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증거하는 원리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원리 이해의 지평을 지금까지와는 달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원리를 우리 삶의 답으로만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원리를 우리 삶의 질문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지요. 원리는 우리 삶의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진리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우리 삶의 현실에 끊임없이 던지는 본질적 질문이기도 하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오랜 역사의 기간을 두고 인생과 우주에 관한 근본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해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아가 아직까지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하여 석연한 대답을 해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라면 결과로서의 인생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떠한 분으로 계시는가 하는 것을 모르고서는 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원리를 변화하는 시대와 환경 혹은 상황을 관통하는 모든 현실 문제에 대한 답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원리를 이해한다면 답을 찾기가 쉽지 않은 문제가 발생될 수 있기 때문에 원리 이해의 지평을 넓고 깊게 해야 합니다. 원리라고 하는 텍스트 곧 어떤 경우에도 변할 수 없는 닫힌 진리로 원리를 이해한다면 원리는 우리에게 늘 답으로만 존재하며 그 답은 현실 문제를 떠나 있어 우리의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으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다시 생각하여야 하는 화두는 단연 교회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간 우리 교회는 전도와 선교가 부진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구중심제를 도입하고 새로운 출발을 결단했을 뿐만 아니라 협회의 조직을 선교국 중심으로까지 바꾸었다면 이때 다시 숙고해야할 점은 차제에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때 우리는 원리를 이리저리 살피게 됩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에 대해 어떤 이해를 위한 단초가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지요. 살펴보니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고 하겠으나 그렇지도 않습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구원섭리 곧 복귀섭리의 기관 곧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방편이지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위한 기관이기는 하지만 구원의 주권이 교회에 있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교회에 앞서 하는 섭리이며 오늘의 구원은 교회를 수단으로 하지 의존하지 않는다는 신학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교회중심주의에 의한 구원의 독점을 교회가 자행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교회가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섭리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존재 목적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고 깊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교도 우리의 성취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우리는 우리가 처한 컨텍스트를 통해 질문하고 원리로 답하는 원리 이해의 지평을 넓고 깊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원리를 읽을 때 텍스트로 질문하고 텍스트로 답하는 일은 우리의 삶을 현실과 유리시킬 수 있기 때문에 컨텍스트에서 질문하고 텍스트에서 답변을 구해야 함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텍스트와 컨텍스트 곧 하나님과 인간, 신앙과 현실의 관계를 긴장으로 관계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고통은 의로운 인간이 당하는 이유 없는 고통 때문임을 선포하고 증언함으로써 우리는 오늘에 만연한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고 고통으로부터의 하나님 해방도 이룰 수 있음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관계를 역동적이게 하는 수수의 정분합작용을 확실히 이해함으로써 우리의 삶에서 묻는 삶의 질문이 현실적이든 궁극적이든 원리에서 그 답을 얻고자 하고 잘만하면 확실한 답도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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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을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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