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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단편소설 페스티벌-하창수의 성자가 된 소설가.pdf
진리는 추악하다. 진리에 정복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겐 예술이 필요하다.
- F. W. 니체, <권력에의 의지>
예수는 실패한 소설가다. 지금의 어떤 문학평론가도 더 이상 그의 소설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떤 소설가의 소설은 불경과 신성모독이라는 혐의를 쓴 채 평론의 대상에서 제외되곤 하지만 예수의 경우는 정반대다. 언제부턴가 그의 소설을 다루는 자체가 불경이며 신성모독이 되어버렸다. 평론가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이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문학연구자들은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정당하지 못하다. 예수 본연의 모습을 들추어내는 데 있어 그들은 엄연히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이다. 듣는 이의 귀를 막막히 붙들어두었던 그의 숱한 은유들을 향해 이제 그 누구도 문학적 수사(修辭)의 돋보기를 들이대지 않는다. 아니 감히 하지 못한다. 대신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의 언설들을 금강좌에 얹어놓고는 날마다 머리를 조아리며 경배하고, 읽고 또 읽어 가슴에 새기려 한다. 오늘 그 어떤 걸작도 누릴 수 없는 영광이 그의 소설 위에 쏟아지고 있으며, 이는 볼썽사나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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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처음 소설가가 되려 했을 때의 일화를 우리는 기억한다. 다 알다시피 소설가가 되기 전의 그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목수일을 배우고 있었다. 소설가가 되려한다는 아들의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아비 요셉의 뇌리를 아쉬움과 두려움이 번갈아 스치고 지나갔다. 아쉬움은 목수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고, 두려움은 소설가로 살아가는 일 자체가 지닌 엄청난 고난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요셉은 아들의 형형한 눈빛에서 이미 설득의 기회가 사라졌음을 절감했다.
“내게서 목수일은 배웠다만, 나는 네게 소설가가 되기 위한 배움을 줄 수는 없다.”
“압니다.”
“찾아갈 사람이 있더냐?”
“있습니다.”
“누구더냐.”
“그는 광야가 끝나고 안식과 풍요의 숲이 시작되는 강변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의 아비는 아들의 얘기를 듣고 단번에 그곳이 요르단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강을 자신의 아들처럼 묘사한 이가 없었으므로 잠시 어리둥절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무어라 부르더냐?”
“세례를 베푸는 사람 요한이라 합니다.”
“음…….”
요셉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무겁고 음산한 기운이 그의 온몸에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요셉의 아들은 슬쩍 고개를 돌려 정오의 햇볕에 타들어가는 무화과나무를 바라보았다. 그의 귓전에는 방금 아비의 온몸에서 비어져 나왔던 신음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그 신음은 무화과나무 뒤편으로 길게 늘어선 감람나무 숲으로 시선을 옮길 때까지 계속 그의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코끝이 아렸고 눈이 따가웠다. 햇살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문득 아비를 따라 목재를 구하러 다니던 열대여섯 살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다. 멀리 바라보이는 시온산의 감람나무숲을 가리키며 아비가 그에게 말했었다. 저 숲을 보아라. 성자가 죽을 만큼 은밀하지 않느냐. 헬몬산의 백향목숲도 깊고, 상수리로 뒤덮인 길보아산도 은밀하지만 저 시온 앞에 서기만 하면 나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다. 인간의 모든 악행을 대신해 죽을 자가 있다던 신의 말씀이 정말 이루어진다면 그의 그 성스런 사멸의 정토는 바로 저 시온산 같은 곳이지 않겠느냐. 그리고는 요셉이 아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너를 얼어붙게 만든 산은 무엇이더냐. 아비의 물음에 예수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어떤 산 앞에서도 얼어붙은 적이 없었다. 모세가 신으로부터 열 개의 율법을 받았던 거대한 바위산 앞에서조차 그는 어떤 위압도 느끼지 않았었다. 차라리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헐벗은 에발산을 보면서 인간의 운명과도 같은 마음의 황폐가 떠올라 현기증이 일기는 했었다. 그리고 갈멜산의 관목숲 사이에서 본 사랑을 나누던 벌거벗은 남녀에게서 잠깐 마음이 흔들린 적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산은 그저 산일뿐이었다.
“그를 아느냐?”
요셉의 물음은 신음만큼이나 음산했다. 예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아비에 대한 까닭 없는 죄스러움이 밀어닥쳤다. 나는 무엇을 잘못한 것인가.
“얼마큼이나 아느냐.”
추궁하듯 아비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역시 예수는 답할 수 없었다.
“세례를 주는 자에게서 언설의 힘을 얻을 수 있겠느냐.”
요셉의 목소리는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예수는 숨을 삼켜 아랫배에 힘을 넣었다.
“세례자 요한은 물만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그는 깨우침이 중요하다 했습니다. 깨우침은 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칼로 된다 했습니다.”
“이미 만나본 것이냐. 그를 만나보았더냐. 그가 너에게 소설의 배움을 주리라 하였더냐.”
