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함께 베트남, 캄보디아 선교답사여행을 다녀온 김 장로님께서 중국-장가계 경치가
좋다고 휴식여행을 알선하여 줄 것을 요청하여 왔다.
우리들은 이 기회를 사용하여 제3차 해외답사여행을 계획하기로 하고 그 준비에 들어가게 되었다.
일행은 제1진과 제2진으로 나누고 제1진은 장가계, 서안 관광으로 짜고, 제2진은 실크로드
답사와 서안관광으로 구성하였다.
여러 여행사와 접촉한 끝에 서울의 열린여행사와 계약하기로 하였다.
서안행 항공편이 2002년 가을인 이 때에는 아시아나항공과, 중국서북항공의 신강항공,
그리고 “장안항공“이 있는데, 좌석이 모자라서 여간 애를 먹은 것이 아니었다.
여행을 요구하시는 분들이 모두 교인들이라 제한적인 조건이었다.
월요일 출발 토요일내로 한국 도착에 서안과 장가계를 관광하는 조건이라 매우 어려웠다.
다행히 중국서북항공의 신강항공편이 이용 가능하여 출발하게 되었다.
또한 김 장로님 측에서 13분이 신청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모두 바쁘신 분들이라 취소가
잇달아서 곤경에 처해있던 바, 요행히 우리 강동교회에서 목사님과 몇 분들이 동행할 것을
신청하여 주셔서 한 팀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스도투어의 김 승우 집사님께서 동행하기로 하고 경리부분을 맡기로 하였다.
모든 경비는 여행사에 납부하는 것을 제외하고 일정액을 추가로 받기로 하고,
여행을 마치고 인천공항에서 헤어질 때까지 일체 추가비용을 지불하지 않도록 하기로
원칙을 세웠다.
핸드폰을 본인의 번호로 호출이 가능한 것 1대와 홍콩전화번호의 것 1대로 2대를 로밍하여 휴대하였다.
특히 경비를 아끼지 않고 여행자보험을 추가로 가입하여 만일에 대비하였다.
처음 수행하는 사업여행이라 긴장하였으나, 순리대로 그리고 안전제일주의로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2002년 11월18일
여권과 비자를 확인하고 모두 14명이 인천공항을 출발하였다.
약2시간 비행하여 중국 서안(Xian)공항에 도착하였고 일행을 모두 통과시키고 나오니
미리 약속된 서안 현지여행사의 “방 철수” 씨가 마중 나와 있었다.
또한 실크로드로 떠나는 제2진을 맞을 또다른 현지여행사의 “현 동옥” 씨도 나와 있었다.
먼저, 제1진-장가계 팀을 “방 철수” 씨에게 인계하여 드리고, 저녁 식사하는 곳까지 가서
식사를 드시는 것을 확인한 후 우리들은 먼저 우루무치로 향하기 위해서 다시 공항으로
들어갔다.
미스 “방”의 안내로 우루무치에서의 현지 가이드와의 Meeting을 설명을 듣고 탑승하였다.
탑승하기 전에 Boarding 대기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어디서 우리나라말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확인하여 보니 4~5명의 남자 분들이 우리와 같은 비행기를 기다리는 눈치인 것 같다.
무작정 다가가서 수인사하니 사장이라는 사람과 이사, 부장 하며 소개하여 주는데,
좀 눈치가 이상하였다.
명함을 드리면서, 그쪽도 달라고 하니 어색한 행동이 참으로 얄굿다 못해 수상한 것이다.
그러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차! 이분들이 지하선교를 하시고 있는 분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 쪽의 성지개발 계획과 답사여행에 관하여 말씀드리고 조언을 구하였더니
그제서야 사장-목사, 이사-장로, 부장-집사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중국은 개혁, 개방이 되어 거의 모든 것이 시장경제로 이행하고 있으나, 정치와
종교(사상)은 철저히 금기시 하고 있는 관계로 선교사업도 지하에서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용기들이 대단한 것 같다.
그들은 서안에 이미 집회소를 갖고 있으며, 우루무치에 집회소를 개설하였는데, 그곳을
점검하려 간다는 것이다.
또한 둔황에도 개설을 추진 중이라고 한다.
연락처를 서로 교환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들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되었다.
지루한 시간을 목사님들과 함께 얘기하다보니 탑승시간이 다가왔다.
이륙 후 약 4시간 가까이 비행한 후 밤이 다 되어서 도착하였다.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이게 왠일인가?
실크로드의 변방도시로 생각하였는데, 호텔안내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몸싸움이
대단한 상태이었다.
중국이 이렇게 변하고 있다는 말인가?//
충격이었다.
91년, 94년, 99년에 이어 4번째 중국 방문이지만 이곳 서북변방지역에 이렇게 관광 붐이
일 줄이야,,,
지금 중국전역은 내수관광이 80%이상이고 외국인의 관광은 그 나머지정도라고 한다.
아무튼 항상 가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던 이곳에 왔으니 하여간 기분이 좋다.
약속된 이곳 현지 가이드인 oo씨가 나와 있었다.
이곳에는 한국인이 오지 않기 때문에 한국어 가이드가 없다.
따라서 영어로 가이드를 하고 받을 수밖에 없다.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가 고생하게 생겼다.
반갑게 악수를 하고 준비된 차로 호텔로 향하였다.
저녁은 비행기에서 한 걸로 때우고 피곤하기도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투르판으로 출발
하여야 하는 관계로 바로 가는 것이다.
호텔 로비에서 현지 여행사의 사장을 만나서 이후 경비를 지급하고 협조를 구하였다.
이 분도 여자인데 30대 초반이다.
사회주의국가, 특히 중국에서 여성의 사회적 위치가 대단하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번번히 놀라게 된다.
그들과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 후 방으로 가서 그대로 쓸어졌다.
11월19일
아침 일찍 서둘러서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해 치우고 나오니 가이드가 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유럽 등 소위 선진국에서는 호텔에서 아침을 아메리칸 뷰폐로
식사할 때 밖을 보면서 유유히 먹을 수 있지만, 이곳 중국이나, 동남아에서는 아침 일찍
허덕이며 출근하는 사람들이 지켜보는 유리창 안에서 식사하기란 여간 고민이 되지 않는다.
