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행통훈대부신계현령유공묘지명.>
대제학 이호민
1602년 (선조35)壬寅年 (萬曆 30) 50세
기계유씨는 대대로 성족(盛族)이 되어 자손들이 연이어 졌는데, 첨추공 휘 기창(起昌)과 판서공 휘 여림(汝霖) 그리고 증영의정 휘 관(綰)은 곧 신계공의 3대 선조이시다. 영의정공은 의령남씨와 혼인하였으니, 증 복정공 휘 충세(忠世)의 따님이며 추강 남효온(南孝溫) 선생의 손녀이시다.
1531년(중종26)에 공을 낳으셨는데 공의 종숙부 찰방공[휘 경(璟)]은 아들이 없어 후사로 삼았다. 공은 어려서 학문을 쌓았어도 과거의 학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벗들의 권유로 뜻을 굽히고 과거장에 들어가 늦도록 성취하지 못하였으나 1567년(37세)에 상의원 별좌를 역임하였다.
1572년(42세)에 사헌부 감찰에 천거되었고, 같은 해 여름 아산현감(牙山縣監)에 제수되었으나 후모(後母)의 상을 당하였다. 장차 외직에 제수 받으려는데 연달아 친모(親母)이신 의령남씨의 상을 당하여 1577년(47세)에 상복(喪服)을 마치게 되었다.
1578년(48세) 겨울에 홍천현감(洪川縣監)이 되었고, 1585년(55세) 여름에 다시 감찰(監察)에 서용되었다가 갑자기 이천현감(伊川縣監)으로 나갔다.
1588년(57세) 여름에 한성겸참군(漢城兼參軍)에 서용되었으며 신계현령(新溪縣令)으로 승차하였으나 이듬해 관아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이때가 1589년 9월 23일로 향년59세이었다. 같은 해 11월 고양 관산리 병향지원(丙向之原)에 장사지냈는데 선영아래에 안장하였다.
공의 휘는 순(洵)이며, 자는 노천(老泉)이었다. 살아서는 대범하며 뛰어나 터럭만큼도 사의(邪意)에 기울어짐이 없이 선비의 직분을 기다렸다. 종족을 만나면 화목하였고, 형제간에는 우애하였으며, 남의 궁핍을 구제하여 베풀기를 좋아하였다. 이러한 품성은 공의 자연스런 천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어려서 서적을 널리 읽고, 그 내용을 잘 기억하였는데 좌전을 즐겨 중국 진대(晉代)의 학자인 두예(杜預)의 성벽을 지녔다. 천성이 교유를 즐기지 않아 바깥출입을 간소하게 하였고, 손님이 이르면 문득 바둑을 즐기며 술잔을 이끌어낼 뿐이었다. 항상 자제들에게 이르기를, “술은 스스로 즐길만하고 책은 스스로 우울한 마음을 풀 수 있는 것이니라.” 라고 하였다. 벼슬에 종사하는 것은 역시 각종 문서 작성과 보고 등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고 폐단을 제거하며, 들어오는 것을 살피고 나가는 것을 문서에 기록하였던 것이다. 벼슬을 파하고 돌아오면서도 인정이 가고 머무름에 인색하지 않았다. 귀환(歸還)의 날짜를 헤아려 양식을 지니고 가다가 혹은 양도(兩道: 황해도와 충청도) 사이가 멀면 인가에 밥을 얻어먹기도 하였다. 노경(老境)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청렴한 행의(行誼)를 바꾸지 않았다. 후에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참여하여 의례에 따라 좌승지[이조참판으로 증직이 더해졌음]에 증직되었다. 어찌 하늘도 위계에 그 굳게 감춘 뜻을 아끼리오!
배위 파평윤씨는 판관 휘 흥효의 따님으로 노성한 숙덕(宿德)을 지녔다. 신계공이 별세한 후 10년간 의복을 소박하게 하고 고기반찬을 물리쳤다. 이제 연세가 80인데도 오히려 슬프게 애도함이 하루 같이하여 향사(饗祀) 때마다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제사를 올렸다. 공이 증직됨에 따라 숙부인(淑夫人)에 책봉되었는데 1남4녀를 낳았다. 1남 대이(大頤, 종사랑)는 좌랑 권개(權愷, 영의정 權轍의 아들)의 따님과 혼례를 올려 2남1녀를 두었다. 2남은 낙증(樂曾,장사랑, 사복시정)과 계증(繼曾)이며 사위는 정홍명(鄭弘溟, 대제학)이다.