“마음을 발라 햇살 아래 널어놓는 말씀의 칼은 배워서 가질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이미 가진 것이라 했습니다. 다만 그는 칼을 벼리는 숫돌입니다. 하여 그가 없이는 언설의 힘을 날카롭게 유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스스로 숫돌이 되기 전에는.”
“얼마나 된 것이냐. 처음에 그를 찾아간 것이 언제였더냐.”
아비의 음성은 다시 무거워져 있었다. 그 목소리에서 분노를 읽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예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눈길을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숲 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숲 사이로 우물이 보였다. 우물곁에는 한 여인이 물을 긷고 있었다. 여인의 몸 전체를 검은 옷이 휘감고 있었다. 그 검은 옷 밖으로 드러난 하얀 손과 얼굴은 마치 그믐날의 어두운 하늘에 드리워진 은하수와 같았다. 그 여인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마리아는 마치 두 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듯 물을 긷던 손길을 멈추고 아들과 남편이 있는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 아들로 하여금 요르단강으로 가 세례자 요한을 만나게 한 것은 바로 그녀였다. 그녀의 의도대로 아들은 요한을 만났으나 그 결과는 그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아니 예수의 어미는 처음부터 요한을 잘 알지 못했다. 그녀가 믿었던 요한은 요한의 실체가 아니었다. 요한은 사제도 율법가도 아니었다. 물론 그녀가 아들로 하여금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를 찾아가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판단으로는, 스무 살이 된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생이었다. 그에게 신의 영광과 지혜를 가르쳐줄 수 있는 랍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를 만나고 온 뒤의 아들에게서 들은 것은 신의 영광과 지혜의 전수자인 랍비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것이었다. 아들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진언(眞言)이 아니라 잡설(雜說)이었다. 갑작스럽다는 것보다 더 갑작스러운 변화가 이미 아들에게서 일어난 뒤였다. 요르단강을 다녀온 뒤 아들이 그녀에게 들려준 것은 욥의 고난과 에제키엘의 저주가 아니라 뱀과 정사를 나눈 청년의 이야기였다. 더없이 아름다웠으나 뼈와 살이 바들바들 떨리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도대체 요한이란 자는 이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준 것이란 말인가. 사탄과 아담이 몸을 섞은 이야기를 왜, 무슨 의도로 들려준 것인가. 마리아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 낳은 아들인데.
“…….”
예수는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저자를 떠돌게 될 때 그는 저 여인에 대한 이야기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니, 자신의 행로를 바꾸어버린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저 여인의 기구한 삶이었다. 그녀가 요한을 만나러 가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그에게 말해주기 이전에 이미 그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있었다. 그것은 여전히 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독실한 경청자이긴 했으나 경청자에 머물지 않는 무엇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들은 것을 사람들에게 옮겨주는 일이었다. 옮겨준다는 것 - 그것이 중요했다. 듣기만 한다면 신만으로도 족했다. 그러나 옮기기 위해서는 그 신이 만들어낸 가공품들, 즉 인간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신보다는 차라리 당신의 피조물이 더 필요한 것이었다. 그의 관심은 신이 아니라 그 가공품들의 조잡하고 지리멸렬한 삶의 방향과 갈피없이 흔들리는 나약한 성정에 있었다. 영원히 사는 신에게는 처음부터 흥미가 없었다. 당신이 만들어낸 저 수많은 가공품들의, 술병의 좁은 주둥이와 같은, 그 주둥이를 들락거리는 파리와 같은 하찮고 비루한 목숨에 예수의 관심이 쏠려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비루하고 나약하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그들은 왜 가공품으로서의 삶에 만족할 뿐인가. 그들의 사전엔 왜 운명이란 단어만 있고 초월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는 그 질문에 대답해줄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답은 단식이나 기도나 명상만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신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지극히 일면적이고 이기적인 사건에 불과했다. 