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문신. 字는 여견(汝見)·여현(汝賢), 호는 서당(西堂), 서운관정공(휘 綏) 후손으로 교리(校理) 첨(瞻)의 아들이다. 부인은 양천허씨 허엽(曄)의 따님으로 조선 중기 시인으로 이름 난 난설헌(許蘭雪軒)이다. 1589년(선조2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벼슬은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에 그쳤고, 임진왜란때 순절했다. 시(詩)에 명성이 높았다.
1) <국역 석릉세적> (1996.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간)의 기록 내용 西堂공 휘誠立의 기록 -- [지봉유설]에 휘誠立에 대하여는 부인 허난설헌과 비교하여 너무 격하시킨 기록이 전하여지고 있으나, 서당공께서는 문과급제자로서 [성소부부고]에도 휘誠立께서 [策文]을 잘 짓는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국조인물고]에 휘魯, 휘弘度, 휘 의 비문이 다른 명현들과 함께 전하여 지고 있고, [해동역대명가필보]에는 우리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의 혈맥을 있게 하여준 휘自行의 외조부 徐甄(서견)의 필적이 전하여지고 있다.
서당공(휘誠立)은 왜적을 막고저 의병을 모집하고 宣陵과 靖陵의 의병을 모집, 왜적과 싸우시었다.
3)<연려실 기술 내 기록 내용 종합> (2003. 11. 18. 윤만(문) 제공)
▣ 연려실기술 제15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임진왜란 임금의 행차가 서도(西道)로 파천(播遷)가다 ▣
○ 이때 왜적의 소식이 날로 급박해졌다. 임금이 비변사에 명하여 장수될 만한 인재를 추천하게 하였는데 가리포 첨사(加里浦僉使) 이순신(李舜臣)을 발탁하여 전라 좌수사를 삼았으니 좌상(左相) 유성룡이 추천한 것이다.
○ 변방의 사정을 아는 재신(宰臣)을 골라 하삼도(下三道)를 순찰케 했다. 김수(金晬)를 경상 감사, 이광(李洸)을 전라감사로 삼고, 윤선각(尹先覺)일명 국형(國馨)을 충청 감사로 삼아 병기를 준비하고 성지(城池)를 수축케 하였다. 이때 오랫동안 태평이 계속되었으므로 서울과 지방이 편한 것만 알고 부역을 꺼려 원성이 가득하였다. 양남(兩南)에 쌓은 성은 모두 모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크고 넓게 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하기에만 힘썼다. 《징비록》
○ 임진년 봄에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나누어 보내어 변방 준비를 순시(巡視)하게 했다. 이일은 충청ㆍ전라도에 가고, 신립은 경기ㆍ황해도에 가서 모두 달이 넘어 돌아왔는데 활ㆍ화살ㆍ창ㆍ칼이나 점검(點檢)하였을 뿐이었다. 신립은 본래 잔폭(殘暴)하기로 이름이 있어 가는 곳마다 사람을 죽여 위엄을 세웠다. 《조기야문》ㆍ《징비록》
○ 특별히 승지 김성일을 경상 좌병사에 임명하였다. 비변사에서 유신(儒臣)은 이 소임에 합당하지 않다고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징비록》
○ 이때 도성 안 선비들이 천ㆍ백(千百)으로 떼를 지어, 미치광이나 괴물처럼 노래하고 춤추며 웃다가 울고 하여 부끄러움을 모르고 도깨비나 무당의 흉내를 내며 다니니 흉하고 놀랍기 말할 수 없었는데, ‘등등곡(登登曲)’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명가(名家)의 자제인 정효성(鄭孝誠)ㆍ백진민(白震民)ㆍ유극신(柳克新)ㆍ김두남(金斗南)ㆍ이경전(李慶全)ㆍ정협(鄭協)ㆍ김성립(金誠立) 등 30여 명이 그것을 불렀다. 사람들이 이것을 난리 나고 나라 망할 징조라고 하였다. 《일월록》
--- <희윤의 묘비> 허봉 지음 --- 피어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 - 희윤의 아버지 성립(誠立)은 나의 매부요 할아버지 첨(瞻)이 나의 벗이로다 눈물을 흘리면서 쓰는 비문, 맑고 맑은 얼굴에 반짝이던 그 눈! 만고의 슬픔을 이 한 곡(哭)에 부치노라
<허난설헌 시비>
<신 시비>(2006. 4. 발용(군) 제공)
--- <아들딸 여의고서> ---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놀 테지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며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종 목-시도기념물 90호
명 칭 허난설헌(許蘭雪軒墓) 분 류-묘 수 량-1기 지정일-1986.09.07 소재지-경기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29-5 소유자-안동김씨서운관정공파종중 관리자-안동김씨서운관정공파종중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릉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 가문은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누대의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 이러한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다. 가정내의 불화와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일부를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 애송되었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 閨怨歌〉와 〈봉선화가 鳳仙花歌〉가 있으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참고문헌 蘭雪軒詩集(國立本) 許筠全集(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81) 女流詩人 許蘭雪軒考(朴鍾和, 成均 3, 成均館大學校, 1950) 許楚姬의 遊仙詞에 나타난 仙形象(金錫夏, 國文學論叢 5·6合輯, 檀國大學校, 1972) 허난설헌연구(문경현, 도남 조윤제박사고희기념논총, 1976) 역대여류한시문선(김지용편역, 대양서적, 1975). 〈高敬植>
2) 허난설헌의 생애 (2002. 8. 30. 영환(문) 제공) - 정리: 류주환 허난설헌(許蘭雪軒)은 1563년(명종 18년)에 태어나서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 27세로 사망했다. 난설헌이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1592년, 선조 25년 발발)이 일어나기 직전의 조선 중기로서 당시 조선의 정세는, 정치적으론 연산군 이후 명종에 이르는 4대 사화(四大士禍)와 훈구(勳舊)·사림(士林)세력간의 정쟁으로 인한 중앙정계의 혼란, 선조 즉위 이후 사림세력의 득세로 인하여 격화된 붕당정치 등으로 정치의 정상적인 운영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난설헌의 본관은 양천(陽川) 허씨, 이름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이다. 초희라는 이름은 장성해서까지 사용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번이라는 자는 난설헌 자신이 중국에서 옛부터 전해져온 여선(女仙)인 번부인(樊夫人)을 사모하여 지은 것이라고 한다. 난설헌이라는 호의 유래는 직접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고 다만 난초(蘭)의 이미지와 눈(雪)의 이미지에서 지어진 것이라 생각된다. 난설헌은 강릉(옛 지명은 임영(臨瀛)) 초당리에서 아버지 허엽(許曄)과 어머니 김씨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허엽(1517 - 1580)은 호가 초당(草堂)으로 후에 경상감사를 역임하였고 동서분당 때 동인의 영수가 된 인물이다. 난설헌의 어머니는 허엽의 둘째 부인이었으며 허엽은 첫째 부인인 한씨부인과의 사이에 두 딸과 아들 성(筬)을 두었고 김씨부인과의 사이에는 봉([竹封]), 난설헌(許蘭雪軒), 허균(許筠)의 2남 1녀를 두었다. 허엽은 난설헌 18세 때 상주에서 객사했다. 난설헌보다 15세 위였던 큰오빠 허성(許筬, 1548 - 1612)은 호가 악록(岳麓)이고 이조·병조판서까지 지냈다. 작은오빠 허봉(許봉, 1551 - 1588)은 호가 하곡(荷谷)이고 자가 미숙(美叔)인데 홍문관 전한을 지냈고 강직한 성격으로 임금에게 직언을 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허봉은 1583년, 난설헌 21세 때 율곡 이이의 잘못을 탄핵하다가 귀양 갔다가 3년 후 방면되지만 불우하게 지내다가 술에 의해 몸을 망쳐서 난설헌 26세 때 객사했다. 그는 난설헌보다 12세 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난설헌의 재능을 아껴주었다. 그리고 동생 허균(許筠, 1569 - 1618)은 난설헌보다 여섯 살 아래로서 호는 교산(蛟山)이고 형조·예조판서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아주 총명하고 지식이 막힘이 없었으며 개혁의식이 뚜렷했다. 허균은 봉건적 사회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자이며, 후일 혁명을 준비하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50세에 처형당했다. 간단히 말해서 봉, 난설헌, 균은 모두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을 갖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모두 불행하게 죽었다. 난설헌의 집안은 아버지와 자녀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세상 사람들은 이들을 허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 불렀다. 허엽은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화담 서경덕 등에게 문장을 배웠다. 난설헌은 작은오빠 봉, 동생 균과 같이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서울 건천동에서 장성했고 결혼 생활도 서울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 건천동은 김종서, 정인지, 이순신, 유성룡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라 한다. 난설헌은 문장을 집안에서 배웠다. 일찍부터 글을 깨우쳤고 도교의 신선세계에 대해 배웠다. 난설헌은 특히 태평광기(太平廣記; 중국 송(宋)나라 학자 이방 등이 편찬한 설화집. 신선, 도술 등의 이야기가 많이 나옴.)를 즐겨 읽었다고 한다. 난설헌은 8세 때인 1570년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그것은 신선 이야기에 나오는 달(月)의 광한전에 백옥루를 새로 짓는다고 상상하고 그 건물의 상량문을 쓴 것이었다. 난설헌의 글재주는 허균과의 일화에서 잘 드러난다. 허균 자신도 글재주가 남보다 뛰어났는데 어릴 적에 시를 써서 누나인 난설헌에게 보였다. 그 시의 내용에 '여인이 흔들어 그네를 밀어 보낸다.' (女娘료亂送秋千) (*다스릴 료)란 시구가 있었다. 이를 보고 난설헌이 '잘 지었다. 다만 한 구가 잘못되었구나.'라고 말했다. 균이 '어떤 구가 잘못되었는가?' 하고 물으니 난설헌이 곧 다음과 같이 고쳐 주었다. '문 앞에는 아직도 애간장을 태우는 사람이 있는데, 백마를 타고 황금 채찍을 하면서 가버렸다.' (門前還有斷腸人, 白馬半拖黃金鞭) 난설헌의 시들은 도교적인 측면과 당나라 시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보이고 있는 것들이 많다.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이 화담 서경덕에게 배웠는데 이것도 난설헌이 도교에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드는데 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작은오빠 하곡 허봉은 난설헌보다 12세나 위였기 때문에 난설헌의 어린 시절에 충분히 그녀를 가르쳐 줄 위치에 있었다. 봉은 자기의 글벗인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글을 배우게 해주었다. 이달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는데 서얼로 태어났기에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상 벼슬길에 나갈 수 없었고 떠돌이 생활을 했으며 틀에 박히지 않은 당시 풍의 글을 썼다. 난설헌은 이달에게서 자유분방한 성격을 지닌 당나라 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난설헌은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14세나 15세에 시집을 갔다. 남편은 안동김씨 집안의 김성립(金誠立)이었다. 그의 집안은 5대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다. 김성립은 허난설헌보다 한 살 위였고, 자는 여견(汝見)·여현(汝賢), 호는 서당(西堂)이었다. 그는 나름대로 문장을 했지만 난설헌의 경지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던 것 같다. 그의 처남이었던 허균은 그를 "문리(文理)는 모자라도 글을 잘 짓는 자"라고 평했다. 즉, 글을 읽으라고 하면 제대로 혀도 놀리지 못하는데 과문(科文; 과거(科擧)의 문장은 우수하였다 한다. 그는 외모가 잘 생기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 공부에도 그다지 뜻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1589년(선조 22), 즉 난설헌이 죽던 해, 자기 나이 28세가 되어서야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는 후처로 남양홍씨(南陽洪氏)를 맞아들였다. 난설헌이 죽고 3년 후인 그의 나이 31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의병으로 싸우다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벼슬은 정9품의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었다. 시체를 찾지 못해 의복으로만 장례를 치루었다. 그는 자식이 없이 죽어서 집안에서 양자를 들였다. 난설헌의 외모는 뛰어났고(佳人; 이덕무 청장관전서), 성품도 어질었다(賢; 허균의 학산초담)고 한다. 난설헌은 아주 많은 책을 읽었고, 아주 많은 작품을 썼다. 글을 쓸 때에도 생각이 마치 샘솟듯 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고 한다. (허부인난설헌집 부경란집) 허균의 기록에 의하면 부부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고, 고부간 갈등도 심했던 것 같다. 부부간의 갈등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얘기들이 전해온다. 남편 김성립이 접(接: 글방 학생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에 독서하러 갔다. 난설헌은 남편에게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古之接有才, 今之接無才)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즉 파자를 사용해서 지금의 접은 接에서 才자가 빠진 妾(여자)만 남아있다고 하며 방탕하게 노는 것을 꾸짖었던 것이다. 다른 얘기에는 김성립과 친구들이 집을 얻어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었을 때 김성립의 친구가 거짓으로 '김성립이 기생집서 놀고 있다'고 했다. 난설헌이 이를 전해 듣고는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시를 한 구절 써서 보냈다.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길래 이간질을 시키는가?" (郎君自是無心者, 同接何人縱半間) 이를 보고 사람들은 난설헌이 시에도 능하고 기백도 호방함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김성립은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난설헌을 멀리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고 또 역설적으로 평소 기생집에서 놀았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1579년 5월(난설헌 17세)에 아버지 허엽이 경상감사가 되어 내려갔다. 다음해인 1580년 2월(난설헌 18세),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사망했다. 이때부터 허씨 집안이 기울기 시작한다. 작은오빠 허봉은 시집간 누이동생인 난설헌을 아껴서 시도 지어 보내고 붓도 선물하였다. 난설헌의 글재주를 아끼는 마음과 형제애를 느낄 수 있는 사건이다. 특히 1582년(난설헌 20세)에는 허봉이 난설헌에게 "두율(杜律)" 시집을 보내 주면서 "내가 열심히 권하는 뜻을 저버리지 않으면 희미해져 가는 두보의 소리가 누이의 손에서 다시 나오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라고 써주었다. 강직한 성격의 허봉은 1583년(난설헌 21세)에 율곡 이이를 탄핵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1585년 봄 (난설헌 23세), 상을 당해 외삼촌댁에 머물렀는데 이때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를 지었다. 이 해에 허봉이 방면되지만 서울에는 들어오지 못하고 떠돌아다녔다. 1588년 9월(난설헌 26세), 금강산에 있던 작은오빠 허봉이 황달과 폐병으로, 향년 38세의 나이로 객사를 한다. 난설헌에게는 딸과 아들이 하나씩 있었는데 아들의 이름이 희윤(喜胤)이었다. 그러나 딸을 먼저 잃고 다음 해에 아들을 잃었다. 이들이 태어나고 죽은 연도는 명확하지 않다. 희윤의 묘비명을 허봉이 지어준 것을 보면 모두 허봉이 귀양(난설헌 21세 때) 가기 전의 일들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난설헌은 몰락해 가는 집안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식을 잃은 아픔, 부부간의 우애가 좋지 못함과 고부간의 갈등, 그리고 사회의 여성에 대한 억압 등등을 창작으로 승화시켰음에 틀림없다. 그녀는 항상 화관(花冠)을 쓰고 향안(香案: 향로나 향합 따위를 올려놓는 상)과 마주앉아 시사(詩詞)를 지었다고 한다. (이능화(李能和),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자신의 세계에서 이미 신선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난설헌이 지은 시와 문장이 집 한 간에 가득 찼다고 한다.
난설헌의 죽음은 신비롭다. 허균의 《학산초담》과 구수훈(具樹勳)의 《이순록(二旬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난설헌이 일찌기 꿈에 월궁(月宮)에 이르렀더니, 월황(月皇)이 운(韻)을 부르며 시를 지으라 하므로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허경진 역) (碧海浸瑤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라고 하였고, 꿈에서 깨어난 뒤 그 경치가 낱낱이 상상되므로 "몽유기(夢遊記)"를 지었다. 그 뒤에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今年乃三九之數, 今日霜墮紅) 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3·9는 27이라, 난설헌이 세상에 살다 간 세월과 같다.
난설헌은 그렇게 1589년 3월 19일, 향년 27세로 요절했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들은 다비(茶毗: 불교용어로 불태우는 것. 화장.)에 부치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초당(草堂) 허엽은 선조조 동서분당 때 동인의 영수가 된 인물로 슬하에 허성(許筬), 허봉(許 ), 허난설헌(許蘭雪軒), 허균(許筠)이 있어 모두 시문에 뛰어났다. 특히 허난설헌은 여류시인으로 이름나 황진이(黃眞伊)·신사임당(申師任堂)과 함께 삼대 여류시인으로 꼽히고, 허균은 서손을 차별대우하는 봉건적 사회제도의 개혁을 부르짖은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작자로 널리 이름났으며 허엽의 아들이다.
허균은 1594년(선조2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검열·설서를 지냈으며 1597년 중시문과에 장원, 다음해 황해도 도사가 되었다. 이어 춘추관 기주관·형조정랑을 거쳐 1602년 사예·사복시정을 역임, 이어 전적·수안군수를 지낸 뒤 1606년 원 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영접, 이때 탁월한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 후 사의원정, 삼척부사, 내자시정, 공주목사, 형조참의를 지내고, 1 610년(광해군2) 진주부사로 명나라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얻어 왔다.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교의가 깊었던 서자 출신의 박응서(朴應犀)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정을 위해 당시 권신이던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예조·호조의 참의를 지내고, 숭문원 부제조를 거쳐 1614년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7년 폐모론을 주장하는 등 대북파의 일원으로 왕의 신임을 얻은 것을 기화로 반란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해 좌참찬에 승진, 다음해 하인준(河仁俊)등과 반란을 계획하기기 탄로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처형되었다.
여자는 태어나면서 어버이를 따르고 혼인 해서는 남편을 섬기며 늙어서는 자식을 따라야 하는 삼종(三從)의 도가 수명처럼 지배하던 가부장적 사회 제도에서 여자에게 필요 한것은 오로지 복종(服從)과 인내(忍耐)였다. 조선사회(朝鮮社會)를 살다간 여인들을 얘기할때 우리에게 먼저 떠올리는 것응 한(恨)이다. 어려서 태어나면 호적에도 올리지 않고 여자로서의 행실을 가르치는 외에는 글공부도 시키지 않았고 출가 해서는 오로지 남편만을 섬기며 시집 살이를 해야했다. 귀먹어리3년 장님3년 벙어리3년으로 지내는 동안에는 가문(家門)을 이을 아들을 낳아야 했고 그러지 못하면 소박데기 신세의 서러움을 씹어야 하는 오로지 기다림만이 그네들의 위안 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울타리속에 갇힌 여인들 이였기에 그들의 한을 시(詩)나 노래속에 담았다. 조선시대 여류시인 중에서 첫손에 꼽는 인물이 허난설헌이다 그에게서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한이며 지식인으로 서의 고뇌를 모두 느끼게 한다. 그의 어릴때 이름은 초희(楚姬)였고 자는 경번(景樊)이며 본관은 양천(陽川)난설헌(蘭雪軒)은 호다. 조선시대 여인들중에서 드물게 호를 가졌던것으로 보아 그의 의식세계는 남달랐지만 그 때문에 그의 일생이 얼마나 번뇌에 찼던가를 짐작케 한다. 천품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용모를 타고나 어렸을 때에는 여신동(女神童) 라고 까지 하였으나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와 함께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아내로서의 슬품, 자식을 사별하는 어버이로서의 비애를 모두 겪고 삶의 의욕을 잃어 시작(詩作)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1589년(선조22년) 3월19일 27세의 일기로 요절한다. 허난설헌은 조선명종 18년(1563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협의 딸로 태어나 명문대가의 안동김씨 김성립과 결혼했으나 원만치 못한 규원과 친정이 역옥에 연루되는 겹친 화액에서 오는 고뇌를 시작으로 도학적인 분위기속에서 학문세계에 눈을뜨게 된다. 그의 문장력은 여성특유의 감상적 시풍에 시세계를 이룩, 작품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건네주자 중국에서 "난설헌집"이라는 시집이 간행되어 겪찬을 받았으며 일본에까지 애송되었다. 명나라 문장가들 까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헸다는"광한전백 옥류상량문"은 8살때 지었다 한다. 허난설헌은 난편에게 버림받은 아픔과 함께 두자식을 병으로 잃고 만다. "작년에 딸 잃고 올해에는 아들을 여의다니 슬프다 광릉땅에 두 무덤이 마주 섰구나.백양나무에 바람 처량이 불고 소나무 숲엔 도깨비 불만 밟다니. 지전을 뿌려 혼을 부르고 술잔을 네 혼에 바치노니 너의 남매 가엾은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 배안에 또 아이 있으나 어찌 장성하기를 바라리 이제 황대사를 읊으며 통곡 과 피눈물을 삼키노라" 이렇듯 자식을 잃은 어버이로서의 애끓는 심정을 시로 담았다. 이때 그의 친정에서는 당파싸움에 몰려 오빠 허봉이 갑산으로 귀양을 가는등 설상가상 이었다. 그는 또 인생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체험했고 천재이기에 어느 사람보다 뜨거운 정열과 애정을 가지고도 번뇌와 우수를 겪어야 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산29의5 남동향을 바라보고 있고 주위에는 안동김씨의 문중 묘젹 30여기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오늘까지 그가 남긴 작품으로서는 시2백11수와 두편의 산문이 전해지는데 그의 시에는 신선의 세계가 즐겨 등장한다. 철저한 남권중심 사회로 자유분방 함이 인정되지않는 폐쇠된 사회,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해도 여자에게는 오히려 허물이되는 사회, 삼종의 예와 칠거지약으로 여성을 울타리에 가둬둔 현실 세계에서 새로운 이상향은 그림으로서 정신적인 안식처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자들은 그의 신선세계가 현실을 부정한 허구적인 세계라기 보다도 현실을 토대로한 미화세계라고 말한다. 허난설헌, 그는 평생에 3가지 한을 가졌다고 하는데 남자아닌 여자로 태어났음이 그 첫째고 조선처럼 좁은사회에 태어나 기개를 펴지 못했다는 것이 둘째, 시재를 겸한 의걸을 남편으로 섬기지 못했음을 원통히 여겼다.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허난설헌" 도내의 흩어져 있는 수많은 충신열사 들의 무덤이 세월속에 스러져가고 있음을 보아왔던 것과는 달리 그의 글이 오히려 세월속에서 더 큰빛을 내듯 그는 죽어서도 오늘까지 살고있는듯 하다. 1995. 5.25 ...난설헌묘역에서... 김 태 영
☞ 위의 글은 군사공파 태영씨가 모 일간지 기고란에 올렸던 글을 대필한 것입니다
5)허난설헌 거주지-서울 건천동(서울시 중구(中區) 인현동(仁峴洞) 1가(一街) 40번지 부근) (2003. 3. 21, 본 홈 게시판 자료 인용)
서울시 중구(中區) 인현동(仁峴洞) 1가(一街) 40번지 부근의 마을이 건천동(乾川洞)이었다. 생민동(生民洞)에서 흘러오는 개천이 있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늘 말라 있으므로, 마른냇골 또는 한자명으로 건천동(乾川洞)이라 한다. 이곳에 이름난 이가 많이 났는데, 단종 때에 김종서(金宗瑞:順天人), 정인지(鄭麟趾:河東人), 이계동(李季仝:平昌人), 세조 때 양성지(梁誠之:南原人), 김수온(金守溫:永同人), 이병정(李秉正:全義人), 중종 때 유순정(柳順汀:晉州人), 권민수(權敏手:安東人), 유담년(柳聃年:文化人), 명종 때 노수신(盧守愼:光州人), 허엽(許曄:陽川人), 선조 때 유성룡(柳成龍:豊山人), 허봉(許봉:陽川人), 이순신(李舜臣:德水人), 원균(元均:原州人)이 모두 이곳에서 났으으로, 더욱 유명하였다. 허난설헌도 이 곳에서 성장하였다.
* 2003. 8. 17. 안.사.연(안동김씨 사아버 학술 연구회)에서 이 지역을 답사하였으나 아무런 표석이 없어 확인하지 못함
"허난설헌의 「양간비금도」는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소녀가 그림 속의 인물로 등장하는 첫 그림으로 보여진다. 임란 전 조선중기까지의 그림이 중국의 고사인물도나 우리의 산수가 아닌 화보풍의 산수를 그린 데 비해 허난설헌의 「앙간비금도」는 주변의 실경이 등장하는 경우로 조선후기 진경산수와 풍속화에 선구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여성화가에 대한 소고", 김선희, http://www.femiart.co.kr/gallery/t-history1c.asp))
(2)묵조도
<묵조도>(2002.3. 18. 영환(문) 제공)
(출처: '한국여류한시문선', 김지용, 대양서적, 1973.) 『 기울어진 처마 스쳐 짝지어 제비 날고 낙화는 분분하게 비단옷을 치고 있네 동방 깊은 곳에 임 생각 상한 마음 푸른 강남 가신 님은 돌아오질 아니하네 비단폭을 가위로 결결이 잘라 겨울 옷 짓노라면 손끝 시리다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저음은 등잔불도 돋울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 호수 가 달이 뜨서 밝아오며 연 캐는 아가씨들 밤중에야 돌아가네 이 기슭에 행여나 배 저을세라 한쌍의 원앙들이 놀랄까 두렵구나. 』
경기도 용인읍 원삼면 검지산의 양천허씨(陽川許氏) 묘역은 초당(草堂) 허엽(許曄, 1517~1580)과아들인 허성(許筬, 1548~1612)ㆍ허봉(許篈, 1551~1588)의 묘가 있고,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許筠, 1569~1618)의 묘와 여류시인으로 당대를 풍미했던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시비가 있다.
▲ 양천허씨 묘역
▲ 허엽 묘표 탁본
▲ 허엽 신도비
▲ 교산 허균의 묘
허 난설헌(許蘭雪軒)의 시비(詩碑)
양천 허씨 묘역의 신도비 뒷쪽에는 화강암으로 된 비가 서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시비(詩碑)이다. 앞면에는 ‘蘭雪軒許楚姬詩碑’라고 쓰여 있고, 그 좌측 위쪽에는 친필을 네모지게 테두리를 두르고 음각하였는데, 글씨가 아담하고 여성스러우면서도 획의 뻗침과 붓의 놀림이 시원하고 조화로와 많은 사람들이 탁본을 하여 집에 걸어 놓는다 한다. 그 내용은 ‘한견고인서(閒見古人書)’, 곧 ‘한가하면 옛 사람의 책을 보라’는 뜻으로 난설헌이 얼마나 책을 좋아하고 여러 사람의 문장을 섭렵하였는지를 여실히 들어내는 글귀이다. 시비(詩碑) 뒷면에는 생전에 지은 시를 1969년 시를 추모하는 문인들에 의하여 각(刻)을 하여 놓았다.
▲ 허난설헌 시비 전면
▲ 허난설헌 시비 후면
하늘 하늘 창가의 난초잎들은 (盈盈窓下蘭) 어쩌면 저렇게도 향기가 나는가 (枝葉何芬芳) 서풍 한 번 잎새에 스치고 나면 (西風一披拂) 그만 찬서리에 시들어지는데 (零落悲秋霜) 뛰어난 그 모습은 초췌해져도 (秀色縱凋悴) 맑은 향기는 더욱 짙구나 (淸香終不死) 이 모든 것은 내 마음을 슬프게 해 (感物傷我心) 자꾸만 옷깃에 눈물 적시네 (涕淚沾衣袂)
이 시는 난설헌이 지은 ‘감우(感優)’라는 연시(聯詩)의 첫째 연인데, 창가의 난을 보고 자기 신세를 한탄한 노래로, 시상(詩想)과 문장력이 뛰어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싯귀에서 느끼는 바와 같이 그녀는 27세에 요절할 운명을 타고난 듯 슬픔이 가득하다.
종 목 : 문화재자료 59호 명 칭 : 강릉이광노가옥 (江陵李光魯家屋) 분 류 : 고가 수 량 : 1동 지정일 : 1985.01.17 소재지 : 강원 강릉시 초당동 475-3 . 소유자 : 이광노 관리자 : 이광노
조선 선조 때 문신인 허엽(1517∼1580)이 살던 집으로 지은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곳은 허엽의 딸이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허난설헌(1563∼1589)이 태어난 곳으로 전한다.
행랑채의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마당을 거치면 ㅁ자형의 본채가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하고 그 사이에는 광을 배치하였다. 안채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부엌과 방, 마루로 되어 있는데 건물 앞·뒤로도 칸을 구분한 겹집 형태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솟을대문과 협문을 두고 공간을 구획하여 독립성을 확보하였다. 후원과 사랑마당은 한국 전통의 정원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갖가지 화초와 나무들로 잘 정돈되어 있다.
문화재명 강릉이광노가옥(江陵李光魯家屋)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 허난설헌(1563-1589)이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며,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맞배지붕의 솟을 대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3칸의 광이 있고, 좌측으로는 행랑방과 마구간이 있는 대문간채를 지나면 잘 다듬어진 정원과 함께 사랑채가 나타난다. 팔작기와지붕으로 전면에 툇마루가 있고, 대청 2칸을 우측에 두고 있다. 사랑채의 좌측 끝은 상 노인방으로 안채 출입문간에서도 출입이 가능하게 하였고, 협문과 공간을 구분하는 담을 전면에 가지고 있다. 사랑 대청은 창호로 둘러싸여 있으며 천장은 연등천정으로 하고 상부의 판대공과 대들보는 툇간만큼 전면으로 돌출되면서 노출 되어 있어 구조적인 미를 풍기고 있다. 안채는 팔작기와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되어 있다. 부엌, 방 마루로 되어 있으며 부엌의 출입구는 사각으로 연결되어 미닫이문을 내고 있으나 근래에 수리를 한 듯하다. 안채 방은 두짝 세살문과 용자창호의 이중문으로 구성되고, 마루는 네짝 분합문으로 짜여 있다. 집 주위에 담이 둘러싸여 있으며, 사랑채의 출입은 솟을대문을 통하여 남자들이 주로하며,측면의 협문은 여자들이 안채에 출입할 때 사용하였다. 이때의 시선 차단을 위하여 출입 통로를 따라 담을 쌓았으며 이러한 것은 공간의 분할을 가져와 전체적으로 폐쇄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으나, 후원과 정면의 마당을 넓게 자리잡아 정원을 아주 잘 꾸미고 있어 차라리 개방감을 주면서 한국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볼 수 있다
(2) 2차 탐방기 (2005. 8. 18. 항용(제) 제공)
지난 8월 11일 어머님을 모시고 우리집 가족 일행 7명은 강릉과 속초를 거쳐 설악산 지역으로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강릉 경포대 옆의 초당이다. 이곳은 허난설헌이 태어난 생가이다. 지난 3년 전(2002년)에도 다녀갔던 적이 있다. 초당 주변은 아직 3년 전 그대로이나 초당으로 가는 길목은 많이 변했다. 주로 음식점이 많이 생겼다. 현대식으로 개발되는 것이 싫어진다. 아마 나도 적잖은 나이를 먹었는가 보다.
초당 동네에 들어서자 난설헌 생가로 들어가는 길옆 여기 저기에 적당한 간격으로 詩碑가 서 있다. 詩香이 물씬 풍기며 이내 분위기가 그윽해 진다. 생가 가옥 옆의 작은 쪽문으로 들어가니 바로 안채가 나온다. 전에는 관리인이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어 좀 개운치 않았는데 지금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입구의 해설판>
<가옥 남쪽의 쪽문>
몇 몇 다른 관람객들과 함께 안방을 살핀다. 사방 2m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날의 우리가 쓰는 방에 비하면 너무나 좁다. 그 옛날 선조님들은 얼마나 검소했는가? 슬그머니 미안한 생각이 든다.
<안채의 안방, 방안에는 난설헌의 시를 진열하고 있다>
앞마당에 서니 작게 꾸며진 화단에는 온갖 꽃나무가 심겨 있다. 500년 전, 그 옛날 이곳을 오갔을 어여쁜 한 아가씨를 떠올려 본다. 그때도 이 꽃나무가 있었다면 이것이 그에게 어떤 시심으로 자리 잡았을까?