신계공의 1녀는 군기정(軍器正) 안창(安昶)에게 출가하여 2남2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안홍중은 생원이며 안홍량은 진사이다. 두 딸은 참봉 심천수(沈天授)와 사인 김광위(金光煒)에게 출가하였다. 신계공의 2녀는 충의위(忠義衛) 박안명(朴安命)에게 출가하여 아들인 박승안은 참봉이다. 신계공의 3녀는 군수 이상관(李尙寬)에게 출가하여 1남은 지일(志一)이며 3녀는 각각 황전(黃澱),홍여필(洪汝弼) 기잠(奇潛)에게 출가하였다. 신계공의 4녀는 구발(具撥)에게 출가하였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신계공 슬하에 증손(曾孫)대에서 남녀가 30여인이나 된다. 나 이호민(李好閔)은 어려서 일찍이 공과 교유하며 소양을 쌓는데 보탬이 많았다. 느지막하게 윤부인에게 먼 친척이 되었다. 신계공의 묘에 묘지(墓誌)를 하면서 문사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어서 명하기를,
“느지막이 가문을 통래함이, 윤부인이 돌아가신 부군(夫君)께 독실히 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네. 어려서 공을 종유하였음은, 공의 덕성이었으며 부인의 현명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네. 부인께서 소원한 것이었으니, 천년토록 한방에 해로하는 부부로서는 당연한 행신이로다. 남들이 이를 짓밟을 수 없음은, 이야말로 아름다움을 짝하는 부덕(婦德)의 길인 탓이로다! ”
자헌대부 예조판서 양관대제학 이호민은 찬하다.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 經筵叅替官行通訓大夫新溪縣令兪公墓誌銘
大提學 李好閔 撰
杞溪之兪 爲世茂族 胤胄蟬聯 僉樞起昌判書汝霖 贈領議政綰 卽公之三代 議政娶宜寧南氏 贈僕正忠世之女 秋江居士孝溫之孫 以嘉靖辛卯生公 公之從叔父察訪璟 無子 取爲後 公少績學 不喜擧子業 以親故屈意場屋 晩不成 丁卯 筮仕尙衣院別坐 壬申 遷司憲府監察 夏 除牙山縣監 遭所後母喪 將外除 連遭南氏喪 丁丑 服闋 戊寅冬 監洪川縣 乙酉夏 再敍監察 俄出伊川 戊子夏 敍漢城兼參軍 冬 陞新溪縣令 明年 以蒺卒于官 是萬曆乙丑九月二十三日也 得壽五十九 同年十一月 歸葬于高陽館山里丙向之原 從先兆也 公諱洵字老泉生而倜儻 無纖毫傾邪意 待士恭 遇宗族睦 處兄弟友 好施人窮乏 此公之得於天者然也 少讀書强記 嗜左傳 有杜預癖 性不喜交遊 簡出入 客至則輒圍棋引酌而己 常語子弟曰 有酒可自娛 有書可自遣 其從仕也 亦不屑屑於簿牒 愛民除獘 省入簿出 其罷歸也 亦不吝情去留 算日持糧 或阻兩道中 則匃食人家 及老而淸儉不替 後叅光國原從功臣 例贈承旨 豈天亦惜其慳於位耶 配坡平尹氏 判官興孝之女 有宿德 公歿之後 十年服素却肉 年今八十 猶悲哀如一日 每饗祀必沐浴行之 以公之 贈封淑夫人生一男四女男大頤 娶佐郞權愷女 生二男一女 樂曾繼曾 女鄭弘溟 一女適軍器正安昶 生二男二女 男弘重生員 弘量進士 女叅奉沈天授士人金光煒 二女適忠義衛朴安命 生男承顔 叅奉三女適郡守李尙寬 生一男三女男志一女黃澱洪汝弼奇潛四女適具撥早歿曾孫男女 見有三十人 好閔少嘗陪公遊 晩於尹夫人 爲葭莩之親 誌公墓 不可以不文辭 系以銘曰
晩通家也 聞尹夫人之篤於所天 少從公也 知由公之德 以有尹夫人之賢 夫人之願兮 行當同室於千年人母躪蹂也 曰此兩羔之阡
오봉집 부록 10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