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산군 남휘 신도비명(神道碑銘)

▲경남 창녕 부곡면 구산리 남휘. 정선공주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
① 영의공 남민(敏)을 시조로 하는 공은 이조 태종대왕의 부마(駙馬=사위)로 이름은(諱) 휘 (暉)요, 시호는 소간(昭簡)이요, 호는 구당(龜堂)이다.
* 휘(諱) : 돌아가신 선조님에 대하여 함부로 이름을 바로 부르지 않고 존대하는 뜻으로 이름 앞에 먼 붙이는 단어로 비문 등에서는 통상적으로 붙이는데, 편의상 해설시 생략한다.
② 6대조 남군보(君補)는 고려 때 통헌대부 추밀원 직부사로 의령군에 봉해지니, 의령남씨 관(貫)이 여기서 시작된다.
③ 할아버지는 남재(在)요 호는 구정(龜亭)이요, 영의정 겸 수문전 대재학으로 의령부원군에 봉해져 시호는 충경공(忠敬公)이며, 태조대왕의 신주를 모신 종묘(宗廟)에 신주를 함께 모셔 배식(配食)을 같이 하는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 계시며, 제사는 당시 영산현이던 구봉서원 즉 부곡면 구산리의 농화당에서도 지냈다.
④ 공의 아버지 남경문(景文)은 병조의랑(兵曹議郞)을 지내신 분으로 후에 보국숭록대부와 영의정에 추증 되었고, 처 숙령택주 온양방씨는 참의를 지낸 순(洵)의 딸이다.
⑤ 공의 형제가 세 사람이니 첫째가 충간공 지(智)요, 둘째가 직제학 간(簡)이요, 셋째가 즉 공인데, 부친은 일찍 돌아가셔서 의지할 때 없었으나, 모친에게 효성이 지극하며 현명하고 인자하고 청렴한 타고난 성품이 조정에 까지 소문이 났다
⑥ 태종대왕의 딸 중 막내 딸 정선공주가 있었는데, 부마(사위)를 고를 때에 태종 임금이 말하기를 “정선공주가 시집갈 나이이고 국가도 태평하니 적당한 사람을 선비족벌 집안에 광범위 하게 구하여 보았더니, 병조의랑을 지낸 남경문의 아들을 사위로 삼겠노라” 하였다.
⑦ 무릇 사위 될 사람은 가난하지만 건강해야 한다. 대개 문벌(門閥)자손은 부모의 세력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여 깨끗하지 못해 패가망신 하는 수가 있다.
⑧ 남휘는 비록(雖-비록수) 영의정의(남재) 손자이나, 그는 나이가 많아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있고, 그 부친 역시 별세하여 모친 손에서 가난하게 길러졌으나, 몸가짐이 단정한고로 이번에 사위를 뽑을 때는(간택) 교만 한 것이 없는 자 이어야 한다고 하시니, 조정의 신하들이 첨가하여 말하기를 “남휘는 개국공신의 손자요,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는 자라, 대대로 내려오는 덕 있는 집안의 가풍(家風)이 다른 족벌과 달라 공주를 시집보내는 데에 (리강) 진실로(允)화목하기로 이름난 집안이오니 공주를 신하에게 시집 보내소서(리강=釐降)” 하였다.
⑨ 공은 항상 고려 말의 습속이 아직도 없어지지 않고 있으므로 해서, 조목조목 3가지 일을 아뢰니, 첫 번째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토록 함이요, 두 번째로 백성의 생산물에 대한 세금을 가볍게 해주고, 세 번째 과거시험을 보아 인재를 육성 할 것을 아뢰니 임금이 기쁘게 받아들여 채용 하였다.
⑩ 일찍이(嘗 - 일찍 상) 어려서부터 집에 있을 그 동안에는 사서오경등 중국의 성인과 현인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이나 역사를 기록한 책을 통달하였고, 조정에 입궐해서는 충성을 다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자신의 소신을 말씀 드리면 임금이 말하기를 “누에고치가 실을 뽑아내듯이 할아버지(남재)가 젊었을 때 말하는 것과 꼭 빼 닮았다.”라고 하시고 의산군(君)에 봉하니, 의빈부(임금의 사위를 관리하는 부서: 구 부마부)에서 군(君)에 봉해지는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다.
⑪ 공은 세종대왕 때 평양선위사 및 황주선위사를 역임하고, 세종8년과 15년에 사은사로 중국 명나라에 두 번이나 임금의 명을 받들고 사신으로 갔다 오셨다.