<안채 앞의 화단>
<사랑채 앞의 배롱나무>
꼬리를 무는 생각을 길게 늘이며 중문을 나와 사랑채로 돌아 나온다. 대문쪽에서 사랑채를 바라보니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 등이 당대의 명 문인인 이달선생에게 글 배우는 모습과 청아한 글 읽는 소리가 눈과 귀에 보이고 들려온다.
앞마당 화단옆에는 시멘트로 만든 긴 의자 하나가 놓여 있다. 아마도 옛날에도 이곳에 나무의자가 있었고 난설헌이 앉아 오라버님들과 담소했으리라. 온 식구가 나의 설명에 홀려 돌아가며 사진을 찍는다.
솟을대문을 나오니 너른 마당이 나오고 그 한쪽으로는 차일을 친 곳에 한 어르신이 앉아 계신다. 가슴에는 <자원봉사대>란 명찰을 붙이고 있다. 인사를 하고 몇 가지를 여쭈니 친절하게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솟을대문>
전직 교장 출신으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자세하고도 흥미로웠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현 허난설헌 생가는 최초부터 이런 모습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곳이 폐허상태로 전해오다가 약 150년 전에 김모씨(?)가 여러 고증을 들어 복원을 했다.
2. 그 후 정길환씨(현 50세, 인근에 거주)가 이 집을 경매로 샀다가 이광로교수에게 팔았다.
3. 강릉시에서는 이광로교수에게 이곳을 문화재 및 관광지로 활용할 것을 설득하였고, 연차적으로 대금을 지불하여 2005년에 이 지역 4만평을 47억원을 주고 완전히 매수하였다.
4. 앞으로 이 지역을 잘 정비하여 강릉의 중요한 문화 관광지로 개발할 계획이며 전시관도 따로 지어 정기적인 학술발표회도 가질 예정이다.
선생님의 해설을 듣고 앞마당 밖으로 둘러쳐진 적송 숲을 보며 온 길로 되돌아 나온다. 앞으로 몇 년 후면 또 어떻게 바뀔까? 모쪼록 오래도록 귀한 기념물로 남을 수 있도록 잘 개발되었으면 한다. ‘우리 안사연 식구들과 함께 와서 멋진 학술대회라도 연다면’ 하는 상상을 하며 다음 코스인 경포대를 향하여 어머님을 부축하고 차에 오른다.
<생가 측면>
(3)안사연의 3차 탐방기 (2006. 7. 10. 글-상석(제), 사진-윤만(문), 항용(제) 제공)
강릉지역의 대표적인 전통명문가옥인 선교장을 지나 13:00가 되어 난설헌 할머님의 생가인 초당에 도착하였습니다.아까부터 시나브로 감아왔던 실타래가 한 다발이 되자 초당 입구의 우물이 보입니다.다른쪽 실 끝을 놓으며 난설헌 할머님이 어릴적 초희의 모습으로 안채에서 나오시며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십니다.음택에서 부터 감아 온 실의 처음과 끝이 우주안에서 공생하는 혼(魂)과 백(魄)의 존재일 것이라 생각하며 소담스런 화단을 지나 사랑채로 건너갑니다.
사랑 앞에 둘러서서 항용님께서 낭송해 주시는 "閨怨"을 가슴으로 듣습니다.또한 학계와 여성계에서 평가하는 목소리들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조선조 반가의 총명한 규수(허초희)가 일찍부터 학문을 통해 접한 사상과 철학을 억누르지 않고 짧은 생애에서 지혜롭고 어진 아내로,여성으로서,자식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로서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시를 통해 사회에 던진 메시지의 위력이 컸다는 것을-----그리하여 구태의연한 이들의 반발과 졸장부들의 시기를 샀다는 것을-----.
<허난설헌 생가터 일각문>
<허난설헌 생가터 안채>
<안채 옆면과 후면>
<안채 화단과 곳간채>
<내외담과 사랑채>
<사랑채>
<사랑채 마루방과 온돌방>
<사랑채 홑처마와 원기둥>
<사랑채 불밝기창>
<솟을대문>
<담장>
<석류 등 허난설헌 생가터에 피어 있는 꽃>
조선조 대표적인 여류시인,저항시인으로 잘 알려진 난설헌 할머님을 뒤로하고 <강릉종친회>에서 제공하신 강릉고 앞의 초당엄마손순두부에서 늦은 점심을 합니다.식전에 안사연에서는 경진보(영인)와 강릉답사자료집,충렬공 소설<붉은바다 열전 김방경>과 기념품을,문단공 기념사업회에서는 <국역 우암 김주문집>을 <강릉종친회>에 전달하는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문학예술]'허난설헌'…허난설헌이 꿈꾸던 仙界는 어드메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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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여인 허난설헌은 현실의 굴레를 넘어 선계에서 노닐며 천상의 사랑을 꿈꿨다.동아일보 자료사진
◇허난설헌/김성남 지음/244쪽 1만6000원 동문선
<머리말>여성은 이름이 없었던 시대인 조선에서도 뚜렷한 이름과 자(字), 호(號)를 지녔고 그 이름이 국경을 넘어 천재시인으로 불렸던 이가 바로 허난설헌(許蘭雪軒)이다. 그는 허씨의 5대 문장가 중 한 사람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그 일부만이 남아 동생 허균의 손을 거쳐 1608년에 ‘난설재집(蘭雪齋集)’으로 간행됐다. 그의 시는 평범한 규방시인의 범주를 넘는 초월적 상상력과 세련된 형식미를 갖춘 것으로 높이 평가돼 왔다. 그는 “조선에서, 여자로, 김성립의 처로” 살아야 함을 ‘세 가지 한(恨)’으로 여겼으나, 그 콤플렉스 속에 안주하지 않고 시를 쓰며 선계(仙界)로 비상하는 나비가 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거울 속 난조(鸞鳥)’처럼 겨우 27세에 삶을 접었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그를 현대적 담론의 자리로 끌어내려 했으나,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자리매김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번에 출간된 이 책은 모처럼 그의 시에 담긴 상징과 기호를 잘 풀어 21세기의 한국 여성들 앞에 마주 앉혀 놓은 역작이다. 저자는 중국에 전래된 허난설헌의 시와 관련된 문헌들을 검토하고, 그 바탕 위에 그의 시세계를 성실하게 조명하며 연보와 ‘난설재집’을 덧붙여 책을 엮어냈다. 이 책은 허난설헌의 생애와 문학을 현대적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분석하되 쟁점별로 관련 문헌들을 인용하면서 정리했다. 남편과의 갈등과 상처, 학문적 성장과정과 시 창작, 중국문단의 반응, 표절 시비 등이 그의 주요 관심사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능동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시에서 펼치려 했던 그에 대해 박지원과 홍대용이 서로 판이한 견해를 보인 점이나, ‘조선시선(朝鮮詩選)’ ‘고금여사(古今女史)’ 등 명대(明代) 서적들이 허난설헌의 시를 평가하고 수록한 과정을 세밀히 검증한 것이 돋보인다.
또 표절 시비의 시대상황적 배경이라든가 명나라 문단의 이문화(異文化) 현상이 허난설헌 시집의 출판 동인이 되었던 사실에 주목한 점도 예리하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연구 성과는 ‘태평광기(太平廣記)’를 비롯한 중국문헌자료들에 견주어 풀어 놓은 ‘유선시(遊仙詩)’의 신화적 해석에 있다. 허난설헌이 ‘규방’을 탈출하기 위해 선택한 선계(仙界)는 자유와 평등, 행복을 추구하는 여신들의 왕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선계가 너무나도 인간적이라는 지적이 이채롭다. 여성의 굴레를 벗으려는 시도, 인간적 고뇌를 탈피하고자 했던 노력이 결국 너무나도 여성적이고 인간적인 천상(天上)의 사랑으로 귀납됐다는 말이다. 유선시 작품을 분석한 곳 중 일부에서 작품 내 등장인물의 이미지를 시인 자신으로 확대해석한 흠은 아마도 텍스트에 대한 지나친 애정 몰입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된다. 허난설헌의 삶과 시를 마무리하는 일은 아무래도 독자의 몫인 듯하다.
1세(1563, 명종18년) : 허난설헌은 강릉 초당 생가에서 초당 허엽의 삼남 삼녀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8세(1570, 선조3년) :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지었으며 뒷날 주옥같은 시 213수를 남겼다. 15세(1577, 선조10년) : 난설헌은 이 때 서당 김성립에게 시집간 것으로 보인다. 23세(1585, 선조17년) : 자기의 죽음을 예언하는 시『몽유광산산』를 지었다. 27세(1589, 선조21년) : 짧은 나이로 한많은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1590년(선조23) : 이 해 11월 남동생 허균이 친정에 흩어져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모으고, 자신이 암기하고 있던 것을 모아서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았다. 1592년(선조25) : 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전쟁중에 싸우다가 죽었다. 1598년(선조31) : 이 해 봄 정유재란때 명나라에서 원정 나온 문인 오명제에게 허균이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보여주다. 이 시가 『조선시선』『열조시선』등에 실렸다. 1606년(선조39년) : 허균은 이 해 3월 27일 중국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모아서 전해주어 『난설헌 집』은 사후 18년 뒤에 중국에서 간행되었다. 1607년(선조40년) : 이 해 4월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였다. 난설헌집의 발문은 태안 피향당에서 지었다. 1711년 :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하여 『난설헌집』이 간행되었다. 38세(1606, 선조39년) : 『난설헌집』을 주지번에게 줌. 『난설헌집』은 그녀가 죽고 나서 18년 뒤에 비로소 중국에서 . 1913년 : 이 해 1월 10일 허경란이 난설헌의 시를 읽고 감화받아 자신이 소설헌이라고 칭하며 시를 지은 <소설헌집>이 활자본으로 신해음사에서 출판되었다.
(2) 閨怨歌(규원가) 일부
비단띠 비단치마 눈물 흔적 쌓였음은 임 그린 1년 방초의 원한의 자국 거문고 옆에 끼고 강남곡 뜯어 내어 배꽃은 비에 지고 낮에 문은 닫혔구나 달뜬 다락 가을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서리친 갈밭 저녁에 기러기 앉네 거문고 아무리 타도 임은 안 오고 연꽃만 들못 위에 맥없이 지고 있네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3) 哭子歌(곡자가)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 슬프고 슬픈 광릉의 땅이여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백양나무 숲 쓸쓸한 바람..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번쩍이는데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 지낸다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니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여필종부(女必從夫)와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엄격한 사회제도에 묶여 여인네는 '오직 술이나 음식을 의논할 뿐이며, 옷이나 바느질하고 물이나 길으며 절구질이나 잘 하면 넉넉하다'고 여겨질 따름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사회적 지위를 누리지 못했던 시절에 주옥 같은 글로써 삶을 노래하고 한(恨)을 노래한 시인이 있다. 서애 유성룡으로 하여금 말을 세우고 뜻을 창조함이 허고의 꽃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이 빛나 눈여겨 볼 수가 없고, 소리가 울리는 것은 빼어난 옥구슬이 서로 부딪힘이요, 남달리 뛰어나기는 숭산과 화산이 빼어나기를 다투는 듯하다. ... ... 사물을 보고 정감을 일으키며 시절을 염려하고 풍속을 민망케 함에 있어서는 열사(烈士)의 기풍이 있다.
(4)난설헌의 문학세계 평론
한가지도 세상에 물든 자국이 없으니...하며 감탄을 숨기지 못하게 했던 여인. 스물일곱 해의 짧은 삶을 마감하고 2백수 남짓한 한시를 남겨 조선 시대의 가장 빛나는 여류시인으로 손꼽히는 난설헌은, 경상감사와 부제학을 지낸 학자 허엽의 딸로 강릉에서 태어났다. 성과 봉의 두 오빠를 위로 하고, 홍길동전을 지은 균을 아우로 둔 난설헌은 조상적부터 문학이 뛰어 났던 허씨 집안에서 재주 많은 형제들과 더불어 부족함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글배우기를 즐겨서 여러 스승을 찾아 다녔던 허엽은 자기의 글 배울 적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자주 들려주었고, 여성들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시대에 오빠 봉은 난설헌을 자신의 글벗인 이달등에게 나아가 시를 배우게 해 주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면서 난설헌은 일찍이 남다른 글재주를 보였다. 그녀는 이미 여덟 살이던 해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이란 장시를 써서 많은 이로부터 시재를 인정 받았다. 그녀는 풍부한 정감을 갖고 있으며 이 정감을 곧잘 시로 표현하어 주위의 찬사를 얻곤 헀는데, 어여쁜 용모와 재치, 타고난 시재는 십여살의 허난설헌을 신동이라 불리게 했다. 그러나 난설헌에게도 불행은 왔다. 열네 살 된 해 난설헌은 부모가 정해주는 안동 김씨의 남자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시댁은 5대째나 계속 문과에 급제한 문벌이었으나 그녀의 남편 김성립은 과거 공부를 한다고 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고, 게다가 아내와 시를 주고 받으며 즐거움을 나눌 만한 위인도 못 되었다 한다. 반면에 난설헌은 평범한 가정주부로만 만족할 수는 없는 뛰어난 재주와 기품을 지닌 여성이었다. 비범한 아내에 대한 열등감에서인지, 남편 김성립은 집에 있는 날보다 기생과 함께 노는 날이 더 많았다. 공부하러 간다는 핑계하고 날마다 첩의 집에서만 노는 남편에게 난설헌은 옛날의 첩은 재주가 있었건만, 오늘의 첩은 재주가 없더라라는 뜻깊은 편지를 써보내 그를 꾸짖어 보기도 했다. 그녀가 남긴 내방가사의 걸작 "규원가"는 남편과의 불화와 그로 인한 고독을 빚어낸, 눈물과 인종(忍從)으로 살아가는 한 여인의 처절한 심경토로의 산물이다. 거기서 난설헌은 '부생모육(父生母育) 신고(娠苦)하여 이내 몸 길러낼 제, 공후배필 못 바라도 군자호구 원하더니, 삼생(三生)의 원업(怨業)이요 월하의 연분으로, 장안유협 경박자를 꿈같이 만났으니, 상시의 마음쓰기 살얼음을 디디는 듯, ...... 간장이 구곡되어 구비구비 끊겼어라. 차라리 잠을 들어 꿈에나 보려하니, 바람에 지는 잎과 풀속에 우는 짐승, 무슨 일 원수가 되어 잠조차 깨우는고, ......'하고 잠 못들며 비통해 하다가 '세상의 설운 사람 수없다 하려니와, 박명한 홍안이야 날같은 이 또 있을까, 아마도 이 님의 탓으로 살동살동 하여라'고 끝내 통곡하는 것이다. 난설헌의 비애는 남편의 난봉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남편으로 향하는 애정까지 보태어 키웠던 아들과 딸이 다 크지도 못한 채 차례로 떠나는가 했더니, 평화로웠던 친정도 옥사에 휘말려 오빠 봉과 아우 균이 이리저리 귀양길에 올랐다. 난설헌에게 닥친 안팎의 슬픔은 그녀를 더욱 외롭게 했다. 다정다감한 그녀는 오로지 시로써 고달픈 심정을 가누어야 했다. 스물 세살이던 해에 난설헌은 어머니의 상을 당해 친정에 잠시 머물렀다. 하룻밤 꿈에 그녀는 신선의 세계에서 노닐다가, 구름을 따라 날던 한떨기 붉은 꽃이 아래로 떨어지는 모양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난 난설헌은 문득 시 한 수를 지었다. 그중 한구절을 '부용의 꽃 삼구 송이 붉은 채 서리 찬 달 아래 떨어지니'라고 읊으니, '삼구'란 27을 뜻한다. 서리 찬 달 아래 지는 '삼구' 송이 부용꽃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기라도 한듯이 그녀는 27해에 세상을 떠났다. 혼자서 삭이던 많은 한과 원망을 가슴 가득 안은채,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하여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했던 난설헌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쓴 글을 다 불태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뒷날 불길을 피한 그녀의 작품 일부가 동생 허균을 통해 중국과 일본에 소개되어 격찬을 받았다. 허난설헌은 경기도 광주군의 야트막한 한 동산에 그녀의 두 아이의 무덤을 바라보고 묻혔다. 죽은 지 400여년이 지난 뒤에 세워진 그녀의 묘비는 '굴종만이 강요된 질곡의 생활에 숨막혀 자취도 없이 왔다가 간 이 땅의 여성들 틈에서도 부인은 정녕 우뚝하게 섰다' 는 글귀가 그녀를 애잔히 기리고 있다.
기사 분야 : 문화/생활 등록 일자 : 2003/04/26(토) 08:26 ■ [오페라]●허난설헌 다룬 창작오페라 무대 오른다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을 주제로 한 창작 오페라가 무대에 오른다. 극단 씨어터21과 한국문화연구재단은 조선문학사에서 최초의 여성문학가로 기록돼 있는 ●허난설헌을 재조명하는 창작 오페라「아! 난설헌」을 제작, 내년중 선보일계획이다. 이를 알리기 위해 25일 저녁 서울 안국동 운현궁 야외무대에서는 오페라에 등장하게 될 주요 노래들을 갈라 형식으로 소개하는 '프리뷰 콘서트'가 마련됐다. 이 자리에는 주최측인 씨어터21 및 한국문화연구재단, 주관을 맡은 새울전통타악진흥회(이사장 김청만) 관계자들과 예술감독을 맡은 테너 박성원(연세대 교수)씨등이 참석했다. 「아! 난설헌」은 오페라 무대감독, 연극연출가 등으로 활동해온 장윤경씨가 극본을, 작곡가 장소영씨가 음악을 담당, 현재 1차적으로는 대본 집필과 작곡이 모두끝난 상태다. 조선 명종 때인 1563년 강릉에서 태어난 ●허난설헌은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무릅쓰고 무려 200편이 넘는 시를 써 이름을 떨쳤지만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불과 27세로 요절한 비운의 인물. '홍길동전'의 작가인 허균의 누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총 2시간여 길이의 3막으로 구성된 오페라는 ●허난설헌의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대기를 짚어가면서 그가 가졌던 꿈과 소망, 여성으로서의 강한 주체의식,천재적인 문학성 등을 재조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미 지난해 40분 길이의 소규모 야외 오페라로 완성돼 ●허난설헌의 고향인 강릉에서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강릉 지역의 수해로 공연이 무산, 이번에 작품 길이와 완성도를 한층 높여 다시 제작한 것. 극본을 쓴 장윤경씨는 "●허난설헌을 무대화하기 위해 아주 오래 전부터 연구해온 끝에 이제야 제대로 작업을 마치게 됐다"며 "극을 통해 자신의 운명과 고통을 이겨내는 그녀의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주겠다"고 소개했다. 이날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 속에서 진행된 프리뷰 콘서트는 오페라「아! 난설헌」에 대한 소개, ●허난설헌 추모시 및 자작시 낭송, 새울전통타악진흥회 및 영산예술단(안무 양성옥)의 추모공연, 갈라 콘서트 등의 순서로 이어졌다. 시 낭송에는 시인 이애진, 문학의 집 서울 이사장인 김후란씨가, 갈라 콘서트에는 소프라노 박선휘 김영림, 테너 임재홍, 광인연합합창단(지휘 이병철) 등이 출연했다. 주최측은 「아! 난설헌」의 공연을 내년 4월중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로 예정하고 있다.
■(조선일보/문화 : 2003.04.23) [온스테이지] 여류시인 허난설헌 오페라로 부활
조선 중기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이 오페라로 부활한다. 공연예술기획사 ‘씨어터21’은 허난설헌을 주제로 현재 제작중인 오페라 ‘아! 난설헌’의 2004년 초연(初演)을 앞두고 작품을 미리 선보이는 예고편 공연을 한다. 오는 25일 오후6시 서울 안국동 운현궁이 무대다. 야외 열린 공간에서 오페라 ‘아! 난설헌’의 주요 대목을 오페라가 아닌, 콘서트 형식으로 보여주는 맛보기(프리뷰) 음악회다.
작곡가 장소영이 장윤경 극작을 바탕으로 작곡중인 오페라 ‘아! 난설헌’은 허난설헌의 시와 정신세계를 음악·춤·노래로 표현한다. 허난설헌은 화담 서경덕과 퇴계 이황의 제자로 정3품 대사간을 거쳐 대사헌에 이른 초당 허엽의 세째딸로 태어났다. 개방적 가풍 속에서 많은 책과 진보적 사상을 접하며 자랐으나 15세에 안동 김씨 가문의 김성립과 결혼하면서 비극적 삶을 살다 27살 나이로 요절했다. 여자에게는 이름조차 허락되지 않던 때 그는 스스로 초희란 이름과 난설헌이라는 호를 만들어가졌다. 210수가 넘는 많은 시를 남겼다.
이날 콘서트에서는 국립오페라단 단장을 지낸 박성원(테너)이 예술감독을 맡고, 성악가 박선휘(허초희) 김영림(송씨부인) 임재홍(허봉·김성립) 등이 오페라 ‘아! 난설헌’의 주요 대목을 피아노 반주로 노래한다. 공연에 앞서 허난설헌의 시를 낭송하고 추모의 춤과 소리로 엮는 진혼무·비나리·혼풀이, 김후란 시인의 축시 낭송을 곁들인다. 양성옥이 안무하는 무용단, 김청만이 이사장을 맡고 있는 국악연주단 ‘새울 전통타악진흥회’ 등이 출연한다. 극작가 겸 연출가 장윤경씨는 “오페라 ‘아! 난설헌’은 선구적 여성 허난설헌을 통해 우리시대 새 여성상을 모색하는 공연”이라고 말했다. 무료공연. (02)511-3488 (김용운기자)
14) 남편 김성립과 부인 허난설헌의 일화 소개 (2003. 1. 19. 윤만(문) 제공)
(1) 이야기 하나. --난설헌은 남편 친구 송도남(宋圖南)이 남편의 이름자를 따서 농담을 하니, 언어 유희인 퍼닝(punning)의 기지를 발휘해 남편도 그의 친구에게 대응하게 하였다. "멍석닙이. 덕석닙이. 김성립이 있느냐?"
하고 송도남이 농담을 하자, 난설헌은 그의 남편 김성립을 시켜 그 친구에게
"오 귀뜨라미. 맨드라미. 송도남이 왔구나"
라고 응답하게 했더니 송도남이란 친구는 "부인에게 배운 모양이지"
하고 넘겨 잡았다고 한다.(이숭녕, 『허부인 난설헌』 청량, 1930, 44-60쪽)
(2) 이야기 둘. --난설헌의 대범한 도량과 인내성, 현명한 지혜와 순수한 성실성이 난설헌을 통해 한국 여성의 전통적맥락을 이루고 있다고 허미자 교수는 언급했는데, 신흠(申欽, 1566-1628)의 일화 등에서도 그것을 느끼게 한다. --내가 젊었을 때 김성립과 다른 친구들이 함께 집을 얻어서 과거 공부를 같이 했는데, 친구가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놀고 있다"고 근거없는 말을 지어 냈다. 계집종이 이를 듣고는 난설헌에게 몰래 일러 바쳤다. 난설헌이 맛있는 안주를 마련하고 커다란 흰 병에다 술을 담아 병에다 시를 한 구절 써서 보냈다. "낭군께서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기에 이간질을 시키는가?" 그래서 난설헌은 시에도 능하고 그 기백도 호방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시화휘성(詩話彙成)』서울대 규장각본)
(3) 이야기 셋. --남편 김성립이 서당에 독서하러 가면 이내 편지를 써서 자기의 바람을 써서 말하길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임상원(任相元), 『교거쇄편(郊居쇄編』권1)
(4) 이야기 넷. --김성립이 약혼할 때에 난설헌은 부모님께 "소녀의 신랑은 소녀가 친히 보지 않고는 시집가지 못하겠습니다. 한편 그 신랑을 우리집으로 청해오면 소녀가 엿보아서 마음에 합당해야 시집가겠고,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그대로는 시집가지 않겠으니 소원을 이루워 주십시요"라고 졸랐다 한다. 그리고는 난설헌의부친은 그 후에 삼십리쯤 떨어져 있는 신랑의 집에 가서 간선을 하고 김성립의 부친과 한담을 하려는데돌연 방문이 열리고 연죽(煙竹)을 든 상노아이가 들어와서 섰는데 허엽이 눈을 들어보니 난설헌이 남장을 하고 부친 뒤를 쫓아서 몰래 신랑될 사람을 보고 부친보다 먼저 집에 당도하고 있었다 한다. (허미자, 『허난설헌연구』 성신여대출판부, 1984, 163쪽)
上 p351 蘭雪軒은 중국사람이 그 詩를 사가다. 난설헌 허씨는 전한 허봉의 누이로 정자 김성립의 아내이다. 근대 규수의 제일이 되었는데 일찍 요절했고 다만 시집이 세상에 남아 있다. 그런데 평생에 금슬이 좋지 못했기 때문에 원망하는 생각으로 지은 것이 많았다. 채련곡에서는 말하기를 "깨끗한 가을 호수에 푸른 옥이 흐르는데, 연꽃 깊은 곳에 난초 배를 매었네 낭군을 만나 물을 격해 연밥을 던지니, 멀리서 남이 알까 봐 나절을 부끄러워하네" 라고 했다. 중국 사람이 그 시집을 사 갔고, 심지어 이담(耳談=귀엣말)에까지 들어갔다.
김성립이 젊었을 때 江舍에서 글을 읽는데 난설헌이 시를 보내 말하기를 "제비가 비낀 처마를 잡고 쌍쌍으로 나니, 떨어지는 꽃 어지러이 비단옷을 때리네. 洞房 저 멀리 봄 뜻이 상하니, 풀은 강남에 푸르고 사람은 돌아오지 않네" 했는데, 이 두 작품은 流蕩에 가깝기 때문에 문집 속에는 실려 있지 않다.
난설헌집 속의 금봉화염지가는 명나라 사람의 시에 있는 "거울에 떨친 화성은 밤달에 흐르고, 그린 눈썹의 붉은 비는 봄산에 지나네" 의 句를 취해 點化해서 만든 것이다.
또 유선사 속에 있는 두 편과 그밖의 악부 궁사 등 작품에는 古詩에서 도둑질해서 취한 것이 많기 때문에 홍참의 경신과 허정랑 적이 모두 한 집 사람으로서 항상 말하기를, 난설헌의 시편 외에는 모두 위작이요, 그 백옥루상량문도 또한 허균과 이재가 지은 것이라 한다. <지봉유설>
*출전 : <지봉유설>(芝峰類說) 1614년(광해군 6)에 이수광이 편찬한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적인 저술. 저자 : 이수광 시대 : 조선 목판본. 20권 10책.
조선 중기 실학의 선구자 지봉(芝峰) 이수광이 세 차례에 걸친 중국 사신에서 얻은 견문을 토대로 1614년에 간행하였다. 조선의 일은 물론 중국·일본·안남(安南:베트남)·유구(流球:오키나와)·섬라(暹羅:타이)·자바[爪凌]·말라카[滿刺加] 등 남양 제국과 멀리 프랑크[佛狼機]·잉글리시[永結利] 같은 유럽의 일까지도 소개하여 한민족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새롭게 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당시의 학자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은 이 책의 제문(題文)에서 "…위로는 천시(天時)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사(人事)를 말함에 의리(義理)의 정미(精微)와 문장의 득실(得失)을 보이며, 곤충초목에 이르기까지 모아 남김이 없고, 파헤쳐 남김이 없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총명(聰明)을 계발하게 하고, 지려(智慮)를 진익(進益)하게 하니, 마치 귀머거리에게 세 귀가 생기고 장님에게 네 눈이 얻어짐과 같아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여 이 책의 가치를 짐작케 하였다.
내용은 권1에 천문(天文)·시령(時令)·재이(災異), 권2에 지리(地理)·제국(諸國), 권3에 군도(君道)·병정(兵政), 권4에 관직(官職), 권5에 유도(儒道)·경서(經書), 권6에 경서, 권7에 경서·문자(文字), 권8∼14는 문장(文章), 권15는 인물·성행(性行)·신형(身形), 권16은 언어(言語), 권17은 인사(人事)·잡사(雜事), 권18은 기예(技藝)·외통(外通), 권19는 궁실(宮室)·복용(服用)·식물(食物), 권20은 훼목(卉木)·곤충(昆蟲) 등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총 3,435항목에 이른다.
한국 역사 연구에 좋은 참고가 되며, 현재 조선고서간행회본(朝鮮古書刊行會本)과 조선연구회본이 유포되어 있다.
: 허난설헌著. 한호(석봉)書. 許蘭雪軒(1563 ~ 1589)이 지은 글에 1605년(宣祖 38) 韓濩가 半草書로 써서 陰刻한 木板을 찍은 것이다. 本文은 모두 9장으로 作者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表紙에는 [僊語]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仙語라는 뜻으로 神仙의 얘기를 담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글에 담긴 내용과 상통되는 점이라 하겠다. 裡面 앞에는 [廣寒殿白玉樓上樑文]이라 首題하고 1面 5行으로 배열 하였다. 끝에는 [皇明萬曆紀元之三十三載己巳夏仲望石峰書于遼山郡之沖天閣]이라 기재 되어 있다. 이로 보아 韓石峰이 1605년 縣令으로 있을때 이웃고을인 遼山郡 (遂安郡의 舊名)에 갔다가 쓴것으로 보인다. 이글은 여류 蘭雪軒의 名文으로 알려져 있으며 <奎 NO 2843> <蘭雪軒集>의 부록에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 내용은, 天上 仙界에 있다는 廣寒殿과 白玉樓의 假想世界를 동경하여 그것을 작자의 이상세계로 현실화 시키고 그 殿과 樓를 짓고 上樑에 올리는 글을 지은 것이다. 이것은 蘭雪軒이 여덟살때 지었다고 전해지나, 그 전기가 풍부한 문장, 神仙的 분위기와 道家의 用語가 적절하게 배합되어 있는 점으로나, 閨房의 恨을 달래면서 현실을 떨쳐 버리는 作者의 심경이 상징적으로 表白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晩年의 作으로 보인다. 그는 남편에 대한 불만으로 외로운 閨中生活을 하다가 27세로 요절했던 것이다. 어쨌던 이 板書는 글과 글씨 모두 名品인 것이다.
(2) 시 삼 수 (2002. 8. 31. 영환(문) 제공)
<규장각도서 한국본 도서해제> 발행처: 한국인문과학원 에서 옮김.
(가)采蓮曲 채련곡(연꽃을 따는 노래)
秋淨長湖碧玉流 가을에 맑은 호숫물 옥돌처럼 흘러가고 추정장호벽옥류 蓮花深處繫蘭舟 련꽃 피는 깊은 곳에 란초 배를 매놓고서 련화심처계란주 逢郞隔水投蓮子 당신 보고 물건너서 련꽃을 던졌는데 봉랑격수투련자 或被人知半日羞 혹시 남이 봤을가봐 반나절 부끄럽네 혹피인지반일수
(나)江南曲
人言江南樂 사람은 강남의 즐거움을 말하고 我見江南愁 나는 강남의 수심을 보고 있다. 年年沙浦口 해마다 이 포구 와서 보고 腸斷望歸舟 애끓게 떠나는 배를 바라본다
奇夫江舍讀書 [*1] 燕掠斜첨兩兩飛 제비는 처마를 스쳐 / 쌍쌍이 비껴 날고, 落花요亂撲羅衣 지는 꽃은 우수수 / 비단 옷에 부딪네. 洞房極目傷春意 내다뵈는 그 모든 것 / 봄시름을 돋우는데, 草綠江南人未歸 초록 강남 낭군님은 / 돌아올 줄 모르시네. (처마 첨) (감길 요)
(다)貧女吟 (가난뱅이여자의 노래)
豈是乏容色 工鍼復工織 이 얼굴 남들만 못하지 않고 바느질 길쌈베도 솜씨 있건만, 少小長寒門 良媒不相識 가난한 집 태어나 자란 탓으로 중매인도 발끊고 몰라라 하네. 不帶寒饑色 盡日當窓織 추위도 주려도 내색치 않고, 진종일 창가에서 베를 짜나니, 惟有父母憐 四隣何曾識 부모님야 안쓰럽다 여기시지만, 이웃이야 그 사정 어이 알리요. 夜久織未休 알알鳴寒機 밤 깊어도 짜는손 멈추지 않고 짤깍짤깍 바디소리차가운 울림, (창 알) 機中一匹練 終作阿誰衣 베틀에 짜여가는 이 한 필 비단,필경 어느 색시의 옷이 되려나? 手把金剪刀 夜寒十指直 가위 잡고 삭독삭독 마를 제면 밤도 차라 열손끝이 곱아드는데 爲人作嫁衣 年年還獨宿 시집갈 옷 삵바느질 쉴새 없건만 해마다 독수공방 면할 길 없네.
