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가 두루미를 초대하여 접시에 스프를 주었다. 입이 뾰족한 두루미는 도저히 접시의 스프를 먹을 수 없었다. 두루미가 여우를 초대하여 목이 긴 병에 음식을 내 왔을 때는 여우가 도저히 먹을 수 없었다.
다 아는 이솝우화이지만 우리의 교육이 이와 같습니다. 만약 우리 아이가 여우인데 학교에서 병에 든 교육을 시킨다면 아무리 애를 써도 말짱 꽝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서로 다른 능력을 갖고 태어납니다.
글을 잘 쓰는 아이, 그림에 뛰어난 아이, 잘 만드는 아이, 사람 말을 잘 이해하는 아이, 사람을 잘 사귀는 아이, 착하고 고운 마음을 가진 아이, 일 잘 하는 아이, 모범적이며 잘 다스리는 아이, 운동을 잘 하는 아이,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 컴퓨터를 잘 하는 아이, 노는 것을 잘 하는 아이,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 악기를 잘 다루는 아이, 기계를 잘 다루는 아이, 음식을 잘 만드는 아이, 장사를 잘 하는 아이, 눈치가 빠른 아이 등등.... 다양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의 재능을 개발하는 것이 교육인데 과연 우리의 교육은 어떤가요?
사람은 천성적으로 성격이 다르듯 갖고 있는 재능이 다릅니다.
크게 분류하면 암기력과 수동적 사고력에 재능이 있는 사람, 종합적이며 창의적사고력에 재능이 있는 사람, 감각적 사고력이 뛰어난 사람, 언어와 정서적재능이 뛰어난 사람, 대인관계에 뛰어난 사람, 신체능력과 의지력이 뛰어난 사람, 상상력과 도덕 지능이 뛰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각 재능은 별도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현재의 우리 교육틀은 암기력과 수동적 사고력이 우월한 8%정도의 아이들은 위한 산업시대의 인력양성이 목표였던 이미 지나간 시대의 산물이며 첨단 정보화시대에 필요한 다양한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양성하는 데는 전혀 맞지도 않습니다.
학습틀은 다시 교실형, 대화형, 관찰형, 감각형 등 4가지로 나뉘는데 현재 우리나라 교육방식은 교실형 위주의 주입식이며 8%쯤의 교실형을 제외한 90%의 아이들이 자기 학습틀에 맞지 않는 테스트를 받으며 불리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 셈입니다.
만약 교육정책자들이 각각의 재능들을 정밀하게 평가하는 학습틀을 만든다면 주입식 암기능력에 의한 단답형만 측정하여 서열을 정하는 우리나라의 단순한 교육정책이 얼마나 편협하며 많은 아이들의 재능을 꺾고 미래를 잘못 안내하는 것인지 이해 할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다양한 아이들의 재능을 개발시키는 교육을 하고 있지만 우리 교육은 7차교육과정에서 처음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번 서울시교육감 당선자가 초등학교 시험을 부활시키겠다는 취임사를 말하다 여론이 나빠지자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지만 그가 임기 중 행할 권한은 의심스러우며 신뢰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의 秀優美養加 부활론은 인성적성교육으로 가고 있는 7차교육과정과는 전적으로 배치되며 서울시장 맹박이의 교통혼란과 같은 교육난맥상을 예고하는 과거로의 후퇴가 될 것이 확실합니다.
과연 공정택이 빼어나고 넉넉하고 아름답고 기르고 더한다는 수우미양가의 원뜻을 이해하는지 의심이 갑니다.
현재 상류계층은 강남과 분당에 거주하며 그들만의 교육카르텔을 형성하고 그들의 자녀들에 대한 막대한 경제적 투자를 통해 계층신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자의 자녀들이 유리한 것은 전적으로 고액 잡학업자들이 추측 가능한 다양성이 결여된 편협하고 단순한 단답형 객관식시험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즉 일제 강점기의 부산물인 지금의 교육 시스템은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교과서와 단답형 시험으로 교실형의 소수 아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서열을 정하고 그 서열에서 밀리면 사회적 지위까지도 자기재능과는 거리가 먼 위치에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는 구조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과거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수동적으로 잘 따르고 반영하는 하부관리인 양성소로 식민지 한국의 학교들을 획일화된 학습틀로 운영했습니다.
