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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가야
이형기
一. 머리말
加耶에 대해서는 막연히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신라에 병합된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야에 대한 직접적인 문헌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서 기인하고 있다. 가야에 대해서 간접적이나마 전하는 자료로는 {三國史記}와 {三國遺事}, 중국의 {三國志}와 {南齊書}, 일본의 {日本書紀} 등의 사서를 들 수 있다. 그리고 {新增東國輿地勝覽}, {大東地志}와 같은 地理志類 등을 통해서도 영역에 대해서 추정하게 하는 기록들을 볼 수 있으며, 금석문으로는 廣開土大王碑文과 昌寧 眞興王 拓境碑(이하 창녕비라 함) 등에서도 간접적인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이처럼 자료가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야사에 대해서는 비교적 일찍부터 주목되어져 왔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일본의 조선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일관계사 특히 '任那日本府'라는 문제를 두고 많은 연구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점들이 많은 것은 어떤 목적에 맞추어져 연구가 진행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가야사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에 의해 먼저 연구가 진행되었는데 이들의 연구경향은 任那日本府說을 입증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任那의 영역 및 지명에 대한 위치비정 등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국내학자들은 가야연맹설에 입각하여 성립, 대외관계, 영역 등을 설명하였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고고학의 발굴이 활발하게 되고 그 성과들이 보고되기 시작하면서, 가야사 연구는 활기를 띠게 되어 고고학자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문헌자료의 부족을 메우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아직도 가야사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이 되어졌다고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그래서 새로운 방법으로 인식하고자 시도한 것이 가야개별사에 대한 연구이다. 이러한 연구방법은 특정한 가야제국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내적인 발전과정과 대외관계 등을 살펴봄으로써 발전하고 멸망해 나가는 과정을 고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연구성과들을 종합하여 가야사를 체계화하고자 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필자도 여기에 동의하여 가야제국들을 하나 하나 다루어 보고 나중에는 이들 연구결과들을 바탕으로 보편성과 특수성을 고찰하여 본다면 가야사를 어느 정도는 체계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본고는 이러한 생각에 따라 가야 소국 중 유력한 국가였던 非火伽耶에 대해서 다루어 보고자 하였다. 비화가야라는 이름은 {삼국유사}, 五伽耶條에 최초로 나타나며 현재의 창녕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
비화가야를 검토의 대상으로 선택하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먼저, 창녕지역이 신라와 가야의 완충지대에 해당하는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어 양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는 신라의 낙동강 이서 지역으로의 진출을 막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보해야 될 요충지이면서도 신라와 가장 가깝기 때문에 신라가 가장 먼저 침투하고자 하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신라가 이 지역을 확보하느냐에 따라서 가야지역의 경략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다른 가야지역과는 달리 창녕형 토기라는 독특한 형태의 토기문화가 형성되어 있던 곳이다. 창녕형 토기의 변화와 분포를 파악해 보면서 비화가야의 변화과정과 더불어 가야라는 실체파악이 좀더 용이해 지지 않을까 해서이다.
신라사의 입장에서는 낙동강 이서 지역으로 진출하는 길목으로 대가야와 아라가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비화가야를 먼저 경략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 555년에 창녕지역에 하주를 설치하고, 561년에 창녕비를 세운 그 이듬 해에 대가야가 멸망하는 것으로도 잘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로써 필자는 가야개별사에 대한 최초의 시도로써 비화가야를 주목하고자 한다.
비화가야에 대한 기존의 연구로서는 백승옥의 글이 있다. 그는 비화가야를 진한종족계통의 유민이 선주토착집단과 결합하여 형성된 소국인 '不斯國'의 후신으로 파악하며, 그 성장기반은 농업과 교역을 들고 있다. 그리고 고령 합천 밀양 의령 함안 등 모든 지역을 제압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신라와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비화가야를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는 것을 부족한 자료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잘 설명해 주고 있지만 자체 발전적인 측면에서의 모습보다는 신라와 백제의 각축장으로서의 전략적 요충지라는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즉 비화가야의 입장에서 역사를 정리한 것이 아니라 신라와 백제 사이에서의 성격을 규명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본고는 자체 발전적인 입장에서 비화가야의 형성과정에서부터 멸망되어 가는 과정을 하나 하나 다루어 보고자 한다. 비화가야의 형성부터 발전 멸망까지를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국내사서에 단편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가야관계기사를 중심으로 재구성하되, {일본서기}, {삼국지} 등의 외국사서와 금석문 등으로 보완하고 지표조사보고서, 발굴조사보고서 등의 고고학적 자료들을 적극 활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주변 가야 여러 나라들과의 관계, 신라와 백제와의 대외관계 등을 찾아보면서 비화가야의 성격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검토는 가야사 연구에 일정 정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二. 非火伽耶의 형성
1) 文獻記錄의 검토
비화가야가 사서에 처음 보이는 곳은 {삼국유사}, 오가야조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A 五伽耶(按駕洛記贊云 垂一紫纓 下六圓卵 五歸各邑 一在玆城 則一爲首露王 餘五各爲五伽耶之主 金官不入五數 當矣 而本朝史略 竝數金官 而濫記昌寧 誤) 阿羅(一作 耶)伽耶(今 咸安) 古寧伽耶(今 咸寧) 大伽耶(今 高靈) 星山伽耶(今 京山 一云 碧珍) 小伽耶(今 固城) 又本朝史略云 太祖天福五年庚子 改五伽耶名 一金官(爲金海府) 二古寧(爲加利縣) 三非火(今昌寧 恐高靈之訛) 餘二阿羅 星山(同前 星山 或作碧珍伽耶)
위 기사를 보면 비화가야는 지금의 창녕지역임을 조심스럽게 언급하고 있지만 창녕지역을 비화가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선학들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다.
다음의 사료들을 보기로 한다.
B ① 火王郡은 본래 比自火郡(比斯伐이라고도 한다)이다. 진흥왕 16년에 주를 두었는데 하주이다. 26년에 주를 폐하였다. 경덕왕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창녕군이다. 영현은 하나이다. 玄曉縣은 본래 推良火縣(三良火縣이라고도 한다)이다. 경덕왕때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玄豊縣이다.
② 上藥縣은 본래 서화현이다. 경덕왕때 개명하였다. 지금의 靈山縣이다.
③ 昌寧郡은 본래 신라 비자화군(비사벌이라고도 한다)이다. 진흥왕 16년에 하주를 두었고 26년에 주를 폐하였다. 경덕왕때 화왕군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 23년에 다시 지금의 이름(창녕군)으로 고쳤다.
위의 사료들을 보면 창녕군의 속현으로는 지금의 達城郡 玄風이 있으며, 영산은 밀성군의 속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풍이 창녕의 속현이었다는 내용은 이곳이 비화가야 시기에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창녕은 '比自火郡' 또는 '比斯伐'로 불리어졌으며, 신라 경덕왕 때에 '火王郡'이라는 이름으로 고쳐졌다가 고려 태조 대에 '昌寧郡'으로 바뀌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비화'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서는 '비자화' 또는 '비사벌'로 불리어졌으며, 창녕비에는 '比子伐'로 기록되었다. 한편 {일본서기}에서는 比自 로 표현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이름으로 창녕의 옛이름인 '빗 '의 한자음 표기를 달리한 것으로서, 自.子는 일본어 'の'의 뜻을 가진 촉음이며, 伐.火는 '邑里'의 뜻을 가진다고 하는데 '非火'는 앞의 촉음과 伐.火 등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앞에서 본 바대로 현풍이 창녕군의 속현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창녕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으며 '비사벌'이라고 불리어지던 때는 현풍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 비화가야에 대해서 언급할 때, 현풍지역도 포함할 것임을 미리 이야기해 둔다.
그런데 창녕과 전주의 古號인 完山의 이름이 '比斯伐'로 똑같이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 대한 기존의 견해로는 그대로 인정하는 경우와, {삼국사기} 찬자의 오기라는 견해, 그리고 사민정책에 의해 이러한 결과가 생겼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 만약 그러하다면 4세기 대에 백제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다른 국가들에게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 보일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녕과 전주의 예 외에는 아직 이런 경우가 발견이 되지 않고 있어 그대로 믿고 따르기에는 다소의 문제가 있지 않을까 한다. 따라서 진흥왕대에 전주까지 신라가 진출하지 못한 점으로서 그대로 인정하기 곤란한 점과 더불어 {삼국사기} 찬자의 오기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와 같이 선학들의 연구성과들과 문헌사료들을 종합해서 살펴본다면 비화가야의 위치는 현재의 창녕군으로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는 창녕지역의 자연지리적 환경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경상도지역은 太白山脈과 小白山脈에 의해 다른 지역과 구분되어 지형적으로는 폐쇄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 지역을 嶺南盆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洛東江과 그 지류 그리고 앞의 두 산맥의 작은 줄기들에 분할된 작은 규모의 분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낙동강 수계를 따라 형성
<그림 1> 창녕의 지리적 위치
된 이들 분지는 선사시대부터 인간 활동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창녕지역은 북동으로는 비슬산, 화왕산, 관룡산, 영취산 등의 산맥을 경계로 달성군, 청도군, 밀양군과 접하고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낙동강으로써 합천군, 의령군, 함안군, 창원군과 맞닿아 있다. 지형은 대체로 동북은 산지, 중앙부와 남부는 평지, 그리고 서부지대는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다. 창녕지역에는 낙동강이 창녕지역을 감싸고돌면서 만든 牛浦.沙旨浦.蛇沒浦.龍湖.石谷湖.丈尺湖.速氣湖 등의 자연호와 배후저습지가 널리 분포되어 있다. 특히 넓은 배후 저습지와 소택지가 형성된 것은 관개에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는 고대사회에서 수전 농업의 훌륭한 터전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고 낙동강이 19세기 중엽까지만 하더라도 수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과 그 지류인 南江과 黃江이 군계와 접하고 있다는 것은 이 지역이 교통의 요지였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겠다. 이러한 입지적 조건은 뒤에서 언급하였듯이 비화가야가 신라와 가야의 교역 중개지 역할을 가능케하는 것이다.
2) 非火伽耶의 形成
비화가야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이야기해 주는 문헌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삼국유사}, 駕洛國記條에 가락국의 형성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비화가야의 형성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는 문헌기록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형성 당시의 모습을 최대한 밝히고, 아울러 고고학적 자료들을 분석함으로써 그 대강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본 절에서는 가야 여러 나라들의 형성과정에 대한 연구성과들을 개괄적으로 살펴본 뒤 비화가야의 형성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조를 보면 가락국 형성 이전에 가락구촌이 있었고, 이들 촌의 장으로는 '酋長'이라 불리는 干이 존재하였다. 이들 구촌은 고고학 상으로 기원전 3~2세기 이래로 김해시, 김해군 대동면.주촌면.장유면 등지에서 지석묘, 석관묘, 옹관묘, 토광묘 등을 축조하면서 청동기문화를 배경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개별적인 정치집단들에 비정되고 있다. 이들 구간들이 수로를 추대하여 가락국을 형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이 어떤 계기에 의해 통합되어 가락국을 형성하게 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고고학적 자료들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김해지역에서의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청동기시대로의 이행은 단절이 아닌 연속된 공생으로,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 및 원삼국시대로의 이행은 외부로부터의 유이민 파동이 미친 것으로 보는 연구성과는 그 형성에 대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한편 가락국의 개국기년에 대해서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까지로 학자들에 따라 다양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렇듯 김해지역의 가락국형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연구성과가 있는 것도 단편적이지만 문헌기록과 더불어 고고학적 조사가 비교적 많이 진행되어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가락국의 형성시기에 대해서도 정확한 연대가 설정되지 않고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는 형편이다.
기존의 가야형성에 대한 연구성과들을 보면 대체로 지석묘를 축조하던 토착집단이 내부적으로 완만하게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조선유민의 파동으로 인하여 북방계열의 선진문물이 유입되고 여기에 자극을 받게 되어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지석묘 사회의 성격에 대해서는 역사학계는 물론 고고학계에서도 아직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지석묘가 당시의 수장급 무덤이건, 아니건 간에 지석묘는 최초의 정치집단의 존재를 나타내는 자료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소국의 형성을 지석묘단계의 출현부터 언급해 나가는 것이라 보여진다. 지석묘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할 때 주목할 만한 유적으로 경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 조사된 창원 덕천리유적을 들 수 있겠다. 낙동강 남안에서 약 6km 정도 떨어진 창원군 동면 덕천리에 위치하는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4세기대를 중심연대로 하여 支石墓 3기, 石棺(槨)墓 12기, 石蓋土壙墓 5기, 성격 미상의 토광유구 7기 및 주혈 다수, 그리고 주위에 溝를 돌린 묘역시설물, 환호 등이 조사되었다. 이 유적의 지석묘 중에서는 일반적인 구조와는 달리 상석에 비해 묘광을 크게 파기 시작하여 점차 단을 지워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유구를 축조할 만한 크기로 만들고 개석을 1겹 이상 중첩되게 쌓거나 개석과 개석 사이에 수백 개의 돌을 적석하고, 또한 적색 - 황색토를 둥글게 쌓은 다음 상석을 얹거나 적색 - 황색토로서 봉토처럼 둥글게 만든 후 묘광을 파내려 간 것이 보이는데 이것은 전혀 유례가 없는 것이라고 한다. 1호지석묘에서는 가공된 석재를 사용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타내어 주는 것이라 여겨지는 석축을 쌓아 500여평에 이르는 묘역을 만들었으며, 그 모서리 부분에서는 토기의 破碎 投棄가 이루어졌다. 이는 분묘를 조성한 후 시신을 매장함에 있어서 일정한 의식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추측되는데 결국 주거공간과 묘역공간의 분리, 그리고 의례행위가 확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발굴성과는 지석묘가 한 정치단위집단의 수장급 묘제라는 것을 보여주는데 손색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보게 되면 지석묘 축조사회는 일정 정도의 계급화가 진행되었던 사회였던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하나의 분지 내에 존재하는 다수의 지석묘군은 대등한 복수의 정치집단이 존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의 사료들을 살펴보자.
