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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 이익 삶과 사상을 따라] 2.성호의 고향 첨성리, 실학의 고장 -경기일보20130121
승인 2013.01.21
그리하여 그는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조상의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리(瞻星里)로 내려와 1763년 12월 17일 83세의 일기로 서거할 때까지 일생 동안 학문에 종사하였다. 성호는 국가와 사회의 문제점을 예리한 시각으로 짚어내며 개혁의 방안을 제시하여 경세치용학파의 대표자가 되었고, 100여 권이 넘는 저술을 통해 실학의 비조로 추앙받고 있다.
성호 이익 선생 묘와 사당
첨성리 선영과 이계손
성호 가문이 안산의 첨성리에 정착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여주이씨가 이곳에 선영을 마련한 것은 성호의 8대조인 이계손(李繼孫)에 의해서였다. 그는 조선 초기인 세조ㆍ성종대 관찰사와 판서를 역임한 인물로, 성종대 경기관찰사 재임시 이곳을 직접 살펴보고 선영 아래에 많은 촌가가 있자 자금을 주고 이주케 하였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석형이 지은 글에 의하면 이계손의 부친인 이우인을 1450년(세종 32) 이곳에 장사 지내고, 모친이 돌아가시자 1467년(세조 13) 이곳에 합장했다고 한다. 이를 고려한다면 세종대 부친의 묘소를 이곳 첨성리에 마련한 후 경기관찰사 재임 시 세장지로 조성하기 위해 촌가를 매입하여 확대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자신도 이곳에 묻히고 그의 셋째 아들 이지시가 묻히면서 첨성리는 성호 가문의 세장지가 되었다. 현재는 택지 개발로 인해 모두 이장되거나 화장되었으며, 다행히도 성호의 유택만은 그대로 남아 이곳이 실학의 산 터전이었음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첨성리에 선영이 조성되면서 후손들이 거주하게 되었고, 수원의 팔달산 일대와 광주의 송동촌(현 화성시 매송면)과 함께 수십 리 안에 여주이씨의 선영과 세거지가 존재하게 되었다.
첨성리는 안산군의 진산인 수리산의 취암에서 죽 이어진 연봉이 남으로 10여 리 이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옆 마을은 바다에 접해 있고 포구의 이름은 성곶포(聲串浦)라 불리며 고깃배가 드나들었지만, 그 사이에는 노적봉이 자리 잡고 있어 바닷가의 번잡함을 막아주었다. 첨성리는 조선 후기에 간행된 『안산군읍지』에는 점성리(占星里)로 나오며, 점섬(占剡)으로도 흔히 불리었다. 순암 안정복이 처음 성호를 찾은 기록에도 점섬으로 나온다. 특히 18세기 이후의 문집류에는 섬산(剡山), 섬계(剡溪), 섬중(剡中), 섬촌(剡村), 섬천(剡川) 등 점섬과 관련된 호칭들이 더 많이 쓰이고 있어 첨성은 점성 또는 점섬 등으로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이웃 부곡 마을에는 성호와 같은 남인인 진주유씨가 세거해 있었으며, 18세기에는 시ㆍ서ㆍ화 삼절로 꼽히는 표암 강세황이 안산에 거주하고 있어 이곳 첨성리나 부곡 마을의 청문당 또는 안산 소재 사찰이나 포구 등에서 여주이씨 집안 인물들과 함께 시회(詩會)를 열기도 하였다.
첨성리와 성호장
첨성리는 광주의 첨성리로도 불렸는데, 안산과 광주의 경계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첨성리는 안산군 군내면 소속의 마을로, 명칭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한자의 뜻으로 본다면 “별을 바라보는 마을”이란 아름다운 뜻을 지니고 있다. 성호는 선조대부터 불러온 첨성리(瞻星里)를 사랑하였고 이곳에 거주하여 자신의 호를 성호(星湖)라고 지었다.
지도 오른쪽 위로 보이는 성곶포와 노적봉 뒤로 첨성리가 있었다. (안산군지도, 1872)
또한, 성호의 물가[星湖之濱]에 집을 짓고 성호장(星湖莊)이라 불렀으니, 마을에는 성호라는 호수(또는 연못)가 있었을 것이다. 성호장이라 하니 왠지 화려한 별장을 연상할지 모르지만, 성호의 거처는 그의 품성처럼 검소하였다. 성호의 셋째 형 옥동 이서가 지어준 육영재(六楹齋)라는 이름처럼 단지 6개의 기둥으로 지어진 바깥채에서 앞의 1칸은 흙마루로 쓰고 뒤의 2칸은 방으로 만들었다. 순암 안정복이 이곳을 찾아왔을 때 그의 거처가 매우 소박하고 누추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삼두회와 반숙가
성호는 학문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는 한편 스스로 채소도 심고 벌도 치고 닭도 기르면서 향촌생활을 영위하였다. 성호는 당시 심각했던 기근을 해결하는 데 콩이 유용하다고 보았다.
