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두씨들의 모임
영남의 풍수와 대구의 역사지리를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임란 직후 우리 나라에 귀화했고, 천계(天啓:明 희종조 연호) 연간 (1620-1627)에 타계한 복야공(僕射公) 두사충(杜師忠)이 바로 그다. 임진 년에는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로, 또 정유년에는 비장(裨將)이라는 각기 다른 직함을 가지고 두 번이나 전란에 참여한 그는 주로 진(陳)터와 병영(兵營)터를 고르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마디로 지형 지세를 이용하여 전쟁을 유리하도록 이끈 일종의 풍수전략가였던 셈이다. 그런데 '두릉 두씨세보(杜陵杜氏世譜)'에 나오는 '제가창수시(諸家唱酬詩)'와 '동국동유록(東國同遊錄)'란을 보면 그야말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그와 교유(交遊)한 우리 나라 사람들이 송강 정철, 서애 유성룡, 백사 이항복, 우복 정경세 등과 같은, 하나같이 당대 최고의 인물들인 까닭이다. 근본적 으로는 물론 국난이 그들을 조우시켰겠지만, 이순신 장군의 7대손 삼도통 제사 이인수가 찬(撰)한 복야공 신도비문에 "우리 선조의 묏자리를 길지에 잡아주었으니..."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두사충의 풍수술이 그런 교유를 돈독히 하는데 적잖케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하기야 그 때까지만 해도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각종 풍수이론이 끊임없이 도입되고 있던 시기 인지라 풍수를 아는 양반관료들은 두사충의 지리술을 남다르게 신뢰했을 터이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문경시 동로면 적 성리의 연주패옥형(連珠佩玉形: 옥녀가 화장을 하기 위해 목걸이를 풀어 놓은 형국) 명당 얘기는 아무래도 문제가 많은 듯하다. 두사충이 우의정을 지낸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잡아준 명 당을 훗날 그 아들이 찾지 못해 오늘날까지도 비밀로 내려오고 있다는 것 인데, 두사충이 약포가 사거한 후에도 최소한 십수년간 멀쩡히 살아 있었 음을 감안하면 그 터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해괴하게 받아들여 지지 않는가. 사람에 따라 지세를 보는 안목도 다를 뿐더러 더군다나 전설 같은 얘기를 차분히 따져보지도 않고 무작정 그 터를 찾아나서는 얼풍수들을 보노라니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두릉두씨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두사충이 현재의 경상감영공원터(구 중 앙공원터)에 최초로 정착했다는 얘기 또한 의문스럽기는 매한가지다. 얘긴 즉, 임란 후 나라에서 그 일대의 터를 두사충에게 하사했는데, 1601년에 그곳에 경상감영이 들어서면서 계산동 일대의 땅(속칭 뽕나무 골목)과 맞 바꾸었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 당시에 안동에서 대구로 감영을 옮기기를 주장했던 체찰사(體察使)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과 두사충의 친분관계를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그보다 여러 해 전에 이 미 한음과 두사충은 평양에서 접후사(接候使) 자격으로 서로 만나면서 시 문(詩文)을 주고 받은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당시에 대구의 풍 수지리에 밝았던 두사충이 자신이 하사받은 땅이 감영터로 적격임을 알고 그곳을 양보한 후, 스스로 하천 범람의 위험이 더 높은 계산동 쪽으로(당 시에는 용두산-건들바위-반월당-동산동-달성공원앞-금호강을 잇는 큰 하천 이 있었음) 이거(移居)해 갔다고 충분히 상정해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에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다면 그것은 대구의 역사지리로 볼 때 매 우 중요한 내용임이 분명하다. 앞산 밑 현재의 경마장 서쪽 한 기슭에 그 가 명나라 황제를 향해 배례하기 위한 대명단(壇)을 설치하고, 또한 연재 (蓮齋)라는 아호를 모명(慕明)으로 바꿨으며, 그로 인해 대명처사(處士)라 는 호칭과 대명동(大明洞)이라는 지명이 생겨난 사실은 어찌 생각하면 그 의 개인적인 사안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하지만 감영터는 그 경우가 다르 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대동적인 삶을 위한 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단 그 터가 정해지면 그것이 읍성축조의 모양새에 끼친 영향 또한 지대했을 게 뻔하다. 