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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무력독립운동(武力獨立運動) 기지건설(基地建設)
1907년 일제(日帝)의 강압으로 해산당한 대한제국군(大韓帝國軍)은 해산 당일 서울과 지방에서 치열한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무수한 병력과 막강한 화력에 밀려 패전(敗戰)하게 되자 이들 장병들은 즉각 각지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의병들의 전투력 향상에 도움을 주면서 효과적인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였다. 정규적인 군사 교육을 받았고 전투 유경험자인 한국군 장병들은 종래의 의병항쟁(義兵抗爭)으로는 일제의 강력한 군사력에 대항하기 어렵다고 보고 소규모의 의병으로 효과적인 유격전(遊擊戰)을 벌이도록 하였다. 그전에 유생들이나 농민들이 주가 되던 의병들은 수백명의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과 전면전(全面戰)을 벌임으로써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한국군 장병들이 의병항쟁에 참전하면서 전투의 양상이 달라졌다. 적게는 5명 이내, 많으면 10여명 정도의 규모로 일본군을 기습공격하고 재빨리 은신하는 전법(戰法)을 사용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이에 일본군은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소위 의병대토벌작전(義兵大討伐作戰)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잔악하고 악독한 군사작전으로 의병이 출몰하였거나 은신할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무차별 공격을 가하여 초토화시키는 것이었다. 이 초토화 작전은 의병항쟁의 근거지를 없애는 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 작전으로 의병들은 점차 근거지를 상실하였을뿐만 아니라 수많은 지도자와 장병들을 잃게 되었다.
이에 의병들은 새로운 활동기지를 찾아 만주와 연해주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1910년을 전후하여 유인석(柳麟錫), 이진룡(李鎭龍), 조맹선(趙孟善), 박장호(朴長浩), 송상규(宋尙奎) 등의 의병부대가 국경지방을 넘어 이동하였다. 이들은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토지를 개간하여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인재를 양성하는 한편, 무기를 구입하여 부대를 재정비하여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였다. 당시 이곳에는 의병계통과는 달리 국내에서 결성된 비밀결사단체(秘密結社團體)인 신민회(新民會)에 의하여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독립군 기지가 건설되고 있었으며 개신교(改新敎) 계통의 인사들도 역시 용정촌(龍井村)을 중심으로 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1919년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이 일어나고 수많은 애국인사들이 모여들자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각기 반일 단체를 조직하고 소속 독립군을 편성하여 본격적인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을 전개하였다.
특히 3·1운동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정규적인 군사교육을 이수한 군사전문가들이 몰려옴으로써 독립군의 활동은 활기를 띠게 되었다. 대부분의 독립군 지도자들은 대한제국군 장교 출신이거나 중국 혹은 일본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군사 책임자인 양규열(梁圭烈)은 한국군 참령(參領)이었으며, 사령관 이청천(李靑天)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 재학중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를 졸업한 후 일본군 중위(中尉)로 복무하다가 만주로 망명한 인물이며, 교관 신팔균(申八均)은 대한제국군 정위(正尉) 출신이다. 대한제국군 출신 이외에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는 앞에서 말한 이청천, 나중소(羅仲昭) 외에 김경천(金慶天) 등이 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의병항쟁(義兵抗爭)에서 독립전쟁(獨立戰爭)으로 그 맥이 이어지는 데에는 대한제국군 출신들이 가교가 되었으며 특히 이후에 전개되는 독립전쟁은 한국군 출신 장병들과 이들에 의하여 양성된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었던 것이다.
● 독립군 양성사업(獨立軍養成事業)
만주와 연해주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군 부대 정비에 주력하는 한편,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교육에도 심혈을 경주하였다.
일제(日帝)가 국권(國權)을 침탈하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는 민족 지도자들에 의하여 수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있었는데 이들 민족학교의 교육목표는 어디까지나 구국인재(救國人材)의 양성에 두고 있어 대부분 군사교육을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군사교육 전문기관이 설립된 것은 1910년 이후부터였다.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는 만주의 신흥학교(新興學校)와 대전자학교(大甸子學校)를 들 수 있는데 이중 신흥학교는 독립군 양성의 중추역할을 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이후 항일독립전쟁(抗日獨立戰爭)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출신 인물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것이다.
신흥학교는 1910년 국치(國恥) 이전 신민회(新民會) 지도자들의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방략에서 비롯되었다. 신민회는 동회의 독립전쟁 방략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이곳에 학교를 설립하여 구국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목표 아래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를 기지로 선정하였다. 이어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등 민족 지도자들과 각 도에서 자원한 1백여호가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먼저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고 많은 동포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병농일치제(兵農一致制)를 실시하는 한편, 인재 양성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1911년 4월에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한 신흥강습소는 1913년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尼河)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한 후 신흥학교로 개명하였으며 교과과정도 중학반과 군사반으로 나누었다. 이 과정은 얼마 후 변경되어 군사반만을 설치하였다.
그후 많은 동포들이 이주함에 따라 입학자가 증가하자 신흥학교는 무엇보다 수용시설의 확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1917년 통화현 팔리초(八里哨)의 소북대(小北垈)에 분교를 설치하고 이를 신흥학교 백농분교(白農分校)라 하였다.
1919년에는 신흥무관학교로 명칭을 개편하고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40여간의 교사와 수만평의 연병장을 마련하여 이전하였다. 이는 3·1운동 이후 급증하는 입교지원자를 수용할 시설의 부족 때문이었다. 한편, 고산자에는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장교를 양성하였으며 합니하에는 초등군사반을 두어 3개월 과정의 일반 훈련반과 6개월 과정의 후보 훈련반을 두었다.
신흥무관학교는 신흥강습소 이래 여러 차례 폐교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필사적으로 운영을 계속하여 1911년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총 3천 5백여명의 독립군 기간요원을 길러냈다. 또한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정규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유경험자가 속속 모여들었다. 곧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이청천(李靑天), 김경천(金慶天) 등과 중국 육군 강무당 출신인 이범석(李範奭), 그리고 대한제국군 장교였던 신팔균(申八均), 김창환(金昌煥), 이장녕(李章寧) 등이 합세함으로써 명실공히 독립군 사관양성의 기능을 다 할 수 있었다.
1일 14시간 정도의 학과교육과 70여리의 야간 행군 등 강도 높은 군사교육이 실시되었다. 교육내용도 정신교육에 치중하여 학과 10%, 교련 20%, 정신교육 50%, 건설 20%였으며 학교 건물 연병장 건설 등은 모두 자체에서 해결하였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의 교육자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교장에 이천민(李天民), 부교장에 양규열(梁圭烈), 학감에 윤기섭(尹琦燮), 훈련감에 김창환(金昌煥), 敎成隊長에 이청천(李靑天), 교관에 남상복(南相復), 이장녕(李章寧), 이세영(李世永), 김경천(金慶天), 신팔균(申八均) 등이 각각 담당하였다.
독립군 양성기관으로서 좀더 구체적 사실을 알 수 있는 기관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 경영하던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이다.
이 연성소의 교육은 전투가 없는 경우 오전 훈련과 오후 훈련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오전은 9시에 시작하여 11시까지로 주로 제식훈련과 전술훈련이었으며 오후는 사격술(射擊術), 총검술(銃劍術) 등 총기훈련(銃器訓鍊)과 학과훈련(學科訓鍊)을 밤늦게까지 실시하였다. 또한 이 연성소는 장교훈련뿐 아니라 신병훈련도 담당하였는데 신병에게는 2개월 내지 6개월 정도 집중교육을 시킨 후 부대에 배속시켜싸. 그리고 신병 중에 정신력이나 학력이 부족한 사람은 별도의 교육을 실시하여 보완하게 하였다.
연성소 교관들은 대한제국군 장교 출신 또는 중국에서 사관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대부분 의병항쟁 경력으로 전투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었다.
서대파(西大坡)로부터 왕청하(王淸河) 상리삼리(上里三里)에 있어 서대파 상촌(上村)의 군정서 직영의 무관학교에는 현재 약 4백명의 재학생이 있어서 회색의 군복을 입고 모두 상등병(上等兵)격의 견장을 붙였으며 18세로부터 30세까지의 청년인데 6개월의 강습을 완료하면 모두 소위(少尉) 자격이 되며, 소대의 지휘관이 될 수 있다. 그 교육과정은 정신교육과 역사, 군사학, 병기술과, 지령법 등이었다.
이 군정서(軍政署)의 독립군 훈련에서 특이한 사실은 러시아 및 중국군 장교가 훈련을 도와주었다는 점이다. 러시아군 장교는 주로 무기 판매를 위하여 군정서 사관연성소로 왔다가 군정서의 요청에 의하여 독립군의 훈련을 담당하였으며 중국군 장교는 군정서가 훈련담당 교관으로 돈을 주고 임시로 고용한 용병이었다.
부대 지휘관은 주로 구한국군(舊韓國軍) 출신이거나 중국에서 정교적인 사관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많은 수가 의병항쟁에 참전하였던 군사지식이 풍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대원의 훈련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특히 군정서에는 독립군 지휘관 양성을 휘하여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고 청년 중 특히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입교시켰다. 이 사관연성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 1만원의 자금을 지원하여 설립된 것으로 소장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이 겸임하였고 학관은 이장녕(李章寧), 이범석(李範奭), 김규식(金圭植) 등이 담당하였다.
독립군 양성기관은 만주와 연해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상해(上海)의 임시정부에서도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를 설립, 운영했으며 미국, 하와이 등지에서도 군사요원을 양성하여 만주와 연해주에 파병한다는 목적으로 일찍이 독립군 양성사업이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양성기관으로는 미국 클레어몬트에 있는 한국인 군사훈련반(軍事訓練班, 1910년 10월 설립), 켄자스에 있는 소년병학원(少年兵學院, 1910년 11월 설립), 하와이에 있는 한국 국민군단(韓國國民軍團, 1914년 6월 설립) 등이 있다.
● 독립군(獨立軍)의 편성(編成)
1919년부터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는데 이들의 조직계통을 살펴보면 대략 네가지 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의병과 유생들로 구성된 개신교(改新敎), 대종교(大倧敎) 등 종교를 중심으로 편성된 독립군, 또한 출신 지방별로 뭉쳐서 편성된 독립군, 그리고 나머지는 특별한 연고 관계없이 거주지를 중심으로 편성된 독립군이었다.
이러한 독립운동 군사단체(獨立運動軍事團體)들은 구황실(舊皇室)의 복벽(復辟)을 이상으로 하는 보수계와 공화정체(共和政體)를 이상으로 하는 공화계로 나눌 수 있는데 보수계는 주로 의병 유생 출신의 노장년층이며, 공화계는 소장층이 핵심이 되고 있다. 따라서 보수계는 반임정(反臨政) 태도를 지녔으며, 공화계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의 방법에 따라 다시 구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시급히 독립군 병력을 국내에 진입시켜 국내에서 일제(日帝)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하여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서두르는 이른바 급진파의 독립군과, 이와는 달리 먼저 병력 배양에 힘쓰고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군사력이 준비되면 일거에 독립전쟁(獨立戰爭)을 일으켜 일제를 국내에서 축출하고 국권회복(國權恢復)을 기하자는 이른바 점진파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계통과 이념의 차이는 재만(在滿)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진영에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눈앞에 도사리고 있는 일제를 효과적으로 축출할 수 있느냐가 더욱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였다. 그래서 재만 독립군은 끝내 1개의 대단체(大團體)로 통합되지는 못하였지만 각기 독자적으로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하면서 한편으로는 꾸준한 통합운동(統合運動)을 추진하여 나갔다.
첫번째 독립군의 통합운동은 1919년 12월 독립군 일부 지도자들에 의하여 일어났다. 좀더 효좌적인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하고 통일적인 독립운동기구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목적 아래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 대한의용군사회(大韓義勇軍事會), 한족회(韓族會) 등의 간부들이 회합을 열어 통합기관의 설립에 합의하고 1920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직속기관으로 교민통치기구인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와 독립군인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를 설치하였다.
● 모병사업(募兵事業)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 조만(朝滿) 국경지대와 간도(間島) 지역에서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의군부(義軍府),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평북독판부(平北督辦部), 흥업단(興業團), 야단(野團), 대한의민단(大韓義民團), 혈성단(血誠團) 등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소속 독립군(獨立軍)을 편성하는데 필요한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각기 자기단체(自己團體)의 관할지역 안의 주민들에 대하여 징병제(徵兵制)를 실시하고 있었다. 대한국민회는 호구조사를 실시한 후 18세에서 40세까지의 장정을 매호(每戶)당 1명씩 징집하였으며, 한족회(韓族會)에서도 17세~30세까지의 장정 중 선발하여 징집하였다. 주민을 많이 관장하고 있는 단체에서는 5호(戶) 중에서 1명을 징집하고 징집되지 않은 4호는 징집된 호구(戶口)의 생계를 돌보도록 하였다.
재만(在滿)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 단체 중에서 가장 조직적으로 징병제를 실시한 단체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後日의 北路軍政署)였다. 군정서(軍政署)에서는 평균 30호(戶)를 1구(區)로 하여 18세~35세의 건강한 신체를 지닌 자를 매호(每戶)에서 15명~25명을 선발하여 징병검사를 실시한 후 적격자에게는 즉시 입대를 명하고 나머지는 군정서가 필요로 할 때에 즉시 소집에 응하도록 서약하게 하였다. 이어 35세 이상의 자로서 상당한 지식이 있고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는 사람은 각 부대나 각 구의 간부로 임명하였다. 또한 입대자에게는 급료 및 여비로 50원을 지급하였다.
이상과 같이 징집을 통한 방법 이외에 자진 입대자와 모병(募兵)에 의한 방법이 있었다. 3·1운동 이후 국내로부터 수많은 청년들이 도만(渡滿)하여 독립군에 자진 참여하고 독립군 간부들은 국내에서 꾸준하게 모병 활동을 전개하여 애국 청년들을 독립군에 흡수하였다. 또 시베리아 연해주(沿海州)로부터도 많은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당시 나코리스트 방면에는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부라고웨시치엔스크 방면에는 금광업에 종사하는 한국 사람들이 많았는데 시베리아 지방의 정국 혼란으로 실직하고 있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이들을 대상으로 초모(招募)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들에게 독립군에 입대하는 것은 침략국에 정복된 국가를 광복시키는 성스러운 일에 참여하는 영광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입대 후에도 생활이 보장될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여 독립군에 흡수하였다. 군정서에서는 이들이 입대하면 소정의 증명서를 발급하여 이들이 군정서의 독립군임을 증명하였다.
독립군의 부대편성은 그 부대의 실정에 알맞게 편성되었다. 지휘관의 군사경력에 따라 대한제국의 편제를 적용하거나, 일본군이나 중국군의 편제를 적용하거나 또 부대의 규모와 지역 사정에 따라 부대를 운영하기 편리한 방법으로 독자적인 편제를 사용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립군 편제는 일반적으로 소대(小隊), 중대(中隊), 대대(大隊)로 편성하였다.
