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매일 기획특집
이재창 시인, 남도문학 현장을 가다 (30)- 정형택 시인
“살아보면 알 일이다, 얼마나 가슴 뜨건 사람들인지…”
효친의 시 전범, 소외된 인간의 애정과 관심 묘사
엄숙함과 진지성 통해 언어의 절제미로 형상화
평생을 평교사상 실천한 과묵한 성품의 시인
2004. 02.18(수) 00:00
정형택 시인(57, 전남문인협회 회장, 영광실업고 교사)은 문학의 대중화와 생활화 운동을 몸소 실천하는 시인이다. 또한 그는 천선적으로 시인 기질을 타고 태어났다. 말수가 없는 그의 성품처럼 작품에서도 언어의 절제미로 갈무리된 남도언어가 새벽이슬보다 더 차갑게, 때론 용광로처럼 뜨겁게 독자들의 가슴 속 깊이 각인되는 시인, 그러면서도 교육자로서의 사명감을 잃지 않으며 평생을 평교사로 살아가는 과묵한 시인이다.
자신의 사리사욕보다도 좀더 나은 세상을 위해 교육자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살려 노력한 그는 첫시집 ‘아버지의 교훈’과 둘째시집 ‘나의 어머님’에서 각별한 효심을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그의 작품 특성은 육친에 대한 정, 즉 효사상을 구현하고자 하는 경향과 동시집 ‘변두리의 아이들’과 시집 ‘가삐리 가삐리 부여잡는 노화섬’에서 보여주는 소외된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 표명으로 드러난다.
낫놓고 ‘r’자도 모르는 어머니, 그 어머님의 가난하고 서러운 삶을 통해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보편적 생활과 자식사랑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것이 곧 그의 교육자 정신과 시정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말수는 적어도 속 깊고 다정한 품성, 그리고 정직하고 강직한 실천력이 거기에서 용솟음 치는 그런 시인인 셈이다.
“가난한 살림에 태어났던 여덜자식/한 끼 굶어도/배교픔을 모르셨다는 우리 어머님//재산복을 대신하여/자식 복으로 가난을 달래 놓고/남보다 일찍 아침을 열어/굵은 손마디가/마를날이 없으셨던 우리 어머님//……//추석명절 다가오면/몇 날을 품삯 일로/밤까지 지새시던 어머님 모습//그 때 사주셨던/한 켤레의 운동화/댓돌 위에 놓아두면 행여 어쩔까/자다가도 나가셔서/들여 놓으시던 그 때의 처지를/이제야 참마음 풀어 놓는/어머님 이야기//……//열 손가락 깨물어/안 아픈 손가락 있다냐/영문도 몰랐던 그 때의 말씀/이제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음을/깨달은 오늘/철없던 지난날에 가슴만 탑니다”(‘나의 어머님․3’에서)
어머니 혹은 아버지의 추억은 애달픈 마음을 되새기게 한다. 더불어 지난 시절의 아픔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그 애달픔과 안타까움은 더욱 깊은 그리움을 부추기는 요인이 될 때 삶의 이력이 높아지곤 한다. 이는 삶의 원형을 찾아 길을 나서는 결국은 자기 찾기의 일환이로 돌아오기 때문에 엄숙해 지곤 한다. 그의 시는 순수로 길을 내는 시의 행로가 전통적인 정서로 가득차 있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원형 혹은 고향의 정서와 상통하기 때문에 항상 엄숙하다. 아울러 돌아가고 싶은 일념으로 뒤를 돌아보지만 아득한 자락만 흩날릴 뿐 시야는 더욱 암연해 진다. 이때 시인은 갈증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다. 철없던 지난날에 가슴만 타듯이 애절한 그의 시심이 깨달음과 서러움이 교차하면서 그의 모습이 아름답게 투영되고 있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효친의 시이다. 어버이 날이나 어버이 생신날, 혹은 기제사를 당해 부모님의 은혜를 떠올리는 일시적인 효심이 아니라 몸에 밴 효성이다. 골수에 박힌 사친의 정임을 실감케 하는 시이다.
또한 농촌의 토속성과 일상생활의 앙금이 시인의 고운 심성과 인정으로 잘 배합해 조화를 이루어 시화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저만치서 가슴을 쳐/하늘을 저으면/온 마을엔 굿판이 서고/세상사 한바탕/가락에 접는다.//즈믄 해 걸러 와도/식을 줄 모르는/신비의 맥박/안으로, 안으로 굽어도는 선율이여//태고적 음성으로/백의의 자락을 풀어/다듬어, 다듬어 놓은/한 줄기 회한이여//굽어, 굽어진 담밑으로/나래 돋힌 듯/죽창문 창살 헤집고/방안사람 불러내는/금수의 맥박이여//자지러진 상쇠가락에/묵직한 떨림으로/간간히 흥을 치는/슬기어린 조상의 얼이여//삼천리 골골마다/팔도의 가슴마다/육자배기 목을 풀어/사족(四足)이 리듬을 타는/징-/징-/징소리여.”(‘징소리’)와 같은 울림으로 확산된다.
