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다수 한국 개신교인들처럼 나도 근본주의 또는 복음주의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내가 어떻게 다원주의자가 되었는지 그 과정을 좀 소개하고 싶다. 그래야 10년 전 대광고에서 쫓겨나게 된 사건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근본주의 개신교를 만나다
종교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내 전공이 철학이었기에 종교문제를 곳곳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죽은 후의 세계로 모든 중간 단계를 부인하고 천국과 지옥만을 말하는 기독교의 극과 극의 논리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가톨릭에 천국과 지옥의 중간단계, 또는 전단계로 연옥설이 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나는 원시적 흑백논리로 현대인의 사고를 묶는 이 종교가 매우 해롭다고 생각했고,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글을 졸업논문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학부 졸업논문은 '안셀무스의 신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이 되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슬쩍 찾아온 두려움이 있었다. 만일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신에 대한 기독교의 해석이 맞다면, 나는 틀림없이 지옥에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기독교의 신을 부정해야 했다. 그런 내가 기독교에 입문하게 된 건 친구의 권유로 참석한 학내 신앙동아리수련회를 통해서였다.
부흥회 성격의 집회가 끝나고 저녁 늦게 참석자들이 모여 지난날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기도하는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한 학생이 부끄럽고 힘겨운 과거를 토로하며 기도를 요청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부끄러운 과거를 여러 사람 앞에 말하다니. 그러나 그다음에 이어진 광경은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참석한 학생들이 거의 모두 눈물을 흘리며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닌가! 그 이전까지 나는, 자신의 비참한 내면을 그렇게 드러내는 사람도, 또한 그의 말을 듣고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용서와 치유를 위해 신에게 한 마음으로 비는 사람들도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기도는 꽉 막힌 내 마음의 문을 흔들었다. 나는 처음으로 신에게 기도했다. "나는 당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계신다면, 저 사람들의 기도는 반드시 들어주어야 합니다." 눈물이 났다. 기독교에 대한 빗장이 풀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이 있건 없건 나도 이 무리들과 하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크게 동요하는 것을 눈치 챈 친구가 나를 모임의 지도자에게 데려갔다. 그분의 인도를 받으며 나는 통곡하고 말았다. 어떤 사람도 믿지 못하고 모든 사람을 경계하며 살아왔던 나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친구를 형제라 부르며 눈물 흘리는 사람들... 나는 초라한 자신을 발견했고 죄인임을 고백했다. 나는 펑펑 울며 기도했다. "하느님, 이제부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입문했던 곳은 모든 이웃종교 심지어 천주교까지도 사탄의 조직으로 보는 극단적 신앙공동체였다. 이후로 나는 학과시간에는 <종교철학>과 <인도철학> 등 종교관련 과목을 선택해 들었고, 방과 후에는 근본주의 교리공부에 열중하며 혼란의 시기를 보냈다. 그때 읽은 <꾸란>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기독교의 모든 것이 거기에도 있었다. 천지창조, 아담과 하와, 노아, 아브라함, 모세에 이르기까지 성서와 뿌리가 같았다. 다윗도 예수도 꾸란에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열등감을 느꼈다. 당시 내 눈에 비친 성서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꾸란은 기독교를 어느 정도 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충격 가운데 기억하는 꾸란의 구절이 있다. "진실로 너희의 종교는 하나이니라." 나는 지금 그 구절이 꾸란의 어디에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때의 당혹감과 두려움은 아직도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다.
기독교에 귀의한지 몇 달 만에 찾아온 충격, 그건 이미 근본주의 신앙에 투항한 나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혼란이었다. 뒤늦게 내가 너무 쉽게 기독교에 백기를 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애정은 그 때부터 지금까지 별로 흔들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2. 근본주의 신앙에서 포괄주의 신앙으로
학부를 졸업하고 나는 곧바로 장로회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투철한 신념에 의한 선택은 아니다. 목회자의 길에 대한 소명의식보다는 신학을 통해 신앙적 방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내가 삶을 통해 만난 예수님과 기독교가 교리적으로 설명하는 예수 사이에 존재하는 커다란 간격을 극복하지 않고는 앞으로의 삶을 제대로 살아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차피 어떤 직업이건 가져야 하는데 평생에 걸쳐 풀어야 할 숙제를 풀면서 생활까지 해결할 수 있다면 일거양득이 아닌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다. "결국 성직을 생계수단으로 생각한 거냐?"고 묻는다면 "일정 부분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런 동기로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걸 내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내가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하는 건 목회자의 길을 생계수단으로('만'이 아니라 '도') 선택했다는 점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늘 정직한 목회자로 살아오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어쨌든 내가 신학생이 된 건 1980년 3월, 광주항쟁이 일어나기 두세 달 전이었다. 근본주의 신앙공동체에서 자란 나에게 진보신학은 감당키 어려운 도전이었다. 나는 수업을 받으며 이렇게 기도하기도 했다. "하느님, 이것이 사탄의 음성이라면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주옵소서." 그러던 내가 다원주의 신학을 본격적으로 접하게 된 건 당시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막 따고 돌아온 젊은 종교학자 길희성 교수를 만나면서였다. 그가 강의하는 <비교종교학>을 들으며 <기독교와 불교의 구원관에 대한 비교 연구>라는 제목으로 졸업논문을 준비했다. 그때 칼 라너, 한스 큉 등의 포괄주의 학자와 존 힉, 변선환 등 다원주의 학자들을 글로 만났다. 불교의 매력에 빠져들며 다원주의에 마음을 뺏기기 시작했지만, 다원주의로 가면 안된다는 두려움으로 포괄주의로 논문의 방향을 잡았다. 정직한 결론이 아니라는 마음의 불편이 오랫동안 따라다녔다.