그리고 사회적 도덕성보다 황국에 대한 충성이나 복종을 집단적 미덕으로 간주하는 윤리 교육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해방이후 그러한 요소들이 청산되지 못하고 친일 잔재세력들의 부활에 의해 유지된 것이 오늘날의 우리교육의 불행이기도 하며, 편협한 교실형 학습틀의 서열에 의해 그러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만 양성하여 사회적 다양성을 무시하고 국가를 운영한 이유로 우리 사회는 온갖 편법과 부정부패와 몰상식의 지병을 앓고 있는 고도비만의 사회로 현재 중병에 시달리고 있고 그 틈을 비집고 선 정치지도자도 그들의 기득권에 늘 도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만져보고 분해하고 경험을 해야 종합적이며 창의적으로 인식하는 재능을 가진 초등4개월 중퇴의 에디슨이나 대학을 중도 하차한 빌 게이츠류의 사람들도 그 당시의 교실형의 학습틀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입니다. 또 신통치 않은 중등교육시절을 보낸 아인슈타인과 내성적인 왕따소년 스티븐 스필버그는 어떤가요?
부분적으로 외국어교육 하나만 살펴보아도 남의 나라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본래의 취지와 얼마나 어긋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배우는 영어는 식민지 시절, 발음이 자유롭지 못한 일본의 영어 학습틀을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일본이 영어를 받아들일 당시 그들의 언어 특성상 영어를 도저히 제대로 말할 수 없는 현실을 깨닫고 택한 것이 어순이 다른 독해만이라도 제대로 하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들이 영어를 소리로서가 아니라 활자로서 자유롭게 이해하려는 학습틀과 교재들은 식민지한국의 교육정책에 그대로 이식되었고 다양한 발성을 할 수 있는 특성을 가진 언어적으로 우월한 한국은 아무 판단력 없이 일본식 발음을 강요받았고 문법위주의 독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무릇 언어는 대화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본래의 취지를 벗어난 상태로 외국어 교육이 이뤄지게 된 현실입니다.
한국은 산업화시대의 개도국이 아니라 고도첨단정보산업화 국가의 반열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진국이나 중국과 같은 개도국의 값싼 임금에 의한 생필품가격경쟁에 밀리지 않는 정책은 비정규직 확대라는 자본가를 위한 노동유연성보다, 정규직 확대에 의한 노동자의 안정적 기술적 질적 향상에 의해 그들의 추격에 본질적인 차별화와 고부가가치 확대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의 다양성과 다양한 잣대로 다양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가치 있게 만들어 가는 개인의 가치를 높이는 교육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찌 한 학년 수십만의 아이들을 똑같은 교과서로 단순히 주입된 암기지식을 기억 해 낼 수 있는지, 거의 말장난에 유사한 퀴즈와 같은 자질구레한 단답형 문제로 테스트하여 점수의 많고 적음만으로 서열화 시켜 다양한 특성을 가진 아이들의 재능을 매장시킬 수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사지선다형이나 객관식암기 테스트틀에는 창의성이나 정서적능력 등 다양한 아이들의 재능이 숨 쉴 틈이 없으며 생명력을 잃을 뿐입니다.
그런 후, 다양한 특성과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생존경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끌어주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을 통해 고양시키고 그들의 능력을 최대화시키는 테스트라는 다양한 잣대가 정립되어야만 합니다.
단군이래 최저의 학력이라고 기준도 근거도 애매한 말을 하기도 하는데 그 전에 최고의 학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칩시다.
그리고 한국의 중등교육과정은 선진국의 추종을 불허하며 각종 올림피아드를 휩쓸었다 칩시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비효율적인 수동적 관리교육을 안긴 일본조차 여럿 갖고 있는 학문과 관련한 노벨상이 하나도 없으며 그 뛰어난 올림피아드 수상자들이 오리무중인가요? 그리고 우리에겐 더뎌 보이는 선진국들의 학습틀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인재들을 배출하여 세계 문화에 왜 영향력을 줄까요? 왜 우리의 대학교 앞에선 책방이 망하고 목 좋은 유흥과 소비시장이 될까요 ...