⑫ 아아! 애석 하도다! 집에 소장하고 있던 책이나 기록물들은 난리 중에 화를 입어 없어져, 그 생존 년월일과 남긴 글을 알아 볼 데가 없고, 다만 의빈부 (부마부)벽에 걸려있던 시 한수가 전해지고 있었으니, 그 시에서 말하는 것은 “나물죽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고 나아가 벼슬을 하게 되면 청렴결백하게 조정 일을 돕는 것을 서민들도 관심을 가지는 바인데, 이를 모르는 사람은 무슨 화를 당할까봐 구름 속에 가려진 산의 나무와 같이, 자기의 경륜을 펴지 않고 숨어서 일생을 보내고 만다”란 시였다. 이 시는 공경(公卿 : 고관의 총칭)이 배우지 못한 사람들같이 산림 속에 들어가 뜻을 펴지않고 숨어사는 것을 개탄한 시이다.
(고려를 섬기는 사람들을 말함)
⑬ 공이 정선공주와 결혼하여 4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주부를 지낸 빈(份)이요, 다음은 붕(棚)이요, 그 다음은 동(仝), 그 다음은 흡(翕)이며 1녀는 대사성 평산 신씨 신자승(申自繩)에게 출가 하였다.
⑭ 주부공인 빈(份)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남은 병조판서를 지낸 남이(怡)장군이요, 둘째는 군수공 초(怊)요, 셋째는 개령 현감을 지낸 개(愾)이다.
⑮ 병조판서를 지낸 남이장군은 태어날 때부터 용맹스러워, 어릴 때부터 <남장군>이라 불러지더니, 17세 최연소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25세에 함경북도 회령부사를 지냈던 이시애의 난을 북청에서 평정하고, 이어서 승승장구한 기세를 몰아 건주 여진족 정벌하여 적의 괴수 이만주 부자를 사로잡아 목을 베었다.
⑯ 다음해 병조판서에 발탁되니, 한해에 건너뛰어 관청에 우두머리가 되어 버리니 간신배 유자광이가 시기 하더라.
⑰ 여진족 정벌 시 지은 시(詩)에서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이마셔 없어졌네, 남자가 20세에 나라를 평안케 못하면, 후세에 어찌 대장부라 하리요” 하니 이시를 보면 장군의 패기와 위국충정이 뚜렷이 나타 나있다.
⑱ 세조대왕이 돌아가시고 예종 때에 공이 궁궐(禁中)에서 숙직을 하고 있을 때에, 밤에 혜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동료들과 함께 하늘이 보여주는 기이한 재난을 예고하는 것에(혜성의 출현) 대해 이야기하는 도중, 당시 금기시 하고있는 춘추좌전(春秋左傳)의 말을 인용하여, 혜성이 떨어지는 것은 “제구포 신지상(除舊布 新之像) - 구왕이 물러가고 새 왕이 들어설 징조이다”라고 하니, 평소 장군을 시기하던 간신 유자광이 떨어져서 몰래 엿듣고, 이를 날조하여 없는 일을 꾸며대기를 “백두산 시중에 남아 이십 미평국(未平國)을 미득국(未得國)으로 고치고, 혜성론은 묶은 왕조(王朝)가 물러가고 새 왕조가 들어설 징조라고 고쳐, 역적모의를 하고 있다고 남이장군을 역모 반란 혐의로 몰래 일러바치니, 예종역시 그동안 마음속으로 시기하고 있었던지라, 당일 즉시 체포하여 죄인으로 심문해 죄 없는 사람을 뒤집어 씌어 돌아가시게 하니, 슬하에 다만 여자하나 뿐이라 천지가 통곡하고 풍운이 격노할 일이다.
⑲ 그 화가 선조에게도 미쳐, 의산위공의 위패도 옮기지도 못하고 폐쇄되어 제사를 드리지 못했으며, 나머지 자손 역시 이에 연루되어 동생 초(怊)는 진도에 귀양가고, 개(愾)는 충남 서산군 비인에 귀양가니, 대대로 이어져온 명문족벌가문(비녀와 갓끈으로 표현)이 하루아침에 귀양가 떠돌아다니는 족속이 되었다.
⑳ 아아! 높고 푸른 하늘이여! 어찌 이다지도 극에 달할 수 있으랴! 군수공 초(怊)가 진도에 귀양가 있을 때에 유서에서 말했듯이, 형(남이장군)의 억울한 죽음은 비단 남씨 종친들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이 다 불쌍히 여기고 있는 터이니, 바라건데 하늘이 보살펴 억울한 일이 풀릴 날이 반듯이 올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희들은 천리길도 멀다않고 달려가, 옛날 거주하던 고향의 여러 종문들께 방문하여 인사하고 먼저 묘소를 찾아가 손질을 하고 내 뜻을 이어라 하였다.
㉑ 유서를 전수받은 군수공 초(怊)의 5세손 되는 함청당 남응생(南應生)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옛 영산현 동쪽 귀미리(龜尾里)에 피난하다가 정착하게 되었다. 비록 선조의 억울한 원한은 풀리지 않았고, 언제 풀릴지 기약이 없었으나, 하늘이 한량없는 복을 내려 자손이 수천으로 영화롭게 번성하였다.