저 길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유리창안의 우리들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기름지고 깨끗한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아름다운 아가씨의 시중까지 받아가며 먹는
너희들은 무슨 종자인가? 하는 것 같다.
허긴 나도 어렸을 때에 유리창 밖의 처지에 서있었던 것이 흘낏 기억이 난다.
어제 서안에서부터 이곳 우루무치까지 오는 동안 내내 흐렸던 날씨 때문에 을씨런스러웠던
날씨가 오늘도 완전히 개이지 않아 상당히 춥게 느껴진다.
이곳이 추운지방이라고 알고 왔으므로 내복 등으로 무장하였으나 역시 으스스하다.
차를 출발하여 일로 투르판으로 향하였다.
중국은 고속도로 공사를 국가 주요시책으로 삼아 각 지역에서 경쟁적으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곳도 우루무치와 서안을 잇는 고속도로가 거의 완공이 되었다고 한다.
차량은 한국과 비교하면 거의 없다시피 하다.
천산산맥의 동쪽을 뚫고 지나가는 형태로 질주한다.
오른쪽으로는 투루판 분지가 끝없이 이어진다.
투루판은 신강위구르 자치구의 일부분으로, 1975년
7월 15일,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성립된 도시이다.
신강과 대륙간의 교통의 요충지로, 총 면적은 6.97㎢ 이며, 50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위구르족, 한족, 회족 등 25개의 민족이 살고 있으며, 그 중 위구르족이 전체 인구의 73%를 차지한다.
이 투루판분지는 이스라엘의 사해지구 다음으로 해발 -인 지역으로 가장 낮은 곳은 해저150m 정도까지 라고 한다.
그래서 겨울에는 찬 공기가 이곳 낮은 데로 모여서 영하40도까지 내려가고 여름에는
영상 40도까지 올라가는 혹한, 혹서의 땅이다.
반대로 비가 년 간 200mm도 내리지 않기 때문에 포도의 감미가 상당히 많기 때문에
옛부터 포도가 유명하다.
투루판의 포도제는 실크로드의 개통 2100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열리는 행사이다.
1990년 8월에 제1회 포도제를 시행하였고, 그 이후 매년 행사가 개최된다.
투루판 포도는 2000여년의 재배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100여 개의 품종 중 무핵백포도가 가장 유명하여 "중국의 녹색진주"라고 불린다.
또한 신선한 포도로 제조된 포도주와 건포도의 맛도 자랑할 만하다.
이곳 신강위그르 자치주는 지하에 유전과 지하광물이 무궁무진하게 매장되어 있는 관계로
중국이 이곳의 위그르인들이 독립운동하는 것을 철저히 진압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위그루인이 70%이상을 점하고 있던 땅이었으나 중국당국에서 정책적으로 한족을
식민시켜 우루무치같은 대도시는 오히려 한족이 80%이상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자치주의 인구비율은 한족이 50%를 넘기고 있다고 한다.
신판 인해전술이다 !!!
역시 주행중에도 가스유정에서 내뿜는 불길이 보이고, 또한 바람을 이용하는 전력생산용
풍차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우리나라 대관령에도 이러한 풍차발전기를 설치한다고 하였는데 비교하여 보아야 하겠다.
그리고 이곳 투르판 분지가 태고에는 바다이었다가 융기한 지역이라 거대한 소금연못
(바다라는 것이 어울리다)이 있어 소금공장이 아주 유명하며 현재도 가동 중이다.
주위는 (가보지는 못했지만) 달이나 화성에 온 것 같은 나무 한포기 풀 한포기 없는
정말 철저히 황량한 산 만이 이어진다.
정말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수 있을 까?
차안에 히터를 켰지만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냉기가 힘들어 휴게소에서 따끈한 라면같은 것을 기대하고 차를 세웠지만 휴게소안은 더욱 춥고 찬 음료수만이 있으니 어이할꼬?
물만 2병을 사서 다시 차에 오른다.
기념사진이나 한 장 찍고서,,,
2시간 넘게 달려 드디어 투르판으로 들어섰다.
기차는 이곳 투르판 시가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정거장이 있다.
먼저, 인터넷으로 찾은 이곳 지도를 보고 가이드와 일정을 협의하고 우리는 내쳐
고창고성으로 향했다.
시가지에서 서동쪽으로 40Km 떨어진 곳에 있는 고창고성(高昌故城 : 까오창꾸청)은
옛 고창왕국의 유적지로, 투루판시 동쪽에서 40㎞ 떨어진 화염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기원전 1세기에 고창벽이 지어졌으나, 13세기에 전쟁으로 훼손되었다.
교하고성과는 달리 흙벽돌로 축적된 사각형으로, 사원과 궁전 유적 이외에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파손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 성윤곽은 남아 있다.
고창고성은 장방형으로 매우 크고 길이는 5㎞ 이며, 외성, 내성, 궁성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개관시간은 09:00-21:00 이다.
시내에서 동쪽으로 2㎞ 떨어져 있는 소공탑(蘇公塔 : 쑤공타)은 목납촌(木納村)에 위치해 있는 신강 최대의 고탑(古塔)이다.
청대 명장인 액민화탁(額敏和塔)이 청왕조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울러 자신의 일생의 업적을 후세에 알리기 위해서 은화 7000냥을 들여서 짓기 시작했던 것으로, 액민탑(額敏塔)이라고도 불린다.
액민화탁이 죽은 이듬해인 1777년에 둘째 아들인 소래만(蘇來滿)에 의해 완공되었다.
탑외부는 전부 청회색이며, 44m 높이의 원형탑이다.
탑 안에는 72개의 나선형 층계가 꼭대기에 이어져 있다. 개관시간은 09:00-21:00 이다.
도착하니 을씨런스러운 입구에 몇 사람들만이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표를 사는 것도 소리를 질러 겨우 구입하였다.
입장료는 중국돈 20원/1인 이고 안으로 들어가니 당나귀가 끄는 마차가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다.
걸어 다녀도 된다고 하나, 바람이 부는 황량한 이곳을 어찌 걸어다니랴?
시간도 촉박하고하여 마차를 중국돈 20원/1인 으로 세내었다.
