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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정 : 제1일⇒오전8시 출발→(의령)정암나루와 충익사→보천사터 삼층석탑 과 부도→(함안)방어산 마애불→어계고택과 서산서원(점심)
및 채미정→함안박물관→아라고분군→대산리석불→(김해)김
해 천문대(신어산)→1박(가야연수원)
◈ 정암나루 ◈
안정기(고등 1년)
공부방에서 2박3일로 답사를 갔는데 오랜만에 가는 체험학습이라서 매우 설레었다.
아침 8시에 출발해서 3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서 처음 간 곳이 정암나루였다.
남강 위로 놓여 있는 정암교를 건너려는데 다리가 너무 오래되어 입구 위에 키높이 칸막이를 세워놓아 소형차량만 지나갈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우리 차가 못 지나가면 어쩔까 걱정이 되었는데 무사히 통과했다. 정암교는 흔히 보기 힘든 철교같이 생긴 다리였다.
그리고 그다지 넓지 않은 남강을 사이에 두고 함안과 의령으로 나누어졌다는게 생소했다. 그런데 다리 아래 정암나루를 가보니 다리가 있기 전에는 배를 타고 남강을 건너느라 오르내렸을 모습이 그려지면서, 강을 건너기가 힘들어 강을 사이에 두고 의령과 함안으로 나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광양과 하동도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시와 도가 나뉘어 지는 곳이 있다는 것도 생각났다.
임진왜란 때 맨 처음 의병활동을 한 것에 대해 의령사람들은 자부심이 대단할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해봐도 만일 왜군들이 남강을 건넜다면 곧바로 한양까지 유린당했을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었을 것인데, 이런 상상하니 끔찍함이 느껴지고, 곽재우가 대단히 훌륭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 부근이 정암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연유가 된 바위를 보니 한자의 鼎자 모양을 닮은 듯, 바위의 아래 부분이 세 개로 나누어져 마치 다리가 세 개인 것처럼 보였다. 흔히 수석들을 보면 자연석도 많이 있지만 기계 등으로 깎아서 만든 것도 있는데 자연에 의해 鼎자 모양을 갖춘 바위는 참 특이한 것 같았다.
정암나루는 볼 것이 많아서 참 좋았다.
기회가 되면 학교에서도 한번 갔으면 좋겠다.
◈ 충익사 ◈
안은지(초등3학년)
정암나루에서 큰길로 한참 와서 다리를 건너니까 언덕 밑에 충익사가 있었다. 충익사는 곽재우 장군과 열일곱 의병장을 모신 사당이다. 곽재우 장군은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인데, 숙종 임금이 곽재우 장군에게 충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했다. 충익사에 가니까 맨 처음 꼭 꽃상여 모양으로 예쁘게 생긴 집이 있었다. 이 집은 충의각인데 곽재우 장군이 죽은 다음에 내린 관직명이 보관된 건물이라고 했다. 사당에도 갔는데 사진은 없고 위패만 있었다. 그리고 기념관에 갔는데 거기에서 관장할아버지가 설명을 해주셨다. 관장할아버지는 머리카락이 조금 밖에 없으셨다. 기념관 안에는 곽재우 장군의 갓끈과 말안장, 그리고 사자모양의 철도장, 예쁜 그림이 그려진 팔각대접, 포도나무무늬가 새겨진 벼루랑 곽재우 장군이 썼던 유물들이 많이 있었다. 이 유물들이 모두 보물 제 671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또 기념관에는 곽재우 장군의 묘에서 찍었던 사진도 있었다. 그런데 곽재우 장군의 묘가 다른 사람들처럼 불룩 나오지 않고 조금만 나와 있었다. 나는 이게 묘야?? 하고 놀랐는데 목사님의 말씀과 안내를 해주셨던 관장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보니 곽재우 장군의 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옛날에 곽재우 장군이“나의 묘를 만들지 마라!”라고 하셨는데. 곽재우 장군의 묘가 그냥 빤듯하니까. 사람들이 묘인 줄 모르고 묘위에도 올라가서. 사람들이 조금만 나오도록 했다고 했다.
충익사 마당에는 500년 전에 심은 모과나무가 있었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는지 진짜 신기했다.
충익사에 와서 새로운 것을 많이 봐서 좋았다.
◈ 보천사터 삼층석탑과 부도 ◈
최문석(초등 3학년)
충익사에서 나와서 큰길 앞에서 왼쪽으로 쭉 가다가 어느 동네 길로 들어갔다. 조금 더 가서 길도 좁고 포장도 안 된 길로 갔다. 그런데 자갈밭으로 된 공터가 나왔다, 그리고 위로 가면 용국사라는 절이 있다는 표시가 있었다. 혹시 탑이 절에 있을까 했는데 공터 한쪽에 있었다. 그리고 부도는 조금 떨어진 언덕 아래에 있었다.