신의 말씀만으로는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병증을 깨닫게 해줄 수 없었다.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자신들이 얼마나 꾀죄죄한 삶을 꾸려가는지를, 그 이면에 무엇이 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것은 경전이 아니라 바로 소설이었다. 이해가 아니라 암송을 요구하는 경전은, 인간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을 수는 없다는 것을 예수는 절감하고 있었다. 삶의 전복(顚覆), 삶의 전도(顚倒)가 필요했다. 사제와 율법가와 랍비들은 입만 열었다 하면 순응과 당연함을 말할 뿐이었다. 죄 값을 치르는 것만이 신의 가공품으로서 해야 할 일의 전부라는 거였다. 랍비로서 그렇지 않은 인간은 요한, 오직 그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위대한 소설가였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소명을 요한 이전에 이미 철저하게 깨닫고 있었다. 험악한 입담을 가진 사람들의 입에서 자신의 어미를 향해 추행, 강간, 능욕 따위의 단어가 함부로 내뱉어질 때였다. 늙은이가 소녀를 능간했고 그 결과로 사탄의 그것과 같은 발칙한 검은 눈빛을 가진 아이가 태어난 거라는 얘기를 그가 처음 들었을 때 그는 이미 경전을 버렸고, 그것을 넘어서 있었다. 그때 그는 깊게 눈을 감고 어금니를 깨물었었다. 나는 저들에게 사랑을 말하리라. 저들의 아가리에 똥을 처넣는 대신 향기로운 철자들로 만들어진 꽃다지로 저들의 입안을 채우리라. 너희들의 신은 저주의 신도 징벌의 신도 아닌, 사랑의 신이므로. 사제에게 가 말하리라. 나의 아비는 나의 어미를 사랑했으며 그 사랑은 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아래도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저 황홀한 아가(雅歌)의 시인들이 사용했던 문법(文法)의 힘이라는 것을. 율법가들에게 가서는 이렇게 말하리라. 에녹과 엘리야의 죽음 없는 죽음을 신비화하지 말라, 그것은 승천(昇天)의 우화일 뿐. 그리고 나는 랍비와 담판하리라. 이제껏 행한 랍비들의 가르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씀의 끊임없는 계승을 위한 음험한 포석이 아니었던가. 그 계보의 기록이 경전을 이루고 그런 경전을 암송하기 위한 철자법의 교육이란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지금에나 이후에나 그 이어짐은 계속될 터인데 그것은 한낱 과거를 거울에 비추어 오늘과 내일의 방편을 구하자는 속셈일 뿐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그 끊어짐에, 그것을 끊음에 지극한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신을 저버리고 황야로 돌아가는 자의 헐벗은 등짝을 이야기함이 더 중요하지 않는가. 천국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최면을 걸기보다는 천사장과 창녀가 벗고 뒹구는 희극으로 사람들의 허리춤을 잡게 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 아닌가. 랍비란 무엇인가. 진리의 허를 찌르는 창끝에 녹슬지 않도록 기름을 발라주는 이가 아닌가. 사제와 율법학자와 랍비 앞으로 나아가 그들의 저 완고한 말의 성벽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내 어미와 아비 사이에 일어났던 그 놀라운 기적을 어찌 설파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랑하는 아들아.”
늙은 요셉의 휘어진 팔이 예수의 어깨 위에 올려졌다. 어느새 분노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에게는 아들의 의지를 꺾을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만은 알고 싶은 게 있었다.
“아들아, 나는 너의 지혜를 알지 못한다. 내가 네게 가르쳐준 것이라곤 모두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쓸모 있는 것들뿐이었다. 하루를 살아가는 데에 지혜까지 필요한 건 아니지. 그러나 이제 네가 가려는 그 길에는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하다. 그것은 하루를 사는 일이 아니라 천년을 사는 일이기 때문이다. 네게 천년을 살 지혜가 있더냐?”
“아버지, 걱정하시 마세요. 아버지는 옳았습니다.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한낱 나무의 열매와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천년을 사는 일과 맞닥뜨렸다 해도 지금 당장 천년을 살 지혜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루는 하루를 살 몫의 열매만으로 충분합니다. 내일 맺힐 열매를 오늘 걱정하지 말라는 것은 바로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아비는 희미하게 웃었다. 교묘한 언변이었다. 저자거리로 나가 이야기를 팔아도 배를 골을 일은 없으리라, 하릴없이 생각했다. 그러나 굶주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이들이 이야기를 파는 소설가가 되려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자고 자신의 아들이 목수에겐 목숨과도 같은 규구준승(規矩準繩)을 버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가거라.”
요셉은 손을 뻗어 아들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가기 전에 네 어미에게로 가서 그녀에게 네 발을 씻기도록 해라.”