1753년 72세 때 직접 콩을 재배하여 콩죽, 콩장, 콩나물 등 콩으로 만든 음식을 마련하여 친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는데, 이 모임을 삼두회(三豆會)라 한다. 또한, 콩 반 쌀 반을 섞어 밥을 지어 먹으며 ‘반숙가(半菽歌)’란 노래를 지어 스스로 즐기기도 하였다.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하늘이 오곡을 내림에 콩이 그 중 하나인데 / 天生五穀菽居一
그 중 붉은 콩이 더욱 좋다고들 한다네 / 就中赤色尤稱嘉
여름이면 바야흐로 자라나고 겨울이면 시드니 / 火旺方生水旺死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 오히려 사치스럽다네. / ?滑輕?味更奢
가난한 집의 형편에 좋은 방편이 되니 / 貧家乏財善方便
싼 값에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좋다네 / 賤價易辦此亦多
쌀과 서로 섞여 조화를 이루어 / 與米相和得均劑
가마솥에 푹 찌니 김이 뭉게뭉게 / 錡釜爛蒸騰成霞
가득 담긴 그릇 여니 김이 사람에 확 끼치니 / 盈?啓會氣燻人
물기운과 불기운 서로 더하여 어울렸네 / 水晶火齊交相加
봄바람에 온갖 꽃이 흐드러지게 여니 / 春風雜花開複疊
붉은 복사꽃 흰 오얏꽃 윤기가 흐르네 / 桃紅李白色?磨
늙은이 젊은이 나누어 다투어 숟가락질하니 / 長少分行爭擧匙
동시에 씹음에 입안 가득 향기로다. / 一時咀嚼芬齒牙
이로부터 고기 맛을 잊은 지 오래이니 / 爾來肉味忘已久
잉어와 농어 맛은 자랑하지 말게나 / 河鯉松?莫相誇
별처럼, 호수처럼
성호장에는 성호의 학덕을 사모하여 찾아오는 붕우와 제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첨성리는 서울과 가깝고, 성호장에는 아버지 이하진이 중국 사행길에 구해온 수천 권의 도서가 있었다. 성호는 밤에는 늦게 자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났으며, 제자들과 강론을 할 때는 며칠씩 밤을 새워도 피곤한 줄 몰랐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자손과 친척 중에는 이맹휴, 이병휴, 이용휴, 이구환, 이중환, 이가환, 이삼환과 문인 중에는 안정복, 신후담, 윤동규, 권철신 등 수많은 쟁쟁한 제자들을 키워냈던 것이다.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은 성호를 사숙하며 그를 위대한 스승으로 존경하였는데, 성호 사후 그의 옛집을 찾아 시를 남겼다.
섬촌의 이 선생 옛집을 지나며[過剡村李先生舊宅]
도맥이 후대에야 동국에 전해 / 道脈晩始東
설총이 그 시초를 열어놓았고 / 薛聰啓其先
그 맥이 포은 목은 몸에 미치어 / 傳流逮圃牧
높디높은 충의를 이루었다네 / 忠義濟孤偏
퇴옹은 주자 진수 드러내시어 / 退翁發?奧
천년 뒤에 그 도통 이어받으니 / 千載得宗傳
육경은 다른 뜻이 있지를 않아 / 六經無異訓
백가들이 다 함께 받들었다네 / 百家共推賢
맑은 기운 마침내 동관에 모여 / 淑氣聚潼關
밝은 문장 섬천에 환히 빛나니 / 昭文耀剡川
주된 뜻은 공맹에 가까워지고 / 指趣近鄒阜
주석은 공융 정현 뒤를 이었네 / 箋釋接融玄
몽매한 나 한 줄기 빛이 보이어 / 蒙?豁一線
깊이 잠긴 자물통 열고 싶어도 / ??抽深堅
짐작을 못 할레라 지극한 뜻을 / 至意愚莫測
그 운용 오묘하고 또한 깊다네 / 運動微且淵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살면서도 백성의 삶을 개선하고 사회의 병폐를 개혁하고자 한 개혁 사상가 성호! 현실과 세계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깊은 애정, 새로운 세계에 대한 유연하고 개방적인 그의 사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르지 않는 샘이 되고 있다.
이우석 / 건국대학교 강사, 안산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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