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성구 시니어클럽 문화재해설단으로 일하기 시작한 지 두달째다.
처음으로 나에게 맡겨진 곳이 이곳 고산서당과 독무재 그리고 수성1가 느티나무이다.
집에서 엄청 멀리 있는 곳이라 처음엔 부담스러웠지만 그곳에 대한 공부를 하고
초등학생들과 고등학생들 탐방팀을 맞이하면서 홍순탁선배와 함께 해설을 하면서 재미가 붙었다.
이곳 고산서당을 공부하면서 혼자 생각한 것이 수성구 문화재 해설단으로 이왕 시작을 했으면
우리 수성구에 어떤 문화재가 있는지 찾아보고 알아보고 공부해보자고 결심을 했다.
그래서 가입하던 첫날 받은 수성의 문화유산이라는 책자에 있는 안내도를 보면서
틈만 나면 그 문화재들을 찾아가 보기로 했었다.
사진기를 들고 문화재를 만나면 반가이 사진도 찍고 관계되는 자료도 찾아보고
또 그것을 정리해서 내 블로그에도 올리고 시니어클럽 홈페이지에도 올리고 하면서
차츰차츰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높여가고 있는 중이다.
고산서당에 대해서는 이제 어느 정도 잘 알게 되었고 정도 들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 고산서당 해설을 그만 두란다.
고산서당에 대한 해설은 다른 사람에게 맡긴단다.
그리고 나는 투어팀 버스에 동승해서 안내를 하란다.
아마도 내가 해설하는 것이 서툴러서 그런 것인지 싶기도 하고???
아니면 집이 멀다고 배려해서 그런 것인지 싶기도 하고???
하긴 얼마 전에 어떤 선배가 나에게 모명재를 맡아서 해설하라고 하면서
친절하게도 자료까지 나에게 주었었기에 고맙게 생각하며
모명재에 대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자료도 찾아 정리를 했었는데
또 갑자기 다른 선배가 나에게 이제 해설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그만 버스를 타고 안내하며 다니란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하는 수밖에......
하긴 나에게 무엇을 맡긴다고 내가 어려워 하며 힘들어 하겠는가?
재미만 있는데......ㅎㅎㅎ
이제 이 고산서당에 대한 해설을 더이상 할 수 없게 되었기에 다시금 찾아와서 사진을 찍었다.
처음 왔을 때는 앙상한 가지만 있던 서당 뜰안의 나무와 뒷편 이황나무와 정경세나무들이
무성한 잎은 자랑하는 것을 보고 해설을 시작한 지 벌써 시간이 꽤 많이 흘렀음을 느끼게 한다.
앞으로 수성구에서 이곳을 크게 정비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소식이 있으니
그때 다시 만나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세상이 하 수상하니 말이다.ㅎㅎㅎ
오늘 욱수초등학교 3학년 문화재 투어에 처음으로 버스에 동승을 해서 안내를 하며 함께 하는 날이다.
나는 3학년 6반 학생들과 6호차를 동승해서 투어를 함께 했다.
모두들 호기심 많고 열심으로 참여를 했다.
귀엽고 예쁜 아이들이다.
그런데 고산서당을 찾았을 때 홍순탁선배님의 해설이 있고난 다음에
질문시간에 6반 어린 학생이 했던 질문 중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서
여기에서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번째 질문은 이곳에 학생이 몇명이 배웠으며 책상은 왜 없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잠시 대청에 올라가 훈장선생님은 여기에 이렇게 앉고
학생들은 이쪽에 이렇게 앉아서 이렇게 공부한다고 시범을 잠시 보였다.
전에부터 잠시 생각했던 것인데
서당을 찾아오는 어린 초등학생들에게 그냥 고산서당에 대해서만 설명을 하지 말고
해설사가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고 대청마루에 앉고 그 앞에 서안(書案)을 놓고
앞에 초등학생 십여명을 앉게 하여 옛날 서당의 공부하던 모습을 재현해보는 것도
찾아온 어린 아이들에게는 추억이 될 것이며 효율적인 설명이 될 것 같고
또 서당의 활용도를 높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을 가졌었다.
이제 떠나면서 이런 방법의 해설도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여기에 이렇게 제안을 해본다.
두번째 질문이 대청에 걸린 태극기이다.
태극기가 왜 걸려 있느냐? 하는 질문과 함께
태극의 색깔이 붉은 색이 없고 왜 누런색이냐? 하는 질문이다.
홍선배님이 태극기가 오래 되어서 색이 바래서 그렇다고 대답을 했고
또 여기에서 고산서당의 이황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고 기념을 하기 위해 모임을 갖느라고 태극기가 있다고 대답을 해주셨다.
그랬는데 그 초등학생이 혼자서 하는 말이 지금도 마음에 걸린다.
"태극기는 헌 것이 되면 태워없애야 하는데..."
참으로 어른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난 번에도 말했지만 서당에 태극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굳이 태극기를 두어야 한다면 이 학생의 말을 새겨 듣기 바란다.
이 문제는 조속히 해결되기를 소망한다.
어린 학생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말이다.
고산서당(孤山書堂)
고산서당은 대구와 경산간 국도상에서 대구와 접경지점의 북쪽에 위치하는
성동의 서원골 야산 중턱에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그 앞으로는 남천이 흐르고 있다.