(3) 허난설헌 시집(허경진역)에서 인용한 시 몇 수 (2002. 8. 26. 태영(군) 제공)
(가) 몽유기(夢遊記)
난설헌의 죽음은 신비롭다. 허균의 《학산초담》과 구수훈(具樹勳)의 《이순록(二旬錄)》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난설헌이 일찌기 꿈에 월궁(月宮)에 이르렀더니, 월황(月皇)이 운(韻)을 부르며 시를 지으라 하므로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허경진 역) (碧海浸瑤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라고 하였고, 꿈에서 깨어난 뒤 그 경치가 낱낱이 상상되므로 "몽유기(夢遊記)"를 지었다.
어젯밤 꿈에 봉래산에 올라 갈파의 못에 잠긴 용의 등을 탔었네. 신선들께선 푸른 구슬지팡이를 짚고서 부용봉에서 나를 정답게 맞아 주셨네. 발아래로 아득히 동해물 굽어보니 술잔 속의 물처럼 조그맣게 보였어라. 꽃밑에 봉황새는 피리를 불고 달빛은 고요히 황금 물동이를 비추었어라.
봉래산은 바닷속에 있다는 신선산이다. 그래서 이곳으로 가려면갈파의 물에있는 용을 타야한다. 신선들처럼 푸른구슬지팡이를 짚고서 부용봉으로 올라가 내려다 보니 인간의 세계는 참으로 작고도 보잘것이 없었다. 저 조그만 세계에서 사랑하고 미워하며, 슬퍼하고 눈물 흘렸던가, 그는 선녀인지라, 세속의 눈물과 슬픔을 모두 잊어버리고 하늘나라의 생활을 즐길뿐이다.
그 뒤에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今年乃三九之數, 今日霜墮紅) 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3·9는 27이라, 난설헌이 세상에 살다 간세월과 같다.
난설헌은 그렇게 1589년 3월 19일, 향년 27세로 요절했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들은 다비(茶毗: 불교용어로 불태우는 것. 화장.)에 부치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웠다.
어느새 새벽이 다가와 부용각 잔치는 끝나고 푸른 신선 바다의 신선은 흰 학에 올라타시네. 뚫는 듯 들려오는 자줏빛 피리 소리에 오색 노을 흩어지고 이슬 젖은 은하의 강 속으로 새벽 별이 떨어지네
(4)<난설헌집>에 없는 시 <산람> 소개 (2005. 8. 9. 영환(문) 제공)
山嵐(산람)-(산 아지랑이)
暮雨侵江曉初闢 (모우침강효초벽) : 저녁 비가 강을 엄습하더니 새벽이 비로소 열리고
朝日染成嵐氣碧 (조일염성남기벽) : 아침해가 산 아지랑이를 온통 푸르게 물들이네.
經雲緯霧錦陸離 (경운위무금륙리) : 피어오르는 구름과 퍼지는 안개가 비단으로 짜이고
織破瀟湘秋水色 (직파소상추수색) : 소상강 위에서 헤쳐지며 가을 물빛으로 화하도다.
隨風宛轉學佳人 (수풍완전학가인) : 바람 따라 천천히 돌며 아름다운 여인인양
畵出雙蛾半成蹙 (화출쌍아반성축) : 고운 눈썹을 그려보지만 반쯤은 찌푸려졌네.
俄然散作雨비비 (아연산작우비비)(비 = 雨 아래 非) : 갑작스레 비가 거세게 흩뿌리며 내리더니
靑山忽起如新沐 (청산홀기여신목) : 청산이 새로 목욕한 듯 홀연히 일어서누나.
[류주환 역]
이 시는 허난설헌 문집인 "난설헌집"에는 나오지 않고 "역대여자시집"이란 곳에 나오고 있는 소위 문집외 시들 중
하나입니다.
3구와 4구는 마치 멋지고 그윽한 동양화 한 폭입니다. 원문을 보면수직으로 피어오르는 구름과 수평으로 퍼지는 안개가 서로 씨실과날실이 되어 빛나는 비단을 짜고 있고, 그렇게 짜여진 것이 소상강에까지 이어져서 그 위에서 비단이 풀어지듯 조각조각바스러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드러나는 것은 온통 깊어진 가을의물빛이고요. 소상강은 중국에 있는 강으로서 옛날 순(舜)임금이 죽자 그의 두 부인 아항(娥姮)과 여영(女英)이 소상강에 와서 빠져죽었다는 고사가 있어 많은 시와 노래에 등장한 의미 있는 강입니다.
마지막 두 구도 몹시 기상이 크고요. 시가 6구와 7구가 없거나 조금 다르다면 여자가 쓴 것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제가 보기에 시의 전체적인 스케일에 비추어 이 두 구의 무게가 떨어져서 달리 번역할 수 없을까 고심을 해보았지만 위처럼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 같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참, 저는 한문에관한 한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제 번역을 다 믿지는 마시고 (^^)
저 번역을 언제 다시 고칠 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로 다음은 허경진님의 번역입니다.
늦은비가 강을 적시면서 새벽이 처음 열리고
아침해가 물들면서 아지랑이 더욱 푸르러지네.
구름과 안개 얽히면서 비단이 땅에 깔리는데
소상 강가에서 찢어지며 가을 물빛을 보여주네.
바람 따라 완연히 돌며 예쁜 여인을 배우다가
굽은 눈썹 그려 내었지만 반쯤은 찌푸려졌네.
잠시 뒤에 흩어져서 비가 되어 흩뿌리더니
푸른 산이 갑자기 일어서는데 새로 목욕한 듯싶어라.
5) 모 사이트에서 (2005. 2. 28. 태서(익) 제공)
송하곡적갑산(送荷谷謫甲山)-허송하곡적갑산(送荷谷謫甲山)-허난설헌(虛蘭雪軒)
하곡 오빠가 갑산에 귀양가기에-허난설헌(虛蘭雪軒)
遠謫甲山客(원적갑산객) : 멀리 갑산으로 귀양가는 나그네 咸原行色忙(함원행색망) : 함경도로 가는 행색 황망하기만 하다 臣同賈太傅(신동고태부) : 신하의 심정은 고태부나 主豈楚懷王(주기초회왕) : 임금은 어찌 초회왕이리오 河水平秋岸(하수평추안) : 강물은 가을 언덕에 평평히 흐르고 關雲欲夕陽(관운욕석양) : 변방의 구름에 석양이 물들려한다 霜風吹雁去(상풍취안거) : 서릿바람 불어와 기러기 날아가니 中斷不成行(중단불성행) : 마음이 아파서 더 이상 못쓰겠구나
추한(秋恨)-허난설헌(虛蘭雪軒)
가을의 정한-허난설헌(虛蘭雪軒)
絳紗遙隔夜燈紅(강사요격야등홍) : 붉은 깁창 저 넘어 밤등불 붉은데 夢覺羅衾一半空(몽각나금일반공) : 비단 이부자리에서 잠 깨니 옅자리가 비었구나 霜冷玉籠鸚鵡語(상냉옥롱앵무어) : 서리기운 차가웁고 새장에는 앵무새 울고 滿階梧葉落西風(만계오엽락서풍) : 뜰에 가득한 오동나무 서풍에 잎이 지는구나
다) 참석자(6명) : 상석(제), 윤만(문. 외 가족 2), 주회(안), 항용(제, 외 가족 2)
라) 내용 : 윤만(문) 종친의 발의로 상호 연락하여 단체 입장.
<좌로부터--주회, 강유정(연출가), 최명희(작가), 항용>
<입구에서 작가 최명희 선생님과>
<입구의 안내판>
<연극 공연 후>
<초희 1역(박세진님), 초희 2역(이현순님)>
<초희 시모역(성병숙님)>
<연극 공연후 평가회-작가와 함께>
<연극 팜플렛> <연극 광고지>
*연극 관련 <조선일보> 기사 내용 (2003. 8. 29. 주회(안) 제공)
■(조선일보/문화 : 2003.08.27) [온스테이지] 허난설헌 다룬 `반가워라 붉은 별이…` 공연 한 여성의 삶 둘러싼 세상의 곡선
조선시대의 천재적 여성시인이자 ‘홍길동전’ 작가 허균의 누나인 허난설헌의 삶이 연극 무대에 오른다. 여인극장이 공연하는 ‘반가워라 붉은 별이 거울에 비치네’(최명희 작, 강유정 연출· 2003년 8월 27일~9월 14일 문예진흥원 예술극장 소극장). 연극은 15살 때 사대부 집안으로 시집간 팔방미인 난설헌이 여자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는 시어머니 아래에서 겪는 굴곡투성이 삶을 그린다. 집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쓴 난설헌의 시가 엉뚱하게도 방탕한 유부녀의 시로 폄하되는 가혹한 조선의 현실 속에서도 시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한 여성의 열정이 무대를 채운다. 그리고 한 여성의 삶을 가혹하게 둘러쌌던 세상의 독선, 모순과 횡포가 그려진다. 난설헌역은 이현순, 박세진. 시어머니 역은 성병숙이 맡는다.
여성연출가 강유정은 “요즘 한국은 퓨전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시대이지만 그 바람에 진지한 고민을 정통으로 보여주는 극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며 “그런 흐름과 달리 이번 작품은 한 시대의 사회상을 제대로 보여주는 정통사극으로 꾸미겠다”고 했다. 문의 (02)744-0300. (김명환기자)
▣ 반가워라 붉은 별이 거울에 비치네(작가의 글) ▣ (2003. 9. 17. 윤만(문) 제공)
<극작가 최명희> [아름다운 것들은 멀리있다. -요절에 대하여-]
--한 사람이 태어나 살고 사라져가는 오묘한 것이나 각자 지닌 사연은 하늘의 별만큼 다양하고 그 다양한 사연들과 접하면서 우리는 인생을 알아가고 느끼고, 간혹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외로움을 견뎌낼 힘을 건져올리는 것이 아닐까.
--비루한 현실 삶에서 도망쳐 버리고 싶을 때 또 우리는 그 어떤 정제(精製)된 삶의 이야기를 찾아 헤매고 그것에 매료되고 자신을 잊고 위안을 얻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이 경우에 그 어느 실존 인물의 생생한 이야기는 대단한 위력으로 다가올 때가 종종 있다.
--수백년이라는 시간은 긴 것일 수도 짧은 것일 수도 있겠으나 현대의 일상을 사는 우리에겐 그 너머의 사는 모습들이 얼른 감이 잡히지 않는 데에서 이번 작품은 시작되었다.
--그 머언 시간을 사이에 둔 그들의 삶이 너무도 생생한 현실감을 내게 주었기에 그 주변 상황에 파고 들면서 흥미롭고 또한 행복했었다.
--우리의 뇌리에서 결코 늙지 않을 여인 허난설헌은 타고난 순수함과 가문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환경적 조건 등으로 하여 특별했으며, 또한 그 때문에 시대와의 타협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결국 그녀의 비극은 요절(夭折)로 귀결되었고 한 젊은, 불꽃과도 같은 삶의 여인이라는 추상(抽象)을 이루어낸 것이다.
--몇몇 철인 현자들이 ‘하루를 살건 백년을 살건 그가 살고 간 인생의 무게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한 말을 떠올린다.
--남들보다 일찍 한 점 향기짙은 꽃잎파리로 사라져간 영혼들 모두에게 이작품을 바친다.
<연극 ‘반가워라, 붉은 별이 거울에 비치네’ 연출가 강유정> (2003. 9. 12 윤만(문) 제공)
▣ 연극 ‘반가워라, 붉은 별이 거울에 비치네’ 연출가 강유정 ▣ 올해로 37년. 연출을 맡아 무대에 올린 작품 횟수만 무려 121회다. 1966년 34세의 나이로 여인극장을 만들 당시만 해도 37년이란 시간이 이처럼 빨리 갈지 몰랐다고 강유정(73)씨는 말한다. 그의 이름 앞에 붙여지는 한국의 여류 연출가 1호라는 수식. 허난설헌의 삶과 고뇌를 표현한 그의 최근작 ‘반가워라, 붉은 별이 거울에 비치네’가 대학로 문예진흥원예술극장 소극장에서 14일까지 공연한다. 시작(詩作)에 대한 열정으로 온 몸을 불살랐던 허난설헌과 닮은 모습인 강씨를 지난 달 29일 무대 뒤에서 만나보았다.
“조선시대에 여성이 시작 활동을 한다는 건 참으로 어려웠죠. 가정하고 양립하기 힘들었던 부분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난설헌의 작품은 상당히 훌륭했어요. 시대의 선각자였던 셈이죠.”연극 ‘반가워라, 붉은 별이 거울에 비치네’는 시작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채 ‘방탕한 시를 짓는 부덕한 여성’이라 낙인찍혔던 허난설헌의 고뇌를 다룬다. 조선이라는 시대 상황이 여성에게 요구한 미덕, 가정에 충실하고 남편의 출세를 도와야 한다는 여성의 역할과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갈등했던 허난설헌의 괴로움이 사극의 형식을 빌어 사실주의적으로 재현되었다.
1966년, 여인극장을 만들다 허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 불릴 만큼 문장에 뛰어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15세에 김성립과 혼인하며 그의 예술적 재능을 사장시켜야 했던 허난설헌.
27세의 나이에 그의 시 ‘몽유기(夢遊記)’에서처럼 아무런 병도 없이 유연히 눈을 감는다. 생전에 그는 ‘빈녀음(貧女吟)’을 통해 여성의 인권회복을 주장하고 ‘혹우(惑愚)’를 통해 세도가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 등 고통받는 계층과 시국을 고민한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강씨는 37년이란 연극 인생 말미에 허난설헌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 남다른 감회를 갖게 한다고 말한다. 그 역시 세 아이의 엄마였고 주변의 반대가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30대의 열정 하나로 연극계에 뛰어들었기 때문.1950년 동국대 연극반에서 연극을 시작한 강씨는 이해랑 선생이 대표로 있던 극단 신협에 들어가 연극 수업을 받았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란 생각에 배우 활동을 하며 무대를 익혔고 강단있는 성격을 인정받아 연출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결혼을 하고 잠시 다른 일을 하다 다시 연극 활동을 하고 싶다는 열망에 동료 연극인 10명과 극단 여인극장을 만든다. 극단의 이름 탓인지 연극계 안팎의 관심이 모아졌다. “결국은 여성문제에 귀착되는 얘기죠. 여성들이 연극활동을 통해 사회참여를 해보자 그런 차원에서 출발한 건데 당시만 해도 여성들이 연극을 한다는 건 쉽지 않았어요. 여자 연출가도 없었고.”창단 첫 공연 ‘갈매기’를 시작으로 휘 네오나드의 ‘다(아빠)’, 서머 셋 모옴의 ‘아내라는 직업을 가진 여인’, 휴 네어드 ‘키 큰 세 여자’, 테렌스 맥널리의 ‘마스터 클래스’, 마틴 맥도나의 ‘아름다운 여인의 작별’에 이르기까지 여성, 인간의 성찰을 다룬 수많은 해외 작품과 국내 창작품을 선보였다. 1972년에는 여인극장 전용 소극장인 <에단바라 소극장>을 만들고 1975년 ‘세계 여성의 해’를 맞아 ‘젊은 여성연극인의 사회 참여에 있어 여성 연극인으로서의 역할’이란 주제로 심포지엄을 개최, 강성희작 ‘역광’을 공연하는 등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왕성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여자들이 연극한다고 떠들기만 하고 싹 꽁지 감추고 한 두 번하고 그만 두면 어떻게 해요. 내 일에 책임을 지려다 보니 37년이란 세월이 흘렀죠.”강씨에게 37년은 그저 자기 일에 책임을 졌던 시간일 뿐이다. 그러나 갈수록 여성을 다루는 연극을 하게 되는 것은 그의 긴 연극 인생과 연장선상에 놓인다.
“연극은 하나의 시대정신인데, 연극정신이 옛날만 못하고 상당히 퇴화되어 있어요. 작품도 전부 개그식으로 흘러가고. 진지한 문학성이 담긴 연극이 드물어 안타깝죠.” 한국 연극계에 대한 우려를 덧붙인다. 삶의 일부가 된 연극 그를 아는 후배들은 강씨의 곧은 성격과 고집이 극단을 이끌어 온 동력이라 입을 모은다.
연극협회 심재찬(50)회장은 좋은 작품, 레퍼토리로 한국 연극계의 초석을 닦은 이로 그를 평가한다. “요즘이야 여성이 활동하기에 여건이 좋지만 당시만 해도 극단을 운영하기란, 그것도 여자가 하기란 힘든 일이었어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연극계를 지켜온 분이시죠. 적극적이고 부지런한 분이세요.”89년부터 여인극장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영화배우 정경순(38)씨는 “강단 있고 무서운 분이다. 너무 곧고 고집이 세서 그 고집으로 여인극장을 이끌어 오신 것 같다”면서 “문학적이면서도 풍류 좋아하고 배우들이랑 어울려 술 마시는 것 좋아하는 호탕한 분이다”고 전한다. 강씨는 문학성이 담긴 진지한 작품을 선호한다. 건강이 안 좋아져 후배들에게 물려줄 때도 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를 주변에서 듣지만 “계속 하고 싶다”고 말한다. 연극이 이미 ‘삶의 일부’라고 말하는 그에게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연극이 막을 내릴 즈음 중년 여성 관객들은 허난설헌이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재미와 쇼가 압도하는 요즘의 공연물과 거리가 먼 진지함을 추구하지만 대부분 여인극장의 작품과 강유정을 기억하고 찾아온 이들이었다.
<매거진 > 여성신문 9월 5일] 02-765-7890 임인숙 기자 isim123@womennews.co.kr
<연극대본 소개> (2003. 10. 1. 항용(제) 제공)
<반가워라 붉은 별이 거울에 비치네>
1. 공연 일시 : 2003. 8. 27--9. 14 2. 공연 장소 :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문예진흥원> 여인극장
작가 최명희
<등장인물>
난설헌2 .. 여, 20대 중 ~ 27세, 내레이터를 겸함. 난설헌1 .. 여, 15세 ~ 20대 초 시모 .. 여, 3 ~ 40대, 난설헌의 시모 성립 .. 남, 15 ~ 27세, 난설헌의 남편 언년이 .. 여, 9 ~ 21세, 난설헌의 몸종 귀동어미.. 여, 3 ~ 40대, 김씨가의 비 하곡 .. 남, 2 ~ 30대, 난설헌의 오라버니 친모 .. 여, 3 ~ 40대, 난설헌의 친모 손곡 .. 남, 3 ~ 40대, 시인 균 .. 남, 14세, 21세, 난설헌의 오라비 시부 .. 남, 30대, 난설헌의 시부 매헌, 우천 .. 남, 20세쯤, 성립의 친구들
? 출연배우들의 실제 나이는 대략 10세 정도 많은 것이 좋을 듯 싶음.
<무대>
무대 위 건조물은 조선 중기 (16세기 후반) 사대부가(士大夫家)의 일부. 무대 오른쪽으로 광의 문을 포함한 그 반(半)이 보이고, 왼쪽으로 이 또한 방의 일부가 보이며, 그 오른쪽 옆 방이 웃방으로 그 옆의 마루(광과 웃방을 이어주는)와 함께 이 연극의 주요 무대이다. 마루 아래 댓돌이, 마루와 웃방 사이에 문이 있다. 광, 마루, 웃방, 또 그 옆방이 일자로 나란히 있으며, 다만 광이 조금 안 쪽으로 들어가 있다. 일자로 나란히 놓인 건조물들의 앞, 곧 객석 쪽 공간을 뜰로 가정한다. 마루에는 다용도 찬장 그리고 자그마한 찻상 하나와 물시계를 포함하는 최소한의 집기들이 놓이고, 웃방 안엔 장, 궤, 서안, 병풍, 벽장 등이 있다. 주인공 등의 시(詩)를 소개하기 위한 screen이 필요하다. 위에서 내려오고, 쓰이고 난 후에는 다시 말려올라가는 것이 좋을 듯.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난설헌2, 웃방 문 열고 나와 마루를 통해 뜰로 나온다. 뜰은 객석 쪽으로 가정한다. 그녀, 무대 끝 가까이에 쭈그리고 앉는다.)
난설헌2 (그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면서) 봉선화야, 금잔화, 채송화, 다들 잘 있었니? 언년이 (21세)(등장하면서 그녀를 보고 몹씨 반가워한다.) 아씨마님, 일어나셨어요? 난설헌2 (일어나 마루 쪽으로 가면서) 바야흐로 녹음방초 호시절이구나! 언년이 네 아씨마님! 난설헌2 (도중에 조금 휘청한다.) 언년이 (그녀를 부축하여 마루로 간다.) 난설헌2 여기 좀 앉아있자꾸나.
(둘, 나란히 마루 끝에 앉고)
난설헌2 어머님은 좀 어떻하시더냐? 언년이 간신히 일어나 죽 몇 숟깔 뜨셨네요. 난설헌2 그 분 스스로 그리 하시더냐? 언년이 웬걸요? 지가 (시늉하며) 이렇게 싹싹 빌었구만요. 제발 좀 드시라구요. 난설헌2 수고 많았다. 언년이 아씨께서 마님 뵈러 가도 되겠느냐 여쭸더니, 여전히 아무 말씀 없으시데요. 난설헌2 ... 언년이 어서 방으로 드셔서 죽이라도 좀 .. 난설헌2 됐다. 조금만 더 이렇게 앉아 있자꾸나. (사이) (무대 암전되면서)
난설헌2 (spot 비치면) 저는 조선 14대 선조 임금 때 살던 허난설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식으로 따져 16세기 후반을 살았었다 이렇게 되나요? 전 강릉의 초당공 허엽의 셋째 딸로 태어나 어렸을 때 서울 인현동으로 옮겨 살다가 경기도 광주에 주소지를 둔 김씨 가문에 시집온지 어느덧 12년이 됐군요. 제가 이 댁에 시집온 다음 날 일이었읍니다. 그날 아침 시부모님께 아침 인사를 마치고 아침 식사를 끝낸 후 저는 친정에서 시집올 때 데리고 온 아까 보신 그 아이 언년이, 그땐 겨우 아홉살 밖에 안된 그 애의 시중을 받으면서 얼굴 단장을 하고 있었죠.
(무대에 다시 조명 들어오면 웃방에서 난설헌1, 언년이(9세)의 시중을 받아가며 얼굴단장을 하고있다. 방 안 곳곳에 서책들이 잔뜩 쌓여있고 서안 위에도 쌓여있으며 어떤 것들은 펼쳐져있다.)
난설헌2 (웃방 쪽을 보고있다가) 보십시오, 저 화사하고 발랄하며 터질 듯 난만한 행복에의 기대! 방년 15세 어린 새악씨의 얼굴 가득한 저 사랑스러움! 저한테 저런 시절이 있었다는게 정말 믿어지지 않습니다. (spot 꺼진다.)
(웃방. 난설헌1의 얼굴 단장이 끝나자 언년이, 그녀의 머리 위에 어여머리(장식용 가발)를 얹고 그 위에 화관을 씌운다. 화관은 예쁜 중간 색조의 들꽃들로 장식되어 있다.)
언년이 아유, 어쩜 이렇게두 예쁘시대요? 꼭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으시네요 아씨마님? 난설헌1 어머님이 부엌으로 오라 이르셨지? 어서 가 보거라. 언년이 네, 아시마님! (일어나 마루를 거쳐 퇴장한다.) 난설헌1 (뒷정리하는데) 시모 (등장한다. 마루로 올라 방문 앞에 서서) 악아, 난설헌1 (못 듣는다.) 시모 악아, 난설헌1 (놀라 벌떡 일어나면서) 예 어머님! (방문 연다.)
(시모 들어선다. 난설헌1 뒤로 물러서고, 시모 아랫목에 좌정한다. 난설헌1 시모의 앞에 공 손한 자세로 마주앉아 해맑은 미소로 시모의 눈 마주 본다. 시모, 흠칫한다. 곧 수습하고)
시모 어여머리가 예쁘구나. 혼례때 내 정신이 없어 잘 못 보았는데 이제 보니 참으로 어여쁘기 짝이 없구나! 훗날 우리 성립이가 당상관이 되면 그땐 그것을 상시(常時)에 하고 있어도 되니 앞으로 꼭 그리 되도록 네 남편을 잘 내조해야 하느니라, 알았느냐? 난설헌1 예 어머님. 시모 그래 어떠냐? 불편한 것은 없느냐? 난설헌1 없읍니다 어머님. 시모 그래? .. 네가 훌륭한 가문의 규수이니 내 길게 말하진 않겠다. 다만, 네가 일찍부터 수많은 서책을 접하고 시사(詩詞)에 유별난 재주가 있다고 들었다. 남다른 재주에 부지런한 독서, 다 좋다. 허나, 아녀자의 본분이 무엇이냐, 첫째, 삼종지도에 어긋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난설헌1 허지만 어머님, 시모 왜 그러느냐? 난설헌1 아녀자란 여인을 낮추어 부르는 말입니다. 시모 (말 가로채듯) 뭐라고? 여인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라, 난설헌1 제 말씀은, 저나 어머님이나 다 같은 여인이온데 기왕이면, (시모의 기분 알아채고 고개 숙인다.) 시모 .... 아내된 자, 며느리된 자, 어미된 자의 소임이 무엇이냐, 자신을 낮추고 밑거름으로 하여 가문을 융성케함이요, 늘 가솔들의 의식주를 위해 힘써 일하며, 접빈객 봉제사에 한 점 흐트러짐이 있어서도 안될 것이다. 알겠느냐? 난설헌1 (눈 들어 맑게 마주치며) 예 어머님! 시모 시집 와 새로이 인연 맺은 식구들을 극진히 보살피고 떠받들며, 그를 행함에 있어 자신의 그 무엇도 아낌이 없어야 하느니라. 당연히 하루를 열흘처럼 쪼개 써도 시간은 부족할 터. 시사에 뜻을 두고 독서에 빠져들 여가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일은 창기(娼妓)들에게나 합당한 것,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 해도 이 집안 며느리로선 절대로 허락될 수 없다. 알겠느냐? 난설헌1 ... 시모 왜 대답이 없느냐? 그리 못하겠다, 난설헌1 아닙니다 어머님. 시모 그럼 내게 약속할 수 있느냐? 난설헌1 어머님, 시모 그래. 난설헌1 집안일을 게을리 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니 아울러 책을 읽고 시사 짓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시모 (단호하게) 안 된다. 어쩌다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열 번 되는 것. 아얘 싹 잊고 삶이 네 신상에 좋을 게다. 난설헌1 (뭐라 말하려는데) 시모 (말 가로채어) 됐다. 그만 접도록 하자. 난설헌1 (고개 숙인다.)
(무대 암전되고)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늦은 밤. 마루에서 제사준비가 한창이다. 난설헌1, 머릿수건과 앞치마 두르고 앉아 익힌 녹두 반죽을 가늘게 채썰고 있다. 솜씨가 고르 지 못하며, 가끔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그 옆에서, 역시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두른 귀동어미가 찹쌀 반죽으로 유과를 빚어 상 위에 늘 어 놓는다. 그 옆에 언년이(9세)가 앉아 귀동어미 하는 것을 따라 하고 있다. 시모 등장한다. 이들이 하는 양을 보다가)
시모 언년아, 언년이 (놀라) 예 마님! 시모 일어나거라! 언년이 (벌떡 일어난다.) 시모 넌 부엌에나 가 보거라. 언년이 예. (서둘러 퇴장한다.) 시모 제삿 상에 놓을 음식은 종들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나 손 대는 게 아니다. 어린 것이 몰라 덤비더라도 귀동어미 네가 말렸어야지. 귀동어미 네 마님. 잠깐 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님. 시모 (난설헌1에게) 넌 어째 채써는 솜씨가, 쯧쯧 .. 난설헌1 (더욱 조심하여 채썬다.) 시모 (돌아서며) 일이 늦구나. 빨리들 서둘러라. (둘이서 동시에) 난설헌1 네 어머님. 귀동어미 네 마님.
(시모 퇴장하고) (사이)
난설헌1 (꾸뻑 존다.) 귀동어미 이그, 졸립기두 허겠지. 새색씨가 시집오구부터 원 잠이라구 몇 식경이나 자봤어야지? 허기사 시집살이가 달래 시집살인감? ... 제사에 웬 화면(花麵)이냐 어리둥절하겠네? 그게 이 댁 자랑꺼리라서 그래.아 제사 지내러 오시는 어른 양반들이 이 댁 화면 맛에 반해 가지구 오죽허면 제사보다 잿밥이라구들 헐까. 헌데 새애기씨, 난설헌1 네? 귀동어미 새애기씨 시집 올 때 가져온 서책이 만 권이나 된다는 그 말, 사실이유? 난설헌1 어떻게 만 권이 되겠어요? 수레 몇 대분이랬자 수레 한 대에 몇 권이나 담긴다고 .. 귀동어미 그렇지? 만 권은 좀 너무 했다 싶더라니 .. 허지만, 이름이 세 개 씩이나 된다던데, 그건 맞지? 난설헌1 ... 네. 귀동어미 초희, 난설헌, 그리구 .. 또 뭐더라? 난설헌1 경번이요. 귀동어미 그 그래 경번. 내 듣구두 또 깜빡 했네. 정말 새애기씬 욕심두 많구먼. 양갓집 태생이래두 여자 몸이면 평생 하나 지니기두 힘든 이름을 세개씩이나 지닌걸 보면. 난설헌1 (꾸뻑꾸뻑 조느라 귀동어미 말을 잘 듣지 못한다.) 귀동어미 내 처지에 언감생심 헐 소리는 아니나, 그저 난 부럽기만 허구먼. 난설헌1 (졸다가 칼에 손가락을 베어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싸쥔다.) 귀동어미 저런! (재빨리 치마 허리에서 무명천 조각을 꺼내 쭉 찢어 지혈해준다.)
(둘, 하던 일 계속하며)
난설헌1 고마워요, 귀동어미. 귀동어미 뭘 .. 졸립긴 허지, 일은 급허지 .. 난설헌1 제가 일이 더뎌서요. 귀동어미 아직 일이 몸에 배질 않아 그렇지 뭐. (물시계 쪽을 보고) 아유 벌써 인시(寅時)가 다 돼가네? (남은 일깜을 보고) 해두 해두 끝이 없네? 이러다 밤 새겠네? 새애기씨, 남은 건 내가 어째 볼 테니 그만 일어서. 난설헌1 안 돼요. 이 많은 걸 어떻게 .. 귀동어미 (서둘러 챙기면서) 아냐, 저기 가면 일손 빠른 것들이 두엇 있어. 내 요령껏 해볼 테니, 아무 걱정 마. 어서 들어가 눈 좀 붙이라구. 어서. 난설헌1 (엉거주춤하는데) 귀동어미 (챙겨들고 나가며) 어서 들어가 자. 낼 보자구.
(난설헌1, 서서 귀동어미의 뒷 모습 보다가 웃방으로 들어가면 웃방에 흐린 조명. 난설헌1 무심코 들어가는데, 몰래 들어와 누워있는 성립(15세)에 걸려 넘어진다.)