그 학력 좋은 강남아이들이 모인 우리의 명문대학들의 학력이 세계 100등 바깥 끝쯤 된다는 데는 대학들의 시각이 좋지 않고 선수 하나를 발굴하기 위해 시골구석까지 누비는 초등학교 축구 코치만도 못 하다는 반증이며, 교육부에서 정해준 밥상에만 앉아 골라준 아이들을 놓고도 대학들의 텃세를 넘어보려고 치는 각 고교의 구라 때문에 신뢰 할 수 없다고 불평하며 완강한 강남의 상류층패거리의식으로 교육100년 대계 아닌 정저지와장사속이라는데는 정말 국운이 처량합니다.
왜 우리의 교육은 히틀러식 웅변대회가 있으며, 왜 독서상을 책 많이 읽은 순서로 주어야 하며, 왜 예체능이 종이시험지 하나로 평가 되어야 하며, 수학과학을 공식암기와 기계적 문제풀이를 잘 하느냐로 평가 되어야 하며 국어영어가 문법적 분해로 측정되어야 하는지 생각해보고 교육선진국들이 우리아이들의 학력?(순전히 우리들의 기준이지만)보다 낮은 교육을 시켜도 대학생이 되면 우리의 대학생들과 엄청난 학력차로 역전 되는 일이 왜 일어나는지 의문을 가져야 합니다.
왜 우리는 설득력 있는 상식적인 잔잔한 논리를 웅변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한권의 책이라도 오랜 기간 반복하여 잘 읽지 않으며 운동이나 예술을 타고나도 전 과목 성적 좋은 모범생이 아니면 빛을 발할 수 없으며 특별한 수학이나 과학적 관심사와 흥미를 가진 아이들과 감수성과 언어적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찾아내지 못 할까요.
더욱 정직하고 도덕적인 재능을 가진 이타적인 아이들을 경쟁에 몰아넣어 그 재능을 상실시켜 몰상식이 지배하는 사회로 만들고 성적 좋아 출세한 국가 관리자들과 지도자들이 직위를 이용하여 국민을 억울하게 하고 우리의 전통인 인심조차 말살 시켰을까요?
왜 우리의 교육은 뉴질랜드처럼 부족한 아이들을 기다려주고 이끌어 주는 시스템이 아니고 다수의 아이들을 좌절시키는 시스템인지 깊이 생각 해 보아야만 하며 진정한 학력이 아닌 금전을 교육 장사꾼이나 교육기술자들에게 쏟아 부어 훈련된 세계의 명문대학들이 인정하지도 않는 학력답지 않은 학력운운 하는 공정택이나 고교등급제류의 교육틀이 국가를 효율적이고 긍정적이고 따뜻하게 유지하는데 얼마나 기여할지 깊이 생각 해 보아야만 합니다.
국제원유가는 사상최고치를 계속 갱신하면서 우리 경제의 주름을 더욱 패이게 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해 우리는 220억$의 원유를 수입하여 30%이상을 자동차가 소비하여 그 어느 때 보다도 대체에너지 사용이 절실한 시점인데 최근 우리의 한 중소업체 연구원이 차세대용 축전지를 개발하는데 성공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대기업들과 학술계는 중소업체의 학벌카르텔 없는 연구원들을 업신여기고 더욱 국가조차 외면했고, 약빠른 미국과 독일은 이 기술을 높이 인정하여 제품화계약을 따내어 친환경 저속자동차를 완성하여 바로 상용화 키는 민첩함으로 오히려 이 획기적인 신기술을 장착한 제품들을 비싼 로열티를 주며 역수입해야 할 판입니다.
개발은 우리가 하고 오히려 수입을 해 와야 하는 우리의 사회교육적 현실은 후진적 교육틀과 망국적 학벌과 천민자본주의의 이기주의가 그 원인입니다.