신학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나는 교회목회는 하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다. 한국 교회의 풍토에서 목회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사가 되기에는 그릇이 작다는 느낌, 내 신앙과 신학으로는 교회목회가 적합지 않다는 생각 등이 어우러져 학원선교로 일찌감치 방향을 잡았다. 교사가 되는 건 어렸을 적 꿈이기도 했다. 목사도 되고 교사도 될 수 있는 길, 바로 학원선교였다. 하지만 다원주의 신학을 기꺼이 받아들이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마음 깊이 도사리고 있는 다원주의 성향을 눌러가며 포괄주의 신학으로 목회를 시작했다. 1983년 2월에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나는 염광여자상업고등학교 야간부 시간강사와 영락교회 교구전도사를 거쳐 1985년에 서울 숭의여자중학교 교목으로 부임했고 그 해 가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90년에는 대광중학교 교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1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나는 다원주의로 기울지 않도록 자신을 억눌러가면서 포괄주의 신앙과 신학을 견지했다. 이 시기에는 교단은 물론 학교와도 거의 갈등이 없었다. 내 설교의 중심에는 항상 예수님과 십자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내 신앙의 고민을 눈치 채는 사람은 드물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열린 복음주의자'로 인식하였다.
숭의여중 시절에 있었던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신앙심 깊은 감리교회 장로인 교장선생님과 여름방학 중에 열린 교사수련회에서 같이 산책을 하게 되었다. 그는 평소에 궁금하게 생각했던 문제라며 "목사님의 솔직한 의견을 듣고 싶다."면서 말을 꺼냈다. "부처님 같은 성현이나 훌륭한 삶을 살다 가신 분들의 구원 문제는 어떻게 봐야 되나요?" 나는 가슴 서늘해지는 긴장을 느꼈다. 존경하는 교장이었고 믿을 수 있는 분이었지만 혹 말이 잘못 새어나갔다가는 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희들은 잘 모르죠, 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둘은 그냥 말없이 걷기만 했다.
3. 다원주의 신학을 감추고 목회하다
다원주의 신앙과 신학으로 가고 싶은 유혹(?)을 억지로 떨쳐내고 포괄주의 영역에서 버티던 내가 결국 두 손을 들고 만 사건이 벌어졌다. 현직 교목들에게 종교과목을 가르칠 수 있도록 교사자격증을 주기 위한 연수과정이 1995년에 서울대에서 개설되었다. 서울대 종교학과가 주축이 되어 개설된 강의는 아무 전제 없이 객관적으로 종교문제를 다루었다. 이웃종교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었던 나는 자유롭고 즐겁게 다양한 종교여행을 즐겼다.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내 안의 음성을 끊임없이 들어야 했다.
1997년 2학기가 시작되면서 대광학원의 기독교교육 전체를 책임지는 교목실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기독교교육에 관한 모든 부분은 내가 책임지고 바로 교육해야 했다. 사람 눈치 보지 말고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일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개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정직한 신앙과 양심의 판단을 따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교목실장으로서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말하고 행동하자면 기독교의 전통 교리를 넘어서야 했다. 나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학교가 수용할 수 없는 설교를 했다. 학교 운영자들이 내가 변한 것 같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강의석 사건이 일어나기 2~3년 전, 당시 학교의 실질적 최고책임자였던 부이사장에게 불려갔다. 교사예배 때 했던 설교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다원주의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나는 학교를 떠나는 것은 물론 한국교회에서 매장될 것이었다. 나는 "다원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포용주의자(개신교에서는 포괄주의보다 포용주의라는 말을 더 많이 쓴다)이며, 포용주의와 다원주의는 이렇게 다르다"고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교장실을 나오면서 안도감보다는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하면서 학교에 있어야 하나? 그로부터 나는 한 달 정도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겪었다. 학교를 그만둘 것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 길을 선택하지 못하고 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이후로도 나는 한번인가 두 번인가 더 그에게 불려갔지만 그 때마다 겨우 위기를 넘겼다.
교목실장이 되고 난 후 조금씩 내 소신을 피력하면서 생겨난 학교 운영자들과의 갈등, 위기를 해쳐가는 과정에서 내가 보인 정직하지 못한 변명, 현실 기독교에 대한 처절한 절망과 분노, 이런 것들이 내 마음에 깊은 상처로 자리잡아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나는 오직 생활비를 벌기 위해 힘겹게 한 해 두 해 버티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강의석 사건은 갑자기 들이닥친 거대한 쓰나미 같았다.
* 이 글은 <공동선> 2014년 05+06월호에 실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