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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작21 원문보기 글쓴이: 창작21
<초대시인>
풀밭에서의 저녁 식사
조명제
내 살아 있음의 기쁨이여! 이것이 끝물 사랑의 발설법이던가. 해질녘 캔맥주와 줄김밥 사 들고 루비콘보다 아름다운 강변으로 간다. 먼저 온 데이트족들이 자신들의 반짝이는 사랑 넓이만큼씩 풀밭을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에 알맞은 사랑만큼의 터를 꾸미고 풀잎 위에 앉는다. 날은 아직 훤한데, 저만치 제일 높은 빌딩 허리춤에서 반달이 희미한 얼굴로 삐져나온다. 빡! 캔을 따고 촉촉한 눈웃음 섞어 틱! 부딪치고, 부풀어 오른 사랑의 거품을 쭈욱 들이킨다. 식사와 안주, 하찮은 김밥이 이리 요긴할 줄이야! 저녁의 미풍을 타고 여기저기 어스름이 가등(街燈)을 켠다. 가을을 검색하자 선선한 바람이 분다. 갑자기 고기가 당긴다. 겨울잠에 들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내 몸의 센서가 먼저 알고 일러 주는 것이리. 문화일보 1면 사진 기사가 가을을 전한다. 물두꺼비는 짝짓기 꼴로 동면에 들어 7개월을 지낸다고. 물두꺼비는 좋겠다. 너희들은 지겹지도 않니? 한 사람과 한 평생 산다는 거 지겹지도 않아? 한 5년이나 10년마다 결혼을 갱신해야 좋잖겠니? 옥시토신의 유효 기한이 길어야 3년이라잖아! 풀잎 끝마다 멀리 도회의 오색 불빛이 이슬처럼 맺힌다. 맞댄 두 이마 아래의 키 작은 풀잎들이 거짓말처럼 고개를 꺾어 까-딱- 인사을 한다. 저들도 심상찮은 사랑의 공기를 느끼는가. “이 봐! 풀들도 우리 사랑에 경의를 표하는 걸!” “불륜인데두요?” 라고 그네는 말하지 않았다. “불륜의 사랑은 위대한 거야.” “하기사, 세계문학사의 모든 위대한 소설의 사랑은 다 불륜이라고 설파해 왔죠. 당신이 젤루 좋아하는 「닥터 지바고」도 그렇지만요.” 황운(黃雲)을 지나 버스에서 내려서 걷는 광덕사 가는 길은 참으로 호젓했다. 절 문을 지키는 늙은 시조(始祖) 호두나무는 벌써 잎을 다 떨어뜨리고 회갈색의 빛나는 가지로 한 줌이 아까운 햇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습작시마다 핀잔을 들은 시인 지망생 이쁜 코 미시 제자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절친한 미쓰 학우 앞에 대고 나 들으라는 듯, “시를 쓰려면 눈물의 뼈도 볼 수 있어야 한대 글쎄!” 한다. 아직 더러 잎 달린 젊은 호두나무숲을 지나 골짜기로 가는 오솔길 향긋한 가을 잡목들이 저마다 가지들을 시샘하듯 내밀어 우리의 허리께를 치며 인사를 한다. “이 봐! 나뭇가지들이 우리의 사랑을 반기는 거!” 눈이 작아서 예쁜 여자가 대답한다. “거 참, 신기하네요!” 바빌론강 기슭 거기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리는 울었도다. 그 언덕 버드나무 가지 위에 우리의 수금(竪琴)을 걸어 놓고서* 밤 강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신비로운 큰 눈의 그네는 풀밭에서의 저녁 식사를 기억하고 있을까. 내 살아 있음의 슬픔이 기쁨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성경』의 「시편」137에서 인용.
가도 가도 끝없는 ―천한봉 다완 ‘斗斗屋’
조명제
지구(地球)의 붉은 땅에 맨 처음 밭갈이한 이 누구인가.
태평양(太平洋)은 너무 먼 데 있고 울란바토르에서 장안(長安)으로 건너가는 고비사막에는 하늘이 너무 넓어 하늘이 없다. 젖빛 같은 은방울꽃은 멀리 베링해 쪽으로 가 버렸는가. 삭사울나무들이 몸을 말아 이따금 공처럼 굴러가는, 가도 가도 끝없는 과벽탄(戈壁灘) 쌍봉낙타는 죽어서 모래가 되고 기다림의 잠시가 모여 억 년 그리움이 되는데 노을 속 천 년 미이라는 언제 잠 깨는가.
조랑말 발굽소리 들리는 없는 하늘 어느 별에서는, 거짓말처럼 한낮에도 별이 뜬다는 소백(小白)의 하늘 밑 찻그릇 굽는 땅 문경(聞慶)이 보일까. 늙어도 늙지 않는 그 마을의 한 늙은 도공이 흰 도포자락 날리며 꿈 속처럼 지구별의 황막한 사막을 건너는 게 보일까. 보일까.