대한독립군은 소속 부대를 4개 중대로 편성하고 그 명칭을 남만주(南滿州) 제1사단(師團)이라 하였으며, 의군부와 대한독립군은 3개 중대로, 통의부(統義府)의 의용군은 3개 소대를 1중대로 하여 4개 중대로, 참의부(參議府)는 5개 중대, 정의부(正義府)는 4개 중대로 편성하였다. 그런데 신민부(新民府)는 5개 대대로 편성하였는데 대대의 규모나 대대 이하의 편성은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다. 부대편성에서 특이한 것은 광복군사령부의 부대편성이다. 광복군사령부는 소속 독립군을 1영(營)에서 6영까지로 나누어 지방에 분산 주둔케 하였다.
독립군의 편성 규모를 가장 상세히 알 수 있는 것은 대한군정서로서 동(同) 부대는 창설 초기 병력이 적었을 때는 25명을 1개 소대로 하고, 2개 소대 50명을 중대로 하였으며, 2개 중대 100명을 대대로 편성하였다. 그러나 뒤에 병력이 증강되자 50명을 소대로 하고, 1개 소대를 1개 중대로, 그리고 4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하였으며 각 제대(梯隊)에는 대장(隊長) 1명을 두어 부대를 지휘하게 하였다.
초기에는 총병력 5백여명이 장총 5백정, 권총 4십정, 기관총 3문으로 비교적 착실하게 장비를 갖추었으며 군자금도 10만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군정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병력증강을 꾀하였는데 국내에서도 독립군 모병 활동을 착실하게 수행하여 매일 수십명의 장정이 입대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8월에는 총병력이 1천 6백명을 돌파하였으며 장비로는 장총 1천 8백정(1정당 탄환은 8백발),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대포 3문과 다수의 수류탄을 보유하여 재만 독립군 중 최강의 부대로 성장하였다.
독립군의 개인장비는 소총 1정, 탄환 5백발, 수류탄 1개 그리고 비상식량으로 정요(精要) 6승(升)과 신발 1켤레씩을 휴대하였다. 그리고 대한군정서는 전(全)독립군을 4개 대대로 편성하였는데 이 중 1부대는 각 지방과의 통신연락 및 주변 경계임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 군자금과 무기조달
독립군에게 무엇보다 제일 긴요한 것은 군자금이었다. 군자금 준비는 부대의 세력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성패를 가늠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무기와 군수품을 마련하기 위하여는 상당한 액수의 자금이 소요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독립군이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군자금의 조달이었다. 만주에서의 군자금조달의 대상은 물론 재만교민(在滿僑民)들이었다. 그리하여 대한군정서는 재만교민에 대하여 재산 정도에 따라 납세형식으로 일정액을 징수하였다. 대개 빈민층이 많은 교민들에게 일시 불로 징수하기 어려워 분납제(分納制)를 적용하였는데 1년에 전후기(前後期)로 나누어 분납하게 하였다. 대개 토지 5정보(町步) 이상을 소유한 부유한 교민들에게는 재산정도에 따라 100월 이상을 할당하여 납부하게 하였으며 일반빈민들에게는 호당 평균 조 2말과 짚신 2켤레를 징수하였다.
대한독립군은 5등급으로 나누어 1등 5원, 2등 3원, 4등 1원 5각, 5등 5각반을 징수하였으며 화룡현(和龍縣)에서 결성된 대한독립이사회는 3등급으로 나누어 부호(富戶)는 곡식 5두와 금 10원을, 빈호(貧戶)는 3두와 5원, 극빈호(極貧戶)는 5승과 1원을 징수하였다. 또 홍범도(洪範圖) 부대는 각 호에 곡식 3두와 짚신 1족을, 연길현(延吉縣)에서 군자금 모금만을 전담하기 위하여 결성된 독립단총재소(獨立團總財所)는 5원에서 100원까지 여러 등급으로 구분하여 기부금을 징수하였다. 또 이범윤(李範允)의 광복단(光復團)에서는 매호에 곡식 1두를 징수하고 또 3등급으로 나누어 1등은 5원, 2등은 2원 50전, 3등은 80전을 징수하였다.
또 재만 독립군은 부족한 자금을 국내에서 모금하였다. 군정서의 국내 모금 활동 상황을 보면 군정서는 대원 중에서 엄선된 인물을 국내에 파견하여 모금 활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는데 상당한 학식과 신망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그 사람을 원적지로 파견하고 그 곳에서 친척이나 그 지방 지면인사(地面人士)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그들로부터 의연금을 받아내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모금 활동은 어디까지나 국민들에게 항일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거나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자발적인 협조를 부탁하는데 있었고 강제적인 징수는 아니었다. 독립군의 강제적인 모금 활동의 대상은 친일파이거나 독립운동에 비협조적인 부호들에게 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간도지방 독립군의 모금에는 상당한 부작용이 일었다. 그것은 간도지방에는 여러 군데의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어 있어 이들 각 단체가 제각기 모금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교민들에게 이중삼중의 부담을 주었을뿐 아니라 그 중에는 독립군을 빙자한 무뢰배들이 독립운동 단체의 간판만을 걸어놓고 교민을 총기(銃器)로 위협하여 강제로 재산을 약탈함으로써 교민들의 민심을 독립운동으로부터 이반시키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가들은 이들 가짜 독립운동가들로부터 교민을 보호하여야만 했으며 각 단체가 통합하여 질서있는 독립운동을 전개해야만 했다.
독립군 부대의 규모가 점점 커짐에 따라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군자금 부족현상은 나날이 심각해져 갔다. 이에 독립군은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국내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강제모금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대대로 부작용이 나타나게 되었다.
독립군은 부대유지비뿐만 아니라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에 처음에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의연금에 의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차츰 강제적 모금의 방법을 병행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독립군이 군자금의 마련과 동시에 시급히 추진한 것이 무기의 구입이었다. 당시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주된 길은 시베리아나 연해주로부터였다. 당시 이곳은 적군(赤軍)과 백군(白軍)간의 내전으로 혼란이 극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으로부터 많은 무기가 유출되어 무기판매상들에 의하여 비밀리에 거래가 성립되고 있었다. 따라서 독립군이 무기를 구입하는 것은 자금만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시베리아로 출병하였던 체코슬로바키아군이 시베리아에서 철군하면서 막대한 무기를 싼값에 독립군에 판매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지난날 헝가리 제국주의의 압제 밑에 짓밟힌 자신들의 노예 생활을 회상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려고 투쟁하고 있는 한국 독립군에 대하여 많은 동정을 베풀고 자신들의 무기를 판매하여 주었던 것이다.
당시 무기의 가격은 일정하지가 않았는데 무기상이나 중간 무기상으로부터 구입하는 것은 고가(高價)였다. 무기구입에 있어 제일 어려운 것이 운반이었다. 철도를 이용하여 소만국경(蘇滿國境)까지 운반되면 그곳에서 본부까지 직접운반하였다. 중국과 일본 군경(軍警)의 감시를 피하여 산간지방으로 운반하였는데 산간지방에서는 마적단(馬賊團)의 무기탈취를 피하여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독립군은 별도로 무기운반대를 편성하여 운반 도중에 발생되는 사고에 대비하였다. 이 운반대는 마을에서 신체가 건강한 사람 1명씩 소집하여 조직하였는데 이 운반대는 무장된 독립군의 경호를 받으며 무기를 운반하였다.
독립군의 무기는 러시아제 총기(銃器)가 과반수를 차지하였으며 그밖에 일본제, 미국제, 독일제 총기도 가지고 있었다. 기록상에 나타나 있는 독립군의 무기를 보면 러시아식 장총(長銃)과 기병총(騎兵銃), 일본의 38식 장총과 1930년대식 보병총(步兵銃), 무라타[村田]식 장총, 중국제 장총이 있으며, 브로우닝, 스미스, 모젤, 콜드 권총(拳銃) 등 미국제와 러시아제 5연발 및 7연발~12연발 권총, 일본제 권총 등도 보이고 있다.
한편, 독립군의 근거지는 대부분 방어전(防禦戰)을 벌이기에 유리하고 일본군의 습격을 피할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근거지에는 자력으로 병영과 연병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군무부(軍務部)의 문서 기록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의 근거지는 백초구(百草溝)에서 동북방 135리, 대왕구(大旺溝)로부터 90리 지점의 울창한 산림으로 뒤덮인 양봉산(養棒山)이라 불려지는 산록에 있었다. 이곳은 그다지 높은 고지는 아니었으나 동방으로 약 100리에 훈춘(琿春) 차구에 이르며 동북방 150리에는 경수천자(倞水泉子) 방면으로 통하는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어 어느 쪽으로나 적군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쉬운 군사적 요충지에 자리를 잡았다. 대한군정서는 이곳에 병영을 건설하고 연병장을 만들어 본부로 삼았다.
2.독립군(獨立軍)의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1910년 국치(國恥) 이후 만주(滿州)와 연해주(沿海州)에서 편성된 항일독립군(抗日獨立軍)은 군사력 배양에 힘써오다가 3·1운동 이후에 본격적인 독립전쟁(獨立戰爭)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국경을 넘어 오는 일본군경(日本軍警)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한편 국내로 진공하여 일본군 병영이나 경찰대 주재소 등을 습격하거나 일제(日帝)의 식민지 지배 행정기관을 파괴하고 일본의 정치적 실권자나 친일파를 살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일본 경찰의 근무 기록을 살펴보면 독립군 항일투쟁(抗日鬪爭)의 단면을 볼 수 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기 전 국경지방에서는 때때로 중국 마적단(馬賊團)의 침입이 있었을뿐 조선 독립군에 관해서는 큰 일이 없었는데, 3·1운동 발발 후에 있어서는 사건에 관계되는 자의 일부가..... 중국 땅으로 숨어들어 그곳에 주재하는 반역의 무리와 합하여 독립군이 되고, 각종의 불온한 단체를 조직하여 각지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상해의 임시정부 등과 연계하여 무력 침공(武力侵攻)을 감행하기 위해 항상 우리 경비력을 엿보고 교묘하게 국경 연안의 경비망을 통과하여 조선내로 침입한 후 독립운동(獨立運動)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얻는다고 하면서 소재의 민가를 습격하고..... 때로는 주재소, 면사무소, 기타의 관공서를 습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국경 일부에 있어서는 아직 그러한 일이 계속되고 있다.
독립군은 근거를 중국 땅에 두고 단결하여 항거하고 있다. 또한 그들은 골드식, 모젤식 연발총을 소지하고 있으며 그 행동은 민첩하며 지리에 정통하고 야영조식(野營租食)에도 익숙할 뿐 아니라 부대훈련에도 뛰어나 있어 출몰자재하여 교묘하고 대안(對岸)으로부터 월경침입하여 주간은 인적이 미치지 않는 산악 또는 밀림지대에 잠복하였다가 일몰을 기다려 횡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금후 더욱 다사다난할 것으로 그 위험은 예측하기 어렵다.
촌각의 안심도 할 수가 없어 경찰관들은 취침에 있어서도 불시에 대비하기 위해 무장한 그대로 총기(銃器)를 목침으로 삼아 가침(假寢)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전혀 휴양 안식할 틈이 없는 상태이다.」
독립군의 작전은 주로 조만(朝滿) 국경지대인 평북, 함남, 함북 지방에서 전개되었는데, 1920년부터 1921년까지 벌어진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 가운데 중요한 전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0년 3월에 간도(間島)의 독립군이 함북 온성군 풍리동에 있는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평북 벽동군 면사무소를 습격하였으며, 두만강 상류 남양동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4월에는 평남 영유군 우편소 면사무소를 습격하였고, 5월에는 함북 회령군 우무령에서 우편물 호송대를 습격하였다. 6월에는 함북 온성군 강양동의 일본군 헌병초소를 공격하였으며, 평북, 강계, 자성, 벽동, 위원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의주군 옥상면 경찰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하였고, 평북 삭주군 양산면 경찰관 주재소도 독립군의 공격을 받았다.
동년 8월에는 평북 선천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하였고, 평북 자성군 대안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평남 대동군 전촌경찰서를 공격하였고, 평북 강계군 고산면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9월에는 황해도 신천군 초리면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고, 평북 용천군 동하면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으며, 평북 강계군 문옥면 삼강면에서 경찰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10월에는 평남 선천군 내산사, 맹산군 맹산면에서 각각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11월에는 함남 갑산군 보혜면 태평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기도 하였다.
1921년 1월에는 함북 옹기군 신건원 경찰관 주재소를 공격하였고, 평남 덕천군 태금면 영광리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2월에는 평북 의주군 교외에서 일본 헌병대와 교전하였다. 3월에는 평북 영변군 고성면 산중에서 경찰대와 교전하였고, 평남 덕천군 풍덕면 덕주령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평남 영원군 온창 면사무소가 독립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5월에는 평북 맹산군 옥천면에서 독립군과 일본 경찰대간의 총격전(銃擊戰)이 벌어졌다.
6월에는 평북 의주군 옥천면, 벽동군 동하면, 자성군 만흥동에서 각각 독립군과 일본 경찰대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7월에는 평북 후창군 서례령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함남 강진군 메몰령에서 일본 헌병대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8월에 함남 갑산군 오시내 부근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함남 풍산군의 헌병대 주재소를 공격하였으며, 압록강 연안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9월에는 평북 초산군 도원면에서 일본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공격하였고, 함남 갑산군 동인면 함정경찰서와 면사무소, 영림창 출장소 등을 공격하였다.
10월에는 함남 갑산, 신흥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고, 함남 삼수군 호인면 운전리의 일본 경찰대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12월에는 함남 단천군 수하면 중평리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고, 함남 갑산군 보혜면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1919년부터 1920년에 걸쳐 만주일대에 근거를 두고 있었던 여러 독립운동 군사단체(獨立運動軍事團體)들은 쉴새없이 조만국경(朝滿國境)을 넘어 국내로 들어와 일본군경(日本軍警)을 기습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1920년 초기에는 독립군의 활동이 그 어느 때보다 왕성하였던 시기로서 특히 2월부터 6월초까지 독립군의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은 32회나 되었으며, 일제(日帝)의 경찰관 주재소, 헌병대 초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 파괴한 곳이 34개처나 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전투를 벌인 독립군 가운데 특히 괄목할 만한 활동을 전개한 부대가 홍범도(洪範圖) 장군이 인솔하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이었다. 1919년 8월에는 삼수(三水), 갑산(甲山), 혜산진(惠山鎭) 방면으로 출동하여 일본군 병영을 습격하였으며 10월에는 만포진(滿浦鎭), 자성(慈城)으로 진출하여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1920년 안무(安武)가 인솔하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민병대와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합세하여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라는 독립군연합사령부(獨立軍聯合司令部)를 편성하고 더욱 대일항전(對日抗戰)에 박차를 가하였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주요 간부를 살펴보면 사령관에 최진동, 부관에 안무, 연대장에 홍범도, 제1중대장에 이천오(李千五), 제2중대장에 강상모(姜尙模), 제3중대장에 강시범(姜時範), 제4중대장에 조권식(曺權植) 등이었다.