사진 촬영이 않된다고 하여 속이 상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보이느니 진흙으로 빚은 성곽의 잔해와 건물들로 추정되는 것들의 집합체이다.
손괴가 많이 진행된 것같다.
건조한 기후로 이나마 남아있다고 한다.
당나귀가 끄는 대로 흔들리고 가서 가장 높은 장소에 있는 대사원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후에 투르판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경교(네스토리아파 기독교)의 벽화가
발견 된 곳으로 우리들의 이번 답사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못내 아쉬워 마차를 찍는다는 핑계로 억지로 사진을 찍고 돌아 나오는데, 일본인 관광객인 듯 한 일단의 사람들이 마구 사진을 찍고 있는게 아닌가?
가이드에게 항의하였지만 저들은 곧 지적받고 혼이 난다며 한사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
우리도 인터넷에서 이곳에서는 관광객의 실수만 보았다가 고발하는 것으로 업을 삼는 사람들이 있다는 정보를 알고 왔으므로 참기로 한다.
유적지를 돌아 나와 손오공의 소설에도 나오는 화염산 기슭에 있는 백자극리극천불동(栢孜克里克千佛洞 : 뽀즈커리커쳔포우똥)으로 간다.
이곳은 투루판시 동쪽 화염산 아래에 위치한 것으로, 83개의 동굴 중 지금은 57개가 남아 있다.
동굴 안에는 40여 개의 벽화가 있는데, 총면적인 122㎡ 이며, 투루판에서 현존하는 석굴 중 가장 많은 벽화를 보유하고 있다.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된 집'이라는 뜻이며, 현재는 많은 석굴들이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손상되어 석비들이 서 있다.
도착하니 여기도 비수기철이라 썰렁하기만 하다.
입장료(20원/1인)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니 여기서도 사진을 못찍게 한다.
사진을 찍지 말고 생각나면 다시 와서 달러만 더 내고 돌아가라는 말인가?
볼 것도 없이 황량한 굴들만이 이어진다.
흥미를 못느끼고 돌아 나오는데 대만인 같은 이들은 또 사진을 열심히 찍고 있는게 아닌가?
또 가이드에게 항의하였더니 경멸하는 듯한 어투로 잘못된 행동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니 어이하랴?
마당에서 이 추운 날씨에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노인이 안쓰러워 5원이라도 추렴하고
나온다.
입구에서 너무 억울해 관리인에게 정식으로 사진 촬영을 허락하여 줄 것을 청하니
전경만 찍으라고 한다.
그건 누군들 못 찍으랴? 그러나 참고 몇장을 찍고 나오니 아직도 간간히 오는 관광객
(대부분 일본인이고 틈틈이 대만인들이 온다)을 기다리느라 낙타가 기다리고 있다.
탈 기분도 아니어서 그냥 차를 타고 돌아 나온다.
화염산은 급경사의 붉은 모래산으로 이 지방이 얼마나 타는 듯이 더웠으면 화염산이라
할까 할 정도로 타는 듯한 색깔이다.
그래도 제법 깊은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나무들도 있다.
그래서 이곳에 굴을 파고 벽화를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돌아 나오는 길에 있는 아사탑나고분군을 보지 않겠느냐고 가이드가 권했지만 이곳에서
출토된 미이라들은 모두 박물관에 있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거절하고 우선 점심을
들기로 하였다.
아사탑나고묘(阿斯塔那古墓 : 아쓰타나구무)은
고대 고창국과 당나라 귀족들의 공동묘지로, 대략 3-8세기에 걸쳐 만들어졌다.
아쓰타나는 "휴식"을 의미하는 위구르어로, '영원히 잠든 묘지' 또는 '휴식의 장소'라는 뜻이다.
1916년 외국 탐험대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서진태시 9년(273년)의 묘이며, 가장 최근의 것은 당대력 6년(772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개관시간은 09:00-21:00 이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한 식당에 들어가니 이미 준비된 식탁으로 안내한다.
우리는 두 사람인데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되어 커다란 식탁을 대하니 좀 미안하다.
손님들이 별로 없어 위안하면서 음식을 주문하고 특히 이곳 위그르인들이 좋아 한다는
양고기도 꼬치구이로 시켰다.
음식의 양이 너무 많아 거의 손도 못 대고 식사를 마쳤다.
모두 81원(\12,000이면 저렴한 편이다)을 지불하였다.
양고기 꼬치구이는 맥주와 잘 어울리는데 손가락 만하게 자른 양고기를 구운 것을
이빨쑤시개에 꼬치로 끼워져 나왔다.
먹을 때는 몰랐는데, 그날 하루종일 입안에서 냄새가 나서 혼났다.
식사 후 투루판 박물관을 찾았지만 휴관이란다.
아차! 싶었지만 어이하랴 후일을 기약하고 조금 떨어진
교하고성(交河故城 :찌아오허꾸청)으로 향하였다.
투루판시 서쪽 교외로부터 10㎞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는 고성 유적지로, 도시의 길이는 1650m 이고, 폭은 300m 이다.
이 곳은 고대 서역성곽 제국 중의 하나인 차사전국(車師戰國)의 도시로, 서역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의 중심이었다.
또한 진한시대부터 차사전국의 수도로 번영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인구 6500명을 가진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교통 요충지였다.
14세기 전반 원나라 때에 전쟁으로 훼손되었으나,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 보존이 되고 있는 미개간 도시이다.
최근 고고학자가 고성을 발굴하는 도중에 최초로 지하 사원과 차사국의 귀족무덤이 발견되었다.
아울러 바다 진주, 사리 등의 진귀한 물품들도 출토되었다.
개관시간은 09:00-21:00 이다.
도착하니 무슨 절벽 같은 곳에 커다란 대문을 세워놓고 그 옆에는 2층 팔각정을 세우고 관광객을 맞고 있었다.
입장료(30원/1인)를 지불하고 걸어 올라가니 고창고성보다는 그래도 훼손이 덜 되어서 볼만한 것이 있을 것 같다.
역시 진흙을 주종으로 축조된 성곽도시이다.
중앙대로(폭이 약 4~5m 정도로 왕복2차선이 힘들 것 같은 폭)라는 길을 따라 이곳저곳을
살피며 올라가니 중앙대탑이라는 건물에 다다른다.
