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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해서 퍼왔는데 요즘은 출처 밝히고 퍼와도 꼬투리 잡기가 심하다고 하는데 괜찮은가 몰갔다.그래도 챙길것은 챙겨 올려 봅니다...나중에 살펴 볼것이 많아 이곳 게시판에 저장해 놓습니다.
호 중 (湖 中)의 형 승 지 “보령의 영보 정”
※ “한음 이항복”의 행장(行狀)을 기록한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문집을 보면 : <永 保 亭 勝 槩 冠 湖 中 : 영 보정(永 保 亭)은 그 경치가 호중(湖中)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곳이다>라는 말이 있다.
“영보 정”은 ‘계곡 집’에 의하면 현 충청남도 서해안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보령시’에 있었다고 보아진다. 보령(保 寧)땅이 “호중(湖中)”에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시 보령(保 寧)의 수군절도사 영(營)내에 있었다고 하였다. 이 호중(湖中)지방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라는 것에 반론을 제기하며, 충청도 보령 땅은 호중(湖中)지방이 될 수 없으며, 이곳이 호중(湖中) 땅의 첫 손가락 꼽히는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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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을 보자. (谿谷集 제15권)
(推忠奮義平難忠勤貞亮竭誠效節協策扈聖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鰲城府院君李公行狀 : 추충분의평난, 충근정량갈성효절협 책호성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오성부원군, 이공 행장) (관심부분 발췌)
【世子在洪州.欲移駐保寧之水營.使公往審之.公還詭對以爲不可駐.或疑之.公曰.永保亭勝槩冠湖中.恐少主居之.啓異日侈蕩心.識者服其遠識。: 세자가 홍주(洪 州)에 있을 때 보령(保 寧)의 수영(水營)으로 옮겨 머물려고 생각하고는 공(이항복)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공이 돌아와 머물 수 없는 곳이라고 속임수로 대답하였다. 이에 더러 의심을 하자, 공이 말하기를, “영 보정(永 保 亭)은 그 경치가 ▶호중(湖中)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곳이다. 따라서 소주(少 主)께서 이곳에 머무르시면 뒷날 방탕 하는 마음을 갖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였는데, 이 말을 듣고 식자들이 그 원대한 식견에 탄복하였다. 】
◎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朝鮮)왕조의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뒤져 보았으나 “보령 현”이 있었나는 것 외에는 없다. (해당부분만 발취한 것임)
▶ <호 중 (湖 中)> 이란 말은 무슨 의미인가? 『호수가 많은 지방의 가운데 또는 호수가 많은 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반도 충청남도 지방을 『호우(湖右 : 호수의 서쪽)지방』이라고 했고, 또는 『호서(湖西 : 호수의 서쪽)지방』이라 했다는 역사해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충청북도 제천(堤川)에 있는 의림지【 義 林 池 : 위키 백과 : 충청북도 제천시 모산동 241번지 일대에 있는 삼한시대의 인공 저수지이다. 둘레는 약 1.8km, 수면은 약 158,677m², 수심은 8~11미터이다. 밀양 수산제, 김제 벽골제와 함께 역사가 오랜 저수지로,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기록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의림지는 우륵이 축조했다는 설과 현감 박 의 림이 축조했다는 설도 있으나, 삼한시대의 저수지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세종 때와 세조 3년에 정인지가 둑 방을 고치고, 1910년부터 5년간 다시 보수를 하였다. (중략)】를 기준으로 충청남도 지방을 호우(湖右 : 호수의 서쪽)지방이라 했다는 말은 거짓을 가장한 말이다. 그러면 충북 제천의 북쪽지방(충북일부와 강원도)은 “호 북(湖北)”지방이라야 맞는 말이며, 제천의 남쪽지방(경상북도)이 “호남(湖南)”지방이어야 한다. 또 의림지의 동쪽지방인 영월과 태백과 경상북도 일부지방은 호좌(湖 左 : 호수의 동쪽)지방이 되어야 한다. 과연 이러한 예가 있었는가?