C ① 개벽한 후로 이 땅에 나라의 이름과 또한 군신의 칭호가 없더니 이에 아도간 여도간 피천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등 구간이라는 추장이 있었는데 백성들을 거느렸다. 무릇 1백호요 7만 5천인이었다. 모두 스스로 산야에 무리를 이루고 우물을 파서 밭을 갈아서 먹었다.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삼월 제삿날에 북구지(이는 산봉우리 이름으로 열 마리 거북이 엎드린 형상으로 이렇게 부른다.)에 머무른 바 되었는데 수상한 소리로 부르는 기색이 있어 무리 2 3백인이 이곳에 모였다. 사람의 소리와 같은데 그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발하여 가로되, "여기에 누가 있느냐?" 구간 등이 일러 "우리들이 있습니다." 또, 말하기를, "여기가 어디냐?" 대답하기를 "구지입니다." 또 가로되 "황천이 내게 명하기를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라 하였기에 여기에 내려온 것이다. 너희들은 산봉우리의 흙을 파내면서 노래하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하면서 춤을 추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간 등이 그 말대로 기뻐하여 노래하고 춤을 추고 얼마 후 우러러보니 붉은 줄이 하늘에서 내려와 닿았는데 그 끝을 찾아보니 이에 붉은 보자기에 쌓인 금합자가 있었다. 열어서 그것을 보니 황금알이 여섯 있었는데 해처럼 둥글었다. 무리들이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늘어서서 절을 하였다. 이윽고 알을 싸서 아도간의 집으로 돌아와 걸상 위에 두고 무리들이 흩어졌다. 12일이 지난 다음날 새벽에 무리들이 다시 모여 상자를 열어 보니 여섯 알이 동자로 변해 있었다. 그 용모는 매우 뛰어났다. 이에 걸상에 앉으니 무리들이 절하여 축하하고 지극히 공경하였다. 날이 갈수록 장성하고 10여일이 지나자 신장이 9척인데, 즉 殷의 天乙이요, 얼굴은 용과 같은 것이 漢의 高祖요, 눈썹이 여덟 빛깔인 것이 당의 요임금이고, 눈동자가 겹인 것은 우의 순임금과 같았다. 그달 보름에 즉위하니 비로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首露라 하였고 혹은 首陵(이는 죽은 후의 이름이다.)이라고도 하였다. 나라이름은 大駕洛이라 하고, 또 伽耶國이라 하였는데, 즉 六伽耶의 하나이다. 나머지 다섯은 각기 돌아가 五伽耶의 왕이 되었다. 동으로는 黃山江, 서남으로는 창해, 서북으로는 地理山, 남쪽은 나라의 끝이 되었다.
② 김유신은 왕경사람이다. 十二대 조상은 수로인데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 후한 건무 18년 임인에 구봉에 올라 駕洛九村을 쳐다보고 드디어 그 땅에 이르러 개국하였다. 이름을 가야라 하였는데 나중에 금관국으로 고쳤다.
③ 시조는 성이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원년 갑자년 사월 병진날에(혹은 정월 십오일이라고도 한다.) 즉위하니 이름을 居西干이라 하였다. 이때 나이는 13이었다. 나라이름은 徐那伐이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조선유민들이 산과 계곡사이에 나누어 거주하여 육촌을 이루었다. 一은 알천양산촌, 二는 돌산고허촌, 三은 취산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 불렀다), 四는 무산대수촌, 五는 금산가리촌, 六은 명활산고야촌이었는데 이는 진한육부이다.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어귀 蘿井곁의 숲 사이를 바라보니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래서 가서 그것을 보니 문득 말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알만 있었다. 그것을 쪼개어 보니 어린 아이가 나왔다. 어린 아이를 데려다 키우니 십여 세에 이르러 기골이 준수하고 숙성하였다. 육부인들이 그의 탄생의 신이하여 받들어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되었다.
위의 기사들로서 김해의 가락국과 경주의 사로국이 형성되기 이전에 각각 가락구촌과 사로육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락구촌의 각 촌의 호수가 일백호라는 사료이 내용은 一萬戶의 오기인 것으로 대개 파악도고 있다. 가락구촌과 사로육촌은 지석묘를 축조하던 토착집단으로 각 촌의 長은 추장 또는 촌장으로 불리어졌다. 촌장들은 씨족 계보상 높은 서열로 인하여 그 자리에 오른 이들로, 이들의 추대에 의해 수로와 혁거세가 즉위하면서 가락국과 사로국이 형성된 것이었다. 이러한 기록들은 각각 수로와 혁거세로 대표되는 이주집단의 영향으로 국가를 형성하게 되는 당시의 역사적 사실들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지석묘를 축조하고 생활을 영위하던 토착집단들에게 어떠한 정치.문화적 동인이 주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앞의 사료의 내용들로서 이주민들의 유입이 자극이 되어져 소국이 형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가지고서 비화가야의 형성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지석묘의 창녕군 분포를 보면, 창녕읍 교상리, 장마면 유리, 부곡면 부곡리.청암리, 영산면 죽사리.신제리, 도천면 도천리, 달성군 구지면 평촌리, 유가면 유곡리 등이다. 이들 지석묘가 분포하는 각 지역에서 청동기시대 이래의 일정 정도의 계급성을 띤 집단의 상정이 가능한 것이다. 즉 부곡면, 영산면, 계성면, 창녕읍, 현풍읍 일대에 지석묘를 축조하면서 생활을 영위하던 자연촌락을 비정할 수 있겠다. 이들 자연촌락들이 몇 개 모여서 읍락을 구성한 것이라 짐작된다. 이때 읍락은 나중 {삼국사기}, 지리지에 나타나는 현효현, 창녕군, 영산현 등의 지역으로 상정할 수 있겠다. 이들 읍락에는 앞에서 보았듯이 촌장, 또는 干이 지배자로 존재하였을 것이다. 기원전 1세기 초에 들어서 고조선 혹은 낙랑지역 주민의 유민 파동 등으로 철기문화가 전파되면서 농경을 비롯한 몇 가지 기술혁신과 더불어 전업화의 수준이 높은 생산체계가 성립되어 진다. 그러면서 생산물에 대한 지배를 통합 읍락간의 위계화가 진행되고, 아울러 읍락간의 연맹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의 맹주가 있던 곳이 나중에 '국읍'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라 믿어진다.
창녕지역의 국읍은 지석묘집단의 분포만으로는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자료들을 원용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 된다. 창녕지역 내에서 규모나 입지면에서 가장 월등한 교동고분군이 분포하는 창녕읍 지역이 국읍지가 아닐까 하고 추정한다. 이렇듯 촌락사회는 초기철기문화가 파급되면서 사회통합을 진전시켜 소국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소국형성의 주체는 누구이며 시기는 언제일까? 여기에 대해서 영남지역의 초기철기문화가 앞단계의 청동기문화와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며, 소국형성기의 유적임을 보여주는 다호리의 발굴결과는 당시의 지배집단의 출자를 나타내어 주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유적은 낙동강의 남안에서 약 2km정도 떨어진 야산에서 평지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을 따라 밀집분포된 기원전 1세기에서 늦어도 기원 1세기 후반까지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土壙木棺墓群이다. 한국식 동검문화의 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는 이 유적에서는 철제무기류, 철제농공구류가 상당 발견되고 단조제품, 주조제품이 모두 발견되어 철기제작기술이 상당히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철기의 제작기술 자체는 북방으로부터 파급된 한의 철기문화의 영향아래에서 이루어졌지만 무기류는 상당수가 기존의 한국식 동검문화와의 복합으로 제작되었고, 농공구류는 이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창안되어 제작되었다. 무기류가 한국식 동검문화와의 복합으로 제작된 것이라면 철기문화를 지니고 들어온 유이민집단이 토착집단에 흡수.동화되어 이러한 결과가 생기지 않았을까 필자는 추측한다. 농공구류가 이 지역에서 독창적으로 제작된 것이라는 것도 당시의 주된 경제생활이 농경이라고 할 때 이 지역에서는 상당한 정도의 농경이 발전하였을 것임은 물론 유이민집단의 동화를 쉽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 유적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신분의 차이를 상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고자들은 목관묘를 Ⅰ, Ⅱ, Ⅲ형으로 구분하여 Ⅰ형은 규모가 비교적 크고 깊으며 묘광 바닥 중앙부에 부장갱이 있는 것, Ⅱ형은 Ⅰ형보다 약간 작으며 부장갱이 없는 것, Ⅲ형은 Ⅰ, Ⅱ형보다 더욱 작고 얕은 것으로 신분의 차이에 의한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1호분의 경우는 부장품을 다른 분묘의 것과 비교해 볼 때, 양이나 질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피장자는 군장과 같은 정치 지도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초기철기문화의 제작양식은 북방계통이지만 무기류나 농공구류가 독창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라는 조사결과는 토착집단과 유이민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유이민들에 의해서 철기문화가 형성되었다 하더라도 토착집단의 문화를 근거로 발전되어 나가며 소국형성이 진행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러한 발굴결과는 기원 전후한 시기에 다양한 유물들을 부장할 수 있는 신분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앞 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석묘 하부구조에서도 상당한 권력을 가진 정치지배자의 존재를 짐작케 하는 유구도 발견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로서 문헌자료와도 그 시기가 거의 일치되는 기원 전후한 시기에 소국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창녕에서는 이러한 유적들이 발견되거나 발굴된 예가 없어 정확한 연대는 언급하기 곤란하다고는 하더라도 문헌기록상의 연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소국형성을 추정할 수 있는 자료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서 창녕도 이와 비슷한 시기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때 형성된 소국은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國'이라고 표현된 것에 해당하리라 생각한다. 여기에 대한 해석은 각기 달라서 '국' 자체를 하나의 군장사회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추장사회 몇 개가 통합되어 생긴 소국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리고 성읍국가 또는 읍락국가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러한 명칭 자체가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는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대개는 이때 창녕지역에 형성된 소국을 {삼국지} 불사국으로 창녕지역에 비정하는데, 千寬宇는 창녕군 영산지역에 존재하였던 국가를 難彌離彌凍國으로 비정하면서 비화가야지역인 창녕이 여기에 포함되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언급하고 있다. 필자는 이때를 소국단계의 비화가야로 이해하기로 하겠다.
한편 당시의 내부는 어떠한 모습일까? 직접적으로 그 모습을 보여주는 사료는 없지만 다음의 {삼국지} 기사들과 {삼국유사}의 기사들로서 그 대강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D ① 변진에는 또한 12국이 있고 또 모두 소별읍이 있다. 각각 거수가 있는데 큰자는 신지, 다음은 험측, 다음은 번예, 다음은 살해, 다음으로는 읍차가 있다.
② 그 풍속과 기강은 낮아서 국읍에는 비록 주수가 있으나, 읍락이 잡거하여 서로 능히 제어하지 못한다.
③ 국읍에 각 한 사람을 세워 천신에 제사지내는 것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름은 천군이다. 또 모든 나라에는 별읍이 있는데 이름은 소도이다.
④ 그 나라안에 무슨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하면, 모든 젊고 용감하고 건장한 자는 모두 등의 가죽을 뚫고 큰 밧줄로 그곳을 한발쯤 되는 나무막대를 매달고 온 종일 소리를 지르며 일을 하는데도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하며, 또 이를 강건한 것으로 여긴다.
⑤ 하루는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구간 등은 모두가 관료들의 우두머리로 그 자리와 더불어 이름이 모두 미천한 사람들의 이름이요, 결코 존귀한 직위의 이름이라 할 수 없으며 만일 바깥에서 듣게 된다면 반드시 비웃을 것이다." 드디어 아도를 아궁으로, 여도를 여해로, 피도를 피장으로, 오도를 오상으로, 유수와 유천의 이름은 윗글자는 그대로 두고 아랫글자를 고쳐 유공과 유덕으로 하고 신천을 신도로, 오천을 오능으로 고쳤다. 신귀의 음은 바꾸지 않고 뜻만 고쳐 신귀라 하였다. 계림의 직관과 의례를 따라 각간, 아질간, 급간의 등급을 두고서 그 아래 관료들은 주와 한의 제도를 따라 나누어 정하였으니, 이는 옛 제도를 혁신하고 새 관직은 마련한다는 도리라고 할 것인가? 이떄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정돈하여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여 그 가르침이 어지럽지 않으나 위엄이 있고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다스려 졌으니
위의 기사를 보면 각 소국의 수장의 칭호가 각각 순서대로 신지, 험측, 번예, 살해, 읍차 등이며 이들 주수들은 국읍에 존재하여 읍락을 통제하였다. 이때 주수는 사로국과 금관가야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박혁거세와 수로에 해당하는 지위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각 읍락은 사로육촌과 가락구촌 등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들 소국에는 祭天儀式을 주관하던 '天君'이 있었다. 제천의식은 청동기시대 이래로 토착사회에서 거행되어 오던 중요한 행사 가운데 하나였다. 그래서 제천의식의 주재자인 천군은 국읍의 주수와 더불어 토착사회의 중요한 지배자 중의 하나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이러한 제천의식은 소국 내, 각 읍락사이의 유대를 강화시키면서 주수가 가지는 정치 경제 군사적인 지배권력의 한계를 극복시켜 주는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관가의 존재는 일정 정도의 지배체제가 형성되어 있어서 관리들이 존재하였을 것이며, 축성 등의 일들이 있을 때 여기에 인원을 동원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즉 국가사업을 할 때에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강제력을 소유한 권력층의 존재가 사료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소국의 신분구조는 主帥, 天君, 民, 下戶 등의 계층으로 분화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료의 내용이 모든 소국 내에서도 해당되는 것이라고는 자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앞에서 소국의 형성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고, 강제력을 소유하는 계층들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볼 때엔 정도의 차이가 있고 반드시 호민, 민, 하호 등과 같은 명칭은 아니다 하더라도 상.중.하로 나뉘어 지는 사회계층의 분화는 보편적이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창원 다호리유적에서 발견된 붓은 필사용으로 지식인계층의 상정이 가능하였으며 또한 관리계층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은 D ⑤의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겠다. D ④의 사료에서도 이미 관리의 존재를 나타내어 주는 관청이 짐작할 수 있었지만 국내사료에서도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료로서는 정확하게 언제쯤에 지배체제가 정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수로대에는 일정 수준의 통치제도가 정착되었을 것이다. 다만 수로가 계림의 직제를 따랐다는 사료의 내용으로 보아 가야제국과 사로국의 직제는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위의 내용들로서 비화가야의 내부모습을 추측해 보면 어느 정도의 계층분화가 이루어지고, 국읍과 읍락으로 단위집단간의 위계화가 진행되며, 소박하나마 통치조직이 있어 역역을 부담지울 수 있는 사회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경상도의 다른 지역들의 이 시기 고분군들을 분석한 내용을 보면 고분군간의 위계화 진행은 대개 기원 전후해서 시작되어 기원 2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정치체의 영역이 확장되고 그 속에서 집단들 사이의 위계화는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고 한다. 비화가야는 교동고분군과 송현동고분군 등 창녕군 내 타지역 고분군들보다 규모면에서 거대한 고총고분군들이 존재하고 있는 창녕읍 지역이 중심읍락인 국읍이 되어 점점 권력이 집중되어 가면서 더욱 발전해 나가리라 생각된다.