고창고성은 물론 이곳도 개보수부분이 약70%이상이어서 감회가 그리 크지 않다.
그래도 채색벽화가 몇 군데 남아있어 그나마 감동을 주고 있다.
사진 촬영은 여기서도 금지되고, 역시 일본인들은 아랑곳없이 찍어 댄다.
다음번에는 가이드 없이 와서 마음먹은 대로 찍어가리!
내 마음에 담아 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 자위하며 돌아 나온다.
전체적인 조감도를 상상하니 2개의 물줄기가 이곳 입구에서 만나 한 물줄기로 합쳐지고
그 침식작용으로 길게 삼각형으로 절벽의 형태로 높게 남아진 형상이다.
이러하니 북쪽만 방어하면 동,서 남쪽이 자연적인 절벽으로 방어성벽의 역할을 하게 되니
천혜의 성곽도시를 조성하기에 안성맞춤이지 않겠는가?
나오는 입구에서 전체적인 사진을 찍고 그 팔각정 같은 건물안에서 사진책자를 산다.
교하고성, 고창고성 2개의 사진첩을 28원에 샀다. (이것만은 꼭 사기 바란다)
이제 돌아가는 것으로 알고 차를 올랐는데 다시 박물관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아까는 점심휴식시간이기에 휴관이었다는 것이다.
(낮1시부터 오후3시까지-이곳이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이해할 수 있으나 요새 같은
시기에도 휴관이라니!)
정말 다행이다 싶어 입장료(20원/1인)를 내고 들어가니 방문객이 없었던지 그제서야
부랴부랴 형광등을 켜고 난방도 시작한다.
공산주의의 낭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째든 열심히 보기로 하고 둘러본다.
모두 유심히 보아야 할 것 들이지만 특히 고창고성과 교하고성에서 출토된 것들과
아사탑나 고분군에서 발굴한 미이라들을 보아야 한다.
자세히 확인하지는 못하였지만 나중에 확인된 경교벽화는 너무나 반가운 것이다!
또한 미이라중에서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미이라, 갓난아기 미이라, 2층 미이라 등이 있다.
최대한 시간을 들여 보고서 나왔다.
돌아갈 길이 멀어 서둘러 차에 오르니 피곤이 엄습한다.
투루판지역을 당일치기로 우루무치에서 왕복하다니!
한국사람이 아니면, 아니, 우리들이 아니면 불가능할 것이다.
우루무치로 돌아오는 길은 주위 경치를 찍으며, 졸며 하며 왔다.
가이드에게 우루무치 신강위구르자치구박물관(新疆維吾爾自治區博物館
: 신장웨이우얼쯔츠취보우관)의 현황을 물었더니 지금 개보수 중이라 2003년 말에나
개관 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쉬움을 남기고 그 때를 기약한다.
우루무치시 서북로에 위치한 박물관으로, 1953년에 세워졌고,
외관은 위구르족 건축 풍격을 갖추고 있으며, 면적은 7800㎡ 이며, 역사문물, 혁명
문물, 민족문물 등의 5만 여 물품들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호텔에 도착하여 가이드와 운전기사에게 수고했다고 위로하고 돌려보냈다.
방에 들어가 간단히 샤워를 하고 잠깐 쉰 다음 다시 호텔을 나와 우루무치시가지를
사냥(?)하기로 한다.
방으로 들어와 간단히 샤워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호텔을 중심으로 위치를 확인 한 후 가장 가까운 불럭부터 한바퀴 돌아보기로 하였다.
이리도 추운 길에서 여기서 유명한 무핵백포도를 팔고 있기에 한번 사먹어 보았으면 하였으나 너무 추워서 포기를 하게 된다.
해내외에 널리 알려진 투르판 포도는 2,000여년의 재배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현존 100여개 품종 중 무핵백포도가 가장 유명하고 "중국의 녹색진주"라 불린다. 신선한 포도로 제작한 건포도 및 양조한 포도주는 뒷맛이 아주 좋다고 한다.
이름난 포도골은 포도 집산지로 사막 속의 진주타운이라 불린다.
1990년 제1차 신강포도축제가 개최된 후 해마다 계속 개최되고 있다고 한다
적당한 식당을 찾고 있는데 잘 보이지 않는다.
다시 다른 인근 불럭을 한바퀴 돌다보니 사람들이 북적이는 것이 호기심을 유발한다.
맛있는 집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일단 찜해놓고 더 좋은 집이 있을까 하여 한바퀴 더 둘러보다가 골목길로 들어가 보자고
하니 동행하던 김 집사님께서 한사코 만류하신다.
원래 골목길이 재미(?)있는데,,,,,
다시 찜했던 집으로 찾아가 들어가려고 하는데 손님인 듯한 친구 하나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코를 푸는데 아이고, 장난이 아니다.
길에다 냅다 누런 것을 ---!
만정이 떨어져, 그만 포기를 하고 근처를 더 어슬렁거리다 웬만큼 깨끗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소고기 삶은 국물에 편편한 칼국수를 띄운 것과 오뎅 비슷한 것인데 삶은 고기가 들어간
요리를 시켰다.
맥주와 곁들여 먹으니 제법 괜찮다.
말이 안 통하니 간신히 주문하였으나 먹는 법이나 기타 말을 시킬 수가 없다.
역시 호텔보다 불편하기는 하다.
그러나 재미는 이런 곳이 더 많다.
한국을 아느냐고 별 재주를 다하였으나 코리아, 월드컵 등 모드 동원하였으나 모르고 있고
“한꾸어” 라고 하니 알아듣는다.
그런대로 맛있게 먹고 비교적 저렴한 식사값도 지불하고 나오니 기분이 괜찮다.
오늘 일정은 이것으로 마무리 하고 내일 서안으로 향하는 길을 재촉하기로 하였다.
11월20일
아침식사후 미리 대기하고 있는 승합차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가이드에게 약간의 수고비를 지불하고, 기사와 같이 나누라고 하였더니, 너무나 고마워한다.
(나중에 확인하니, 우리가 이미 지불한 비용 중에 이미 다 포함되었던 것 같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기로 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이번에는 아침이므로 마음먹고 촬영을 하여야 하겠다.