난설헌1 아이구머니나! 성립 (그녀를 꽉 껴안는다.) 난설헌1 (목소리 죽여) 매일 밤 이러시면 어머님한테 정말 큰 꾸중 듣고 말겠어요. 성립 (목소리 죽여) 꾸중 하시라지. 이쁜 내 색씨가 재워줘야지 공부두 잘 되는 걸 난들 어쩌라구. (성급하게 그녀의 저고리 고름을 푸는데) (그녀는 졸고있다.) 성립 아니, 이 보오 부인! 난설헌1 (눈 뜨고, 졸음을 참으며) 네 서방님. 성립 그렇게도 졸리오? (계속 조는 그녀를 흔들어대며) 이 보오, 이 보오 부인! 난설헌1 (눈 뜨고) 네 서방님. 성립 나요, 나란 말요, 성립이. 난설헌1 네 알아요, 서방님. 성립 (좀더 꽉 껴안으며) 우리 어머니가 부인 잠도 못 자게 하고 밤낮 일만 시켰구려. 정말 미안하오. 난설헌1 아 아녜요. (애써 눈 떠 그를 본다.) 성립 오, 부인의 눈은 어쩌면 그리도 맑은 거요? 대여섯살 어린아이와도 같은 눈이오. 하늘에 영롱하게 빛나는 샛별만 같구려, 오오! (그녀를 안고 딩굴다가) (다시 뚫어져라 그녀의 눈을 보면서) 부인! 난설헌1 네. 성립 아니, 난설헌! 난설헌1 네. 성립 아 아니오. 초희, 초희가 제일 이쁜 이름이오. 초희라고 부르고 싶소. 난설헌1 그렇게 하세요. (터져나오는 하품을 손으로 누른다.) 성립 (그녀의 손을 잡고 보며) 초희는 손도 참 예쁘구려. 과연 아름다운 시가 쓰여질만한 손이요. 난설헌1 고마워요 서방님. 성립 (그녀의 손을 놓고 이번엔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갠다. 뜨거운 포옹 한 참 후 그녀의 손을 잡은채 그녀의 옆에 천정을 보는 자세로 누워) 초희를 처음 보았을 때, (고개 돌려 그녀를 새삼 보고나서) 아 난 또 잠이 들었나 하고. 졸립더라도 우리 조금만 이러고 있읍시다. 달밫도 교교한데 얘기라도 좀 나누다 자도록 합시다.
(시모 등장하여 웃방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흠칫 선다. 웃방 쪽을 보다가 한심하다는듯 혀를 차며 퇴장한다.)
성립 초희를 처음 보았을 때 난 내 눈을 의심했소. 하늘에서 선녀가 하강한 것이 아닌 가 싶었소. 난설헌1 정말인가요? 성립 물론이오. 난 너무도 복이 많은 사내요. 초희! (다시 그녀를 안는데)
(무대 서서히 암전되면서)
난설헌2 (spot 비치면) 그후 15세 어린 남편 성립은 시모님의 주선으로 서실로 보내집니 다. 서실이란 형편이 비슷비슷한 양반댁 자제들이 모여 함께 과거공부를 하는 곳이죠. 시모님 말씀이, 남의 아내된 여인의 첫번째 도리는 지아비의 출세를 돕는 일이며, 그 첫째가 지아비의 기운을 애먼데 쓰게해선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모님의 말씀을 옆에서 듣고있던 어린 언년이가 시모님 가신 후, 지아비의 기운을 애먼데 쓰게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자꾸 물어서 무척이나 난처했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마침내 전 첫 딸 상희를 얻고 다음 해에 둘째를 갖기에 이릅니다. (spot 꺼지고)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마루에서 시모, 난설헌1, 언년이가 함께 일하고 있다. 난설헌1과 언년이는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두르고 있고, 난설헌1은 배가 만삭이 되어있다. 그들은 율란, 조란, 강란을 만들기 위해 익힌 밤, 대추, 생강을 껍질을 까서 으깬 다음 꿀, 계피 가루와 섞어 밤톨 모양, 생강 모양, 대추 모양으로 만들어 잣가루를 묻힌다.)
시모 (대추, 생강, 밤톨 모양을 빚어 상 위에 늘어 놓으며) 중국 후한의 악양자를 본받도록 해야 한다. 아내는 베를 짜서 생계를 이어가며 공부하기 싫어하는 남편이라도 자식과 같이 꾸짖고 북돋우며 공부를 뒷받침해야 하느니, (도마 위의 잣을 칼로 다지던 난설헌1이 익힌 대추 알의 껍질을 칼로 벗기던 언년이가 꾸뻑 졸자 허벅지를 살짝 꼬집어 준다. 언년이, 눈 뜨고 일 계속한다.) 기록에 보면 이런 서찰이 흔하게 눈에 띄니라. (이야기 중단하고 언년이가 껍질 벗겨놓은 대추 한 알을 들어 보며) 이렇게 속 살을 죄다 깎아버리면 어쩌느냐? 얇게, 박사(薄紗)보다도 얇게 벗겨내거라. 언년이 네 마님. (더욱 조심해서 칼질을 한다.) 시모 우리 낭군이 또 이번에 낙방하셨음을 알았습니다. 낭군께서 괴롭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 앞으로도 힘을 다할 것이니, 이미 작년에는 머리를 잘라 객지에서의 양식을 마련해 드렸으나, (이 때 칼질하던 난설헌이 존다. 언년이, 시모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그녀를 흔들어 깨운다. 난설헌1, 일 계속한다.) 올 봄에는 비녀를 팔아서라도 이 한 몸의 물건을 다 없앨망정 낭군의 여비를 어찌 모자라게야 하겠습니까, 어떠냐들, 마음에 느껴지는 바가 있느냐? (둘이서 동시에) 난설헌1 네 어머님. 언년이 예 마님. (귀동어미 등장한다.) 시모 (귀동어미가 다가오자) 어떻더냐, 부엌 큰 솥의 추어(미꾸라지)는 푹 고아졌느냐? 귀동어미 네 마님. 아궁이 불도 꺼내 놓았습니다. 시모 그래 잘 했다. 귀동어미 (난설헌1에게 서찰 주며) 친정 오라버니 서찰이유. 난설헌1 (받아 곁에 놓아 둔다.) 귀동어미 상희는 점심 잘 먹구 잘 놀고 있으니 염려 말우. 난설헌1 고마워요 귀동어미. (귀동어미 퇴장한다.) 시모 참으로 가련키도한 일은, 가세 가난하여 식솔들이 굶을 지경이면 그 또한 아녀자의 짐이라, 어떻게 해서라도 양식을 마련하여 굶지 않도록 하여야 하니 오죽 괴롭고 답답하겠느냐.
(잠시 후 무대 암전하고)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난설헌1, 그동안 깨끗이 치워진 마루 끝에 앉아 서찰 읽는다.)
하곡 (spot 비치면) 내 사랑하는 누이 난설헌 잘 있는가? 누이의 두번째 아이 복중 태아는 지금쯤 만삭이 되었을 터인데 그 또한 잘 있는가? 그러리라 믿네. 기쁜 일이 두어 가지 되네. 첫째는, 조선 최고의 당시인(唐詩人)이며 조선의 이태백, 우리의 영원한 사부 손곡, 즉 이 달(李 達)이 중국 사신 일행의 접객 일을 맡아 하면서 누이의 시들을 보인즉, 중국시의 전성기인 당 시대 시인들과 비교하여도 손색이 없을듯 하다는 찬사를 얻었네. 누이의 유선시(遊仙詩)들에선 신선계(神仙界)에 대한 동경과 꿈이 탁월하게 묘사돼 있으며 음률 또한 절묘하다는 평이었네. 그리고 또 하나는, 시문집(詩文集) 편찬 건이네. 백인 시선(百人詩選)이라 이름 붙일 모양인데, 이번 일은 매우 획기적인 시도가 될거라고들 벌써부터 다들 기대가 크다네. 무슨 얘긴고 하니, 이번에는 천민을 제외하고 사대부 외에도 농공상 양인들과 서얼에, 심지어 부녀자들까지 망라하기로 했네. 기생들은 여늬 부녀자랄 수 없으니 빼기로 했고. 이 일에 우리 손곡이 나와 함께 끼어들기로 되어있고, 중요한 편집위원 격인 주봉이란 인물은, 저명한 성리학자로서 보수와 진보의 양면을 적절하게 선용할 줄 아는 매우 융통성 있는 인사일쎄. 강직하면서도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있는 분이네. 손곡과 나는 합의하여 누이가 혼인 전에 쓴 <연밥을 따면서>를 싣기로 하고 추천에 올렸네. .. 좋은 꿈이나 꾸게. 우리 천재 신동 누이의 아름다운 시사를 그 누가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하겠는가!
(무대 암전되면서)
난설헌2 (spot 비치면) 오라버니께서 추천에 올리셨다는 그 시는, (동시에 screen에도 소개되며) 가을 호수는 맑고도 넓어/ 푸른 물은 구슬처럼 빛나는데/ 연꽃 둘린 깊은 곳에/ 목란배를 매어 두었네. 님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 따서 던지고는/ 행여나 누가 보았을까/ 한 나절 혼자서 부끄러웠네. 혼인 전, 미래의 나의 남편이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하면서, 또한 그리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쓴 시입니다. 그 시가 시문집에 실리게 되다니, 전 너무도 기뻐서 그날 밤 한 숨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spot 꺼지고)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웃방의 난설헌1, 아기가 잠들어있는 옆에서 아기 옷을 짓고 있고, 언년이는 밤 껍질을 까고있 다.) (사이) ((E) 갖난 아이 깨어 우는 소리) (언년이, 아기에게 간다.)
언년이 어유, 우리 복동이 깨셨나? (우는 아기를 포대기채 들어 안고) 아씨, 우리 도련님이 배가 고픈가 봐요. 젖좀 주셔요. ((E) 아기 울음 그친다.) 난설헌1 (일감 밀어놓고 젖 문질러 젖 먹일 준비 한다.) 언년이 (아기를 넘겨주며) 영리하기도 하지. 밥 먹을 때를 어찌 그리두 잘 알아맞추나, 우리 복동이. 난설헌1 (아기에게 젖 물린다.) 언년이 (일 계속하며) 지례 계신 큰 마님께서 이름 지어 올려보내시고 아직 큰 손주 얼굴 한 번 못 보셨으니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난설헌1 그러게 말이다. 언제나 한 번 말미를 내어 올라 오시려는지 .. (아기를 보며) 어이구, 배가 얼마나 고팠으면 젖 넘어가는 소리가 꿀떡꿀떡 크기두 하지 우리 윤이!
(무대 서서히 암전되면서)
난설헌2 (spot 비치면) 옛부터 아이들 아니면 웃을 일이 없다고 했나요,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상희, 갖난쟁이 윤이, 두 어린 것은 정말 큰 복덩이들이었죠. 저의 기쁨, 축복, 행복, 위안, 그리고 효자 효녀들이었습니다. 아이 젖 준다 핑계 대고 눈 한 번 붙이고, 아이 돌본다 구실 삼아 한숨 돌리고, 고것들 보러 애들 아비가 집에 자주 들리면서 식구들 간에 오붓한 시간도 누려 봤습니다. 호랑이 같은 시모님까지 아들 낳느라 수고했다며 그 보기 힘든 웃는 얼굴을 제게 보여 주셨습니다. 허나 우리 시모님은 또다시 저로 인해 마음 불편해 하셨습니다. .. 제가 남편 성립에게 보낸 사랑의 서찰 때문이었죠. 제비는 처마 비스듬이 짝지어 날고/ 지는 꽃은 어지러이 비단옷 위를 스치네. 규방에서 홀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 봄풀이 푸르러도 강남 가신 그대/ 돌아올 줄 모르네. 이것 때문이었죠. (spot 꺼지면서)
(무대에 조명 다시 들어오면 난설헌1과 언년이가 갖난 윤이를 어르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시모 등장한다.)
시모 (마루로 올라 방문 앞에서) 악아, 난설헌1 (벌떡 일어나 방문 열며) 어머님 어서 오세요. 시모 (들어선다.) 언년이 (아기 안은채 아랫목에서 물러난다.) 시모 (아랫목에 좌정하고 언년이에게 팔 내밀어 아기 달라는) (언년이가 아기 안겨주자) 어디 보자, 그래애, 네가 이댁 맏상주냐? 응? .. 허, 녀석이 보면 볼수록 즤 애비 눈매를 빼닮았구나. (아이 어르는 소리.) 그래애, 이댁이 뉘 댁인가 하면, 안동 김씨에 김성립이가 늬 애비란다, 알겠느냐? (다시 아이 어르는 소리) 이마는 (난설헌1을 보며) 널 닮아서 훤하고 당돌하구나. (아기를 도로 언년이에게 주면서) 아이 안을 땐 조심해야 하느니라. 아직 뼈가 굳질 않아 고개며 허리를 잘 받쳐주어야 하느니. 언년이 네 마님. (아이를 조심스레 자리에 눕히고) (시모에게) 마님 이제 그만 상희는 데려올까요? 만일 자다 깨서 울기라도 하면 .. 시모 괜찮다. 그냥 안방에서 자게 둬라. 그리고 언년이 넌 좀 나가 있어라. 언년이 네 마님. (서둘러 나간다.) 시모 .. 윤이도 곁에 있으니 짧막하게 이르마. 너, 서실의 네 서방한테 서찰을 보냈느냐? 난설헌1 .. 네 어머님. 시모 그것도 보통의 것이 아니고 규중 아녀자로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는 내용이더구나. 제비가 짝지어 날고? 이건 도저히 정숙한 여인의 시사라 할 수 없다. (계속 차분한 어투로) 네가 그런 음탕한 시를 지었다 해도 내가 일일이 네 서안 옆에 붙어있기 전에야 그걸 어찌 알겠느냐? 네가 서실로 전한 그 서찰이 그 애 친구들한테 발각이 된 모양이더라. 그런 얘기 들었느냐? 난설헌1 못 들었습니다. 시모 그래서 짖꿎은 서실 친구들이 네 서방을 놀려대고 한 바탕 소동이 난 모양이더라. 이래서야 되겠느냐? .. 성립이 그것이 입 하난 무겁지. 나두 이 얘길 그애한테서 들은 게 아니다. 밖에서 들려오더구나. 이미 사람들 간에 소문이 되어 떠돌고있다는 얘기가 아니냐, 이 무슨 가당찮은 집안 망신이란 말이냐? 난설헌1 .. 시모 너 내 말이 고까우냐? 난설헌1 아닙니다. 잘못했습니다 어머님. 시모 그럼 그래야지. 넌 종내 이 집 귀신이 될 몸. 소중한 식구이니 내 타이르는 것이다. 여자란, 목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름 또한 담 밖을 넘어가선 안 되느니, 다신 그런 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없도록 해라. 알겠느냐? 난설헌1 네, 어머님. 시모 (아기 내려다보며) 녀석 혼자서 잘도 노는구나. 네 젖이 탈없이 좋은 모양이로구나. (일어서며) 혹시라도 젖이 잘 안 돌면 말하거라. 난설헌1 (일어서며) 네 어머님.
(시모 방을 나서는데 무대 암전되고)
(spot 비치면 시모, 마루 끝에 앉아 허리춤에서 서찰 꺼내 펴 읽는다. 옆엔 쌀이 담긴 함지박이 놓여있다.)
시부 (spot 비치면) 가내 두루 평안한지 궁금하오. 난 이 곳 지례에서 잘 지내고 있소. 무엇보다 기쁘기 짝이 없는 것은, 우리 첫 손주가 무사히 백일을 맞이하게된 것이오. 수고 많았다고 나 대신 며늘애에게 치하의 말 전해 주오. 그리고 우리 며늘애 말이오, 이 곳 객지에서 큰 인물을 만나 직접 그의 입을 통해 며늘애 칭찬을 듣게 되었소. 서애 유성룡 말이오, 예조판서에 동지경연춘추관사 제학을 겸하고 있고 이태 전 왕명으로 황하집서를 편찬하여 올린 적이 있으며, 덕행과 문명(文名)이 드높은 인물이 아니오. 그 분 말씀이, 난설헌의 글을 보았는데 여자의 글이 아니었소. 어찌 허씨 집안에만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난 시학을 잘 모르나, 내 보기에 말(語)을 세우고 뜻을 창조하는 솜씨가 마치 한 떨기 꽃이나 물 속에 비친 달과 같았소. 이러질 않겠소? 그 분이 난 시학을 잘 모른다고 한 것은 순전히 겸손에서 나온 말일 뿐임은 조선인이면 누구나 알고있을 터이고, 결국 우리 며늘애는 시인으로서 조선 제일의 반열에 든 거나 다름이 없소. 또한, 허씨 집안의 뛰어난 재주란 누구겠소, 바로 내 친구 하곡과 그 동생 균까지를 일러 말함이 아니겠소. 그리고 그 분 말씀이, 세 남매 중 난설헌, 곧 우리 며늘애가 첫째라는 거요. 첫째. 알겠소? 우리 며늘애 건강은 어떠하오? 내 보기에 그 애 몸집이 그리 튼실치는 못해 보이니 유의하여 신경써주기 바라오. 그리고 이건 다른 얘기요. 내가 지례로 좌천이 돼온 것이 무엇 때문인지 잘 알 것이오. 동인들이 밀리고있기 때문 아니오. 그러니 처남 응개도 조심하라 이르고, 이럴 때 같은 동인끼리니 며늘애의 친정댁과도 별 탈이 없어야 함을 잘 알 것이오. 이 또한 각별히 유의해주기 바라겠소.
(시모가 서찰 내려놓음과 동시에 시부의 spot 꺼지고)
시모 (남편에게 말하듯) 내가 무슨 며늘애를 구박이라도 하였소? 당신은 속도 좋으시우.우리 성립이 아직껏 출사도 못했는데, 그깟 며늘애 시사 나부랑이 칭찬을 달가와 하시우? 당신은 내 맘 몰라요. 집안 일은 대충 해치우고 서책에 파묻혀 인사불성이지 않으면 방탕한 시나 지어 집안 망신 시키는 그 애 소행을 내 일일이 고해바치지 않으니, 당신이 알 턱이 있나요? (spot 꺼지고)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마루에서 난설헌1과 언년이, (둘 다)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두르고 나박김치에 들어갈 재료들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고추는 보급되기 전임.) 귀동어미 등장한다.)
귀동어미 (난설헌1에게 서찰 주며) 친정 오라버니 서찰이구먼.
(난설헌1, 서찰 받아 옆에 놓고 귀동어미 나간다. 난설헌1, 앞치마에 손의 물기 닦고 서찰 펴 읽기 시작한다. 언년이 일 계속하는데 무대 조명 약해지면서 서찰 읽는 난설헌1과 하곡에게 각각 spot 비친다.)
하곡 (spot 아래) 우선, 하는 수 없이, 우리 누이의 시가 지난번 이야기했던 시문집에 오르지 못했음을 알려야겠네. 이유는, 그 시가 여인의 시로서 지나치게 부덕(不德)하여 이 나라의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이라네. 지난번에 이야기한 주봉 그 사람이 그 시를 읽더니 고개를 홰홰 내저으며 이러더군. 과연 소문대로이군. 우리가,무슨 소문입니까 하니 사대부가의 부녀자로서 덕이 부족하다는 소문이네. 그렇잖아도 난설헌이라는 부녀자의 이야기가 있었네. 그러면서, 이 나라 여인들의 교화는 조선조 이래 조정의 강력한 의지인데 거기 찬 물을 끼얹을 수 없다는 것이 그 자의 주장이었네. 마음이 열려있는 줄 알았던 주봉 또한 알고 보니 경직되고 편협한 이 즈음 위정자들의 무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실감하였네. 허나 여기 손곡의 글을 보내네. 이 글은 손곡이 어느 시인들의 모임에서 누이를 소개하기 위해 준비한 내용일쎄. 그리고 다행하게도 손곡은 그 날 모임에서 누이를 소개하면서 참석자들의 박수까지 받았다네. 그 모임엔 주봉 같은 훼방꾼이 없어서였겠지. (spot 꺼지면서)
손곡(이 달) (spot 비치면) (초라하고 어딘가 삐딱한 차림새이다.) 여기, 이 시대의 어둠 속에서 유독 밝은 빛을 발하는 하나의 정신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허난설헌이라 합니다. 조선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 중 제일 앞서가는 한 여인, 천재시인이라 불러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러하냐? 그 까닭은, 이제까지 조선 최고의 시사로 칭송되고있는 속미인곡의 상투성을 그녀의 시는 간단히 넘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또 왜냐? 자, 속미인곡은, 임금을 그리워하는 시인의 마음을 여자의 그것에 기탁하여 지은 시가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껏 모든 다른 시편들에서 처럼 이 시에서도 시인은, 임금에게 버림받거나 헤어짐이 모두 자신의 탓이라고만 할뿐 절대 자신의 솔직한 속마음을 드러내는 법이 없습니다. 속마음으로 아무리 임금을 원망하고 임금의 처분을 섭섭해 하더라도 말입니다. 허나, 난설헌의 시는 다르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screen에도 소개된다.) 아름다운 비단 한 필 곱게 지녀왔어요. 먼지를 털어내니 맑은 윤이 났어요. 한 쌍의 봉황새 마주보게 수놓으니/ 반짝이는 무늬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오늘 아침 그대 가시는 길에 드려요. 님의 옷 만드신다면 아까울 것 없지만/ 혹여 다른 여인 치맛감으론 주지 마셔요. 자, 여기서 저는 제일 마지막 줄에 그만 홀딱 반해버렸습니다. 혹여 다른 여인 치맛감으론 주지 마셔요. 어떻습니까?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모두가 자신의 탓이라고만 하는 대신 솔직한 감정표현이 너무도 사랑스럽지 않은가요? 물론 여러분들 중 대다수는 이런 솔직함에 익숙치 않겠지요. 어색하고 불편하겠지요. 허나 그것은 우리 모두가 얼마전부터 그렇게 잘못 길들여져왔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린 지난날, 요즘과 달리 참으로 멋지게 살았던 과거가 있습니다. 헌데 우린 점차 그 기억마저 잊어가고 또 잃어가고 있습니다. 솔직함, 자연스러움으로부터 자꾸 멀어져만 가고 있는 것입니다. 허나 이 어둠 속에서도 난설헌 그녀만은 자신을 제대로 표현할 줄 알고 있습니다.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내보일 줄 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님을 만나 물 건너로 연밥 따서 던지고는/ 행여나 누가 보았을까/ 한 나절 혼자서 부끄러웠네. 자, 이 몇줄 시에 대해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얼마 전 어느 근엄한 시인이며 학자이신 분께서 이 시를 여인으로서 부덕함의 소치라 평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여인의 몸으로 대담하게도 님을 만나고 연밥을 따서 던지고 하는 그런 헤픈 몸가짐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전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자 할 때 우린 정직해질 필요가 있는 것이고 그러한 정직한 자기성찰을 통해서만 우린 인간을 인생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 박수소리) 손곡 아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E) 박수소리 잦아들고) 손곡 에, 지금 저는 뜻밖에 좋은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벅찹니다. 솔직한 반응 보여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드리면서,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관계상 난설헌의 시의 나머지 훌륭한 점들을 간략하게 간추려 말씀드리겠습니다. 두번째로, 난설헌은 시를 지음에 있어 마치 화공과도 같은 솜씨를 지녔다 할수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 <봉선화>라는 시에서 새벽에 일어나 주렴 걷다가 보니/ 반가워라, 붉은 별이 거울에 비치네.를 놓고 볼 때, 전날 밤 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여 빨개진 손톱이 아침에 일어나 발을 걷다가 보니 그 빨간 손톱들이 거울에 비치면서 붉은 별들처럼 보인다 이거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E) 다시 박수소리 시작되었다가 잦아들고 난 후에) 손곡 에, 이 밖에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적지 않습니다만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고, 끝으로, 난설헌은 자신의 처지와 다른 가난한 집 처녀들의 고달픔을 노래한 아주 많은 편수의 <빈녀음>을 썼습니다. 빈녀음, 가난한 처녀를 위한 노래죠, 그 중 한 수, 그리고 나 이 달이 무척 아끼는 또 한 수의 시를 읊도록 하겠습니다. 가난한 처녀를 위한 노래, (screen에도) 그 얼굴 남만 못지 않고/ 바느질 길쌈도 솜씨가 좋건만/ 가난한 집 태어나 자란 탓에/ 중매인도 발 끊고 몰라라 하네. 에, 이번 것은 밤에 홀로 앉아입니다. (screen에도) 비단폭 가위로 결결이 잘라/ 겨울옷 짓노라면 손끝 시리네. 옥비녀 비껴들고 등잔가를 저음은/등잔불을 돋울 겸 빠진 나비 구함이라. (spot 꺼진다.)
난설헌1 (spot 비치면) (손곡에게 말하듯) 고맙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스승님! 허지만,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힘겹게 토해낸 저의 시들을 읽어줄 사람들을 찾지 못해 저는 그 때문에도 너무 외롭습니다. 물론 스승님께서 절 지켜봐 주시고 격려해 주시지만, 저의 외로움이 쉽게 끝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screen에도) <내 소리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구나> 오동나무 한 그루가 역양산에서 자라/ 차가운 비바람 속에 여러 해 뽐내었네. 다행히 보기 드문 악공을 만나/ 베어다가 거문고를 만들어/ 한 가락 타보았건만/ 세상이 내 소리를 들어주지 않는구나!/ 천년만에 타본 광릉산 곡조/ 앞으로는 이 옛소리 끝내 없어지리라.
(무대 암전된다.)
난설헌2 (spot 비치면) 그리고 뜻밖의 비보가 전해집니다. 인자하시던 시부님께서 객지에서 그만 돌아가시고 만 것입니다. 며느리 시집 와 얼마 안 있어 시부님이 돌아가신 것은 이는 곧 며느리의 흉인줄 알고 있느냐? 시모님의 말씀이었죠. 전 그 물음에 뭐라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웃방에서 어린 윤이 누워 자고있고 그 옆에서 언년이, 아기 옷감에 누빔질을 하고있다. 난설헌1, 서안 앞에 앉아 있다.)
(이윽고 만취한 성립, 흥얼흥얼하면서 들어와 곧장 마루로 올라 방문 앞에 서서)
성립 이보오 부인 부인! 난설헌1 .. 언년이 (일어나 방문 열고) 어서 오십시오 서방님. 성립 뭐야? 감히 네까짓게 날더러 서방님이라? 허! 이몸이 엄청 바쁘신 몸인데, 끅, 네 차례까지 가겠느냐? 언년이 (아기가 깰까봐 전전긍긍한다.) 난설헌1 서방님, 윤이 자고 있는 게 안 보이십니까? 성립 (윤이에게 가는데) 난설헌1 (언년이에게) 데리고 나가거라. 언년이 (아기를 포대기에 싼 채 안고 나간다.) 성립 어? 우리 윤이가 어딜, 어딜 가는거야? (쫓아간다.) 난설헌1 서방님! 성립 (멈춘다.) 난설헌1 (일어나며) 자리를 펴겠으니 누워 쉬셔요. 성립 (그녀를 무작정 껴안고 딩굴다가 그녀를 깔아 누른채) 난설헌, 자네 참 잘났더군! 서울 장안의 시인 학자들이 모두 자네 얘길 하며 군침을 흘린다네, 허허 .. (다시 껴안고 딩굴며) 허나 자넨 내꺼, 오로지 이 김성립이꺼라 이거야! (걸리적거리는 책이며 지필묵을 마구 던지며) 이 따위 것들 다 갖다 버리라구!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고 입을 맞추며) 오 이쁜 것, 내 사랑! 세상에 지어미한테 지아비만한 게 어디 있다구, 안 그렇소 부인? 내 자주 못 들려 미안허네만, 어쩌겠소, 남정네가 세상 나가 큰 일 하자면 준비 또한 소홀찮거늘. .. 왜 그런 눈으로 보오? 얼음짱 같은 그 눈길에 내가 그만 얼어죽겠소! (그녀가 뿌리치고 일어나려 버둥대지만 더 꼭 눌러 꼼짝 못하게 하며) 어허, 이러지 말아요, 난 부인의 남편이요. 정식으로 대례 올린 하늘 같은 지아비란 말이오. (가까이 있는 책을 던지며) 이런거 다 치워버리고 이 서방님만 기다려주면, 누가 알겠소? 그 땐 내 열흘에 한 번이라도 찾아와 줄른지. 어떻게 생각하오 부인? 말해 보오 어서! 난설헌1 .. 성립 (부른다.) 부인, 난설헌1 .. 성립 대답하구려 어서. 예 서방님하고. 난설헌1 .. 성립 내게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 담아 시사 지어 보내던 허초희, 난설헌은 어딜 간거요? 이제 신혼은 다 끝났다 이거요? .. 그렇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겠지. 허나, 세상 여인들이란 지아비가 어떤 모습으로 들이닥쳐도, 설혹 10년 만에 산적이 되어 돌아온다 해도 세월을 잊은듯 한결같이 나긋나긋한 여인이어야 하는 것 아니오? 어떻게 생각하오 부인? .. 어허, 점점 더 차가워 지는거요? . (한숨) (천천히 일어나 앉는다.) 난설헌1 (일어나 엉거주춤 고개숙이고 앉아있다.)
(잠시 사이)
성립 (술이 확 깬다.) 미안하오. 내가 실수를 했소.
(난설헌1, 일어나 마루로 간다.)
성립 (가까이에서 시고 하나를 집어들어 펼쳐 읽는다.) (screen에도) 물시계 소리는 낮아지고 등불은 반짝이니/ 비단 휘장은 차고 가을밤은 길기도 해라. 변방 옷을 다 지어 가위는 차디찬데/ 창에 가득 파초 그림자 바람에 흔들리네. 허, 애절하구만. (시고를 서안 위에 놓고) (난설헌1이 가져온 꿀물을 마시고) 규원가라, 나이 스물도 되기 전에 생과부를 만들었으니 미안하오만, 나 또한 괴로움이 많다는걸 알고 있소? 난설헌1 압니다. 성립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인생을 살아야하는 남정네들의 운명을 생각해 봤소? 난설헌1 그래서 한눈 안 팔고 열심히 공부를 하셨는지요? 성립 허 꼭 내 어머니 같은 말투구려. 난설헌1 말꼬리 돌리지 마십시오. 기생들 치마폭에나 싸여 세월을 죽이시면서 과거(科擧) 이야기를 할 수 있으십니까? 성립 (재미있다는듯) 허 제법 강짜가 심하시오 부인? 난설헌1 오래 얼굴을 못 본다고 하여 무작정 규방이 외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에 계시든 제 마음을 알아주신다면 외로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서방님께서 저로 인해 힘든 일이 많으신 줄 알고 있습니다. 성립 허 그래요, 알고 있다 ..? 난설헌1 듣기 거북하시더라도 들어보세요. 성립 들어봅시다. 난설헌1 첫째, 친한 친구들조차 아내보다 시를 못 짓느니 어쩌니 해가면서 일부러 농담 속에 가시를 담아 툭툭 내던지는 말들로 하여 사기가 죽고, 그보다 더욱 저에 관한 이런 저런 소문들로 괴로우신 줄 잘 압니다. 제가 부덕(不德)하며 때로 음탕한데다 집안 일 또한 소홀히한다는 소문이 돌고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허나, 저로서 뭘 어찌해야 그런 소문들을 막을 수가 있나요? 시를 버리면 된다? 서방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런가요, 서방님? 성립 (한숨만) 난설헌1 그러시겠지요. 서방님도 저처럼 뭘 어찌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기 어려우시겠지요. 허나 그렇다고 꼭 그런 식으로 자포자기하셔야만 할까요? 서방님이 마음을 다잡으시고 과거공부에만 전념하신다면 저나 우리 상희 윤이도 설혹 일년을 못 본다 하여도 서운치 않을 것입니다. 만일 이 즈음처럼 서방님께서 앞으로도 다름없이 늘 그렇게 하신다면, 그 땐, 급제도 급제지만, 우리 가정이 결코 온전치 못할 것입니다. 성립 (유구무언이다.)