예수는 아비의 말대로 우물곁의 여인에게로 갔다. 그가 우물가로 걸어오는 걸 본 마리아는 물을 길어 대야에 붓고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오자 그녀는 무릎을 꿇고 그의 발을 씻겼다. 훗날, 그녀가 왜 아들의 발을 씻긴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그 해석들 중에는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의 발을 씻긴 것은 앞으로 그가 걸어갈 험난한 길에 대한 상징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는 극히 소수의 의견일 뿐 대다수의 해석가들은, 그러니까 예수가 결코 소설가가 아니었다고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의 발을 씻긴 행위를 그의 아비와 어미가 그의 성스러움을 향해 올린 경배였다고 해석하며, 경전은 그렇게 기록해놓고 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요한의 움막에서 기거하기 시작한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소설가가 되기 위한 특별한 수업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는 수삼 년 전부터 요한과 함께 기거하며 요한으로부터 소설수업을 받고 있던 사람들에게 헬라어를 곱트어나 히브리어로 옮길 때 일어날 수 있는 미묘한 의미의 차이 같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물론 세례자 요한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이도 어리고 정규수업을 받은 적이 없는 예수와 요한의 제자들은 사사건건 부딪쳤다. 그 중에서 가장 충돌이 잦았던 것은 훗날 예수를 열렬히 믿고 따르게 되는 세 사람 중의 하나인 요한이란 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스승인 세례자 요한과 구별하기 위해 작은 요한이라고 불렀는데, 예수가 강변의 움막으로 들어갈 당시 그는 성자의 출생과 관련된 우화를 창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비의로 가득 찬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그 주된 내용은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의 임신에 얽힌 것이었다. 그 묘사가 얼마나 정치하고 교묘했던지 듣는 이로 하여금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사실적이었다. 예수에게 있어서 작은 요한의 그 소설은 남다른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데가 있었다. 성인의 출생에 얽힌 그 비밀은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화와 거의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불임녀가 임신하게 될 거라는 신의 계시를 전해 받은 그녀의 몸종이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일시적으로 벙어리가 된다는 대목이었다. 사실, 예수와 작은 요한이 가장 격렬하게 부딪친 것이 바로 그 대목이었다. 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몸종의 입을 막아야만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예수가 따지고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질문에 대한 작은 요한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 소설에서 불임녀의 몸종은 입이 싼 인간들을 상징하는 것이고, 은밀한 계시의 의미를 깨닫기 전에는 그런 자의 입에서는 결코 올바른 전언이 나올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라는 거였다. 이에 대해 예수가 들고 나온 것은 ‘동어반복’의 논리였다. 사실 예수가 문제 삼는 것은 임신한 불임녀의 몸종이 벙어리가 된다는 설정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성자의 신비로운 탄생 우화 자체를 문제 삼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수천 년 전부터 수없이 반복 사용되어온 것이며, 이는 신비를 조직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거였다. 그것은 소설의 본질적 가치인 새로움의 발견에는 하등의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게 예수의 생각이었다. 이에 대해 작은 요한은, 결국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신의 의지이며, 신의 의지를 명확하고 또렷이 알리기 위해서는 신의 의지로 삶의 지표를 삼는 성자가 필요하며, 따라서 그런 성자의 신비로운 출현은 몇 번이나 반복되어도 상관없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예수는 단호하게 반박했다. 그 같은 생각은 결국 ‘대중의 기호에 철저히 영합’하는 것일 뿐이라는 게 반박의 요지였다. 둘은 팽팽하게 맞서 있었다. 양보나 타협은 요원했다. 그런데 주먹다짐 일보직전까지 간 둘은 식객으로 움막에 잠시 머물고 있던 유다란 자에 의해 극적으로 화해를 하게 된다. 그는 가리옷 사람으로, 움막사람들 사이에서 ‘신실(信實)한 자’로 존경받고 있었다. 훗날 예수를 중심으로 하나의 조직이 형성되었을 때 그가 그 조직의 경리일을 맡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가리옷 유다가 작은 요한과 예수를 향해 던진 화두는 소설이 아니라 소설가의 문제였다.
“이보게들, 그대들은 지금 소설만 문제 삼을 뿐 정작 그를 쓴 사람은 간과하고 있네.”
유다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예수와 작은 요한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모두 직감적으로 그가 어떤 얘기를 할 것인지 이미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허를 찔려버린 그들은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가리옷 유다의 가라앉은 목소리만이 냉랭하게 움막 안을 휘돌았다.
“같은 소설을 누가 읊는가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은 달라지지. 반응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그 감동까지 달라지거든. 거두절미 그건 소설의 힘이 아니라 소설가의 힘이지. 세상에 존재하는 위대한 소설들에서 만약 창작자의 이름을 지워버린다면 아마도 그것들 대부분은 썩은 감람나무 열매처럼 우수수 떨어지고 말걸.”
그렇게 간단히 수습이 된 듯했다. 유다가 예수를 향해 그 다음 말만 던지지 않았더라도.
“그대가 문제 삼고 있는 그 소설의 작자가 만약 작은 요한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이었다 해도 그렇게 통렬하게 비판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유다의 수습은 성공했다. 유다의 얼음같이 차디찬 질문에 예수가 어떤 반응도 보이질 않은 채 침묵을 지켜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예수는 분명히 가리옷 유다의 질문에 “물론 비판했고말고,” 라는 대답을 했었다. 다만 그 소리를 입 밖으로 내놓지만 않았을 뿐이었다. 대신 예수는 거기서 가리옷 유다의 사람됨을 간파할 수 있었다. 유다는 냉철한 비판가였으나 그가 비판의 칼을 들이대는 것은 내용보다는 형식 쪽이었다. 그는 신비의 내용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누가 그것을 사용하는가에 따라 세상의 인심이 움직인다는 사실, 그 자체에만 그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현실의 모순을 꿰뚫어보는 자였다. 그에게 소설보다 소설가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현실의 모순과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설’을 읽을 뿐이라는 것. 그러나 예수의 생각은 그와는 정반대였다. 예수에게 있어서 소설은 민중들로 하여금 피폐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판타지이자 이상이었다. 중요한 것은 소설이지 소설가가 아니었다. 물론 유다의 비판 역시 소설보다 소설가의 힘이 지배하는 문단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유다는 자신이 판 그 함정에 그 자신이 걸려든 꼴이었다. 그는 더 이상 소설의 힘을 믿지 않게 된 것이었다. 엄밀히 말해 그는 작은 요한과 예수의 싸움에 끼어들어 중재를 한 것이 아니라 두 종류의 이상주의자를 한꺼번에 질타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기실 세례자 요한의 움막에 기거하는 소설가들 대부분은 이상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유다를 식객으로 존숭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유다로부터 은연중 자신들의 무딘 현실감각을 검증받고 있었던 셈이었다.
