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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집권과 동시에 정권인수작업에 나섰지만 그 속도는 역대 정권들보다 훨씬 느렸고 방식도 많이 달랐다. 그래서 박근혜스타일이란 말까지 나왔다. 박근혜 인수위는 역대 정권들과 비교해 상당히 늦게 출범한 ‘늦깎이 인수위’였다. 2013년 1월 4일 김용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포함한 24명 규모의 인수위 위원 인선이 마무리됐고 1월 6일에야 공식활동에 들어갔다.
12월 26일 출범한 이명박 인수위보다 12일이 늦었고 노무현 인수위보다는 10일 늦었다. 동일한 대통령 선거일, 정권 출범일 이란 객관적 조건이 주어졌지만 출범이 10여일 이나 지연된 것은 박근혜 당선인의 독특한 인사스타일 때문이라는 지적이었다. 보수에서 보수로 정권이 연장된 탓도 있다는 지적이 없는 것은 아니나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 당선됐던 노무현 대통령은 훨씬 속도감 있는 정권인수작업을 추진했었다.
역대 대통령들에 비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조직을 만들고 조직을 채울 사람들을 찾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는 얘기다. 한정된 정권인수기간에 인선을 위해 시간을 투자하면 할수록 전체 인수위원회 일정은 촉박해질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당선 이후 보름 동안 인수위 구성에 집중한 것은 신중을 기했다는 얘기도 된다. 여권 내부에서는 여당에서 여당으로의 정권 인수인데다, 현직 대통령과 대통령 당선인의 관계가 우호적이고 협조적이라는 점을 박근혜 인수위가 늦게 출범한 이유로 드는 견해도 있다.
박근혜 인수위의 핵심코드는 대통령직 인수에 집중하는 작은 전문가 인수위였고 인수위원 인선의 키워드는 ‘박근혜가 데리고 써 본 사람’으로 요약할 수 있다. 김용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을 정점으로 국정기획조정, 정무, 외교국방, 경제1, 경제2, 법질서, 교육과학, 고용복지, 여성문화 등 9개 분과를 뒀고 각 분과에 24명의 위원, 전문위원과 실무위원을 뒀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대통령선거 선대위 국민행복추진위원회에서 공약을 만든 참모들을 인수위원회로 대거 발탁했다. 12명이나 된다. 자신의 공약 이행방안과 이를 위한 재원조달 적임자에 선거 때 호흡을 맞춘 참모들 이상 가는 인사가 없다는 판단이 작용한 듯하다. 여기에 대선가도에서 박근혜 싱크탱크로 기능한 국가미래연구원 출신도 다수다.
옥동석 인천대 교수와 윤병세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안종범 의원, 최성재 서울대 교수 등이 국가미래연구원 창립멤버다. 이들은 나중에 새정부 초대 내각 각료나 청와대 수석비서관으로도 중용된다. 박근혜 인수위 활동기간 인수위 스타로 부상한 유민봉 국정기획조정분과 간사를 비롯해 인수위원의 1/2이 대학교수인 점도 눈여겨 볼 만한 대목이다. 공직 인선에서 어떤 독특한 특징을 찾기보다는 일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중요하다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생각을 미뤄 짐작해 볼 수 있다.
김장수 전 국방부장관, 류성걸 전 기획재정부 2차관, 이현재 전 중소기업청장, 모철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등 관료 출신도 다수 인수위에 합류했다. 자질과 관련분야 경력만 놓고 보면 박근혜 인수위는 전문가집단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조윤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대변인은 "전문성을 제1 가치로 뒀고 공약이행에도 역시 방점을 둔 인사"라고 설명했다. 대신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오랜 측근들은 모두 인수위에서 배제하는 용단을 내렸다.
안종범, 강석훈, 이현재 의원 등이 국회의원직을 갖고 있었지만 이들은 친박이라고 보기 어렵다. 대통령직 인수위에 합류한 유일한 친박계는 이정현 전 의원 뿐이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지만 절대로 2인자를 두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용인술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2002년 대선 패배와 연 이은 탄핵정국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에 구원투수로 등판한다. 이후 당 대표와 비상대책위원장, 대선경선후보 등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당을 위기에 구하는 리더십을 보여줬지만 지금껏 단 한 차례도 자기 밑에 2인자라고 할 정도로 힘이 집중된 인사가 없었다.