조 명 제(趙明濟)
• 경북 청송 출생. • 중앙대학교, (同)대학원 및 우석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 1985년 월간『시문학』시 추천완료, 계간『예술계』제3회 문화예술신인상(문학비평 부문) 당선으로 등단. • 중앙대, 한국교원대 대학원, 백석대 대학원 등에서 문학론 강의, 현)안양대 교육대학원 출강. 계간『문예운동』편집주간. • 제1회 일지창작지원금 공모 당선(연작장시). 제17회 중앙대문학상 수상. • 한국시문학문인회, 한국현대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비평문학회 회원. • 한국시문학아카데미 회원, <시현장> 동인, 나오리 예술[도예]협회 회원. • 저서: 시집『고비에서 타클라마칸 사막까지』,『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노래』, 동인시집『남북시』(5집 간행). 문학비평집『한국 현대시의 정신 논리』, 문학사론『한국문학의 흐름과 이해』(공저). • 문학과 도예:「神의 몫과 窯變」,「한국 도예의 전통과 도전」등 15편.
눈구멍
유 승 우
빛만 드나들 수 있는 창입니다. 공기마저도 드나들 수 없는 유리와 같은 마음의 창입니다. 창 안을 엿보다가 맺힌 이슬처럼 눈에 맺힌 눈물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어둠이 떠나는 새벽에 이슬이 맺히듯, 슬픔이 떠나는 눈가에 맺히는 눈물은 마음의 창을 맑게 닦아 줍니다.
귓구멍
귓구멍은 소리를 먹는 입입니다. 먹기만 하고 뱉어내지는 않습니다. 단 소리든 쓴 소리든 가리지 않습니다. 단 소리는 마음에 들어가 잠들고, 쓴 소리는 잠 못 들고 서성이다가 입으로 나와 남을 할퀴고 덤빕니다. 귀는 먹기만 하고 싸지 않으므로, 누구의 마음도 더럽히지 않습니다.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
김종희
그는 시간을 잃어버렸다 그가 떠나온 우주의 하늘에 대하여 너무 오랫동안 골돌히 생각한 탓이다
이제 그의 낮과 밤은 텅 비었다 어제의 기억도 없고 기대할 내일도 없다 그는 하나의 빈 공간일 뿐이다
시간을 느끼지 못하는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오직 지금 뿐이다 언제까지나 지금 뿐이다
보이는 것은 모두 스쳐가는 풍경일 뿐 30초도 못가는 그의 기억은 그의 뇌에 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아내는 언제나 처음 보는 사람 딸은 보아도 누구인지 모른다 아무리 가르쳐주어도 모른다
아내가 오려준 색종이별 손에 들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그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며 보고 있다
그가 모르는 붉은 하늘에 붉은 구름 흘러간다
자동문
최금녀
제물에 벗어부치는 계집처럼
손만 닿으면
스르르 치마끈 풀어놓는,
종일
열었다 닫았다
성업 중인.
‘세한도’
- 화가와 뮤즈(8)
김철교
솔잎마다 시(詩)들이 눈꽃으로 달려 있다 찬바람에 뼈가 시린 것보다 마음이 더 춥다
글지식도 집안배경도 곳간 가득한 쌀도 세상의 힘을 만들어 내는 양념은 될지라도 영혼의 허기는 달랠 수 없다
‘추운 겨울이 되면 낙엽은 떨어지나 송백은 아직도 푸르르다‘1)
찬바람이 우리 마음 구석구석 후벼파는 황량한 벌판 초가집 곁에 서있는 몇그루의 소나무 새파랗게 추운 하늘 아래 그러나 송백이여 그대는 진실로 행복한가?
1)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논어에서 인용한 추사가 세한도에 쓴 글씨의 일
부.
바람 속 풍경 하나
김 상 경
달의 시장 월정로 한 모퉁이 젊어 낯설은 대춧빛 아낙이 바람의 가운데서 수세미, 때밀이, 손수건, 양말 몇 켤레, 대빗을 놓고 아까는 긴 머리 넌지시 보더니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어쩌면 저 삭풍의 국경선을 넘어온 조선 아지매일까 아니면 남도 물길 따던 그 섬의 흑단머리 고운 아가씨였을까 어린 것들이 빈 우유통을 빨고 하마 올까 울다 지쳐 잠든 포름한 낮달이 살며시 들여다보고 간 그 습습한 지하의 - 일품팔이 절름발 서방님은 외지로 몇 날 출장가고 외눈박이 형광등만이 깜박깜박 눈 빠지도록 기다리는 달맞이고개 그 집의 여인일까 주머니 속 이황 할배 고름 잡고 만지작거리는데 면경 앞에 동백기름으로 빗어 올리던 어머니 대빗이 눈에 차 들어온다 알미장 터 삼십리길 머리에 한 보퉁이 이고 대추땀 흘리며 기우뚱 기우뚱 차창 밖으로 어머니가 걸어가신다 그놈의 아스피린 몇 알 무슨 보약이라고 아껴두었다 당신 대주 몰래 먹이셨다는 - 하여 당신은 그 주사 한방이면 뚫는다는 핏대 막혀 그 징하다던 말씀 끊어버리시고 존심상 스러워 끝내 고향을 두 손 저어버리시고 상여타고 옛날 그 집 훌쩍 왔다 가신 어머니의 대빗
“얼마요?” “이천원이에요.” 계면쩍 얼굴 붉어지는데 “그것밖에 안되요?”