三. 非火伽耶의 발전
1) 加耶諸國의 성장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기원 전후한 시기에 창녕지역을 중심으로 비화가야가 형성되었다. 본 장에서는 비화가야가 어떠한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 나가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새로운 시대구분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기존의 통설을 그대로 이용하여 1~3세기와 4~6세기로 구분하여 가야제국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한 다음 얼마 되지 않는 사료들과 기존의 연구성과들, 그리고 고고학적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그 모습을 조금이나마 밝혀 보고자 한다.
1~3세기의 가야지역은 대개 김해의 狗邪國을 중심으로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소국들과 뒤에 이야기할 포상팔국 등이 전기가야연맹 또는 변한연맹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 김해가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로서는 교역과 영남지역에서의 철의 생산을 들고 있다. 즉, 김해지역이 낙랑, 왜와의 교역을 하는데 있어서 남해안에 접하고 있다는 것과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 다른 지역들보다 지리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이현혜는 이를 교역과 분배를 통해 위계적인 권위를 확립하는 관문사회(Gateway Community)의 성격으로 파악하고 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 등에서 수로가 가야의 시조로 인식되고 있는 것은 김해가 초기 가야사에 있어서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케 해 주는 것이다. 특히 내륙에 위치한 양산, 밀양, 창녕, 합천, 고령, 성주 일대의 소국들이 대외교역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하구의 김해를 거칠 수밖에 없어 이들에 대한 일정한 영향력의 행사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창녕지역도 당시에는 김해지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김해의 구야국이 1~3세기 당시의 경상도 남해안 연안의 소국들에게까지 정치적으로 우월할 수 있었던 증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남해안 연안의 정치집단들 또한 구야국과 같이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에는 진왕과 깊은 관계를 가지는 거수들에게 優呼를 더해 주는 내용이 나오는데 변한 12국 중 구야국과 안야국이 포함되어 있어 안야국도 구야국에 못지 않은 위치의 소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浦上八國의 亂'으로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난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당시 가야제국의 역관계를 다르게 설명할 수 있음으로 그것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다음 사료를 보기로 하자.
E ① 칠월에 浦上八國이 음모하여 加羅를 침범하였다. 加羅王子가 와서 구원을 청하니 왕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리음이 육부병을 거느리고 가서 구하도록 명하였다. 팔국장군을 쳐서 죽이고 육천인을 포로로 하여 돌아왔다.
② 勿稽子는 내해이사금때의 사람이다.......포상팔국이 함께 음모하여 아라국을 쳤을 때 아라가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왕이 왕손 音이 근군 및 육부군을 거느리고 가서 구하도록 명하였다. 드디어 팔국병이 패하였다.......그후 삼년이 지나 骨浦.柒浦.古史浦의 삼국사람들이 갈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구하니 삼국의 병사들이 대패하였다.
③ 第十奈解王 즉위 17년 임진년에 保羅國, 古自國(지금의 固城), 史勿國(지금의 泗州) 등 팔국이 함께 왕서 변경을 침범하니 왕이 태자 내음과 장군 일벌 등이 병사를 거느리고 그것을 막도록 명하였다. 팔국이 모두 항복하였다.......10년<20년의 잘못으로 보인다. 필자註> 을미년에 골포국(지금의 합포이다) 등 삼국왕이 각각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갈화성(굴불로 의심된다. 지금의 울주)을 공격하였다. 왕이 친히 그것을 막았다. 삼국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 기사는 보라국.고자국.사물국 등의 포상팔국 연합군이 김해의 가라국을 침범하여, 가라국의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고 도움을 받았던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도 본기와 열전의 내용을 보면 포상팔국이 침범한 곳이 각기 가라와 안라로 달리 나타나고 있으나, 이를 {삼국유사}의 가라국을 침범하였으나 실패하고 3년 뒤에 포상팔국 중 세나라가 울주지역의 갈화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퇴하였다는 내용의 기록으로 보완한다면 포상팔국이 진출하고자 한 곳은 김해의 가라지역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포상팔국의 이름으로는 골포국.칠포국.고사포국.보라국.고자국.사물국 등이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고사포와 고자국은 같은 곳을 나타내는 지명으로 볼 때 결국 8국 중에서 다섯 개의 이름밖에 전해지지 않으며 나머지 3국의 명칭은 알 수 없다. 이들은 창원(마산)의 골포, 고성의 고사포, 사천의 사물국, 칠원의 칠포국 등의 위치비정과 칠포.골포.고사포 등의 해안을 나타내는 명칭으로 미루어 보아 경남해안지대에 위치한 8개의 소국으로 볼 수 있겠다. 정약용은 포상팔국의 위치에 대해 남해안의 창원에서 곤양까지의 8읍으로 보고 함안을 그 일원으로 비정하였으며 이후의 연구자들도 대개 이를 수용하고 있다.
경남 남서해안지대에 위치하고 있던 포상팔국이 연합해서 전기가야연맹의 중심지였던 구야국을 침범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의 소국들도 교역을 통해서 내적 발전을 하여서 내해왕대에는 구야국을 공격할 정도까지 발전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권주현은 이 사건을 들어서 가야사회 내에서 지역연맹체의 성격을 지닌 소연맹체를 상정하고 있다. 그는 전기가야연맹의 맹주국인 구야국의 영향력이 경남해안지대의 소국들에게까지 일정하게 미치지는 못하였으므로, 일정한 지역 내에 비교적 선진적인 소국 또는 교통상으로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소국을 중심으로 하는 소연맹체의 상정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안야국 중심의 포상팔국이 소연맹체를 이루었으며, 이 연맹체가 김해의 구야국을 중심으로 하는 加羅라 불리는 소연맹체와 전쟁을 하게 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러한 지역연맹체는 뒤에서 언급할 부체제와 더불어 앞으로 검증이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아직 정확하게 언급할 수 없지만 긍정적인 방향에서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4세기가 되면, 고구려가 한반도 서부지역의 낙랑군, 대방군 한반도에서 축출시키면서 대방지역을 두고 백제와 패권을 다투게 되면서 백제는 남하하는 고구려세력을 저지하기 위해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교역의 측면에서 보면 낙랑.대방군의 소멸로 한반도 내의 대중국교역의 구심점이 소멸됨으로써 가야사회 전체의 교역권이 재편되어 김해지역과 서부경남지역의 교역권 체계가 확립된다.
이러한 중에 백제의 가야지역 진출이 있게 된다. 다음 사료를 보기로 하자.
F 삼월에 황전별.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아서 구저들과 더불어 군사를 정돈하고 탁순국에 건너가서 장차 신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때 혹자가 말하기를 군사의 무리가 적으면 신라를 깨칠 수 없다고 하여 다시 사백.개로를 보내어 군사를 증가시킬 것을 청하였다. 그런즉 목라근자.사사노궤(이 두사람은 그 성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다만 목라근자란 자는 백제의 장군이다.)에게 명하여 정병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더불어 함께 보내었다. 모두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서 깨뜨렸다. 그리고 비자발, 남가라, 탁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일곱나라를 평정하였다. 이에 군사를 옮기어 서쪽을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의 침미다례를 쳐서 백제에게 주었다. 이때 백제왕 초고 및 왕자 귀수가 또한 군사를 거느리고 내회하였다. 비리, 벽중, 포미지, 반고의 사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이 기사의 내용은 백제 近肖古王 24年(369)에 병력을 낙동강방면과 전남해안방면으로 나누어 보내어 전남해안을 장악하는 동시에 낙동강방면을 그 세력권 내에 편입시켰던 사실을 보여준다. 이는 가야의 발전이 어느 정도는 위축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울러 어느 정도 백제군과 백제인이 상주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백제의 영향력이란 것은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던 것 같으며 유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사에서 보이는 加羅七國은 당시 가야 내에서의 유력세력으로 짐작되는데 比自 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창녕의 비화가야도 이 당시에 백제의 영향아래에 들었을 것이다.
백제가 개로왕 21년(475)에 장수왕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전사하는 등 국가위기를 맞이하게 되고, 解仇의 전횡으로 왕권이 교체되는 등 내외적으로 정국이 불안하여 가야에 대한 영향권 행사가 약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炤知麻立干 3年(481)에 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을 침입하자 신라의 요청에 의해 백제와 가야가 연합하여 이를 격퇴하였다는 기사로서 짐작할 수 있다. 백제가 가야에 대한 영향력 행사가 약해지자 가야는 신라의 원병요청에 즉각 응할 정도로 자주적인 외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외적으로도 독자적인 활동이 가능하였다는 것은 {南齊書}, 東南夷傳 東夷條에 加羅國王 荷知가 南齊太祖 建元 元年(479)에 남제와 통교하여 '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직함을 수여받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4세기 후반에 백제의 영향권 아래에 놓였던 가야가 5세기 후반에는 신라에 구원병을 보낼 수 있는 것과 독자적인 중국과의 교류는 비록 백제에 부용적인 위치에 있었다고는 하더라도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의 상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사실들로서 비록 3세기 초 이후의 상태를 사료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5세기 말에 중국측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과 가야, 신라, 백제 연합군이 고구려에 대항하는 것으로 보아 가야는 끊임없이 성장 발전하고 있었다라고 하는 견해가 제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백제 무녕왕대에 들어 가야에 대해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가야의 발전은 또다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는 {일본서기}, 계체기 6년(512)과 7년(513)에 가야지역인 上 唎, 下 唎, 娑陀, 牟婁의 4현을 할양받는 기사와 己汶, 滯沙지역을 사여받는 기사로서 백제의 가야지역에로의 진출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후 나제동맹이 결렬되면서 백제의 영향력이 다시금 축소되어 간다. 이때를 틈타 가야는 신라에 접근하면서 백제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백제에 부용적인 위치에 있었다 하더라도 대가야와 아라가야는 소국연맹단계를 지나 부체제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는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중국과 독자적인 외교관계를 맺을 정도로 발전하였다. 이와 더불어 주목할 만한 것이 陜川 苧浦里 E지구 제4-1호 봉토분에서 '下部思利之(?)'란 명문이 새겨진 단경호가 발견되었다. 이 단경호는 平底이면서 方形의 胴體에 口緣이 外反하는 대가야의 토기계통으로, 구연과 저부에는 짚의 흔적이 남아있고 구연부의 내부에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고 한다. 이 토기에 새겨진 '下部'라고 하는 명문으로 가야에 부제가 실시된 흔적을 유추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보이는 '下部'라는 용어는 현재까지는 백제에서만 사용된 지방명이다. 그런데 대가야에서 이러한 용어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백제의 지방제도를 본뜬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된다. 고령 고아동 벽화고분의 기원이 公州 宋山里 6號墳에서 찾아진다는 사실도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당시 백제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부의 존재가 상정 가능하다고 하면, 그와 대비되는 상부의 존재도 유추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그것을 확인할 자료가 대가야문화권 내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어쨌든 이러한 사실은 합천 저포리 일대를 대가야의 한 部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아라가야의 경우에도 남강 이남의 지역들을 규합하면서 대가야에 못지 않은 발전을 하였던 것 같다. 다음절의 <표 1>에서 보듯 아라가야에는 왕과 그 아래의 차한기, 하한기, 한기 등의 직책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독립소국의 우두머리로서 아라가야와의 연관하에 반독립적인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아라가야 정치조직의 일부를 담당하는 계층으로 되어진다고 한다. 따라서 아라가야에서의 왕은 일정한 한계를 가지기는 하지만 연맹장의 성격을 넘어서고 있으며 고대국가 전단계로서 부체제 단계에 이르렀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다고 한다.