지난 2004~2005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김덕룡 원내대표체제에서 김 원내대표가 의회를 이끌어가는 플로어리더였지만 박 대표는 김 원내대표에 대한 견제심리를 늦추지 않았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명박정부 집권 3년차 당의 주도권이 박근혜 당선인에게로 넘어오고 박 당선인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대선후보로 당선인으로 대통령으로 변신해가는 과정에서 단 한번 2인자로 볼만한 인물이 부상한 적이 없었다. 이 점에서는 역대 모든 대통령들이 비슷한 행태를 보였고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권력관리가 얼마나 중요한 지 보여주는 반증이라는 분석도 있다.
전문가집단으로 채워진 인수위원회의 외형적인 허울은 컴팩트 인수위로 요약된다. 박근혜 인수위원회는 인수위원장과 분과별 간사, 인수위원, 전문위원, 실무위원을 합해 155명으로 규모면에서 그야말로 작은 인수위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인수위는 인수위원 25명에 전체 246명이었고 이명박 인수위는 인수위원 24명에 전체 183명 규모로 출발했었다. 특히. 이명박 인수위는 ‘자문위원’이란 직제를 만들어 인수위원회 전체 직원 숫자는 무려 1000명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인수위였다.
노무현 인수위의 자문위원 숫자는 700명이나 됐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 비교해 정권창출 과정에서 주변의 신세와 빚을 많이 졌던 이명박 대통령은 그만큼 더 주변의 공신들을 나몰라라 하기 어려웠던 처지였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공을 세운 정권창업 공신들에게는 인수위원회 자문위원 자리를 선물로 나눠줬었다. 반면, 박근혜 당선인은 대선 선대위를 구성한 인물들이나 선대위 외곽에서 선거를 도운 사람들은 물론이려니와 이른바 ‘친박계’로 분류되는 특급참모에게도 부채의식이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니 참모들을 의식한 논공행상(論功行常)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잘 알려진 것 처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정치적 자산은 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과 본인의 정치적 역량이며 이를 바탕으로 국민들과 직접 소통을 해왔다. 이는 참모들의 역할이 제한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작은 인수위는 역대 인수위를 반면교사로 삼은 측면도 크다. 이명박 인수위에서는 일부 자문위원들이 물의를 일으키는 바람에 거센 비판에 직면했었다. 이명박 인수위의 경제2분과 자문위원을 맡았던 고 모씨는 자문위원직을 이용해 부동산 투자상담 명목으로 고액의 상담료를 받은 혐의로 지난 2008년 1월말 검찰에 수사의뢰됐었다. 이명박 인수위는 당시 일부 자문위원에게서 문제가 불거지자 등록 자문위원 숫자가 558명이라고 밝혔지만 사실은 천명도 넘는다는 얘기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박근혜 인수위 구성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평이었지만 대변인 인선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과거 정권들이 대선 과정에서 선거대책위 공보단 등에서 활동했던 검증된 인사들을 인수위 대변인으로 썼던 것과 달리 박근혜 인수위는 당선인은 물론 대선과정에서도 별 존재감이 없었던 윤창중씨를 인수위 대변인으로 깜짝 발탁했다. 윤씨의 과거행적과 처신에서 문제가 불거져 나오면서 그 파장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에게 그대로 미쳤다.
윤씨는 18대통령선거 전 칼럼에서 문재인 전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를 지지한 보수 성향 정치권 인사들을 '창녀'로, 안철수 전 후보에 대해선 '더러운 장사치'로 표현하며 세력간 대결을 조장했고 대선 후에는 박근혜 당선인을 지지하지 않은 48%의 국민을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해 물의를 빚었다. 조선업에 대한 전문성 없는 윤씨가 국가 소유 업체인 대우조선해양 사외이사로 선임돼 월 수백만원의 급여를 받은 것도 논란거리가 됐다.
윤씨와 대우조선해양 CEO는 같은 고교출신이었다. 이런 이력 때문에 민주통합당은 집권초 정권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오던 과거 관행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윤창중 대변인에 대한 박근혜 당선인의 인사를 밀봉인사로 규정 자진사퇴를 요구하는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 오죽했으면 새누리당에서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데 왜 그를 임명했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윤 대변인은 인수위 종료와 함께 그 역할이 끝날 것이란 일반의 예측을 깨고 청와대 대변인으로 발탁돼 박근혜식 마이웨이 인사란 여론의 비판이 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