절실한 체험을 진실되게 표현한 그의 작품들에 대해 독자들이 신뢰를 보내는 것은 한 편 한 편에 보이는 그 진지성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붐비는 사거리/서양 빵집 훨씬 지나서/초라한 놀이터/골목에 들면//부푸는 풀빵만큼/부푸는 아이들 가슴//덥적덥적 할아버지 손으로/구워내는 풀빵엔/할아버지 기침과/아이들 멀건 눈빛/함께 익는다//두고 온 손자들 생각이 나면/모여든 아이들/얼굴 한 번 쳐다보고,//아이들 초롱초롱 눈동자는/부푸는 풀빵에/모두 다 박혀 있고//하나 둘/아이들이 불어나면/셋 넷/구워내는 빵은 곱으로 되지만//땡닢 한 푼 없는 아이들 가슴은/빵틀만큼이나/열만 달아오른다”(‘변두리 아이들’)
그의 동시집 ‘변두리 아이들’에 실린 표제시이다. 이 동시집에 실린 작품들은 어린 시절의 시골 체험과 초등학교 교사 시적ㄹ 10여년을 코흘리개들과 함께 살며 쓴 것들이다. 그래서 인지 그의 마음 속에는 지금도 그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모습이 동시를 떠나지 못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 시집엔 동심의 눈으로 바라본 가족관계, 꽃과 새, 그리고 곤충들을 소재로 하면서 가난하면서도 맑은 심성을 잃지 않는 어린이의 목소리가 잘 형상화 돼 있다.
“살아보면 알 일이다/얼마나 가슴 뜨건 사람들인지/얼른 뒤돌아 설 수 없는/그리움의 손/그래서 놓지 못한다.//가삐리 가삐리 하면서도/놓지 않는 손/그 뜨건 열기만큼/갈꽃섬에는/뜨거운 사람이 분다”(‘갈꽃섬․43-만나보면 다 그래’)
‘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라는 부제가 붙은 시집 ‘가삐리 가삐리 부여잡는 노화섬’은 노화도 사람들과 마을, 행사를 노래한 시 62편이 ‘갈꽃섬’이란 연작시로 실려 있다. 섬마을의 유래와 풍광, 전설이 담긴 유적지와 학교, 병원 등 각 공공기관 등을 형상화하고, 노화섬 사람들의 풋풋한 인심을 시인의 차분한 목소리로 통해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노화섬 곳곳을 그곳 사람들과 함께 노래하고 있는 현장감 있는 시들은 페이지마다 그들의 삶의 모습을 컬러사진으로 실어 더욱더 현장감이 살아나고 정겹게 느껴진다. 이 인연으로 노화섬 이장단이 주는 표창까지 맏고 눈물의 송별식까지 받았다는 정형택 시인은 시르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 생활 속에 시를 알렸고, 또 시인으로서 소리 없이 민중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전형을 창출해 냈다.
그는 말한다. “문학을 배울 때 먼저 눈물을 배워라. 그리고 나서 피를 배워라.”라고. 그는 우리 사회의 문학가들이 한때 오로지 싸움과 피만을 강조하며 글을 쓸 때 우려하는 마음에서 이런 말을 했다. 문학하는 사람이 과격한 시를 먼저 쓰고 배우면 자칫 문학의 원론과 멀어지고 감동도 떨어지는 것이어서 인간의 눈물을 먼저 배우고 쓰면 과격한 시보다도 더 큰 감동과 힘이 나온다고 강조한다.
그렇다. 오직 투쟁만을, 오직 정의, 민주만을 주장하면서 국회의원이 되고 권력을 틀어쥐니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인간이 근원적인 인생과 삶의 문제를 눈물로 깊이 천착하지 못한 자들은 결국 시인이 아니라 무엇이 되더라도 타락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경계하는 말이다. 정의, 민주, 어쩌고 하면서 거들먹거리는 류들이 결국 더 비민주적이고 더 큰 힘과 세력에 편입되고 싶어 속마음을 숨기고 거짓시, 거짓 글로써 재주를 피우는 부정한 기회주의 패들일 수 있다는 작금의 시대적 현실을 짚어내는 말이다.
문학의 대중화·생활화 몸소 실천
1985년 월간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등단
정형택 시인은 1947년 3월1일 전남 영광군 묘량면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영광중학교와 영광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교육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 영광을 떠나게 된다.
1969년 목포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서 제자들 앞에 설레이는 가슴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을 다닐 때 지도교수였던 고 박홍원 시인을 만난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해 이이들에게 시와 산문을 가르치면서 비로소 시창작을 시작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지만 할 수 있는 취미는 문학이었고, 또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문학이 좋았던 까닦이다.