세상은 봄인데도 바람은 겨울을 울고 백수 왕자는 그 속에서 술취한 그 날처럼 ‘봄날은 간다’ 카사블랑카에서 불러댔지 “...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
<영역시> 서펀타인 호수에서 그리는 수채화
김철교
애써 감춘 몸짓으로 흐르고 있는 이 세상으로 떠밀려온 슬픔을 아침 정원이 나무들을 데리고 와 다독이고 있다
부자 집 따님 버지니아 울프가 알 수 없는 외로움에 함께 가슴앓이 하던 산책길 풀꽃들도 저 세상으로 되돌아간 그림자 못 잊어 이슬로 글썽이고 있다
셸리의 아내 웨스트브룩은 남편의 가슴팍에 자리 잡은 바람구멍을 막지 못하고는 호수에 몸을 던져 수련 꽃으로 떠있고
서쪽 궁전 주인이 된 다이애나 먼 이국에서 꺾여서는 이곳 빈 정원에 흰 국화꽃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다
동쪽 정원에는 젊은 연인들이 부둥켜 앉고 어젯밤을 홀짝거리며 호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다
오가는 관광객만이 이곳저곳 이승을 카메라에 담으며 가슴 짠할 뿐 백조가 슬픈 이야기는 다 주어 먹어 버렸다
호수위에 조용히 떠 있는 꽃봉오리들은 숨진 여인들을 닮으려 애쓰지 않아도 옹골찬 외로움으로 아름답기만 하다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셰리의 조강지처가 남편의 바람기가 싫어 몸을 던진 서퍼타인 호수(Serpentine Lake)를 경계로, 서쪽 켄싱턴 가든(Kensington Gardens)에는 다이애나(Diana) 황태자비 궁전이 있고, 동쪽은 하이드파크(Hyde park)다. 서퍼타인 연못 남쪽 자락(22 Hyde Park Gate, Kensington)에는 템스 강에 몸을 던진 버지니아 울프가 태어나 젊은 시절은 보낸 곳이 맞닿아 있다.
Painting with Watercolors at the Serpentine Lake
A morning garden that brought its trees Are comforting the barely concealed grief Which has been flooding into the world.
Flowering plants on the walkway share the burning heart That Virginia Woolf, the daughter of renowned parents, Suffers from mysterious depression Tear in dewdrops Not forgetting her shadow in heaven as well.
Harriet, the wife of the poet Shelley, Who failed to fill a hole in his bosom made only for affairs, Floats as a lotus flower on a pond having drowned herself,
Princesses Diana, a landlady in the palace of the west, Who was plucked in a foreign land, Has a lingering illness as white chrysanthemum in the empty garden.
In the east garden young couples cuddling together Are looking at the clouds floating on the pond, Sipping last night.
The swans pecked at sad stories, Only tourists take these world pictures here and there Feeling a little bit bitter.
Buds floating silently on the pond Don't struggle to resemble the dead women, But even their sturdy loneliness looks gorgeous.
* The wife of Shelley, the English Romantic poet, drowned herself in the Serpentine lake due to her husband's affairs. In the western boundary of the lake there is the late princesses Diana' palace in Kensington Gardens, and the east of Hyde park lies immediately to the lake. The south of the lake is contiguous with a place Virginia Woolf, who threw herself into the River Ouse, was born and spent her youth.
손주 놈의 소우주
김송하
봉긋하다. 동산에 떠오르는 보름달 닮았다 중턱 쯤 올라왔다. 은은하게 비춰오는 호수의 잔물결에 달빛 빙긋이 웃는다.
그러거라 거기가 너의 소우주니라 큰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정거장 이니라.
실컨 놀다 나오너라. 놀라움으로 가득찬 세상이 널 기다리고 있느니라.
하하하하! 야이 녀석아! 물탕 튄다! 하하하하!
-6개월 된 봉긋한 며눌 아이를 보며 -
봄바람
김송하
이 논네가 봄바람 났나 뭣 때미 혼자 쿠쿠거리고 지랄이댜?
그럴 일 있제!
뭔디?
그럴 일 있대두!
증 알고 싶으믄 일루와 귀 좀 대 봐 너 한티만 말하는 겨 남덜 한티 애기하믄 절대 안 도ㅑ! 알았지?
나 쿠쿠쿠~
네 달 반 있으믄
할아버지 된~댜!
하하하하!!