지【池 : 못 지. 홍자옥편 - 穿 地 溜 水】는 자연스럽게 연못이 된 지형을 말하는 것이며, 저수지는 인공적으로 목적을 위해 제방을 쌓아 물을 가둬 놓은 것을 말하며, 그 둑을 제방(堤防)이라 한다. 제천(堤 川)이란 말이 “하천의 물 흐름을 막아 놓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곧 하천의 물이 장마 또는 홍수 때 넘쳐나 농경지나 가옥 등을 못 쓰게 만드니 물 흐름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고, 물이 둑을 넘치지 못하도록 제방(堤防)을 쌓은 것이다. 의림지(義 林 池)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의 림 제(義 林 堤)”래야 맞는 말이다. 위 백과사전에 언급된 것처럼 벽골제, 수산제 등처럼 “의 림 제(義 林 堤)”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다.
호중(湖中)이란 표현이 가능한 지방은 반도 땅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호중(湖中)이 될 수 있는 곳은 옛 백제(百濟) 땅으로 호남(湖南)성과 호 북(湖北)성과 강서(江 西)성이 함께 어울려 있는 동정호(洞庭湖) 및 기타 호수와 장강(長江)과 한강(漢江)이 만나는 이러한 지방이 호중(湖中)지방이라면 썩 어울리는 곳이다. 또한 이러한 곳이 『경치가 호중(湖中)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곳이다.』라고 표현했다면 백번 타당한 이야기가 된다. 이곳의 경치가 “둘째”라고 한다면 서러울 정도로 최고로 꼽히는 곳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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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0권 / 충청도(忠 淸 道) / 보령 현(保 寧 縣)
동쪽으로는 청양 현(靑 陽 縣) 경계까지 47 리이고, 홍주(洪 州) 경계까지 32 리이고, 남쪽으로는 남포 현(南 浦 縣) 경계까지 29 리이고, ➡서쪽으로는 해안까지 19 리이고, 북쪽으로는 결성 현(結 城 縣) 경계까지 25 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신촌 현(新 村 縣) 사촌(沙 村)이라고도 하였다. 이었는데, 신라 때에 신읍(新邑)이라 고쳐 결성 군(潔 城 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와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는 운주(運 州)에 붙였고, 예종(睿宗) 원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으로 하였다.
【형승】 땅이 협소하고 ➡서해[鰈 海 : 접해]가에 위치해 있다 정대(鄭 帶)의 기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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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해 (鰈 海 : 접해 : 통상적인 역사해설에서 접역(鰈域)이라 하여 가자미가 많이 나는 곳 즉 반도라 하고 또는 반도 땅이 가자미처럼 생겼다는 뜻에서 반도를 말한다고 설명한다.)가 서해(西海)를 말하는 것일까.
이곳저곳의 설명을 보면 ;
1) 鰈域(접 역 고), 鰈 國(접 국), 鰈 墟(접 허), 鰈 海(접해), 鰈 水 之 鄕(접수지향) 등으로 반도를 말한다고 하였고,
2) 『지봉유설』에 “비 목 어는 동해(東海)에서 나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접역(鰈域)이라 한다.” 하고,
3) 『우 해이어보』에도 “『주서 周 書』에서 말하기를 비목어가 동해(東海)에 나는데 그 이름이 겸이다. 옛 선비들이 겸을 접이라 하였는데 지금 보니 그 종류가 매우 많다.”라 하였고,
4) 『전어지』에 “가자미는 동해에 나며 서남 해에도 있는데 이것은 동해(東海)에 많이 나는 것과는 다르다.”고 한 것으로 보아 가자미는 예전에도 동해(東海)에 많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5) 옛날 중국 사람들은 넙치를 일컬어 ‘접어(鰈魚)’라고 하고, 우리나라를 접역(鰈域)이라고 불렀는데 ‘접어’란 말은 ‘동쪽의 물고기’ 다시 말해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물고기란 의미다.
이렇게 설명들을 하고 있다. 문제는 반도의 동해(東海)와 중국(대륙)의 동해(東海)는 다르다는데 있다.