2) 非火伽耶의 발전
4세기 들어서면서 백제의 부용적인 위치에 있게 된 가야는 지속적으로 자구의 노력을 계속하면서 대외적으로 중국과 독자적으로 외교관계를 맺고 신라에 원병을 보낼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대가야와 아라가야는 고대국가 전단계인 부체제단계에까지 발전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비화가야는 어느 정도까지 발전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비화가야의 성장기반은 교역과 농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교역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남강과 황강이 창녕의 군계에 위치하여 이를 통제할 수 있는 입지적 조건을 가지고 있어 김해와 낙동강 상류지역, 합천, 그리고 진주지역과의 교역의 중간지대적 역할을 충분히 상정할 수 있어 창녕지역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三國志}의 "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 曉蠶桑 作 布"라는 기록으로 이 시기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농업생산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호리의 발굴결과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자연호의 존재와 낙동강의 배후습지는 수도작이 비교적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게 한다. 선사와 고대의 水田조성이 濕地性이거나 水源이 가까운 곳에 있어 간단한 도수시설로도 관개가 가능한 토지가 1차대상이었다는 견해에 비추어 이러한 추정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종합하여 본다면 비화가야는 기원을 전후하여 형성된 후 교역과 농업을 통해 지속적인 발전을 해 왔으리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겠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보면 기원 108년에 이미 신라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였다는 기사가 나타난다. 선석열은 이 기사에 대해서 하나의 기사에 여러 회에 걸쳐 전개되는 사건들을 묶어 집약하여 기재하는 {삼국사기}의 기록방식이 나타난다고 하면서 창녕의 비지국은 532년에서 555년 비사벌주가 설치되기 이전에 멸망되었으며, 다벌국과 초팔국은 대가야와 함께 신라에 병합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백승옥은 이 기사에 대해서 연대문제는 의심이 가지만 신라가 이 지역에 일시적으로 진출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필자는 기록만으로 완전한 복속관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고 보며 고고학적 유물.유적의 성격이 비슷하다고 해서 그 지역이 바로 복속되었다고 보는 것도 위험한 일이라고 하는 백승옥의 견해에 대해서 동의하지만 당시에 신라가 창녕지역으로 진출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라는 데에는 일단 동의를 유보해야겠다. 필자는 {삼국사기}의 초기 신라 -- 가야관계기사는 신라와 가야의 제소국관계이며, 신라가 낙동강 서쪽의 소국들을 정복한 이후에 자국의 역사로 기록하면서 그 이전의 전승기록에 가야의 제소국들을 모두 '가야'로 통칭하였을 것이라고 보면서 이 기사를 창녕지역 근처에 있었던 진한제국 중의 일국과의 관계기사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다음의 사료를 보자.
G 그리고 比自 , 南加羅, 國, 安羅, 多羅, 卓淳, 加羅의 일곱나라를 평정하였다.
이 사료의 내용은 백제가 낙동강유역으로 진출한 기사 중의 일부이다. 당시 백제가 공격한 가야의 7개 지역은 당시의 유력집단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이때 이들 나라들은 대개가 낙동강연안에 위치하고 있어 교역으로 4세기 당시의 유력집단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추정한다. 그런데 여기서 창녕지역을 가리키는 '比自 '이 보이고 있다. 비화가야가 당시 가야제국 중 유력세력으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비화가야의 그 이후의 모습에 대해서 밝혀 주는 사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따라서 고고학 자료들로써 이를 추정해 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지만 창녕지역 전체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모습을 밝혀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조사된 것을 바탕으로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창녕지역의 고분군은 창녕읍 교동 송현동 토천동, 고암면 우천리, 계성면 계남리 사리, 영산면 죽사리 성내리 동리, 이방면 거남리, 대합면 합리 장기리, 현풍면 성하리 등의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특히 창녕읍 교동.송현동고분군, 계성면 계남리고분군 등을 보면, 창녕분지 내에서도 지속적인 성장.발전을 통하여 다른 정치집단을 아우를 수 있는 정치집단의 존재와 발전된 문화를 상정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고분군들의 분포는 비화가야 내 지방세력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고분군들에 대한 조사는 일제때 조선총독부에서 창녕 지역 고분군들에 대한 발굴조사와 경상남도, 영남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한 桂城面 桂南里古墳群,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의 校洞古墳群이 있다.
먼저, 교동고분군은 1911년 일본인 關野貞의 소개를 시작으로 今西龍, 浜田耕作, 梅原末治의 발굴조사, 谷井濟一의 발굴조사 등으로 알려진 유적이다. 이들은 이 고분군을 A, B, C群으로 나누었는데 A군은 창녕읍 북방의 구릉을 따라 분포하고 있으며 약 70여기가 있다. 이 가운데에 A군의 主墳格인 대형분묘인 7호분이 있다. B군은 창녕읍 동북방 구릉상의 화왕산록에 분포하는 고분군이다. 현재 창녕읍 도야동으로 통하는 지방도로를 따라 양측으로 약 80기 가량이 분포하고 있다. C군은 창녕읍 송현동 내 화왕산에서 흘러나온 계류의 북방산록에 약 20여기가 분포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浜田耕作, 梅原末治는 A군, 谷井濟一은 A, B군을 각각 조사하였다. 東亞大學校 博物館에서 조사한 곳은 목마산 기슭의 B군에 속하며 그 중에서도 전형적으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면서 과거 공식적인 발굴조사가 한번도 없었던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는 부분으로 다섯 기를 발굴하였다. 동아대에서 발굴한 고분은 대체로 5세기 전반에서 5세기 후반에 걸쳐 조영된 것들이었는데, 거기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신라계통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5세기 중엽들어서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공격을 당하면서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되는데, 이때 비화가야는 백제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친신라화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무녕왕대에 들어서면서 백제의 정세가 안정되면서 다시금 가야지역으로 진출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대도로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고분군의 하한은 신라가 창녕지역을 병합한 때이다. 고분의 구조는 대개 횡구식 횡혈식 석실분 형식을 띠고 있다. 내부 석실은 지하식, 반지하식을 띄면서 횡구식이었는데 동아대 1, 2, 3號墳은 입구에 묘도가 달린 것이었다.
유물로는 7호분에서 금동관이 출토된 것을 비롯하여 순금제 귀걸이.곡옥.銀製冠飾片.帶片.유리제목걸이 등의 장신구와 環頭大刀.鐵鏃.鐵 .鐵製冠帽.小札.短甲 등의 무기류, 재갈. 子.杏葉.銅製마탁과 같은 마구류, 鐵鎌.鐵製보습.鐵斧 등의 農具類, 有蓋高杯.長頸壺.有蓋長頸壺.有臺長頸壺.有臺 .蓋杯.鉢形器臺 등의 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금동관이 출토되었다는 것과 순금제 귀걸이등을 비롯한 다양한 장신구류가 발굴되었다는 것은 이곳이 비화가야의 최고 지배층의 분묘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런데 금동관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당시 지배층의 권력의 정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하겠다. 신라의 경우도 금관의 사용은 5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가능하였고 그 이전에는 금동관을 썼을 것이라는 견해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당시 비화가야의 지배층 또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아울러 다양한 종류의 무구류와 마구류가 부장되어 있는 것은 당시의 상당한 수준의 군사력을 확인시켜주는 자료이다.
여기에서 출토된 무구류 중에서 특히 대도류들은 대개가 백제계통의 것이다. 앞 절에서도 이미 언급한 11호분 출토 대도와 더불어 7호분과 10호분에서 발견된 대도들은 柄部에 銀線을 감은 것이 무녕왕릉 출토의 것과 같은 형태여서 백제계통의 칼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이것은 5세기말에서 6세기초에 백제의 정세가 안정되면서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게 되었고, 특히 무녕왕대에 백제의 가야지역 진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겠다.
농공구류가 다량으로 발굴된 것은 이 지역에서의 농경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앞 절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배후습지와 자연호 등으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던 창녕지역에서의 농경문화의 발달은 이들 철제농공구류의 사용으로 그 생산력이 더욱 높아졌으리라 생각되어진다.
이 고분군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 유적들은 창녕군 내의 다른 고분군들보다도 우월한 유물상을 보이고 있는 볼 때에 이 고분군의 축조자들이 창녕지역에서는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졌던 집단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창녕군 계성면 계남리 고분군은 전형적인 竪穴式石槨墓이면서 主.副槨을 가지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는 木材를 사용하여서 墓槨의 덮개부분을 구성한 흔적이 보이고 있다. 이 고분군의 유물상은 金銅冠片과 장신구, 토기류, 무구류, 농공구류 등이 다수 발견되었는데 비화가야 내의 주요 지방세력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들 고분군은 산성에 인접하여 조영되어 진다. 교동고분군과 송현동고분군은 목마산성, 계성의 계남리고분군과 창리고분군은 계성(산성), 영산의 태자산고분군과 죽사리고분군은 영취산성과 이어진 구릉에 분포되어 있으며, 현풍의 현풍고읍고분군은 역시 서산성에 인접한 구릉상에 분포되고 있다. 이는 당시에 국읍과 읍락에 주거를 정하고 정치, 경제, 문화 등 생활권을 형성한 다음, 이 생활권을 방어하고 또 외침을 방어하기 위하여 국읍과 읍락에 산성을 축조하였으며 인접 구릉상에 고분을 축조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4세기대에 가야의 유력세력 중 일국으로 발전한 비화가야의 내부구조는 어떠했을까? 4세기 이후의 가야 지배구조에 대해서 언급한 것으로 는 권주현이 아라가야의 지배구조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거의 유일한 연
구성과이다. 그는 전기가야 시기의 다른 소국들과 연계하여 신지로 불리워지던 아라가야의 수장은 '旱岐'로 불려지게 되면서 소연맹체의 장이 되고, 각 소국의 한기들보다 한단계 격상된 '王'으로 되면서 주변가야제국을 대표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왕은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연맹장의 성격을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뿐만 아니라 대가야에서도 왕이란 칭호가 등장하게 되는 사실은 개별가야의 발전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을 알 수 있으므로 그 하부의 관직도 일정 단계 이상에까지 도달한 것으로 믿어진다.
가야의 통치구조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사료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의 말미에 기록된 왕력과 {일본서기}에 보이는 기록을 들 수 있다.
우선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나타나는 가야의 관직명으로는 泉府卿, 司農卿, 宗正監, 阿干, 大阿干, 角干, 沙干, 水彌叱 등이 있다. 이들의 직위와 역할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거의 알 수 없다. 한편 여기서 천부경과 사농경은 재정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의 장으로 종정감은 왕실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의 장으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만약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가야내부에서도 전문화된 관리의 등장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표를 보기로 하자.
<표 1> {일본서기}, 흠명기에 나오는 가야제국 대표자들의 직함
위의 <표 1>에서는 개별 가야에서의 관직명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아라가야와 대가야에서는 왕의 칭호가 보이고 있으며 나머지에는 보이지 않고 있는 점이다. 이 점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두 나라는 고대국가 전단계인 부체제까지 발전하였을 것임을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이들 국가에는 금관가야의 경우에서처럼 어느 정도 전문화된 관리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 증거는 보이고 있지 않지만 4세기 이후 세력이 급격히 약해지는 금관에서 그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면 그보다 우세한 단계까지 발전한 아라가야나 대가야에서도 그 단계에까지 발전하였으리라고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가야가 이 단계에까지 발전하였을때 합천에서 '하부'가 새겨진 토기명의 출토로 다라가 대가야의 지방조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계열화된 관리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나친 억측일 지는 몰라도 그 당시까지도 독립된 정치조직을 유지하고 있던 비화가야는 아라가야나 대가야보다는 못하겠지만 다라보다는 더 발전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여기서 창녕 교동 11호분에서 출토된 원두대도에서 발견된 상감명문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 명문은 칼등에 넣고자 하는 자체를 단면 Ⅴ자형 또는 형으로 얕게 파고 그 안에 두께가 거의 없는 폭 5mm안쪽의 금사를 박아 넣은 후 숫돌로 마무리 작업을 하여 만든 것으로 현재 7자가 남아 있다. 7자 중 첫 글자는 가로획의 한 부분만 보이지만 나머지 여섯 자는 글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이로 볼 때 전체 필치는 행서체로 보이고 있다. 명문의 내용은 글자수가 적고 판독이 불가능한 것이 많아 의미추적이 어렵다. 이 명문의 판독에 대해서는 고구려계통의 칼로 보면서 "上部先人貴△乃(또는 刀)"로 판독하기도 하고 이와는 달리 백제계통의 칼로 보면서 "......△ 先人(△)貴(?)△刀"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이 대도처럼 원두형을 장식한 것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렇지만 中刀나 刀子에 원두형을 장식한 것은 공주 무녕왕릉과 창녕 교동 7호분, 나주 신촌리 9호분 등에서 보이고 있다. 공주 무녕왕릉 출토 도자의 경우 柄部에 孔이 없다는 것이 다른 지역 출토품과 다른 점이다. 특히 일본 내의 도자에 孔이 있는 병부를 가진 경우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일본의 도자는 5세기 후반경 한국의 원두도가 전래되어 제작되었다고 한다. 한편 원두대도는 원두도자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들을 본다면 孔이 있는 원두대도는 공이 없는 원두도자에서 발전되었으며 교동 11호분에서 발견된 대도도 따라서 백제계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판독보다도 이 대도의 명문에 보이는 '上部'라는 내용에 주목하여 비화가야의 내부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서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나친 억측이겠지만 합천 저포리에서 발견된 토기명문에서 下部라는 부명과 상감명에서의 上部라는 명칭들은 당시 가야사회에서의 지방제도명을 나타내어 주는 것으로 짐작하는 바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비화가야 형성 당시의 읍락으로는 현풍, 창녕, 영산지역을 들 수 있었다. 비화가야가 점점 발전해 가면서 창녕을 중심으로 권력의 집중화가 진행되어졌을 것이다. 비록 국읍과 읍락의 관계에 있었지만 거의 대등한 관계였던 구조가 어느 시기엔가 읍락의 계열화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그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비화가야가 가야의 유력세력으로 나타난 4세기 중반을 그 하한으로 설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후에 영산과 현풍지역이 비화가야의 지방조직으로 편제된 것인데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고총고분이 조영될 시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위와 같은 내용들을 종합해 본다면 비화가야는 교동고분군이 축조되던 5세기에서 6세기 초기에 이르면 부체제에까지 도달한 것으로 믿을 수 있겠다.
비화가야의 중심집단이 교동고분군을 축조하던 집단이었으며, 영산지역은 계성고분군의 발굴로 주요 지방세력이 분포하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지역이 금동관을 가질 정도로 상당한 권력수준에 이르러, 소국을 비정할 정도였지만 거기에서의 출토된 토기들이 창녕토기의 주분포권에 해당된다는 사실은 비화가야의 주요 지방세력을 설정할 수 있게하는 것이었다. 현풍지역에서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이러한 사실은 보다 정확하게 확인되리라 생각한다.
4세기 이후에 비화가야의 성격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 창녕토기를 분석한 박천수의 견해가 주목된다.
창녕지역의 토기는 뒤의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이 5세기 초에 들어와 영남지역 전체에 분포하는 토기의 속성에서 분리되기 시작하여 5세기 중엽에는 주변지역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양식적 특징, 즉 脚이 직선화되는 형태, 투창이 一列→交互로 변화하고, 꼭지가 다양화되는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6세기 초가 되면서 토기의 양식에 획기적 변화가 나타난다고 한다.