움막생활을 하는 동안 예수가 가장 즐거워한 것은 해질녘 요르단강변에서 행해진 세례자 요한의 강설(講說)이었다. 강설이란 ‘소설을 읊다’라는 단순한 뜻을 지니고 있었지만, 요한의 경우에만 배타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였다. 해질녘의 강설에는 적어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때로는 그 길이가 움막에서 강가 쪽으로 2,3 쇠누스는 실히 될 정도로 많은 독자들이 운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를 움막사람들은 특히 ‘양떼구름같이 몰려들었다’고 표현했다. ‘양떼’와 ‘구름’이라는 두 개의 단어를 합쳐서 구름떼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음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었다. 예수가 실제로 그런 광경을 목격하게 된 것은 유월절 기간 중에 있었던 강설 때였다. ‘양떼구름’이라는 표현이 참으로 어울린다 싶을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하지만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 대부분은 안식일 동안 여행할 수 있는 거리를 넘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어떻게 알았는지 치안부대의 군사들이 요르단강으로 와서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그에 항의하면서 소요가 일어났다. 군인들 중에 요한의 열혈독자들도 끼어 있어서 큰 사고 없이 강설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그날의 강설은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는데, 사람의 일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어서 그것이 그의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될 줄은 그때 그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있지 않아 요한은 헤로데에게 강설자로 초청을 받게 된 것이었다.
“선생님, 저도 함께 갈 수 없습니까.”
요한이 헤로데의 왕궁으로 초청을 받아 떠날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막대기로 움막 바닥에다 뭔가를 긁적이고 있던 예수가 스승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예수와 눈이 마주친 스승은 가볍게 웃어주었다. 그는 누덕누덕 기운 자국이 유난히 많은 평상옷을 막 벗은 뒤였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그의 몸이 웬일인지 제 빛을 잃고 있었다. 피부가 유난히 희고 맑아서 요르단강에서 멱을 감을 때마다 움막사람들로부터 아이 같다고 놀림을 받곤 했었는데 그의 살갗은 간이 나쁜 사람의 그것처럼 거무튀튀했다.
“걱정이 되어서더냐?”
예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헤로데냐, 아니면 나냐.”
예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헤로데가 우유부단하여 간관의 무리에 곧잘 놀아나고 유대 사제들의 농변에 곧잘 속기는 하지만 그는 문자의 힘을 아는 자다. 사실 그와 나는 처음 만나는 것이 아니다. 수년 전 내가 스승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갔을 때 그를 만난 적이 있다. 내가 반년 넘게 소설을 배웠던 자케우스는 헤로데와 절친한 사이였다. 나는 그가 읊어주었던 오비디우스의 시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말을 하면 그것들이 모두 저절로 시가 되었다는 로마의 시인 말이다. 나는 그때 보답으로 전도서의 구절들을 풀어서 읽어주었는데, 그는 헤어질 때 내게 오비디우스의 시가 적힌 파피루스를 선물로 주었단다. 그가 지금 나를 궁으로 초청한 것은 모두 그 인연과 관계가 있다. 그러니 헤로데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제가 만약 걱정을 한다면 헤로데나 선생님이 아니라 두 사람의 우정을 시기하는 한 여인 때문입니다. 허나 그것도 걱정은 아닙니다. 모든 것은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고, 모든 일은 그렇게 일어나도록 꾸며져 있을 뿐이니까요. 작은 뼘 하나를 뻗으면 닿을 수 있는 미래조차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모든 일이 일어난 뒤에야 우리는 땅을 치고 울분을 터뜨리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걱정 때문이 아니라 궁금해서입니다.”
“예수야, 너는 무엇이 궁금한 것이냐.”
예수는 고개를 숙이고는 움막 바닥에다 막대기로 무언가를 썼다. 그것은 히브리어의 첫 글자인 알레프였다. 요한은 예수의 손길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스승의 손에는 기운 자국이 별로 없는 희고 긴 옷이 들려져 있었다. 이제 그것이 앙상한 그의 몸에 걸쳐지면 그의 생애는 마지막을 향해 걸어가게 될 것이었다. 우정을 시기한 한 여인에 의해 위대한 소설가의 목이 잘려 쟁반 위에 올려지게 될 것이었다. 요한은 움막 바닥에다 쓴 제자의 글씨를 응시했다. 그것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인 베트였다. 알레프와 베트. 첫 글자와 두 번째 글자. 처음과 나중. 하나와 둘. 나와 우리.
