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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산행기
계단의 센서 등이 고장 났다.
수 만 번을 오르내린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와서 가게로 통하는 옆문을 열었다.
코를 찌르는 향기에 문 옆에 붙은 전등스위치를 꽉 눌렀다.
잘 쓰지 않는 저울 위에 올려놓은 천리향이 만개하여 질펀한 향기를 흘리고 있었다.
더러는 꽃잎이 밤사이에 별이 되어 떨어졌다.
신속하게 손 폰의 밧데리를 교환하고 디카를 챙겼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골목길은 스산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혼수용 떡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가게가 즐비한 군침 도는 골목이었다. 밤새도록 알록달록 치장을 한 이바지 음식들이 사시사철 새벽부터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유명그룹에서 은밀히 시장일대의 땅을 매입하였다.
횡재를 한 주인은 오래도록 살아온 집을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났다.
지난 늦가을부터 빈 점포와 주인 잃은 집들은 중장비로 순식간에 헐리고 펜스가 높이 둘러쳐졌다.
땅파기를 하는 중이나 아직은 일꾼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펜스 모퉁이를 돌기 전에 바지 지퍼를 내리고 맨홀 구멍에 엇비슷하게 소피를 갈겼다.
소변의 절반이 맨홀 구멍으로 들어가지 않고 두꺼운 강판에 떨어졌다.
넘치는 오줌에 등산화가 젖을까봐 자리를 옮기다가 전봇대에 배낭을 부딪쳤다.
남자로 태어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쇼핑 앞에 대철이 먼저 와 있었다.
산객; 굿 모닝, 친구!
대철; 얼쑤! 시간 하나는 정확하구면.
산객; 한 달이라는 시간은 만삭의 산모에게는 중요하고, 1주일은 주간지 편집장에게
중요하고, 24시 하루는 어제 죽은 자가 목숨 걸고도 살지 못한 하루이고....
대철; 재수 없다. 계속해라.
산객; 한 시간, 그리니까 60분은 연인들에게는 사랑과 증오가 번복되는 시간이구,
1초는 사고의 순간을 모면한 사람에게 위기의 타임이고,
에.... 백분의 1초는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는 기록갱신의....
대철; 빼 먹었다. 1분은?
산객; 남겨 놓은 거지.
1분 늦어서 버스 지나 간 뒤에 손들면 뭐 하노!
대철; 밥은 먹었남?
산객; 마눌 주무실 때 모르게 먹었지. 도시락은 밥도둑처럼 소리없이 퍼 왔다카이.
친구는 뭐, 맛있는 것 가져 왔노?
대철; 새벽 2시까지 술을 밤참으로 알고 처먹다가 까무러지는 통에 아침밥은 고사하고
도시락도 못 챙겼다.
산객; 훌륭하다. 오늘 아침 더욱 돋보인다.
최 형은 온댔나?
대철; 이 양반이 당췌, 전화를 안 받네
요즘 일 때문에 간밤에도 초가 된 거 아녀?
전화 받아라. 효도 폰이 울리네.
산객; 조선 제일의 남자입니다.
임선; 호호호
상기씬 뭐 잘 하는데?
산객; 늦게 자고도 일찍 일어납니더.
임선; 산에 갈 때만 그렇지. 술 마실 때만 잠이 엄꼬!
산객; 놀러가기 전날 밤에도 잠을 설칩니다.
특히 여친들과 같이 가기로 한 날은....
임선; 즈 쯔쯧! 농담 그만 하고, 거기 누구랑 있어요?
대철; 누구 전화고?
산객; 미세쓰 칠곡 선. 등산아카데미 최고의 미인!
대철; 그라모, 진은 누군디?
산객; 신 선생은 진이고 실크 강은 미이고 이렇게 진선미, 다 하는 거지 뭐.
칠곡 진 선 미. 후후후!
임선; 여보세요. 아자씨!
듣고 있는가요?
산객; 말씀 하소서!
임선; 조 사장님과 회장님은 연락이 되었고, 신 선생은 기다리는 중이니
대식씨께 다시 전화하고 승차하소.
