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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지맥 1구간
2011.12.31 (토)
산길 : 첨봉~뚜드럭재
사람 : 조진대고문님 부부, 무심이님, 이희중
거리 : 18.2km
첨봉~6.5~덕음산~2.2~우슬치~2.1~만대산~4.0~금강산~3.4~뚜드럭재 / 18.2km
Cartographic Length 23.0km Total Time: 10:36
(접근 : 바람재~첨봉 1.0km 20분)
화원지맥 1구간
2011.12.31 (토)
산길 : 첨봉~뚜드럭재
사람 : 조진대고문님 부부, 무심이님, 이희중
거리 : 18.2km
첨봉~6.5~덕음산~2.2~우슬치~2.1~만대산~4.0~금강산~3.4~뚜드럭재 / 18.2km
Cartographic Length 23.0km Total Time: 10:36
(접근 : 바람재~첨봉 1.0km 20분)
07:28 첨봉
07:48 바람재
08:18 △384.6m(깃대봉)
08:40 건들재 (건댓재)
09:04 ×384봉
09:36 구룡목재
11:03 덕음산
12:30 우슬재
13:42 ×447봉
14:13 만대산 (480)
14:28 만대산(萬垈山 ×466m)
14:52 금강재
15:35 죽산성
15:45 금강산
16:50 아침재
17:40 뚜드럭재
02시 부산을 출발하여 해남읍에 들어가니 6시쯤 된다. 아침밥 사먹으러 일부러 읍까지 들어갔는데, 군청 소재지임에도 문을 연 식당이 없다. 뱅뱅 돌다보니 마침 오늘이 해남장날이라, 장터에 장꾼들을 위해 문을 연 식당이 하나 있어 겨우 아침밥을 먹었다.
자경재(210m)
자경동 고개에 올라 잠깐 기다리니 고문님 일행이 도착하시고, 다시 내려올 길이라 배낭은 차에 두고 맨몸으로 출발하고,
막 동이 트려는 시점이라 해드랜턴은 없어도 되겠다. 첨봉 들머리는 고개너머 (동편)이다. 나르듯이 움직이니 땀 날 겨를도 없이 20분 만에 정상에 올라선다.
땅끝기맥 화원지맥 분기점
첨봉(352m)
땅끝기맥 진행시 저 이정표 기둥 위에 눈이 봉긋하게 덮혀, 마치 지리산 조개골에 철모를 쓴 이정표 처럼 보였다. 전혀 기약할 생각조차 없던 화원지맥 하러 다시 올줄 알기나 했나. 지형도에는 뾰족할 첨 尖峰인데 해남군의 유래에 나오는 삐죽산이 오히려 친근하게 들린다.
삐죽-산〔원경산, 첨봉〕【산】옥천면 대산리와 백호리, 용동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340m. 꼭대기가 뽀족하고 높아서 북쪽으로 멀리 바라보며 경치가 아름답다. 옥봉(玉峰)이라고도 하니 백옥봉의 아호가 여기에서 인연했다고 한다.
첨봉은 강진군과 해남군의 군계다. 이정표는 강진군에서 세웠고 화원지맥은 온전히 해남구역임에도 이정표에 [화원지맥]을 표시했다. 다른지역에 가보면 남의 구역에 대한 표시는 외면하는게 일반적(?)이더라만, 강진군의 아량이 돋보인다. 어찌보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런 일임에도 특별하게 보이는 이런 세태가 안타까운거라.
첨봉을 뒤로하고 4분 내려오니 왼쪽 아래로 자경동 골짜기가 보이는 바위가 있다. 멀리 왼쪽으로는 주작공룡능선이, 오른쪽으로는 두륜산 봉우리가 보인다. 편백나무 조림지를 지나 자경동 고개에 원위치 하니 왕복에 40분이다.
자경동 마을 / 공룡능선과 두륜산
자경재가 아니라 바람재다
바람재 (자경동고개) 220m
지형도에 고개이름이 없어 아랫마을 이름을 빌어 자경재라 불렀다만 해남군의 유래를 찾아보니 바람재다.