창녕형 토기의 주분포는 현재의 창녕군지역과 거의 일치하지만 경주를 비롯해서 대구, 고령, 합천, 진주, 창원, 함안 등지의 넓은 지역에 걸쳐 발견되고 있다. 이렇게 창녕산 토기가 신라.가야 양대 세력 사이에 광범위한 분포를 보여주는 것은 창녕의 정치집단이 낙동강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신라와 가야 사이를 왕래하면서 일종의 교역의 중심지
<그림 2> 창녕형 토기의 변천과 비교
역할을 수행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내용들은 소국단계에서도 교역과 농업을 통해서 발전해 왔던 비화가야가 교역중개지역할을 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五. 非火伽耶의 멸망
가야는 4세기에 백제의 영향권 아래에 들었지만, 고구려의 남하, 나제동맹, 신라의 한강유역진출, 신라의 낙동강유역진출 등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가야는 대내외적으로 지속적인 성장 발전을 해 나올 수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비화가야는 현풍지역과 청도이서지역, 낙동강을 영역권으로 하여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가야는 하나의 국가로의 통합을 보지못하고 결국 신라에 복속당하고 만다. 여기서는 삼국의 대외관계 속에서 가야의 멸망과정을 찾아보면서 아울러 비화가야의 멸망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비화가야의 멸망연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한 견해가 없다. 이는 멸망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서는 김해의 금관가야나, 고령 대가야의 멸망사실을 전하기는 하지만 여타 소국의 멸망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비화가야의 멸망에 대한 기존의 견해들을 살펴보면, 文暻鉉은 정확한 시기는 언급하지 않고 가야연맹 중 창녕지방의 비화가야는 연맹 내에서 강대한 세력이었으나, 가장 먼저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한다. 金廷鶴도 정확한 시기는 언급하지 못하고, 경주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신라의 서남부진출 길목에 있는 점을 들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가야사의 입장에서라기보다는 신라의 팽창에 초점을 맞추어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고 신라와 영토가 가깝고 신라팽창의 길목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에 멸망되었을 것으로 보고있는 것이다.
朱甫暾은 555년에 比斯伐에 주를 설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비화가야는 이보다 앞서 신라에 복속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다하면서 555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멸망된 듯하다고 하였다. 주보돈의 견해 역시 신라의 팽창이라는 부분에 방향을 설정하고 비화가야의 멸망을 설명하면서 창녕의 주 설치문제를 들어 연대를 추정하고 있다.
한편 白承玉은 비사벌가야는 530~541년 사이의 어느 시점에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하면서 이 때 복속된 비사벌가야는 그 자치권을 555년까지는 유지한 것으로 생각되며 신라가 비사벌에 하주를 설치하고 중앙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완전히 멸망되고 마는 것이라고 하였다.
宣石悅은 532년에서 555년 비사벌주가 설치되기 이전에 멸망되었던 것으로 본다.
李永植은 창녕의 교동고분군에서 나타나는 가야의 신라계 문화의 교체과정이 6세기 초를 경계로 한 것과 {日本書紀}, 계체기 23년(529)년조 이사부의 금관가야 抄略기사에 보이는 '費智'를 比只國과 동일한 국명으로 보면서, 창녕의 가야세력이 신라에 정치적으로 통합되는 것이 6세기 초 이전으로 소급될 수는 없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다.
위의 견해들은 대개가 6세기 초를 비화가야의 멸망으로 보고 있으나 김태식은 이와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는 교동고분군의 유적 유물에서 알 수 있듯이 5세기 이래로 신라에게 부속적인 성격을 띠고 그나마 6세기 전반에는 이미 지역적인 기반을 상실했다고 보이므로, 당시의 가야연맹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위와 같이 비화가야의 멸망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나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하였다시피 멸망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가야의 멸망과정을 살펴보면서 비화가야의 멸망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앞에서도 간단하게 언급하였듯이 4세기에 접어들면서 가야는 백제의 일정한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며, 백제는 가야에 어느 정도의 군사력과 주민을 상주시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백제의 영향력은 그렇게 강한 것은 되지 않은 듯하다는 것은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가야가 5세기 이후에 고구려의 남하에 대항하여 백제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신라에 구원병을 보낼 수 있었다는 기사로서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5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고구려는 신라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신라는 백제에 구원을 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이에 백제는 구원에 응하여 소위 羅濟同盟을 맺는다. 이후 양국의 관계는 백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고 백제 동성왕과 신라의 伊伐 比智의 딸과의 혼인 등으로 알 수 있듯이 매우 우호적이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백제는 가야에 대한 영향력을 다시금 키워나갔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무녕왕대에 가야지역에로의 진출과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환두대도와 창녕지역에서 발견된 대도의 양식이 비슷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는 공격의 고삐를 갑자기 백제쪽으로 돌린다. 이 이후에 고구려는 백제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런데 신라는 여기에 원병을 파견하는 등의 공동의 군사행동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羅濟同盟이 끝났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정세는 백제의 가야에 대한 영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을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이때에 가야는 '百雉'를 신라에 보내어 접근하고 있다. 이는 친신라정책을 함으로써 백제세력에 대한 견제를 하는 것이다. 가야와 신라와의 관계가 급진전되는 것은 가야의 청혼에 신라가 응하는 것을 보여주는 다음의 사료로 알 수 있다.
G ① 三月에 加耶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請婚하였다. 왕이 이찬 비조부의 누이를 보내었다.
② 이로 인하여 加羅는 新羅와 交友關係를 맺었고 日本에 원한이 생기게 되었다. 加羅王이 新羅의 王女를 아내로 맞이하여 드디어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신라가 처음에 여자를 보낼 때에 아울러 100사람을 보내어 여종이 되게 하였다. (이들을) 받아들여 제현에 흩어 두었는데 신라의 의관을 입게 하였다. 阿利斯等은 그들이 변복하였다며 성내며 불러서 돌려보내었다. 이에 신라는 크게 부끄러워 그녀를 도로 돌아오게 하려고 "전에 그대가 장가드는 것을 받아들여 내가 즉시 허락하였으나, 지금 이미 이와 같이 되었으니 왕녀를 돌려주기를 청한다"라고 말하였다. 가라의 己富利知伽(상세하지 않다)가 대답하여 "부부로 짝지어졌는데 어찌 다시 헤어질 수 있겠소? 또한 아이가 있는데 아이를 버리면 어디로 가겠소"라고 말하였다. 드디어 지나가는 길에 刀伽.古跛.布那牟羅 등 세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또한 북경의 오성을 함락시켰다.
③ 또 釋順應傳에 大伽倻國 月光太子는 正見의 십세손이다. 아버지는 異腦王이다. 新羅에 혼인을 구하여 伊 比枝輩의 딸을 맞이하여 太子를 낳았으니 이뇌왕이다. 이는 惱窒朱日의 팔세손이다. 그러나 이 또한 생각할 바가 되지 않는다.
위의 사료들은 가야가 신라에 청혼을 하여 결혼동맹을 맺고, 그 뒤로 낙동강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던 신라는 의관제를 빌미로 하여 동맹을 파기하고 급기야 大加耶 3성과 北境 5성을 복속시키는 내용들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연대가 각각 522년과 529년으로 보이는 것은 결혼동맹의 이야기가 수년 간에 걸쳐서 진행되어진 사건이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신라는 남쪽 방면으로의 진출의사는 굽히지 않고 있었다. 이는 결혼동맹 기간 중인 524년의 남경척지와 가야국왕의 내회기사로서 짐작할 수 있다. 이때 가야국왕은 누구일까?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왕으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앞에서의 대가야와 결혼동맹 중이고, 남경척지의 결과로 가야국왕이 내회한 것이라면 금관가야왕으로 보아야 타당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때 내회라는 것은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부용적인 위치에 있을때 사용된 외교용어라는 견해에 비추어 당시 명목상으로만 유지되어 오던 금관가야의 국왕이 신라의 남쪽유역으로의 진출에 위협을 느껴 내회한 것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결혼 동맹 이후에 가야는 친백제정책과 친신라정책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자구책을 모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계속적으로 낙동강유역으로의 진출기회를 엿보고 있던 신라는 529년에 결혼동맹을 파기하면서 가야의 북경과 금관가야를 공격한다. 이는 낙동강 중상류지역의 가야제국을 고립시키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거의 명맥만 유지해 오던 금관가야는 법흥왕 19년(532)에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완전히 멸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화가야는 어느 시기에 복속되었을 것인 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창녕지역의 비화가야는 남강과 황강의 분기점을 끼고 있는 지리적 이점 등을 이용하여 교역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이 점은 또한 신라가 가야지역을 경략하는데 가장 먼저 창녕지역을 확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가야세력을 양단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즉 창녕지역의 확보란 곧 낙동강의 본류를 사이에 두고서 함안의 아라가야와 고령의 대가야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있는 고지를 차지한다는 전략적 의미가 큰 것이므로 신라로서는 빠른 시일 내에 창녕지역을 복속시키려 들었을 것이다. 신라의 가야지역 진출에 대해서는 다음의 기사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H ① 卓淳 등의 禍는 新羅가 스스로 강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바가 아니었다. 己呑은 가라와 신라의 경계에 있기 때문에 매년 공격받는데도 任那가 능히 구원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망했으며, 南加羅는 작고 협소하여 갑자기 준비하지 못하고 의탁할 곳을 몰랐기 때문에 망하였으며, 卓淳은 상하의 의논이 양분되어 主가 스스로 종속되기를 원하여 新羅에 내응하였기 때문에 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삼국의 패망은 진실로 이러한 이유였다.
② 新羅는 봄에 淳을 취하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久禮山戍를 몰아내고, 결국 그것을 점유하여, 安羅의 가까운 곳은 안라가 경작하고, 久禮山에 가까운 곳은 신라가 경작하였다. 각각 그것을 스스로 경작하면서 서로 침탈하지 않았다.
위의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신라가 탁순과 남가라, 탁기탄을 복속한 이유와 탁순을 멸망시킨 이후에 久禮山에 주둔하고 있던 백제군을 몰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卓淳은 大邱, 漆原, 昌原, 密陽 등으로 학자들에 따라 비정하는 곳이 각기 다르며, 久禮山의 경우에도 玄風 琵瑟山, 昌原 天地山, 飽德山, 昌寧 火旺山으로 다르게 비정하고 있다. 밀양지역이 신라가 가야로 진출하기 위한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는 것과, 밀양에 가깝고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서 신라와 함안의 아라가야와의 경계에 존재하는 곳으로는 창녕의 화왕산을 들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최근에 탁순을 밀양으로, 구례산을 화왕산으로 비정한 의견을 따르기로 한다.
卓淳은 위의 기사로서 541년 이전에 멸망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언제인지 다음의 사료를 살펴보기로 하자.
I ① 定南亭은 巴西里에 있다. 신라 법흥왕 임자년에 가락왕 구형이 와서 항복한 이유로 불렀다.
② 破西幕은 巴西이다. 신라 진흥왕 개국 12년 임오년에 異斯夫, 斯多含을 보내어 대가야를 멸망시킨 연유로 불렀다.
③ 離宮臺는 검암리에 있다. 신라지증왕이 강<낙동강. 필자註> 우측을 병탄하려고 하여 이사부에게 이곳에 진을 치도록 명하였다. 서로 대가야를 치고 남으로 가락을 치니 법흥왕때 가락이 와서 항복하고 진흥왕때 대가야가 망하였다. 이 땅은 대대로 왕이 가는 곳이 되었다.
④ 停戰寺는 豊角 松只의 서쪽에 있다. 신라 진흥왕이 친히 대가야를 정벌하고자 이곳에 머무를때 전승의 보고서가 와서 군사를 돌이켰다하여 그렇게 불렀다.
위의 기사는 밀양지역과 청도지역에서 신라의 왕과 관련된 지명의 유래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사료자체에 대한 신빙성은 그다지 높다고는 할 수 없으나 지명에 대한 내용들을 재구함으로써 밀양과 청도지역은 신라의 가야를 멸하기 위한 중요한 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신라왕들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 사료 H ①의 내용을 본다면 탁순은 스스로 신라에 복속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529년 금관가야 공격에 그리 멀지않은 시기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사료 I-③의 내용을 보면 밀양은 이미 지증왕대에 신라의 영역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日本書紀}, 欽明紀 5年 3月條를 보면 탁순국의 왕이 신라를 불러들였다는 내용은 지증왕대의 밀양진출을 시사케 하는 것이다. 즉 탁순은 이미 신라에 복속된 것이지만 정치적 독자성이 인정될 뿐이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탁순을 복속시킨 뒤 곧 신라가 화왕산으로 비정되는 구례산으로 진출하는 것으로 보아서 비화가야는 탁순과 거의 같은 시기에 멸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530년에도 비화가야의 존재는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금관가야가 멸망될 무렵 비화가야도 신라에 복속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비화가야의 병합은 아라가야나 대가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목의 확보라는 점에서 신라는 낙동강 하류 못지않게 비화가야의 확보에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대가야의 함락을 위해서 이 지역에 下州를 설치하고, 대가야 공격 1년 전인 561년에 창녕지역에서 군신회의를 소집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백제의 낙동강유역 재진출 의도로 이를 견지하고자 대가야는 신라에 접근하여 결혼동맹을 맺는다. 그렇지만 신라는 낙동강유역으로의 진출의도로써 결혼동맹을 맺었다. 529년 이는 의관제를 빌미로 하여 낙동강유역의 8성을 빼앗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해에 김해지역으로 공격을 하여 금관가야는 명맥만 유지하다가 532년 투항하게 되었다. 이때 탁순과 탁기탄 등도 거의 함께 복속되는데 비화가야도 함께 신라에 병합되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6세기초에 신라토기의 양식이 나타나는 등 토기의 급격한 변화가 나타나는 것으로도 6세기 초의 비화가야 멸망에 대한 짐작을 뒷받침해 준다.