그리고 버스가 두 대로 출발하니 향군회관에서 이쪽 차로 옮겨 오시던지 알아서 하소.
대철; 저 버스다. 타자!
지난달에 망운산에 동행한 후배님이 보이는구나.
먼저 인사하자.
산객; 하이고, 반갑습니다.
대철; 나는 맨 뒤에 가서 길게 앉을 테니 빈자리에 앉으라.
산객; 뒷좌석은 쪼매 흔들릴 텐데.
회장님이시 닷!
민족의 태양이시며 위대한 등.아의 영도자 김회장니임,
날씨가 좋습니다. 마이크부터 받으소서. 아푸 아부.
김 회장; 우리 등산 아카데미를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선후배님!
그리고 특별히 동참해 주신 동호인 여러분 참으로 고맙습니다.
존경하는 여러 동문님의 적극적인 참여와 음으로 양으로 수고하시는
여러 임원진의 노력으로 우리 등산 아카데미가 발전하며 달이 갈 수 록
더욱 산행이 성 황 리에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미흡한 점이 있으시더라도 태산처럼 너그럽게 받아 주시면
더욱 노력하여 동창회 발전에 기여하겠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정기산행에 나와 주셔서 거듭 감사를 드립니다.
산객; 대철아! 잠깐, 내가 각별이 인사를 올려야 할 분이 계시구나.
대철; 누구?
어느 분이신고?
산객; 여기 계시는 분. 우리 동네 이웃사촌이시다.
부군 되시는 분이 몇 해 전에 등산교육을 수료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부인과
함께 하신 모양이지요?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마리나; 어머나! 같이 한 것은 아니고예....
부부가 같이 가게를 운영하다보니 우리자기가 먼저 수료 한 후에
제가 따라서 하였지예.
산객; 부부의 취미가 같으면 부부애가 남다르지요?
부럽습니다. 남편께서는 암벽에도 재미를 붙이셨다던데?
같이 오시지 않으시고?
마리나; 일요일이지만 업무가 있어 같이 오지는 못했어예.
산객; 같이 앉아 갑시다.
일이 우선이지요.
생업을 취미처럼 즐기며 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지요.
어떤 이는 취미로 전업을 한 후 취미도 잃고 생활도 고달파지는 경우가 있습디다.
저도 한때는 낚시 배를 구입하여 먼 바다로 나가 낚시도 즐기며
생업을 도모해 보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지요.
그러다가 또 한 시절은 지리산 장맛비에 흠뻑 젖어 치밭목 산장에 들어갔다가
일천 냥을 주고 마신 원두커피 맛이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아서 산장지기로
전업 해보려 고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산장지기가 직업이 될지는 아직도 모르지만요.
돌이킬 수 없는 청춘시절의 희망사항 이였지요.
마리나; 그런 일도 있었어예?
대대로 풀뿌리 나무열매를 수집 판매하는 일을 가업으로 여기며
밥만 먹고 잠만 자는 동네 애늙은이로 여겼지요.
참! 형님은 등산 좋아 하지 않으시나요?
산객; 저야 조부님 때부터 역마살을 물려받은 터라
반나절도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는 팔자이니 그렇다 치고,
둘째 아이를 낳고 몇 년 후 부터는 통영 부속 섬과 팔공산에 몇 번 동행 하였는데
흥미 를 못 느낍디다.
차를 타고 먼 곳으로의 여행은 좋아하는데 현장에서 팔다리를 움직여 하는 일은
싫어하 는 것 같습니다.
신혼 때는 유감이었으나 평생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같지 아니한 것도 좋은 점이 됩디다.
작년여름엔 아예, 테마 여행사를 따라 온 가족이 남해 갯마을에 조개를 캐러 갔었지요.
날씨가 유난히 무더웠으나 모두가 하루 종일 즐거웠지요.
아내는 식물원이나 두류공원의 벚꽃구경을 매우 좋아하지요.
봄꽃이 많이 기다려집니다.
마리나; 생각보다 남자분이 섬세한 경우가 많더네예.