바람-재【고개】수리방죽 동남쪽, 용동리의 재경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바람이셈
선두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시길래, 배낭을 차에 실은 채 선두대장님을 상개마을이 있는 구룡목으로 보내고, 우리는 계속 맨몸으로 진행한다. 건너편 들머리는 고개 서편 완만한 밭지대다. 벌목을 하고 밭을 개간한 비탈인데 [소득작목재배지역] 노끈이 쳐져있다. 초장부터 덤불의 저항이 심하다.
△384.6m
△384.6m (깃대봉)
기반이 뭉그러져 번호식별이 안되는 삼각점이 있을 뿐이다. 이제사 공룡등뼈 위로 하늘이 불그스럼해 지고, 그것도 잠시 그뿐이다. 해가 구름속에 묻혀 일출은 없다. 이 봉우리도 깃대봉이란 유래가 있다.
깃대-봉【산】옥천면 용동리와 백호리 경계에 있는 산. 높이 384m. 세부 측량의 표준기가 박혀 있던 곳.
제대로 된 길이 없으나 ×293봉까지는 능선이고, 그 다음 급비탈에는 어디가 길인지 식별이 안되 무작정 내려오니 왼쪽으로 쏠려 고갯마루 남쪽으로 떨어졌다.
건들재 (170m)
2차선 아스팔트 도로. 지형도에 건들재이고, 유래는 건댓재로 나온다.
건댓-재【고개】⇒ 용동리의 "건댓재".
고개북쪽 콘크리트 방벽에 흰페인트로 ‘해달6.5’라 적어 놨는데 뭘 말하는지 알수 없다. 그 글씨 옆 방벽 터진 곳으로 수레길이 들어간다. 이 수렛길은 상개마을까지 양반걸음으로 갈 수 있는 길이다. 당연히 ×384봉(어깨)은 생략하고 질러가게 되는데 추천코스가 되겠다. 384봉은 오름이나 내림이나 점잖은 자세로는 통과가 안되는 봉우리다.
건들재 / 전봇대 옆 수렛길로 상가마을까지 가면된다.
고문님과 무심이님은 초장 △384.6봉에서 혼이 났는지 수렛길로 들어가시고, 임도 전문인 이 몸도 당연히 그리 가야하는데, 희중아우가 억지로 밀어 올린다.
[여기가 건들재입니다] 준희님 팻말이 걸린 들머리부터 빽빽한데, ‘혹시나’ 하면서 올라붙었지만 끝까지 ‘역시나’다. 길도 없이 오만 잡동사니들이 다 시비를 걸어온다만 맨몸이라 그런대로 해쳐나간다
×384
×384봉
건들재 건너편 △384.6봉과 높이도 거의 같은 봉우리. 아무것도 없이 덤불만 빼꼭하다. 남쪽 조망이 겨우 열린다만 이미 다 본 그림이라 그리 반갑지도 않고 하릴없이 내려가는데 흡사 올라 온 길로 내려가는 기분이 들 정도로 급한 우회전이다. 삼산면계를 따라 덕음산까지 간다.
내림길 사면은 온통 너덜이다. 돌이 무너진듯한 비탈에 낙엽이 덮혔고, 돌에 낀 이끼는 원시림에 있는 그런 것들이다. 돌밭이라 발디딤이 아주 까다롭다.
내리막길 10분을 내려오니 묘가 나오고 길이 있다. 우측 편백 조림지에서 내려오는 수렛길을 만나고, 거사(居士)나주나공묘는 석판으로 사각 둘레를 높혔다. 학생, 처사가 아닌 거사는 또 처음 본다. 아래쪽에는 더 넓은 묘터가 나오고 가야할 봉우리들이 조망된다. 이어 우측에서 나오는 넓은 수렛길은 건들재에서 직행으로 온 길이다. 여유만만하게 지나가셨을 고문님과 무심이님을 생각하니 더 열이나네.
덕음산이 보인다
안부까지 내려오니 임도는 왼쪽 중리마을로 내려간다. 바로 앞에 ×138봉이 하나 더 있는데 기왕 넘은거 빼먹고 돌아가려니 자존심 상한다. 올라가보자
밭을 가로질러 올라 붙었더니 빽빽한 시눗대 숲이다. 두 팔로 헤엄을 치듯 벌려가며 빠져나가 우측으로 내려가니 ‘상가’ 버스정류장 옆이다.