➊ 반도의 동해(東海)는 말 그대로 열도(列島)의 서쪽과 반도(半島)의 동쪽사이의 바다를 말함이고,
➋ 중국(대륙)의 동해(東海)는 절강(浙江)성과 복건(福建)성 지방의 남동쪽바다를 동해(東海)라고 했다. 대륙의 지도를 보면 산동 반도 북쪽은 발해(渤海)라 했고, 장강(長江)이북해역은 황해(黃 海)라 했으며, 강소 성, 절강성, 복건 성 등의 남동쪽지방은 동해(東海)라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결과로 볼 때 주서(周書)에서 말하는 비목어가 나는 동해(東海)는 반도(半島)의 동해(東海)가 될 수 없으며, 또한 중국에서 접어(鰈 漁)가 동해에서 많이 나기 때문에 접역(鰈域)이란 반도를 지칭한다는 말 또한 어설픈 거짓이다.
위 글【형승 : 땅이 협소하고 ➡서해[鰈 海 : 접해]가에 위치해 있다 정대(鄭 帶)의 기문에 있다.】라는 번역은 접해(鰈 海)를 반도라 지칭하고 반도 보령 땅이 서해바다를 끼고 있으므로 서해(西海)라 번역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접역(鰈域)이 중국에서 동해(東海)를 지칭한다고 보면 접역(鰈域)은 반도가 될 수 없으며, 그곳은 대륙의 남쪽지방인 절강 성과 복건 성의 남쪽 해안지역이 더 가능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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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 ① 당산(唐 山) : 현 동북쪽 4 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② 지을 현(地 乙 峴) : 현 동쪽 5 리에 있다. ③ 오서산(烏 棲 山) : 현 북쪽 17 리에 있다. ④ 아 현(我 峴) : 현 서쪽 12 리에 있다. ⑤ 타고도산(打鼓島山) : 현 서쪽 43 리에 있다. ⑥ 사읍 현(沙 邑 峴) : 현 남쪽 9 리에 있다. ⑦ 백월 산(白月 山) 현 동쪽 25 리에 있다. ⑧ 바다 : 현의 서남쪽은 모두 바다이다. ⑨ 대천(大川) : 현 남쪽 24 리에 있는데, 백월 산에서 발원하여 해소 포(蟹 所 浦)로 들어간다. ⑩ 해소 포(蟹 所 浦) : 현 남쪽 24 리에 있으니, 대천의 하류이다. ⑪ 죽도(竹 島) : 현 서쪽 19 리에 있다. ⑫ 송도(松 島) : 현 서쪽 22 리에 있다. 주위가 12 리이며, 조수가 물러가면 고만도(高 巒 島)와 연하게 된다. ⑬ 고만도(高 巒 島) : 현 서해 22 리 지점에 있는데, 옛날에 군사가 지키던 곳에 민간인의 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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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보령현의 설명에서 “➡서쪽으로는 해안까지 19 리이고” 하였으나 산천(山川) 설명은 또 다르다. 즉 【⑧ 바다 : 현의 서남(西南)쪽은 모두 바다이다.】 : 현재의 보령 땅과 당시의 보령 땅은 같을 수밖에 없는데【물론 행정구역이 일부 바뀌어 행정구역은 일부 다를 수 있으며, 간척사업으로 일부 해안 측의 땅이 넓어졌다. 이는 비교를 하는데 이무런 장애가 될 수 없다.】지도를 보면 보령(保寧) 땅의 서남쪽지방뿐만 아니라 서쪽지방 모두 바다(海)에 접해 있다. 곧 청소면의 서쪽도 바다요, 주교, 대천(현 보령시) 서쪽도 바다요, 남포. 웅천 서쪽도 모두 바다(海)이다.