변 명(辨 明)
愼 協
때때로 몸이 무거워 도마뱀이 제 꼬리를 잘라내듯 나도 내 몸 자르고 이름 두 자로 산다.
다섯 잠 후 고치를 틀면 여섯 줄로 끝나는 누에의 생리 옷 벗으면 우리는 단 두 줄 몸 가리울 고치를 지을 뿐
갑자기 하늘이 커 보이면 나는 시간 뒤에 서서 별들을 헤아린다. 내 이름자 묻을 하늘 밑에서
色
김찬옥
봄이 왔다고 또 다시 봄이 돌아왔다고 어화둥둥! 언 나뭇가지들이 바글바글 술을 빚네 대문 밖까지 연둣빛 누룩냄새가 진동하네
장롱 문을 열고 입고나갈 옷이나 한 벌 골라 볼까
.. 빨강은 너무 빨강이라서 .. 노랑은 너무 노랑이라서 .. 파랑은 너무 파랑이라서 .. 검정은 너무 검정이라서 늘어진 몸매가, 골 접힌 얼굴이 옷장 속도, 거울 앞도, 너무 싫은 것뿐이네
한 번 가버리면 그만인 맘으로 재껴 논 것들을 다시 뒤집어 보세
어화, 두둥실 色이 떠오르네
빨강은 빨강으로 --- 노랑은 노랑으로 --- 파랑은 파랑으로 --- 검정은 검정으로 --- --- 바닥으로 가라앉았던 빛이 두둥실 떠오르네
거울에 비친 내 어머니 같은 얼굴이 두둥실! 심장 안에 갇혀 긴 잠을 자고있던 물고기 한 마리 팔딱팔딱!
어화둥둥! 두둥실 봄을 찾아 나서야지 집나간 것들을 다시 찾아 와야지
나의 봄이 먼 곳으로 아주 떠나기 전에,
아내의 동창생
최창순
청운면 다대리 농장 매달 둘째 주 아내 소꿉친구들 모임 지난날 못 다한 우정 모두다 풀어 놓네
아내 동창생 열 한명 여주, 춘천, 횡성, 안산, 서울서 온 여인들 둘러앉으면 초등학생으로 돌아가네
쌍둥이 엄마는 홀딱 벗고 춤춰도 볼 사람 없어 좋다며 모두 하나 되어 아들 딸 자랑 남편 흉보며 해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다 새벽이 오면,
먼 산을 넘어오는 뻐꾸기 소리 한소쿠리씩 담아서 집으로 가는 여인들 ,
가슴에 쌓인 무거운 스트레스 한 아름씩 밭고랑에 풀어놓고들 가네
임플란트
김 기 덕
방풍림을 흔들며 치통처럼 바람이 불었다.
피고름이 고인 갯벌을 훅훅 입 냄새 풍기며 달려온 태풍에
기둥이 뽑힌 집들은 아랫도리부터 허물어졌다.
파도에 물어뜯긴 모래언덕에 할아버지 수염처럼 늘어진
허연 뿌리들이 허공을 향해 말미잘 같은 촉수를 흔들었다.
쓰레기 매립지를 파고 철빔을 박았다.
지반이 약한 탓에 건축 전문가들은 조립식 건물을 권했지만
내겐 어떤 태풍도 견딜 반영구적 빌딩이 필요했다.
꽃 같은 웃음을 보여주던 마른 대궁들을 뽑아내고
들뜬 땅을 다진 후 콘크리트 하여 세운 든든한 믿음의 뼈
아버지, 날마다 성현의 말씀 뼈마디에 새겨 곱씹으라 했는데
무너진 고기토의 집에서 상앗빛 말씀들을 갈고 닦지 못했다.
악취의 언어들이 쏟아지고
한 순간 마른 풀잎들은 바람에 흩날렸다.
뼈 속에 뼈를 심고서야 말씀의 뿌리들이 가슴에 사무쳤다.
몸에 심겨진 206개의 뼈들이 다 진리였구나.
마을 입구 옹벽이 새 단장을 했다.
폐차들이 붉게 녹슬고
빗물과 함께 토사가 넘쳐나던 담벼락,
허물어진 골과 틈을 채워 성형을 했다.
꿈을 디자인한 타일들의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옹벽이 웃는다.
초특급 태풍에도 무너지지 않을 옹벽의 신념들
동네가 훤하다.
우음도(牛音島)
김리영
더 살아야 할까 그래도 살아야겠다. 세차게 몸이 날려도 다시 휘감는 것은 바람 뿐 돌아서 온 도시의 연기는 보이지 않는다.