건들재에서 질러온 길
시눗대 밀림
구룡목재
고개넘어 배낭실은 차가 기다린다
백두대간에서 화원지맥까지
구룡목재 (80m)
삼산면과 옥천면의 경계. 해남군의 유래는 '구렁목'이다.
구렁-목【고개】금동리 서남쪽, 삼산면 상가리의 중리로 넘어가는 고개
[물좋은 가재골], [청주한씨 世葬阡] 표석 옆에 구룡목 간판이 있는데 그 내용이 삼상치 않다.
백두대간 호남정맥 땅끝기맥 화원지맥까지 연결을 하고 이곳을 ‘구룡목재’라 했다. 우리 같이 산줄기 따라가는 사람들의 화두를 이렇게 잘 대변해 주는 글귀를 본적이 없다. 말미에 상가 이장님 성함과 전화번호까지 기재를 했다. 상가마을 이장님을 만날 수 있을까. 저수지 옆길 따라 마을로 들어간다 지맥 능선 바로 옆이다
삼산면 상가리 마을회관
고문님이 회관 문을 두드려 이장님을 찾았으나 부재중이시란다. 조은 안내판에 대한 감사의 말씀이라도 드리려 했다만, 수령 350년의 팽나무(보호수)가 상가마을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이장님은 부재중.
지맥 마루금으로 복귀하려다, 조금이라도 질러 가려는 욕심에 마을 위쪽으로 올라가는 길따라 들어 갔지만 마지막 집 뒤로는 밀림 같은 동백림에, 시눗대 숲이다. 능선이 그리 멀지 않아 억지로라도 뚫으며 올라갔다.
밭이었던지 계단식으로 단이 쳐진 비탈을 다 올라 왼쪽으로 틀면 ×194봉을 향하는데 아까 384봉의 잡목은 갖다 댈 정도가 아니다. 묵은 길 형태는 있으나 가시나무와 덤불이 다 점령해 이리 돌고 저리 틀고 전지 가위로 자르며 들이밀어 보는데 100m 나가는데 10분이 더 걸릴 지경이다.
×194봉에는 묘목을 심었던지 플라스틱으로 만든 모종 컵이 흩어져 있으나 그 플라스틱이 다 삭아 부서러질 정도이니 얼마나 오래 묵은 길인지 짐작이 간다. 겨우 헤쳐나가 안부에 떨어지니 상가마을 맨 안쪽길이 바로 아래다. 이런줄 진작에 알았더라면 마을길 끝까지 들어와서 ×194봉 지난 안부로 올랐을터 이다만 다 긁히고 나서 후회해 본들 뭐하나.
×184봉은 이만하면 양반길이다. 덕음산으로 오르는 중간에 69번 송전철탑을 지난다. 280쯤 되는 능선에 올라서면 덕음산은 왼쪽으로 떨어져 있어 갔다가 되돌아와야 한다. 그런대로 길 흔적이 드러나고 다닌 자국이 있어 포기하지 않고 들러본다.
덕음산
덕음산 (×327m)
지형도에 ‘덕음산(덕룡산)’으로 표기되었고, 대동여지도에는 德隱山(덕은산)이다. 가운데 글자가 숨길 은隱, 응달 음陰으로 서로 다른데, 단어로 보건데 ‘숨길 은’이 뜻이 더 통하므로, 대동여지도의 ‘덕은산’이 맞겠다.
특별히 볼품이라고는 없는 봉우리 조망도 없어 잡목 속에 가려진 바위 위로 억지로 올라서니 삼산면 들판과 멀리 두륜산에 대둔산까지 보여진다. 우리가 올라 온 길 보다는 반대쪽 연동저수지쪽 길이 더 뚜렷한데, 이 길로 내려가면 연동저수지 뒤로해서 호산, 남각산까지 이어지겠다.
덕음산에서 돌아서 내려가면 왼쪽이 해남읍이 되고, 정면 나뭇가지 사이로 앞에 삼각뿔처럼 솟은 ×416봉이 보이는데 오늘 최고의 조망대가 아닌가 싶다. 안부에 내렸다가 오름이 시작되면서 조망도 동시에 열린다.