더구나 어떤 방식으로든 두사충이 예의 그 풍수술로 감영건물 을 짓는데도 관여했을 것인즉, 우리는 대구(大丘)의 발전기에 그가 끼쳤던 영향력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자신의 유택(幽宅)을 지금의 수성구 만촌동 형제봉(兄弟峰) 자락에 마련하면서 또다시 당시의 대구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풍수사가 자신을 위해 직접 터잡은 곳인 만큼 세인들의 관심은 온통 그 터에 쏠리게 됐던 것이다. 그의 묘는 물론 좋은 터에 자리잡고 있다. 우선 묘가 들어앉은 판국의 내맥(來脈) 자체부터가 여간 예사롭지 않다. 저 남쪽의 비슬산에서 팔조령을 거쳐 줄곧 북쪽으로 치닫는 지맥이 용지봉과 두리봉 (경북고 뒷산)을 지나 담티고개와 모봉(母峰)까지 이르는데, 거기에서 갑자기 지맥이 서쪽으로 방향을 꺾는다. 그 급선회한 형제봉의 남쪽기슭만 놓고 보자면 마치 용이 머리를 돌려 그 근원을 돌아보는 듯한 회룡고조(回龍顧祖)의 형세다. 계좌(癸坐)의 복야공 묘 후맥에 서서 앞쪽을 한번 바라 보라. 안산(案山)을 이루는 이중, 삼중의 내맥 지맥 너머로 그 뿌리를 이 루는 용지봉과 비슬산 주릉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그 모습이 회룡고조 지세의 증표다. 그러고 보면 복야공은 이미 대구 전체의 지세를 머리속에 훤히 꿰뚫고 있었던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자신의 주거지로부터 (지금의) 신천을 건너고도, 또 남북 방향으로 길게 가로놓여 있는 (그 당시 의) 수많은 지맥들을 다 지나친 후, 그 먼 형제봉에까지 이를 수 있었으리오.
좌우 지맥이 일궈놓은 미시적(微視的)인 판국 또한 그런 빼어난 전체적 인 내맥상(來脈相)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 주봉(主峰)이 다소 낮아 그 지세를 선인이나 옥녀와 같은 사람의 형상에는 비유할 수 없지만, 판국 자 체가 마치 날개를 활짝 편 새의 모습을 닮아 생동감이 넘친다. 다만 아쉬 운 점이 있다면 판국내 명당수가 크게 모자라 보인다는 사실이다. 비록 형제봉 북쪽을 흐르는 금호강이 어느 정도 공배수(拱背水: 혈의 뒤쪽 산 너 머를 감싸주며 흐르는 물)의 역할을 해주고는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음양 이 부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판국내에서도 복야공의 묘는 골짝안 한가운데 지맥 위에 터잡고 있다. 때문에 그 중심성 만큼은 무척 빼어나다. 그렇다고 날갯죽지에 자리잡고 있는 문중의 여타 분묘들이 터를 잘못 잡았다는 뜻은 아니다. 그 문중묘역은 남쪽사면인데다 개개의 분묘 앞쪽 모든 방향으로 안산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에 눈에 띄게 나쁜 묘터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복야공 묘 바로 턱밑에 자리잡고 있는 두 기(基)의 분묘가 모두 복야공 묘와 똑같은 계좌의 좌향으로 앉아 있다 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복야공이 그 지맥에서는 계좌의 묘향(墓向)을 취해야 자손이 번창할 수 있다고 말했다지만, 후손들이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해도 크게 했다는 생각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풍수사였던 복야공 묘터마저도 실로 이해하기 힘든 황 당한 풍수설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가 원래 자신의 묘를 쓰고자 했던 곳은 지금의 터가 아니라 남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수성구 성동의 고산서당 터였다는 얘기다. 그 터를 아들에게 알려 주기 위해 함께 고산으로 향하던 중, 워낙 몸이 쇠약하여 담티재에서 그만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는데, 후일 바로 그 터에 고산서당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조작된 얘기다. 퇴계 이황과 우복 정경세가 그 서당에서 강회(講會)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산 서당이 세워진 시점이 1500년대 후반기로 추정될 뿐더러 풍수적으로도 고 산과 같은 독산(獨山)에 묘를 쓰는 바보는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복야공 묘터의 품새는 이미 과거의 그것에 전혀 견줄 바가 아니다. 담티재 도로가 넓혀지면서 판국 전체의 속기처(束氣處)가 크게 훼 손됐을 뿐만 아니라 주변으로 건물이 빽빽히 들어서 이제 더 이상 명묘로 서의 품위를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근본을 잊지 않는 다"는 뜻의 모명재(慕明齋) 만동문(萬東門) 편액에 씌어 있는 '百川流水必之東'이라는 글귀가 그렇게 마음에 와닿을 수가 없다. 아마도 그 글귀가 주는 가르침과 복야공의 모명정신, 그리고 회룡고조터가 묘한 일체감을 불 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리라.
<출처:이몽일의 영남 신풍수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