경비행기 날아갈 때마다 옷깃 풀어헤쳐 울부짖지만 신발 벗어던져도 기어오를 언덕이 없는 황혼빛 섬. 날짜변경선을 넘어 두 번씩 맞은 청춘의 크리스마스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먹던 아침밥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걸 몰랐다. 그 땐 땅이 아니던 기름기 없는 흙더미에 올라 꺼져드는 발목 끌어올리며 춤을 춘다. 바람이 몸을 저어 돌리고 염분 빠진 황무지에서 억수로 자라온 잡풀들이 목을 찌른다. 팔 높이 뻗어 휘청이며, 곧 석양이 오고 피할 수 없는 역광에 키가 묻혀 쓰러지기라도 하면 안겨도, 안겨도 끌어안고 놔주지 않는 서해안 바람목에서 천 조각을 쌩쌩 바람에 휘날리며 달아나지는 말아야지.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웃으며 춤 춰야지. 이왕 발 빠진 섬에 붙잡혀 질척하게 살고픈 꿈을 키워 나가야지.
이정표 없는 벌판에 맨발로 들어와 벌린 춤판 진 바닥을 딛고 훨훨!
원효봉
김규화
도봉산을 뒤꿈치로 밀어내면서 코가 발끝에 닿는 돌계단이 가파르다 돌계단에서는 뒤를 보지 말아야 지옥의 낭떠러지는 눈을 감아야 다만 백팔배 염주만을 굴려야지
소돔과 고모라에게는 이 말이 안 들렸을까
맑은 햇살이 얌전히 내려앉는 가을 아랫마을에는 흙먼지가 부옇게 꽃피고 단풍에 안긴 원효가 산꼭대기에 앉아 돌손바닥 하나 펴고 서너 중생씩만 올라오라고 한다 털신 발자국을 움푹움푹 찍어놓고 있다 내 신발 그 발자국에 맞추어 흔들리는 다리 곧추세운다
우리동네 줄타기곡예사는 원효를 만나봤을까
예쁜 요석공주가 앞에서 보고 있을까
오늘 32
김율리아
구름이 삼켜버린 햇발 하늘이 내려앉는 공원 보이지 않는 푸른 잎
바람의 늪을 지나 초록 문을 연다 소록소록 돋아나는 어린 잎 기댈 언덕 하나 돋는다
누가 용의 비늘을 보았는가
임 솔 내
속 깊은 대야산 골짜기 너럭바위 등짝에 거치른 용 비늘이 옥류의 물소리를 듣고 있다 소沼에는 옥구슬 흩뿌린듯 속이 훤하다 돌단풍 키우며 불멸의 옛길을 아직도 흐른다 억 광년 돌 속에 물속에 들앉아 돌만 깨는 석수의 정소리 귀가 짠하다 저 아래 무당소沼까지 내려가 치성하던 여인의 정한수 위에 어른거려 본다 천일동안 기다리다 화석으로 남기까지 그 목숨줄 풀었었다 아직도 천변만화의 비상을 꿈꾸며 너럭바위 햇살처럼 반쯤 눈을 감고 옥류의 물소리를 듣는 늙은 용 한 마리,
그 깊은 전설의 그루터기에 내가 앉은채 나이테의 턴테이블은 돈다
바둑을 두면서
김운향(金雲香)
갈 곳 몰라 헤매다가 호구에 들어가서 얌전히 잡히고 축에 몰려 발버둥치며 추락되곤 했었지 피땀 어린 정성으로 집을 지어도 고작 옥집, 가없이 방황하는 우리들의 얼굴은 얼마나 일그러졌을까 오그리고, 뛰고, 부딪치고 그렇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새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으려 눈에 불 밝히고 마지막 별빛을 모두 마셨지 대마싸움에 패라도 생기면 어찌할까 어복으로 진출하여 세력을 뻗혀야만 하는 허허로운 벌판의 까마귀와 해오라기 이긴 자, 진 자도 없이 어귀찬 사랑으로 살 수 없을까 아, 우리들의 어둠에 대하여 반항에 대하여 가슴 앓는 영웅들 매화 육궁, 도화 오궁, 포도송이 송이로 소리 없이 기진한 무리들 불평 없이 은혜롭게 살아가는 이 시대의 흑돌들.