난설헌1 끼니 때가 가까우니 밥상을 차리라 일러야겠다. 균 아닙니다 누님. 저 시장하지 않습니다. 차나 한 잔 들고 가겠습니다. 난설헌1 굳이 사양할 것 없다. 균 아닙니다. 정말 저 시장하지 않습니다. 난설헌1 ... 그럼 차를 마시자꾸나. 균 네.
(난설헌1, 방문 열어놓은채 마루 찬장에서 한과와 오미자 화채를 마련하는 동안)
균 상희 윤이, 못 본 사이에 많이도 컸더군요. 난설헌1 그렇지? 많이 컸지? 균 네. 난설헌1 (다과상 들고 들어와 내려놓고) 자 들자. 균 (화채 조금 마시고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 꺼내 주며) 어머님이 누님 위해 지으신 보약입니다. 난설헌1 (받으며) 이런, 다음엔 이런 것 안 먹어도 된다고 말씀드리거라. 내가 딸 노릇한 게 뭐 있다고. (한 쪽에 소중히 놓아둔다.) 균 (나머지를 주며) 이건 하곡 형님이 주신 것입니다. 난설헌1 (서책 한 권을 집어 들어 기뻐하며 펼쳐본다. 이어 서책 내려놓고 지필묵을 들어 보며) 지필묵이구나! (하나 하나 들어보며) 이 귀한 것을, 오라버니께서도 아껴가며 쓰시는 이 귀한 것을! (그리고 서찰을 집어들고 반갑게 펴서 읽는다.) 두율 시집 한 권을 보낸다. 시가 외면당하는 이 시대에 차츰 희미해져가는 두보의 노래를 너를 통해 다시 듣고 싶구나. 오래비가. 균 형님께선 요새 부쩍 시가 그립다, 시가 그립다 노랠 하십니다. 대체 어딜 가야 좋은 시를 만나랴, 하시면서요. 난설헌1 세상 일들이 뜻 같지 않으니 그러시겠지. 균 게다가 손곡 스승님은 또 어떻구요? 난설헌1 왜? 무슨 일이라도 생긴게냐? 균 얼마 전에 한리학관에 제수되신 것은 알고 계실 터이고, 난설헌1 왜 또 답답하다시며 자리를 물리고 나오셨느냐? 균 그렇지요. 그리고 나선 또 정처없는 유랑의 길, 그리고 한참 있다 잊을만 하면 상거지에 해골이 다 돼 돌아오시곤 하시지 않습니까. 난설헌1 (한숨만.) 균 허나, 생각해 보십시오. 손곡이라면 조선 제일의 시인에 식견 또한 누구에게도 뒤질 분이 아니신데, 접빈사 종사관에 한리학관이 무엇입니가? 그게 말이나 됩니까? 난설헌1 어쩌니, 서얼인걸. 균 그럼 왜 객관에 주재하는 양반들에게 기생첩은 붙여줍니까? 거기서 태어나는 소생을 그토록 차대할 작정이면 말입니다. 정말 너무들 하는 것 아닙니까? 보십시오, 우리 하곡 형님만 해도, 조정은 왜 죄없는 형님을 죄를 엮습니까? 모두 썩었습니다. 썩어 빠졌습니다! (목소리 점점 커진다.) 그뿐입니까? 누님 일만 해도 그렇죠. 왜 세상은 점점 아낙들을 집안에 가두고 못살게 구는 거죠? 왜들 그러는 거죠? 난설헌1 말소리를 좀 낮추어라. 균 .. 난설헌1 난 괜찮다. 우리 상희 윤이도 예쁘고. 그런대로 잘 살고 있잖니. 집에 가면 어머님께 그렇게 말씀드리거라. 균 (목소리 조금 낮추어) 그렇게 대충 가린다고 가려집니까? 누님, 전 커서도 이 나라의 벼슬자린 절대 근처에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난설헌1 아무리 홧김에라도 그런 말은 좀 심한 것 같구나. 균 오로지 서안 앞에서 유교 경전만을 달달 외워서 벼슬길에 나아가고, 그러지 않는 한 차라리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아야 하다니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일어난다.) 난설헌1 왜, 벌써 가려느냐? 균 (마루를 내려서며) 네, 갑니다. 난설헌1 (균을 쫓아 내려간다.) 균 나오지 마십시오. 난설헌1 (계속 균의 뒤를 따른다.) 균 그만 들어가시래두요. 난설헌1 (그래도 따라 나서는데)
(무대 암전된다.)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김씨댁 사랑. 네모난 공간 쯤의 가변무대로 한다. 성립, 우천, 매헌이 주안상 앞에 둘러앉아 있다. 주흥이 고조돼 있다.)
매헌 아 고죽이 마침내 북도 평사의 임무를 마치고 홍랑과도 이별할 때가 되었네. 귀동어미 (등장하여 주안상의 빈 그릇들을 챙긴다.) 성립 (귀동어미에게) 안주 좀 더 내오게. 귀동어미 예 서방님. 매헌 허나 그게 차마, 발길 떨어지기가 쉽잖았네. (성립, 우천이 동시에) 성립 그럴테지. 우천 (고개 끄덕인다.)
(귀동어미, 챙긴 그릇들을 갖고 무대 오른쪽으로 서둘러 간다. 오른쪽 끝에쯤 난설헌1이 안주접 시들이 놓인 쟁반을 들고 서있다.)
귀동어미 아유, 이 무거운걸, 고맙구먼. (그녀에게 빈 그릇을 주고 대신 안주 쟁반 받아들고 주안상으로 돌아간다.)
(난설헌1, 돌아서려다 잠시 사랑 쪽을 보며 서있는다. 귀동어미, 안주접시들을 상에 놓아주고 왼쪽으로 퇴장한다.)
매헌 (계속되는 이야기) 아 고죽이 떠나오는데 부득부득 홍랑이 따라나서는 거야. 그렇게 둘이서 한 20여리 같이 오다가 이젠 도저히 여인 혼자 몸으로 돌아가기 힘들만큼 왔다 싶어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이별을 했는데, 아 그러구두 글쎄 이 여인이 달랑 혼자 몸으로 함관령까지 오질 않았겠나, 그래 날은 저물고 비는 내리는데, 아 거기서 이 여인, 섬섬옥수로 시 한 수를 지어 고죽에게 보냈겠다, 성립, 우천 허! 매헌 그 시가 이거야. 묏버들 가려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성립 허! 그거 참 멋지구만! 우천 묏버들 가려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가 그 중 멋들어지구먼. 임의 손에 보내노라가 아니라 보내노라 임의 손에, 하! 성립 맞아. 정말 기가 막히군! 매헌 허나, (성립을 보며) 난설헌에야 비할 바가 못되겠지. 안 그런가? 성립 (얼굴색이 변한다.) 매헌 (찔끔한다.) 우천 (잔 들고) 자 자, 술이나 드세. (마신다.) 성립, 매헌 (잔 들어 마시고 안주 집는다.)
(조명 약해지고, 세 사람 그런대로 술자리 이어가는 동안 시모가 왼쪽에서 등장하다가 난설헌1을 보고 곧장 다가온다.)
시모 아니 너 대체 여기 서서 뭘하고 있는게냐? 난설헌1 (놀라) 아 아닙니다 어머님. 시모 아니라니, 뭐가 아니라는 게냐? 난설헌1 귀동어미가 혼자 몹씨 분주한듯 하여 .. 시모 빈 그릇을 받았으면 곧바로 부엌으로나 갈 일이지 어쩌자고 여기 서서 사랑을 엿보느냐? 네가 암만해도 창기가 부러운 게 아니냐? 창기처럼 얼굴 단장을 하고 기생들 노는 얘기에 정신을 팔고 있으니. 난설헌1 잘못했습니다 어머님.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시모 네가 몸이 너무 편해 그런 모양이다. 어서 가 부엌 일을 거들도록 해라. 손이 모자라 쩔쩔매고들 있다! (쌩하고 가버린다.) 난설헌1 예 어머님!
(무대 암전되면서)
난설헌2 (spot 비치면) 그 순간 저의 눈 앞을 스치는 하나의 광경이 있었습니다. (무대 쪽으로 돌아서고)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친정 사랑이다. 가변무대. 손곡(30대), 하곡(20대), 난설헌1(혼인 전, 10대)이 찻상을 가운데에 두고 담소 중이다.)
손곡 두목지로 말할 것 같으면, 에, 대단한 미남이었지. 노래에 춤에 수많은 미희들에 둘러싸여 일생을 보냈지. 물론 시도 출중했지. 두보만은 못해도 작은 두보 소린 들었으니까. 다만, 절제가 모자랐지. 반면, 두보는 일생동안 가난 속에서 방랑을 일삼았으니 고생을 면할 수 없었지. 하곡 대신 두보의 시는 민중을 대변함에 거침이 없었지 않습니까? 손곡 그렇지. 옳은 얘기야. 헌데 초희야, 난설헌1 네. 손곡 너라면 둘 중 어느 쪽이 마음에 들겠느냐? 두보냐, 두목지냐? 난설헌1 ... 손곡 허허 . 아무래도 두목지 쪽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 아니냐? 난설헌1 (고개 푹 숙인다.)
(무대 암전되면서)
난설헌2 (spot 비치면) 사랑방에 당당한 한 사람으로 끼어 앉아 담소를 즐길 수 있었던 그 시절은 이제 다신 오지 않을건가요? 정녕 그러한가요? ... 어머니!
친모 (spot 비치면) (앉아서) 초희야, 내외법을 모르진 않겠지? 시집 가서 말이다. 사랑채에 외간 남자가 와 있으면 근처에 얼씬도 말아야 한다. 우리집은 여늬집들과 달리 심하게 가리지 않아왔으나, 일반 사대부가 아낙들에겐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니 내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다. 알겠느냐? (spot 꺼지고)
난설헌2 그 후 저는 전보다 몇배 강도 높은 여공, 즉 집안일에 밤낮 없이 파묻히게 되었습니다. 헌데 이상한 것은, 전엔 일에 지치면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는데 이젠 어찌된 일인지 아얘 잠이 오지 않는 거에요. 정말 고통스럽더라구요. 그래서 전 차라리 잠 잘 것을 포기하고 한 밤중에 일어나 책을 읽거나 시를 짓기로 했습니다.
(웃방에 약한 조명 들어오면 난설헌1, 잠자리에서 일어나 등잔불을 켜 불빛을 약하게한 다음 병풍으로 방문을 막아 불빛이 새나가지 않게 한 다음 서안 앞에 앉아 책을 읽는다.)
난설헌2 결국 하루 중 수면 시간은 두세시간에 이른 새벽부터 밤중까지는 여공에, 한밤중엔 책과 시에 바치는 나날이 얼마간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 전 쓰러졌고, 이삼일 누워있다가 다시 일어난 바로 그 날 일입니다. (웃방 조명과 spot 함께 꺼지고)
(무대에 조명 들어오면 난설헌1, 핼쓱한 얼굴로 서안 앞에 앉아 서책을 뒤적이고 있다. 시모 등장하여 마루로 올라 방문 앞에서 헛기침 소리 낸다. 난설헌1, 벌떡 일어나 방문 연다. 시모 들어선다. 아랫목에 좌정하고 난설헌1, 마주앉는다.)
시모 모두가 그 놈의 질기기도 한 시귀신 때문이니 날 원망하진 말아. 난설헌1 (시모를 본다.) 시모 그 놈의 시귀신 때문에 네가 허약해져서 종내 쓰러진 것이 아니더냐? 네가 남 다 자는 한밤중에 일어나 한 식경 씩이나 몰래 잡서와 시 나부랑이를 읽고 또 시를 짓는다는 것을 내 다 아느니. (한 쪽 구석의 시고더미를 가리키며) 저 시고들 이리 가져오너라. 난설헌1 (가져다 준다.) 시모 (받아 곁에 놓고) 이 시고들은 당분간 내가 보관하겠다. 네 것이니 돌려는 주겠으나 조건이 있다. 다시는 한밤중에 일어나 그 짓할 생각도 말아라. 또 그러면 그 땐 이 시고들, 아궁이로 들어갈 것이니. 알겠느냐? 난설헌1 ... 시모 내 너 시집온 다음 날 분명히 못을 박지 않았느냐, 잡서며 시 따위는 접어두기로. 헌데 넌 그동안 시에미는 말해라, 난 모른다, 이런 마음가짐이 아니었느냐? 난설헌1 ... 시모 &
1)제목:광한전백옥루상량문 단권 2)상태:상 3)지질:한지 4)판본:목판본 5)분량:11장 6)간행연대:1605년 7)크기:가로 19.3cm, 세로 31cm 8)내용:허난설헌이 8세때 지었다고 알려진 명문장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은 천상세계에 있다는 광한전과 백옥루의 가상 세계를 동경하여 그것을 작자의 이상세계로 현실화하여 그 殿과 樓를 짓고 상량을 올리는 글로서 글씨는 한석봉이 썼으며 특히 이 문장은 神仙 세계 즉 道家의 사상이 들어 있습니다. (코베이 출품작)
출전 : <한국의 한시 10. -허난설헌 시집> (1996년 초판5쇄, 1999년 개정증보판1쇄, 허경진, 평민사)
보배로운 日傘일산이 하늘에 드리워지니 구름 수레가 색상의 경계를 넘었고, 은빛 누각이 해에 비치니 노을 난간이 미혹된 티끌 세상을2) 벗어났다. 신선의 나팔이 기틀을 움직여서 구슬기와 궁전을 짓고, 푸른 이무기가 안개를 불어서 구슬나무 궁전을 지었다.3) 靑城丈人청성장인은4) 옥 휘장의 도술을 다하고, 벽해왕자도5) 금궤짝의 묘방을 다 베풀었다. 이는 하늘이 지은 것이지, 사람의 힘이 아니다.
(광한전) 주인의 이름은 신선 명부에 오르고, 벼슬도 신선 반열에 들어 있어서, 태청궁에서 용을 타고 아침에 봉래산을 떠나 저녁에 방장산에서 묵었다. 학을 타고 삼신산을 향할 때에는 왼쪽에 신선 浮丘부구를6) 붙잡고, 오른쪽에 신선 洪崖홍애를7) 거느렸다. 천년 동안 玄圃현포에서8) 살다가 꿈 속에 한 번 인간 티끌 세상에 늦었는데, <黃庭經황정경>을9) 잘못 읽어 무앙궁에10) 귀양왔다. 赤繩적승 노파가11) 인연을 맺어주어, 다함이 있는 집에12) 들어온 것을 뉘우쳤다.
병 속의 신령스러운 약을 잠시 玄石+少현사에 내리자, 발 아래의 달이 문득 계수나무 궁전으로 몸을 숨겼다. 웃으면서 붉은 티끌과 붉은 해를 벗어나 자미궁의 붉은 노을을 거듭 헤치며, 난새와 봉황이 피리 부는 신령스러운 놀이의 옛모임을 즐겁게 계속하였다. 비단 장막과 은병풍에 홀로 자는 과부는 오늘 밤이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니, 어찌 日宮일궁의 은혜로운 명령을 月殿월전에까지 아뢰게 할 수 있으랴.
벼슬 맡은 무리들은 몹시 깨끗해서 그 발로 팔색 노을의 관청을 밟으며, 지위와 명망이 드높으니 그 이름이 오색 구름의 전각을 짓눌렀다. 옥도끼에서 차가운 기운이 나니, 계수나무 밑에서 吳質오질이13) 잠들 수가 없었다. <霓裳羽衣曲예상우의곡>을14) 연주하자, 난간 가에 있던 素娥소아가 춤을 추어 올렸다. 영롱한 노을빛 노리개와 노을빛 비단이 신선의 옷자락에서 떨쳐지고, 반짝이는 星冠성관은 별빛 구슬로 머리꾸미개를15) 꾸몄다.
여러 신선들이 모여들 것을 생각해보니, 상계에 거처하던 누각이 오히려 비좁게 느껴졌다.16) 푸른 난새가 玉妃옥비의 수레를 끄는데 깃으로 만든 일산이 앞서고, 백호가 조회에 참석하는 사신을 태웠는데 황금 수실이 그 뒤의 먼지를 따랐다. 劉安유안이17) 경전을 옮겨 전하자 두 용이 책상 위에서 태어나고, 姬滿희만이18) 해를 쫓아가자19) 팔방의 바람이 산비탈에 머물렀다.
새벽에 상원부인을 맞아들이자 푸른 머리는 세 갈래 쪽이 흩어졌고, 낮에 상제의 따님을 만났더니 황금 (木+人빼고俊)북으로 아홉 무늬 비단을 짜고 있었다. 瑤池요지의 여러 신선들은 남쪽 봉우리에 모였고, 백옥경의 여러 임금들은 북두칠성에 모였다.
唐宗당종은 公遠공원의20) 지팡이를 밟아 羽衣우의를 三章삼장에서 얻었고, 手帝수제는21) 火仙화선과 바둑을 두며 온 누리를 한 판에 걸었다. 붉은 누각이 높게 지어지지 않았더라면 어찌 편하게 붉은 깃발을 세우고 조회에 참례할 수 있었으랴.
이에 十洲십주에22) 통문을 보내고 九海구해에 격문을 급히 보내어, 집 밑에 匠人장인의 별을 가두어 놓게 하였다.23) 목성이 재목을 가려 쓰고 鐵山철산을 난간 사이에 눌러 놓으니, 황금의 정기가 빛을 내고 땅의 신령이 끌을 휘둘렀다. 魯般노반과 (工,人+눈목빼고睡)공수에게서24) 교묘한 계획을 얻어내어 큰 풀무와 용광로를 쓰고, 기이한 재주를 도가니에 부리기로 했다.
푸르고 붉은 꼬리를 드리우자 쌍무지개가 별자리의 강물을 들여 마시고, 붉은 무지개가 머리를 들자 여섯 마리 자라가 봉래섬을 머리에 이었다. 구슬 추녀는 햇빛에 빛나고, 붉은 누각이 아지랑이 속에 우뚝했다. 비단 창가에는 유성이 이어지고, 푸른 행랑을 구름 너머에 꾸몄다.
옥기와는 물고기 비늘같이 이어졌고, 구슬계단은 기러기같이 줄을 지었다. 微連미련이 깃대를 받드니 月節월절이 자욱한 안개 속에 내리고, 鳧伯부백이25) 깃대를 세우자 난초 장막이 三辰삼진에 펼쳐졌다. 비단 창문의 수술을 황금 노끈으로 매듭짓고, 아로새긴 난간의 아름다운 누각을 구슬 그물로 보호하였다.
신선이 기둥에 있어 오색 봉황의 향기로운 누대에서는 기운이 불어나오고, 선녀가 창가에 있어 쌍 난새의 거울 갑에서는 향수가 넘쳐 흐른다. 비취 발과 운모 병풍과 청옥 책상에는 상서로운 아지랑이가 서리고, 연꽃 휘장과 공작 부채와 백은 평상에는 대낮에도 상서로운 무지개가 둘러쌌다. 이에 봉황이 춤추는 잔치를 베풀고, 제비가 하례하는 정성을 펼치게 하였으며, 널리 백여 신령을 초대하고, 널리 천여 성인을 맞이하였다.26)
서왕모를27) 북해에서 맞아들이자 얼룩무늬 기린이 꽃을 밟았고, 노자를 함곡관에서 영접하자 푸른 소가 풀밭에 누웠다.28) 구슬 난간에는 비단무늬 장막을 펼쳤고, 보배로운 처마에는 노을빛 휘장이 나직하게 드리웠다. 꿀을 바치는 왕벌은 옥을 달이는 집에 어지럽게 날고, 과일을 머금은 鴈帝안제는29) 구슬을 바치는 부엌에 드나들었다.
쌍성의 羅鈿나전 피리와 晏香안향의 銀箏은쟁은 鈞天균천의30) 우아한 곡조에31) 맞추고, 婉華완화의 청아한 노래와 飛瓊비경의 아름다운 춤은 하늘의 신령스런 소리에 얽혔다. 용머리 주전자로 봉황의 골수로 빚은 술을 따르고, 학의 등에 탄 신선은 기린의 육포 안주를 바쳤다. 구슬 돛자리와 옥방석의 빛은 아홉 갈래의 등불에 흔들리고, 푸른 연과 하얀 복숭아 소반에는 여덟 바다의 그림자가 담겼다. (이 모든 것이 다 갖춰졌지만) 구슬 상인방에 (상량문) 글이 없는 것만이 한스러웠다.
그래서 신선들에게 노래를 바치게 하였지만, <淸平調청평조>를 지어 올렸던 李白이백은 술에 취해서 고래 등을 탄지 오래이고32), 玉臺옥대에서 시를 짓던 李賀이하는33) 蛇神사신이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백옥루) 새로운 궁전에 銘명을 새긴 것은 山玄卿산현경의 문장 솜씨인데, 상계에 구슬을 아로새길 蔡眞人채진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나는)34) 스스로 三生삼생의 티끌 세상에 태어난 것이 부끄러운데, 어쩌다 잘못되어 九皇구황의35) 서슬푸른 소환장에 이름이 올랐다. 江郞강랑의36) 재주가 다해서 꿈에 오색찬란한 꽃이 시들었고, 梁客양객이37) 시를 재촉하니 바리에 三聲삼성의 소리가 메아리쳤다. 붉은 붓대를 천천히 잡고 웃으며, 붉은 종이를 펼치자, 강물이 내달리듯, 샘물이 솟아나듯 (상량문) 글이 지어졌다. 子安자안의38) 이불을 덮을 필요도 없었다. 구절이 아름다운데다 문장도 굳세니, 이백의 얼굴을 대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 비단 주머니 속에 있던 신령스러운 글을 지어 올리고, (백옥루에) 두어서 仙宮선궁의 장관을 이루게 하였다. 쌍 대들보에 걸어 두고서 六偉육위의39) 자료로 삼는다.
들보 동쪽으로 떡을 던지네.40) 새벽에 봉황을 타고 瑤宮요궁에 들어갔더니 날이 밝으면서 해가 扶桑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붉은 노을 일만 올이 바다를 붉게 비추네
들보 남쪽으로 떡을 던지네. 옥룡이 아무 일 없어 연못 물이나 마시니 은평상 꽃그늘에서 낮잠을 자다 일어나 웃으며 瑤姬요희를 불러 푸른 적삼을 벗기게 하네.
들보 서쪽으로 떡을 던지네. 푸른 꽃에 이슬이 떨어지고 오색 난새가 우는데 玉字옥자를 수놓은 비단옷41) 입고 서왕모를 맞아 학을 타고 돌아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네.
들보 북쪽으로 떡을 던지네. 북해가 아득해서 북극성이 잠기고 봉새의 깃이 하늘을 치니 그 바람에 물이 치솟네. 구만리 하늘에 구름이 드리워 빗기운이 어둑하네.
들보 위쪽으로 떡을 던지네. 새벽빛이 희미하게 비단 장막을 밝히고 신선의 꿈이 백옥 평상에 처음으로 감도는데 북두칠성의 국자 돌아가는42) 소리를 누워서 듣네.
들보 아래쪽으로 떡을 던지네. 팔방에 구름이 어두어 날 저문 것을 알고 시녀들이 수정궁이43) 춥다고 아뢰네. 새벽 서리가 벌써 원앙 기와에 맺혔네.
엎드려 바라오니, 이 대들보를 올린 뒤에 계수나무 꽃은 시들지 말고, 아름다운 풀도 사철 꽃다워지이다. 해가 퍼져 (달이) 빛을 잃어도 난새 수레를 어거하여 더욱 즐거움 누리시고, 땅과 바다의 빛이 바뀌어도 회오리 수레를 타고 더욱 길이 사소서. 은빛 창문이 노을을 누르면 아래로 구만리 미미한 (인간) 세계를 내려다 보시고, 구슬문이 바다에 다다르면 삼천년 동안 맑고 맑은 뽕나무 밭을44) 웃으며 바라보소서. 손으로 세 하늘의45) 해와 별을 돌리시고, 몸으로 구천세계의 바람과 이슬 속에 노니소서.
김성립 선조님과 허난설헌을 소재로 한 창작소설 <이 생에서는 늘 이별이었네>가 격월간 순수문학지인 <좋은문학>에 연재되고 있다. 작가는 김해에 사시는 여류 소설가 김영희님이시다. 2005년 8/9월 통권 27호부터 연재하고 있는데 종전의 소설이나 문학작품에서 다루던 내용과는 사뭇 다른 각도에서 다루었다고 한다.
이번 호에는 기획특집으로 제1장이 처음 연재되었는데 38쪽(114쪽-152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마흔 셋이 되는 해 늦가을, 마침내 내 인생에 결론 하나가 내려졌다. 나는, 아니 우리는 영산이라는 조그마한 시골에 버려졌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이었다. 유폐(幽閉), 그랬다. 우리는 유폐 되었다. 나는 더는 기다릴 사람이 없었다. 인간에 대한 모든 믿음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컴퓨터 한 대와 내 아이만이 내 모든 것이었다. 아이가 학교에 간 시간에는 나는 홀로 들과 숲을 쏘다녔다. 겨울로 넘어 가는 들과 산은 물 속 같았고 나는 조그마한 지느러미를 단 길 잃은 물고기였다. 때로 시냇물을 따라 걸으며 나무와 들꽃에게 나의 남은 길을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 아는 척도 하지 않고 시간의 질서를 따라 바람결에 흘려갈 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무응답이 섭섭하지는 않았다. 다만 시간의 질서에 순응해 흘러가는 그들만큼 순결하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다 날이 저물어 둥지로 돌아오는 내 발길은 허허로웠다. 저녁 밥상을 마주한 내 아이와 나는 말없이 수저만 움직였고 밤을 무서워하는 아이는 일찍 잠이 들었고 나는 컴퓨터 앞에 앉자 아이의 밤을 지켰다. 나는 여전히 세상의 욕망이 남긴 때를 씻어 내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내 사랑이 남긴 어둠 때문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내 어둠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구원해줄 빛 한줄기를 찾아 전자책들, 특히 역사책들 속을 떠돌아 다녔다. 나는 더는 인간을 믿질 않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인간이 쓴 역사책들은 믿었다. 왜냐하면 역사책들이란 실패한 인간들의 왜곡된 사랑에의 신음들이기 때문이었다. 그 뒤틀린 길들에서 방향 감각을 잃지 않고 제대로 길을 읽을 줄만 알면 빛이 된다고 믿었기에 나는 책들 사이에서 끝없이 방황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책들의 미로에서 빛을 찾아 헤매는 노마드(Nomad)였다. 그러다 한 여인을 알았다. 허 초희(許楚姬). 허 난설헌(許蘭雪軒)으로 더 잘 알려진 여인이었다. 물론 생소한 이름은 아니었다. 찬사와 비난, 진실과 소문이 엉켜 안개와 신화라는 아우라(Aura)로 둘려 싸여 4세기 반이나 흘려온 낡은 이름. 그러나 그녀는 내게 소문으로, 풍경으로만 스쳐가던 무관심한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일차적으로는 시간적 거리와 한문이라는 생경한 언어 탓이겠지만, 젊은 날 언젠가 이 여인의 시집을 읽은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의 시에서 손에 잡히는 어떤 절실한 삶의 질감과 독창성을 읽지 못한 탓이었다. 그런 내가 이 여인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선조 실록과 광해군 실록 그리고 16c 이후 인물들의 저술들을 역시 전자책으로 읽어 가다 단편 단편 기재된 이 여인에 관한 언급과 이 여인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언급들에 주목하면서였다.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입장차이에 따라 상반된 기술을 하고 있긴 했으나 실록과 저술들은 이 여인에 관해 이전에 내가 알고 있거나 세상에 떠도는 이 여인에 관한 많은 찬사와 비난들이 조금만 노력하면 밝혀질 수 있는 실체적 진실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만들었다. 이런 확인은 내게 다소 의외였고 또 일면으로는 곤혹이었다. 왜냐하면 이 여인에 관한 찬사와 비난들의 얼마간은 후대인들이 의도적으로 허난설헌 시집의 실체적 진실을 왜곡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 얼마간은 허초희의 진면목은 외면한 채 후대인들이 그들의 개인적 이념, 혹은 집단적 이념에 허초희을 이용하고 있다는 판단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 판단과 곤혹들은 내게 조선시대 선조조(宣祖朝) 초·중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역사 소설 『 이 生에서는 늘 離別이었네 』를 쓰게 하는 동기를 제공했지만, 내 소설에는 주인공으로 설정한 허 초희 이외에도 많은 인물들이 등장해서 주인공 허 초희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렇게 높지 않다. 그 이유는 허 초희가 살던 시대적 환경과 주변 인물들의 활동을 그리지 않으면 신화와 안개라는 아우라에 싸인 허 초희라는, 중세의 어두운 시절을 살다간 한 여성 시인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기 어렵다는 믿음에서였다. 작가가 자신이 쓰는 글의 끝을 미리 말하는 것은 글의 재미를 감소시키는 어리석은 짓이지만, 나는 허초희를 세상에 떠도는 소문이나 목소리 큰 자들의 강변(强辯)에 근거하여 성공한 시인이나 선구적이고 투쟁적인 페미니스트로 그리진 않을 작정이다. 왜냐하면 나는 허초희 당대와 여러 후인들의 저술에 근거하여 그녀를 방황하는 한 시인, 혹은 시인이 되려다 실패한 한 여인으로 보게 된 까닭에서이다. 나는 그녀를 순결하고 선구적인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자신의 불순결함과 욕망과 가망 없는 허영에 힘들어하고 사랑에 목말라 하던, 자의식이 강하나 시적 상상력 부족에 고민하던 한 시인으로 그리려 한다. 나는 내가 겪어 온 실패와 좌절을 되새기듯 허초희의 실패와 좌절을 되새김하며 맨 얼굴로 거울 앞에 쓴 나를 그리듯 그녀를 그리고자 한다. 모든 인간들이 세면을 하고 거울 앞에 서면 맨 얼굴인 자신을 외면할 수가 없듯이 그녀 또한 자신의 내면의 거울 앞에 서면 소문과 강변으로 덧칠된 자신의 벗겨진 맨 얼굴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은 엄혹한 진실일터 이기에. 그러나 나는 흠이 있더라도 분칠이 벗겨진 맨 얼굴인 허초희를 진실로 사랑한다. 왜냐하면 맨 얼굴로 거울을 마주한 그녀에게서 나는 실패한 내 삶과 내 사랑과 내 불순결함과 욕망과 허영에 힘들어하는 나를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그녀에게서 흔들리는 자신의 삶과 자신의 불순결함과 욕망과 가망 없는 허영에 힘들어하는 모든 인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 부인(婦人)으로 문장에 능한 자를 말하자면 옛날 중국의 조대가(曹大家)와 반희(班姬), 그리고 설도(薛濤) 등 이외에도 많이 있어 이루다 기재하지 못하겠다. 중국에서는 기이한 일이 아닌데, 우리 나라에서는 드물게 보는 일로 기이하다 하겠다. 문사(文士)김성립(金誠立)의 처(妻) 허씨(許氏 허난설헌)는 바로 재상 허엽(許曄)의 딸이며, 허봉(許?)ㆍ허균(許筠)의 여동생이다. 허봉과 허균도 시에 능하여 이름이 났지만 그 여동생인 허씨는 더욱 뛰어났다. 호는 경번당(景樊堂)이며 문집(文集)도 있으나, 세상에 유포되지 못하였지만, 백옥루(白玉樓) 상량문 같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전송(傳誦)하고 시 또한 절묘하였는데, 일찍 죽었으니 아깝도다. 문사 조원(趙瑗)의 첩(妾) 이씨(李氏)와 재상 정철(鄭澈)의 첩 유씨(柳氏) 또한 이름이 났다. 논하는 자들은 혹, “부인은 마땅히 주식(酒食)이나 의논할 것인데, 양잠하고 길쌈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오직 시를 읊는 것으로 일삼는 것은 미행(美行)이 아니다.” 하나, 나의 생각에는 그 기이함에 감복할 뿐이다.