밥을 먹은 뒤, 한참 후, 참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밥 먹자마자 또 밥을 먹는 짖은 원래의 밥이 부실 한데 원인이 있던가 필요 없는 이중의 영양을 공급하는 것이나 다름 아닙니다.
도대체 학교 정규수업 외에 보충수업이 왜 필요하고 왜? 사교육이 존재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런 후, 본래의 밥으로 영양을 충분히 공급하고 골고루 아이들에게 먹일 수 있어야 하고 아이들만의 삶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존중하며 친구들과 웃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만들어 주어야만 서울의 교통난맥상과 같은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어리석고 무책임한 사회적 걸림돌을 구호로 하는 시대적 변화를 망각한 구태의연한 복고풍의 꼴통 관료들이 선택되지 않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반영하면서 입시도 사회적 진화를 하는 현상인가?
경제!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부시의 전쟁과 인간들의 환경파괴로 인한 자연재해로 기름 장사들이 1배럴당 50불 이상씩 기름을 파는데 그 비싼 것을 사서 써야하는 우리의 처지는 당연히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는 과거 일제이후부터 YS정권까지의 친일매국과 부정부패의 먹이사슬에 의존해온 국가운영이 IMF를 불러 온 것이 원인이며 결코 그 난관을 수습하는 DJ나 노무현정부의 개방적 개혁정책 때문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외환보유고는 1천7백5억 달러(세계 3위: 건국 이래 최고)로 이제는 외국에 진 빚을 모두 갚고도 남으며, 받을 돈(대외채권)이 되려 2004년 1·4분기기준 7백39억 달러로 규모가 계속 커지고 수출증가세도 마찬가지입니다.
YS가 백화점기업들을 도소매업까지 법허용을 하여 시골구석까지 대규모 할인점들이 잠식한 것이 원인이지만 재래시장이 죽는다, 가정경제가 어렵다 불평하는 것보다, 10년 전에 비해 가족들의 핸드폰이 몇 개나 되는지, 인터넷비용, 유선방송비, 자가용이 몇 대인지, 자녀의 불필요한 사교육비는 없는지, 대형할인점보다 불결하고 믿을 수 없는 재래시장에 가고 싶은지 생각 해 보라고 합니다.
내수시장의 부진은 서비스업에만 종사하려는 국민의 취업에 대한 눈높이에도 문제가 있고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격차, 소득격차, 비정규직문제, 막대한 지하자금의 횡포를 막는 투명한 정부정책과 중산층의 해체로 인한 급격한 빈부격차의 누적된 양극간 모순들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택시기사가 경제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시골구석은 물론 가가호호 승용차가 과다하게 늘어나고 도로소통이 좋아진 것이 근본 원인이지 나빠진? 경제탓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택시기사도 퇴근할 때 자가용으로 집으로 간다고 하니.....
아이의 장래를 밝게 하려면 학부모들의 욕심부터 버려야 합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지적, 창의적, 정서적, 육체적 능력 모두가 탁월한 아이들은 없습니다.
그 중 1~2개의 능력이 탁월한 아이들도 드믄 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육 현실은 지적 능력 중, 일제가 남겨준 교육기준인 암기능력 하나만 높게 평가하는 편협한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편입니다.
또, 국제질서는 급속하게 글로벌 정보화 사회로 진보하는데도,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다수 국민들과 정책입안자들이 암기능력 하나로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사회는 훨씬 복잡하여 이 기준이 아니어도 아이들의 미래는 예측불허하게 달라집니다.
즉 좋은 학벌과 가문이 아니어도 돈을 많이 벌거나 대통령이 되기도 하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해도 좋은 배우자를 만나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장 바람직하게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종사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이웃까지 도우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몽둥이를 들고 변별력을 주장하며 아이들을 경쟁시키는 것은 지팡이를 든 주인이 강아지를 부르는 것이나 다름 아닙니다.
당근 강아지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 아닙니까? 강아지를 사랑한다면 지팡이는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죄송! 오래전의 글입니다. 다음 글은 (블라인드 면접과 한완상부총리에 대한 회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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