧 성서적 진리를 이 백성으로 하여금 소유하게 하는 일이다. 널리 깊이 조선을 연구하여,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라. 그러므로 조선을 성서 위에.
성서와 조선—성서를 조선에—조선을 성서 위에. 이것이 우리의 「성서조선」이다.
혹시 만국성서연구회 또는 대영성서공회 등과 「성서조선」과의 관계를 묻는 이가 있으나 이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성서조선」은 오직 그 주필(主筆)이 모든 책임을 지고 경영하는 것이며, 조선을 성서화(聖書化)하는 데 찬동하는 몇몇 친구들이 협력할 뿐이다. 무슨 교파나 단체나 외국의 돈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해제>
이 글은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라는 간명한 표현으로 <성서조선>의 목적과 김교신의 사상을 요약한 글이다. <성서조선> 「창간사」에서 가장 사랑하는 조선에 가장 귀한 선물인 성서를 주겠다고 했던 김교신은 그로부터 8년 후 쓴 글에서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라는 보다 간명한 언어로 <성서조선>의 사명을 다시 표명하고 있다. ‘성서’와 ‘조선’ 이 둘에 대한 김교신의 사랑과 헌신이 얼마나 진지한 것이었는지는 그의 삶과 사상 전체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글이 발표되었던 <성서조선> 1935년 4월호에는 소록도에서 온 편지인 「그리스도 복음 심장에서」와 김교신의 응답인 「나환자의 음신을 받고」가 함께 실렸다. 소록도에서 온 편지와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라는 이 표어가 함께 어우러져 당시 독자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송두용은 김교신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내와 감격적인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성조 만약 문둥이 하나를 위로할 수 있다면 다시 더 구할 것이 무엇이랴, (중략) 이것이 곧 ‘성서를 조선에, 조선을 성서 위에’가 아니고 무엇일까. 아! 위대한 또 영원히 남아 있을 참사업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