출전 소개 : 견한잡록(遣閑雜錄) 심수경이 쓴 것이다. 그의 호는 청천당(聽天堂)이다. 종중 계묘년(서기 1543년)에 진사에 합격하고, 명종 병오년에 문과에 장원하여 호당(湖堂)에 뽑히고 직제학에 승진, 8도 감사를 거쳐 청백리에 등록되었고, 선조 경인년에 우의정이 되니, 나이 75세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가 84세에 죽었다. 이 책은 아마 75세 이후 벼슬을 내놓은 다음에 지은 것으로 여겨진다. 수록된 이야깃거리는 총 69편으로 담적기는 신이(神異)한 것을 많이 쓴 것에 반하여 사실에 치중한 점이 있다
(2)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2003. 6. 11. 태서(익) 제공)
경번당(景樊堂)에 대한 변증설
세상에서, 허초당(許草堂 이름은 엽(曄))의 딸 난설헌(蘭雪軒)을 저작랑(著作郞) 김성립(金誠立)의 부인이라 하는데, 약간 재주가 있고 시(詩)에 능하여 《난설헌집(蘭雪軒集)》1권이 세상에 전해지며, 그 서문(序文)은 명(明) 나라의 사신이었던 난우(蘭?) 주지번(朱之蕃)이 썼다. 이 때문에 그 시집(詩集)이 중국에 들어가 온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세속에서, "허씨(許氏)가 부군(夫君)의 사랑을 받지 못한 때문에 '인간에서는 어서 김성립과 사별하고, 지하에 가서 영원히 두목지를 따르리.[人間願別金誠立 地下長隨杜牧之]'라는 시를 짓고 이어 호(號)를 경번당이라 하였으니, 이는 번천(樊川 당(唐) 나라 두목(杜牧)의 호)을 사모한 것이다." 고 전해지고, 우산(虞山) 전겸익(錢謙益)의《열조시선(列朝詩選)》, 어양(漁洋) 왕사진(王士?)의《별재집(別裁集)》, 주죽타(朱竹?)의《명시종(明詩綜)》ㆍ《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서당(西堂) 우동(尤?)의《서당잡조(西堂雜俎)》등에도 다 허씨를 경번당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천하에서 다 허씨를 경번당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허씨에게 있어 씻을 수 없는 치욕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선현(先賢)들이 그렇지 않음을 많이 변론하였다. 폐상(廢相) 강산(薑山) 이서구(李書九)의《강산필치(薑山筆?)》에, "허씨는 그런 사실이 없는데, 사람들이 억지로 끌어대어 괜히 그런 누명을 받게 된 것이다." 해명하였고, 우리 조부의《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에,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 연경(燕京)에 갔을 때 전당(錢塘)의 추루(秋●) 반정균(潘庭筠)이 '귀국(貴國)의 경번당은……어찌 다행이 아니냐?' 묻자 담헌이 '지하에 가서 영원히 두목지를 따르리.'라는 시구를 인용 대답했다." 하였고, 이어 나의 조부 형암공(炯庵公)이, "듣건대, 경번당은 허씨의 자호(自號)가 아니라 천박하고 경솔한 사람들이 침해하고 조롱하는 말이라 하는데, 담헌 같은 이가 어찌 이를 해명하지 않았던가. 만약 난공(蘭公 반정균의 자)이 시화(詩話)를 편찬할 때 담헌의 이 대답을 기재하게 된다면 허씨에게 어찌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내가 그 본집(本集)을 살펴보면 그 곡자시(哭子詩)에 '거년엔 귀여운 딸애를 잃고 금년엔 귀여운 아들을 잃었다.[去年喪愛女 今年喪愛子]' 하였으니, 부군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말은 허위이다. 내가 평소에, "젊은 부녀가 아무리 부군과의 사이가 좋지 않다손 치더라도 어찌 다른 세대의 남자를 사모하여 경번당이라 자호까지 할 수 있겠느냐." 생각하며 세속에 전하는 풍설을 늘 불만스럽게 여겨 오다가 신돈복(辛敦復)의《학산한언(鶴山閑言)》에, "난설헌이 경번당이라 자호한 데 대해 세상에서, 두번천(杜樊川)을 사모한 때문이라 하는데, 이 어찌 규중(閨中)의 부녀로서 사모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당 나라 때에 선녀(仙女) 번고(樊姑)가 있었는데 호(號)는 운교부인(雲翹夫人)으로 한(漢) 나라 때 상우령(上虞令)이었던 선군(先君) 유강(劉綱)의 아내였다. 그는 선격(仙格)이 매우 높아 여선(女仙)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이름도《열선전(列仙傳)》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난설헌이 바로 그를 흠모하여 경번당이라 칭한 것이다." 는 대문을 보고서야 무릎을 치며 통쾌하게 여겼다. 이 어찌 억울한 누명을 깨끗이 씻어 줄 수 있는 단안(斷案)이 아니겠는가. 또 본집(本集)도 허씨의 친저(親著)가 아니므로 다음과 같이 그 사실을 열거한다. 지봉(芝峯) 이수광(李?光)의《유설(類說)》에, "허난설헌의 시는 근대 규수(閨秀)들 가운데 제일위이다. 그러나 참의(參議) 홍경신(洪慶臣)은 정랑(正郞) 허적(許●)과 한집안 사람처럼 지내는 사이였는데 평소에 '난설헌의 시는 2~3편을 제외하고는 다 위작(僞作)이고,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도 그 아우 균(筠)이 사인(詞人) 이재영(李再榮)과 합작한 것이다.' 했다." 하였고, 신씨(申氏)의 《상촌집(象村集)》에도, "《난설헌집》에 고인(古人)의 글이 절반 이상이나 전편(全篇)으로 수록되었는데, 이는 그의 아우 균이 세상에서 미처 보지 못한 시들을 표절 투입시켜 그 이름을 퍼뜨렸다." 하였고, 전우산(錢虞山)의 소실(小室)인 하동군(河東君) 유여시(柳如是)도《난설헌집》에서 위작(僞作)들을 색출하여 여지없이 드러냈으니, 난설헌의 본작(本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성립의 후손인 정언(正言) 김수신(金秀臣)의 집이 광주(廣州)에 있는데, 어느 사람이, "간행된《난설헌집》이외에도 혹 책상자 속에 간직된 비본(?本)이 있느냐?" 고 묻자, "난설헌이 손수 기록해 놓은 수십 엽(葉)이 있는데, 그 시는 간행본과 아주 다르다." 대답하고 이어, "지금 세상에 전해지는 간행본은 본시 난설헌의 본작(本作) 전부가 아니라 허균의 위본(僞本)이다." 하였다. 그 후손의 말이 이러한 것을 보면 아마 그 집안 대대로 내려 오는 실전(實傳)일 것이다. 지봉의 실기(實記)와 상촌의 정론(定論)과 후손의 실전이 낱낱이 부합되므로 쌓였던 의혹이 한꺼번에 풀린다. 내가 평소에《동관습유(?管拾遺)》를 편찬하면서 우리나라 규방(閨房)의 시들을 모아 이 책을 만들었는데, 경번당의 사실이 매우 자상하게 수록되었으니 함께 참고하는 것이 좋다.
출전;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2
(3)허난설헌 가문과 안동김문과의 관계--밀접한 겹사돈 관계 (2003. 1. 7. 윤만(문) 제공)
*교산 허균과 안동김씨
1) 11세(1579, 선조 12년) : 누이인 허난설헌이 김성립과 결혼하였다. 2) 17세(1585, 선조 18년) : 의금부 도사를 지낸 김대섭(金大涉)의 차녀와 결혼하였다. 3) 18세(1589, 선조 19년) : 허균은 이해 봄 처남인 김확과 함께 백운산에 있던 둘째형에게 글을 배우러 찾아 갔다. 그곳에서 한퇴지와 소동파의 고문을 배웠다. 금각을 만나 함께 배웠으며 그 해 여름 봉은사에서 둘째형의 벗인 사명당을 만났다. 4) 24세(1592, 선조 25년) : 허균은 4월 14일 소서행장의 군대가 부산에 상륙하면서 시작된 임진왜란으로 홀어머니 김씨와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피난길을 떠났다. 덕원에서 함경도 곡구를 거쳐 7월 7일 단천에 이르렀으며 만삭 부인은 첫 아들을 낳고 임명역으로 거쳐를 옮겼다. 몸조리를 못한 부인은 7월 10일 저녁 박논억의 집에서 산후병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 허균은 짐을 싣고 다니던 소를 팔아서 아내의 장례를 임시로 치르고 북쪽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첫 아들도 젖을 먹일 수 없어 죽었다. 그의 아내는 15세에 시집와서 8년간 허균과 함께 살다가 22세의 짧은 나이로 전란에 생애를 마쳤다. 이 때 허균은 심한 충격을 받고 영동역. 수성역. 함경도를 피난하며 지내다가 그 해 가을 9일동안 배를 타고 강릉에 도착하였다. 5) 27세(1595, 선조 28년) : 허균은 낙산사에서 내려와 부인 김씨의 묘를 단천에서 강릉 외가인 애일당 쪽으로 이장을 하였다. 6) 32세(1600, 선조 33년) : 3월에 부인 김씨의 묘를 어머님을 따라 원주 서면 갈대 숲에다 마지막으로 관을 묻었다. 이 언덕은 선영의 왼쪽에 있었는데 동북쪽을 등지고 서남쪽을 바라보는 곳이다.
(주) <허난설헌과 강릉 P40/강릉시/장정룡/1998>에 난설헌의 친정 어머니 김씨 부인은 허균과 함께 여행을 다니다가 1601년 8월 14일 전주에서 사망했다. 김씨 부인은 설익은 감을 먹은 것이 체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후에 균은 형조참의에 올라 "원주 법천사 북쪽 10리쯤에 양천 허씨 선영에 어머니를 모셨고 해마다 한차례씩 성묘를 했다'(성소부부고 권6, 遊原州法泉寺記)고 하였다.
7) 41세(1609, 광해군 1년) : 허균의 죽은 아내에게도 숙부인의 직첩이 내려졌다. 8) 50세(1618, 광해군 10년) : 8월 17일 허균도 기준격과 함께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잡히기 전날, 자기의 문집인 "성소부부고" 초고와 문집에 실리지 않은 원고를 딸집으로 보냈다. --허균은 죄목을 알리는 결안도 없이 8월 24일 그의 심복들과 함께 서시에서 책형 당하였다. 마지막 으로 허균은 "할 말이 있다"며 외쳤다고 "조선왕조실록"에는 기록하였다.
<-허균은 15세인 김씨부인과 결혼하여 혈육으로 딸이 한 명 있다. 딸은 진사 이사성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들이 허균의 유일한 후손이다. 이사성의 외아들인 이필진은 외조부의 유고를 간직하였다. 허균이 무오년(1618년)에 마지막으로 감옥에 갔을 때 풀려 나오지 못할 것으로 미리 알아 자기가 엮은 [성소부부고] 를 외손인 이필진의 집으로 보냈다. 이필진은 현종 11년(1670년)에 자기의 발문을 붙여서 간행했고 정조의 관심으로 규장각에서도 필사하여 보관한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한다.
【출전 : 평전 허균과 허난설헌/장정룡/허균. 허난설헌 선양사업회/1999】
(4) <조선일보 홈페이지> 기록 내용 (2002. 4. 10. 주회(안) 제공)
[다시 읽는 여인열전] (5) 개혁적 문필가 허난설헌 (2002.04.09)
허난설헌(1563∼1589)에게는 세 가지 한이 있었다. 첫째, 이 넓은 세상에서 왜 하필이면 조선에 태어났을까? 둘째, 왜 하필 여자로 태어나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서러움을 지니게 되었을까? 셋째, 수많은 남자 중에서 왜 김성립(金誠立)의 아내가 되었을까? 이 세 가지 한은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을까”란 말로 압축할 수 있다. 동인(東人) 영수 허엽(許曄:1517∼1580)의 셋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8세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삼종지도의 나라’ 조선에서 여성의 재능은 불필요한 혹일 따름이었다. 그녀는 오빠 허봉(許封)의 주선으로 삼당시인(三唐詩人) 이달(李達)에게 글을 배웠다. 여성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던 당시에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한 유년시절은 결혼과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조혼 풍습에 따른 14세의 결혼은 불행한 미래에의 초대장이었다.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집을 떠나 과거공부에 전념했는데, 그런 시절의 일화가 전한다. 함께 과거공부를 하던 친구가 “성립이 기생집에서 놀고 있다”는 말을 지어내자, 여종이 이를 난설헌에게 말했다. 그녀는 도리어 술과 안주를 마련해 “낭군께선 이렇게 다른 마음 없으신데/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간질을 시키는가”라는 시와 함께 보냈다. ‘상촌집’(象村集) 작자 신흠은 이를 보고 “허씨는 시에도 능하고, 기질도 호방함을 알게 되었다”고 평했다. 그러나 조선여성에게 호방한 기질은 불행의 씨앗일 뿐이었다. 그녀는 시를 통해 부부관계를 한 차원 높게 승화시키려 했으나 이 또한 비난의 대상이 됐다. ‘강남에서 독서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寄其夫江含讀書)란 시에서 “규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풀이 푸르러도 강남 가신 님은 오시질 않네”라고 노래하고, 시 ‘연꽃을 따며’(采蓮曲)에선 “물 건너 님을 만나 연꽃 따 던지고/행여 누가 봤을까 한나절 얼굴 붉혔네”라고 남편에 대한 수줍은 애정을 노래했다. 하지만 훗날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이 두 작품은 그 뜻이 음탕한 데 가까우므로 시집에 싣지 않았다”고 평했다. 사부곡(思夫曲)까지 음탕으로 몰아부치는 조선에서 여성의 모든 적극성은 비난받았다. 게다가 과거에 거듭 낙방한 김성립은 기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허난설헌은 이런 왜곡된 현실과 맞서기 위해 시를 무기로 선택했다. 난설헌은 “누가 술 취해 말 위에 탔는가/흰 모자 거꾸로 쓰고 비껴 탄 그 꼴”이라는 ‘색주가의 방탕한 사람에 대한 노래’(大堤曲)’로 남편을 풍자했다. 그녀는 여성이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부차적 존재가 된 것이 문제의 근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생의 운명이란 엷고 두터움 있는데/남을 즐겁게 하려니 이 내 몸이 적막하네”라고 읊은 시 ‘한정(恨情)’은 그런 인식의 표현이다. 그녀가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시어머니에게 미움 받은 그녀가 의지할 곳은 두 아이뿐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에게 비극이 잇달았다.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더니/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슬프고 슬프구나 광릉(廣陵:아이들 묻힌 곳) 땅이여/두 무덤 마주보고 서 있구나”(자식을 애곡함·哭子)라는 시는 불행이 거듭되는 운명에 대한 통곡이었다.
그녀는 시로써 조선의 사대부를 조롱하고 모순된 사회에 저항했다. 또한 여성에 대한 억압과 빈자에 대한 불평등을 동일시하는 강한 개혁지향성을 드러냈다.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고루(高樓)에선 노래 소리 울렸지만/가난한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려/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느낌을 노래함·感遇)란 시는 가난한 백성들의 질곡에 대한 분노였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는데/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손으로 싹둑싹둑 가위질하면/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남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건만/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 시 ‘가난한 여인을 읊음’(貧女吟)’은 노동자가 노동의 결과물에서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나오기 300여년 전에 시인의 직관으로 간파한 완벽한 소외론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를 통한 현실 변혁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녀의 분노는 시로 쓰여지는 것 이상의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현실을 넘어 피안의 세계로 다가간다. 도교의 세계였다. 장시 ‘신선이 노니는 노래’(遊仙詞)나 ‘꿈에서 광상산에서 시를 지으며 노닌 이야기’ 등이 그런 글들이다. 그녀가 남긴 시들이 허균에 의해 ‘난설헌집’(蘭雪軒集)으로 간행되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 의해 중국에서 출간되면서 “이 넓은 세상에서 왜 하필이면 조선에 태어났을까”란 첫 번째 한은 풀렸다. 훗날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규중 부인으로서 시를 읊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외국(조선)의 한 여자로서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가히 영예스럽다고 이르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사대(事大)의 나라 조선의 남성들은 명나라를 통해 역수입된 그녀의 명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1711년에는 분다이야(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시집이 간행됐다. 그녀가 남긴 시들은 여성 차별의 왕국, 조선의 영역을 넘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모순으로 가득찬 사회에 대한 그녀의 승리이기도 했다.
[다시 읽는 여인열전] 허난설헌-허균 남매 (2002.04.09)
허난설헌이 조선 여인으로서 호를 남긴, 이례적 인물이 된 데에는 동생 허균의 노력이 절대적이었다. 난설헌이 요절하자 허균은 친정에 흩어져있던 누이의 시와 자신이 외우고 있던 시를 모아 ‘난설헌집’를 펴냈다.
이 때 여러 사람의 발문을 받았는데, 유성룡은 “이상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라는 감탄을 남겼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게도 발문을 받았는데 그녀의 시에 감탄한 주지번은 “‘유선사’ 등 여러 작품은 중국 시의 전성기였던 당나라 시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라는 극찬과 함께 이를 중국에서 출간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조선인 역관 허순과 중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한 소녀는 이 시집을 보고 ‘난설헌을 사모한다’는 뜻의 경란(景蘭)으로 이름을 바꾸고 “내가 바로 난설헌이 다시 태어난 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심취했다.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고 나중에는 천주교 기도문을 가져올 정도로 정형화된 사고를 거부했던 허균이기에 ‘난설헌집’을 남기고 ‘홍길동전’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특출한 성격때문에 광해군 10년(1618)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말았다. 박제된 삶을 거부한 남매의 비극이자, 조선의 비극이었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부인의 성(姓)은 김씨(金氏)니 서울의 대성이다. 고려조 정승 방경(方慶)의 현손(玄孫)인 척약재(惕若齋) 구용(九容)은 고려 말에 이름을 떨쳤고, 벼슬이 삼사(三司)의 좌사(左使)에 이르렀다. 그 사대손(四代孫)인 윤종(胤宗)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절도사였고, 그 아들 진기(震紀)가 경자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별제(別提)로 첫 벼슬에 나아갔다. 그리고 그가 휘(諱) 대섭(大涉)을 낳으니 또한 계유년 사마시에 합격, 도사(都事)로 첫 벼슬에 나아갔다. 그리고 관찰사(觀察使) 심공(沈公) 전(銓)의 딸에게 장가드니 부인(夫人)은 바로 그 둘째딸이다. --융경(隆慶) 신미년(선조 4, 1571)에 낳아, 나이 열다섯에 우리집에 시집왔다. 성미가 조심스럽고, 성실하고도 소박하여 꾸밈이 없었으며 길쌈하기에 부지런하여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고, 말은 입에서 내지 못하는 듯이 하였다. 모부인(母夫人)을 섬기기를 매우 공손하게 하여, 아침 저녁으로 반드시 몸소 문안드리고, 음식을 드릴 때 꼭 맛을 보고 드렸다. 철을 따라 제 철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했다. --종들을 다루기를 엄격히 했지만 잘못을 용서해 주었고 욕지거리로 꾸짖지 않으니 모부인께서 칭찬하시되,
"우리 어진 며느리로다." 하셨다.
--내 한창 젊은 나이에, 부인에게 압류(狎遊)하기를 좋아하였지만 싫은 기색을 얼굴에 나타낸 적은 거의 없었으며, 어쩌다 조금이라도 방자하게 굴면 문득 말하기를,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엄중해야지요. 옛사람은 술집ㆍ다방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던데, 하물며 이보다 더한 짓이겠어요?"
하였으므로, 내 듣고 마음으로 부끄러워, 더러 조금이나마 다잡힘이 있었다. 그리고 항상 내게 부지런히 글 공부하기를 권하여,
"장부가 세상에 나서 과거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고, 제 몸에 이롭게 하는 이도 또한 많습니다. 당신은 집이 가난하고, 시어머님은 늙어 계시니, 재주만 믿고 허송세월하지 마십시오. 세월은 빠르니 뉘우친들 어찌 뒤따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진년(선조 25, 1592) 왜적을 피하던 때에는 마침 태중(胎中)이어서 지친 몸으로 단천(端川)까지 가서 7월 7일에 아들을 낳았다. 이틀 후에 왜적이 갑자기 닥치자, 순변사(巡邊使) 이영(李瑛)이 물러나 마천령(磨天嶺)을 지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그대를 이끌고서 밤을 새워 고개를 넘어 임명역(臨溟驛)에 이르렀는데, 그대는 기운이 지쳐 말도 못하였다. 그때 동성(同姓)인 허행(許珩)이 우리를 맞아 같이 해도(海島)에 피란하였으나 머물 수가 없었다. 억지로 산성원(山城院) 백성 박논억(朴論億)의 집에 이르러 10일 저녁 숨을 거두매, 소 팔아 관을 사고, 옷을 찢어 염(斂)을 하였으나, 오히려 체온이 따뜻하므로 차마 묻지를 못하였는데, 갑자기 왜적이 성진창(城津倉)을 친다는 소문이 들리므로, 도사공(都事公)이 급히 명하여 뒷산에 임시로 묻으니 그때 나이 스물둘로 같이 살기는 여덟 해였다. --아! 슬프다. 그 아들은 젖이 없어 일찍 죽고, 첫딸은 자라 진사 이사성(李士星)에게 시집가서 아들ㆍ딸 하나씩을 낳았다. --기유년(광해 1, 1609)에 내가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직하여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임명되니 예에 따라 숙부인(淑夫人)으로 추봉케 된 것이다. 아! 그대 같은 맑은 덕행으로, 중수(中壽)도 못한데다가, 뒤를 이을 아들도 없으니, 천도(天道) 또한 믿기 어렵다. 바야흐로 우리 가난할 때, 당신과 마주 앉아 짧은 등잔심지를 돋우며 반짝거리는 불빛에 밤을 지새워 책을 펴 놓고 읽다가 조금 싫증을 내면 당신은 반드시 농담하기를,
"게으름 부리지 마십시오, 나의 부인첩(夫人帖)이 늦어집니다."
하였는데, 18년 뒤에 다만 한 장의 빈 교지를 궤연[靈座]에 바치게 되고 그 영화를 누릴 이는 나와 귀밑머리 마주 푼 짝이 아닐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당신이 만약 앎이 있다면 또한 반드시 슬퍼하리라. 아, 슬프다. 을미년(선조 28, 1595) 가을에 길주에서 돌아와, 또한 강릉 외사(外舍)에 묻었다가, 경자년(선조 33, 1600) 3월에 선부인을 따라 원주 서면 노수(蘆藪)에 영장(永葬)하니, 그 묘는 선산 왼쪽에 있으며 인좌(寅坐) 신향(申向)이다. 삼가 행적을 쓰노라.
《출전 : 성소부부고 제15권 문부 12 - 행장 行狀》
▣ 망처(亡妻)의 제문 ▣
오직 부인은 본성이 공경스럽고 정성스러웠고/惟靈性惟恭恪
그 덕은 그윽하고 고요하였네/德則幽閑 일찍이 시어머니 섬길 때/早事先姑 시어머니 마음은 몹시도 기뻤다네/姑志甚驩 죽어서도 시어머니 따라/死而從姑 이 산에 와 묻히는구려/來窆玆山 휑덩그레한 들판 안개는 퍼졌는데/荒野煙蔓 달빛 쓸쓸하고 서리도 차구려/月苦霜寒 의지 없는 외론 혼은/孑孑孤魂 홑 그림자 얼마나 슬프리까/悲影之單 십팔 년을 지나서/踰十八年 남편 귀히 되어 높은 벼슬에 오르니/夫貴陞班 은총으로 추봉하라는/恩賁追封 조서가 내려졌네/紫誥回鸞 미천할 때 가난을 함께 하면서/賤時共貧 나의 벼슬 높기를 빌더니만/祈我高官 벼슬하자 그댄 벌써 죽어 없으니/及官已歿 추봉(追封)의 은총만 부질없이 내려졌네/寵命徒頒 어찌하면 영화를 같이 누릴꼬/焉得同榮 내 마음 하염없어라/我懷漫漫 아마도 그대 넋 알음 있다면/想魂有志 그대 또한 눈물을 줄줄 흘리리/其亦汍瀾 녹으로 내린 술 한잔 들구려/一酌官醪 서러움에 눈물만 줄줄 흐르누나/悲來涕潸
[내용] --필사본. 8권 1책. 규장각 도서. 1611년(광해군 3)에 저술하였다. 부록인 〈한정록(閑情錄)〉은 은둔(隱遁)·고일(高逸)·한적(閑適) 등 16부문으로 나누고, 그 밖에 시(詩)·부(賦)·잡문(雜文)과 병화사상(甁花史觴)·서화금탕(書畵金湯) 등은 권말에 덧붙였다. 저자가 모반의 혐의로 처형되어 간행을 보지 못한 채 초본(抄本)으로 몇 종류가 전해 오다가 1961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大東文化硏究院)에서 영인(影印)해 소개하고, 그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번역 출간하였다. 【출전 : 야후 백과사전】
--허균은 15세인 김씨부인과 결혼하여 혈육으로 딸이 한명 있다. 딸은 진사 이사성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들이 허균의 유일한 후손이다. 이사성의 외아들인 이필진은 외조부의 유고를 간직하였다. --허균이 무오년(1618년)에 마지막으로 감옥에 갔을 때 풀려 나오지 못할 것으로 미리 알아 자기가 엮은 [성소부부고]를 외손인 이필진의 집으로 보냈다. 이필진은 현종 11년(1670년)에 자기의 발문을 붙여서 간행했고 정조의 관심으로 규장각에서도 필사하여 보관한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한다. 【출전 : 평전 허균과 허난설헌/장정룡/허균. 허난설헌 선양사업회/1999】
(6) <허난설헌집>의 뒤에 제하여(題蘭雪齋後) (2004. 4. 8. 발용(군) 제공)
許家有女最淸秀,
蘭雪詩如語鬼神.
繡句縱驚文士耳,
不如蠶織奉南蘋.
허씨 집안에 여인이 있으니 가장 맑고 빼어나,
난설헌의 시는 마치 귀신을 말하는 듯.
비단 같은 구절 비록 문사들의 귀를 놀래 키지만,
옷을 지어 남편을 봉양함이 더 나으리.
<출전 : 시서유고(市西遺稿)>
김선(金璇)
1568(선조 1)∼1642(인조 20).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광산. 자는 이헌(而獻), 호는 시서거사(市西居士) 또는 지서자(之西子). 전라남도 나주출신. 아버지는 상호군(上護軍) 부성(富成)이다.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계에 진출하였으나,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한탄하여 나주로 내려가 두문불출하였다.
1615년(광해군 7) 강진사람 이정언(李廷彦)·윤유겸(尹惟謙) 등이 그가 영창대군을 옹호하였다 하여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나오게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참봉·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양명학에 조예가 깊은 장유(張維)·임담 등과 친밀히 교유하였다. 저서에 《초당한람 草堂閑覽》이 있다.
(7)<국정 브리핑>속의 자료 (2006. 1. 22. 발용(군) 제공)
* 재평가 아쉬운 허난설헌 작품 세계
출전 : 국정브리핑 2005-11-29 21:25
허난설헌 시비(詩碑)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시인으로 칭송받고 있는 난설헌 허 초희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허난설헌의 문학과 삶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그녀가 잠들어 있는 곳을 찾아가보고 싶었다.
관련 서적과 인터넷을 뒤져도 주소 이외에는 찾아가는데 도움이 될만 한 정보가 없었다. 해당 자치단체인 광주시 문화체육과에 전화를 걸었다. 허난설헌 묘를 찾아가야 하는데 위치 설명을 부탁드린다고 했더니, 허난설헌이라는 호칭에 낯설어 한다.
몇 사람의 손을 거쳐 담당자라는 사람이 설명해주는데 관내 거주민이나 알아들을 수 있는 지역 명칭을 섞어가며 안내해 준다.
길 모르는 나그네가 쉽게 찾아갈 수 있었으면
장황한 길 안내 끝에 홈페이지에 나와 있으니 찾아보란다. 길을 묻는 나그네에겐 나그네의 입장에서 나그네가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가르쳐 주어야 하는데 자상한 행정 서비스가 아쉬웠다.
도로표지판. 허난설헌 묘 가는 길도 표시했으면 좋겠습니다.
홈페이지를 뒤졌다. 세계 도자기 엑스포나 분원 붕어찜 축제 그리고 퇴촌 토마토 축제, 유서 깊은 노거수 등은 명승지로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반해 허난설헌에 관한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끝내 찾지 못하고 다시 전화를 걸어 물었더니 포토뱅크에 있단다. 찾아들어갔더니 2002년도에 찍어서 올린 허난설헌 시비(詩碑) 사진 한 장이 달랑 있다. 아무런 설명도 없다. 이것이 오늘 현재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을 보는 이 시대의 시각이다.
호주제가 폐지되고 동성동본 금혼이 옛 이야기가 되어버린 남녀평등 시대에 여류시인 허난설헌을 바라보는 태도가 이러한 데 지금으로부터 440년 전. 숨소리마저 제대로 내지 못하고 숨죽여 살아야했던 남성우위의 조선사회에서 여자로 태어난 허 초희가 시(詩)를 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기방(妓房)문학은 있지만 규방(閨房)문학은 없다는 남존여비의 조선사회에서 27세의 꽃다운 나이에 한 많은 생을 접은 허난설헌이 잠들어 있는 곳을 찾아 무작정 길을 나섰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라는 지명이 있으니까 찾을 수 있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중부고속도로에 올라갔다.
20여분 달린 후 경안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좌회전 무조건 광주시내로 들어갔다. 시내에서 몇 사람을 붙잡고 허난설헌을 물으니 모른단다. 허난설헌이라는 물음 자체가 생경스럽다는 반응이다.
그렇다면 지월리는 어디냐고 물으니까 이쪽으로 저쪽으로 해서 다리를 건너가면 지월리란다. 지월리에 진입하여 제일 큰 부동산에 차를 세웠다.
영양가 없는 질문은 귀찮다는 부동산 업자
“지월리에 허난설헌 묘가 있다는데 어디쯤 될까요?”라고 물었더니 자기들도 서울 사람이어서 잘 모른단다.
하, 그렇구나. 경기도 광주에도 투기바람이 불어 떳다방들이 몰려와 있구나. 그제서야 자세히 살펴보니 무슨 무슨 컨설팅, 무슨 무슨 부동산이라고 씌여진 간판들이 즐비하다. 길을 모를 때 복덕방에 가서 물으면 된다는 순진한 생각이 통하지 않은 투기의 열풍지대였다.
“그런 것은 우리는 잘 모르니 개울건너 마을회관에 가서 물어 보슈.”
"몇 억원을 가지고 있는데 마땅한 땅이 있어요" 라는 달콤한 얘기는 환영하지만 허난설헌은 돈이 되지 않는 상담이고 귀찮은 질문이라는 뜻이다.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길을 물었다. 나이 지긋한 마을 주민 몇 분이 계셨지만 역시 모른단다. 지월리만 들어가면 쉽게 찾을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이 걱정으로 바뀐다.
"여기에서 이 길로 1.5km 정도 가면 신토불이 라는 오리구이 식당이 있는데 그 집 주인이 그런 것은 조금 아니까 거기 가서 한번 물어보세요.”
식당에 도착하여 주인을 찾았더니 시내에 볼일 보러 나가고 자리에 없단다. 막막하다. 주위를 살펴보니 사당도 갖추고 그런대로 괜찮게 가꾸어 놓은 묘역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 일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약간 경사진 구릉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10여분 올라가 확인해보니 아니다. 허탈감과 함께 등에서는 땀이 흐른다.