고산서당이 언제 세워졌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퇴계 이황(1501∼1570) 선생과 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이 이곳에서 강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1500년대에 이미 건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고산이란 이름은 퇴계 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1690년에는 서당 뒤편에 사당을 건립하여 두 사람의 위패를 모시면서 서원으로 개칭되었으나
사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강당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879년(고종 16) 유림에서 강당만을 다시 중건하여 고산서당이라 하였다.
서당 뒷편에는 1872년 세워진 퇴계, 우복 선생의 강학을 기념하는 유허비가 있다.
이 서당은 네모꼴의 흙담으로 되어 있고 건물은 납도리 위에 세 개의 대들보로 간결하게 짜 맞춘 구조로
큰 대들보는 가운데가 굽은 목재와 막석가래를 사용해 자연스러운 모양을 내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가운데 2칸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는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작은 규모의 소박한 교육공간으로 재건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중앙에 성균관이 있고 각 지방에 향교가 있었으며 사립으로는 서원과 서당이 있었다.
서당은 요즘의 초등학교와 비슷한 조선시대 사학의 아동교육기관이다.
서당이 최초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로 추정되나
서당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조선시대이며
특히 교육적 기능면이나, 그 수에서 보편화되고 사회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조선중기 이후의 일이다.
서당의 입원 자격은 나이가 대략 만 7세를 넘어야만 가능하였으며,
훈장은 기본적으로 국가에서 치르는 과거에 1차 합격한 사람이 훈장의 자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1차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초시에 합격하였다 하여 성균관에 들어갈 자격을 얻게 된다.
어렸을 적 읽은 '소나기'라는 소설에서 주인공 소년을 좋아한 소녀의 할아버지가 '윤초시'였던 것 기억나시나요?
서당에서는 천자문, 동몽선습, 계몽편 등을 교과서로 삼아 공부하였고,
스스로 주위를 깨끗이 하는 법이나 어른에 대한 예의범절 등도 배웠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강 받는다’하여 시험을 치르기도 했는데,
시험 성적이 제일 우수한 학생을 장원이라 하여
그 학생의 집에서는 떡과 술을 마련해 훈장과 여러 학동들을 대접하였다.
지방에서는 향교나 서원으로, 서울에서는 사부학당(四部學堂)에 진학해서 과거시험을 준비하였다.
훈장을 초빙하여 자제를 교육하는 경우와 마을서당, 문중(門中) 서당 등이 있다.
천자문(千字文)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학습하고
그 밖에 글짓기와 글쓰기도 아울러 공부하였다.
서원은 외형적으로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며
후학을 양성하던 사설 중등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 크게 번성하였다.
고려 학자 안향을 모시는 백운동서원이 최초의 서원이라 하겠다.
서원의 외형적 구성은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드리는 사(祀)와 교육장소인 재(齋)기 기본이 되며
그 외에 서고 판고 비각 고직사(서원에서 생활하는 유생들의 숙소) 등의 공간이 부설된다.
서원의 정원은 대게 10명에서 15명 정도가 정원이었다.
입원 자격은 양반의 자제는 만 16세가 넘으면, 특별한 결격사유가 없는 한 입학이 허용되었고,
사서 가운데 소학과 논어 등 유학서적을 읽을 줄 아는 학생이 선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양인이나 서민의 자제 또한 특출한 학문적 능력이 있거나 경제적 기여에 의해 입학이 허용되었다.
이러한 경우 서원 안에는 기숙사 건물로 사용되는 재(齋)라는 건물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1개씩 있어
각각 동재와 서재로 불리우게 되고, 동재에 양반집 자제들이 머무르며
서재에 양반신분이되 세력이 없거나 혹은 양인, 서민의 자제와 함께 기거하도록 하였다.
퇴도 이선생 우복 정선생 강학 유허비(退陶 李先生 愚伏 鄭先生 講學 遺墟碑)
선조40년(1872) 우복 정경세 선생이 대구부사로 부임하여 이 서당에 퇴계 선생으로부터
고산 이라는 재호와 구도라는 친필을 받아 걸고 강학을 해 왔던 사실을 적은 것인데
비문은 당시 현령으로 부임 했던 이헌소(李憲昭)가 지어 고종9년(1872)에 세웠다.
성동 느티나무 - 이황나무와 정경세나무
첫댓글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 저희도 지금 고산서당 등 문화재 현장에서 체험활동 부분을 생각중에있습니다 ^^ 특히나 고산서당 같은 경우에는 서당 천자문공부나 이런형태로 체험활동하려고 합니다 ^^
고맙습니다.
부족한 저의 의견을 이렇게 답글까지 주시니 감사합니다.
단순한 견학이 아닌 체험활동으로 변하게 되면 학생들의 관심이 증대되리라 생각합니다.
조속히 그렇게 체험활동화 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
귀하는 작은 어부가 아니고 큰 어부이며 우리 해설단의 큰 별입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크게 봐주시니 마냥 고마울 뿐입니다.
힘이 납니다.
김성호선생 너무섭섭해마시오, 김선생님의 능력은 모두가 알고 있으니 재주가많으며 더큰일에 쓰시려 준비하고 이 ㅅ네요.큰어부화이팅!!!
섭섭한 것은 없답니다.
그냥 고산서당을 떠난다니 서운할 뿐이죠.
무얼 맡긴들 못하리까?
격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