六. 맺음말
이상으로 창녕지역에 위치하였던 비화가야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任那日本府'라는 고대 한일관계사의 첨예한 문제와 결부되어 자료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많은 주목을 받은 가야였지만 아직도 가야사 연구자체는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는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였듯이 가야의 자체발전적인 역사상을 그리기 보다는 '임나일본부'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외관계사에 치중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고고학의 성과들이 속속 소개되면서 가야사 연구도 활기를 띠게되었다. 이런 활기 속에서도 가야사는 풀기가 쉽지 않음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이에 필자는 가야사를 체계화하기 위해서는 가야제국을 하나하나 살펴봄으로써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이러한 연구가 시도되어지고 있다. 그들은 하나의 개별가야국을 선택하여 형성부터 멸망까지 아주 세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 연구들도 기대되어 지지만 필자는 가야제국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고 보편성과 특수성을 구분해 내면 어느 정도 가야사의 체계화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필자의 시도가 창녕지역의 비화가야에 대한 고찰인 것이다.
비화가야의 고지인 창녕지역은 자연호와 낙동강의 배후습지 등의 존재로 말미암아 농경에 아주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창녕은 사서에 比自火, 比斯伐, 火王郡, 非火, 比子伐, 比自 로 표현되고 있다. 창녕지역에서의 최초의 정치체의 등장은 지석묘의 출현으로서 알 수 있었다. 비화가야의 형성은 다호리의 유적으로서 기원전후한 시기로 추측할 수 있었다. 비화가야는 농경과 낙동강의 중류에 있으면서 황강과 남강의 분기점이 창녕군계에 위치하는 교역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 등으로 발전을 해 나간 것으로 추측되나, 그 증거를 보여주는 자료는 구체적으로 찾을 수가 없었음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이다. 기원 4세기에 접어들면서 가야는 백제에 부용적인 위치에 있게 되어 백제의 영향을 받게 되었지만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노력을 계속 기울였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백제의 내부사정으로 가야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한 5세기 말 대중국과의 접촉과 신라에 원군을 보낼 정도로 발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화가야의 발전은 고고학적 자료들로서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고고학적 자료들로 보았을 때 창녕지역에서는 농경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상당한 수준의 군사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토기 등으로 보았을 때 비화가야는 신라와 가야의 사이에 있어서 교역의 중개지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들 외에도 비화가야의 전략적 중요성은 신라가 가야지역으로 진출할 때 교두보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멸망연대는 탁순의 멸망에 그리 멀지않은 시기인 532년 전후로 추측할 수 있었다.
이상으로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나름대로 필자가 비화가야의 형성.발전.멸망이라는 동태적인 모습을 그려내고자 한 필자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정태적인 모습만을 그린 것 같다. 특히 비화가야의 형성 당시의 모습을 언급하면서 그 정치체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히지 못한 것과 비화가야로서 언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할 수 없었다. 그리고 가야사 전체라는 틀 속에서 비화가야가 어떠한 위상을 가지는 지에 대해서도 견해를 밝히지 못하였다. 이러한 점들은 앞으로 필자가 계속 공부하면서 채워나가고자 한다. 자료의 부족으로 비화가야 자체의 발전과정에 대해서 동태적으로 파악하기엔 너무 미흡하였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필자의 능력부족이었던 것 같다. 선학들의 좋은 가르침을 바란다.
A Study of Bihwa-Gaya(非火伽耶)
Lee, Hyung-gi
Departmnt of Korean History
Majoring in Three Kingdoms and Koryo History
Graduate School
Yeungnam University
(Directed by Professor Lee, Hyung-woo)
Abstract
Gaya(加耶) was noticed and studied by scholars comparative early, but it wasn't systematized because of the lack of documents.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ystematize and carry our the search of it, so the study of Bihwa-Gaya(非火伽耶) is link of it. The old region of Bihwa Gaya, Chang-nyung(昌寧) has very profitable condition in farminng due to the existence of lake and the marsh in Nakdong-gang(洛東江). According to history books, Chang-nyung is expressed into Bizahwa(比自火), Bisabul(比斯伐), Hawanggun(火王郡), Bihwa(非火), Bizabul(比子伐), Bizabal(比自 ).
The appearance of the first political system in Chang-nyung can be inferred from the apperance of Dolmen. The formaion of Bihwa-Gaya could be guessed in the period Before and After Christ as the lelics of Dahori(茶戶里). It is guessed that Bihwa-Gaya was developed because of the profitable geographic condition in farming and trade that it is located in the middle of Nakdong-gang, and a point of Hwang-gang(黃江) and Nam-gang(南江) is located in Chang-nyung. But as said previosly the historical materials showing evidence couldn't be searched concretely. Toward 4 century, Gaya is located in Baekje(百濟), so it was influnced by it. But Gaya was continuosly tried to get out of it. That effort was developed and appeared enough to send reinforcements to Silla(新羅) and contact with the China in late 5 century.
When the influence power was distinguished toward Gaya because of the condition of Baekje. The development of Bihwa-Gaya couldn't help being searched in archaeological materials, the developments of farming culture and reinforcement of considerable level in Chang-nyung was demonstrated.
And when looking into earthenware, it is guessed that Bihwa-Gaya played a part as intanidiate region of trade between Silla and Gaya. The destruction year could be guessed before and after 532, when was not long before destruction of Tacksoon(卓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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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耶'에 대한 여러 용례들이 있지만 이 글의 성격과는 무관하므로 그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본고에서는 가야의 여러 나라 전체를 하나의 정치체로서 이야기하고자 할 때는 한국고대사 연구의 기본사서인 {三國史記}에 표기되고 있는 '加耶'를 사용하기로 하고, 특정한 가야소국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는 그 이름이 명기되어 있는 {三國遺事}, 五伽耶條의 용례를 이용하여 '○○伽耶'로 표기하기로 한다. 참고로 가야의 용례에 대해서는(白承忠, 1992, ['加耶'의 用例 및 時期別 분포상황 -'加耶聯盟體' 개념의 적용과 관련하여-]{釜山史學})의 논문이 참고된다.
津田左右吉, 1913, [任那疆域考]{朝鮮歷史地理}上.
今西龍, 1919, [加羅疆域考]{史林}4-3 4;1937, {朝鮮古史の硏究}에 재수록.
鮎貝房之進, 1937, [日本書紀朝鮮地名考]{雜考}7(上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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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a, [가야사연구의 시간적 공간적 범위]{韓國古代史論叢}2.
------, 1991b, [530년대 安羅의 '日本府'經營에 대하여]{蔚山史學}4.
------, 1992, [加耶諸國聯盟의 成立과 變遷], 서울大學校 博士學位論文.
------,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
최근 가야개별사에 대한 연구는 권주현과 백승옥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들 두 연구자들은 지속적으로 함안의 아라가야와 창녕의 비사벌가야에 대해서 천착한다고 한다. 앞으로의 연구결과가 기대된다.
權珠賢, 1990, [阿羅伽耶에 對한 一考察], 啓明大學校 碩士學位論文; 1993, [阿羅加耶의 成立과 發展]{啓明史學}4.
白承玉, 1991, [比斯伐加耶의 性格과 그 推移-戰略的要衝地로서의 性格을 中心으로-], 釜山大學校 碩士學位論文; 1992, [新羅.百濟 각축기의 比斯伐加耶]{釜大史學}15.16합.
참고로 백승옥은 {三國史記}, 地理志의 내용에 보이는 '比斯伐'이라는 이름에 가야를 붙여 '比斯伐加耶'라고 명명하고 있다.(白承玉, 1991, 앞의 글 참조) 필자는 {三國遺事}, 오가야조에 보이는 개별가야를 지속적으로 천착하고자 오가야조에 기록된 대로 '非火伽耶'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白承玉, 1991, 앞의 글.
鮎貝房之進, 1937, 앞의 글(上), p.138~139.
三品彰英, 1975, {三國遺事考 }(上), 書房, pp.372~373.
金廷鶴, 1990, 앞의 책, p.238.
① 火王郡本比自火郡(一云 比斯伐) 眞興王十六年 置州名下州 二十六年 州廢 景德王改名 今昌寧郡 領縣一 玄驍縣 本推良火縣(一云 三良火) 景 德王改名 今玄豊縣({三國史記}, 地理1 火王郡條)
② 上藥縣本西火縣 景德王改名 今靈山縣(三國史記}, 地理1 密城郡條)
③ 昌寧郡 本新羅比自火郡(一云 比斯伐) 眞興王十六年 置下州 二十六年州廢 景德王改爲火王郡 太祖二十三年更今名......({高麗史}, 地理2 昌寧郡條)
{大東輿地圖}에서 현풍현은 지금의 달성군 현풍면, 유가면, 구지면, 논공면 등의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盧重國, 1992, [昌寧眞興王拓境碑]{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Ⅱ(韓國古代社會硏究所 史料叢書), p.55. 判讀文 참조.
{日本書紀}, 神功紀 49年(249) 3月條.
鮎貝房之進, 1937, 앞의 글(上), pp.138~139, 앞의 글(下), p.78.
梁柱東, 1975,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pp.122~123.
李丙燾, 1976, [三韓問題의 硏究]{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p.274.
金廷鶴, 1990, 앞의 책, pp.238~239.
현풍지역에 대한 지표조사보고서의 경우에도 창녕의 비화가야와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곳이라는 전제하에 조사가 이루어졌다.
大邱大學校 博物館, 1991, {邱馬高速道路 4車線擴張工事豫定地域內 文化遺蹟地表調査報告書(玉浦~求智)}.
嶺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編,1992,{求智工業團地造成地域地表調査報告書}, 慶尙北道 達城郡.
앞의 사료 B ①과 {삼국사기}의 다음 내용 참조.
置完山州於比斯伐(新羅本紀4 眞興王 16年(555) 正月條)
全州本百濟完山 眞興王十六年爲州 二十六年州廢 神文王五年復置完山州 景德王十六年改名今因之(地理志3, 全州條)
完山(一云 比斯伐 一云 比自火)(地理志4, 完山條)
대개의 일본인 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으며, 李丙燾도 여기에 따른다.
全榮來, 1975, [完山과 比斯伐論]{馬韓.百濟文化}1, 圓光大學校 馬韓.百濟文化 硏究所.
白承玉, 1991, 앞의 글, p.51.
李康來, 1987, [百濟 '比斯伐'考]{崔永喜先生 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探求堂.
비록 창녕지역의 조사는 아니지만 낙동강 배후습지에 형성되어 있는 自然湖의 존재는 후빙기 해면상승, 그 후의 안정과 더불어 곡지가 매적되어 가는 과정상에서 나타나는 지형으로 보아, 수천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가 있다.
(曺華龍.朴春洛.李美幸, 1981, [三浪津 周邊 平野의 地形發達]{地理學}23)
郭鍾喆, 1992, [한국과 일본의 고대농업기술-김해지역과 북부구주지역의 비교검토를 위한 기초작업-]{韓國古代史論叢}4, pp.70~77.
洛東江을 이용한 교역은 尙州와 晋州까지도 연결되었다고 한다.
故慶尙則洛江入海處 爲金海七星浦 北溯至尙州 西溯至晋州 惟金海管轄其口 居慶尙一道之水口 盡管南北海陸之利......({擇里志}11, 卜居總論 生利條)
사료 C ①과 ②의 내용 참조.
李賢惠, 1984, {三韓社會形成科程硏究}, 一潮閣, pp.91~92.
安春培.金元經.潘鏞夫, 1990, [伽倻社會의 形成過程 硏究-金海地域을 中心으로] {伽倻文化硏究}1, 釜山女大, pp.112~113.
駕洛國의 개국기년에 대한 기존학자들의 견해들은 김태식에 의해서 잘 정리되어 있다.(金泰植, 1991a, 앞의 글 참조.)
李相吉, 1993, [昌原 德川里遺蹟 發掘調査報告]{三韓社會와 考古學}(第17回 韓 國考古學全國大會 發表要旨)
1호 지석묘의 경우 8×6m의 묘광을 3단으로 파고, 4.5m 아래에 석실을 축조하였으며 석실에는 5매의 개석을 덮었고, 그 위에 30~50cm의 돌 800여개로 적석하였다. 적석 위에 다시 12매의 개석을 2겹으로 덮고 묘광 어깨선까지 흙을 채웠으며, 적색황토를 봉토처럼 50cm 가량 높이로 덮은 후 그 위에 支石을 놓고 上石을 얹은 구조를 하고 있다.(李相吉, 1993, 앞의 글, pp.104~105)
李相吉, 1993, 앞의 글, pp.110~111.
① 開闢之後 此地未有邦國之號 亦無君臣之稱 越有我刀干 汝刀干 彼刀干
五刀干 留水干 留天干 神天干 五天干 神鬼干等九干者 是酋長 領總百姓 凡一百戶 七萬五千人 多以自都山野 鑿井而飮 耕田而食 屬後漢世祖光武帝建武十八年壬寅三月 洛之日 所居北龜旨(是峯巒之稱若十朋伏之狀 故云也) 有殊常聲氣呼喚 衆庶二三百人 集會於此 有如人音 隱其形而發其音曰 此有人否 九干等云 吾徒在 又曰 吾所在爲何 對云 龜旨也 又曰 皇天所以命我者 御是處 惟新家邦 爲君后 爲玆故降矣 等須掘峯頂撮土 歌之云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以之蹈舞 則是迎大王 歡喜踊躍之也 九干等如其言 咸 而歌舞 未幾仰而觀之 唯紫繩自天垂而着地 尋繩之下 乃見紅幅裏金合子 開而視之 有黃金卵六 圓如日者 衆人悉皆驚喜俱伸百拜 尋還 裏著抱持 而歸我刀家 榻上 其衆各散 過浹辰 翌日平明 衆庶復相聚集開合 而六卵化爲童子 容貌甚偉 仍坐於床 衆庶拜賀 盡恭敬止 日日而大 踰十餘晨昏 身長九尺則殷之天乙 顔如龍焉則漢之高祖 眉之八彩則有唐之高 眼之重瞳則有虞之舜 其於月望日卽位也 始現故諱首露 或云首陵(首陵是崩後諡也) 國稱大駕洛 又稱伽耶國 卽六伽耶之一也 餘五人 各歸爲五伽耶主 東以黃山江 西南以滄海 西北以地理山 東北以伽耶山 南以爲國尾 ({三國遺事}, 紀異1 駕洛國記條.)