내려와 식당에 들렀더니 마침 주인이 와 있었다. 허난설헌 묘를 찾아 가는데 여기에서 잘 아실 거라고 소개받고 왔다 하니 그 역시 모른단다. 아득했다. 지월리만 들어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난감해 하는 모습이 안 돼보였는지 잠깐 기다리라며 어디엔가 전화를 건다. 통화를 마친 후 손가락을 가리키며 설명해준다.
강원도 강릉 초당동에 있는 허난설헌 생가
“여기에서 차를 돌려 2km 정도 되돌아 나가면 다리가 있어요. 그 다리를 건너서 삼육재활원을 지나면 고개가 있는데 그 고개가 파헤쳐져 있을 거예요. 그 땅이 바로 전 부총리 이 아무개씨를 자리에서 내려오게 한 바로 그 땅이거든요. 그 고개를 지나면 동네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좌회전하여 한참 가다보면 고속도로가 나와요. 그 고속도로 지하통로 앞에서 좌회전하면 거기에 있어요.”
너무 너무 친절하다. 자기가 모르는 곳인데도 다른 곳에 전화하여 이렇게 자세하게 일러주니 고맙기 그지없다. 얕은 수익만이 생활화된 현대사회에서 자신에겐 아무런 이익이 없으면서 자기 통화료 지불하며 위치 파악하여 이렇게 자세하게 가르쳐 준다는 것은 너무 고마운 일이다. 그 순수한 친절에 감사를 드린다.
차를 돌려 식당주인이 가르쳐준 길을 찾아가니 고속도로 지하통로가 나온다. 통과하지 말고 좌회전하라는 식당 주인의 말을 떠올리며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바로 옆 풀 섶에 높이 50cm정도의 허난설헌묘 입구라는 비석이 잡초와 쓰레기더미에 묻혀 있다. 주위를 살펴보니 가로 세로 50cm 정도의 입간판이 전봇대에 매달려 있다.
고속도로 둔덕 아래 서있는 허난설헌 묘 입구 표지석(왼쪽아래). 얼마 전엔 이보다 작은 세로로 된 작은 표지석이 있었답니다.
일곱 살 어린 소녀가 상상속의 하늘의 황재가 살고 있다는 백옥루를 연상하며 그 궁전을 건축하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 白玉樓 上樑文)을 지어 그녀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고, 우리나라 규방문학의 금자탑으로 일컬어지는 규원가(閨怨歌)를 지어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긴 허 초희의 오늘날의 위상이다.
주어진 시대의 모순에 순응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 나가며 남존여비를 당연시 하는 조선사회를 통렬히 비판하는 작품과 환상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비단결 같은 불후의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한ㆍ중ㆍ일 동양 3국에서 우뚝 선 여류 시인으로 추앙 받던 한국최초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의 오늘의 현주소다.
묘역에 들어서니 가파른 계단이 눈앞을 가로 막는다. 계단을 올라서니 허난설헌 시비가 우뚝 서 있다. 전면에는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가슴에 묻은 어미의 슬픔을 노래한 곡자(哭子)가 한글로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실재하지 않은 환상의 세계를 노래한 그녀의 시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 전문이 원문과 한글로 음각돼 있다.
허난설헌의 딸과 아들이 묻혀있는 애기무덤
사랑하는 딸을 지난해 보내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슬프고 슬픈 강릉의 땅이어/ 두 무덤 마주보고 나란히 서있구나/ 백양나무 가지에 소소히 바람 불고/ 도깨비 불빛은 숲속에서 반짝이는데/ 지전을 뿌려서 너희 혼을 부르며/ 너희들 무덤에 술잔을 붓노라/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영혼아/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 이제 또다시 아기를 낳는다 해도/ 어찌 능히 무사히 기를 수 있으랴/ 하염없이 황대의 노래 부르며/ 통곡과 피눈물을 울며 삼키리….
자식을 가슴에 묻은 지어미의 슬픔이 절절히 배어있다. 그녀의 시 곡자(哭子)다.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땅에 묻을 때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을까? 더구나 친정아버지 허 엽을 경상도 땅 상주에서 비명횡사로 여의고 딸을 가슴에 묻은 다음 해 아들 희윤이 마저 저 세상으로 보내게 되니 억장이 무너졌을 것이다.
홀로 남동쪽을 바라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녀의 묘 바로 옆에 애기 무덤 두 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그녀의 딸과 아들 희윤이의 무덤이다. 지하에서나마 자식을 가슴에 품고 있는 듯하다.
묘비에는 허난설헌에게 가장 큰 문학적 영향을 끼친 스승과도 같은 오빠이며 당대의 문장가인 허 봉이 조카 희윤이를 기리는 '피어 보지도 못하고 진 희윤아'로 시작하는 시가 새겨져 있다.
부용삼구타 라는 구절이 뚜렷하게 새겨진 시비
허난설헌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허 초희는 자연인으로 대접받아야
묘역을 나서면서 시비에 새겨진 그녀의 시를 다시 살펴봤다. 그녀의 시 몽유광상산(夢遊廣桑山)이다.
부용삼구타(芙蓉三九朶)라는 구절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나이 27살 되던 삼월 열아흐레 날. 깨끗이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은 그녀가 '금년이 삼구에 해당하니 서리 맞은 연꽃이 붉게 되었구나' 라며 눈을 감았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삼구는 이십칠, 바로 그녀의 나이 27세가 아닌가.
광상산은 바로 난설헌이 살고자 했던 이상세계였는지 모른다. 여기 잠들어 있는 그녀는 아직도 상상의 세계를 배회하며 환상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주어진 시대의 모순에 순응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 나가며 살아야 했기에 비난을 감수해야 했으며 평탄하지 못한 삶을 살아야했던 허 초희.
죽은 이후에도 남성 사회의 본류 조선 선비들로부터 폄하와 비판으로 얼룩진 그녀의 작품은 위작과 표절로 매도되었다. 416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녀의 작품과 인간 허난설헌은 완전한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묘역에선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재실 공사가 한창이지만 하루 빨리 허난설헌 그녀의 작품이 제대로 평가받고 자연인 허 초희가 대접받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 23세의 나이, 상을 당해 외삼촌 집에 머물러 있을 때, 꿈에서 환상의 산 광상산 무릉도원을 노닐며 아릿다운 두 연인과 대화를 나눈다. 그곳엔 아름다운 풀과 꽃, 새들이 춤추는데, 맑은 큰 못에 푸른 연꽃이 서리를 맞아 반쯤 시들어 있었다 한다. 두 여인은 난설헌에게 '이 일을 어찌 시로 기록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에 난설헌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시를 읊었다 한다고 산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난설헌 27세의 나이에 붉은 꽃송이가 떨어짐을 예감하였으니 '부용삼구타' 가 이것을 증험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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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유광상산시 (夢遊廣桑山詩:꿈속에 광상산에서 노닐며)
을유년 봄, 내가 상을 입어 외삼촌 댁에 머물고 있을 무렵,
하룻밤의 꿈에 바다 가운데 있는 산에 올랐다.
산은 온통 구슬과 옥으로 모든 봉우리가 첩첩으로 포개져 있었는데,
흰 구슬과 푸른 구슬이 반짝반짝 빛나 눈을 들어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무지개 같은 구름이 그 위에 서려, 오색이 곱고 선명하며
구슬같은 물이 흐르는 폭포 두 줄기가 벼랑 사이로 쏟아져 내리면서 부딪쳐
옥을 굴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두 여인이 나타났는데, 나이는 모두 스물 남짓하였다.
얼굴은 절세 미인으로 한 명은 붉은 노을 옷을 입었고,
다른 한 명은 푸른 무지개옷을 입었다.
손에는 금빛 호로병을 들고, 발은 나막신을 신고서 사쁜히 걸어와
나에게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였다. 졸졸 흐르는 물굽이를 따라 올라가니 기이한 풀과 이상한 꽃이 여기저기 피었는데,
모두 이름 부를 수 없었다. 난새, 학, 공작, 비취새들이 좌우에서 날면서 춤추는데,
온갖 향기가 나무에서 풍기고 있었다. 마침내 정상에 오르니 동남쪽의 큰 바다는 하늘과 맞닿아 전부 파란데,
붉은 해가 돋으니 파도에 해가 목욕하는 듯하였다.
봉우리위에는 큰 못이 있어 맑기가 그지 없고 연꽃은 푸르고,
잎은 커다랗지만 서리를 맞아 반쯤은 시들어 있었다. 두 여인이 말하길 '여기는 광상산입니다. 신선들이 사는 십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당신이 신선의 인연이 있기 때문에 감히 이곳에 이르렀으니,
어찌 시로써 이를 기록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내가 사양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곧 절구 한 수를 읊었다.
두 여인이 손뻑을 치면서 크게 웃으며 '글자마다 모두 신선의 말씀입니다' 라고 하였다. 조금 있으니 한 떨기 붉은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봉우리 위에 걸리고,
북치는 소리를 냈다. 취한 듯 꿈을 깨보니,
베개 맡에는 아직도 아지랑이 기운이 맴돌았다.
모르겠네. 이백의 천모산 놀이가 여기에 미칠 수 있는지. 다만 이것을 적어 보리라.
그 시는 이러하다.
푸른 바다는 구슬 바다에 젖고, 푸른 난새는 오색 난새에 기대네. 스물 일곱 송이 아름다운 연꽃, 달밤 찬서리에 붉게 떨어졌네.
碧海浸瑤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우리 누님이 기축년(1589) 봄에 돌아가셨으니, 그 때 나이가 27세였다.
그의 시에 '삼구홍타'(스물 일곱 꽃송이 떨어지다)란 말은 곧 이것을 증험함이다].
8) <풍수강의>에서 (2004. 12. 14. 윤만(문) 제공)
<고제희의 풍수강의 중 우리 집안관련 재미있는 글이 있어 퍼왔습니다>
(1)나의 어머니
허난설헌의 어린 자식
응~애, 응~ 애.
저와 누나의 이승 나이는 갓난 얘이지만, 저승의 나이로는 4백살이 넘는 어른이라고요. 저는 우리 엄마와 아빠의 ‘부부싸움’과 엄마의 죽음을 애도하려고 해요.
불쌍한 우리 엄마! 저의 엄마는 시인으로 유명한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이어요. 신동으로 소문이 났던 엄마는 이달 선생에게서 시를 배우고, 15살 때 시집을 오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벼슬이 없던 아버지[김성립]은 다재다능하고 똑똑한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고 허구헌 날 기방에만 출입하셨어요. 그러자 할머니는 며느리가 잘못 들어 와 집안을 망쳤다며 엄마를 마구 구박했어요. 엄마는 얼마나 슬펏겠어요.
우리 엄마는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외할아버지(허엽)의 외동 딸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고 해요. 하지만 굴종만이 강요되는 숨막히는 시집살이는 엄마에게 고통 그 자체였어요. 엄마는 슬픈 마음을 시로 달랬어요. 그런데 어린 누나가 먼저 죽고 또 나까지 병들어 죽자, 엄마의 슬픔은 극에 달했습니다. 엄마는 우리를 끔찍히 사랑했어요. 어린 우리의 무덤을 나란히 만들어 놓고는 애끓는 슬픔을 피눈물로 곡을 했을 정도여요.
지난해 귀여운 딸을 여이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을 잃었네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 땅이여/ 두 무덤 마주 보고 나란히 서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불고/ 도깨비불 숲 속에서 번쩍이는데 지전(紙錢)을 뿌려서 너의 혼을 부르고/ 너희들 무덤에 술 부어 제사를 지낸다 아! 너희 남매 가엾은 외로운 혼은/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 이제 또 다시 아기를 갖는다 해도/ 어찌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를 읊조리나/ 애끓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그런데 더 큰 슬픔이 몰려 왔어요, 외할아버지와 큰외삼촌이 연이어 객사한 거여요. 엄마는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고 격한 슬픔을 시로만 달래며 살았어요. 숨은 쉬고 있으나 마치 저 세상 사람 같았습니다.
조선 봉건사회가 짓누르는 구속과 억압 속에서 재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엄마여요. 또 아빠의 외도, 할머니와 집안 사람들의 학대와 질시가 한꺼번에 몰려 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뱃속에 있던 제 동생이 유산되고 또 막내 외삼촌[허균]까지 귀양을 가게되자, 엄마는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아빠는 정말 나빠요. 아무리 엄마가 똑똑한 척을 했어도 어떻게 엄마가 죽자마자, 남양 홍씨를 새로 얻어 장가를 갈 수 있어요? 그리고 돌아가신 뒤에는 엄마가 아닌 작은 엄마와 함께 묻힐 수 있어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에는 안동 김씨의 선영이 있어요. 맨 아래에는 엄마의 예쁜 무덤이 있고, 그 옆에 저와 누나의 무덤이 마치 쌍분처럼 다정해요. 죽어서도 저희들을 지켜주는 엄마의 모습 같아 눈물이 나요. 아빠는 바로 위쪽에 모셔져 있어요.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는 죽어서도 혼자여요. 형님, 누나들 많아 찾아와서 우리 엄마의 외로운 혼을 달래 주세요. 여기 아래로는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가 너무너무 시끄러워요. 밤새 한 잠도 못 잤어요. 아~함, 졸려. 그만 들어가 잘께요.
(2)똑똑한 아내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의 변
저는 김성립(金誠立)입니다.
명문 안동 김씨의 후손으로 28세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이 홍문관 저작(著作, 정 8품)을 지냈지요.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 31살의 아까운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나왔느냐고요? 저는 시인으로 유명한 허초희(許楚姬:허난설헌)의 남편으로, 제 자식이 엄마만 감싸고 아비와 할머니를 욕해 화가 나 나왔습니다.
15살에 시집 온 허초희는 정말 철부지였어요. 양천 허씨 집안에서 귀엽게만 자랐고, 또 어려서부터 신동이라 칭찬만 들어 버릇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부덕(婦德)을 모르는 여자였어요. 마치 지독한 공주 병이 걸린 사람 같았어요. 몇 번을 타이르고 얼렀으나 고집불통에 막무내였어요. 영 사는 재미가 있어야지요. 그러니 제가 어떻게 기방을 출입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랬더니 마누라가 저보고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원컨대 이승에서 김성립과 이별을 하고 죽어 길이 두보를 따르리라.”
와! 생각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아요. 물론 제가 밖으로 나도니까, 시어머니가 타일렀지요. 남편 말을 잘 따르고 살림도 잘하라고요. 그런데 도통 자기 비관만 하고 말을 듣지 않았어요. 똑똑한 마누라하고 사는 것보다 더 지겹고 신물나는 일은 없어요.
또 있어요. 처갓집에 우환이 끊이지 않으니까 마누라는 친정 생각만 하는 거여요. 마치 우울증에 걸린 환자 같았어요. 애교를 떨며 눈웃음까지 쳐주길 바라지는 않았어요. 이건 완전히 고집불통에 오만쟁이여요. 비록 시는 잘 지었는 줄은 몰라도 아내로서, 며느리로서는 빵점이어요, 빵점. 그런데 자식들이 이유없이 연달아 죽고 장인과 처남들이 죽자, 스스로 강물에 빠져 죽은 거여요.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저는 마누라가 미웠지마 그래도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마누라의 모습이 떠올라 후하게 장사를 지내 주웠어요.
저는 마누라를 생각해 홀아비로 늙을려고 했으나, 대가 끊어진다며 온 집안이 새 장가를 가라고 성화였어요. 그래서 남양 홍씨를 얻어 새 살림을 차렸지요. 왜, 있잖아요. 혼자 살겠다고 독신을 선언한 여자들이 어느 날 부모에게 효도한다는 핑게를 대며 결혼해 버리는 거요. 새 장가를 가자 정말 사는 재미가 났어요. 열심히 공부해 과거에도 급제했지요. 봐요. 남자는 다 여자 하기 나름 아니여요. 그런데 기막힌 일이 생겼어요. 이제야 좀 살맛이 난다 했더니 난리가 난 거여요. 관리로 있던 저는 나라를 구하고자 전쟁 터로 나갔고, 운이 나빠 그만….
남자로 태어나 똑똑한 마누라 데리고 살기는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이여요. 부부는 그저 조금 모자라는 사람끼리 서로 보완하며 도와주고 살아야 제 맛이지요. 그래야 행복해요. 그래도 저는 첫 부인을 미워하지 않아요. 그 사람 때문에 당대의 문인, 학자, 풍류객들이 이 외진 곳을 찾아와 술을 부어 주잖아요. 그 술 냄새가 너무나 좋아요. 본래 그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았으니 바로 위쪽에 있는 저에게 가져오세요. 저는 무지무지 좋아해요. 냄새만 맞고 있자니 정말 죽겠어요.
허난설헌을 찾아오시거든 계단으로 올라와 저에게도 술을 부어 주세요. 꼭 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9)난설헌집 발문 (2002. 10. 20. 태영(군) 제공)
<난설헌집> 발문(跋文)
내 친구 허봉(許 竹+封)은 세상에서 보기드문 재주를 가지고 있었는데,불행히 일찍 죽었다. 나는 그가 남긴 글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칭찬해 마지 않았다. 하루는 그의 아우 허균이 죽은 누이가 지은 <난설헌고>(蘭雪軒藁)를 가지고 와서 보여 주었다. 나는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구나, 이건 여자의 글이 아니다.어떻게 해서 허씨의 집안에만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단 말인가." 나는 시학(詩學)에 관하여는 잘 모른다. 다만 보는바에 따라서 평한다면 말을 세우고 뜻을 창조하는 솜씨가 허공의 꽃이나 물속에 비친 달과 같았다.환히 속까지 들여다 보이고 아롱아롱 해서 손에 쥐고 즐길수는 없었다.
그 울리는 소리는 형옥(珩玉)과 황옥(璜玉)이 서로 부딪치는 것 같았다.남달리 뛰어나기는 숭산(嵩山)과
(華山)이 서로 빼어 났다고 다투는 것 같았다. 가을 연꽃은 물위에 넘실거리고 봄 구름이 하늘에 아롱졌다. 경지가 높은 시는 한(漢)나라, 위(魏)나라의 여러 시인들 보다 뛰어나고 그 나머지도 성당(盛唐)의 시와 같다. 사물을 보고 정감을 불러 일으키며 세태를 염려하고 풍속을 근심하는 마음은 열사(烈士)의 기풍과도 같다. 조금도 세속에 물든 자국이 없으니,
- 신영복 - 1995년 12월05일【4회】 강원도 명주군 사천리에 있는 애일당(愛日堂) 옛터를 다녀 왔습니다. 이곳은 당대 최고의 논객으로서 그리고 소설「홍길동」의 작자로서 널리 알려진 교산(蛟山) 허균이 태어난 곳입니다. 지금은 작은 시비 하나가 그 사람과 그 장소를 증거하고 있을 뿐이지만 시비에 새겨진 누실명(陋室銘)의 한 구절처럼 정작 허균자신은 그곳을 더없이 흡족한 처소로 여기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나 환로(宦路)에서 기방(妓房)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두량 넓은 학문의 세계로부터 모반의 동굴에 이르기까지 그가 넘나들지 않은 경계는 없었습니다. 당대사회의 모순을 꿰뚫고 지나간 한줄기 미련없는 바람이었습니다. 비극적인 그의 최후에도 불구하고 양지바른 언덕과 시원하게 트인 바다 그 어디에도 회한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애일당 옛터에서 마음에 고이는 것은 도리어 그의 누님인 허허난설헌의 정한(情恨)이었습니다. 조선에서 태어난 것을 한하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던 그녀의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나 허허난설헌의 무덤을 찾을 결심을 한 것은 오죽헌을 돌아 나오면서였습니다. 오죽헌은 당신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율곡과 그 어머니인 사임당 신씨를 모신 곳입니다. 사임당은 마침 은은한 국화향기속에 앉아 돌층계위 드높은 문성사(文成祠)에 그 아들인 율곡을 거두어 두고 있었습니다. 율곡선생은 이조 최대의 정치가이자 학자로서 겨레의 사표임에 틀림이 없고 그를 길러낸 사임당역시 현모의 귀감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봉건적 미덕의 정점을 확인케 하는 성역이었습니다. 극화(極化)된 엘리뜨주의는 곧 반인간주의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곳은 분명 어떤 정점이었습니다.
나는 교산을 찾아보고 오리라던 강릉행을 서둘러 거두어 서울로 돌아온 다음 오늘새벽 일찍이 난설헌 허초희(許楚姬)의 무덤을 찾아 나섰습니다.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자욱한 새벽 안개속을 물어 물어 찾아왔습니다. 오죽헌과는 달리 허난설헌의 무덤은 우리의 상투적이고 즉각적인 판단이나 신빙성이 있어보이는 판단에서 한발 물러나 그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당신이 힘들게 얻어낸 결론이‘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억압의 철폐는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을 드러내는 일과 직접 맞물려 있다’는 것이라면, 그리고 한 시대의 정점에 오르는 성취가 아니라, 그 시대의 아픔에 얼마만큼 다가서고 있는가 하는 것이 그의 생애를 읽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면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도 와야 합니다.
사랑했던 오라버니의 유배와 죽음, 그리고 존경했던 스승 이달(李達)의 좌절, 동시대의 불행한 여성에 대하여 키워온 그녀의 연민과 애정, 남편의 방탕과 학대 그리고 연이은 어린 남매의 죽음. 스물일곱의 짧은 삶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육중한 것이었습니다. 사임당의 고아한 화조도(花鳥圖)에서는 단 한점도 발견할 수 없었던 봉건적 질곡의 흔적이 난설헌의 차거운 시비(詩碑)에는 곳곳에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개인의 진실이 그대로 역사의 진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연마저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음으로써 대리현실을 창조하는 문화속에서 우리가 역사를 제대로 만날 수 있기는 갈수록 더욱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가 해체되고, 자신은 물론 자식과 남편마저 <상품>이라는 교환가치형태로 갖도록 강요되는 것이 오늘의 실상이고 보면 아픔과 비극의 화신인 난설헌이 설 자리를 마련하기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시대를 고뇌했던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가 청산되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당신의 말이 옳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항상 역사서의 둘째권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죽헌을 들러 지월리에 이르는 동안 적어도 내게는 우리가 역사의 다음 장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문득 의심스러워집니다.
시대의 모순을 비켜간 사람들이 화려하게 각광받고 있는 우리의 현재에 대한 당신의 실망을 기억합니다. 사임당과 율곡에 열중하는 오늘의 모정에 대한 당신의 절망을 기억합니다. 단단한 모든 것이 휘발되어 사라지고 디즈니랜드에 살고 있는 디오니소스처럼 <즐거움을 주는 것>만이 신격의 숭배를 받는 완강한 장벽 앞에서 작은 비극 하나에도 힘겨워하는 당신의 좌절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지월리로 오시기 바랍니다.
어린 남매의 무덤앞에 냉수 떠놓고 소지올려 넋을 부르며“밤마다 사이좋게 손잡고 놀아라”고 당부하던 허초희의 음성이 시비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감수성과 시대가 선포되고 과거와 함께 현재의 모순까지 묻혀져가는 오늘의 현실에 맞서서 진정한 인간적 고뇌를 형상화하는 작업보다 우리를 힘있게 지탱해주는 가치는 없다고 믿습니다.
중부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이 쉴새없이 귓전을 할퀴고 지나가는 가파른 언덕에 지금은 그녀가 그토록 가슴아파했던 두 아이의 무덤을 옆에서 지키고 있습니다. 정승 아들을 옆에 거두지도 못하고, 남편과 함께 묻히지도 못한 채 자욱한 아침 안개속에 앉아 있습니다.
열락(悅樂)은 그 기쁨을 타버린 재로 남기고 비극은 그 아픔을 정직한 진실로 이끌어준다던 당신의 약속을 당신은 이곳 지월리에서 지켜야 합니다.
11)허난설헌 관련 자료 종합 (2002. 3. 18. 주회(안) 제공)
서운관정공파 유연재 김희수 - 동고 김로 - 남봉 김홍도 - 1김첨 (2김수) - 김성립 - 김진 으로 이어지는 家系는 6대 연속 문과급제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6대 모두 詩書畵로 일가를 이루었고, 또한 김성립의 처 허난설헌은 시와 그림으로 이름을 날리어 신사임당과 더불어 조선시대 여류시인을 대표하는 분입니다.
양천허씨와 우리 안동김씨와의 인연을 살펴보면 허균은 (문온공파) 김대섭의 둘째 사위입니다. 즉 김대섭의 둘째 딸이 허균의 첫째 부인 김씨입니다. 임진왜란시 피난길에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 분으로, 이들 사이에 낳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 딸이 홍길동전을 잘 보관하여 전해왔다고 합니다.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은 (서운관정공파) 김성립에게 출가하였고,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과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은 같은 당파(남인)로서 교유가 많은 사이였다고 합니다.
김성립의 처 허난설헌(許蘭雪軒) 은 1563(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릉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봉20)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입니다. 허난설헌은 15세경에 안동김씨 김성립에게 출가하여 27세에 요절하기까지 아들 딸을 잃고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등 불운한 결혼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주옥같은 수많은 시작을 남겨 조선조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시집이 발간되었습니다.
허난설헌의 필적은 [초희, 허난설헌] 훔페이지 (http://kenji.chungnam.ac.kr/my/chohee/)에 보면 친필 1점과 그림 2점 《앙간비금도》 《묵조도》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에 보면 허난설헌의 묘는 문화재로 (경기도기념물 제90호) 지정되어 있습니다. 종 목 시도기념물 90호 명 칭 허난설헌묘 (許蘭雪軒墓) 분 류 묘 수 량 1기 지정일 1986.09.07 소재지 경기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산29-5 소유자 안동김씨서운관정공파종중 관리자 안동김씨서운관정공파종중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허난설헌(1563∼1589)의 묘이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로 용모가 아름답고 성품이 뛰어났으며, 8살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으로 일컬어졌다.
15세에 김성립과 결혼하였는데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하였으며, 친정집에 옥사(獄事)가 있는 등 연속되는 불운에서 오는 고뇌를 시를 쓰며 달래다가 선조 22년(1589) 27세에 생을 마쳤다.
그녀는 섬세한 필치로 여성 특유의 감상을 노래하여 애상적인 독특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작품의 일부는 허균에 의해 중국에 전해져『난설헌집』으로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허난설헌의 묘는 현재의 위치에서 약 500m 우측에 있었으나 1985년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문인석을 제외한 묘비·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상석·망주석·둘레석은 근래에 만들어졌다.
묘비의 비문은 이숭녕이 지은 것이며, 묘의 우측에는 1985년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세운 시비(詩碑)가 서있다. 시비에는 허난설헌의 곡자시(哭子詩)가 새겨져 있으며 시의 대상인 두 자녀의 무덤이 난설헌묘 좌측 전면에 나란히 있다.
문화재명 허난설헌묘(許蘭雪軒墓) 이곳은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의 여류(女流) 시인(詩人) 허난설헌(1563∼1589)의 묘이다. 자(字)는 경번(景樊), 호(號)는 난설헌(蘭雪軒), 본관(本貫)은 양천(陽川)이다.
안동(安東) 김씨(金氏) 김성립(金誠立)의 아내로 천품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용모로 타고나 8세 때에는 광한전(廣寒殿) 백옥루(白玉樓) 상량문(上樑文)을 지었고, 한시(漢詩)에 능하여 『난설헌집(蘭雪軒集)』을 남겼다. 선조(宣祖) 22년(1589) 3월 19일 27세로 요절(夭折)하였다.
▣ 디지털 한국학 홈페이지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릉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봉20)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 가문은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누대의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 이러한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으며, 15세 무렵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으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일부를 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간행, 애송되었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 閨怨歌〉와 〈봉선화가 鳳仙花歌〉가 있으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 국역 석릉세적 (1996) 西堂공 휘誠立의 기록 [지봉유설]에 휘誠立에 대하여는 부인 허난설헌과 비교하여 너무 격하시킨 기록이 전하여지고 있으나, 서당공께서는 문과급제자로서 [성소부부고]에도 휘誠立께서 [策文]을 잘 짓는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이외에도 [국조인물고]에 휘魯, 휘弘度, 휘 의 비문이 다른 명현들과 함께 전하여 지고 있고, [해동역대명가필보]에는 우리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의 혈맥을 있게 하여준 휘自行의 외조부 徐甄(서견)의 필적이 전하여지고 있다.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 김성립(金誠立)
1562(명종 17)∼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여견(汝見) 또는 여현(汝賢), 호는 서당(西堂). 아버지는 교리 첨(瞻)이며, 부인은 허엽(許曄)의 딸인 난설헌(蘭雪軒)이다. 158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에 이르렀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죽었다. 당대에 문명이 높았다. 참고문헌 號譜, 槿域書畵徵. 〈金東洙〉
최근 여성학운동의 성과로 뛰어난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역사적 여성에 대한 발굴과 역사적 재평가가 크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일환으로 허난설헌에 대한 연구도 최근 활발하게 진척되고1) 그 현양사업도 크게 진작되고 있다.2) 그러나 조선시대 여성의 경우 그 사료상의 한계로 말미암아 소수 사료에 집중되어 재인용 혹은 재재인용하는 사이에서 사소한 해석상의 문제가 제기될 시점에 이르렀으니, 이 역시 발전된 양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는 새로운 사료의 발굴이 시급한 단계이다.
특히 시인인 허난설헌의 경우 그 평가가 지나치게 도식화되고 화석화되어 오히려 허난설헌의 이해를 완성시키기도 전에 식상할 위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허균 중심의 사료에 함몰 되어 허난설헌의 평가를 지나치게 가정 내의 문제로만 한정시켜 사적이고 감상적인 결론으로 귀결시키는 것이 지배적인 경향인 것으로 보여진다.
최근 허난설헌의 도식적 이해의 단편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다.
허난설헌의 세가지 한3)
첫째, 왜 조선에 태어났을까?
둘째, 왜 여자로 태어나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서러움을 지녔을까?
셋째, 왜 하필이면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을까?
첫째 이것은 통시대적인 혹은 근대주의적 내지 식민주의적 사관을 저변에 깐 평가이며, 그 시대 즉 조선 중기 그것도 임란이전에 살았던, 그리고 대외적으로 항상 왜변에 시달리고 대난이 예측되는 위기의식이 충만되었던 시대 인식이 배제된 인간 이해이다. 나아가서 동서붕당으로 인한 당론이 격화되고 있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조정의 내분과 제도적 모순으로 인하여 가정 내에 관리인 남편을 안주시키지 못하였던 시대인식을 배제시킨 이해이다. 그리고 인간관계를 남녀간의 애정에만 한정시킨 편협한 인간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천재 허난설헌을 이해함에 있어 친정4)과 아울러 시댁 그 시댁에는 시어머니 한 분만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대가족적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그 시대가 양계적 가족공동체가 온전되어 있고, 당론에 의하여 훨씬 폭 넓은 인간관계로 구성되어 있었음에랴.
둘째 허난설헌은 아이를 갖지 못하였는가? 주지하듯이 허난설헌은 10여년의 결혼 생활 중에 무려 세 아이를 임신하여 1녀 1남 그리고 1회 유산 경력이 있었다. 이 정도면 부부관계도 보통 수준은 될 것으로 볼 수 있다. 함께 아이를 갖지 못하였던 김성립은 어떤 한을 가졌을까?
셋째 김성립이라는 인물이다. 우리는 그에 대하여는 잘 모르고 있었다. 허균의 평에만 의지해서 알아볼 염도 내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난설헌은 국내외에 알려진 문인이다. 친정 오라버니의 초역사적인 사랑과 인정을 받아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만하면 16세기 조선 여인의 사회적 지위는 세계적일 것이다. 그런 세계적인 여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을 김성립이란 인물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본고에서는 초당에서 태어나 서울 건천동에서 성장한 후 14-15세에 결혼하여 28세에 요절하기까지의 성인으로서의 허난설헌의 삶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흔히 재예가 뛰어난 며느리에 대한 시어머니의 질시 때문에 난설헌의 수명이 단축되었다는 설에 대한 근거도 허균의 몇 줄의 글에 근거하고 있을 따름이다. 심지어는 역적 집안의 딸이었으므로 자살의 길을 강요당하였을 것으로 보여지기도 하였다. 과연 허난설헌의 시집살이는 어떠하였을까?