산객; 저는 시골 벽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마냥 행복했던 유년시절을 잊을 수 없지요.
저자의 생활이 힘겨울 수 록 향수병 같은 것이 그리움으로 밀려오지요.
그리 먼 곳도 아니고 또 길흉사로 일 년에 몇 번은 고향에 다녀오지만
갈 때마다 황폐한 고향의 모습에 실망하지요.
그래도 언제나 어디서나 고향 친구들이 좋고 고향의 산과 하늘 나무,
좁은 들과 얕은 개울에 정감이 가지요.
제가 아직은 옛 추억을 새김질 하며 살 나이도 형편도 못되지만
북적대는 명산이나 흐려진 큰 강을 보면 고향생각을 아니 할 수 없지요.
마리나; 거기가 어딘데예?
그리움이 사무쳐서 산자수명해진 그 곳이, 예?
산객; 아니올시다.
부끄럽습니다.
마리나; 막내가 많이 크던데요. 초딩 졸업 했나요?
산객; 내년에 졸업합니다.
마리나; 대체 자녀가 몇 명이라예?
산객; 비밀입니다.
정녕 궁금하시오면 형님께 물어 보십시오.
혹시 대구시에 면사무소가 있다는데 아십니까?
마리나; 예?
산객; 라디오에서 들으니 국수집 이름인데 손님이 오면 “민원은 사양합니다.
면(麵)삶으소!”한데요.
기발하지 않습니까?
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국수도 좋아 하지만 .....
마리나; 호호호 호
국수는 이천년도 넘은 음식이라예.
중국변방 모래 언덕에서 미라가 된 고대인 뱃속에 서 화석으로 발견되었데요.
건조하면 보관이 쉽고 바쁜 손님 접대에는 즉석식품으로 편리하고....
산객; 편의성 때문에 산에서 라면을 먹지만 국수를 즐기는 편입니다.
여름철에 국수를 삶아 계곡물에 씻어 먹으면 그만이지요.
특히 휴식년제에 들어간 골짜기나 상수도 보호구역 같은데서....
흐흐흐. 비밀입니데이.
대철; 친구야, 휴게소다.
밥 먹자.
산객; 석제형님 어서 오십시오.
신 선생님 날씨가 포근합니다. 완전 봄날입니다.
뭐라고 예? 남편과 같이 왔다꼬라?
허 헛 참! 나주평야에서 길 잃으실까 키다리 영감님하고 같이 왔는가요?
누가 월출산에 범 있다 카던가요?
백두대간 하신 분은 귀신도 겁내지 않는다던데....
김가 인사 올립니다.
기왕에 오신 것이니 밥이나 같이 묵읍시다.
먹을 때는 선두에 줄을 섭시다.
등산아카데미가 참 좋다.
뜨신 국물에 낯선 사람 밥도 말아 주고.
남의 남편; 어! 좋다.
내자 따라온 보람 있네 그랴.
밥맛이 꿀맛이네 그랴.
허구한 날 집구석에서 그 나물에 그 밥 묵다가 맑은 공기 마시니
엔돌피가 팍팍 솟 네, 그랴!
산객; 마눌 따라 댕기는 사람이 한정식 자시면서 웬 말씀이.... 그 랴.
키라도 나지막 하모, 밉지나 않지, 그랴.
남의 남편; 소인 보고 한 말씀이오니까?
산객; 사이드 브레이크 당겨 놓은 버스 타이어 보고 했것소이까?
잎도 나기 전에 꽃망울을 터트린 매화나무 보고 했겠소이까?
국물이 뜨뜻하니 대인께서 한 그릇 더 자시지. 그랴!
남의 남편; 입 다물고 남은 김치나 긁어 드시지 그랴.
음식 남기면 벌 받지 그랴.
산객; 눈으로 김치 먹으니 눈 따갑네. 그랴.
남의 남편; 커피나 한 잔 하러 가시지 그랴
자판기 쪽으로 나란히 걸어가며 뒤돌아보니,
친구도 줄을 서고 미세스 칠곡도 줄을 서고 형님도 줄을 서고 후배님도 줄을 서고 손님도 줄을 서고 선배님도 줄을 서고 사장님도 줄을 서고 부장님도 줄을 서고 꽃집의 아가씨도 줄을 서고 회장님은 제일 끄트머리에 줄을 섰구나.