두륜산에서 대둔산까지
해남읍 연동리 들판이 넓게 펼쳐지며 기와집들이 보이는데, 해남윤씨 고산 윤선도의 사당인 녹우단이다. 지도에는 '녹우당'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
녹우단(綠雨壇)
고산 윤선도(尹善道)가 은거하던 집. 사랑채, 사당, 제각과 대문, 뒷대문, 방앗간, 창고, 연자맷간 들이 남아 있어서 호남 지방민가의 대표임. (사적 제167호)
고산사당(孤山祠堂)
옛날 양반 사대부들의 집안에는 고조부 이하 父(부)까지의 位牌(위패)를 봉안하는 祠堂(사당)이 있었고 아래로 代數(대수)가 늘어나 4대를 넘어서는 5대조부터는 위패를 묘로 옮겨갔다.
그러나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위패는 영구히 사당에 봉안하여 모시도록 국가가 허락한 神位(신위)를 不遷之位(불천지위) 혹은 不遷位(불천위)라 하였고 그 불천지위를 모시는 사당을 不조廟(부조묘)라 하였다. 고산사당은 불천지위를 받은 고산의 위패를 영구히 모신 곳으로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고산사당 뒤편에는 ‘해남 연동리 비자나무 숲’이 있다. 수령 5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비자나무 숲은 윤씨의 선조가 “뒷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유훈에 따라 후손들이 숲을 정성껏 보호하여 오늘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하며 문화적·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천연기념물 제241호)
녹우단
×416
암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멋진 그림은 계속되다가 ×416봉에 올라서면 절정을 이룬다. 왼쪽 멀리 월출산이 희미하지만 확연하고 다산 초당이 있는 강진의 만덕산, 석문-주작-덕룡-공룡에, 두륜산 뒤로 대둔산까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남한산경도 그림을 펼쳐 방위를 맞춰보니 동쪽 멀리 천관산까지 짚어진다.
선두대장님이 떡을 나눠 주면서, 능선 서쪽 들판보다 동쪽 옥천 들판이 더 넓어 보이는데 군청소재를 옥천쪽에 두는게 낫지 않겠나 하는 얘기를 하시는데, 풍수에 일가견이 있으신 갑따...
△381.3
내려가는 길에 삼각점 같은 대리석 기둥이 박혀있다. 윗면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데 어디에 쓰는 물건인감?
오래된 5만 지도를 찾아보니 △381.3 표기가 있다. 예전에 삼각점이었나 보다.
급하게 내림질 치더니 ×273봉을 넘어 18번국도 해남터널 위를 지난다. 우슬치 건너편 ×447봉은 높기만 한데 하염없이 내려간다.
옥천면 백호저수지
우슬재 / 왼쪽은 해남학생교육원
우슬재(牛膝峙 150m)
대동여지도에도 ‘우슬치’ 표기가 있다. 해남터널이 뚫리고는 옛길이 되었지만 교통량은 꾸준하다. [우슬재] 표석 옆에 수백년 된 듯한 동백나무가 여러그루 있다. 고갯마루에서 해남쪽으로 넘어가면 해태상과 [5-18민중항쟁 사적지 우슬재] 표시판이 있는데, 5.18 광주로 들어가는 시민군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트를 치고 시민군에게 총질을 했다는 슬픈 역사의 현장이다.
방벽 위로 올라가니 움푹 파진 교통호가 있어 바람을 피할 수 있으니 비좁지만 낑겨앉아 점심을 먹었다. (~12:58)
우슬재 전설
해남의 관문으로 해남 사람들은 우슬재를 넘어오는 순간 비로소 고향에 돌아왔다는 것과 편안함을 느낄 정도로 해남 사람들의 애환이 깃든 고개 이다.
해남은 예전에 토호들의 세도가 하도 높아 현감들이 부임해도 이들의 세도때문에 제대로 기를 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토호들의 세도 때문에 현감들이 해남으로 부임하는 것을 꺼릴 정도였는데 현감 김서구(1782년 2월-1783년 6월)가 부임하게 되었다.
그는 역학(易學)에 능한 사람이어서 금강산에 올라가 해남땅의 모양을 살펴보니 해남을 호천리에 있는 호산(葫山)은 현무의 형상이고 아침재와 우슬재는 각각 백호와 청룡 형상을 띠고 있었다.