“선생님의 마음입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선생님은 무엇을 알고 있는 것입니까.”
요한은 조용히 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아무 대답도 없이 앙상한 자신의 뼈 위에 수의(壽衣)를 씌었다. 그는 움막을 떠났고, 밤이 깊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나의 세상은 그렇게 끝났다. 알레프가 끝났다. 그것은 베트의 시작을 의미했다.
요한의 갑작스런 죽음 뒤에 움막을 떠나 예수를 따라나선 것은 모두 네 사람이었다. 요한의 수제자로 예수를 움막으로 데려오는 데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던 안드레가 그 하나였다. 그는 요한의 움막으로 오기 전에는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움막에 기거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부였고, 안드레와 형제이거나 동료였다. 훗날 예수의 신화를 완성한 인물인 시몬 베드로는 그의 형이었다. 야고보도 안드레와 함께 예수를 따라 움막을 떠났다. 예수와 잦은 시비를 벌였던 작은 요한도 예수와 동행했다. 빌립이 마지막으로 예수와 함께했다. 가룟 유다는 요한의 마지막 날 이전에 이미 움막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뒤였다.
“어디로 가야 하지?”
스승을 여의어 그 눈빛에서 총기와 갈피를 잃어버린 네 사람이 예수를 향해 동시에 물어댔다. 예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요르단 강 건너를 묵묵히 응시할 뿐이었다. 참지 못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예루살렘으로 가자. 유다가 우리들의 거처를 마련해줄 거야.”
마음이 너그러우나 슬픔이 많은 빌립이었다. 예수는 빌립의 말을 물리치듯 강 건너를 향해 길게 손을 뻗었다.
“우리가 지금 필요한 것은 강고한 인내입니다. 강하고 굳은 인내를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든 우리들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강 건너라면, 사막으로 가자는 얘기인가?”
야고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막 얘기가 나오자 빌립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맺혀 있었다. 사실 빌립의 눈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학이었다. 가령, 훗날, 그러니까 소설가 예수에게 성자의 가피가 씌어진 뒤의 어느 해, 빌립은 로마인들이 히에라폴리스라 부르는 파묵칼레 평원에서 순교라는 이름으로 처형을 당하는데, 그때 빌립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소재로 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한꺼번에 만들어졌다. 어떤 이야기꾼은 그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 올리브나무가 자랐고 그 자리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그 교회에서 수많은 이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지어 전했고, 어떤 이야기꾼은 그의 눈물이 터키를 흐르는 열다섯 개의 강으로 고루 퍼졌는데 그 강이 닿지 않는 곳은 모두 사막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어떤 이는 로마와 아랍의 신화를 빌립의 눈물과 뒤섞어 정체불명의 소설들을 만들어냈으나 그 대부분은 지극히 감상적이어서 문학적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물론 경전 속에 존재하는 빌립의 눈물은 한없이 성스럽다. 그 중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은, 예수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굶주린 자들의 배를 채워준 기적의 자리에서 흘린 빌립의 눈물일 것이다. 그 놀라운 광경을 보면서 빌립은 예수에게 품고 있던 일말의 회의를 완전히 걷어내게 되며, 아쉽게도, 그것은 예수를 더 이상 소설가로 묶어두지 않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사막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를 말해보게나, 나의 친구여.”
예수는 야고보의 눈을 한동안 지그시 바라보았다. 예수는 파피루스 보따리를 짊어진 작은 요한의 손을 또 한동안 가만히 쥐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손을 풀어 안드레의 손을 끌어 잡았고, 마지막으로 빌립의 떨리는 손을 감싸 안았다. 예수의 시선은 야고보의 눈으로 다시 돌아왔다. 야고보는 마치 눈싸움을 하는 어린아이처럼 눈꺼풀을 깜박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 잘 웃지 않는 예수와 눈을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힘겨운 일이었는데, 그날따라 그 불편함은 더했다.
“소설가에게 가장 중요한 장기(臟器)가 무엇입니까.”
야고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튼튼한 비위, 강인한 심장, 굳센 간입니까. 형형한 눈빛과 두둑한 배짱입니까. 아니면 날렵한 혀입니까. 힘줄이 불끈불끈 살아 있는 근육과 햇볕에 타들어간 건강한 구리빛 피부입니까.”
네 사람의 침묵이 얼마나 깊었는지 잔잔한 요르단강의 물결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올 정도였다.