2. 허난설헌을 중심으로 본 가족관계
1) 시댁 가족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1562-1592)은 안동김문 書雲觀正公派 11세손이다. 그의 가계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7세 希壽(愁然齋, 별시문과, 사가독서, 대사헌 무오사화 후 김종직의 신원을 상소), 8세 魯 (東皐, 문과, 사가독서, 직제학 김안로를 논척하다가 유배, 퇴계의 백씨인 李瀣와 조광조의 신원을 상소), 9세 弘度((1524-1557) 南峯, 문과 장원급제, 문인화가, 典翰, 영의정추증, 윤원형 탄핵으로 甲山 유배중 卒), 10세 瞻((1542-1584) 荷堂, 문과급제, 校理, 퇴계문하에서 수학, 율곡을 논하다가 지례현감으로 좌천 임소에서 졸))과, ?((1547-1615) 夢村, 알성문과 급제, 사가독서, 輔國領中樞府使) 11세 誠立(1562-1592, 西堂, 문과급제, 홍문관 著作, 31세 임란시 전사), 正立((1579-1648, 평창군수), 12세 振((1603-1688) 증광문과 이조참의, 부제학. 駱峯. 생부 정립. 성립의 아우인 정립의 3자중 제1남을 양자로 들임, 후처인 남양홍씨 역시 생자녀 하지 못한 듯함. 김성립의 묘비명에는 無育 으로 되어 있음.)을 이어오는 가계 구성원의 일원이다. 5) 즉 법제상, 족보상 振은 허난설헌의 양자로서 아들로 간주되는 것이 조선시대의 관례이다. 그의 후손들은 허난설헌을 조상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다.
난설헌은 14-15세 되던 해, 한 살 위인 교리 金瞻의 아들인 金誠立과 결혼을 하게 된다. 김성립의 아버지 김첨과 허봉은 같은 시기에 사가독서 하는 등 또한 각별히 사이가 좋았으므로 혼담이 이루어졌다.6) 즉 난설헌은 동인가계에서 동인가계의 이웃집으로 출가한 것으로 보여진다. 즉 친정은 오늘날의 오장동에 위치하였고, 시아버지의 집은 남소문 앞에 있었다. 그리고 친정의 정치적 비운은 시댁의 정치적 비운과 동시적으로 진행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實錄』에서 허봉, 김첨의 형제, 송응개의 형제들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을 자주 발견된다. 이들 세가문은 허난설헌의 혼인으로 중첩된 혼인관계를 맺고 더욱 돈독하여졌다.
2) 시어머니와의 관계
시어머니 송씨는 이조판서 宋驥壽(1507-1581)의 5녀이었다. 송기수는 을사사화시 사림이 제거되기 직전에 사람들이 “형인 인수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떻게 하겠느냐.”하니 “동산에 가시덤불이 무성한데 그 가운데 한송이 매화가 있다면, 어찌 매화가 상한다고 가시덤불을 없애지 않겠느냐” 라고 하였다. 결국 인수가 처형되자 사람들로부터 형을 모함한 공신이라고 지탄을 받았다.1573년 기로소에 들어가는 등 4조를 섬기며 부귀와 장수를 누렸으나 을사사화에 가담하였다 하여 지탄을 받았다.7) 또한 송기수의 정치적 성향으로 보아 사림보다는 훈구파에 속하는 인물로 주자학주의자로 보기는 힘들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시어머니 송씨의 시아버지인 김홍도는 을사사화시 피화되어 갑산에 유배된 후 그 유배지에서 객사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시댁에서의 송씨의 입지가 세평처럼 ‘현모양처주의’에 입각해서 며느리를 박대할 상황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시어머니 친정의 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0세 11세 12세 13세 14세 15세
世忠 - 麒壽 - 應漑 - 敬祿 - 錫夢 - 之明이다.
(문, 군수) (문, 이조판서)(문, 대사간) (현감) (감찰)
10세 世忠(1468-1498))의 처(1471-1551)) 남편에게 부묘됨. 1남 3녀로 처음 기재된 딸은 閔仁에게 출가하였고, 자녀관계는 기재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가 없는 것으로 추정된다.
두 번째는 縣監을 지낸 鄭耆에게 출가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기재된 바는 다음과 같다.
子 鄭思重
女 朴應賢
子 鄭思盆
女 申?
子 鄭思元
즉 출가한 딸의 시댁의 본관을 기재하지 않았고, 딸의 출생 순서를 기재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외손의 벼슬명이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3녀와 4녀의 경우는 전혀 기재사항이 없다. 추측컨대 출가전 사망자인 것으로 보여진다. 즉 10세 세충의 첫째 기재녀인 민인의 처의 경우는 출가후 미자녀인 것으로 보여지므로 이 경우는 출가전 사망인 것으로 보인다.
5녀는 허난설헌의 시아버지인 김첨에게 출가한 여성으로 허난설헌의 시어머니의 경우이다. 그 자녀출생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子 金誠立(文 正字)
女 李慶全(判書)
子 金正立(郡守)
女 朴燉
이 역시 출생순서대로 기재하였다. 은진 송씨의 족보는 김정립이 임진왜란시 홀로된 두 누이와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을 하였다는 기사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6녀의 자녀 서술순서는 다음과 같다.
女 李감(文 判決事)
女 李尙信(參判)
女 金善餘(文 察訪)
子 兪景曾
子 兪學曾
女 洪奧
이상에서 살펴본 바 딸의 자녀 즉 외손에 대한 기재 양식은 낳은 순서 대로 혹은 생존한 대로 서술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딸의 경우는 사망으로 인한 결원이 없으면 순서를 기재하지 않고 순서대로 기재하였으며, 결원의 경우 서열을 숫자로 표시하여 결원이 있음을 감지케 하였다.
13세 敬祚의 경우는 2남 3녀중 1녀는 무기재의 경우이고, 제2녀의 기술 양식(여, 자, 자, 자, 여의 3남2녀)도 태어난 순서이고, 제3녀의 경우(여, 여, 자, 자, 여의 3녀 2남)) 14 세 錫夢의 경우의 3남2녀로 제1녀는 무기재이고 제2녀는 자녀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15세 之明의 경우는 3남5녀로서 제1녀와 제5녀가 출가하였으나 자녀관계는 미기재이다. 이상은 嘉靖(1522-1566)에서부터 崇禎(1628-1644)년간까지의 기록이다. 즉 임난을 전후한 시기까지 허난설헌의 시어머니의 가계는 여전히 태어난 순서에 따른 기재 양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입양이 아직은 일반화되지 않았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물론 이상의 사항은 통혼관계에서만 확인 한 것이나, 기수 주변의 직 . 방계에서도 입양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안동 김씨의 경우 김성립이 양자를 들인 것에 비해 은진 송씨는 근친내에 입양이 없는 것에서 시어머니가 주자학적 여성관 소지자임을 입증하기는 힘들다.
3)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김성립에 대하여 ‘28세 되던 해에야 문과 병과에 급제하고, 관직이 정팔품 홍문관저작에 그친 것을 보면, 그리 뛰어난 인물은 아닌 듯 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것 역시 허균의 『성옹지소록』의 다음과 같은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세상에 文理는 부족해도 능히 문장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나의 매부 김성립은 경사에 대하여 읽도록 하면 제대로 혀도 못 놀리지만, 科文은 주요점을 맞추어서 논책은 여러 번 높은 등수에 올랐다?
김성립의 문장 솜씨는 뛰어났던 것으로 보여진다. 『實錄』과 안동김문에 그의 글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시 보다는 文과 논리적인 서술에 재주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전하는 바대로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정서와 취향의 차이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김성립의 성품에 대하여 『東史』에 전하는 글을 살펴보자.
“선조때 장안의 선비들이 벗을 모아 무리를 만들어서 일부러 미친짓을 하면서 괴상한 말을 만들고, 동서로 뛰어다니면서 울고 하며 서로 간에 묻기를 ‘무엇이 우숩고 무엇이 슬퍼 우는가?’하다가 큰 소리로 스스로 대답하기를 ‘문무대신이 사람같지 못하니 우습고, 우는 것은 국가가 장차 망할 것이 슬퍼서 운다.’고 하였다. 한 때 이름하기를 登登曲이라 했는데, 이렇게 부르짖는 우두머리는 鄭孝誠, 白雲民, 柳克新, 金斗男, 李慶全, 金誠立, 鄭協 등이었는데 얼마 안가서 壬辰의 亂이 있었다.”
위의 글을 보면 당대의 정치와 잦은 왜변에 대한 관심이 높고, 감정이 격하고 표현이 거칠었던 것으로도 보여진다.
한편 다음의 묘비명을 보면 정서적인 측면도 보인다.8)
...성질이 강직하고 방정하며, 자기 물건 외의 것으로 허식하는 것은 마음에 둔 바 없고, 항상 독서만 하면서 강가에 집을 지어 문을 개방하고 정신수양을 하였다...
김성립이 아둔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는 ‘28세에야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고 하는 점에 근거하고 있다.9) 그렇다면 주변 인물들의 급제 연령을 살펴보자.
허엽(1517-1580)은 1546년 30세로 식년문과에 갑과 급제한 것을 위시하여, 허봉(1551-1588)은 1572년 22세로 친시문과에 병과 급제, 허성은 36세에 병과 급제, 허균(1569-1618)은 1594년 26세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리고 사돈인 시어머니의 친정아버지인 송기수(1507-1581)도 1534년 28세에 문과 병과 급제 하였고, 아들인 宋應漑(?-1588)는 허봉의 친구로 급제 기록은 발견되지 않지만, 1565년(27세 이상)에 홍문관 정자 .저작을 지냈으므로 급제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아우인 應泂(1539-1592)은 음보를 거쳐 1572년 34세로 문과 병과 급제를 하였다. 참고로 율곡 이이(1536-1584)는 23세에 별시에서 장원하였으며, 퇴계 이황(1501- 1570)은 28세에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과거시험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28세 병과 급제는 평균적인 인재 내지 관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급제 후 김성립이 홍문관에 임용된 것은 그의 학덕이 공인되었음을 의미한다. 홍문관은 옥당이라고도 별칭되는 청요직으로서 그 관원이 되려면 知製敎가 될만한 문장과 경연관이 될만한 학문과 인격이 있어야 함은 물론 가문에 허물이 없어야 하였으며 우선 홍문록에 선발되어야 하였다. 홍문록이란 홍문관원의 후보로 결정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홍문관, 이조, 정부(조당)의 투표를 통하여 다득점자의 순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홍문관원의 결원이 생기면 홍문록 중에서 주의, 낙점된 사람으로 충원하게 되므로 홍문관원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홍문관을 위시한 언론 삼사에서는 과거 등재자가 발표되면 제일 먼저 필요한 인원을 우선적으로 선발할 권리가 주어진다. 따라서 홍문관 정자로의 임용은 가장 우수한 인재임을 뜻하며 가문의 광영을 의미하는 것이다.10)
芝峯 李睡光(1563-1628)은 거의 동년배인 김성립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은 만사를 지었다. 30세 임진왜란시 경상도방어사 趙儆의 종사관으로 종군하고, 의주에서 北道宣諭御使로 지내다가 김성립의 순국을 듣고 지은 만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1)
김군은 나의 착한 벗, 그 높은 기개에 재주도 절륜했네
젊어서는 서로서로 도와왔으니 그 정은 형제같이 친하였어도
문예는 세상에서 절륜하였고 출발은 청운이 화창했는데
어찌하여 조물주는 시기를 해서 머나먼 길 천리마 발을 막았나
임진년에 해적들이 몰아왔을 때 나는 영남병막에 부임해가고
그대는 때마침 假記注12)이었네
승정원에 마주서서 하던 이야기 이 어찌 한번 이별 알았으리오
....
아이도 없는데다 수도 못하였으니, 이런 이치 이해하기 아주 어렵네
안동김씨 문중에서의 허난설헌에 대한 평가는 사후에 발생한 허균에 인한 세평에 크게 좌우되지 않은 듯하다. 예를 들어 허난설헌의 사망날자와 연령까지 기재하였을뿐 아니라 조선 말기 헌종 철종 년간에 16세손 秀敦의 청으로 양촌허씨 許傳에게 김성립의 묘비명문을 부탁하여 남긴 글이 전한다.13)
서당공이 몸소 순국하였으니 그 곧은 충성과 큰 절개는 국사에 일성같이 찬란하게 나타나 있으니, 가히 천추에 빛날 것이니 비록 묘도에 비명이 없다 하더라도 오히려 명이 있는 것과 같지 아니하겠는가.구태여 말한다면 세상에는 연고와 어려움이 많아서 그러할 것이다. 공의 7세손 수돈이 변변치 못한 나에게 말하기를 “조상의 묘소에 아직 행적을 나타내는 비각이 없다는 것이 자손의 한이라. 우리 祖?는 자네의 선조이신 초당선생의 끝에 따님 蘭雪齋이라. 나의 조상의 사실과 행적은 자네가 아니고 누구에게 맡길것인가....”
위의 글로 미루어보아 안동김문은 19세기 이후 집권세력의 변동하기까지 김성립의 묘비도 세우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연고와 어려움이 많았던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허난설헌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대단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4) 시숙과의 관계
익히 알려져 있듯이 허난설헌은 1983년 허봉이 갑산으로 유배를 떠날 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낸다.
멀리로 귀양가는 나그네여
함경도 길 가느라고 마음 더욱 바쁘겠소
쫓겨나는 신하야 가의와 같겠지만
쫓아내는 임금은 어찌 패왕같이 아둔할까
가을비 갠 언덕엔 강물이 잔잔하고
고개위의 구름은 저녁노을 물드는데
서릿바람 받으며 기러기 울어에니
걸음이 멎어진 채 차마 길을 가는구려
이상은 허난설헌의 시이다. 이에 시숙인 김수는 조카며느리의 운에 맞추어 친구인 허봉에게 보낸다.
次姪婦韻送許美叔謫甲山
朝端時論變 嶺外逐臣忙
用舍闕天數 愛憎豈我王
悲吟同澤畔 治臥異淮陽
聞說甲山久 心驚淚萬行
조정에서 살피는 시대적 논란이 변해서
영서밖으로 신하 쫓아보내기 바쁘도다.
등용과 해임은 하는 운수에 관한 것이요.
사랑함과 미워함이 어찌 우리 인군에게 있으랴
슬피 읊음은 초나라 굴원의 못 뚝으로 지나던 때와같고
다스리고 쉬는 것이 회양에서와 다르도다.
갑산에 귀양가서 오래될 풍설을 들으니
마음에 놀래서 일만줄기의 눈물이 흐르노라.
이것은 1557년 할아버지 김홍도가 윤원형이 정난정을 정실로 삼았을 때 비난한 것을 빌미로 갑산으로 유배당하던 때를 비유하여 친구이며 허난설헌의 오라비인 허봉에게 보낸 것이다. 같은 동인으로 그리고 친구인 허봉에게 시를 부칠 수야 응당 있을 수 있는 일이겠으나 구태어 허난설헌의 시에 운을 맞추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허난설헌을 인정하였다는 뜻도 되겠지만 평소에도 더불어 시운을 맞추어 왔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시숙과 질부사이에, 더구나 여성의 시에 문과 급제하여 학문적 세평이 높았던 시숙이 운을 맞추었다는 것은 주자학적 사회에서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5) 허균과 김성립의 관계
김성립이 처남 허균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에 관한 자료는 없다. 다만 일방적인 허균의 비방만이 전한다. 이에 잠시 허균 연보14)에 의지하여 허난설헌의 친가와 시가의 사건을 중심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정하고자 한다.
1588년 허균의 작은 형이 죽다.
1589년 허난설헌이 죽다.
같은 해에 김성립은 과거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임용되었다.
1589-1592년 사이에 김성립은 재혼한 것으로 보여진다.
1590년 난설헌의 시 210편을 정리하여 책으로 엮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다.
1592년 임진왜란 발발하자 봉심을 명받고, 근무중 31세 꽃다운 나이에 김성립은 전사하고 시신도 찾지 못하여 의복만으로 장례를 치루다. 반면 허균은 홀어머니 김씨와 만삭의 아내를 데리고 피난중 7월 아내는 해산후 사흘만에 죽고 곧 갖난 아이도 죽다. 15세에 시집와서 23세에 허균의 아내도 아들없이 요절하였다. 함경도를 전전하다가 가을에 강릉에 도착하다.
1593년(25세) 『학산초담』을 지음
1594년(26세) 문과 급제승문원 사관에 임용.
1595년(27세) 홍문관에 후보로 올랐지만 낙점을 받지 못함.
1597년(29세) 세자시강원 설서에 임용되자 곧 3월에 파직됨.
이상의 경력을 비교해 보면, 김성립은 허균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미루어 짐작컨데 허균의 성정에 대한 세평 등등을 감안한다면 허균의 김성립에 대한 인물평은 객관적이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허균은 허난설헌의 죽음을 시댁 탓으로 돌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3. 거내이불언외?
1) 형제와의 교류
허난설헌은 강릉의 초당을 떠나 서울 처음에는 동인들의 거주지인 건천동(오장동)에 살다가 상동(필동으로 추정됨)으로 이사할 즈음인 14-15세(안동문중에서는 15세로 기재되어 있으며, 경국대전 반포 후 법적으로 15세가 결혼 적년기로 규정됨)에 출가하여 남소문동에 살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허균은 1585년에 17세의 나이로 결혼하여 명동에 살게 된다. 오빠인 허봉은 83년에서 85년까지 갑산에 유배되었다가 곧이어 유랑생활을 한다. 난설헌과 허균, 두 남매는 서로 의지하며 자주 왕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갓 결혼한 남동생의 눈에 비친 결혼 10년차의 누나의 결혼생활이 안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기록에 율곡이 허봉의 집에 가서 보니 김첨이 와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허균도 누이의 집에 드나들었을 가능성은 높다. 출가외인으로 간주되었다면 허난설헌의 시를 허균이 간직한 것을 해명할 도리가 없다.
사료상에 보면 김첨과 허봉은 늘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동인이 남북으로 분당하게 되는 장면에서도 허봉은 우성전의 집에서 시간을 허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성전은 허난설헌의 작은 언니의 남편 즉 형부이었다. 후기에는 기피하였을 사돈들이 늘 이해관계를 함께하던 사회가 양계적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후기보다는 지대하였고 함부로 박대하지 못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2) 문학수업
『성옹지소록』중의 기록에 의하면,
“형님과 누님의 문장은 가정에서 배운 것이며, 선친은 젊었을 때 慕齋 金安國에게 배웠다. 모재의 스승은 虛白堂 成俔인데, 그 형 成侃과 金守溫에게 배웠다. 두 분은 모두 泰齋 柳方善의 제자이고, 유공은 文靖公 李穡의 으뜸가는 제자였다.”
라고 하여 허봉과 난설헌이 모두 가학을 계승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학문적인 전통은 도교에 두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 밖에도 초당의 스승으로는 長吟 羅湜과 화담 서경덕이 있다. 난설헌의 시 가운데 仙界詩가 많은 것과 신선 세계에 관한 책을 많이 읽은 것도 모두 아버지를 통해 내려온 서경덕의 영향이다.”
난설헌의 詩風은 일찍이 오빠 허봉과 당시 三唐시인으로 유명했던 손곡 이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주위의 사물을 매우 정감 있게 묘사하고, 詩語에 있어서도 평이하고 간결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점이 특징이었다. 허봉의 문장은 간결하고도 무게가 있었으며 특히 시는 호탕했다고 전해진다. 허균이 스승인 이달의 유고를 모아 편집한 『蓀谷詩集』서문을 보면 난설헌의 시 공부에 큰 영향을 준 이달이 어떠한 인물인가를 알 수 있다.
손곡산인 이달의 자는 益之이며, 쌍매당 이첨의 후손이다. 그의 어머니가 천인이어서 세상에 쓰임 받지 못했다. 원주의 손곡에 살면서 자신의 호로 삼았다.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지은 글도 매우 많았다. 한리학관이 되었지만, 합당치 못한 일을 당하여 관직을 내버리게 되었다. 고죽 최경창 ? 옥봉 백광훈 등과 어울리며 서로 마음이 맞아 시 모임을 결성하였다.(…) 이달은 그 이름이 나라에 알려져 그의 신분에 관계없이 그를 중히 여기고 칭찬하는 시단의 3,4명의 거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세속의 소인들 중에는 그를 질투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많아 여러 번 더러운 누명을 씌워 형벌의 그물에 밀어 넣었지만 끝내 그의 명성을 말살시킬 수는 없었다. 이달은 용모가 아름답지 못하고 성품도 호탕하여 절제하지 못했다. 또한 세속의 예법에 익숙치 않아 이로 인해 풍습에 거슬렸다.
이렇듯 신분이 다른 사람을 어떠한 방식으로 스승으로 삼을 수 있었을까. 엄격히 거내이불언외하던 사회의 소산은 아닐 것이다. 그의 시를 보면 소서문(덕수궁와 서울역을 잇는 뒤쪽 길에 위치함)을 거쳐 서릉(서오릉, 불광동 방향)에 이르는 풍광을 노래하고 있다.15) 그녀의 집과는 상당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거내이불언외하지 않았던 여성의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3) 작품의 내용을 통해본 허난설헌의 참여의식
허난설헌의 문학세계에 대한 고찰은 허미자 교수의 『허난설헌연구』와 허경진 교수의 『허난설헌시선』, 장정룡 교수의 『허난설헌과 강릉』그리고 김성남 선생의 『허난설헌』등의 문헌에 『난설헌집』에 실린 시는 211편이나 된다. 이 시편들을 그 내용에 따라 대략 분류해 보면 유선사(遊仙詞), 견흥시(遣興詩), 규원시(閨怨詩), 민원시(民怨詩)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선계(仙界)에서 노니는 일을 엮은 유선사(遊仙詞)가 87수로 가장 많다. 중정건치(仲井健治)가 쓴 『일본인이 본 허난설헌 한시의 세계』의 기록에 의하면, 이 유선사는 선인(仙人)의 높은 뜻을 흠모하고 심오한 도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뜻에서 지어진 것으로, 사(詞)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가사(歌詞)로서의 운율을 중시한 점에 특색이 있다고 한다.
견흥시는 술을 마시거나 시를 읊는 흥에 겨워 지은 시를 말한다. 규원시는 홀로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의 원망과 정겨움이 담뿍 실린 시이다. 민원시는 당시 일에 지치고 부역에 고단한 가난한 사람들과 병사들의 한많은 인생의 단면을 읊은 시이다. 일반적으로 민원시로 분류된 시들 중에 다음의 두 편의 시를 살펴보고자 한다.
‘출새곡’이라는 제하에
“횃불은 긴 강물에 비추어 있고
군사들은 한가를 떠나 출정하도다
군사들은 창을 벼게 삼아 베고 눈위에 자며
말을 달려 사막에 이르니
삭풍은 진군 징소리를 전해주고
오랑캐들의 피리소리는 만리장성을 넘어오노라
가진 신고를 하여 가며
오랑캐의 병거를 쫓고 있노라“
......
그리고 ‘새하곡’에서는
“전군은 나팔을 불며 진문을 나오고
붉은 깃발은 눈에 얼어붙어 펄럭이지도 못하는구나
구름에 덮여 어두운 사막엔 척후병들의 불빛 신호 번쩍이고
밤이 깊자 유격 기마대는 벌판을 누비도다 ”
......
규중 여성의 시라고 보기는 힘들다. 암울한 전쟁터로부터 들려오는 우울한 소식은 서울에 사는 관리가족에게는 낮설지 않은 풍경 이었을 것이다. 직접 보지는 못할지라도 허난설헌의 감수성으로 멀지 않은 전쟁의 예감과 짓밟힐 민중의 고통을 외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숙인 김수가 남긴 글에도 전쟁터의 풍광이 특히 많은 것을 보면 내훈에서의 여성규범과는 달리 가정내에서 바깥 정세에 대한 대화가 이성간에도 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4) 과부 재가 문제
정치정세뿐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서 사회문제에 무심할 수는 없다. 시를 통하여서만이 아니라 시밖에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허난설헌의 세계를 시를 통하여 들어갈 수 밖에 없다. 다음의 일례를 들어보자.
청동이 홀로 지내기 일천 년,
천수선랑과 좋은 인연을 맺었네.
하늘 음악 소리 밤 늦도록 추녀 밖 달까지 올리고,
북궁선녀도 발 앞까지 내려왔다네.
靑童孀宿一千年
天水仙郞結好緣
空樂夜鳴?外月
北宮神女降簾前
허난설헌 시에 나오는 이 청동은 하늘의 선녀이며, 천수선랑은 인간 세상에 사는 남자 서생 조욱(趙旭)을 말한다. 북궁선녀가 바로 달로 날아간 항아이다. 이 시는 천 년 동안을 과부로 산 청동이 천수선랑과 인연을 맺자 이를 축하해 주기 위해 항아가 땅으로 내려왔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시이다. 청동과 천수선랑 조욱의 사랑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난설헌이 이 신화를 이용해서 바로 과부의 재혼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파악되고 있다.16)
즉 이 시에서 허난설헌이 사용하고 있는 ‘좋은 인연[好緣]’은 재혼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 사회는 국초에 재가녀의 자녀를 관인으로 등용하지 않음으로서 양반가의 부녀자의 재혼을 금하여왔는데,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풍속이 일반화되기에 이른다. 특히 임난이전에 사대부 출신의 허난설헌 입장에서 과부 여성의 능동적 구애의 모습을 표현한 점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허난설헌은 감히 천 년 동안을 과부로 산 청동의 문제를 제기하여 불행한 과부에 대한 동정과 함께 유교 사회에 대해 분노에 찬 비판을 던진 것은 아닐까?
5) 출가외인?
앞서 살펴보았듯이 허난설헌의 집 주위에는 본인의 친정과 시어머니의 친정가족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사임당과 허난설헌은 외가에서 혹은 외가의 지역에서 태어나 생장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노론의 정신적 지주인 宋時烈(1608-1689)의 아버지는 司饔院 奉事 甲祚이고, 어머니는 善山 郭氏로 봉사 自防 의 딸이다. 그는 충청도 옥천군 구룡천 외가에서 태어나 26세 때까지 살았으나 후에는 懷德의 宋村 飛來洞 蘇堤 등지로 옮겨 지내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졌다. 1625년에 공주 장기면에 사는 도사 李德泗의 딸과 혼인하였다. 즉 태어나 결혼한 이후까지 외가에서 살았다.
또한 조선 중기의 열녀들을 살펴보면 친정과 시댁에 의하여 재가의 권유를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다음 몇 개의 사료를 살펴보자.
咸州에 살던 朴召史는 밀양의 良家女인데 의령현감 趙壽儀의 妾이 되었다. 첩이 된지 얼마 안되어 의령현감의 喪을 만났다. 슬퍼하여 살고싶은 마음이 없었다. 복을 마치자 부모님을 보살피기 위해 돌아갔으나 부모가 뜻을 빼앗고자함을 알고 즉시 남편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친정에 왕래하지 않았다.17) 열녀 順月은 古春谷 驛吏 朴希貞의 처이다. 19세에 시집을 가 34세에 남편을 잃고 슬퍼함이 지극하여 9년을 복상하였다. 절기가 변할 때마다 망부를 위해 새옷을 지어 헌제한 후에는 태워버렸다. 부모형제가 일찍 과부된 것을 슬퍼하여 뜻을 빼앗고자 하니 불러도 가지 않고 늙을 때까지 수절하였다.18) 朴召史는 正兵 李弘의 처인데 25세에 남편이 죽었다. 시아버지는 개가시켜 쫓아내고자 하였으며 송곳 꽂을만한 땅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송소사가 스스로 당을 팔아 남편 장사지내고 3년복을 입었으며 지성으로 제사지냈다. 나쁜 무리들이 있어 여러번 강제로 욕보이고자 했으나 송사를 제기하여 마침내 뜻을 빼앗지 못했다.19) 晉州에서 살던 黃壽長의 妾 私婢 鳳鶴은 20세에 남편상을 당하여 상복을 벗지 않고 애통해하여 몸을 상하였다. 그 아버지가 그의 나이 젊음을 가엾게 여겨 애통해하여 개가시키고자 하였으나 죽기를 맹세하고 다른데로 가지 않았다.20)
물론 신분이 낮은 계층에서 집중적으로 보이지만 친정에서 혹은 시댁에서 개가시키려고 하였다. 위의 자료로 볼 때 아직 기층사회민까지 출가외인 내지 개가금지의 풍조는 내면화 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진다. 이와 같은 읍지는 대부분 사류중심으로 임란직후의 흩어진 사회풍속과 토착기반을 굳히고자 하는 목적하에 간행된 것이므로 오히려 하층민의 열녀행실을 독려한 자료로써 사료해석은 역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조선 중기 그것도 임진왜란 직전에 살다간 허난설헌의 삶과 작품을 양계적 사회의 특성 하에 설정하여 살펴보았다. 종전의 연구가 허난설헌은 현모양처를 강요하는 주자학적 사회 . 가족윤리관이 지배하던 사회에서 한 많은 삶을 살았다고 설정하였다. 나아가서 그러한 사회적 한계를 넘어 仙界를 그리는 훌륭한 작품을 남긴 것을 기려왔다.
그러나 본고는 허난설헌의 소녀시절-완벽한 행복, 시집살이-불행의 시작이라고 도식화 시켜놓은 조선 중기 여성의 구체적인 삶, 생활상에 접근하고자 하였다. 친정가족에 관한 연구는 선행 연구성과를 정리하였고, 시댁 가족에 관하여는 『安東金氏族譜 』와 『恩津 宋氏族譜 』 그리고 안동 김문과 동인계의 문집 등을 발굴하여 재 구성하여 양계의 가족관계에서의 허난설헌의 운신의 폭을 가늠해 보고자하였다. 그 운신의 폭이 허난설헌의 공간이고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활력소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본 것이다. 앞으로 보다 좋은 사료가 발굴된다면 조선시대 여성의 생활사가 보다 투명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4) “...자신의 피붙이들을 둘러싼 잇단 불운...” 등 친정에 한정된 고찰에 집중되어 있다. 당시 허난설헌을 둘러싼 모든 인물들 -시아버지, 시숙, 남편, 그리고 시어머니의 형제들, 언니의 남편 그밖의 친지들이 모두 퇴계의 문인이었으므로, 동인으로서 정치적 운명을 함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고찰되어져야 한다. 아울러 왜변과 임진왜란의 희생자들로서 작품분석에서 고려되어져야 할 것이다.
5) 부록 1 세계표 참조.
6) 西郭雜錄, ‘宣祖 癸未(1583) 율곡이 병조판서가 되었을 때 허봉의 집에 갔는데, 김첨과 洪迪이 이미 와서 자리에 있었다....’.
尤庵集, “沙溪(金長生)가 말하길 ‘나는 김첨, 김수와는 世誼가 두터워서 비록 색목은 갈라졌으나, 오히려 글왕래를 하는데, 일찍이 김첨에게 묻기를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송응개의 율곡을 攻駁하는 狀啓는 그대의 손으로 지었다하는데 사실인가, 아닌가?’하자 대답하기를 ‘내가 어찌 그렇게 할 것인가, 그 집은 능숙한 문장가인데, 어째서 나의 손을 빌리겠는가?’하고 대개 송응형을 지목하였다. 이에 대하여 우암이 말하기를 ‘너의 집과 그 집은 族戚이 서로 친하며, 담을 사이에 두고 있으니, 능히 흘러 들어가지 아니하기는 어려울 것이다’라 하였다.”
7) 한국문화대백과사전,12권,911쪽.
8) 사후 200년에 만들어진 묘비명으로 허난설헌과의 인연으로, 이조판서 양천 허씨 許傳이 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