이렇게 연합사령부를 편성한 독립군은 1920년 봄부터 두만강 대안의 국경지방은 회령(會零), 종성(鐘城), 온성(穩城) 지방으로 연속적으로 진입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즉 이 해 2월에 대규모의 독립군 병력이 회령 부근의 일본군 병영을 습격하여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고, 3월에는 약 80여명의 독립군이 종성지방으로 진격하여 그곳의 일본 헌병대를 습격, 궤멸시키고 총기(銃器)와 탄약(彈藥) 등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3월 15일부터 10여일간은 온성 진격작전이 전개되었다. 약 2백여명의 독립군이 온성군 유포면 풍리동의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 파괴하였으며, 80명의 독립군은 미포면의 미점 헌병대를 섬멸하였고, 18일에는 약 30명의 독립군 특공대가 유포면 향당동에서 일본 경찰대와 교전하였고, 약 2백명의 병사는 온성읍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5월 28일에는 독립군이 두만강을 도강하여 국내로 진격, 회령에서 경원으로 가는 길목인 운무령(雲霧嶺)에서 일본군 기마대가 호송하는 우편대를 습격하여 이를 전멸시켰으며, 1주일 뒤인 6월 4일에는 종성 북쪽 5리 지점에 있는 강양동(江陽洞)의 일본 헌병대를 공격하였고, 그곳에 있는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대를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강양동에서 독립군의 기습공격으로 인해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게 되자,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領部)는 대규모의 병력을 독립군 토벌작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 대장인 아라미[新美二郞] 대좌(大佐)에게 독립군의 본거지인 만주의 삼둔자(三屯子)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독립군은 일본군의 추격을 사전에 탐지하고, 이에 대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다. 즉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사령관 최진동(崔振東)은 독립군의 일부 병력을 삼둔자 서남쪽에 잠복시킨 후 적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6월 6일에 피아간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으나 일본군은 60여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은 채 퇴각하였고, 독립군은 소총(小銃) 150정과 기관총(機關銃) 3문을 노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삼둔자전투(三屯子戰鬪)에서 일본군이 패배하자 함경북도 나남(羅南)에 주둔해 있는 제19사단 소속 야스가와[安川二郞] 소좌(少佐)의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가 아라미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출동하였으나 역시 고려령(高麗嶺) 서남방에서 이화일(李化日)이 지휘하는 독립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많은 피해를 입었다.
삼둔자전투에서 승리한 독립군은 본부가 있는 봉오동(鳳梧洞)으로 돌아와 일본군의 추격에 대비하였다. 홍범도(洪範圖) 장군은 독립군 병사 7백여명을 연병장에 집결시키고 전투배치를 하였는데, 이천오(李千五) 중대를 봉오동 윗마을 서북단에 잠복시키고, 강상모(姜尙模) 중대는 동쪽 고지에, 그리고 강시범(姜時範) 중대는 북쪽 고지에, 조권식(曺權植) 중대는 서산 남쪽에 각각 잠복하여 일본군을 기다리게 하였다. 또한 연대장 홍범도가 직접 인솔하는 병력은 남산에 위치하여 이번 작전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나머지 병력은 이원(李園)이 인솔하여 서북쪽 산 속에 위치, 탄약과 식량보급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독립군의 금번 작전은 어디까지나 봉오동으로 일본군을 유인하여 일거에 섬멸하려는데 있었으므로 이화일(李化日) 분대를 전방으로 보내어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면서 봉오동으로 유인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화일은 휘하 독립군을 인솔하고 일본군과 교전하여 본대가 봉오동에서 전투준비를 완료할 때까지 싸우다가 점차 봉오동으로 유인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 수뇌부의 전략대로 6월 7일 12시에 봉오동으로 들어왔다. 이때는 이미 독립군의 전투배치가 완료되었으며 주민들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후였기 때문에 봉오동 안에는 아무도 없었을 때였다. 봉오동으로 들어온 일본군은 마을을 수색한 후 그곳 학교로 들어가서 독립군의 매복지점을 세밀히 살펴보았으나 독립군의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하자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 운동장으로 몰려나왔다. 홍범도는 일본군이 진입하기 전에 독립군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장비를 전부 가지고 산에 들어가 잠복하라. 일본군은 마을과 사방을 수색한 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판단되면 틀림없이 학교로 들어갈 것이다. 그때 재빨리 사방을 포위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발포하거든 학교를 향하여 총공격을 하도록 하라. 그러나 절대로 총을 헛되이 쏘지는 마라. 탄환은 곧 군인의 목숨이다. 탄환이 없는 총은 몽둥이에 지나지 않는다. 꼭 적병을 쓰러뜨릴 자신이 있을 때에만 사격하여야 한다."
홍범도의 예상은 적중하여 일본군은 짐작한 대로 학교 교정에 모였던 것이다. 봉오동 윗마을에 이르도록 독립군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한 일본군은 아무런 의심도 지니지 않은 채 선봉부대의 뒤를 이어 주력 부대까지 봉오동으로 들어와 학교 교정에 모였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홍범도 장군이 장총(長銃)을 겨누어 들고 방아쇠를 당기자 이것을 신호로 학교를 완전히 포위한 독립군 병사들은 일제히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독립군은 홍범도의 지시에 따라 정확히 적병들을 조준하여 사격하였다. 갑작스러운 독립군의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당황하여 교정에서 갈팡질팡하였고 미처 응사할 겨를도 없이 쏟아지는 총탄에 쓰러져 나갔다.
오후 1시경에 전열을 수습한 일본군은 대열을 정비하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대대장 야스가와[安川] 소좌는 휘하의 카미야[神谷] 중대와 나카니시[中西] 중대를 지휘하여 동쪽 고지에 매복해 있는 강상모 중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의 제2중대장 강상모는 부하들을 독려하며 일본군을 맹공하여 이를 격퇴시키고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오후 3시 30분이 되자 야스가와 소좌는 다시 예비 병력인 모리[森宗] 중대와 앞서 패퇴한 카미야 중대의 잔류 병력을 합하여 기관총대(機關銃隊)를 선두로 하여 재공격을 감행하였다. 중대장 강상모는 적군이 양쪽으로 공격하여 오는 것을 보고는 일부 병력만을 잔류시키고 중대원을 모두 퇴각시켰다. 그리고 잔류 병력을 지휘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맹렬한 총격전(銃擊戰)을 전개하던 강상모 중대는 조용히 격전장에서 빠져나왔고, 양쪽으로 올라오던 적군은 저희들끼리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 4시간 동안 벌어진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자 157명 부상자 2백여명의 피해를 입었으나 독립군은 전사자 4명, 부상자 2명이라는 경미한 피해만 보았을 뿐이었다.
독립군의 전력을 얕잡아보고 덤벼들었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은 일본군은 더 이상 싸울 의욕을 잃고 그날 저녁 잔존 부대를 수습하여 공산동(空山洞)으로 철수하였으며 독립군은 승전(勝戰)의 기쁨을 가득 안고 명월구(明月溝)로 행군하였다. 명월구로 오는 도중 노두구(老頭溝)에서 간도의 일본 총영사관 소속 고등계 형사 쯔보이[坪井] 경정(警正)이 인솔하는 경찰수색대와 조우(遭遇)하여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 경찰관 22명을 사살하고 명월구로 돌아와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교포들의 환대를 받았다.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를 지휘하여 승리로 이끈 홍범도(洪範圖) 장군은 당시 나이가 53세로 약간 몸집이 뚱뚱하였다. 그는 계급장도 없이 언제나 병졸 차림으로 다녔으며 무기도 권총(拳銃)이 아닌 장총(長銃)을 휴대하였고, 탁월한 전략과 백발백중(百發百中)의 사격술(射擊術)로 전투에 임하여서는 패배를 모르는 만부부당(萬夫不當)의 지용(智勇)을 겸비한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만주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지역에서 6일간 계속된 10여회의 접전을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라 한다. 이 전투의 주역은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총지휘하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독립군이었다. 이 북로군정서 부대는 본영을 왕청현(汪淸縣) 십리평(十里坪)에 두고 1600여명의 병력을 보유하면서 총기(銃器) 1800정으로 무장하고 대포(大砲) 3문까지 장비된 재만(在滿) 독립군 가운데 최강의 정예부대였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완패한 일본군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날로 증강되어 가는 조선 독립군을 일거에 소탕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만주로 병력을 출병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중국의 마적단(馬賊團)을 매수, 동년 10월 2일 훈춘(琿春)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사건이 유명한 훈춘사변(琿春事變)이다.
이를 기화로 일제는 만주에 있는 일본인과 자기들의 공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출병을 단행하였다. 당시 만주로 출병한 일본군은 제19사단 전부, 제20사단과 제13사단 및 제14사단의 일부 병력과 관동군으로서 총 3만여명의 전투병력이었다. 이 거대한 병력으로 동서남북 사면으로 독립군을 포위, 공격하였다.
한편 일본군의 출병소식을 접한 독립군은 중국 당국의 권유를 받아들여 근거지를 떠나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였다. 북로군정서도 장백산(長白山) 산중으로 이동할 것을 결의하고 본거지인 서대파(西大坡)를 떠나 10월 5일에 삼도구에 도착하였다. 이때 북로군정서의 병력은 비전투원(非戰鬪員)을 포함하여 2800여명이었으며 군수장비를 수송하는 수레가 180여대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북로군정서의 편제를 보면 다음과 같았다.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참모부장 나중소(羅仲昭)
부관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 이범석(李範奭)
중군장교 이민화(李敏華) 김훈(金勳) 백종렬(白鍾烈) 한건원(韓建源)
보병대대장 김규식(金奎植)
제1중대장 강화린(姜華麟)
제2중대장 홍충희(洪忠熙)
제3중대장 김인수(金仁洙)
제4중대장 오상세(吳祥世)
특무정사 나상원(羅尙元) 권중행(權重行)
북로군정서가 삼도구로 이동하고 있을 때 일본군은 그 일대를 포위하고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이 작전을 총지휘하게 된 아즈마[東正彦] 소장(少將)은 자신의 부대를 4개 제대로 나누어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그리하여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金佐鎭) 부대와 홍범도(洪範圖) 부대 2천여명, 그리고 아즈마 소장이 거느린 일본군 병사 1만 5천여명 사이에 십여 차례의 치열한 총격전(銃擊戰)과 포격전(砲擊戰)이 전개된 것이다.
①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사전에 부대를 4개 제대로 나누었다. 비전투원과 훈련이 부족한 병사를 제1제대에 포함시켜 총사령관인 김좌진이 직접 지휘하고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정예병력은 제2제대로 편성하여 연성대장인 이범석이 지휘하게 되었다.
독립군은 백운평 계곡에 방어진을 구축하고 일본군의 출현을 기다렸다. 독립군은 좌측이 산림이 울창한 약 80도의 급경사지대이며 우측은 암석이 험준한 고산에 매복하였다. 전투의 주력은 이범석 휘하의 제2제대였다.
10월 21일 9시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일본군 전위부대가 나타나자 독립군 병사들은 소총(小銃) 6백여정, 기관총(機關銃) 4문, 박격포(迫擊砲) 2문 등 소유하고 있는 각종 화력을 동원해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일본군은 산포(山砲)와 기관총 등으로 응사하였으나 지리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방어진을 구축한 독립군의 맹렬한 공격에 여지없이 무너져 갔다.
이때 이도구(二道溝) 방면에서 우회하던 일본군이 독립군의 우측을 공격하여 독립군은 좌우 양측에서 적군의 협공을 당하게 되었다. 독립군은 아군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작전상 후퇴하여 22일 새벽 2시 30분에 갑산촌(甲山村)으로 이동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보병 2백여명이 전멸당하는 피해를 입게 되었다.
②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는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와는 달리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의군부(義軍府), 한민회(韓民會), 한국광복단(韓國光復團), 의민단(義民團), 신민단(新民團) 등의 독립군 부대가 합쳐진 독립군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이 수행한 전투로서 10월 21일 오후부터 22일 새벽까지 어랑촌(漁浪村) 서북방 완루구 산림 가운데에서 벌어졌다.
남쪽과 북쪽으로 나누어 진격하여 온 일본군의 동태를 정찰병으로부터 보고 받은 연합여단의 총지휘관 홍범도(洪範圖) 장군은 미리 마련되었던 방어선에서 독립군 병사들을 배치시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동시에 미리 준비시켜 두었던 예비대 병력으로 하여금 산림 중간로를 우회하여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군충돌(自軍衝突)을 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즉 북쪽에서 진격하던 일본군은 독립군의 중앙 고지 방어선을 향하여 돌격하는 일본군을 독립군으로 오인하고 공격함으로써 서로 우군끼리 총격전을 하는 결과를 낳았다. 따라서 중앙고지를 향하던 일본군은 한쪽에서 독립군의 공격을 받고 다른 쪽에서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상태에 빠졌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자 4백여명이라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③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
백운평전투(白雲坪戰鬪)에서 일본군 1개 보병연대 병력을 무너뜨린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는 갑산촌(甲山村)으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천수동(泉水洞) 민가에 일본 기병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재만(在滿) 조선 민간인의 제보를 받게 되었다. 이 첩보를 받은 독립군은 즉시 전투준비를 하고 22일 새벽 4시에 출발하여 1시간 동안 행군, 천수평 어귀에 도착하였다. 김훈(金勳) 중대는 북쪽으로 가서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이민화(李敏華) 중대는 천수평 남방고지를 점령하였으며 이범석(李範奭)이 거느린 2개 중대 병력이 곧장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새벽 5시 30분에 독립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응사할 기회도 제대로 찾지 못한 채 무너졌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이 아직도 1백여리 떨어진 청산리 쪽에 있다고 판단하여 아무런 대책도 없이 진을 치고 있다가 독립군의 습격을 받았으며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전의를 잃고 도주로만 찾다가 패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기병 120여명을 사살하였는데 탈출에 성공한 일본군은 4명뿐이었다고 한다.
④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는 천수평전투(泉水坪戰鬪)와 같은 일환으로 전개된 것이다.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는 천수동에서 사살된 일본군 장교 시마다[島田彬] 중위(中尉)의 군복에서 전문을 발견하고 일본군 2개 대대, 기병 1개 중대, 포병 1개 중대가 어랑촌(漁郞村)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후 급히 어랑촌으로 이동하여 서남방 고지를 선점하였다.
일본군 병사들은 일제히 대포와 기관총을 쏘며 고지를 향해 올라왔다. 이에 유리한 고지를 장악하고 있던 독립군 병사들은 각종 개인화기(個人火器)로 무차별 사격을 가하며 일본군의 돌격전(突擊戰)을 저지하였다. 당시 독립군은 병력이나 화력에 있어서 일본군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열세였을뿐 아니라 백운평에서 첫 교전을 치르고 1백여리를 강행군한 직후라 체력이 많이 소진되어 있었다. 다만 선점한 지형이 유리하다는 것밖에 강점이 없었다.