숲에는 새가 없다
이병곡
천변솔밭 새벽 강물은 달달한 솔향이 난다
바람이 잔잔한 날은 소나무가 물 안에서 자고 있다
잠을 깨우는 건 새다 소나무 숲은 저들을 영혼이라 부른다 새들이 영가를 부르면 숲은 새끼에게 먹일 수액조차 강물에 보시한다
물고기는 젖향이 난다 하고 물풀들은 밥향이 맞다 하고 할머니들은 세월의 향기라 여긴다
영혼이 달거리처럼 쉬는 날이면 강물은 아예 빨갛게 물들고 침잠한 연옥(煉獄)이 강에 드러눕는다 그럴 때면 꼭 내 영혼에는 빈집만 하나 늘고 정적에 불안한 나는 열병에 걸린 아이처럼 번잡한 세상을 쏘다닌다 나의 냄새를 맡기 위해
새들을 찾는다 땀에 흠뻑 젖지 않은 나의 살향으로는 너무나 먼- 새
푸른방
위상진
하마터면 나는 현관문을 열고 나갈 뻔 했다
문을 반 쯤 열자, 나를 쏘아보는 그 눈은 불 꺼진 사진관에서 파란 불을 내뿜고 있는 오래된 눈빛 같았다
나는 매수당한 증인처럼 부르르 떨며 간신히 돌아누웠다. 내 옆을 기어가는 어둠은 전갈자리를 건드리지 못했다
모래밭으로 밀려온 한 마리 고래 같은 중고 책을 집어 든다 그때 책갈피에서 누군가의 엽서가 떨어진다, 배추흰나비처럼
-그러나 네 노래 속에 나는 없고 내 혈관엔 너의 피가 흐르고 있다 어떤 말이 의심 없이 나를 이해받을 수 있을까-
밤은 가죽장갑을 물어뜯으며 언 창의 녹는 소리 뒤에 서있다 나는 체온계를 꺼내 입에 문다
「포스트 잍」에서 비밀번호가 떨어지는 소리 굳어가는 빵 같은 재생되지 않는 시간
새벽은 몹시 늦게 날아들지 않았다 해안선을 색칠하는 날개의 흔적을 가로질러 파르스름하게 얇아지는 찬 공기를 가로질러
거기 누구 없소
서 봉석
불효한 놈이 우러러 보는 하늘보다 불효 한 자식 내려다보는 눈 더 아픈가 사월에도 찬 눈 내린다 멋조차 엿 보이는 춘설이라지만 때 없이 내려 벚꽃 눈 감겨 버리고 이별 뒤처럼 걷게 되는 눈길 섭섭하다 손도 발도 시리다 어미는 물론 산파도 없이 낳고 기른 산 저 들 저 바다 아직 더 키워야 하는 가 울렁거리기만 한다 사대천왕이 육조배판으로 판 키운 광화문에서 태초의 천리 전음은 케이팝 몇 소절에 모두 문어졌다 하늘 탓이다 그것 낳았다고 미역국 드신 거기 탓이다 저 나긋나긋한 눈 몸짓이 히죽거리며 써 내려간 소식지엔 밤이면 홍대 근처 큰일 났다고 만우절 풍 코믹 기사 넘치는데 정형수술을 너무 많이 해서 꿰맨 자리 울퉁불퉁한 마음은 닮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하늘이 있어서 부끄러운 여기 보다 우러를 하늘조차 없는 저기 혼자 지킨 평생 한스러럽다 쓰일 모 없이 낳기만 한 천지 사방 얼마나 용쓰시기에 지쳤으면 이제는 날씨조차 못 다스리시나 친정 다녀가는 장금이 편에 산삼 두어 뿌리 다려 보내려 하는데 벽공 가는 길 아는 분
거기 누구 없소!
내 벗은 몸이 네 벗은 몸을 내려다본다
이 덕 주
천정으로 향한 너의 눈은 나의 몸을 지나 천정 밖의 밤하늘을 보고 있다
내 벗은 몸이 네 벗은 몸을 내려다본다 우리라는 우리에 너는 갇힌 적이 있었을까
아래로 흐르던 물을 위로 돌려놓으면 너의 몸은 부풀어 오르겠지 네 벗은 몸을 밤하늘을 끌어당겨 덮어준다
눈을 뜨면 반쪽이 지워진다 네 벗은 몸이 내 벗은 몸을 내려다본다 (바닥에 세워진 것들이 사라지는 시간)
옷으로 가리고 있던 너의 몸이 하나씩 벗겨질 때 내 벗은 몸이 바닥으로 스민다
우리에 갇힌 적이 없었다고 고개를 젓는다 잠깐 사이에 지워지는 기억
몸이 몸으로 갈 수 없는 텅 빈 방에서 내 벗은 몸이 네 벗은 몸을 내려다본다
흐린 날엔
가영심
흐린 날 마당 귀퉁이에서 스친 달팽이 대체 무엇이 그를 이 한낮에 불러냈을까
더듬이 세우고 느릿느릿 딛고 간 빈자리마다 고장난 시계로 허기진 꿈들은 푸른 이끼되어 남아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추억의 흉터들을 하나씩 지워갈 수 있을까 홀로 비를 기다리던 달팽이 숨은 욕망의 창문은 언제나 열려있었다