해남 사람들이 유난히 거센 것은 이러한 모양이 좋기 때문이라고 본 그는 호천리에 있는 흑산과 우슬재를 3자 3치를 낮추어 끊어 버리면 지방민의 세도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해 이대로 시행한다. 이후로 현감의 권위를 세워 다스리게 됐다는 얘기가 구전되어 오고 있다.
이로 인해 혈맥이 끊긴 영향 탓인지 이후로 해남에서는 출중한 인물이 배출되지 않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해남 들감자'나 '해남 풋나락'과 같이 그다지 명예스럽지 못한 명칭이 붙은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만은 않다. 우슬재는 이후로 국도가 놓이고 도로 포장이 되면서 깎이어 많이 낮아졌지만 가파른 고개를 힘겹게 넘어서면 해남읍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슬재
소가 무릎을 꿇은 형상이란다
1명 사망, 수명 부상.
꾸준한 오름길이 시작되고 길 상태는 별로이나 걸리적거리지는 않는다. 200정도 올라가니 내려앉은 벙커 같은게 있고, 바위손이 뒤덮은 암릉이 나온다. 바위손이 또 몸에 좋다던가, 근래 무심이님이 몸에 조은거에 관심이 많아졌다. 북쪽만 뺀 조망이 시원하다. 서편 아래 둥근 운동장은 해남의 ‘우슬경기장’이다. 해남읍의 서쪽 벽을 이룬 남각산이 멋지게 보인다. 현 지형도에는 南角山이나 대동여지도에는 南郭山(남곽산)이다
굵은 로프가 두 줄로 걸린 일반등산로를 만나는데 해남읍 해남학생교육원에서 올라온 길이다. 철 난간에 로프를 두 줄씩이나 걸어놓은걸 보고 학생들 등산코스라 길 잃을까봐 이중으로 달았다는 희중님 설명, 꿈보다 해몽이다. 어쨌든, 여기서 금강산까지 해남읍 등산로라 제대로 사람 흉내를 내면서 산길을 간다.
×447봉 일대는 거대한 바위로 된 암봉이라 사면으로 길이 나있고, 돌아 올라가면 동편으로는 절벽이라 철난간이 쳐져있고 바위에 페인트로 ‘정상’, ‘야호’라 적어놓은걸 보니, 희중님 야그 학생들 등산코스가 맞나보다. 비로소 북쪽의 만대산 능선이 보인다.
해남 우슬경기장
해남읍, 남각산
금강산은 우틀~
헬기장(417m)
마루금 트랙은 우측인데 꺾을만한 데가 없어 면계에서 벗어나 계속 나가니 ×404봉 직전에 넓은 헬기장이 나온다. 여기 이정표를 보면 교육생은 직진으로 [B코스 정상1봉]으로 가고 우측 [금강산]은 (교육생 등산로 아님)이라 해놨다. 교육생이 아니라도 만대산 가는 길은 고속도로나 다름없다.
안부에는 우측으로 [옥천영신임도 0.8km] 갈림길이고, 만대산은 0.9km, 금강산은 5.4km나 남았다.
올라가면 거대한 바위군이 여러 형상을 나타낸다. 해남읍은 금강저수지 골짜기 틈으로 겨우 보이고 우측으로 월출산이 한결 뚜렷하게 보인다.
만대산 정상 이정목
이정목 기둥에다 만대산 정상 해발 480m라 적어놨다. 지형도상 만대산은 아직 멀었다만 높이는 이 봉우리가 더 높아 여기다 정상이라 표시했나보다. 넓은 등산로 여기저기 표지리본을 뜯어 버려놨다. 고문님이 여럿 주워 새 가지에다 걸었다.
만대산 480m
만대산(萬垈山 ×466m)
정상으로 표시한 이정목 봉우리에서 6분 더 가니 지형도상 만대산이다. 별 특징없이 고목나무에 준희님표 [만대산 466m]팻말이 걸려있다.
만대산 ×466m
금강재
×395m
직진은 [체육공원]이고 금강산은 우측이다. 이정표가 없다면 직진하기 좋을만한 곳이다.