이 비행코스는 천산산맬 남쪽회랑을 끼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을 따라 비행하고 있는
투르판분지안 빗물길
타클라마칸사막속의 길
것이다.
타클라마칸사막속의오아시스
따라서 천산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모두 촬영할 수 있는 것이다.
3시간40분을 비행하고 서안공항에 도착하니, 미리 약속한 오 영호 씨가 마중나와있다.
그가 가지고 나온 회사차로 우선 서안시내 답사를 하기로 하였다.
고선지 장군 유택지
고구려 장군으로 나라가 패망하자 당나라의 장군으로 변신하여 서역정벌에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 고선지장군의 유택지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고선지의 저택은 우의동로(友誼東路)에서 동사사로(東斜四路)로 빠지는 철안(鐵安)1가의 남면으로 추측된다.
그 주변에는 중국밀교의 총본산인 청룡사(靑龍寺)라는 사찰이 자리하고 있다고 하여 “지금은 일본종교의 하나인 청룡사 터”라고 정보를 주니 기사노릇을 하는 여행사 여직원이 어렵사리 찾아 간다.
황량한 들판일 뿐이다.
사진 몇장을 찍고, 앞으로 청룡사만 찾으면 된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천남생 유택지
집터도 역시 서안 벌판을 훤히 내려다 보는 위치에 있음을 보니 고개가 끄덕여 진다.
다시 돌아 나와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 남생의 유택지를 찾아 나선다.
형제들과 권력다툼을 벌이다 당나라의 침략도 모르고 나라를 망친 딱한 사람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제정세를 모르면 망쪼들기 안성마춤이라는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겠다.
지금은 도로가 사통팔방으로 나있어 도저히 기분을 느낄 수 없는 상황이다.
사진속의 노란색 빌딩과 앞쪽의 아파트모양의 건물사이로 골목길을 들어가면 그곳쯤이
천남생의 유택지이다.
남생의 저택은 지금의 만수북로(万壽北路)를 따라 가면서 왼쪽으로 난 첫번째 골목으로 들어간다.
현재 시안 시내의 장낙서로(長樂西路)에 있는 샹제리라(香格里拉) 호텔을 오른쪽에 둔 장락중로(長樂中路)의 왼쪽에 있다.
왕모중의 저택은 시기는 달랐겠지만 천남생이 살고 있었던 창안 동쪽 흥녕방에 같이 있었다.
현재는 시안 시내의 만수북로에서 왼쪽으로 첫번째 난 도로(금화북로·金花北路)로 들어가면 눈에 띄는 서도(西都)호텔 뒤쪽의 만년로(万年路) 중간쯤에 해당한다.
자료-
고구려 후예들의 집단 거주지 高麗曲
고구려 후예라는 말이 고구려족 혹은 고구려인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친밀하게 사용됐을 뿐만 아니라 당시 널리 사용된 사회통념적(社會通念的) 형식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구당서” 권106 ‘왕모중전’에서는 그를 ‘본고려인’(本高麗人)이라 했다가 장열이 쓴 “농우감목송”( 右監牧頌)에서는 ‘동국망왕지후예’(東國亡王之後裔)로 적었다.
창안의 지리를 이해하는 데 창안8경(景)과 창안8수(水)는 매우 중요하다.
또 이것들이 있는 장소마다 한국과 관련된 유적이 적지 않다.
그것은 신라의 구법승려들과
지식인·신선(神仙)·유학생들과 관련 있다.
우리 사학계에 이미 보고 된
신라관(新羅館),신라방(新羅坊)과 고려곡· 신라사
등은 우리 유민들의 집합체 혹은 거류지였다.
신라사종과 절터는 서안 인근의 안강현에 소재하고 있어 왕복 하루가 더 걸리니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고 , 회사차를 보낸 다음 우선 사업상으로 건축자재상가를 찾기로 하였다.
택시를 타고 도착 한 상가는 우리나라의 을지로 건자재상가를 연상시키는데, 전체 시장의 품질이 매우 열악하다.
우리가 가져 간 샘플을 보고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다행이 한 군데에서(최첨단 수준의 가게라 한다)아는 척 하였으나 역시 래핑작업 운운 하며
정확한 제작수준을 지적하지 못한다.
실망감을 갖고 오 영호 씨에게 넘겨주고 언제든지 관심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연락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제 공식적인 일은 모두 마친 셈이니, 저녁을 위해 위구르인들의 집단마을로 향하였다.
서안의 퇴근길의 러시아워도 참 대단하다.
교통규칙도 없다시피 하면서 나름대로 질서를 잡아 차량을 운행하는 것이 신기롭기만 하다.
우루무치에서도 인도의 푸른 신호등에서 건널목을 건너려다 돌진하여 오는 차량 때문에 혼비백산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나, 이곳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택시를 어렵게 잡아타고 위그르인 집단상가로 들어서니 입구에서부터 장터의 냄새가 물씬 묻어난다.
여기저기 구경을 하다 가장 이름났다는 음식점을 찾아 들어가니 마침 우리나라의 명동의 교자반점을 연상시킨다.
1층에 자리가 없어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위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과 나오는 음식이 모두
만두종류인 것 하고 영낙없이 닮았다.
만두는 안에 만두물이 들어있어 조심스레 들어내어야 하고 먹을 때는 그 국물이 뜨거우므로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국수종류가 나오는데 먹을 만 하다.
옆의 중국인 인듯한 젊은이들이 자꾸 우리들을 쳐다보니 신경이 쓰인다.
양도 많아서 간신히 해 치우고 나오니 칠흑같은 어둠이다.
오영호씨와 사업얘기도 있고 하여 간단히 목을 축일 장소를 안내하라고 하여 찾아가니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하는 가라오케집이다.
여행업계 전반의 내부사정과 우리들의 사업계획을 서로 나누고 협조하기로 합의가 되었다.
이 집의 기본요금은 중국돈 200원이고 기본으로 맥주가 서너 병, 그리고 원하는 안주가 1접시가 나온다.
노래방기기는 중국것인데 대부분 중국노래이다.
한국인이 많이 찾는 곳은 우리나라 노래도 준비했다는데 이곳은 중국인이 대부분이라 없다.