종이 잔의 커피를 질금질금 마시며 돌아오니,
밥을 담아주고 국을 퍼주며 반찬을 나누어 주던 임원 몇 분은 줄을 서지 않고 밥통과 국그릇과 반찬접시 앞에 그대로 퍼질러 앉아 아침밥을 먹었다.
사람은 누구나 밥을 먹어야 한다.
앉거나 서거나 잘 먹거나 못 먹는 것은 차후의 문제이다.
누구나 먹을 만큼 먹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명과 어울려서 먹는 일이 즐거워서 아침밥을 두 번째로 먹고 커피 잔을 든 채 대절버스에 올랐다.
차창에 성에가 끼어 뽀얗게 되었다.
좌석에 앉은 채로 마이크를 건네받아 통성명을 하고나니 몸이 노곤하였다.
차는 지리산을 넘어 남쪽으로 달려가고 나는 일장춘몽으로 빠져들었다.
지난해 9월이었다.
영암읍에서 준영이와 택시를 타고 천황사 입구 주차장에 내렸다.
오밤중이었으나 서너 곳의 가게가 불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밤이 깊었는지 슈퍼 앞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침낭과 취사도구가 잔뜩 든 70리터 배낭을 들쳐 메고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가을에 접어들었으나 해지기 전부터 소주 맥주를 줄기차게 마신 터라 후덥지근하였다.
“어이 친구, 어디가노?”
“이쪽으로!”
거긴 주차장이어?
“초보가 말이 많아. 오기 싫으면 밤새도록 거기 서 있고.”
텅 빈 주차장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가던 그가 하필이면 화장실 옆에 멈추어 섰다.
“뭘 찾는데?”
“수도, 어! 저기 있군. 마침 벤치도 두 개가 마주보고 있으니 안성맞춤이구면.
슈퍼가 문 닫기 전에 맥주나 사오너라! 내가 자리 펼 테니”
“여기서 자나?”
“비박이지, 프랑스 말로는 비부악!
“우리말로는 노숙이제”
“그럼, 기럼”
숲 속에서 산짐승 소리를 들으면서 자는 줄로만 알았으나 맥주를 사러 가면서 생각해 보니 잘 된 것도 같았다.
출발 할 때부터 텐트는 필요 없다고 여러 번 말하였으니, 준영이는 이미 노숙을 계획한 바였다.
칠흑처럼 어둡고 낮선 곳에 어디를 간단 말인가? 술이나 마시자.
맥주를 사들고 오니 그사이에 깔판 위에 침낭을 풀어 놓고 마른안주를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새로 구입한 헤드랜턴을 목에 걸고 시에라 컵에 맥주를 가득 부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어두우니까 각자가 알아서 마시기”
준영이는 컵도 커서 맥주 한 병을 두 번 따르고는 옆으로 치웠다.
“비가 오지는 않겠지?”
“걱정하지 마라. 별이 보이지 않느냐?”
비스듬히 누워 하늘을 보니 천 만 억 조 무량대수 불가사의의 별빛이 신비로웠다.
준영이가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니 서울에서 회원을 태운 버스가 막 출발하였다고 했다.
밤공기가 서늘하였다.
준영이가 명품 스토브에 불을 붙여 라면과 만두와 떡국과 먹던 참치 캔을 넣고 끓였다.
침낭에서 자다가 몇 번을 깨었다.
마리나; 잠꼬대 그만 하세요. 다 왔어요.
대철; 계속 주무시지 않고, 하산 할 때 까지!
넓은 주차장은 버스와 등산객으로 번잡하다.
전 번에 노숙을 한 곳이 어딘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등반부장이 일행을 불러 모았다.
이부장님을 바라보며 둥글게 모여 섰다. 스트레칭을 할 모양이다
“ 아무리 바빠도 이것만은 합시다. 박수 시작!”