“사람들은 우리들의 몸으로부터 감동하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강인한 육체로부터 감동받는 것이라면 우리가 영혼을 단련할 필요는 없겠지요. 우리의 혓바닥은 군병의 창칼도, 사제와 율법가들의 금박 입힌 경전도, 창녀의 아랫도리도 아닙니다. 소설은 전쟁을 얘기하지만 무기가 될 수 없고, 신을 얘기하지만 은총이 될 수 없으며, 욕망을 얘기하지만 배설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쟁과 은총과 욕망을 얘기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혀는 군병의 창칼에 베이지 않고, 율법가의 금박 입힌 경전보다 눈부시며, 창녀의 아랫도리보다 달콤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기기 위한 전쟁을 요구하지 않고, 신의 은총을 사고팔지 않으며, 욕망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한 것은 몸이 아니라 영혼인 것입니다.”
예수의 안광은 네 사람의 눈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젖을 빠는 아이들이 거머쥔 어미의 유방과도 같은, 사람들의 영혼을 진정으로 비육(肥育)하는 이야기를 짜내는 순수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우리의 몸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만약 우리의 몸 어딘가에 있는 것이라면 여러분이 원하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를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몸 어딘가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러면, 광야에 있는가?”
빌립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광야에 있고, 깊은 산중에 있습니다.”
“우리의 스승은 저자거리로 나가 강설하라 했네. 광야나 산중이 아니라.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자거리의 독자가 아닙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이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허공을 휘젓는 예수의 팔을 붙들며 요한이 나섰다.
“광야로 가서, 산중으로 가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대의 말대로 인내를 위한 것인가. 광야가 우리를 인내하게 하고 산중이 우리를 인내하게 하는 것인가? 혹시 그대는 스승의 누더기와 때 없는 결식(缺食)을 잊었단 말인가. 도시로 나가도 우리의 인내는 이미 쓸 만큼 쓰다네. 돼지의 쓸개만큼 쓰단 말일세.”
요한의 팔에 붙들린 채 예수는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내가 이들을 왜 설득하려는 것일까. 나는 홀로 광야로 가고, 홀로 산중으로 가면 될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움막의 사람들을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길이 있었다. 그 길을 그가 함께 가야할 이유는 없었다. 길이란 문장과도 같았다. 그것은 이미 사람마다 다르게 되어 있었다. 같은 길을 강요함이란 같은 글을 써야한다는 주장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감동을 강요하는 일만큼 어리석은 짓이었다. 물론, 머지않아 다시 그들은 예수의 길지 않은 생애 동안 같은 길을 가게 되지만, 그들과 동행하지 않고 광야로 들어가려는 예수를 보며 그때 그들은 그것이 그와의 영원한 이별이라 생각했었다. 사실 네 사람은 그때 예수의 행동을 잘 이해할 수 없었고, 더러는 실망을 넘어서서 분노까지 느끼고 있었다. 그동안 잦은 충돌을 통해 오히려 돈독하게 정을 쌓아왔다고 생각하고 있던 작은 요한은 다른 사람에 비해 예수에 대한 실망의 정도가 더 컸다.
“친구여, 그대에게 내렸던 내 판단 하나를 깨끗이 지워야겠네. 그대는 누구보다도 우애와 사랑에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우리를 저버리는 걸 보니 사람을 잘못 보아도 한참이나 잘못 보았군.”
예수는 손을 뻗어 요한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요한은 손을 뒤춤에 감추었다.
“소경이 어찌 소경을 인도할 것이오.”
예수의 그 말은, 지금은 우애와 사랑을 얘기할 때가 아님을 에두른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요한의 화를 돋우는 말이 되고 말았다.
“흣, 그렇군. 피차 소경이 되었군. 그러니 헤어짐은 당연한 일.”
네 사람이 강변을 떠난 것은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서였다. 그들이 언덕을 넘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예수는 요르단강을 건넜다. 그것이 예수가 강 위를 걸어 건넌 최초의 때라는 얘기가 어떤 소설에 전한다는데, 아무튼, 강을 떠나며 예수가 남긴 독백은 기록에 남아 오늘까지 전해진다.
“그대들은 나를 모르오. 그대들이 그대들 자신을 모르듯이. ‘나’란 존재는 모든 것보다 우월한 빛이요, 모든 것 자체요. 모든 것은 ‘나’에게서 나왔고, 또 ‘나’에게로 돌아가지. 장작을 쪼개도 ‘나’는 거기에 있고, 돌을 들추어도 거기에 ‘내’가 있질 않는가. 그대들이 그대 자신을 발견하는 그곳에서 나는 ‘나’를 발견하는 것. 그래서 나는 사막으로, 산중으로 가려는 것. 지금 저자의 인간들은 그 누구도 우리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니, 그것은 그들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들의 책임인 것. 사막과 산중에서 영혼을 단련하지 않았기 때문이오. 듣는 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지껄이고, 듣는 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떠들지 않음 없이 어찌 저 바위로 고막이 막힌 자들의 귀를 뚫을 것인가.”