삼층석탑은 4.57m이고 다른 곳의 탑과는 다르게 탑 아래를 튼튼하게 만들어서 탑이 흔들리지 않고 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부도는 팔각형 모양으로 생겼는데 지붕이 조금 무거워 보였지만 끝에 꽃모양이 새겨져 있어서 멋있었다.
그리고 아래쪽에 구름무늬가 많이 있어서 멋있었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가 언제이고, 이 부도탑에 든 사리가 누구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도탑이 보물 제472호라고 하지만 주변이 너무 썰렁했다.
국보나 보물이 있는 곳을 잘 관리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하면 좋겠다.
부도탑이 있는 곳으로 갈 때는 잔디밭을 달려 다녀서 재미있었다.
◈ 방어산 마애불 ◈
김 미희(초등 6학년)
마애불을 올라갈 때 쉬운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가는 길이 멀고 험했다. 중간정도 갔을 때 사람들이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해서 힘을 내서 갔는데,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여섯명이나 있었다. 나는 빨리 간다고 갔는데 나보다 먼저 간 이이들이 있어서 힘이 빠졌다. 그래도 꼴등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방어산 마애불 그림에는 부처님 3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 약통을 들고 있는 사람의 그림도 있었다. 그 약통에는 여러 가지 약이 있었다고 한다. 방어산 마애불은 암벽을 깎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1962년1월21일 보물 제159호로 지정 되었다고 한다. 또 마애불은 신라 애장왕 2년에 만들어 진 신라 하대의 가장 저명한 마애불이다. 신라는 언제인가 궁금하다. 자세히 알고 싶다. 책을 보면 알 수 있을까?? 방어산 마애불은 암벽을 깎아서 만들고 돌이 빤듯하지도 않는데 아주 선명하게 잘 만들어졌다.
방어산 마애불에 올라갈 때 작은 돌탑이 아주 많이 쌓아져 있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이 그걸 쌓으면서 소원을 빌었다고 생각했다. 다른 애들도 그렇게 생각 하겠지?? 그런데 여기에다 소원을 빌면 이뤄질까? 옛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몰라서 돌탑에 소원을 빌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올라가다가 고운이랑 절벽에서 떨어질까 무서워하면서도 돌을 던지며 놀았다. 그리고 거기에 새가 다니는지 사람들이 보리랑 콩들을 뿌려놓은 것을 보고, 그걸 더 뿌려놓았다. 그런데 혼날까봐 좀 무서웠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먹이를 발로 밟을까봐 다시 주웠다. 그때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다 주워놓고 땀을 닦을 때 흙을 만져서 내손이 엄청 더러워져 있었다. 그래서 땀을 닦은 자리가 더러워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애불에 새겨져있는 그림을 나도 그려 보고 싶지만은 그림 솜씨가 없어서 그냥 상상만 하였다. 거기에 올라 갈 때는 힘이 들었지만 가서 보니깐 보람 있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 높은 곳에다 어떻게 암벽을 깎아 불상 조각을 했을까? 믿음이란 위대하다.
◈ 어계고택 ․ 채미정 ․ 서산서원 ◈
이우경 선생님(컴퓨터선생님. 운전봉사)
어계고택 ․ 채미정 ․ 서산서원은 모두 어계 조려와 관련이 있는 곳이다.
▶어계고택
여수를 출발하여 첫번째 답사지인 의령군의 홍의장군 유적지, 그리고 힘들게 고생 고생하여 올라간 방어산, 그 힘든 숨가쁨이 채 가라앉기 전에 도착한 어계선생의 생가, 첫날의 빡빡한 일정으로 점심도 미루고 찾아간 고택은 빈 속의 쓰림을 더하였다. 아담한 산을 안고 자리 잡은 어계선생님의 고택은 첫눈에 보아도 명당자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고택 앞 주차장에 차를 주차 한 후에 한눈에 들어오는 고택의 전경과 함께 선생님 집안의 며느리로 짐작되는 백발에 허리가 굽고 밭일을 하는 복장의 할머니의 모습에서 계승되지 못하고 단절되고 잊혀져 가는 역사의 한 단편을 보는 씁쓸한 마음이 속을 더 쓰리게 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선 고택은 아무리 겨울의 끝자락이라고는 하지만 오래전 쓰러진 담장과 먼지가 수북이 쌓인 대청마루와 처마들, 그리고 관리가 안돼서 떨어지고 흔들거리는 문짝들, 마당 곳곳에 있는 잡초들과 이끼들, 농사일로 허리가 휜 문중의 며느리인 늙으신 할머니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너진 담장과 먼지가 앉은 마루 그리고 도둑놈이 와서 유물을 훔쳐가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조상들의 얼이 깃들어 있는 이러한 곳에 관심을 가지고 보존과 관리가 필요함을 느꼈다.