우울향기로 가득한 꽃밭 온종일 햇빛얼굴 그리워하며 결핍의 열망으로 떠도는 바람 가슴을 하염없이 뜯어가던 오랜 시간의 고집이 잠깐 반짝 눈물로 빛났을 때
생의 서러운 노래였었다. 구름되어 떠나고 싶던 흐린 날이면 늘 한 발 늦은 박자로 기어가야 했던 그의 기도는
공원 길 2
박경림
소리가 놀러 왔다 이어폰을 타고 왔다 구절초 꽃에 앉았다가 날아가는 왕팅이벌 소리를 내다가 칡넝쿨에 납작 붙어 파리소리로 울다가 고막에 대고 비비적 거린다
소리는 공원길을 막무가내로 내닫다가 달려오는 아이와 박치기를 했다
윙 ! 불똥이 지나갔다 고요했다
<탈북자 강제북송반대 詩> 다리를 건너다
이선
압록강 얼음다리, 건너가네 달도 별도 잠든 밤, 숨죽여 건너네
아버지인 백두산, 어머니인 두만강, 생명젖줄 이어, 나를 키우신 땅 신발 한 짝 절뚝거리며 강물에 둥둥, 떠밀려가네
-배고프지 않는 나라 텐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꿈인 거야, 난 지금 황홀한 꿈을 꾸는 게야, “넌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누나는 내 이마에 꿀밤을 먹이고 깔깔 웃어댔지
러시아 벌목 노동자, 철도노역자, 뭐든 야무지게 일할 거야 나는, 다시는 배곯지 않아 -자유, 한 공기 배 두드리고 맘껏 퍼 먹을 테니까,
숨죽이고 울며, 울며 건넜던 압록강을 죽음너머, 푸른 강물 너머, 또 다시 속히 건너오라 하네 -사뿐사뿐, 나비처럼 날아서
“어머니, 제발”
압록강에 오른 발 걸치고 두만강에 왼발 걸치고 나는, 차라리 무지개 징검다리가 되고 싶소
오, 땅이여 북조선 땅, 헐벗은 나무들을 돌보아 주소서
살아지는 것, 사라지는 것
이유미
뜻대로 태어난게 아니다 보니 이렇게도 한 세상 저렇게도 한 세상 살아지는 것
살다가 살다가 사라지는 것
살아지는 것들은 한 번 왔다가 사라지는 것
고드름
허 열
살의 관념을 풀고 뼈가 되어 서다
형체는 무형無形의 관념이었으므로
어느 날 산산이 부서진다 하여도
햇살 속에 잠시 반짝이던 목숨이었음을
풀잎들이 바람결에 무심으로 손 흔드는 날소
비로서 알리라 뼈의 관념을 풀고 살이되는
죽음의 관념을 풀고 부활하는.
앵무새 성자
권 혁 수
하루에도 열두 번 열대 밀림을 걱정하는 저 눈 좀 봐 동그랗게 뜨고 나를 부르잖아 자꾸 뾰족한 혀로 함께 소리쳐보자고 내 목 줄기를 콕콕 쪼아대네 무딘 내 열망을 쓰다듬어 주네 날개 활짝 펼쳐 아, 너무 부드러워 결국 너와 나의 딱딱한 간격을 톡톡톡…… 철장 쪼아대네 안으로 들어오라고, 들어와 횃대 하나 물그릇 하나 좁쌀 통 하나 함께 쓰자고 제 이름도 모르면서 오늘 얻은 새 이름마저 나를 주네 -억 -억 목이 메어 아직 덜 익은 거리의 노래를 부르잖아 너의 노래~ 들어봐 아, 목구멍 벌리고 벌리고 습관 다 버리고 버리고 버려진 납작한 눈물 자국 찢고 찢어 던져 주네 불러 주네
강아지 꾸꾸
김영찬
누가 이런 사막에 애완견 꾸꾸를 데려왔을까
누가 허허 벌판에 너를, 네 머리에 나쁜 손을 얹은 나를 무작정 데려왔을까 꾸꾸는 외로워 사막이란 doodler의 은거지 같은 곳 빨간 입술에 검은 얼굴, 루주 묻은 필터들만 나뒹굴지 누가 함부로 데려왔을까 통기타 소리도 통바지 가랑이도 찢어져 못 쓰게 된 곳
꾸꾸는 두려워 도마뱀이 모래톱에 숨는 밤에는 마른침 삼키며 z z z 코브라 울음소릴 흉내 내기도 하지 미치도록 무서워서 중천에 걸린 달에게 하소연도 하지
꾸꾸는 원적지를 말소당하고만 거야
누가 남의 집 지붕인 이곳에 귀여운 강아지 꾸꾸를 방기했을까 불쌍한 꾸꾸 사막의 승냥이들에게 붙잡혀 두개골 아삭아삭 깨물려 먹힐 각오가 돼 있지
*노바디^ 노바디^ 밧츄~ 오늘밤 꾸꾸는 나와 함께 꼬리를 싹둑 자를 거야 있으나마나한 꼬리를 싹둑 잘라내고 원더걸스의 무대 위에 오르면 굳은 살 박힌 발꿈치나 핥아달라고 발바닥 내밀겠지 너무 빠른 결정을 내린 게 잘못? 너에게 다른 선택의 길이 있다면 천륜을 거스른 별 하나가 무대 밖 동쪽 하늘에 떠서 꿈속에 너를 안내할 거야
꼬리 없는 강아지 꾸꾸 노바디 노바디 밧츄, 오직 너뿐이야~, 너뿐이라니까!