22일 9시에 시작된 이 전투는 일본군의 포탄이 고지 중앙에 떨어져 독전(督戰)하던 김좌진(金佐鎭)의 군모(軍帽)가 파편에 맞아 날아갔으며 이범석(李範奭)이 적진을 향해 내뻗은 군도(軍刀)가 총탄에 맞아 두 동강이 나는 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최인걸(崔麟杰)이 이끄는 기관총대(機關銃隊)는 산등에 엎드려 기어 올라오는 일본군을 향하여 맹사격을 가하였으며 인근 마을에 살고 있던 교민들이 고지에 올라와 수류탄(手榴彈)을 운반하고 주먹밥을 만들어 전투에 여념이 없는 독립군 장병의 입에 넣어 주는 등 감동적이며 처절한 혈전(血戰)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고지를 완전히 포위하고 거세게 압박하는 일본군의 집요한 공격에 독립군의 저항은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 이때 최인걸은 밧줄로 기관총을 자신의 몸에 붙들어 매고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적군의 빗발치는 총탄에 벌집이 되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10배 이상의 적군과 대적하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점차 위기에 몰릴 때 완루구전투(完樓溝戰鬪)에서 승리한 홍범도(洪範圖) 장군의 독립군연합여단(獨立軍聯合旅團)이 참전함으로써 전세가 역전되었다. 홍범도 부대는 일본군의 후방을 기습하여 포위망을 뚫고 즉각 지원사격을 하여 적군의 공격을 물리친 것이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 장병들은 일본군 3백여명을 사살하였다.
⑤ 기타 전투
22일 어랑촌전투(漁郞村戰鬪)를 승전(勝戰)으로 이끈 독립군은 23일 병력을 정비한 후 이동을 시작하였다. 이 날 이동중 맹개골에서 일본군 기병 30명과 조우하여 교전함으로써 10여명을 사살하였고, 또 그 후 마르꼬우 산림 중에서 일본군 50명과 교전하여 30여명을 사살하였다.
24일 아침에는 쉬구를 향하여 행군중 일본군 보병 100여명을 발견하여 공격하였고 다시 일본군 기병 1개 소대를 쳐서 패주시켰다. 그 후 독립군은 10월 25일 천보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며 25일 밤에서 26일 새벽까지 고동하곡(古洞河谷)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전개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독립군은 통쾌한 승전(勝戰)을 기록하여 일제(日帝)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가 결코 용이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하였고, 우리 민족에게 조국 독립에 대한 희망을 안겨주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발행하는 독립신문(獨立新聞)은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전사한 일본군의 숫자를 1200여명이라고 보도하였고, 당시 중국 언론인 요동일일신문(遼東一日新聞)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 2천여명이 사살되었다고 보도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제19사단의 전투 보고서 기록에는 일본군의 패전(敗戰) 사실이 누락(漏落)되어 있어 큰 대조(對照)를 보이고 있다.
3.독립군의 이동과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 독립군의 자유시(自由市) 집결과 한인군사위원회(韓人軍事委員會)의 성립
1920년 10월 이후 일본군의 만주 출병과 때를 맞추어 재만(在滿) 독립군은 새로운 활동기지를 찾아 소만(蘇滿) 국경지대로 이동을 개시하였다.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안무(安武)가 인솔하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과 기타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신민단(新民團) 등의 여러 독립군들이 소만국경에 위치한 밀산(密山)에 집결하였는데, 이들 독립군은 안전지대인 소련(蘇聯) 연해주(沿海州)로 월경하여 새로이 장비의 보충과 군사훈련을 행하기로 결정하고 입경 전에 하나의 통합군단을 결성키로 하였다. 그리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편성되었다. 이 군단은 전 병력을 3개 대대로 편성하고 1대대를 3중대로, 1중대를 3소대로 나누었는데 소대 총수가 27개였으며 병력이 3500명에 달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간부진을 살펴보면 총재에 서일(徐一), 부총재에 홍범도(洪範圖) 김좌진(金佐鎭) 조성환(曺成煥), 총사령관에 김규식(金奎植), 참모총장에 이장녕(李章寧), 연대장에 이청천(李靑天), 중대장에 김창환(金昌煥) 조동식(趙東植) 윤경천(尹擎天) 오광선(吳光鮮) 등이 각각 취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독립군단은 부대편성을 마친 뒤에 소련 땅 이만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당초의 목적과는 달리 이 군단은 소련의 적군(赤軍)·백군(白軍)간의 내전에 휩쓸려 들어 소련에 이용만 당하고 일부는 곧장 만주로 귀환하였으나 일부는 흑룡강(黑龍江) 연안의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였는데 그 뒤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을 겪고는 끝내 소련군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비극을 겪었다.
이 당시 전부터 연해주에 재류하고 있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의 문창범(文昌範), 한창해(韓滄海)와 자유대대(自由大隊)의 오하묵(吳夏默), 박승길(朴承吉) 등이 그해 12월초에 하바로프스크의 적군(赤軍) 제2군단 본부에 교섭하여 연해주로 들어온 만주(滿州)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을 한 곳으로 집결할 수 있도록 교섭하였다. 이리하여 국민의회는 자유시에 군사주둔지를 마련하는 한편 독립군에 사람을 파견하여 자유시로 집결하도록 인도하였다.
1921년 3월 중순까지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은 최진동(崔振東) 허재욱(許在旭)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안무(安武) 정일무(鄭一武)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홍범도(洪範圖) 이청천(李靑天) 휘하의 독립군과 군정서였으며 전부터 시베리아에서 무장 활동을 하여 오던 김표돌(金票突), 박공서(朴公瑞)의 이만 군대, 니콜라이 최의 다반 군대, 그리골리 박의 독립군단, 임표(林彪) 고명수(高明秀)의 니항군(尼港軍)과 오하묵(吳夏默)의 한인보병자유대대(韓人步兵自由大隊) 등으로서 총병력이 1900여명이었다.
이와 같이 수개의 무장 단체가 자유시(自由市)에 집결함으로써 대군단의 결성과 군비확장의 기회는 도래하였으나 각기 사정이 다른 수종의 부대집결은 자연 뜻하지 않는 분쟁을 가져 왔다. 즉 적군의 제2군단 6연대장으로서 흑하지방 수비대장을 겸임하고 있는 오하묵과 니항군이라는 적계(赤系) 빨치산 부대를 이끌고 활동하던 박일리야간의 군권장악을 위한 암투가 그것이었다.
1921년 1월 이용(李鏞), 채영(蔡英) 등은 한인군사위원회(韓人軍事委員會)를 결성하고 당시 흑룡주(黑龍州) 일대를 관할하는 극동공화국정부(極東共和國政府) 군부(軍部)에 교섭하였다. 이에 군부에서는 박창은(朴昌殷)을 총사령관에, 그레골레프를 참모부장에 임명하여 자유시로 파견하는 동시에 니항군의 명칭을 사할린 의용대라 개칭하고 독립군 및 자유대대 등 모든 무장 단체는 사할린 의용대의 관할 아래에 둘 것을 명령하였다. 한인군사위원회는 극동정부 당국에 비밀협정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한국인 군대의 편성을 무제한으로 승인하고 무기 피복 식량을 무제한으로 공급하겠다는 것, 군사위원회 이외에 여하한 단체를 막론하고 군권을 허용치 않겠다는 것을 명시하였다.
얼마 후 박창은이 총사령관직을 사임하자 극동정부에서는 그리골레프를 연대장으로 박일리야를 군정위원장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이 명령을 받은 그리골레프와 박일리야는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였던 바, 우선 부대주둔지를 자유시 서북방에 위치한 마사노프로 정하고 각 부대를 이곳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극동정부 당국자들로부터 재노령(在露領) 한국인들에 관한 문제는 이르쿠츠크에 있는 국제공산당(國際共産黨)의 동양비서부(東洋秘書部)에서 취급한다는 것을 듣고 이르쿠츠크로 갔다. 그곳에서 전로공산당(全露共産黨)과 합세하여 동양비서부에 한국인 무장군을 통괄할 수 있는 권한을 자기들에게 위임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결과 탄생된 것이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였다.
●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의 성립
한인군사위원회(韓人軍事委員會)가 재노령(在露領) 무장부대를 관할하게 된 것에 불만을 품은 자유대대(自由大隊)의 오하묵(吳夏默) 등은 1921년 2월 27일 대표 6인을 치타의 극동공화국정부에 파견하여 무장부대의 관할을 자기들에게 넘겨 줄 것을 교섭하였다.
군정의회를 조직할 것을 전제로 우선 임시군정의회를 세워 총사령관에 갈난다라시빌리, 부사령관에 오하묵, 임시참모부장에 유주연(兪柱淵), 위원에 김하석(金夏錫) 채성룡(蔡成龍)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군정의회의 병력강화를 위하여 적군(赤軍) 5군단의 기병 6백명과 동(同) 군단내에 소속된 전동민족군(全同民族軍) 한국인 6백명을 부속시키고 공산주의 선전을 위하여 이르쿠츠크 공산당 정치학교 제1회 졸업생 16명을 대동하였다.
이들 군정의회 간부들은 1921년 4월 14일 이르쿠츠크를 출발하여 17일 치타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곧 극동공화국정부(極東共和國政府) 군부총장에게 군정의회 성립경과를 통고하고 각 무장 단체를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군부총장은 적군 제2군단에 무장 단체의 인계를 명하고 치타에 있던 한인부(韓人部)를 해체하였다.
5월 2일 자유시에 도착한 군정의회는 한국인 무장부대의 자유시집결을 강행하였다. 그러나 사할린 의용대를 비롯한 마사노프에 주둔중인 한인군사위원회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군정의회 측은 이르쿠츠크 동양비서부에 이와 같은 사정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당시 병력면의 열세에 처하여 있던 군정의회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후 5월 28일 전동민족군 6백명이 자유시에 도착하고, 6월 2일에는 마사노프에 주둔중이던 홍범도의 독립군 440여명이 자유시로 합류하였으며 6월 6일에는 총사령관 갈난다라시빌리와 위원 유동열(柳東說) 최고려(崔高麗) 일행이 코카샤쓰기 병사 6백여명을 인솔하고 자유시에 도착함으로써 정세는 일변하여 군정의회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마사노프에는 니항군, 총군부, 다반군, 이만군 등 총 1400여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 군정의회(軍政議會)와 한국의용군(韓國義勇軍)간의 내전 발생
군사력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 군정의회는 곧 강력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사노프 주둔군은 자연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총사령관의 명령으로 크라스나야로까지 부대를 이동시킨 마사노프 주둔군은 군정의회에게 장악되었다. 군정의회에서는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 그리골레프와 부관 김해선(金海先)을 명령 불복종으로 체포하고 곧 부대를 자유시로 인솔하고자 하였다.
군정의회의 이러한 조처에 대하여 한국의용군(韓國義勇軍) 측에서는 연대장과 부관의 석방을 요구하면서 이에 불응하였으며 군정의회의 오하묵과 최고려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한국의용군 측은 자유시에 집결하는 경우 군정의회가 의용군 장교를 모두 체포하리라는 소문이 있어 계속 자유시로의 이동을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대를 다른 곳으로 이동코자 계획하였다. 그러나 군정의회 측은 한국의용군의 무장해제를 시킬 것을 계획하고 병력을 동원하여 한국의용군을 포위하였다.
이에 한국의용군 측은 다시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 3인을 군정의회에서 추방灸箚?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요구는 수락되지 못하였으며 결국 한국의용군은 자유시에서 조금 떨어진 수랍세까로 이동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계속 의용군 측은 오하묵 등의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지만 총사령관 갈난다라시빌리는 이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장교와 부사관을 합쳐 1백명을 1개 중대로 편성하면서 3개 중대를 1개 대대로, 3개 대대를 1개 연대로 편성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의용군 측은 150명을 단위로 1개 중대를 편성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6월 25일 총사령관은 구체적인 부대편성에 착수하였고 각 부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제1연대는 총군부(總軍府)와 합동민족연대(合同民族聯隊), 제2연대는 니항군과 독립군단(獨立軍團), 제3연대는 자유대대(自由大隊), 국민회(國民會), 독립군단, 본대는 이만군과 다만군이 각각 포함되었던 것이다.
군정의회의 이상과 같은 부대편성은 계획적으로 의용군의 병력을 분산하여 약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이에 의용군 측은 만주 출신 독립군과 사할린 의용대는 결코 분리될 수 없으니 같이 편성되도록 하여 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의용군의 병력을 분산시켜 전군을 장악하려고 기도하는 군정의회가 이들의 요구를 들어줄리 만무하였다. 이러한 군정의회의 처사를 계속하여 완강히 반대하여 오는 의용군에 대하여 군정의회는 강제로 무장해제를 단행할 것을 결정하고 6월 28일 부대를 수랍세까로 출동시켰다. 군정의회는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와 교섭하여 4개 중대의 적군 증원병력을 얻은 후 적군 2군단에 장갑차의 내원을 요청하였다.
이날 오후 6시까지 양군의 최후 담판이 결렬되자 끝내 비극은 발생하고야 말았다. 2대의 장갑차와 30여문의 기관총을 앞세운 군정의회 병력은 곧 의용군을 공격하였다. 약세에 처하고 있던 의용군은 교전 1시간만에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의용군 측은 272명이 전사하고 864명이 포로로 붙들렸으며 행방불명된 자가 250명에 이르는 큰 피해를 입었다.
● 이르쿠츠크로의 강제이송
무력(武力)으로 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강행한 군정의회는 포로 864명 가운데 5백명은 자군에 편입시키고 나머지 364명에 대해 심사하여 중대 범죄자로 판명된 72명은 이르쿠츠크로 압송하고 482명은 적군(赤軍) 제2군단에 넘겨 버렸다.
7월 5일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는 이르쿠츠크의 동양비서부로부터 한 통의 전보를 접수하였는 바 그 내용은 고려혁명군대(高麗革命軍隊)를 만주로 출동시킬 계획을 정지하고 이르쿠츠크로 입래(入來)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명령의 이유는 원동정부(遠東政府)와 일본간에 대련회의(大連會議)가 개최됨으로 국제상 문제에 관하여 부득히 중지함이라는 것이었다. 소련당국의 이러한 일방적인 처사는 모든 한국인을 격분케 하였다. 속히 만주로 출동하여 대일항전(對日抗戰)에 참전하는 것이 지상의 염원이었던 한국인 무장세력은 소련당국의 배신행위에 실망하여 일부는 이르쿠츠크행을 반대하고 탈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행은 강행되어 8월말에 이동을 완료하였다. 이때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순수 한국인 병력이 1745명이었다. 이 병력은 적군 5군단 관할의 1개 여단으로 편성되어 여단장에 갈난다라시빌리, 군정위원장에 박승만이 임명되었다. 그러나 10월 3일 갈난다라시빌리가 사면되고 새로이 여단장에 오하묵, 정치부장에 채동순(蔡東順)이 임명되었으며 동년 10월 28일 여단내에 6개월 수업기간의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2백명의 사관을 양성하였다.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軍官學校)의 교장은 이청천(李靑天)이었고, 교관은 채영(蔡英), 김승빈(金勝彬) 군정위원장은 선우정(鮮于政)이 각각 담당하였다.