금강재 (290m)
옥천면 신계리로 넘어 간다고 일면 ‘신기릿재’로 불리는 고개다. 벤치가 하나 놓여있고, 금강 저수지에서 올라 온 길은 뚜렷하고 신계리쪽은 갑갑하다.
금강재(신기릿재) : 금강저수지 동북쪽, 옥천면 신계리로 넘어 가는 고개
금강재에서 올라가면 동복오공, 보은이씨 합장묘가 있는데 묘 상석이 각각 나누어 벌어졌다.
×419m
×419m
북서로 가던 길이 남서로 바뀌는 지점. 옥천-해남-마산 3면봉이 된다. 북쪽 건너에 솟은 산이 방금 지나 온 산과 동명이산인 만대산(×443m)이다. 작은 만대산 우측으로 흑석, 가학산이 보인다. 해는 서산으로 떨어지는데 아직 남은 거리가 5km가 더 되어 마음이 바빠진다.
서쪽으로 몇걸음 내려가니 앞이 뚝 떨어지면서 정면으로 금강산 능선이 다 들어온다. 산불초소와 우측으로 통신탑이 보인다. 산불초소가 있는 봉우리에 정상석이 있고, 통신탑 있는데에 삼각점이 있다.
안부에 내렸다가 다시 올라간다. 고도가 높아선지 음달이라 그런지 부분적으로 잔설이 남아있다. 길은 여전히 활짝 열려있어 오로지 다리씸이다. 오름이 다하면 넓은 헬기장으로 나가게 된다
금강산
죽산성 헬기장
죽산성(竹山城)
지형도에 사각으로 성곽이 표기되어 있어, 헬기장 끝에까지 나가보니 석축이 있고 건너편 능선에도 성곽이 보인다. 죽산성에 관한 기록은 海南郡史에 나온다.
죽산현 : 본래 백제의 고서이현, 통일신라의 고(동)안현의 후신으로 현재의 마산면 장재리에 그 치소가 있었으며 죽산성이 그 산성으로 추측된다. 고해남과 마찬가지로 통일신라시대에 양무군의 영현이었다가 고려초에 양무군이 영암군에 영속되게되자 영암의 임내로 편입되었다.
죽산성의 북쪽 벽을 따라 길은 이어지고 산성의 서쪽 끝에 [팔각정]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해남읍이 훤하게 내려다보이고 정상은 0.07km, 바로 코앞이다.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금강산
금강산 (481m)
산불초소가 있고 [금강산 481m] 정상석이 있다. 북쪽의 금강산과 견줄만한지 어떤지는 모르겠다만 아주 조은산임에는 틀림없다. 금북정맥 서산의 금강산은 이름만 같을 뿐 아주 맹탕(!)이었는데 해남 금강산은 나름 한가락 하는 산이다. 따땃한 날 여유를 갖고 올랐다면 한나절 정도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앉아 있을 만하다.
금강산(金剛山) : 마산면 화내리와 해남읍 구교리, 수성리 경계에 있는 산. 경치가 아름다와 강원도 금강산에 버금간다고 한다.
멀어서 못가는 북녘의 금강산 대신 정상석 끌어안고 증명사진을 남기고 걸음을 독촉한다. 아직도 4km가 넘게 남았다. 통신탑 있는 봉을 향하면, 해남읍 일반등산로는 금강산에서 끝이다. 아침 나절의 잡목가지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나, 금강산 갔다왔노라~!
482.7m (△해남11)
해남에서 1등인 삼각점이 철망 울타리를 두른 산불감시탑 앞 억새에 묻혀있다. 1등인 만치 삼각점 기둥도 굵직하다.
금강산 삼각점은 감시카메라가 지킨다
억새 무성한 ×458봉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남은 봉우리가 보인다. 봉긋한 ×291봉 너머에 아침재일테고 그 너머 희미한 봉우리 하나 더 남았으니, 까딱하면 불 달고 내려가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나마 길 상태가 그런대로 나은 편이라 진행에 어려움은 없다. 산죽밭을 지나고 암릉에서 조망이 시원하다. 남각산은 이제 옆 그림을 보여주고, 아침재로 오르는 임도가 뚜드럭재였으면 좋겠다.
로프 걸린 바위틈으로 내려가고 한동안 편편하게 가다가 송전철탑을 지나 올라가면 해남읍-마산면계가 왼쪽으로 갈라지는 ×291봉이다.