그러나 자막이 한자로 나와서 우리나라 讀音대로 따라 불렀더니 모두 놀라는 눈치이며 중국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묻는다.
어디서든지 언제라도 내 스타일대로 하면 무난히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신나게 내 스타일로 노래 부르고 즐겁게 지내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오영호씨와 서울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이제 우리는 좀 쉬었다가 새벽1시가 지나야 도착하시게 될 목사님과 그 일행을 마중하여야 한다.
잠시 쉬었다가 장가계에서 돌아오는 일행을 맞을 가이드의 연락을 받고 호텔 로비로 나가 마중을 준비하였다.
새벽2시가 지나서야 지치신 몸들을 끌고 한 분씩 내려오시는데,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어떤 장로님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표시하는데 몸들 바를 모르겠다.
우리 목사님께서도 말은 없으시나 비행기 탑승에서 너무 오래 기다린 점을 지적하신다.
목사님께서 이 정도이시면 상황은 최악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우선 지친 심신을 한시라도 빨리 쉬시게 하기위하여 서둘러 check-in하고 각 방들을
점검하며 한방, 한방 확인하였다.
우리들이 따라가지 못한 상태에서 불편을 끼치게 된 점을 사과하였고 빨리 쉬시라고 하고
우리 가이드를 불러 자초지종을 확인하였더니,
장가계에서의 날씨가 비가 부슬부슬 오는 기후로 제법 을씨러운 상태여서 추위를 타신 모양이고, 호텔의 난방이 여의치 않아 몸이 풀리지 않았고, 더구나 서안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의 탑승시간이 자꾸 지연되어 장장 6시간 가까이 대합실에서 기다리신 것이다.
우리는 가이드에게 격렬히 항의하였으나 그도 역시 장가계는 그쪽 가이드에게 일임하는 상황이라 시원한 해명을 하지 못한다.
날씨야 어떻게 하랴마는, 호텔의 선정을 다시 한번 점검하여야 할 것 같다.
하긴 그 쪽의 날씨가 추위가 없는 상태이니 호텔에서도 남장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점은 확실히 점검이 필요한 사항이다.
비행편은 서안으로 돌아오는 인원이 너무 많아 단체 할인항공권은 뒤쳐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점도 차후 확인사항이다.
하여간 가이드를 단단히 조여 놓고 내일 만나기로 하고 돌려 보냈다.
참으로 정신 없이 보낸 하루였다.
11월21일
아침을 들고 대기하고 있는 버스에 올라타고 서안 관광을 시작하였다.
먼저 “비림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은 서안시 남쪽 성벽 괴성루(魁星樓)아래에 있으며 비석이 숲을 이루고 있어
비림이라 한다.
비림박물관은 중국 전통적인 공묘(孔廟)의 기초위에 세워졌으며 중국고대비석을 제일 일찍 보존하고 명비(名碑)가 제일 많은 예술보물고이다.
비림은 북송시대(1087년)에 당나라 비석들을 옮겨오면서 형성되였는데 이미 900여년의 역사가 된다.
비림박물관에는 한(漢)나라때부터 근대의 각종 비석, 묘지명(墓志銘) 2300여개가 있는데 그중에서 1807개의 비석을 7개의 진열실과 그 주변에 전시하고 있다.
석각예술실에는 100여건의 한(漢)대부터 당(唐)대의 릉에서 출토된 석각예술과 종교석각예술이 전시되어 있다.
전면
후면
특기할 것은 제2전시실에 있는 “대진경교유행비”이다
대진경교유행비는 781년(당 건중 2년) 중국 서안에 설립된 비로 중국에서의 경고 역사를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탁본을 구입하여 보급하고 있으니 많은 신청이 있기를 기다린다.
또한 이 비의 모조비가 금강산의 한 절에서 발견되었는데,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매우 궁금한 점이다.
비림박물관의 많은 비석자료들을 지금도 탁본하고 있었으며 예외없이 그 탁본들과 출처를
알 수 없는 서책들, 그림들을 팔고 있었다.
너무 고가이므로 바가지를 쓰는 것 같아 나중에 정식으로 수입흥정을 하면서 구입하기로 하고 참았다.
다른 분들은 꼭 필요한 몇가지만 확인하여 드리고 구입하시게 하였다.
비림을 나와서 이어 양귀비를 위하여 당-고종이 지었다는 “화청지” 라는 별궁을 향했다.
이곳은 온천지이며 이 온천을 이용하여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온천욕을 중심으로 구성한 것 같다.
화청지는 옛날 도읍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리적위치, 아름다운 여산(驪山)풍경, 자연이 가져다 준 천연온천으로 역대 황제들의 발길을 끌었다.
주(周), 진(秦), 한(漢), 수(隋), 당(唐) 등 역대 봉건 통치자들이 이곳을 별궁으로 사용하였다.
화청지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로 유명하다.
역사기재에 따르면 기원 745년부터 755년까지 매년 10월이면 추위를 피하여 당현종이 양귀비와 여러 대신들을 대리고 화청지에 왔다가 이듬해 봄이 되여야 장안성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동안 정사를 처리하고 국사를 의논하며 사절를 접견하는 일들은 모두 여기에서 진행해야 했으므로 화청지는 점차적으로 당시의 정치중심으로 되여 버렸다.
천보14년(기원755년) 안사의란(安史之亂)이 일어나므로 현종이 성을 버리고 양귀와
그 자매를 데리고 서쪽으로 도망갔다.
이때로부터 화청지는 황페해지기 시작했고 정치, 경제의 중심이 바뀜으로 그의 특수성
지위도 잃었다.
화청지는 중국 현대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936년 12월 12일 중외를 들썽케 한 서안사변이 바로 이곳에서 발생하였다.
화청지에는 아직도 서안사변 당시 장개석(蔣介石)이 사용하던 오간청(五間廳)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건국 후 여러차례의 수리와 확대건설을 통해 비록 당나라때 번성할때와 비기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온천이 나오는 것을 분수대 형식으로 관광객에게 맛을 보이고 나머지 시설과 건물은 온천설비를 모두 제거한 것 같다.