● 이만에서의 한국의용군사회(韓國義勇軍事會)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을 피하여 은신하였던 이용(李鏞)은 1921년 7월 연해주에 도착하였다. 당시 이만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규면(金圭冕), 장기영(張基英), 박상춘(朴常春), 최기학(崔基學), 한운용(韓雲用) 등이 모여 있었으며 자유시사변 이후 이곳에 온 박일리야도 있었다. 이리하여 이만에는 다시 많은 한국의 무장세력이 집결할 수 있었다. 1921년 10월 29일에는 재차 한국의용군사회(韓國義勇軍事會)가 조직되어 위원장에 김규면이 임명되어 자금의 조달과 무기 구입에 노력하는 한편 한국의용군사령부(韓國義勇軍司令部)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이용, 참모장에 임표(林彪), 참모관에 한운용, 김홍일(金弘一)이 임명되었으며, 제1중대장은 임표, 제2중대장에 김홍일, 제3중대장에 한운용이 각각 선임되어 부대편성을 완료하였고 사관양성을 위한 한국의용군무관학교(韓國義勇軍武官學敎)를 설립하였다.
한국의용군은 적군(赤軍) 연해주사령부의 당국자가 그들의 백군(白軍) 소탕작전에 협력하여 주기를 요청하자 간부회의를 벌인 끝에 연해주사령부와 다음과 같은 군사협정을 체결하였다.
「첫째, 한국의용군은 적위군(赤衛軍)의 백당소탕전(白黨掃蕩戰)을 도와 참전한다. 둘째, 한국의용군의 장비와 식량 및 봉급은 적군과 동일한 대우로 소련 정부가 부담한다. 셋째, 본 작전간(作戰間) 급 작전 후에도 한국의용군은 그 모집 병력의 인원에 제한을 받지 않고 이들의 장비와 병력을 소련 정부가 계속 지원한다. 넷째, 본 협정은 소련 정부의 승인을 얻어 연해주사령관이 이에 서명한다.」
이 협정에 1921년 11월 12일 김규면이 한국의용군의 대표로 서명하였다. 그리하여 11월 13일 의용군의 제1중대와 제2중대가 곧 출동하였다. 적군 측으로부터 신무기 탄약 장비를 보급받은 의용군은 이만시의 서쪽과 우수리강변 사이를 작전지구로 맡았다. 이만 전투에서 제3중대장 한운용은 제1소대 45명과 함께 백군의 기병부대와 접전을 벌여 6백명을 사살하고는 전원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적군 병사들을 감탄케 하였으며 한국군의 용맹성을 널리 떨쳤다. 그 뒤 하바로프스크 공격전에도 참전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후 한국의용군은 하바로프스크 흑룡강(黑龍江) 북안(北岸)의 니꼴라예브까로부터 인스크 사이의 장장 5백리에 달하는 지역내의 철도 교량 및 지방치안을 유지하는 흑룡강 철도수비대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당시 한국의용군사령부와 적군간의 관계는 비록 소련 정부의 군수보급을 받고는 있었으나 의용군은 적군에 속한 부대가 아닌 어디까지나 적군(赤軍)과 대등한 위치에서 전후 장비의 지원 약속에 의하여 참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전후(戰後) 적군 측은 완전히 의용군을 배신하였던 것이다.
다시 이르쿠츠크파에 의한 모략이 의용군 내부에서 일어났는데 군정위원 모이세 박이 몇 사람의 노령 출신 장교들을 모아 사령관을 경질해야 한다고 선동하고는 사령관이 친일파인 장작림(張作霖)과 연락을 취하면서 부대를 이끌고 만주로 탈출하고자 기도한다고 모함하였다. 그리고 김하석(金河錫), 오하묵(吳夏默), 최고려(崔高麗) 등도 이르쿠츠크의 소련 비밀기관에 이용 등은 자유시사변의 책임자이며 장작림과 연락을 취하는 반혁명분자이므로 체포하여야 한다고 무고하여 급기야 이용(李鏞) 체포령을 소련 각 기관에 발송하였다. 사령관 이용은 할 수 없이 사직서를 남겨놓고 이만으로 떠났다. 소련당국이 참전 전에 의용군과 밀약한 장비의 보급, 군사 교육 등을 이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하묵 등의 모략으로 의용군의 입장은 대단히 난처하게 되었다.
● 이르쿠츠크 탈출기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적군(赤軍)에 편입된 만주 출신 독립군들은 당초의 목적인 만주로 출병하여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전개한다는 꿈이 사라지고 적군에 편입되어 버리자 탈출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특히 이들을 자극시킨 것은 연해주에서의 이용(李鏞)의 한국의용군(韓國義勇軍)이 백군(白軍)과의 싸움에서 선전을 펼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르쿠츠크를 탈출하여 어떻게 하면 연해주의 한국의용군과 합세할 수 있을까 궁리하게 되었다. 특히 일본과의 외교적 분쟁을 우려하는 소련 당국의 태도로는 만주로의 출병이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으며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 빈약한 급식은 더욱 이들의 탈출계획을 서두르게 하였다. 이리하여 채영(蔡英), 이다물(李多勿), 황하일(黃河一), 송세주(宋世柱) 등은 1차로 30명을 탈출시키고 2차로 다시 병력을 탈출시키려다가 발각되었다. 이것은 1922년 3월 9일의 일로서 이청천(李靑天), 채영, 황하일 등 14명이 피체되어 적군 제5군단 군사법원에서 군대 반란죄로 기소되어 구금되었다.
그 후에 이르쿠츠크 주재 오하묵(吳夏默) 등은 소련 당국과 협의하여 자기들도 연해주로 이동시켜 줄 것을 간청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용이 이끄는 한국의용군의 세력과 명성이 높아감을 근심하였기 때문에 자신들도 연해주로 가려고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22년 8월 15일부터 오하묵의 이르쿠츠크 주둔군은 연해주로 수송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의 당시 명칭은 고려특립연대(高麗特立聯隊)로서 적군의 지휘하에 들어가 있었다. 이렇게 되어 흑룡주(黑龍州)에서 있었던 자유시사변의 후유증은 다시 연해주로 옮겨짐으로서 재차 양군 사이에 불꽃 튀기는 분쟁이 일어났다. 그후 얼마 되지 아니하여 한국의용군은 결국 다시 무장해제를 당하고 많은 병력이 우수문 노동병으로 끌려가 혹사를 당하고 말았다.
● 한국인 군사단체의 무장해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이후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비롯한 많은 한국인 무장 단체가 적군(赤軍)에 편입되어 버렸으나 그래도 적지 않은 한국인 무장부대가 연해주 방면에서 일본군과 백군(白軍)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다. 이만에서는 이용(李鏞)과 김광서(金光瑞)의 부대가, 추풍(秋風) 방면에서는 신우여(申禹汝), 최경천(崔慶天), 김규식(金奎植)의 부대가, 니콜스크 방면에도 이병희(李炳熙), 장인혁(張仁赫)의 부대가 각각 200명~600명 가량의 병력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무장부대는 이때까지도 적군 측과의 약속을 신뢰하고 있었다. 즉 적군과 연합하여 백군을 격퇴한 후 적군의 장비지원을 받아 국내로 진입하여 대규모의 항일전(抗日戰)을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22년 10월 백군이 적군에게 완전히 제압당하고 동년 10월말에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병하였다. 이때를 기다리던 한국인들이 미처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소련은 한국인 군대에 대하여 강제로 무장해제를 실시하였다. 소련은 일시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한국인들을 이용하였다가 소기의 목적을 달하자 한국인 무장 세력의 존재가치를 부정하여 버린 것이다. 즉 한국인 부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함으로써 시베리아의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대일(對日) 국교상의 분쟁의 씨를 제거한 것이다. 비싼 피를 흘리고 대가를 얻지 못한 한국인 무장 세력은 소련 당국의 처사에 격분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인 부대는 만주 방면으로 적군의 눈을 피하여 이동하거나 무기를 은닉하여 후일 재기를 도모하거나 적군(赤軍)에 편입되어 버리기도 하였다. 이후 소련 당국은 적군에 편입된 자 또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를 제외한 전한인(全韓人)의 무장을 엄금함으로써 1923년 이후 시베리아에서의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은 종지부를 찍고 말았던 것이다.
4.독립군의 재정비(再整備)와 항일전(抗日戰)
● 통의부(統義府) 결성과 분열
1920년 독립군(獨立軍)의 계속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과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 및 청산리대결전(靑山里大決戰)에서의 대승전(大勝戰)은 한국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의 일대 쾌거였으나 그 뒤를 이은 일본군의 만주침입(滿州侵入)과 잔인한 보복행위, 독립군의 시베리아 이동, 그리고 시베리아에서의 적군(赤軍)의 배신행위로 발생한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등은 독립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와 가은 역경은 독립군 지도자들을 크게 각성시켜 이전의 분산적이고 개별적인 항일전(抗日戰)이 크게 역효과를 가져왔음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독립군 세력의 통합운동(統合運動)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즉 1921년 장백현(長白縣)과 무송현(撫松縣)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흥업단(興業團)·군비단(軍備團)·광복단(光復團)·태극단(太極團) 등의 4개 단체가 통합되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이 결성되고 김호(金虎)가 단장, 이은향(李殷鄕)이 부단장, 윤병용(尹秉庸)이 총무로 각각 취임하였다. 1922년에는 서간도(西間島)에서 활동하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광한단(光韓團)·한교회(韓僑會)·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등의 단체가 결합하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하였다. 그 후 이 대한통군부는 문호를 개방하여 8개 단체를 영입하고 1922년 8월에 남만(南滿) 독립군 통합기관으로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발족시켰다. 대한통의부는 남만의 민사(民事)·군정(軍政)을 시행하는 기관으로 발족하였는데 1923년 12월에는 이를 개편하여 군사방면에 주력할 것을 결정하고 동부(同府) 소속 독립군으로서 통의부 의용군(統義府義勇軍)을 편성하였다.
통의부 의용군의 주요 지휘관을 살펴보면 사령관에 김창환(金昌煥), 부관에 김창동(金昌動), 대대장에 강남도(姜南道), 제1중대장에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에 최석정(崔碩渟), 제3중대장에 최시흥(崔時興), 제4중대장에 이진산(李震山), 제5중대장에 김오봉(金嗚鳳), 독립소대장에 김우근(金宇根), 유격중대장에 김창룡(金昌龍)·문학빈(文學彬) 등이었다.
통의부 의용군은 대한통의부 결성에 참여한 각 독립군 부대를 통합·편성한 것이었다. 조직은 1개 대대(大隊) 산하에 5개 중대(中隊)와 독립중대인 유격대(遊擊隊) 및 헌병대(憲兵隊)의 7개 중대로 편제된 단일 지휘체계였으며, 각 중대는 3개 소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의용군은 대한통의부의 통치권을 수호하는 한편, 한국인사회와 국내를 무대로 하여 군자금의 모금과 친일파 응징 및 일제의 식민통치기관에 대한 기습공격 등을 수행하였다.
의용군의 계급은 장사(將士), 정사(正士), 부사(副士), 참사(參士)의 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지휘관인 중대장과 소대장의 복장은 중국군 장교의 복장과 비슷한 다갈색의 군복을 착용하였다. 군모(軍帽)의 휘장(揮帳)은 대한제국 시기의 태극기 모양으로 가운데 부분은 은과 구리를 섞어 만든 것이었다. 이외의 의용군 복장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으나, 통의부의 관할지역이었던 압록강 일대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의 복장을 조사한 일본 경찰의 기록에 의하면 쥐색 무명 군복에 중국 군대식 금장(襟章)과 편장(扁章)을 부착하고 중국 군대식 군모를 착용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군복은 한국인사회 부녀자들이 제조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통의부는 의용군의 편제와 계급 및 복장 등을 제정함에 있어 당시 남만주 일원을 무대로 할거하던 중국 동북지역 군벌 군대의 예를 원용·참고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의용군의 무장은 일반적으로 중국 군대식이었는데, 주된 무기로는 러시아식 보병총(步兵銃), 일본군 38식 보병총, 브로우닝 권총(拳銃), 일본제 26식 권총 등이 개인화기(個人火器)로 충당되었을뿐 아니라 폭탄도 소유·사용하고 있었다.
통의부 의용군은 효과적인 임무수행을 위하여 중대별로 각기 관할 구역과 특수 임무를 분담하고 있었다. 중대별 관할구역은 제1중대가 집안현(輯安縣)·통화현(通化縣) 일대, 제2중대가 환인현(桓仁縣)·관전현(寬甸縣) 일대, 제3중대가 환인현 북전구(北甸溝) 일대, 제4중대가 집안현·유하현(柳河縣) 일대, 제5중대가 흥경현(興京縣) 왕청문(汪淸門) 일대였다.
각 중대에는 정규 무장병력 외에 초모원(招募員) 등으로 불리는 예비인원도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의용군의 일본군 습격과 군자금 모금활동을 위한 정세조사 및 지형안내 등의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제5중대의 경우, 중대장을 보좌하는 내무·외무비서가 있었고, 기본편제인 3개 소대 외에도 예비소대장·참사·부사·중국 측 교섭원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참사와 부사는 의용군 운영을 위한 행정업무를 담당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따로 중국 측 교섭원을 둔 것은 통의부 및 의용군의 활동에 있어서 일제(日帝)의 직접적인 탄압과 공격에 못지 않을 만큼 커다란 제약으로 가로놓여 있던 중국 동북군벌과의 대외교섭을 경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는 복벽(復辟)을 그 이상으로 하는 전덕원계(全德元系)의 노년층 인사가 공화정체(共和政體)를 주장하는 신진인사와 대립 끝에 이탈하여 1923년 별도로 의군부(義軍府)를 설립함으로써 분열되고 말았다. 분열 이후 통의부와 의군부의 상쟁은 한국 민족운동의 비극이었으며 보수파(保守派)와 공화파(共和派)의 갈등이었다.
● 3부의 성립과 활동
통의부(統義府)와 의군부(義軍府)의 상호대립에 실망한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기관이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임을 자각하고 임정군무부(臨政軍務部) 산하의 군사단체로 활동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대표를 정부에 파견하여 전에 있었던 광복군사령부(光復軍司令部)의 전통을 계승하여 정부직속의 군사단체로 승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승인하고 부대명칭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 주만참의부(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로 하고 집안(輯安), 무송(撫松), 장백(長白), 안도(安圖), 통화(通化), 유하(柳河) 등의 각 현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맡도록 하였다. 참의부는 여러 차례 조직이 개편되었는데 1923년 창립 당시의 편제는 참의대장 겸 제1중대장에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에 최석순(崔碩淳), 제3중대장에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에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에 김창천(金蒼天), 독립소대장에 허운기(許雲起), 훈련대장에 박응백(朴應伯), 중앙의회의장에 백시관(白時觀), 민사부장에 김소하(金篠厦)가 각각 담당하였다.
이처럼 정부직속의 참의부(參議府)가 결성되었을 때 참의부에 가담하지 않은 단체들이 별개의 통합체를 구성하였는데 그것이 정의부(正義府)였다. 이 정의부에는 통의부의 일부와 군정서(軍政署)·광정단(匡正團)·의성단(義成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등 8개 단체의 연합체로서 1924년 11월에 결성되었는데 동부(同府)는 헌장을 마련하여 입법(立法)·사법(司法)·행정기관(行政機關)을 설치하여 지방 정부로서의 대규모의 행정조직을 갖추었다.