서남(西南)쪽 지방만이 바다(海)와 접해 있다는 당시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가? 그러나 당시 이 분들은 ‘홍주(洪州 : 현 홍성)’에서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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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최해(崔瀣)가 일찍이 이 고을로 좌천되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외로운 도서(島嶼) 위를 오가면서, 타향에 기식(寄食) 하고 아침저녁을 보낸다. ➡아낙네들은 키가 작아서 다니는 것이 흡사 자라[鱉] 와 같고, 백성들이 곤궁하고 보니 그 모습이 원숭이 방불하구나. 풍속은 비록 그 습 상(習 尙)의 잘못은 있어도, 예절만은 간혹 존비(尊卑)를 분간한다. 해 떨어지니 비린내 풍기는 바다 연기 모아들고, 가을 기운 이미 서늘한데도 해상의 장기(瘴氣)는 훈훈하다. 바다 가운데 위태한 봉우리는 조심조심 서 있는 것 같고, 포구(浦口)의 맑은 물은 한층 더 꿈틀꿈틀 흐른다. 배 돛대의 모습이 물속에 박히니 하늘 그림자를 갈라놓고, 모래 쌓여 있어 지나간 물 흔적을 알 겠 도 다. 바다 지리는 옛것을 가지고 징험하겠고, 조숫물의 역수(曆數)는 지금 사람들에게 번거롭게 물어본다. 늙은 나무는 바람이 싫어서 구부리고 있나. 놀란 물결 암석을 만나 시끄럽게 소리 낸다. 중과 이웃하여 지식(止息)을 같이하니, 세상과 더불어 시끄러운 잡음이 막혔도다. 낚싯대 잡고 때를 어찌 견디어 기다리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멀리 뜨는 것도 또 흥취 있으리라. 이 긴 노래를 누가 화답하리요. 긴 한숨짓고 말하지 않으련다. 다만 이 연파(煙 波)를 즐기는 것도, 오히려 성주(聖主)의 은택임을 믿노라.” 하였다. 모도(茅 島) 현 북쪽 12 리에 있다. 용연(龍 淵) 현 북쪽 15 리에 있다. 또 현 동쪽 15 리에 역시 용 연이 있는데, 모두가 날이 가물면 비를 비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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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낙네들은 키가 작아서 다니는 것이 흡사 자라[鱉] 와 같고, 백성들이 곤궁하고 보니 그 모습이 원숭이 방불하구나. : 詩 曰 ; 婦 矮 行 如 鱉, 民 窮 貌 似 猿 : 여인네들은 키가 작아 다니는 것이 자라(鱉)와 같고, 백성들은 가난해 그 모양이 원숭이(猿)와 같다.>
이러한 당시의 보령(保 寧)에 대한 설명은 참으로 난감한 것이다. 이곳은 본시 여인네들의 몸체가 아주 작은 남방계열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또한 이곳의 생활상이란 것이 너무도 비참했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오죽하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 생활상을 원숭이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보령 땅은 남쪽지방에 있었다는 맞을 지라도 그곳이 반도 보령 땅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령 땅의 동쪽지방(약간 남쪽으로 치우친)의 부여(夫餘)편을 보면 백제(百濟)가 망하기 전 “당시에 10만 호가 태평을 즐겼네.” 하였다. 당시 십만 호(十 萬 戶)라면 최소한 사십만(四十 萬)에서 오십만(五 十 萬)명의 인구가 살았다는 얘기며, 또한 공주(公州)목편의 형승(形勝)을 보면 “웅천(熊 川)은 바다에 접해 있고”하였다. 또한 토산 편을 보면 “동철(銅鐵 : 구리와 쇠). 수철(水鐵 : 주철(鑄鐵)이 마 현(馬 峴 : 주 동쪽 25 리)에서 산출된다.”고 하였다.
얼마나 놀라운 기록인가!!!!!!!!!!!!!!
1) 백제시대 “부여”에 십만 가구가 살고 있었으며,
2) 충청도 내륙의 산간지대에 있었던 공주(公州)의 웅천【熊 川 : 백제 때 공주를 웅천이라 하였다. 보령의 웅천이 아님】이 바다 가에 있었다니 말이다.