×291
지형도에 ‘아침재’로 표기된 봉우리로 왼쪽 면계능선이 더 뚜렷하고, 북쪽 지맥으로는 길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가 조금 내려가니 숲이 헐렁해지며 수렛길 흔적이 보인다.
×291봉 덤불
아침재(95m)
군용으로 보이는 교통호를 만나 왼쪽으로 내려가니 노면이 비교적 양호한 임도에 내려선다. 백덕지맥의 아침재는 높은 고개란 뜻이었는데, 여기는 morning을 뜻하는 아침이다. 건너편 수렛길은 묘터로 가는 길이다. 어느새 카메라 후레쉬가 터지는 시각이나 다리 고달픈 병사들은 무덤가에 퍼질러 앉는다. 준희님의 팻말이 걸린 나뭇가지가 부러져 있어 튼튼한 가지에 옮겨 달았다.
아침재 전설
아침재는 해남읍에서 2km쯤 떨어진 학동리와 마산면 장촌리를 잇는 고개로 금강산이 서쪽으로 줄기를 뻗어 내려간 중턱에 가로질러있는 재이다. 해발 150m로 길이는 약 3km가량 된다. 이 고개는 수목이 우거지고 인가와 멀리 떨어져 있어 지금은 왕래가 거의 뜸하나 옛날에는 해남과 마산을 잇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마산면에는 백제 이래의 현치지(懸治址)인 죽산현이 있었다. 죽산현은 백제 때는 고서이, 신라때는 고안이라 불리다가 고려 때부터 이조 초기에 죽산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죽산현에는 명종때 대사간(大司諫)과 관찰사 등을 지낸 석천 임억령(1496년-1568년)을 비롯 명문고관 재사들이 모여 학문을 닦았다.
그런데 지금의 해남읍은 1412년(태종 12년)에서야 옥산현이 됐고 현감이 세종30년에야 정식으로 부임했다. 해남읍에 부임한 현감들은 당시 죽산현에 자신보다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들이 많아 아침마다 옥산현 현감이 죽산현 선비들을 찾는다고 해서 아침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아침재는 이조 때까지는 현감들이 넘나들던 길이었지만 해방 후로는 마산면민들이 주로 해남읍을 왕래할 때 이용하던 중요한 길이었다. 학생들의 통학로와 함께 오일장날의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였다. 현재 마산면 상등리와 마산면 소재지롤 연결하는 길이 뚫려 아침재는 옛길이 되어버렸는데 당시 일본인들이 이 길을 뚫을 때 꼬불꼬불하게 했다고 해서 마산면민들은 이 고개를 꾸부럭재라고도 부른다.
×255
×255
어쩔수 있나. 고달픈 발걸음 다독이며 꾸역꾸역 올라가면서 너른 바위에서는 먼데까지 열린다만 이제 조망도 한물갔다. 그렇게 20분을 터벅거리니 준희님 팻말이 걸린 255봉이다. 우측이라고 →화살표를 두 개나 그려놨다.
뚜드럭재(88m)
여기도 아침재처럼 교통호가 파져있고, 석축 옆으로 내려선다. 해남읍에서 마산면으로 넘는 2차선 아스팔트 도로다. 건너편에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해드랜턴 켜기 전에 산행 마친게 다행스럽다.
뚜드럭재 : 용전리와 상등리 경계에 있는 고개. 화내리로 넘어간다.
뚜드럭재
아침에 대놨던 무심이님 차를 타고 바람재로 가 내차를 회수하고, 야영이 좋다는 고문님을 달래고 꼬셔서 모델방을 잡았다.
이만한 방 5만원이면, 5명 목욕비만 해도 절반은 뽑는다.
방에서 밥하고 국 끓이다 쥔한테 경고장 한장 받고, 일찌감치 다리 뻗고 누웠다.
해남읍 사파이어Motel
모텔방에서 TV 리모콘으로 형광등을 끄는 신기술(!)을 전수 받고,
냉온수통 하단부가 냉장고 라는 사실, 그 안에 든 음료수 캔은 무료라는 것도 새로 알았다.
고기도 묵어 본 넘이 맛을 안다고... 내가, 모텔을 가봤어야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