그리고 군사조직으로서 군사위원장에 이청천(李靑天)을, 사령관에 오동진(吳東振)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상비군(常備軍)으로서 8개 중대와 헌병대(憲兵隊) 및 민경대(民警隊)를 두었다.
군사위원장 이청천(李靑天)
사령관 오동진(吳東振)
부관 조송림(趙松林) 김기해(金基海)
경리 이성근(李成根)
제5중대장 안홍(安鴻)
제6중대장 문학빈(文學彬)
제7중대장 이규성(李圭星)
제8중대장 김창룡(金昌龍)
헌병대장 김창헌(金昌憲)
정의부의 군대는 동포 사회의 치안확보와 독립군으로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통한 일제(日帝) 세력을 공격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만주의 독립군은 일반적으로 의용군이라 불렸는데 정의부의 의용군은 김창환(金昌煥), 이청천(李靑天), 오동진(吳東振), 이진탁(李振卓)이 차례로 사령관 혹은 군사위원장을 맡아 활약하였으며 정이형(鄭伊衡), 양세봉(梁世奉), 문학빈(文學彬), 장철호(張喆鎬), 이규성(李奎星) 등이 중대장 또는 유격대장으로 직접 대일항전 전선에 참가하고 있었다. 상비군으로서 8개 중대 및 헌병대와 민경대를 두어 1927년 현재 7백명 이상의 병력을 가지고 모젤 및 브로우닝 권총 그리고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 농촌에는 군사보급회를 설치하여 매년 장교를 파견, 군사훈련을 시킴으로써 동포 사회의 부락 부락마다 독립운동의 준비 태세를 완비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상조계(相助契), 한교동향회(韓僑同鄕會) 같은 친일 단체를 분쇄하고 동포 사회 자체 내의 질서를 도모하기에 노력하면서 국내 진격을 수행하였다. 국내진공작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싸움이 1925년 3월 19일 초산(楚山)과 암동군(岩潼郡)의 경찰서를 공격한 사실이다. 이것은 참의부가 고마령전투(古馬嶺戰鬪)에서 일본 경찰대와 헌병대의 기습공격을 받고 42명의 사상자를 낸 직후이어서 더욱 뜻있는 항일전(抗日戰)이었다.
독립군은 3월 18일 밤에 3대를 편성하여 9월 새벽에 모두 공격하였다. 제1대는 예정대로 초산군 성면 마암리(摩岩里)와 추동리(秋洞里) 주재소를 공격하여 추동의 주재소를 소각하고 일본 경찰관 7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혔다. 제2대는 압록강변에서 일본 경찰대와 만나 싸워 예정대로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제3대는 벽동군 오북면의 여해동(如海洞) 주재소를 공격하여 니시카와[西川隆吉] 경부(警部)를 사살하고 주재소를 소각하였다. 그리고 장총 1정을 노획하였다.
이와 비슷한 대일항전(對日抗戰)은 정의부 창설이래 수없이 있었다. 그러나 1925년 6월 소위 삼시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된 후에는 참의부처럼 그 활동에 제약이 많아 용이하게 추진되지는 않았다.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의 경우는 정의부가 참의부만큼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정의부보다 참의부가 국경선 근방에 그 근거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참의부는 원래 군사단체로 출발하였으나 정의부는 독립전쟁도 중요했지만 동포 사회의 안녕 질서와 산업이나 교육의 향상도 돌보아야 하는 자치단체로 출발했다는 것에도 이유가 있었다.
한편 북만주에서도 독립군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1925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계열 등 10개 단체와 각 지역대표들이 영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에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여 통합기관으로 신민부(新民府)를 창립하였다. 창립 당시 동부의 조직은 다음과 같았다.
중앙집행위원장 김혁(金赫)
민사부위원장 최호(崔灝)
군사부위원장 김좌진(金佐鎭)
참모부위원장 나중소(羅仲昭)
외교부위원장 조성환(曺成煥)
법무부위원장 박성태(朴性泰)
경리부위원장 유정근(兪正根)
교육부위원장 정신(鄭信)
선전부위원장 허백도(許白島)
실업부위원장 이일세(李一世)
심판원장 김경(金儆)
그리고 신민부(新民府)의 군사조직은 총사령관에 김좌진(金佐鎭), 보안대장에 박두희(朴斗熙), 제1대대장에 백종렬(白鍾烈), 제2대대장에 오상세(吳祥世), 제3대대장 겸 별동대장에 문우천(文宇天), 제4대대장에 주혁(朱赫), 제5대대장에 장종철(張宗哲) 등이 각각 선임되어 편제를 이루었다.
만주 독립운동 단체는 모두 독립전쟁을 제1차의 목표로 하였던 만큼 자연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연 2기의 속성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여기서 배출한 인원은 도합 5백여명에 달했다고 하며, 김혁이 교장, 김좌진이 부교장, 박두희·오상세 등이 교관을 맡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중반기 이후에 재만(在滿) 독립운동 군사단체는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의 3부로 정리되었으며 3부가 정립하여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수행하였다. 잡다한 독립운동 단체가 3부로 정리되었으나 독립운동 단체의 대동통합(大同統合)이라는 민족적 요구에 의하여 계속 3부의 통합운동이 진전되었다. 그 결과 1929년 3부는 다시 개편되어 혁신의회(革新議會)와 국민부(國民府)로 재탄생되었다.
혁신의회는 정식 군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1년간의 과도기 조치로 결성된 것으로 1929년 5월에 해체되었으나 1930년 한국독립당 조직의 모체가 되었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소속 독립군으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편성하였는데 그 부서를 보면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에 이청천이, 부사령관에 남대관, 참모장에 신숙(申肅)이 각각 임명되었다.
한편 국민부는 1929년 4월 1일에 결성되었는데 처음에는 소속 독립군을 편성하여 군사위원장 이웅(李雄)이 사령관을 겸하고 그 휘하에 8개 중대가 편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년 9월 국민부가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으로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결성하고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편성하게 되자 동년 12월 이에 편입되었다. 이때의 조선혁명군의 편성을 보면 총사령관에 이진탁(李振卓), 부사령관에 양세봉(梁世奉), 참모장에 이웅이었으며 각 중대를 7대로 재편성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생하고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자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은 각기 중국의 무장단체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항일투쟁(抗日鬪爭)을 전개했다. 중국호로군(中國護路軍) 및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과 연합작전을 전개한 한국독립군은 사도하자전투(四道河子戰鬪),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 등에서 일만연합군(日滿聯合軍)을 격파하였으며 중국의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과 연합작전을 전개한 조선혁명군은 흥경성전투(興京城戰鬪), 영릉가성전투(永陵街城戰鬪) 등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5.한중합작(韓中合作) 반만항일전(反滿抗日戰)
●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편성.
1930년 7월에는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와 생육사(生育社)를 모체(母體)로 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창당되었다. 당시 북만주 교민들의 자치기관이던 한족자치연합회를 옹호하고 지도 육성하는 것이 이 단체의 성격이었다. 이 정당은 중앙당부에 6개의 위원회를 두고 지방에는 지당부(支黨部)와 구당부(區黨部)를 설치하여 활동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에는 홍진(洪震), 총무위원장에는 신숙(申肅), 조직위원장에는 남대관(南大觀), 선전위원장에는 안훈(安勳), 군사위원장에는 이청천(李靑天), 경리위원장에는 최호(崔灝), 감찰위원장에는 이장녕(李章寧) 등이 각각 취임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소속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편성하였는데, 1931년까지 북만주 중동철도를 중심으로 26개의 군구(軍區)를 설치하고 일제(日帝)와 대적하였다.
총사령관 이청천(李靑天)
부사령관 남대관(南大觀)
참모장 신숙(申肅)
재무담당 겸 외교관 안지산(安地山)
훈련대장 안광운(安光雲)
의용군 중대장 오광선(吳光鮮)
의용군 소대장 이춘정(李春正)
암살대장 이출정(李出正)
별동대장 한광빈(韓光彬)
헌병대장 배성운(裵成雲)
통신부대장 겸 검사역 신원균(申元均)
구국후원회장 권수정(權秀貞)
서기장 홍진(洪震)
이와 같이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이 결성되었을 때에 만주를 향한 일본군의 침략은 더욱 가열되었고 일본군과 만주국군이 공동 연합하여 북만주까지 침공하여 왔다. 이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1931년 11월 오상현(五常縣) 대석하자(大石河子)에서 중앙회의를 개최하고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당내의 일체 공작활동은 군사방면에 집중할 것과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을 중국 당국과 협의할 것을 결정하였다.
●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편성.
조선혁명군은 처음에는 국민부(國民府) 산하의 독립군이었는데, 1929년 9월 국민부 중앙의회에서 독립군을 당시 민족유일당조직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 소속으로 이관키로 결정함에 따라 지휘처가 변경되었다. 그 해 12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발전하여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으로 개편되자 독립군은 동당(同黨)의 소속 군대가 되었는데 이때 조선혁명당은 산하 독립군을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이라 부르며 독립시켰던 것이다.
조선혁명군의 모체는 정의부(正義府) 소속 의용군 6개 부대였으며 여기에 새로이 20개 부대를 증가시킨 것이다. 처음에는 10개 중대로 편성되어 각 지방에 주둔시켰는데 그 후 조선혁명군으로 개편된 뒤에는 10개 중대를 7개 중대로 개편하였다. 12월에 조선혁명군으로 정비, 독립되었을 때에 혁명군의 지도기관으로서 각 대대에서 대표자를 선출하여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군사위원회에서는 총사령관에 이진탁(李振卓), 부사령관에 양세봉(梁世鳳), 참모장에 이웅(李雄)을 선임하였고 종래의 10개 중대를 7개 중대로 편성하였다. 이 때에 제1중대장은 김보안(金輔安), 제2중대장은 양세봉, 제3중대장은 이윤환(李允煥), 제4중대장은 김문거(金文渠), 제5중대장은 이종락(李鍾洛)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그런데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내부에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그것은 내부에 사회주의자가 많이 침투하여 있었으므로 1930년 8월 조선혁명당 대표회의 때에 이들이 조선혁명당을 탈퇴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혁명군의 제5중대장 이종락도 이들과 동조하여 혁명군을 이탈하여 길림과 흑룡강 지역을 근거로 공산주의 혁명운동을 전개하면서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朝鮮革命軍吉江指揮部)를 설치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선혁명군은 문학빈(文學彬)을 대장으로 삼은 흑길별동대(黑吉別動隊)를 편성하여 당지에 파견하였다.
●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 결성과 대일항전(對日抗戰)
⑴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한중연합항일전(韓中聯合抗日戰)
① 연합군의 초전(初戰) 패배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야기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만주를 점령하고 괴뢰정권인 만주국(滿州國)을 수립하였다. 그 후 일본군은 만주국군과 합동하여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 군사조직에 대한 토벌작전을 본격화하였다. 이 때 만주방면에는 반만항일전(反滿抗日戰)의 기치를 든 수많은 중국 의용군이 편성되어 일본군과 만주국군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이들 군대는 예전의 장학량(張學良) 부대 일부와 보위단(保衛團) 또는 마적의 일부도 참가한 오합지졸(烏合之卒)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군대로서 통화 지방에 왕덕림(王德林), 풍점해(馮占海) 부대가, 흑룡강 지방에는 마점산(馬占山) 부대가, 합니하(哈泥河)에는 중국호로군(中國護路軍) 사령관 정초(丁超)가 여단장 고봉림(考鳳林)과 함께 일만연합군(日滿聯合軍)과 싸우고 있었다. 중국인과 한국인의 공동의 적인 일본군을 대상으로 하는 이들 중국군의 항전을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볼 때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의 성립이 박두하였음을 직감케 하는 것이었다.
1931년 11월 2일 한국독립당은 긴급중앙회의를 개최하고 일제의 만주 점령에 대처하여 새로운 활동목표를 설정했다. 이 회의에서 한국독립당은 모든 역량을 항일전(抗日戰)에 집중키로 하고 다음과 같은 3개항을 결의했다.
1.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하달하고 집중적인 군사행동을 개시한다.
2. 당내의 일체 공작은 군사활동에 집중한다.
3. 길림성 반일당국에 대표를 파견하여 연합작전을 협의한다.
이상과 같이 결의한 후 한국독립당은 동월 10일 각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려 소집과 징모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2일에 당 대표 신숙과 남대관을 중국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및 호로군 총사령부에 파견하여 사령관 정초 및 제2군단장 양문휘(楊文揮), 제3군단장 고봉림 등과 한중연합작전을 협의하게 하였다. 이 결과 동년 12월 11일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이청천 등이 중국군 수뇌부와 협의하여 다음과 같은 구체안을 마련하여 상호 협정을 체결하였다.
1. 한중 양군은 어떤 불리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상호 장기항전을 맹세한다.
2. 중동철도(中東鐵道)를 경계로 하여 서부전선은 중국군이 담당하고 동부전선은 한국군이 담당한다.
3.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시 후방교란은 한국군 장교가 담당하고 한국군에 수요되는 일체 물자는 중국군이 담당한다.
이로써 만주에서 한중연합군에 의한 대일항전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독립군은 앞서 발령된 총동원령에 의하여 소집된 병사의 훈련과 부대편성을 서두르던 중에 1932년 2월 12일에 일만군(日滿軍)의 기습공격을 받게 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다. 그들은 아직 부대를 재정비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장비도 채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 일만군은 2월 5일 하얼빈 방면에서 중국군을 격파하고 그 여세를 몰아 공군 편대의 엄호를 받으며 중동철도를 따라 진공하고 있었다.
한중연합군은 일면파(一面陂), 오길밀(烏吉密), 밀로점(密路岾), 동빈방정(東賓方正) 등지에서 일본군 및 만주국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나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여 참패를 당하고 사산되고 말았다. 이때에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이청천은 참모장 신숙과 더불어 의란(依蘭)에서 1개 지대를 거느리고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하여 통하현(通河縣)으로 퇴각, 부대를 수습하였다.
한편 별동대장 안종선(安鍾宣)은 중국호로군 제3군단장 고봉림(考鳳林)과 함께 3월 3일 하성(河城)을 일시 탈환하였으나 만주국군의 반격으로 패퇴하였고, 지상기(池上奇) 전북빈(全北賓) 등이 인솔하는 한국독립군 제4대대와 제5대대는 유지광(劉志光)이 이끄는 중국호로군 제4여단과 함께 한 달 남짓 교전하다가 일면파 이북지방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첫번째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이 이렇게 참담한 패배로 끝난 뒤 잠시동안 상호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러자 한국독립당은 쌍성현(雙城縣)에서 비상회의를 개최하고 각지에 흩어진 독립군을 다시 집결시키는 한편 중국군 고봉림 부대에 사람을 파견하여 계속 연합작전을 전개할 것을 통고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독립당의 수습책은 성공하여 1개월 미만에 독립군이 재집결하였으며 김창환(金昌煥)을 총사령관 대리로 임명, 부대를 재편성하여 훈련에 임하였다. 전력을 재정비한 한중연합군은 1932년 8월부터 본격적인 연합작전에 돌입하였다.