와르르한 박수소리에 산수유 망울에서 노란 꽃잎이 살짝 비치었다.
안전산행에 준비운동은 필수다.
박수로 시작하는 첫 동작이 재미있다.
이 인호님은 두 번째로 뵈었으나 연륜만큼 산행경험이 풍부한 느낌이 들었다.
단체로 촬영을 하고 천황사 입구로 접어들었다.
화창한 봄 햇살로 겨우내 흔들리며 떨던 대숲도 이제는 조용하다
동백 잎에도 생기가 돌아 반지르르하다.
앞서 가는 등산객 중에 운동화와 청바지를 입은 연인들이 있어서 염려되었다.
첫 번째 사다리를 오르며 우측을 보니 영암들판을 가르며 솟구친 바위벽이 장관이다.
지난번에는 거대한 화강암이 아침 햇살을 받아 황금처럼 빛났었다.
벼랑에 드문드문 붙어 있는 나뭇가지에 아직 새잎이 돋지 않아서 거대한 바위산이 아낌없이 드러나서 더욱 우람하였다.
구름다리에 다다르니 가슴팍에서 사타구니까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윗도리를 벗어 배낭에 집어넣고 바위에 걸 터 앉았다.
삼삼오오로 모여든 등산객이 철제 난간을 붙잡고 발아래 아찔하게 펼쳐진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탄성을 지르고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동기생을 기다리느라 한 참을 쉬고 있으려니 마침 존경하올 회장님이 올라 오셔서 기념으로 한 컷하고 앞장섰다.
가파른 철제 계단을 두 손으로 잡고 매봉에 올랐다.
상그러운 봉오리 그늘진 곳에는 춘삼월인데도 얼음이 붙어 있었다.
배낭에서 준비해 온 과일 통을 끄집어내었다.
산을 다니면서 타인에게 힘이 되지는 못 할지라도 친절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일어서 얼마 전부터 준비하는 대중간식이다.
길목에 서서 방울토마토가 담긴 플라스틱 통을 받쳐 들었다.
모든 이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토마토를 집어갔다.
빈 통을 챙기니 참으로 흐뭇하였다.
대철이 비지땀을 흘리며 올라왔다.
“친구야! 숙취가 쪼까 깨냐? 어떤 술로 해장 할래?”
.......
“안동 소주를 주랴? 서울 문배주를 주랴, 전주 이강주를 주랴, 계룡 백일주를 주랴.
김천 과하주를 주랴, 한산 소곡주를 주랴. 진도 홍주를 주랴, 경주 법주, 대구 탁주를 주랴? 이도저도 아니면 김 회장님 좋아허시는 북한산 벌떡주나 고창 복분자주나 기타 제조주 먹을래?”
“으으으 또 취한다. 안주는 뭘 주나?”
“말만 하거라.
석재형님 돌팔매질이 아직 녹슬지 않았으니....
매봉위에 높이 뜬 독수리를 떨어트려 날갯죽지를 동백기름에 튀겨 먹던지, 사자봉 바위틈에 꼬리 걸린 멧돼지 쓸개를 가루로 먹던지. 바람골 삼거리에서 길 잃은 노루를 붙들어 등살만 쪼까 육회로 먹던지. 구정봉에 물 마시러 나온 산양을 통째로 소금구이로 먹던지, 미왕재 억세 밭에 엎드려 있는 국노루 배꼽만 떼어 먹던지, 향로봉 너럭바위에 말리려고 잠시 빼 놓은 산토끼 생간을 얻어 주까?”
“신령한 산에서 피나고 비린 것은 좋지 못하니 과일은 없느냐.”
“노항 홍시를 주랴, 신방 개암을 주랴, 골안 알밤을 주랴.
원각 머루를 주랴, 용하 다래를 주랴. 아랫귀미 호도를 주랴.
평천 딸기를 주랴, 임고 능금을 주랴. 영천 포도 묵을래?”
“에고, 친구야 빈속에 배 터지겠다.
석제형님 팔공산 염불봉에서 이르기를 말로 떡을 하면 조선 사람이 다 먹고도 남고, 입으로 연애를 하모 자손이 귀하다더라.”