이러한 것은 번역상의 실수로 볼 수밖에 없다. 즉 해(海)를 현재의 통념대로 “바다”로 인식하다보니 이러한 문제가 탄생되는 것이다. 이 해(海)를 하천(河川)으로 보면 공주(웅천)지방을 통과하는 금강(錦江)으로 “웅천은 하천과 접해 있다.”로 설명될 것이다. 그러나 조그마한 하천을 바다같이 넓은 의미로 “해(海)”로 표현한 것이 아닐 것이며, 이는 바다같이 넓은 하천이므로 “해(海)”자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 한다.
3) 또한 공주의 동쪽 25 리쯤에 있었던 “마 현(馬 峴)”이란 곳에서 구리(銅)와 철(鐵)과 주철(鑄鐵)의 생산지였다? 웃기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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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방】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병영(兵營) 현 서쪽 20 리에 있다. ○ 절도사(節 度 使)와 우후(虞侯) 각 1인. 『신증』 정덕(正德) 경오 년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는데, 그 주위는 3천 1백 74척에, 높이는 11척이고, 안에 네 개의 우물과 한 개의 못이 있다.
【누정】 어 풍 정(馭 風 亭) 객관과 동헌(東軒) 북쪽에 있다. 박 눌 생(朴 訥 生)의 기문에, “신해 년에 온천(溫泉 본관) 정공(鄭 公) 대(帶)가 이 고을의 수령이 되어 왔는데, 그 정사가 청렴하고 송사를 잘 다스리니, 백성들이 즐겨 역사에 달려가서 관우(館 宇)와 공청(公廳)을 한 결 같이 모두 신축하였고, 또 동쪽 봉우리 위에 정자를 짓고는 도식(塗飾)과 단청(丹靑)을 이미 마치고 나서 나에게 명명(命名)해 주기를 청해 왔는지라, 내 그 경치를 보려고 처음 정자 위에 올라 보니, 북쪽으로 높은 산에 의거하고, 남쪽으로는 큰 들을 내려다보고 있어 누정의 마루가 시원하고 처마도 나는 듯이 높이 솟아서 마치 구산(緱 山) 산마루에 올라 낭 풍(閬 風 산 이름)을 제어해 보는 것 같았으므로, 이름 하기를 어 풍(馭 風)이라 하였다고 하였는데, 해가 오래되고 퇴락하여 현감 박 적손(朴 迪 孫)이 이를 중수(重修)하니, 관찰사(觀察使) 정미수(鄭眉壽)가 이름을 무이 정(撫 夷 亭)이라고 고쳤다.” 하였다. 제민 당(濟民 堂) 현 북쪽 성안에 있다. 환영 루(環 瀛 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병영 안에 있다. 유제(柳 睇)가 세웠다. 『신증』 이 의무(李 宜 茂)의 시에, “한가하여 높은 누정에 올라 먼 눈길 시원하게 바라보니, 고래 희롱하는 물결 호호(浩浩) 망망(茫茫)하게 하늘과 접해 떠 있구나. 현포(玄圃)로 신선 찾아 마냥 술 마시고서, 푸른 용[蒼 虯] 잡아타고 마음껏 멀리 놀고 싶다. 우연히 만난 옛 벗 푸른빛이 눈에 가득 차 있는데, 탐승(探勝)에 지쳐버린 먼 길손 흰 것이 온통 머리를 덮었다네. 참 신선이 어디 있기에 돌아오는 것이 이다지 늦으랴. 부자유한 진세의 번롱(樊 籠)을 그대는 응당 웃으리라.” 하였다.
➡『신증』 영보 정(永 保 亭)ㆍ빙 허 당(憑 虛 堂) 모두 수사(水使)의 영(營)안에 있다. ○ 박은(朴誾)의 시에, “땅은 절박해 다하여도 천경(千 頃)의 바다는 궁하지 않아서, 산을 열어 오히려 한 머리의 조수(潮水)를 받아들이고 있구나. 빠른 바람이 안개를 쫓으니 물은 거울 같은데, 주저(洲渚)가에 사람 없이 새들만이 스스로 노래 부른다. 나그네 길에 맑은 경치 만나면 매양 한탄을 일으키는 법, 해(임금) 있는 곳 바라보고 다시금 고향이 먼 것을 깨달았다. 고심(苦心)해 읊으며 떠나지 못해도 새로운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떨어지는 해 먼 하늘 가로 빠지는 것을 수심에 찬 채 바라보고 있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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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뛰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영보 정(永 保 亭)>은 당시 수군절도사 영내에 있었다는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설명이다.