②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 3천여명과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2만 5천여명으로 편성된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은 합장선(哈長線) 철도의 요지이며 북만주 중요 물산의 집산지인 쌍성보를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9월 3일 총사령관 이청천(李靑天) 장군이 흑룡강 지방에서 부대를 인솔하고 오자 독립군을 다시 편성하고 김창환(金昌煥)이 다시 부사령관이 되어 19일 쌍성보를 향하여 진군하였다. 진군 도중 만주국군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3일 동안에 2백여리를 진격하여 쌍성보 남쪽 5리 지점에 있는 소성자(小城子)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고봉림(考鳳林)이 이끄는 길림자위군과 합세하여 치밀한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중국군은 동문과 남문을 공격하고 한국군은 서문을 공격하기로 결정한 후 공성전(攻城戰)을 개시하였다. 성내에는 만주국군 3개 여단 병력이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한국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퇴로로 남겨두었던 북문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문 밖에는 미리 이와 같은 사태가 있을 것을 예상하여 매복시켜 둔 연합군 병력의 공격으로 대부분이 사살되었다. 이 전투는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3만 병력이 3개월 동안 유지할 수 있는 많은 물자를 노획하였다.
전투에서 승리하고 많은 물자를 노획한 연합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으나 일본군 대병력의 반격이 있을 것을 고려하여 연합군의 주력부대를 쌍성보 5리밖에 있는 우가둔(牛家屯)으로 옮기게 하고 쌍성에는 소수의 부대를 잔류시켰다. 잠시 후 예상하였던 대로 일본군 대병력이 쌍성보를 공격하여 왔다. 연합군은 이를 맞아 용감히 싸웠으나 불행히도 중국군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 쌍성보를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쌍성보에서의 격전으로 일시 흩어졌던 연합군은 다시 부대를 재정비한 후 11월 7일 재차 쌍성보 탈환작전을 전개하였다.
한국군과 중국군은 부대를 좌익과 우익으로 나누어 쌍성보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한국군은 2백명을 단위로 부대를 15개로 편성한 후 선두에 서서 돌격하였으며 중국군은 탄환과 식량을 담당하였다. 오후 6시에 총공격을 개시하여 1개 부대는 정면으로, 1개 부대는 왼쪽으로, 1개 부대는 뒤편으로, 기관총대는 중앙으로 각각 진격하였다. 적군은 박격포(迫擊砲)를 쏘고 수류탄(手榴彈)을 던지며 완강히 저항하였다. 수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성안으로 침입한 한국독립군은 적진을 교란시켰으며 쌍성보 뒷산을 점령한 한국독립군 포병대가 시가의 주요 건물에 포격을 가하자 만주국군은 전황이 불리함을 깨닫고 전원 항복하면서 성문을 열어 연합군의 입성을 환영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1개 중대가 전멸되고 만주국군 수백명이 부상당했다.
두번째로 쌍성보를 탈환한 연합군은 입성 즉시 전리품을 정리하고 전장을 정돈한 후 주민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는 적군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11월 20일 일본군은 어김없이 보복전(報復戰)을 전개하였다. 하얼빈과 장춘(長春)에 주둔하고 있던 일만연합군(日萬聯合軍) 2만여명이 공군 편대의 엄호를 받으며 반격하여 온 것이었다. 이에 맞서 아군은 전병력을 7개 부대로 나누어 각 요충지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일본군의 반격에 대응하였다. 1주야를 두고 치열한 공방전(攻防戰)이 벌어졌는데 피아에 사상자가 속출하여 성 내외에는 전사자의 시체가 누적되면서 피바다를 이루었다. 21일 밤에 일본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어 아군의 방어선이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항공기를 이용한 일본군의 폭격으로 인하여 마침내 방어선이 적군에게 돌파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독립군은 22일 새벽까지 무너져 가는 전선을 독려하며 온갖 방법으로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중국군의 사기가 점차 떨어짐으로써 부득이 성을 적군에게 내주고 5백여리를 후퇴하여 충하진(沖河鎭)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의 피해도 막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패전에 낙담한 고봉림의 중국군이 적군과 단독으로 휴전회담을 개최하였다. 이에 이청천 장군을 비롯한 한국군 지휘관들이 이를 극력 만류하였으나 본래 신념이 약하고 형세에 끌리기 쉬운 중국인 집단인지라 고봉림의 중국군은 이익을 쫓아 이념과 의리를 버리고 일본군을 상대로 강화(講和) 협의를 계속하였다. 이에 한국군은 동월 7일 패전의 상처와 우군에게 배반당한 쓰라린 분노를 되씹으며 결연히 중국군과 갈라져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1월 29일 중앙회의를 개최하고 앞으로의 활동방침을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
1.군사활동 지점을 개정하여 동만주 지역에 한정하고 먼저 구국군(救國軍) 수뇌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연합작전을 협의함.
2. 각 군구에 수훈장정(受訓壯丁)을 다시 징집할 것.
3. 황학수(黃學秀)를 당군(黨軍) 부사령관으로 선정한다.
이와 같은 결정에 의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은 3명의 대표를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 총사령관 왕덕림(王德林)에게 파견하였으며 또한 남경(南京)에도 대표를 보내어 중국 정부와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을 협의하였다. 12월 25일 한국독립군은 중국구국군과 합세하여 경박호(鏡泊湖)에 진입하던 만주국군 유격대를 매복전(埋伏戰)으로 섬멸하였다.
③ 사도하자전투(四道河子戰鬪)
1933년 3월까지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은 사도하자(四道河子)에 주둔하여 병력을 증강시키면서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하여 한국독립군은 날로 증강되어 갔는데 이와 같은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은 한국독립군을 일거에 섬멸하려고 만구국군과 합세하여 공세를 취하였다. 4월 14일에 일만연합군(日滿聯合軍) 대부대가 진격하여 온다는 것을 전해들은 한국독립군은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과 더불어 적군을 포위, 섬멸하기로 하고 전부대를 4개로 나누어 제1로군은 소부대로 적군을 유인하게 하고 제2로군과 제3로군은 삼도하(三道河) 뒤에 있는 분수령과 좌우 계곡에서 대기하도록 하였으며 제4로군은 이도하(二道河) 입구에 매복하였다가 적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동시에 적군의 수송차량을 빼앗도록 하였다.
15일 새벽 적군의 약 1개사단 병력이 황가둔(黃家屯)에서 이도하 방면을 거쳐 사도하자에 진입하여 왔다. 이것은 적군이 아군의 유인작전에 빠져들어 온 것이었다. 때를 기다리던 아군이 일제히 박격포(迫擊砲)와 연발소총(連發小銃)을 쏘며 급습하니 적군은 미처 응전하지도 못한 채 무너져 갔다. 순식간에 적군 과반수가 쓰러졌으며 혼란에 빠진 적군 패잔병들은 어둠을 뚫고 도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아군의 손실은 극히 미약했으며 연도에는 적군이 버리고 달아난 총기(銃器)와 탄약(彈藥)이 부지기수였다.
18일 저녁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은 부대를 정돈하는 동시에 전리품을 수습하여 당당히 본영으로 개선하였다. 그리고 5월 2일에 연합군은 유격대를 각지에 파견하여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기습공격하였는데 대소 20여회의 전투에서 적병 1백여명을 사살하였다.
④ 동경성전투(東京城戰鬪)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은 승세를 몰아 이번에는 영안성(寧安城) 공격계획을 수립하고 먼저 동경성(東京城)을 공격하였다. 이 작전은 부대를 3개대로 편성하여 시행되었는데, 제1로군은 기병대로 편성하고 동목단강(東牧丹江) 연안의 골짜기에 진출하게 하여 적군의 후원부대를 공격하게 하였고 제2로군은 1개 여단의 병력으로 영안성과 동경성의 중간지점에 배치하여 먼저 교량과 전선을 끊어 적군의 후원부대를 저지하게 했으며 제3로군은 좌우익으로 나누어 직접 동경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6월 3일 밤에 작전계획대로 동경성을 공격하였다. 3시간에 걸친 총격전(銃擊戰) 끝에 일본군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문으로 도주하다가 우군의 복병에게 습격을 받고 전멸되었으며 만주국군은 여단장 운세재(蕓世材)만이 호위병 수명을 데리고 도주하였을뿐 모든 병력이 항복하였다. 이때 영안성에 있던 일본군은 한중연합군이 두려워 감히 구원병을 보내지 못하고 공포(空砲)만 쏘아댈 뿐이었다. 승전(勝戰)한 한중연합군은 성내로 들어가 주민들을 선무하여 안심시키는 한편 전리품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연합군 수뇌부는 영안성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동경성을 확보하기가 곤란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렇다고 일본군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영안성을 당장 공격하기에는 충분한 실력을 지니지 못했으므로 부득이 주력부대를 왕청(旺淸)과 동녕 사이의 산간지대로 이동하여 주둔시켰다.
이와 같이 한중연합군은 전투에 이기고도 점령지를 오랫동안 확보할 실력이 없어 곤란한 경우에 놓여져 있었다.
⑤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
동년(同年) 6월 28일에 한중연합군 전부대는 노송령(老松嶺)을 거쳐 진군했는데, 이때 대전자(大甸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연합군을 토벌하기 위해 접근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행동은 연합군에게 즉각 탐지되었다. 연합군은 곧 일본군을 맞아 교전하여 섬멸하기로 하고 대전자에서 5리 지점에 있는 노모제하(老母諸河)에 병력을 주둔시켰다. 연합군은 일본군이 7월 3일 대전자령을 통과한다는 것을 알아내고 2일 오후 6시까지 대전자령의 요지에 병력을 배치 완료하였다.
이 대전자령의 지형은 'Z'자로 된 험준한 고개인데 길이가 약 20리나 되는 골짜기가 있으며 그 양편에는 높이가 수백미터에 이르는 절벽이 솟아 있는 심산의 밀림지대이다. 이곳에 배치된 우군 병력은 이청천(李靑天)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 2천 5백여명, 시세영(蔡世榮)이 이끄는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 6천여명인데, 한국군 전원과 중국군 2천명이 전위부대로 편성되었으며 공격의 주동은 역시 한국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군은 연합군이 매복하고 있는 지점으로 들어왔다. 이케다 신이치[池田信吉] 대좌(大佐)가 인솔하는 일본군은 연합군이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 자연을 즐기며 소풍이라도 온 것 같이 꽃을 꺾어 들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대전자령을 반쯤 넘어 행렬의 끝이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한중연합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일본군은 미처 응전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사지(死地)에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다가 총탄을 맞고 쓰러져갔다. 4시간의 총격전으로 일본군은 전사자 1천 7백여명의 시체를 남겨두고 흩어졌다.
이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 승리는 한국인들의 무장항일투쟁(武裝抗日鬪爭)에서 특기할 만한 승전(勝戰)이었으며 한중연합대일항전(韓中聯合對日抗戰) 최고의 대승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 그러나 연합군은 전투 이후 군복 3천벌과 담요 3백장, 총포류(銃砲類) 1천 8백여정 등 많은 군수물자를 얻었지만 이 전리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양군 사이에 감정을 해치는 일이 생겨나게 되었다.
약 2개월간 휴식을 취하며 전력을 정비 보강한 한국독립군은 9월 1일에 동녕현성(東寧縣城)에 주둔하고 있는 만주국군을 단독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만주국군은 적절한 시간대에 지원을 해온 일본군 덕택에 한국독립군의 공격을 잘 막아낼 수 있었고, 한국독립군은 후속부대를 파견해 주기로 한 중국군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3일간의 전투 끝에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동녕현전투(東寧縣戰鬪)에서 패배한 이후 한중 양군의 불화는 더욱 심각해졌고 끝내는 중국구국군 제1사단장 오의성(吳義成)이 자신의 병력을 동원해 한국독립군 병영을 습격하여 무장해제를 시키고 이청천(李靑天), 조경한(趙擎韓) 등 한국군 간부들을 체포 구금하였다. 후에 양군 사이에 화해가 성립되어 구속된 한국군 간부들이 석방되었으나 한중연합군은 와해되고 말았다.
⑵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의 한중연합항일전(韓中聯合抗日戰)
① 신빈사변(新賓事變)
북만주에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이 중국구국군(中國救國軍) 등과 연합전선(聯合戰線)을 형성하여 대일항전(對日抗戰)을 전개하고 있는 동안 남만주에서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소속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이 별도로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을 결성하여 항일전(抗日戰)을 펼쳤다. 즉 1931년 일제(日帝)가 만주사변(滿洲事變)을 일으켜 만주를 침공하자 조선혁명당은 이 난국을 타개할 방안으로 한중연합전선구축(韓中聯合戰線構築)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김학규(金學奎), 김이대(金履大)를 당 대표로 선출하여 중국 민족주의 지도자들과 협의하게 하였다.
이들 양인은 번양(藩瀁)으로 가서 그곳의 중국국민외교협회(中國國民外交協會) 및 중국의 민간지도자들과 접촉하여 협의하였다. 이 양측회담에서 주로 논의된 사항은 재만한인(在滿韓人)의 국적문제와 더불어 한·중 양민족의 연합항일전(聯合抗日戰) 문제였다.
그 후 이 회담에서 논의된 것을 기초로 하여 조선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인 현익철(玄益哲)이 구체화시켜 동성한교정세(東省韓僑情勢)와 중한양민족합작의견서(中韓兩民族合作意멕?를 만들어 중국당국에 보냈는데, 그 내용에 대하여 중국인들은 열렬히 찬동하였다. 그러나 이 연합작전의 구축이 구체화되기 전에 현익철이 일경(日警)에게 체포됨으로써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1931년 12월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 간부들이 신빈현(新賓縣)에서 참모회의를 개최할 때 일본 헌병대의 기습공격을 받아 회의장에 있던 30여명의 간부중 이호원(李浩源)·이동산(李東山)·김보안(金輔安)·이규성(李奎星)·차용륙(車用陸)·전운학(田雲學)·장세명(張世明)·김관웅(金寬雄)·박치화(朴致化)·이종건(李鍾建) 등 10여명이 피체되는 비운을 맞이함으로써 치명적 타격을 받아 연합작전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신빈사변(新賓事變)에서 일제(日帝)의 독아(毒牙)를 피할 수 있었던 고이허(高而虛)·양기하(梁基瑕)·양세봉(梁世奉) 등 중견간부들은 이러한 불행에도 추호도 동요하지 않고 대원들을 규합하여 결전태세를 더욱 추진해 나갔다.
1932년 2월에 1개 중대 병력을 거느리고 관전현(寬甸縣)에 주둔하고 있던 양기하가 국내에서 북진한 평북 초산(楚山)의 일본 경찰대와 만주국군의 습격을 받고 전사하자 조선혁명군은 전면적인 개편을 단행하여 총사령관에 양세봉, 참모장에 김학규를 각각 선임하여 새롭게 대오를 가다듬고 본격적인 항일전(抗日戰)을 진행하였다.