할머니의 아들들과 손자들은 문중은 과연 이 상황을 알고 있고 어떤 대책을 세우고 있고 유형문화재로 지정한 군에서는 이것에 대한 개선책을 수립하고 있는 가슴이 아려왔다
후손들만의 책임이 아니라 자치단체에서 보다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채미정
선비의 생활을 한 옛날 선조의 여유와 사려, 학문을 알고자 하는 어려운 배움의 길 그 상황의 실제 공간의 무대를 접하였다.
이곳에서 그 분들은 사서삼경과 여러 가
지 책들을 읽고 깨달으면서 하늘과 산과 나무를 바라보면서 그 생각들을 정리하고 체계화 시켜나갔을 것을 생각하면서 나도 그분들이 시선을 두었던 하늘과 산과 나무에 시선을 돌려 보았다. 어계선생의 절개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연못 속에서 고요히 움직이는 잉어는 그 오랜 세월 전에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었을까? 이곳을 답사하러 온 우리들에게 그 옛날의 이야기 한 가지를 전하여 주려는지 몸짓을 하는 것이었다.
▶서산서원
임금으로 사액을 받은 찬란하고 잘 나가던 시절과, 조정으로부터 철폐령이라는 죽음의 상황까지 경험한 파란만장한 역사를 두루 체험한 공간 속에 들어와 보니 그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가 그 영광에 뿌듯함을 느껴볼 수 도 있고, 처참하고 참담하고 살이 찢어지고 두 눈이 빠지고 피눈물을 쏟는 심정이 내 가슴으로 스며 들어온다. 후손들의 정성과 노력으로 다시 복원되어 겨울의 끝자락에서 조용하게 봄을 맞을 준비하고 있는 담장안의 뜰과 여러 건물, 그리고 오랜 세월의 많은 사연들을 묵묵히 지켜본 나무들을 통하여 역사 속에 많은 상황과 사건들을 접하고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미래를 차분하게 담담하게 맞이하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 함안박물관과 아라고분군 ◈
조우리(초등 3학년)
서산서원에서 점심을 먹고 진짜 많이 온 것 같았다. 함안 군청 뒤에 있는 아라고분군을 간다고 했는데 갑자기 함안박물관으로 갔다.
함안 박물관은 지난 2003년 10월 30일 날 시작을 해서 우리가 잘 몰랐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이야기해주고, 또 아라고분군 가는 길에 함안박물관이라는 표시가 있어서 가봤다. 좀 많이 들어가야 있어서 길을 잘 몰라서 삥삥 돌아갔다. 오래된 것들도 있고 깨진 것도 많이 있었다. 또 우리 팔 같이 생겼는데 꼭 호스같이 둥그렇게 굽어지고 옆에 수레바퀴가 달린 토기가 참 멋있었다. ‘어떻게 수레바퀴 모양을 술잔에 붙여놨을까? 그 때 사람들은 수레바퀴를 좋아했을까?’
오전에 방어산 마애불에 갔을 때 산에 올라가서 너무 다리가 아파서 쉬기도 했다. 5전시실까지 있었는데 다 멋있었다. 한바퀴를 삥 도니까 다시 처음에 들어갔던 데가 나와서 신기했다. 박물관 앞에 또 수레바퀴 모양이 달린 토기가 크게 만들어져 있어서 그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아라고분군으로 갔다. 군청 주차장에 차를 놔두고 왼쪽 계단으로 올라가니까 아라고분군이 나왔다. 아라고분군에는 엄청 큰 무덤이 엄청 있었다. 이렇게 큰 무덤을 만들려면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했을 것 같았다. 아라고분군 뒤로 가보니까 우리가 갔다 온 함안 박물관이 바로 보였다. 우리는 차를 타고 많이 왔는데 너무 가까운 곳에 있어서 신기했다.
여러 군데를 본 중에서 나는 박물관도 가고 그래서 아라고분군이 제일 멋있었다.
◈ 대산리 석불 ◈
송은종(초등 3학년)
첫날 맨 마지막에 간 곳이 대산리 석불이다. 동네 안으로 들어가 쓰러져가는 빈 창고 집을 지나 공터에 차를 세우고 가니 석불이 보였다. 쪼끔 빨간색처럼 보이는 돌로 된 석불이 있었다. 모두 4개가 있었는데, 세 개는 모여 있고, 하나는 따로 있었다.