결국 위의 기록으로 보면 당시에 뛰어난 명승지로, 형승지로 경치를 자랑하던 보령(保寧)땅의 “영 보 정”주위가 어느 날 별 볼일 없는 땅으로 변해버렸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어찌 반도 보령 땅에서 설명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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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 조수 오는 곳에 잠깐 베개에 기대고 있다가, 눈을 들고 홀연히 주저(洲渚)가 생겨나는 것을 보았다. 아침저녁으로 정녕 누가 호흡하도록 하는 것이겠지. 저 하늘과 땅도 마침내는 또한 찼다가는 기우는 일이 있으리라. 남녘 사람들 바다에 뜨면 육지에 말 걸어가듯 하고, ➡물나라[澤 國]에서도 봄을 만나더니 날이 조금은 개는구나. 날마다 누각에 의지하곤 내려갈 줄 모르니, 괴상한 음성 때로 백구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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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나라[澤 國] : 택 (澤)은 “못 택”으로 늪지대를 말하는 것이다. 호수와 하천의 주변으로 못이 많은 곳이므로 택국(澤國)이라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지역이 보령(保寧) 땅이라고 했을 때는 반도 땅을 말하는 것이 될 수 없다. 보령 군(시)과 근접한 홍성. 청양. 서천 등지 어디에도 호수는 없으며 서쪽의 바다만 있을 뿐이다. 바다(海)를 호(湖)라 여기고 호중(湖中) 땅이라고 했다면 본인으로써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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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생 병든 눈이 먼 조망(眺望)을 겁내어, 심장(尋 丈 심은 8척이고 장은 10척을 말한다)의 사이조차 분별하지 못하였다. 새가 지나가면 오히려 한 점의 눈[雪]인가 의아했고, 산이 비껴 있는 것을 다시 구름더미로 착각도 했다. 서녘 하늘가에 떨어지는 해는 빨리 서로 옮겨가고, 공허한 저 속에는 별들이 더욱 스스로 분분히 번쩍인다. 책상에 기대어 어두운 하늘 보고 있노라면 문득 졸음을 이루나니, 다만 낭연(琅 然)한 쇠 거문고 소리가 들을 만하구나.” 하였다.
○ “땅의 형세는 탁탁 치며 곧 날려는 날개와 같고, 누정의 모양은 한들한들 매여 있지 않은 돛대와도 같다. 북녘으로 구름에 쌓인 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디로 향하려는 것이냐. ➡남방으로 오면 둘러싸인 산천 예가 가장 웅장하구나. 바다 기운은 안개를 빚어 비를 이루고, 파도의 기세는 하늘을 뒤집을 듯 스스로 바람을 일으킨다. 어두운 속에서도 새들이 서로 부르짖는 소리를 듣는 듯하여, 앉아 있는 사이에 지경이 함께 비어 있음을 완전히 깨달았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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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방으로 오면 둘러싸인 산천 예가 가장 웅장하구나.>
반도 “보령(保寧)” 땅이 남방(南方)에 있으며, 둘러싸인 산천(山川)이 “가장 웅장하다”는 말은 거짓이다. 반도 보령 땅의 산천(山川)이 웅장하다면 반도의 남방(南方)지대인 ‘전라도와 경상도’의 산천(山川)을 압도한다는 말이 된다.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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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의 반도(半島) 허구성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朝鮮)”이 반도(半島)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반도(半島)는 조선(朝鮮)의 영토(領土) 일부(一部)였다』는 말이 맞는 것이다.
2010년 03월 20일 <글쓴이 : 문 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