② 金庾信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峰 望駕洛九村 遂至其地開國 號曰加耶 後改謂金官國 ({三國史記}, 列傳1 金庾信上.)
③ 始祖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五鳳元年甲子四月丙辰(一曰 正月十五日) 卽位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先是朝鮮遺民分居山谷之間爲六村 一曰 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 山珍支村(或云 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蘿井傍林間 有馬 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有 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歲 岐의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推尊之 至是立爲君焉({三國史記}, 新羅本紀1 赫居世居西干條.)
李鍾旭, 1982, {新羅國家形成史硏究}, 一潮閣, p.18. 註)16.
강봉원, 1986, 앞의 글, p.3.
李種旭, 1982, 앞의 책, pp.12~20.
李賢惠, 1984, 앞의 책, pp.88~95.
李鍾旭, 1982, 앞의 책, pp.12~56.
盧重國은 百濟의 경우에는 溫祖를 도왔다고 하는 十臣들이 六村長과 九干과 같이 선주토착민들의 지배자였다고 한다.(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pp.82~84.)
李種旭, 1993, [韓國 初期國家의 政治發展段階와 政治形態]{韓國史上의 政治形 態}, 一潮閣, p.40.
최근의 연구들에서는 이 사료들의 내용들이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이라 하면서 부정하지 않고 이를 적극 이용하는 견해들이 제시되고 있다.
李種旭, 1982, 앞의 책.
------, 1993, 앞의 글.
李文基, 1990, [新羅 上古期의 統治組織과 國家形成 問題]{한국고대국가의 형 성}, 民音社.
李炯佑, 1993, [新羅 初期國家 成長史 硏究], 建國大學校 博士學位論文.
幽里支石墓의 위치는 행정구역상 장마면에 속하지만, 약 2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桂城古墳群과 같은 능선상에 위치하는 것으로 볼 때 현재의 계성면 소재지를 그 중심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경주의 사로육촌이나, 김해의 가락구촌의 예를 들어 이보다 많은 수의 읍락의 분포에 대해서는 전혀 부정할 자료가 없으나, 현재까지의 자료로서 볼 때 이렇게 짐작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사로육촌장들이 모여 회의를 한 사실들은 촌락연맹이 형성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李種旭, 1993, 앞의 글, pp.41~42) 한편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알들을 아도간의 집으로 가져온 사실도 당시 가락구촌연맹의 맹주가 아도간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르곘다.
유이민들이 유입되면서 국가가 형성되는 내용은 앞의 사료 C群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李健茂외 3명, 1989, [義昌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Ⅰ)]{考古學誌}1.
------------, 1991, [昌原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Ⅱ)]{考古學誌}3.
------------, 1993, [昌原茶戶里遺蹟 發掘進展報告(Ⅲ)]{考古學誌}5.
李健茂외 3명, 1989, 앞의 글, pp.47~48.
李健茂외 3명, 1989, 앞의 글, p.46.
李健茂외 3명, 1989, 앞의 글, p.52.
金貞培, 1978, [蘇塗의 政治史的 意味]{歷史學報}79.
------, 1979, [君長社會의 發展過程試論]{百濟文化}12.
李鍾旭, 1982, 앞의 책 참조.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上)]{韓國學報}2.
金廷鶴, 1982, 앞의 글 참조.
鮎貝房之進, 1937, 앞의 글, p.138~139.
三品彰英, 1975, 앞의 책, p.372.
李丙燾, 1976, 앞의 책, p.274.
白承玉, 1991, 앞의 글, p.19.
千寬宇, 1976, [辰.弁韓諸國의 位置試論]{白山學報}20;, 1991, {加耶史硏究}, 一潮閣, p.69.
①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 濊 次有殺奚 次有邑借({三國志}, 魏書 東夷傳 弁辰條)
②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三國志}, 魏 書 東夷傳 韓條)
③ 國邑各立一人 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條)
④ 其國中有所爲 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 以丈許木 之 通日 呼作力 不以爲痛 旣以勤作 且以爲健......({三國 志}, 魏書 東夷傳 韓條)
⑤ 一日 上語臣下曰 九干等俱爲庶僚之長 其位與名 皆是宵人野夫之號 頓 非簪履職位之稱 化外傳聞 必有嗤笑之恥 遂改我刀爲我躬 汝刀爲汝諧 彼刀爲彼藏 五刀爲五常 留水留天之名 不動上字 改下字 留功留德 神天 改爲神道 五天改爲五能 神鬼之音不易 改訓爲臣貴 取鷄林職儀 置角干 阿叱干 級干之秩 其下官僚以周判漢儀而分定之 斯所以革古鼎 新設官分 職之道歟 於是平理國齊家 愛民如子 其敎不肅而威 其政不嚴而理 ({三國遺事}, 駕洛國記條)
이 구절의 해석에는 다음과 같이 정치지역의 읍락의 미분상태로 보는 견해와(李丙燾, 1976, 앞의 책, p.279.) 주수가 읍락에 잡거했다고 보는 견해(金哲埈 崔柄憲編著, 1986, {史料로 본 韓國古代史}(古代篇), 一志社) 그리고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 가운데에서 취락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로는 국읍과 읍락, 소별읍 등이 있었다고 전제하면서 이 기록을 "국읍에는 주수가 있으나 읍락들이 잡거하여 서로 잘 제어하지 못한다" 라고 해석하면서 한소국은 국읍과 다수의 읍락집단으로 구성된 정치집단으로 추정하는 견해 들이 있다.(李賢惠, 1984, 앞의 책, p.104, 金泰植, 1992, 앞의 글, p.64.)
李賢惠, 1984, 앞의 책, pp.128~129.
金貞培, 1986, {韓國古代의 國家起源과 形成}, 高麗大學校 出版部, pp.153~ 159.
이들 명칭은 {삼국지}, 부여조에 보이고 있다.
邑落有豪民 民下戶皆爲奴業({三國志}, 魏書 東夷傳 夫餘條)
수로는 재위기간이 기원 1세기에서 기원 2세기 후반까지 150여년 이상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의 내용에 대해서 金哲埈은 수로왕의 활동기간을 2세기 후반대로 이해하였다.(金哲埈, 1962, [新羅上古世系와 그 紀年]{歷史學報}17.18合, p.190) 한편, 이현혜는 이를 수로 1인의 재위기간이 아니라 수로집단이 김해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고있는데(李賢惠, 1988, 앞의 글, pp.162~163) 필자는 후자의 견해가 긍정적이라 생각한다.
李盛周, 1993, [1~3세기 가야 정치체의 성장]{韓國古代史論叢}5, pp.132~ 147.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條에 보이는 彌離彌凍國.接塗國.古資彌凍國.古淳是國.半路國.樂奴國.軍彌國.彌烏邪馬國.甘路國.狗邪國.走漕馬國.安邪國.瀆盧國 등의 국가들이 그것인데, 이들 소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견해가 없다. 그리고 뒤에서 언급할 {삼국사기}.{삼국유사}, 물계자전에 보이는 骨浦國, 柒浦國, 保羅國, 古自國, 史勿國 등 포상팔국의 국명으로 볼 때, 전기가야연맹은 이들 12국들과 더불어 좀 더 많은 소국들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條.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李賢惠, 1988, [4세기 加耶社會의 交易體系의 변천]{韓國古代史硏究}1, pp.159 ~167.
앞에서 언급한 {擇里志}의 내용을 보더라도 김해가 海陸之利를 관장한다고 하는 것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아래의 기사에서 볼 수 있듯이 낙랑.대방지역에서 출발한 교역선들은 남해안 연안소국들을 거치면서 항해하고 있다. 이로서도 남해안 연안소국들과 김해의 구야국과의 입지조건에는 큰 차이를 둘 수가 없을 것 같다.
從郡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邪韓國({三國志}, 魏書 東夷傳 倭人條)
{三國志}, 魏書 東夷傳 弁辰條.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 臣雲遣支報 安邪 支 臣離兒不例 狗邪秦支廉之號
權珠賢, 1990, 앞의 글, p.45.
① 秋七月 浦上八國謀侵加羅 加羅王子來請救 王命太子于老與伊伐 利音 將六部兵往救之 擊殺八國將軍 奪所虜六千人還之({三國史記}, 新羅本 紀2 奈解尼師今 14年(209)條.)
② 勿稽子 奈解尼師今時人也......時浦上八國同謀伐阿羅國 阿羅使來請救尼師今使王孫 音率近軍及六部軍往救 遂敗八國兵......已後三年 骨浦.柒浦.古史浦三國人來攻竭火城 王率兵出救 大敗三國之師......({三國史記}, 列傳8 勿稽子傳.)
③ 第十奈解王卽位十七年壬辰 保羅國 古自國(今 固城) 史勿國(今 泗州)等八國 倂力來侵邊境 王命大子 音 將軍一伐等 率兵拒之 八國皆降 十年乙未 骨浦國(今 合浦也)等三國王 各率兵來攻竭火(疑屈弗也 今蔚州) 王親率禦之 三國皆敗 ({三國遺事}, 避隱8, 勿稽子條.)
이를 포상8국과 아라가야와의 관련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면서 당시의 安邪國도 이름이 나오지않는 3국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權珠賢, 1990, 앞의 글, p.37)
丁仲煥, 1962, 앞의 책, pp 183~185.
盧重國, 1990, [ 林國攷]{歷史敎育論集}13.14合, p.192 註 70)
金廷鶴, 1983, 앞의 글, p.12.
李賢惠, 1988, 앞의 글, pp.159~167.
權珠賢, 1990, 앞의 글, p.37.
丁若鏞, {與猶堂全書}6, 疆域考 弁辰別考條.
지역연맹체에 대해서는 이미 盧重國의 연구에서 다루어진 바가 있다. 그는 백제 부체제의 토대로서 馬韓이라는 큰 연맹체 내에서 지역적으로 인접한 국가들이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형성된 작은 소연맹체로서의 지역연맹체를 상정하고 있다.(盧重國, 1988, 앞의 책, pp.62~63)
權珠賢, 1990, 앞의 글, pp.33~39.
盧重國, 1981, [고구려․백제․신라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東方學 志}28, 延世大學校 國學硏究院, PP.50~54.
李賢惠, 1988, 앞의 글, PP.163~171.
{日本書紀}, 神功紀 49年 3月條.
以荒田別.鹿我別爲將軍 則與久 等 共勒兵而度之 至卓淳國 將襲新羅 時或曰 兵衆少之 不可破新羅 更復 奉上沙白.蓋盧 請增軍士 卽命木羅斤資 沙沙奴 (是二人 不知其性人也 但木羅斤資者 百濟將也) 領精兵 與沙白 蓋盧 共遣之 俱集于卓淳 擊新羅而破之 因以 平定比自 南加羅 國 安羅 多羅 卓淳 加羅七國 仍移兵 西廻至古奚津 屠南蠻 彌多禮 以賜百濟 於是 其王肖古及王子歸須 亦領軍來會 時比利 中 布彌支 半古 四邑 自然降服
千寬宇, 1991, 앞의 글, pp.23~26.
근초고왕 대에 백제가 가야지역으로 진출한 이후에 백제와 가야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聖明王曰 昔我先祖速古王 貴首王之世 安羅 加羅 卓淳旱岐等 初遣使相通 厚結親好 以爲子弟 冀可 隆({日本書紀}, 欽明紀 2年(541) 4月條)
乃謂任那曰 昔我先祖速古王 貴首王 與故旱岐等 始約和親 式爲兄弟 於是 我以汝爲子弟 汝以我爲父兄({日本書紀}, 欽明紀 2年 7月條)
다음의 사료 내용 참조.
遣使于百濟 括出在任那日本縣邑百濟百姓浮逃絶貫三四世者 竝遷百濟附貫也({日本書紀}, 繼體紀 3年條)
下令完固 防 驅內外游食者 歸農({三國史記}, 百濟本紀4 武寧王10年 正月條)
{三國史記}, 百濟本紀4 蓋鹵王 21年 9月條.
{三國史記}, 百濟本紀4 文周王 및 三斤王條.
{三國史記}, 新羅本紀3 炤知麻立干 3年 3月條.
高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彌秩夫 我軍與百濟.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 泥河西 斬首千餘級
가라국왕 하지에 대해서는 금관가야 또는 아라가야의 왕으로 비정하기도 하였으나 당시의 고고학 자료 등을 참고할 때 고령의 대가야왕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라고 할 수 있다.
금관가야설; 今西龍, 1919, [加羅疆域考]{史林}4-3,4.
村上四男, 1961, [金官國世系と卒支公]{朝鮮古代史硏究}
아라가야설; 鬼頭淸明, 1974, [加羅諸國の史的發展について]{古代朝鮮と日本}
대가야설; 千寬宇, 1976, [三韓의 國家形成(下)]{韓國學報}3
山尾幸久, 1978, [任那に關する一試論]{古代東アジア史論集}下卷
大山誠一, 1980, [所謂 "任那日本府"の成立について(中)]{古代文化} 32-11.
金鍾徹, 1982, [大加耶墓制의 編年硏究-高靈 池山洞古墳群을 中心으 로-]{韓國學論集}9, 啓明大學校 韓國學硏究所.
朱甫暾, 1982, [加耶滅亡問題에 대한 一考察-新羅의 膨脹과 關聯하 여-]{慶北史學}4, pp.168~169.
權珠賢, 1990, 앞의 글.
金泰植, 1992, 앞의 글.
{南齊書}, 東南夷傳 東夷條.
加羅國 三韓種也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 詔曰 量廣始登 遠夷洽化 加羅王荷知 款關海外 奉贄東遐 可授 輔國將軍本國王
朱甫暾, 1982, 앞의 글, p.165.
{日本書紀}, 繼體紀 6年 12月條.