지금의 공중목욕탕 정도의 욕탕규모이고 꽤나 사치한 면이 보인다.
그들만의 사치한 놀음이려니 하니 관심이 없서진다.
더구나 장개석은 자기가 황제라도 된 양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다니 공산당에게 패한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 생각된다.
정말로 정나미가 떨어져서 구경이 대강 끝난 것 같아 가이드를 재촉하여 나왔다.
다음 스케쥴인 진시황능으로 향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능은 높이 400m 정도의 야트마한(?) 야산 규모이다.
대부분이 정상까지 등산(?)하고 돌아 나올 때까지 몇 가지 유물을 노천에서 공개하는 것을
보았다.특히 진시황 당시의 한문 글자를 확인하는 것이 반가웠다.
지금의 한자와 별로 다르지 않으니 그들의 문명이 참으로 오래된 것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곳을 음산한 날씨 때문에 서둘러 나오니 길가에 고구마며 사진첩들을 파는 잡상인들이 떼 지어 달려든다.
조심하실 것을 당부하고 버스에 오르니 그래도 고구마를 사신분이 계신다.
크기도 우리나라 무우만한 것이 맛도 그런대로 이었다.
진시황릉에서 동쪽4km지점에 위치하는 시황제 병마용갱박물관(秦始皇兵馬俑坑博物館)까지의 도로는 내리막 경사길이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병마용까지 가 도착하니 인산인해이다.
오늘같이 비수기에 날씨도 안좋은 날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몰려드니 이제 중국의 관광산업도 폭발직전인 것 같다.
이들의 소득이 우리정도만 돼도 이 지구 전체가 중국인 관광객으로 뒤덮일 것 같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차례로 입장하였다.
관광객이 너무 많아서 순차적으로 인원을 제한하면서 입장시키고 있었다.
성수기에는 어떨까 ? 생각하니 이곳을 구경하려면 필히 비수기에 와야 할 것 같다.
세계적인 관광지인 만큼 도로포장은 깨끗하게 잘 정리되어있다.
현재의 중국 평균 물가로 보더라도 결코 싼 가격의 입장료가 아니다.
예상보다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지하에 이러한 규모가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2000년도 전에 이러한 지하시설과 조각을
하였다는 것은 놀랄 만 하다.
하도 보도되고 사진도 보고하여 감동은 덜하지만 실물을 직접 대하니 실감이 나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하리라.
병마용 갱
조상(진시황)의 독재와 횡포로 당시의 민중들은 고초가 극심했었겠지만 이로 인해 후손들이
관광객을 상대로 많은 이득을 취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까?
듣던 대로 현재 중국의 하나밖에 없는 자식들을 향한 일방통행식의 사랑이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재현되고 있다.
그 어린이들을 위한 이곳의 관광과 사진촬영과 구매행태가 가히 무조건적이다.
경제적으로 성장기에 접어 들어가는 중국인만큼 생활스타일에 많은 변화 계속되고 있는 한 단면이라 생각된다.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의 중국을 상상하며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라 생각된다.
이 병마용갱은 지금도 작업 중에 있으며 모두8개의 갱이 발견되었지만 현재 3개의 갱만 공개하고 있다고 한다.
병마용갱(兵馬俑坑)은 유적지 발굴현장 위에 건물을 지어 박물관으로 보전하고 있는 특이한 곳이다.
그만큼 일반 박물관 유리관 속에 전시되어있는 한두 점의 유품이 아니라, 전체 유적지
현장을 있는 그대로 보전하는 다이나믹한 현장 박물관이다.
병마용갱(兵馬俑坑)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는다.
1974년에 이곳에서 우물을 파던 농민이 우연히 도기로 된
병마(兵馬)를 발견하면서 발굴작업이 시작되어, 2천년 넘게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병마용갱(兵馬俑坑)이 세상 사람들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발굴작업이 계속되는 동안 1976년에 계속해서 새로운 유적지가 발견되어 현재 그 전모를 볼 수 있게끔 되어 있다.
처음 발견된 1호항은 동서 230m, 남북 62m의 직사경으로
항(坑)의 깊이는 5m로 무려 6,000체의 병마용군단(현재
출토된 것은 그중에서 약1,000체(! 20307;))이 있다.
병마용(兵馬俑)의 용(俑)이란 뜻은 사람이나 동물형태를 한
부장품(副葬品)으로 안이 비어있는 도자기 제품을 일컫는다.
이곳의 병용(兵俑)은 높이가 평균1.8m이고, 마용(馬俑)의 경우 1.5m로 모두가 일렬로 정리하여 동쪽을 향해 서있는 모습이다.
이는 서쪽4km지점에 있는 진시황릉을 수호하기 위한 상징적인 방향이라 추측된다.
모든 병마용(兵馬俑)은 실제의 병사와 말 크기를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병마용의 각기 형체나 표정이 제각기 다른 것으로 보아 실제의 모델을 두고 만들어졌음이라는 추측이
강하다.
이밖에 전차대과 사령부 등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완전한
지하 군단이 진시황의 영생을 지키게끔 조성된 듯하다.
차례로 돌아가며 둘러보는데 미술에 조예가 있는 사람은
하루 온종일을 보아도 모자랄 것 같다.
일반인도 반나절은 잡아야 하나 우리들은 모두 촉박한 시간이라 대강 둘러보고 나온다.
하루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에 나와서 버스에 오르니 고단한 하루였다.
강행군을 하는 일정이 무리인 것 같다.
저녁식사를 위하여 안내받은 곳은 중국-서안의 전통적인 교자만두(餃子饅頭)요리점이었다.
각종 만두요리가 기기묘묘하게 여러 종류로 식탁에 앉은 사람 수에 맞추어 코스로 만들어 나오는데 볼만하였다.
개개의 만두는 엄지손톱만한 크기로 요기가 안 될 중 알았는데 무려 10여개의 접시가 비워지는 동안 배가 상당히 부르게 된다.
예전에는 300여개나 있었다는데 요즘엔 18가지 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모두 재미있어 하시고 만족스러워 하시니 다행이다.
식사를 마치고 배부르니 이제는 여흥을 즐길 시간이다.
예약을 한대로 당악을 연주하는 공연장으로 향하였다.