세 개 한꺼번에 있는 석불 중에 가운데 석불은 연꽃무늬가 그려진 돌 받침대 위에 앉아 있었는데 머리가 없었다. 옷도 앞에가 많이 파지고 왼손 위에 오른손을 세워놓은 모습이 이상했다. 그리고 서 있는 석불 중에 오른쪽에 있는 불상은 왼손에 무슨 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왼쪽에 있는 석불은 왼손은 배에다 대고 오른손을 가슴에 대었다.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따로 있는 석불은 머리도 없고 팔도 없었다.
선생님이랑 석불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도 계속 ‘왜 없어졌을까? 아무렇게나 놔두다가 부서졌을까? 누가 잘라갔을까? 2개나 머리가 없어진 것을 보면 누가 잘라간 것 같은데 왜 잘라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놔두면 다른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은데...
방어산 마애불도 부처 3명이 있는 그림이었는데, 여기도 3명이 있어서, ‘왜 세 개가 한꺼번에 있을까? 불교는 3명을 한꺼번에 그리거나 놔두기를 좋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왜 하나를 또 따로 세워놓았을까? 더 많이 답사를 다니고 더 많이 공부를 하면 다 알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우리나라 보물 제71호라는 말에 ‘중요한 석불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도 답사를 많이 하고, 더 많이 공부해서 우리나라 문화유적에 대해서 잘 알아야겠다.
◈ 김해 천문대 ◈
조양민(초등 2학년)
천문대 주차장에서 내려서 산으로 올라갔다. 천문대에서 별을 보려면 어두워야 된다고 가로등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손전등을 켜고 갔다. 자꾸자꾸 올라가도 안 나왔다. 더 가니까 길가에 봄철의 별자리 사진이 있었다. 여름철, 가을철, 겨울철 별자리 사진도 차례차례 있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다. 그래도 천문대가 다 와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체투영실에서 별자리 공부를 했다. 그리스 로마신화 만화에서 본 이야기가 별자리에 나와서 재미있었다. 의자를 뒤로 눕혀서 보는데 맨 뒷줄은 의자가 눕혀지지 않아서 목이 아팠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다음에는 관측동에서 망원경으로 달을 봤다. 갈색의 달에 구멍이 있는 모습이었다. 너무 신기했다. 그리고 토성을 보았는데 동그라미 가에 긴 모양의 동그란 테두리가 있었다. 그런데 너무 작게 보였다. 또 목성을 봤는데 노란 동그라미 가운데쯤에 갈색 줄이 길게 있었다. 너무 재미있었다. 또 밖에 있는 망원경으로 별을 보았는데 돈을 넣어서 봐야하니까 선생님께서 돈을 넣어주시고 누나와 형들과 같이 봤다. 천체투영실에서 보았던 오리온자리와 북두칠성이 보여서 너무 좋았다.
내려오면서 올라갈 때 보았던 그 별자리 사진을 보니 별자리가 보여서 참 신기했다. 다음날 김수로왕릉에 가서 우리가 갔던 천문대를 보았다. 완전히 산꼭대기였다. 밤에 올라갈 때는 그렇게 높은 데인 줄 몰랐다. 내가 저렇게 높은 곳을 올라갔다 온 것이 참 신기했다. 너무너무 재미있었던 천문대이다. 2박3일 답사 중에서 제일 재미있었던 곳이다. 다음에 또 가면 좋겠다.
가야연수원
김고운(초등 1학년)
첫날밤으로 가야연수원에 갔다. 늦게 도착해서 방배정도 안하고 밥을 먼저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돈까스가 나왔다. 하지만 안 먹고 갈려고 하는데 지수언니가 조금 만 더 먹으라고 했다. 다 먹고 놀다가 방 배정 하러 갔다. 여자는 2층 침대 남자는 온돌방이다. 그런데 오빠들이 2층 침대에서 잔다고 했다 그래서 오빠들도 2층 침대에서 잤다. 우리 방에는 나 지수언니, 은지언니, 우리언니, 정아언니랑 잤다. 천문대에 갔다 와서 내복으로 갈아입었다. 전부다 2층에서 잔다고 해서 나랑 지수언니랑 같이 잤다. 지수언니가 잠잘 때 말하는 사람은 때린다고 했다. 피곤해서 잘려고 했는데 배개싸움 하자고 불렀다. 온돌방에서 불을 끄고 했다. 누가누군지 몰랐다 가만히 있는데 누가 내 얼굴을 쳐서 코피가 났다 방에서 휴지로 닦고 잤다. 잠자는데 정아언니가 떠들었다 그래서 정아언니가 제일 많이 지수언니한테 맞았다. 나는 가야연수원이 제일 재미있었다. 다음에 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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