{日本書紀}, 繼體紀 7年 11月條.
여기에서 '하부'란 지역명이 되고 뒤의 세글자는 인명이 되기 때문에 판독이 불확실한 마지막 글자가 之, 利, 己 등으로 읽혀진다 하더라도 큰 의미는 없다고 한다. 김창호는 백제계 인명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金昌鎬, 1989, [伽耶 지역에서 발견된 金石文 자료]{鄕土史硏究}1, pp.40~42.)
慶尙南道.釜山大學校博物館, 1987, {陜川 苧浦里E地區 遺蹟}, pp.70~71.
蔡尙植은 토기명문의 하부를 고령의 남부로 추정하면서, 백제의 영향을 받은 대가야가 주변의 소규모집단에 사용하도록 한 것으로 보았다.(蔡尙植, 1987, [4號墳 出土 土器의 銘文]{陜川 苧浦里 E地區遺蹟}, 慶尙南道.釜山大學校 博物館) 田中俊明은 百濟 下部人이 이 지역에서 체류하였던 흔적으로 보고 있다.(田中俊明, 1992, {大加耶連盟の興亡と'任那'}, 吉川弘文館, pp.258~260.)
{周書}, 列傳 異域上 百濟條.
都下有萬家 分爲五部 曰上部 前部 中部 下部 後部
金鍾徹, 1988, [北部地域 加耶文化의 考古學的 考察-高靈.星州.大邱를 중심으 로-]{韓國古代史硏究}1, pp.240~242.
權珠賢, 1990, 앞의 글, pp.72~75.
{三國志}, 魏書 東夷傳 韓條.
郭鍾喆, 1992, 앞의 글, p.74.
{三國史記}, 新羅本紀1 婆娑尼師今 29年(108)條.
遣兵伐比只國 多伐國 草八國幷之
宣石悅, 1993, [<<三國史記>> <新羅本紀> 加耶關係記事의 檢討 -初期記錄의 紀 年 推定을 중심으로-]{釜山史學}24, pp.40~41.
白承玉, 1991, 앞의 글, p.39.
宣石悅, 1993, 앞의 글, p.16.
{삼국사기}의 초기기록을 이해하는 데에 비단 가야관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사로국 진출기사도 그 지역에 존재한 정치집단의 활동으로 보며, 나중에 그것이 신라의 역사로 되면서 사로국 진출기사화 된 것이라는 견해도 있어 주목할 만하다. 즉 탈해왕대의 신라와 백제사이의 국경분쟁이나 2세기 중엽 竹嶺.鷄立嶺의 도로개척 내용은 사로국이 여기까지 진출하였다고 보기보다는 그 지역에 존재하고 있던 甘文國.沙伐國 등의 활동으로 보는 것이다.(李炯佑, 1991, [斯盧國의 성장과 주변小國]{國史館論叢}21, p.27; 1992, 앞의 글, p.147.)
因以 平定比自 南加羅 國 安羅 多羅 卓淳 加羅七國({日本書紀}, 神功紀 49年 3月條)
東亞大學校 博物館, 1985, {伽耶文化圈遺蹟精密調査報告書}(慶南 昌寧郡)참조.
朝鮮總督府, 1917, {朝鮮古蹟調査報告}(大正 6年度)
----------, 1918, {朝鮮古蹟調査報告}(大正 7年度)
慶尙南道, 1977, {昌寧桂城古墳群發掘調査報告}.
李殷昌외 3명, 1991, {昌寧 桂城里 古墳群-桂南1.4號墳-}, 嶺南大學校博物館.
沈奉謹외 4명, 1992, {昌寧校洞古墳群}, 東亞大學校 博物館.
關野貞, 1911, [伽耶時代의 遺蹟]{考古學雜誌}1-1.
今西龍, 1917, [慶尙北道 善山郡.達城郡.高靈郡.星州郡.金泉郡, 慶尙南道 咸安 郡.昌寧郡 調査報告]{朝鮮古蹟調査報告}(大正六年), 朝鮮總督府.
浜田耕作.梅原末治, 1918, [慶尙北道 慶尙南道 古蹟調査報告]{朝鮮古蹟調査報 告}(大正七年), 朝鮮總督府.
穴澤和光 馬目順一, 1975, [昌寧校洞古墳群-"梅原考古資料"を中心とした谷井濟 一の硏究-]{考古學雜誌}60-4.
校洞古墳群을 설명하면서 A, B, C群으로 나누는 것과 고분의 일련번호는 앞에서 언급한 穴澤和光.馬目順一의 논문에서의 분류를 따르기로 하되,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한 고분을 언급할 경우에는 동아대측에서 고분에 부여한 일련번호를 따르면서 동아대 ○호분으로 표기하기로 한다.
沈奉謹외 4명, 1992, 앞의 책, p.23.
보고자들은 최소한 5세기대에 들어서 新羅文化圈 내지 新羅領域化되었을 것으로 이야기하지만 소위 창녕형꼭지를 가진 토기들이 함께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정치적 독자성은 유지하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穴澤和光.馬目順一, 1975, 앞의 글, pp.67~70.
金元龍, 1986, {韓國考古學槪說}(제3판), 一志社, p.235.
穴澤和光.馬目順一, 1975, 앞의 글, pp.38~39, 44~46, 49~51.
忠淸南道.百濟文化硏究所, 1991, {百濟武寧王陵}, pp.240~241.
桂南里 1號墳은 日字形 主.副槨式이며, 4號墳은 T字形 主.副槨式의 형태를 띠고 있다.(李殷昌외 3명, 1991, 앞의 책, pp.56~65, 173~181)
李殷昌외 3명, 1991, 앞의 책, p.58.
李殷昌외 3명, 1991, 앞의 책, p.35.
權珠賢, 1990, 앞의 글, pp.71~75.
尹錫曉, 1990, {伽耶史}, 민족문화사, pp.71~75.
權珠賢, 1990, 앞의 글, pp.71~72, <표2> 인용.
이 대도의 명문은 처음에 일본인 학자 田中俊明에 의해서는 "乙亥年△ 率△"로 판독되었지만 최근의 판독으로는 전혀 일치되지 않는다.(韓永熙.李相洙, 1990, [昌寧 校洞 11號墳 出土 有銘圓頭大刀]{考古學志}2, p.92)
韓永熙 李相洙, 1990, 앞의 글, pp85~92.
金昌鎬, 1990, [韓半島 出土의 有銘龍文環頭大刀]{伽倻通信}19.20, pp.17~18.
상부는 백제에서만 보이는 지방구역명이기는 하나, 고구려계 인명 또는 고구려계 도래인의 인명으로서의 용례도 확인된다고 한다.(李永植, 1993, [昌寧 校洞 11號墳 出土 環頭大刀銘]{宋甲鎬敎授停年退任紀念論文集}, p.609.)
이영식은 합천 저포리 출토토기명에 보이는 하부와의 관련지어 이 상부를 대가야에 예속된 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李永植, 1993, 앞의 글, p.609) 그렇지만 이 대도가 만들어지던 시기인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의 비화가야가 대가야에 예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보이고 있지 않다. 토기출토 상으로 볼때 창녕의 지역색을 갖춘 토기가 만들어지며 또한 합천 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대가야에 예속되었다라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靑邱圖}를 보면 현풍과 창녕, 영산의 세 지역의 구분이 되어 있다. 이 표시는 물론 후대의 자료이긴 하지만 비화가야 당시의 부체제를 나타내어 주는 자료로서도 이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朴天秀, 1990, [5~6世紀代 昌寧地域 陶質土器의 硏究], 慶北大學校 碩士學位 論文; 1993, [三國時代 昌寧地域 集團의 性格硏究]{嶺南考古學}13.
朴天秀, 1993, 앞의 글, pp.172~178.
朴天秀, 1993, 앞의 글, p.165, (圖 3)인용.
朴天秀, 1993, 앞의 글, p.194.
합천의 玉田古墳群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을 분석하여 5세기 3/4분기에는 창녕지역을 매개로 하여 신라문물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였다고 본 견해는 창녕지역의 교역의 중개지로서의 역할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趙榮濟, 1993, [外來系 文物을 통해본 5C代 玉田古墳群의 性格]{馬韓.百濟文化}, pp.238~241)
文暻鉉, 1977, 앞의 글, p.35.
金廷鶴, 1983, 앞의 글, p.48.
朱甫暾, 1982, 앞의 글, p.180.
白承玉, 1991, 앞의 글, p.62.
宣石悅, 1993, 앞의 글, pp.40~41.
李永植, 1994a, [新羅와 加耶諸國의 戰爭과 外交]{新羅의 對外關係史 硏究}(新 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15), pp.103~104.
金泰植, 1992, 앞의 글, p.318~319.
{三國史記}, 新羅本紀3 炤知麻立干 3年(481), 6年(484), 11年(489), 16年(494), 18年(496)條.
{三國史記}, 百濟本紀4 東城王 7年(485)條.
{三國史記}, 新羅本紀3 炤知麻立干 15年(493)條.
{三國史記}, 新羅本紀3 炤知麻立干 18年(495)條.
{三國史記}, 百濟本紀4 武寧王 7年(507), 12年(512), 聖王 元年(523), 7年(529), 26年(548), 28年(550)條 참조.
{三國史記}, 新羅本紀3 炤知麻立干 18年(496)條.
{新增東國輿地勝覽}, 高靈縣條에 인용된 崔致遠이 지은 釋利貞傳에 보이는 大加耶 건국설화에 보이는 正見母主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①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 比助夫之妹送之({三國史記}, 新羅 本紀4 法興王 9年(522)條)
② 由是 加羅結 新羅生怨日本 加羅王娶新羅王女 遂有兒息 新羅初送女時 幷遣百人 爲女從 受而散置諸縣 令着新羅衣冠 阿利斯等 嗔其變服 遣使徵還 新羅大羞 飜欲還女曰 前承汝聘 吾便許婚 今旣若斯 請還王女 加羅己富利知伽(未詳) 報云 配合夫婦 安得更離 亦有兒息 棄之何往 遂於所經 拔道家.古跛.布那牟羅 三城 亦拔北境五城({日本書紀}, 繼體紀 23年(529) 3月條)
③ 又釋順應傳 大伽倻國月光太子 乃正見之十世孫 父曰異腦王 求婚于新羅 迎夷粲比枝輩之女 而生太子 則異腦王 乃惱窒朱日之八世孫也 然亦不可考({新增東國輿地勝覽}, 高靈縣條 釋順應傳)
朱甫暾, 1982, 앞의 글, pp.168~169.
{三國史記}, 新羅本紀4 法興王 11年 9月條.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
李永植, 1994a, 앞의 글, p.125.
------, 1994b,[加耶諸國의 外交形式]{新羅末高麗初의 政治.社會變動}(韓國古 代史硏究 7), 신서원, p.300.
李鎔賢, 1988, 앞의 글, p.76.
{日本書紀}, 繼體紀 23年(529) 4月條.
由是 新羅改遣其上臣伊叱夫禮智干岐(新羅 以大臣爲上臣 一本云 伊叱夫禮智奈末) 率衆三天 來請聽勅......上臣抄掠四村(金官, 背伐, 安多, 委陀 是爲四村 一本云 多多羅, 須那羅, 和多, 費智 爲四村也) 盡將人物 入其本國 或曰 多多羅等四村之所掠者 毛野臣之過也.
{三國史記}, 新羅本紀4 法興王 19年條.
十九年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 仲曰武德 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禮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
함안의 阿羅加耶의 멸망시기를 554년이후 어느 시기로 보는 견해가 있다.(權珠賢, 1990, 앞의 글, pp.76~82.)
창녕의 전략적 의미에 대해서는 백승옥이 정리해 놓은 것이 참고된다.
(白承玉, 1991, 앞의 글.)
① 恐致卓淳等禍 非新羅自强故所能爲也 其 己呑 居加羅與新羅境際 而 被連年攻敗任那無能救援 由是見亡 其南加羅 爾狹小 不能卒備不知所 託 由是見亡 其卓淳 上下携貳 主欲自附 內應新羅 由是見亡 因斯而觀 三國之敗 良有以也({日本書紀}, 欽明紀 2年(541)條)
② 新羅春取 淳 仍 出我久禮山戍 而遂有之 近安羅處 安羅耕種 近久禮山處 斯羅耕種 各自耕之 不相侵奪({日本書紀}, 欽明紀 5年(544)條)
金泰植, 1988, 앞의 글, p.194, <표 1>참조.
白承玉, 1991, 앞의 글, p.31, <久禮山과 卓淳에 대한 기존 地名 비정표>참조.
新羅가 가야지역으로 진출하고자 할때 이용되는 교통로는 경주군의 주사산과 단석산 사이를 지나 동창천을 따라 청도를 거쳐 밀양에 이른다고 한다.(李炯佑, 1988, [伊西國考]{韓國古代史硏究}1, pp.25~27)
{密州徵信錄}, 卷一 王蹟地條.
① 定南亭在巴西里 新羅法興王壬子駕洛王仇衡降故云
② 破西幕卽巴西 新羅眞興王開國十二年壬午 遣異斯夫斯多含滅大伽倻故云
③ 離宮臺在儉岩里 新羅智證王欲幷江右 命異斯夫陣于此 西侵大伽倻南伐駕洛 法興王時駕洛來降 眞興王時大伽倻亡 此地爲累世臨於之所
④ 停戰寺在豊角松只西 新羅眞興王欲親征大伽倻 駐 於此 捷書至卽班師故云
{日本書紀}, 繼體紀 24年(530) 9月條.
{三國史記}, 新羅本紀4 眞興王 16年 正月條.
주보돈은 진흥왕이 창녕을 순수한 것이 이미 신라 영역화한 비화가야를 비롯한 가야세력을 위무하고 아울러 잔존 가야세력에 대한 공세의 목적으로 전군지휘관 회합을 위함으로 해석하고 있다.(朱甫暾, 1988, [新羅 中古期의 郡司와 村司]{韓國古代史硏究}1, pp.38~39)
** 연혁 ( 이형기, 영남대학 박사과정 가야사 전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