관광이라면 싸구려로 관광지만 데리고 다니는 행태에서 조금이라도 탈피하여 보려고
특별히 일인당 U$20.-씩 투자하여 주문한 우리 “그리스도투어”의 특별한 스케쥴이다.
공연장인 중국협서가무대극원(Shaanxi Grand Opera House Xian China)에 들어서니 이미
관객들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여기도 미국의 라스베가스 극장처럼 식사를 하고 공연하는 시스템이었다.
우리들은 미리 외부에서 식사를 들고 왔으므로 기본으로 제공되는 간단한 음료만 상 위에 놓고 공연을 기다렸다.
그런데 극장 맨 앞자리에 지정받아 자리를 잡고 기다리다 보니 중간의 가장 좋은 자리는
서양인들이 독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불같이 화가 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가이드와 안내인에게 정식으로 항의하여 그런대로
조금 뒤로 이동하였다.
고개가 그래도 덜 아플 것 같아서 위안이 되었다.
이 공연(Tang-Dynasty Palace Music and Dances)은 당나라시대에 궁중에서 연주되었던
일종의 오페라형태의 가무극형태이다.
화려한 의상과 신기한 악기도 볼 만하지만 은연중 표현되는 연주자들의 자존심을 볼 수
있는 것이 이 나라의 음악미래가 결코 비관적이지마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악기 하나로 각종 새소리를 기본으로 하여 연주하는 남성연주자는 수준도
수준이려니와 자신감에 차있는 태도가 맘에 들었다.
모두들 좋은 시간을 보내셨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다.
피곤한 상태에서 더구나 식 후이니 졸릴 만도 한데
한분도 조는 분이 없었던 것 같다.
나오면서 아들에게 줄 녹화 CD를 1장 샀다.
이제는 피로도 풀 겸 의무적(?)인 옵션상품인 발
마사지를 하여야 한다.
이것을 빼려고 하였더니 안 해도 돈은 내야 한다고
하였다.
억지로 가는 코스이니 좀 어이가 없다.
한 건물로 들어서니 순전히 이것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업소인 것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너무 사람이 많아서 대기하고 있다가 여성분들이 한방으로, 남성분도 한 방에 같이
자리 잡았다.
젊은 처녀애들이 발을 중점으로 마사지하는 것인데 그래도 이들이 고소득을 올리는
처지라 한다.
고정급료는 없고 손님들이 주는 평균 1달러가 주 수입원이라고 한다.
한사람을 약 1시간정도 마사지 하는데 한달 증국돈 2,000원 이상도 가능하니 그럴 만
하다.
우리는 일체의 추가경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기 때문에 일행들에게 팁을 주지 말라고
하였고 가이드를 통하여 일괄지급 시켰는데 이들이 그녀들에게 주지 않는 눈치였다.
후회가 막급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반드시 지급할 것을 가이드에게 단단히 약속시키고 씁쓸한 마음으로 나왔다.
다음번에 다시 가게 되면 반드시 들러서 확인하고 못 받았다면 그때라도 지급하리라.
정말 피곤하신 것 같은 일행들을 모시고 호텔로 돌아와 각 방으로 안내하여 드리고 확인 후
우리들 방에서 가이드와 다시 한번 점검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11월22일
아침 8시50분 항공편이라 서둘러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부리나케 공항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이게 왠일이냐?
짙은 안개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으니 버스가 달리지를 못한다.
예정대로 가도 빡빡한 시간인데,,
그래도 이 기사 분은 달릴 수 있는 한 달리는데, 이곳의 그 지독한 교통 무질서와 같이
길을 건너는 사람들이 있어 아찔하기만 하다.
다행히(?) 이곳을 출국하는 모든 관광객들의 버스가 동시에 주행을 하지 못하는 관계로
이럴 때는 비행기도 출발을 지연한다고 하니 그것에 희망을 걸어본다.
하여간 교통무질서는 알아줘야 한다.
양보 없이 차량의 머리를 들이미니, 가뜩이나 안개로 서행하여야 하는 상태에서 모든 차가
올 스톱할 수밖에,,,
핸드폰도 이곳이 저지대 분지이라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몇 분에게는 서울과 연결을 해드리고 가이드에게 그 마지막 희망을 확인하니
비행기도 관광객이 모두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였다고 한다.
하긴 텅 빈 비행기로 인천갈 일이 없으렸다 !
우여곡절 끝에 공항에 도착하니 오히려 탑승시간이 남는다.
무료한 시간을 쇼핑으로 보낼 겸 둘러보는데 도무지 살 것이 없다.
사지책자 하나와 이 지방에서(정확히는 투루판) 유명한 건포도를 몇 봉지 샀다.
특히 사진첩 한 개는 아무래도 바가지를 쓰는 것 같아 에누리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등 뒤로 판매원의 항의소리만 들었다.
그래도 바가지는 쓸 수 없다 !
시간이 되어 탑승하여 자리를 잡고 사고없이 인천공항에 도착하기만을 기도한다.
이륙하고 다시 한번 일행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잠을 청한다.
일행 중 한 분께서 열심히 대화하시는 상대편이 젊은 여성인데 어떤 여행사의
윤 원신 씨다.
이 여행사는 기획여행상품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라고 하시며 굳이 소개를 하신다.
명함을 교환하고 일이 있으면 연락하기로 하였다.
이 일정을 준비하여 주시고 아무 탈 없이 돌아오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또한 우루무치에서 발견한 경교벽화와 경교비석을 직접 확인하는 기회를 허락하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서방기독교로부터 배척당하고 동방으로 전도를 확장하였던 경교의 전도 루트 중 우루무치와 서안을 연결하는 라인이 확인된 셈이다.
이번에 가보지 못한 아프카니스탄 접경의 카슈가르와 페르시아를 거쳐 안디옥까지의 라인을
다음기회에 벼르기로 한다.
여러 가지 불비한 준비에도 참아주시고 기쁜 마음으로 따라와 주신 일행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함께 다음 기회가 허락된다면 좀 더 기쁜 시간이 되는 여행을 안내하리라 다짐한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는 모 목사님을 만난 것과 우리들의 여행거점마다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는 기적이 일어나 주기를 바라며 이 모든 일정을 감당하여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