*Nobody nobody but you: 원더걸스의 히트곡
달빛의 노래
박 경 희
허기진 저녁 커피나무가 한 움큼 쏟아놓은 허기 내 몸의 벼랑으로 매달리는
까맣게 탄 허기가 있다 거미 발 같은 손을 허공에 뻗어 한 움큼 열매를 움켜쥔다
까치발로 매달려 바둥거리는 검은 아이들 뜨거운 바람은 커피나무에 매달린 야윈 몸들을 핥으며 지나간다
흘린 땀이 소금기 되도록 염장의 시간들은 녹고 머리 위 태양은 뜨겁기만 하다
슬픔을 엎지른 듯 커피향기는 악마의 콧김보다 독하여서 빵 한 조각을 위하여 천천히 기름 낀 목구멍 속으로 스며든다
대답 없는 회답을 기다리는 허공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들 하루의 삶이 노을에 젖는다
오늘도 붉은 열매를 움켜쥐고 나무에 매달린 아이들의 까만 목숨 푸르게 내려다보고 있는 큰 눈이여
하늘 끝으로 배고픈 새들 날아가고 허기로 들끓는 바람이 불고 있다.
오드 아이
박현주
양 귀를 세모로 펼친 고양이 싹 난 모종들을 가게 밖으로 내보내요 외다리 높은 철제 의자에 앉아 늦은 파종을 준비하는 눈을 마주 보지요 오른쪽 왼쪽으로 발랄과 신비를 궁굴리고 곧 트일 눈이 담긴 봉지 사며 씨앗의 수를 세어요 사그락 사그락 부풀어 오를 봉지가 흔들리고 있어요
양팔저울의 무게를 담고 있는 하트형 얼굴 한쪽으로 기울까 조심스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기어린 창을 핧고 있어요 눈 속의 눈을 핧으며 콧등을 찡긋, 제 눈을 보세요 한쪽을 전부라고 말해서는 안돼요 봉지를 열면 아기 고양이들의 여물지 않은 발톱들 말랑말랑하지요
주머니를 뒤져 양쪽의 크기를 재어 봐요 티셔츠를 살 때마다 왼 팔과 오른 팔 소매를 줄이며 팔길이를 늘이며 길어지는 길이들 배꼽을 잡아요
꽃잎마다 얼룩무늬 연두와 주황 분꽃 속 오드아이*를 심어요
* 양 눈 색깔이 다른 고양이
달을 닮은 도형
우애자
골목 길에서 매년 겨울을 지켰다는 호떡 장수 아주머니 달 덩이 같은 둥근 얼굴이다
어떤 생각은 납작하게 눌렸다가 뒤집어 진다 뜨겁게 몇 번 뒤집어져야 노릇하게 구워지는 삶,
손끝에서 연신 둥그런 달이 떠오르고 수많은 생각들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종이봉투에 담겨져 제 갈 길로 뿔뿔이 흩어지는 시간
하루가 끝나면 피곤한 팔 다리는 신음소리 붉게 부어 오르고 고달픈 손금은 하나의 금을 더 그어 운명을 넘어선다
작고 못생긴 호떡이 소원을 빈다
공중 회전하는 그녀의 꿈이 하늘에 떠있다 만물을 비취는 둥근 달,
폭풍주의보 - 거울
최서진
깨지기 쉽게 형성되었습니다. 나는 가파른 벽면에 걸었을 때 완성되었습니다 날마다 얼굴을 들이밀며 자주 표정을 바꿨지만 금방 뒤돌아서는 당신의 등을 사랑합니다 얼굴을 씻고 나를 보여도 옆면을 보지 못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기는 나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무것도 끌어안지 못하는 차가운 이마 부서질 것만 같은 전체 혹은 부분 당신이 내게 보인 만큼 나 또한 내 속을 보이고 말았으니 그러나 얼굴의 내부에는 가장 어두운 뒷면이 있습니다
한 가지 표정을 갖지 못한 자 당신은 오른쪽에서 말하고 나는 왼쪽만을 흉내 내는
틈이 많은 저녁이 지나갑니다
어둠으로 꽉 찬 내면은 질끈 눈을 감아버리는 감정 제자리만 비추는 위태로운 개체 나는 절실히 보호가 필요 합니다
중얼거림
신 규 호
쇠를 가지고 쇠를 자른다 말(言語)을 가지고 말을 허문다 안개가 안개를 먹어 치우고 생각이 생각을 씹어 삼킨다 어둠이 다시 뱉어낸 향내 나는 아침에 모호한 나를 꺼내 열심히 살핀다
저녁에 땅이 다시 해를 삼키면 산이 다른 산의 내장 속으로 기어든다 어둠 속 비개덩어리인 낱말의 배를 가르고 밤새 암 종양을 발라낸다 비린내 나는 원고지 위의 낭자한 혈흔
물로 바위를 뚫는다 빛으로 강판을 끊는다 아무 것도 아닌 풀이 벌판을 삼켜 버린다 자갈과 모래가 세상을 파묻는다 아무 것도 아닌 먼지가 아무 것도 아닌 우주에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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