② 영릉가성전투(永陵街城戰鬪)
1932년 3월 11일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은 참모장 김학규(金學奎)와 함께 조화선(趙化善)·최윤구(崔允龜)·정봉길(鄭鳳吉) 휘하 3개 중대 병력을 거느리고 이춘윤(李春潤)이 이끄는 중국의용군(中國義勇軍) 및 왕동헌(王潼軒)·양석복(梁錫福)이 인솔하는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과 합세하여 신빈현(新濱縣) 왕청문(旺淸門)에서 무순(撫順) 천금자(千金藉)를 향하여 진군하다가 12일 신빈 남쪽의 두령지(兜嶺地)에 도착하여 야영하였다. 이때 이 정보를 탐지한 신빈현성(新賓縣城)에 주둔중인 일본군이 중화기(重火器)를 이용하여 공격해왔다. 그러나 주변지리에 능숙한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은 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효과적인 반격을 전개하였고, 교전 1시간만에 일본군을 격퇴하면서 돌격전(突擊戰)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은 일시적으로 선점하였던 주변고지를 빼앗기고 퇴각을 거듭하였으며, 연합군은 계속 일본군을 추격하면서 신빈 서쪽에 있는 영릉가성(永陵街城)을 함락시키고 다시 일본군을 뒤쫓아 맹공을 가하여 상협하(上夾河)마저 점령하였다. 5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은 2백여명이 넘는 무수한 사상자를 내는 피해를 입었으며 총기(銃器) 1백여정, 군마(軍馬) 3십여필을 버려둔 채 후퇴하였다.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대적한 이 첫번째 전투에서 조선혁명군은 상당한 전과를 올렸으며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보다 더 큰 의의는 한중연합군이 협동작전을 벌여 획득한 이번 승리가 한·중 양민족이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여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공동운명체라는 의식을 높여주게 되었으며 정신적 유대가 공고해졌다는 점이었다.
③ 요령구국회(遼寧救國會)와의 합작(合作)
한중연합작전(韓中聯合作戰)의 첫번째 승리는 더 본격적인 한중연합전선(韓中聯合戰線)을 구축하는데 실마리가 되었다. 1932년 4월 20일 중국의용군(中國義勇軍)의 지휘관들인 당취오(唐聚五)·왕육문(王育文)·손수암(孫秀岩)·이춘윤(李春潤)·왕봉각(王鳳閣) 등이 환인성(桓仁城)에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높이 걸고 요령구국회(遼寧救國會)를 결성하여 항일전(抗日戰)을 계획하였다. 요령구국회는 정치·군사 양위원회를 두고 상무위원회 위원장 겸 정치위원회 위원장은 왕육문이, 군사위원회 위원장 겸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 총사령관에는 당취오가 각각 선임되었다.
반만항일전(反滿抗日戰) 무장 단체인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은 총사령부 아래 52개로 사령부를 두어 환인(桓仁), 통화(通化), 신빈(新賓), 집안(輯安), 해룡(海龍) 등을 비롯한 20여현을 관장하며 20만 대병력을 통솔하는 만주 최고의 항일군(抗日軍)이었다.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에서는 이들과 연합전선구축(聯合戰線構築)을 계획하고 당·군 대표에 김학규(金學奎)를 선임하여 요령구국회에 파견하였다. 김학규는 환인성으로 가서 왕육문·당취오와 협상하여 '중국과 한국 양국의 군민(軍民)은 절실히 연합하여 일치항전하고, 인력과 물력은 서로 통용하며 합작(合作)의 원칙하에 국적에 관계없이 그 능력에 따라 반일공작(反日工作)를 나누어 맡는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완성하였다.
이상의 결의안에 의하여 요령민중자위군 안에서 특수임무를 담당하는 특무대사령부와 선전임무를 담당하는 선전대대를 설치하고 이 두 가지를 조선혁명군 측에서 일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특무대사령부를 통화성(通化城)에 두고 양세봉(梁世奉)이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김광옥(金光玉)이 선전대대장이 되었다. 또한 요령구국회 선전부내에 한국인선전과를 두어 이곳에서 한글간행물과 합작(合作)이라는 이름의 신문을 발간하였다.
특무대사령부는 8개 특무대를 두고 만주 각지와 국내에 특무공작을 전개하였으며 전투에 임하여서는 선봉부대로 맹활약을 펼쳤다. 이어 계속 대원의 충원을 위하여 통화의 강전자(江甸子)에 조선혁명군요성군관학교(朝鮮革命軍要城軍官學校)를 설치, 운영하였는데 2천명의 인원이 교육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각 특무대 소관 지역내에 병농강습소(兵農講習所)를 개설하여 한국인 농촌청년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약 5만명이 수강한 강습소생은 조선혁명군의 후비병력(後備兵力)이었으며 2천명의 군관학교 수료생은 혁명군의 후보군관이 있다.
③ 조선혁명군의 쇠락(衰落)
1933년 5월 8일 일본군 2개 중대 병력과 만주국군 1천 5백명이 다시 영릉가성을 공격해오자 연합군은 이를 역습하여 2일간의 교전 끝에 적군을 격퇴시켰으나 연합군의 각 부대가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관계로 부득이 후퇴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다시 임강, 환인, 신빈, 유하 지방을 공격하였으며 또 중국군의 본거지인 통화로 진격하여 왔다. 중국군은 탄약(彈藥)의 부족과 훈련 미숙으로 일본군에게 대항할 수 없어 교전 수일만에 통화를 버리고 몽강의 산림지대로 후퇴하고 말았다.
수차에 걸쳐 승리한 일본군은 의기양양하여 6월 15일에 대병력을 동원하여 양대령(陽臺嶺)을 넘어서 흥경·청원 등지로 진격하여 왔다. 이에 대하여 조선혁명군 1천여명은 총사령관 양세봉의 지휘하에 청원에서 수비하고 중국의용군은 1만의 병력으로 흥경을 사수하도록 대비책을 세웠다. 조선혁명군은 기습적인 돌격전(突擊戰)으로 일본군 보병 1백여명을 쓰러뜨리는 전과를 올렸으나 일본군 항공기가 공중에서 폭격을 하는 데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이해천(李海天)·김일룡(金一龍)·박석원(朴錫源) 등 30여명의 대원이 전사했으며 수백명의 비전투원이 희생되는 비극을 겪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흥경을 사수하던 중국군마저 패퇴함으로써 조선혁명군은 부득이 분루를 삼키고 남산성(南山城)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7월 7일에 일본군은 또 다시 영릉가에 있는 석인구(石人溝)의 조선혁명군 사령부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조선혁명군은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 장군의 용감한 독전(督戰)과 조화선(趙化善)이 이끄는 제3로군의 지원으로 일본군 40여명을 사살하고 경기관총(輕機關銃) 3정, 소총(小銃) 80정, 중포(中砲) 1문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7월 중순에는 한중연합군이 무순현의 노구대(老溝臺)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 1개 연대를 공격하여 2일간에 걸친 격전 끝에 일본군 2백여명을 사살하거나 부상을 입히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일본군 1개 대대가 통화현에 주둔하고 있는 최윤구(崔允龜)의 제4로군을 공격하자 제4로군은 제3로군의 지원을 받아 적병 80여명을 사살하며 격퇴시켰다. 그러나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지닌 일본군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끊임없이 연합군을 공격하였으며 더욱이 항공기의 폭격은 아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한중연합군의 전력은 일당백의 사기와 훌륭한 전투 능력을 지녔지만 화력의 열세와 항공기를 지니지 못한 약점으로 적군을 완전히 제압하기 어려웠다.
특히 사방으로 포위망을 압축하며 집요한 공격을 전개하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점차 열세에 몰리게 되었으며 이와 비례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연합군의 사기는 저하되기만 했다. 따라서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은 어떤 기적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 빠져들었을 때 조선혁명군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큰 불행이 찾아왔다. 일본군의 밀정으로 활동하는 박창해(朴昌海)라는 부일한인(附日韓人)이 한중연합군을 직·간접적으로 후원하고 있던 중국인 지주를 매수하여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을 암살한 것이다. 항일투쟁(抗日鬪爭)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있던 조선혁명군에게 양세봉 장군 피살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김호석(金浩石)이 양세봉의 후임으로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다시 군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이때 조선혁명군은 개편되어 조선혁명군사정부(朝鮮革命軍事政府)로 바뀌었다. 조선혁명군사정부는 법무부, 민사부, 재무부, 외교부, 교양부, 특무부, 군사부 등 7개 부서를 두었으며 관할지방을 9개 군구로 나누었다.
이 당시 병력은 양세봉이 총사령관으로 있었을 당시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1935년에는 일본군이 만주국군과 합동으로 추계대토벌작전(秋溪大討伐作戰)을 전개하자 조선혁명군은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못 되어 다른 무장부대와 합세하여 전투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해 9월에는 조선혁명군 제1사단장 한검추(韓劍秋)가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 사령관 왕봉각(王鳳閣)과 집안현에서 회담을 갖고 한중항일동맹회(韓中抗日同盟會)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를 조직한 목적은 한국과 중국의 민족지도자들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일치단결하여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싸우자는 데 있었으며 한·중 양국인은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항일동맹회의 조직 구성은 정치위원회 위원장에 고이허를, 그리고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왕봉각이, 군사부총사령관에는 한검추가 각각 임명되었다.
이 조선혁명군의 활동은 실질적으로 1936년을 끝으로 막을 내렸는데 일부는 1938년까지 만주에 잔류하면서 대일항전을 계속하였다.
● 독립군의 관내(關內) 이동과 군사활동
한중연합군이 대전자령전투(大甸子嶺戰鬪)에서 승리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한중 양군 사이에 공산주의자들이 개입하여 간교한 이간질이 행하여지기 시작함으로써 양군 사이에는 틈이 벌어졌고, 결국 적색분자들의 이간질과 장병들 사이에 생긴 사소한 감정대립으로 중국군 지휘관 오의성(吳義成)·시세영(柴世榮) 등은 한국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행하고 이청천(李靑天)·조경한(趙擎韓)·최명록(崔明錄) 등 수십명의 간부를 구속하였다. 그러나 한국독립군 간부들의 항쟁과 한국독립당의 항의로 중국군도 차츰 오해가 풀려 간부들은 석방되고 독립군의 무기도 돌려주었다. 하지만 한국독립군은 그동안 중국군으로부터 받은 정신적, 물질적 피해가 너무나 극심하였으며 중국군에 대한 불신감을 씻어버릴 수 없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재만(在滿) 독립군이 극한적 상황에 빠져들었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와 교섭하여 독립군 간부들을 중국의 정규 군사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합의를 보게 되었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청천을 군사양성의 책임자로 할 것을 결정하고 독립군의 관내 이동을 지시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독립군 간부들은 긴급회의를 개최하고 앞으로의 진로문제를 협의하게 되었다. 회의 결과 중국군과의 합동작전은 믿을 수가 없고 정부의 지시가 있으나 부득이 부대를 관내 즉 중국 본토로 옮기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만주의 독립군을 일시에 이동시키기는 어려우며 또 10여년간 대일전투장인 만주지역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우선 간부 중 일부는 중국으로 들어가서 군관양성사업에 주력하고 독립군 중에 군관학교 입학지원자를 선출하여 보내기로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는 만주에 그대로 잔류하여 최후까지 일본군을 향한 유격전(遊擊戰)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33년 10월 20일경 이청천(李靑天)·오광선(吳光鮮)·최관용(崔寬用) 등 32명의 간부가 정부의 소환으로 중국 본토로 들어가고 잔여 부대는 최악(崔岳)·안태진(安泰振)의 지휘하에 목릉, 영안, 밀산(密山) 등 산림지대로 옮겨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한편 남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혁명군은 이미 1932년부터 간부진이 남경방면을 왕래하면서 중국 정부에 지원교섭을 벌였으며 남경(南京), 광주(廣州) 방면에 체류하면서 임시정부와 연락하다가 그대로 관내에 머물러 새로운 항일독립전쟁 준비에 헌신하였다.
한편 임시정부에서는 한국독립군 간부들이 중국 본토로 들어오자 우선 우수한 청년들을 선벌하여 중국군관학교의 낙양분교(洛陽分校)에 입교시켰다. 이때는 1934년 봄으로 한국인 훈련생 90명만으로 1개반이 특설되어 독립전쟁을 담당할 지휘관으로서의 훈련을 중국군 장교들과 같이 받게 되었다.
한국인 훈련생들은 모두 중국군관학교의 교과과정에 의하여 훈련을 받았는데 교과는 정치훈련과 전술에 치중되었다. 그리고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이청천이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참전했던 이범석(李範奭)이 특별훈련반의 학생대장으로, 오광선으 학생반장이 되었다.
이 한국인 특설반은 처음의 계획과는 달리 1년 후 제1기 졸업생을 내고는 끝나고 말았다. 원래 중국의 군관학교에서 한국 청년들을 교육한다는 것이 국제문제에 관련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대외적으로는 비밀로 하고 훈련생들도 본명을 감추고 가명으로 학적부를 작성하여 훈련을 시켰던 것인데 끝내 이것이 일본측에 탐지되어 버렸고 일본 정부가 중국 정부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하게 되니 중국 정부는 난처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특설반 훈련은 제1기 졸업생을 배출하고 폐지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 제1기 졸업생들은 임시정부의 사정으로 아직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편성단계에 이르지 못하였던 만큼 우선 중국군 장교로 임관되어 중국군 각 부대에 배속되었다. 이들은 1937년 중일전쟁(中日戰爭)의 개전과 함께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후일 한국광복군이 성립되었을 때는 광복군의 중견간부로 활동하였다.
1937년 7월 7일에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군은 중국과 전면전(全面戰)을 전개하여 중국 영토를 잠식할 계획을 갖고 이날 북평(北平) 부근 노구교(老溝橋)에서 야간훈련을 전개하던 중 병사 1명이 실종되었다는 구실로 느닷없이 부근에 있던 중국군을 향한 총격을 시작하였다. 이 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중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관동군(關東軍) 소속부대와 한반도에 주둔해 있던 제20사단을 파견하여 7·8월중에 북평(北平)·천진(天津) 지방은 물론 장가구(張家口)·석가장(石家莊)을 점령하였고 해군 병력을 출동시켜 상해(上海)를 점령하였다. 이렇게 되어 중일전쟁이 발발하였는데, 중국군은 일본군의 공격에 패전(敗戰)을 거듭하여 1937년 7월에서 1938년 12월까지 중국군 사상자가 110여만명에 이르렀고 이에 반하여 일본군 사상자는 70여만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중일전쟁이 개전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긴급 국무회의를 개최하고 대일항전책(對日抗戰策)을 강구하였다. 임시정부는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는 중국 정부와 협력하여 전쟁에 참가한다면 전쟁에 승리하였을 때 한국의 독립도 이루어질 수 있다 하여 적극적으로 참전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우선 군무부 내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독립전쟁 수행에 필요한 모든 계획과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으며 유동열(柳東說), 이청천(李靑天), 현익철(玄益哲), 김학규(金學奎), 이복원(李復源), 안공근(安恭根) 6명을 군사위원으로 선임했다. 이와 아울러 임시정부는 많은 독립군을 전쟁에 참가시키기 위하여 군인 및 군사간부 양성이 시급하여 특별예산을 마련하고 1개 연대 규모의 군대 편성과 군사간부 200명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또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단합회(團合會) 등의 단체들을 통합시켜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陳線)을 결성하고 임시정부의 대일항전 계획에 적극 참여하도록 하였다.
해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위원 신재홍(申載洪) 박사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