그는 시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시 쓰는 선생님이 좋은 것처럼 문학이 좋았다며 더 좋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지만 글로 표현을 안했을 뿐이라며 특별한 시술로서 시 쓰기나 시인의 특허 같은 의식을 갖는 것을 경계하며 글을 시작한 것이다. 문학이 하나의 생활로 인식한 것이다.
그는 교사생활을 하면서 문학에 대한 집념과 문학을 본격적이고 전문적인 공부를 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도중에 교사직을 사퇴하고 원광대학교 국문학과에 편입학해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을 공부하며 석사학위를 박기도 했다.
교직에 있으면서 그는 틈틈이 써 오던 작품들을 처음으로 내놓았는데, 그것이 1985년 12월 월간문학 신인상에 ‘첫 차를 타며’외 9편이 당선되었으며, 더불어서 1988년엔 월간 아동문예 신인상에 당선돼 시와 동시 두 장르의 등단작업 마치고 본격적인 문학활동에 나섰다.
그는 시인으로서 30여년동안 교육일선에서 문화적으로 소외된 도서지역을 자원해서 근무하면서 ‘선산시화전’‘섬지역 순회 백일장’ 등 각종 문화행사를 주관, 청소년들의 문화예술 함양은 물론 지역주민에게도 문화 양식을 제공함을 인정 받아 1999년 ‘제8회 대교 눈높이 교육상’을 수상했다. 대부분의 교육상이 교육기관이나 관계자들이 공적조사를 통해 수상자를 선정하는게 일반적인데 그는 지역주민의 적극적인 연대서명으로 추천을 받아 ‘눈높이 교육상’을 수상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한다.
그는 교육생활 대부분을 도서벽지 학교에서면 근무했고, 이들 학교들이 도시학교와는 달리 문화적 혜택을 전혀 못하는 것을 안까깝게 여겨 근무하는 학교마다 문예반을 만들고 청소년 축제를 기획하는 등 문화적 체험을 교육과 접목하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또한 초중고를 순회하며 문예강좌를 비롯 성교육, 백일장대회를 열어 도서민에게 문학예술을 생활저변에 심어주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는 95~98년 완도군 노화읍에 소재한 노화종고에 근무하면서 학생들은 물론 지역사회에서 보람된 일을 해 그 뜻을 잊지 못하고 지역주민들이 지난해 제2회 노화 읍민의 날에 그를 읍민의 상 명예선양부분의 수상자로 선정해 수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가 4년동안 노화에서 지내며 쌓았던 업적 중에서도 해마다 여름철에 섬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카훼리호에서 선상시화전을 펼친 일과 노화지역을 시집으로 엮어 ‘가삐리 가삐리 부여잡는 노화섬’이란 시집과 논문집 ‘노산 이은상의 시조고찰’, 사제 동행작품집 ‘가을의 소리’ 외 9개학교에서 18권을 출간했다.
그는 도서벽지에서 근무를 많이 했기 때문에 교장을 하려고 한다면 근무평점에 들어가 교장을 쉽게 할수도 있었는데 평교사를 고집했다. 그의 부인 양혜숙씨도 부부교사로서 똑같이 노화섬 등에서 근무해 교장승진을 할 수 있었으나 애초에 도서승진을 포기하고 교육적인 일념으로 그냥 평교사로 평생을 살겠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운동을 하면서 검찰에 불려 다니며 우리 교욱현장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실천으로 살아왔다. 그때 전교조 교사 6명이 사법당국으로부터 해직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해직당하겠다고 나서는 등 교육적 일념도 남달랐다.
그는 2000년 7월 당시 영광고 근무시절 방학중에 3학년 보충수업을 하다가 뇌경색으로 쓰러져 그후 8개월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본인의 의지와 가족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건강을 되찾았으나 지금도 여전히 통근치료를 하고 있다. 오랜 병마끝에 다시 찾은 건강을 찾은 환자를 간호했던 가족들의 간병기록을 문학작품으로 승화해 ‘투병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까지 4권의 시집을 발간했다. 첫시집 ‘아버님 교훈’을 비롯해 ‘나의 어머님’‘변두리 아이들’‘가삐리 가삐리 부여잡는 노화섬’을 펴냈다.
또한 1995~1998년 완도-보길도간 카훼리 선상시화전 4회와 1999~2002년 영광가마미해수욕장에서 여름철 해변시화전 4회 개최와 2002년 영광 법성단오제 초청 시화전을 열기도 했다.
그의 대외 입상실적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전국독서감상문 일반부 우수상을 비롯해 새농민문예상 최우수상, 새마을문고 독후감 최우수상, 전국고전읽기대회 문화체육부장관상, 전국저축백일장 최고상, 문학의 해 유공표창, 영광문화상, 대교눈높이 교육상, 완도군 노화읍민의상, 전남아동문학상, 전남문학상,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1993년부터 1998년까지 전남문인협회 사무국장과 90~2001년 전남시인협회장을 엮임했으며 현재 전남문인협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영광실업고등학교 교사로 근무중이다.
글=이재창 문화부장 겸 편집부국장
사진=정창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