㉒ 숙종 때 무인년(1698년)에 영의정을 지낸 방손 약천공 남구만(九萬)이,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 남전리에 있는 병조판서 남이장군의 묘소에 허물어진 곳을 떼를 입히고 제사를 지내게 하고, 억울함을 풀고 관직을 복구해 줄것을 임금에게 아뢰었으나, 당시 나라일이 많아 허락되지 못하였고, 순조 무인년(1818년)에 직제학 감찰공파로서 영의정을 지낸 방손 남공철(公轍)이 순조임금이 왕자를 가르치고 있는 중에 말씀드려 특별히 억울함이 풀리면서 관직도 복구되고 “충무시호”를 내리시니, 의산위공의 부조지묘(不祧之廟 = 不祧之典 :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게 하던 특전)도 다시 설치하고, 남이장군은 직계후손이 없으므로, 다음 동생인 초(怊)의 후손으로 차손 봉사 할것을 상소하니, 임금이 판단하여 하교하여, 비로소 의산궁에 제사 향불이 다시 이어지게 되었고, 의산군 묘소가 있던 장서리 길과 정선공주의 묘소가 있던 동천의 길도 다시 열리고, 벼슬과 직위도 만회 되니, 양지바른 봄기운이 다시 태동 하는 듯 하였다.
㉓ 선비들의 의논에 의하여 철종 을묘년(1855년)에 구봉서원에서 제사를 지내다가 , 서원을 폐쇄하
라는 령에 의하여 다만 묘 앞 상석 제단이 있는 곳에서만 추모의 정을 지내왔다.
㉔ 의산위공의 묘는 경기도 안성군 양성명 장서리 능곡에 있었고, 공주묘는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 동천리 사후동에 있었는데, 경향각지로부터 너무 떨어져 약 천리 먼 길을 와야 했으므로 묘소를 제대로 가꾸지 못하였더니, 도굴범이 공주 묘터를 3차례나 침해하여 허물어져 편안히 잠을 잘 수 없었다. 자손이 먼데 있어 지키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㉕ 통탄한 나머지 공의 자손이 다함께 이장하기로 의논하여, 옛 영산현 동쪽 지금 부곡면 구산리 학산 남향 아래에 원상되로 옮기면, 의산궁 묘소와 옛날 구봉서원이 있던 곳이 가까운지라, 갑인년 봄에 두 분을 쌍봉으로 이장하고 그전의 묘의 석물을 모두 그대로 운반하여 세우니, 크고 아름다움에 몸과 넋이 편안 한 것 같고, 영령이 가히 의탁할만한 곳이더라.
㉖ 의산위공이 돌아가신지 500여년이 지났지만, 공주와 임금의 사위 묘답게 길도 내고 옛사적을 새겨야 하겠으므로, 영산, 비인, 서천, 청주, 진천에 사는 모든 자손이 모두 발의하여 신도비를 새로 세우니, 산하가 빼어나게 아름다워 해와 달이 더욱 빛을 발하도다.
㉗ 일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 문중 모든 대표들이 나(고려 말 길재의 후손 길준섭)더러, 신도비에 새길 글을 맡기니 학식이 모자라 어찌 감당할 일이겠느냐마는, 의산군의 할아버지되는 구정 남재(在)선생 앞에 감히 엎드려 생각건대, 이조 개국 시 숨은 공로자로 우리를 인도하신 정성과 애쓰심을 생각할 때 고사(사양)하지 못하겠는 고로, 삼가 국조실록에 기재하고 이번에 아울러 숭상해 마지않으면서, 이후로 그 얼을 계승해 나가야겠다.
광복 후 병진년 초(1976년) 월 일
후학 해평 길 준 섭 짓고
방손 부총리 남 덕 우 쓰다
* 편집자 주(註)
위 글은 1997년12월2일 원본을 해설하여 배포한바 있으며, 금번 카페에 올리기 위하여 카페 운영자 남상수(부산영도구 예비군 지역 대장)조력으로 다시 게재하게 되었음.
이 신도비를 세우기 이전까지 조선왕조 실록이 일반에 공개되지 않아 자료 부족과 사실에 맞지 않은 부분들이 많은데, 이에 대해서는 실록에 기초한 제5장 제1편 의산군 남휘와 정선공주 편을 참조하기 바란다.
☞ 남덕우 전 국무총리

남덕우(南悳祐,1924년 10월 10일 ~ )는 박대통령 시절에 재무부 장 관, 경제기획원장관(부총리)을 지내며 한국의 100억 달러 수출 달성 (1977년) 1인당 국내 총생산 (GDP) 1000달러 달성 쌀 4000만섬 생 산 달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전두환 대통령 시절에는 국무 총 리 엮임 하신분으로 2005년 한국선진화포럼 이사장
200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원로자문단으로 활동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