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규 시집-『 외로움이 그리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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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노래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떠나지는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사람이 보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주머니에 그대로 있으면 가을이다.
가을에는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지고
그 맑은 마음결에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떠나보낸다.
‘주여!’ 라고 하지 않아도
가을엔 생각이 깊어진다.
한 마리의 벌레 울음소리에
세상의 모든 귀가 열리고,
잊혀진 일들은
한 잎 낙엽에 더 깊이 잊혀진다.
누구나 지혜의 걸인이 되어
경험의 문을 두드리면
외로움이 얼굴을 내밀고
삶은 그렇게 아픈 거라 말한다.
그래서 가을이다.
산 자의 눈에
이윽고 들어서는 죽음
사자(死者)들의 말은 모두 시가 되고
멀리 있는 것들도
시간 속에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
가을이다
가을은
가을이라는 말 속에 있다.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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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와 시인
우리집에는 수세식 화장실과
앞마당 한구석에 재래식 변소가 있다.
아버지는 굳이 뒷깐이라고 부르셨다.
뒷깐은 직계존비속이다.
장남인 내가 법통을 이어받아
국산품장려 캠페인하듯 드나든다.
어느 날 아침 뒷깐 창틀에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거미줄을 보았다.
금실은실에 매달린 이슬보석들
어느 絶句라고 그리 빛나랴
줄줄마다 詩眼이다.
거미는 몸 속에 집을 넣고 산다.
몸의 몸인 흙은 다 버려놓고
물질의 집만 드높이 짓는 인간들아
비워낼수록 새 집 얻는 거미를 보아라.
몸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잘 뉘는 것.
허름하고 후미진 곳만 찾는 거미여
내 가슴도 알맞이 허물어졌느니
외로움이 더 편한 방 하나
그 옆에 마련해 주지 않으련.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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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무
요 며칠
앞마당의 나무가
한 해 동안 써 모은
문장들을 퇴고하느라
파지들을 떨궈 내고 있다.
나무가 버린 낙엽들이
내겐 더 마음에 드는 대목들이다.
기어코
퇴고를 마친 나무가
마지막으로 남긴 문맥
한 줄기!
나무는
일체의 수사학을 거부했다.
P83
*
어머니
니가 만든 책에는
웬 빈 곳이 그리 많냐,
꼭 눈밭에 찍힌 발자국 같구나.
시집을 낼 때마다 하신
어머니 말씀,
비유법이 시인의 어머니다웠다.
아, 그런데
어머니 떠나신 자리가
시집의 여백보다 더 넓구나.
耳順 넘어 돌아본 지난 세월
아무 한 일도 없어
그대로 白紙인가.
그래, 이젠 거기에
詩쓰기가 제격이구나,
쓰는 것마다 유서가 되겠구나.
P103
*
하느님의 교훈
겨울바람은 사람들에게
다 떨쳐 버리라고
더 가벼워지라고
그래서 아주 비워버리라고 일러줍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옷을 더 두껍게
몸을 더 무겁게 하고
문을 닫고 삽니다.
마음의 문은 더 닫힙니다.
나무며 숲들은
바람이 지나가기 편하게
몸을 비우고 낮춥니다.
일 년에 한 차례씩
하느님은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걸 못 깨우친 사람들이
정말 답답해지시면
책장을 덮듯 흰 눈으로 조용히 가려 버립니다.
P116
*
노동조합
별들은
거대한 단일노조다.
단 한 차례도
파업을 한 일이 없다.
그래서 지상에
꿀이 있다.
P133
*
神의 거처
사람들은 하느님이
저 높은 곳에 계시다고
위만 쳐다본다.
하느님은 처음부터
위에 계시지 않았다
낮은 곳에 계셨다.
그러니 사람들아
하느님이 정 보고 싶으면
고개를 숙이고 , 더 숙이고
허리를 굽혀, 더 굽혀
아래를 보라.
그리고 잘 살필 것,
하느님을 밟고 있지는 않은지.
P143
*
안티골프
고 작은 구멍으로
공을 쳐 넣으려고
기를 쓰면서
이리 큰 구멍이 뚫린
우리네 가슴은
어찌 쳐다보지도 않는가.
P162
*
뜨거운 추억
1·4 후퇴 때
충청도 청양으로 피난 갔었다.
땔나무를 하다가
감시원에게 들켜 끌려 갔었다.
그들 사무실에선
드럼통 난로가 시뻘겋게 달아 있었다.
빼앗은 나무들을 그들은 난로에 처넣었다.
불길은 더 뜨거웠다.
그 열기에
부끄러움, 두려움도 재가 되어버렸다.
어린 나이였었지만
아무 소리도 못하고 나온 게
아직도 가슴에 불덩이로 남아 있다.
P163
*
개에게 사죄함
평소 잊고 사는 일
먹다 남은 밥만 주는 일
때로는 발로 찬 일
목줄을 풀어주지 못한 일
욕설에 이름을 차용한 일
자식을 낳으면 곧 나눠 준 일
지켜주는 집 문패에 내 이름을 내건 일
아파도 그냥 내버려 둔 일
동족을 먹은 일
* 정상 참작 요망사항
그래도 똥은 내가 치워 주었음
더구나 죽으면 내가 묻어 줄 것임
P174
*
시인의 이력서
화려한 경력을 보면
좀 과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내게도 이젠
올망졸망한 이력들이
눈 위의 발자국처럼 찍혀가는구나.
덜 익은 과일이랄까,
덧기운 옷가지 같아
참 누추하다.
그걸 훌훌 벗어 내던지고
지상에서 가장 어둡고 가장 빛나는 이름인
'시인'이라는 문패 하나로만
영혼의 안방을 밝힐 수 없을까.
왜 없을 손가,
내 가슴 속에
그런 脫俗의 시인 하나
아직 들여놓지 못해서 그렇지.
P187
*
주소불명
나의 시는 모두
뮤즈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다.
아, 그런데
번번히 반송되는구나.
뮤즈여
주소 좀 정확히 알려다오.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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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 사람
山은
까발개지고 파헤쳐져도
화가들이 그리기 좋게
거기 그대로 있다.
시인들의 말을 기다리며
입 다물고 있다.
깊은 아픔은
큰 바위로 눌러 두고,
속 썩음으로
숲을 더 푸르게 한다.
그런 사람,
그런 山같은 사람
이 땅에 하나
우뚝 있어 줬으면!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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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규 시인
-1942년 안양 출생
-연세대 국문과,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시집 『靈의流刑』으로 등단(1960)
-안양여고 교사, 연세대·덕성여대·경기대 문예창작
대학원 강사·안양대 겸임교수
-예총 안양시 지부장, 문인협회 안양시·경기도지회장
-중부일보 논설위원, 안양시민신문 회장
-저서
시집으로는 『이 어둠속에서의 지향』『흙의 사상』
『어머니, 오 나의 어머니』『하느님의 출석부』『가을 소작인』등
산문집으로는『사랑과 인생의 아포리즘 999』 『시인의 편지』
『사랑의 팡세』『당신의 묘비명에 무엇을 쓸까요?』등
평론집으로는 『무의식의 수사학』『 해설은 발견이다』등 다수
-수상
흙의 문예상, 경기도 문학상, 경기도예술대상, 경기도문화상,
편운문학상, 후광문학상, 한국시인정신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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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규 시집-『 외로움이 그리움에게』중에서
-도서출판 『시인』- E-mail : jhs500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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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시집을 받았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