사실 우리는 광야 이후의 예수의 삶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광야를 떠나 다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간 예수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 즉 전기수(傳奇叟)로서의 생을 얼마나 활달하게 살았는가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말이다. 그 일화들을 일일이 여기에 옮겨 담는다는 것은 지루할 뿐 아니라 그다지 의미도 없는 일이다. 다만, 언제 어떤 계기로 예수가 소설가의 허울(지금으로서는 허울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을 벗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명확하지 않음도 실은 문학연구자들이 저지른 일종의 직무유기의 결과일 뿐이다. 왜냐하면 알 만한 사람은 이미 알고 있는, 너무도 명백해서 부인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 수밖에 없는 하나의 사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라는 사람은, 우리가 지극한 성자로 알고 있는 그 분은, 정녕 죽음에 이르기까지 소설가이지 않은 때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자의적으로 자신의 정체를 부인한 적도 없었고, 죽음에 직면했을 때 오히려 자신의 정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 뚜렷한 실례를 잊지 않고 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 심지어 랍비들까지 나서서 예수의 처형을 원했을 때, 그의 사람됨은 물론 무엇보다 그의 뛰어난 문장력에 감탄한 바 있던 폰티우스 필라테는 유대인들의 무지와 억지에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흥분한 군중들이 들을 수 있도록 충분히 큰 목소리로, 그러니까 순전히 의도적으로 예수에게 이렇게 물었던 것이다.
“그대가 어찌 유대의 왕인가? 그대는 그대를 강도나 살인자처럼 취급하는 저 유대사람들의 왕이 맞는가?”
이 질문은 실은 가증스런 것이었다. 아니 무척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너무도 뻔한 답을 요구하고 있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누구에게도 왕으로 행세한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스스로 왕이었노라고 대답할 리 없었고, 따라서 그 질문은 그로 하여금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유대군중들의 어리석은 분노의 불길 위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 되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필라테의 이 같은 우문은, 그리고 그 결과로 얻어진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저 빌립의 눈물만큼이나 예수 신화의 완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수의 몸에서 소설가의 옷을 벗겨버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가령 예수 사후 이십년쯤 뒤에 태어난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작성한 연대기를 보라. 타키투스는 네로가 자행한 기독교도인에 대한 박해를 묘사하면서 기독교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고, 그때 그는 예수와 필라테의 관계를 끌여들였던 것이다. 타키투스는 아무런 의심도 없이 다음과 같이 기술해버렸다.
“네로는 자신이 로마에 불을 지른 것이라는 풍문을 잠재우기 위해 사악한 풍속을 만들어 유행시킨다는 이유로 로마인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던 속칭 기독교인이라는 자들에게 그 죄를 덮어 씌웠다. 네로는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이들을 심하게 처벌하였다. 그 기독교라는 종교의 창시자는 그리스도로서 티베리우스 재위 당시의 총독 폰티우스 필라테에 의해 처형을 당한 사람이었다.”
Ω
예수가 언제 어떤 계기로 소설가에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속한 위대한 희생자로 탈바꿈하였는지에 대한 의논은, 이제 그다지 실익이 없다. 그것은 예수를 두고 아무리 실패한 소설가라고 폄하해봐야 그 자체로 그의 신성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만 되고 말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얘기해 그의 신성이 공고해진다는 사실과 그가 뛰어난 소설가의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사이에는 어떤 충돌도 있을 수 없다. 다만 예수가 소설가가 아니라 성자일 때 얻어지는 반사적 이득의 폭을 무시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라면, 예수가 소설가였다는 주장은 그들에게 엄청난 상처가 될 것은 뻔하다. 그들에게 그것은 터무니없는 날조며, 불경이며, 신성모독일 것이 뻔하다. 그들에게 있어 예수가 사용한 문장은 신의 뇌와 가슴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일 뿐, 거기에는 어떤 창작의 기미도 허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만약, 예수와 가장 가까이에 있었으며 하나의 문장을 두고 그와 끊임없이 논쟁했던 사람, 도마가 예수의 문장을 어떻게 변형시켰는지를 안다면 아마도 기겁을 할 것이다. 물론 도마 역시 훗날 예수의 신화를 창작한 작가의 한 사람이었지만.
예수가 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한 불우한 성자의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환영받는 예언가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는 그곳으로 돌아갔고, 진리의 순교자처럼 그곳에서 죽었다. 이제, 내가 그 예언가의 불길했던 희망에 대해 얘기하노니,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도마는 훗날 이 이야기를 패러디하였는데, 그 시작은 이러했다.
“사람을 고치는 사람은 그를 아는 사람의 병을 고치지 못하는 법.”
진언과 잡설의 사이에서 우리는 곧잘 한 사람의 정체를 헛갈리곤 한다. 어떤 것이 진언인지 어떤 것이 잡설인지에 대한 어떠한 기준도 없이 우리는 진언자를 성자로, 잡설가를 소설가로 치부해버린다. 그러나 이건 그다지 불행한 일은 아니다. 소설가든 성자든, 그들이 지닌 고유한 가치란 처음부터 우리들의 판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불행한 것은, 해질녘의 요르단강가, 누더기의 한 남자가 조용한 음성으로 읊기 시작하던 그 이야기를 이제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허무하고, 허무하고, 허무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