대철이 햇살에 눈을 찡그리며 “신토불이 원산지가 분명하니 네 혼자 많이 먹고, 물 있으면 한 모금만 주랴.”했다.
생수병 마개를 열어 건네는데 주위에서 누군가가 다급히 “팔이 빠졌다”고 했다.
깜짝 놀라 어찌된 것이냐고 물어 보니 앞선 사람의 스틱을 잡고 경사면을 오르다가 한쪽어께 뼈가 빠졌다고 했다.
팔이 빠졌으니 망정이지 스틱이 빠졌으면 더 큰일 날 뻔했다.
일행이 있어서 구조헬기를 부르라 하고 지나갔다.
잠깐의 부주의로 불상사가 생긴 것이다.
그늘진 절벽에 고드름이 맺혀 있었다. 스틱을 뽑아 짚었다.
비탈길을 내려가서 봉오리로 치달았다. 허기가 느껴졌다.
산죽 아래로 잔설이 남아 있었다. 정상은 지척이다.
“석제형님! 정상이 코앞이니 여기서 식사를 합시다.”
손 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2시가 다 되었다.
“그래, 정상에는 발 디딜 틈도 없을 테니 여기에 자리를 잡자”
양지바른 곳에 둘러앉으니 여러 무리가 옹기종기 모여 들었다.
이웃한 등산객과 반주를 나누고 반찬을 얻으며 배불리 먹었다.
배불리 먹고서야 주위를 둘러보니 신 선생 부부가 보이지 않았다.
도갑사까지 간다고 서두른 모양이다.
응달진 빙판을 거슬러 천황봉 정상에 이르렀다.
만고강산 좋을시고!
평야에 우뚝 솟은 천황봉에서 사방으로 내려다보니 계곡도 깊이 파인 바위로만 형성되었다.
능선을 따라 길게 이어진 송곳 같은 봉오리로도 모자라 커다란 바위를 하나 둘씩 이고 있었다.
정상석 옆에 둥근 표지석이 있어 글귀를 대충 읽어보니 “하늘에 제사를 올린 곳이다” 고 적혀 있었다.
혹시나 하고 바닥을 살펴보니 청자 파편은 일체 보이지 않고 부스러진 바위조각으로 최근에 축을 쌓아 놓았다.
영암읍을 둘러싼 평탄한 들녘에 연두 빛이 감돌았다.
아득한 들녘을 자세히 조망하니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물길이 있었다.
영산강인가 보다.
물길은 논밭을 적시며 바다에 이르고 땅 끝과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그 곳은 청자 빛을 띠고 있었다.
그렇구나!
강진에서 그릇을 굽던 도공이 언 땅이 녹는 이른 봄에 천황봉에 올라 옥황상제님께 제를 올리다가 하늘과 땅과 물의 어우러짐을 보았구나!
정상에 오래 머무르면 후손에게 짐이 되니 하산하자.
남근 바위를 발로 차고 바람 재에 이르렀다.
바람 재에는 바람 한 점 없고 봄볕이 고르게 비치어 평화로웠다.
한 여름이나 엄동설한에 월출산을 찾으면 몸 고생을 하리라.
이번에는 좌측 경포대 방향으로 내려섰다.
골이 깊으나 기운은 맑았다.
노거수가 된 동백나무가 무지막지한 바위를 떠 바치며 힘겹게 서 있었다.
얼음 녹은 물이 여울져 흐르다가 소를 이루고 작은 폭포로 떨어지며 상쾌한 화음을 만들었다.
굵은 마사토가 소담하게 쌓인 물웅덩이에 당도하여 너나없이 등산화를 벗고 발을 씻었다.
으-랏, 차차 차 찻 !
뼈가 시리도록 차가웠다.
아이 아이 아아 아....
시린 발을 높이 들며 뒤로 자지러지는 여인의 엄지발톱에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피다가 떨어진 동백꽃 잎이렷다!
2009년 3월 8일 월출산행을 기념하며....
산 객 합장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