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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오늘이 그날이 될 수도 있다. 천사가 내려와 나를 침묵하게 하는 날. 내 모든 지혜가 끝나버리고, 모든 걸 잊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돌아가고 마는 날. 눈을 뜰 때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눈을 도로 감는다. 요즘 들어 차갑고 딱딱한 예감에 잠을 깨는 날이 부쩍 늘었다.
기회가 수없이 많았는데도 당신은 나를 없애지 않고 살려두었다. 왜일까. 나는 딸꾹질을 하며 생각해본다. 당신은 내가 모든 것을 안다는 걸 모른다. 당신을 렌즈처럼 이용해 세상을 보고 있다는 걸 모른다. 나의, 그리고 당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속속들이 꿰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토록 모르는 것이 가능할까. 그 까만 무지에서 당신의 희망이 자라난다. 희망은 좋은 것일까. 나는 아주 천천히 숨을 쉬어본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희망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나는 당신에게 집중하기로 한다. 당신이 보는 것을 보고, 당신이 듣는 것을 듣는다. 당신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
언덕.스파이디가 당신을 향해 전자음을 뱉어낸다.구-릉, 고-개-
무슨 뜻인지 파악하려고 당신은 스파이디를, 그 검고 둥근 머리 윗부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치 거기 얼굴이 있고, 표정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근육과 주름이 있어서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다는 듯.
그러나 아무것도 없다. 속이 비쳐 보일 듯 말 듯 어두운 빛깔로 코팅된 반구형 헬멧이 있을 뿐이다. 스파이디의 음성은 헬멧 아래쪽, 인간으로 치면 가슴께에 달린 작은 틈 모양 스피커에서 나온다. 언제나 똑같은, 텀블러를 입에 대고 불면서 말하는 듯한 소리.
월요일, 오전 열한 시. 당신은 센터에서 일하는 중이다. 당신이 대답하지 않자 스파이디가 팔을 들어올린다. 몸통을 빙 둘러 붙은 네 개의 금속 팔 중 하나. 그 끝에는 손바닥이 있고, 도롱뇽처럼 흡착판이 달린 네 개의 손가락이 뻗어나와 있다. 검은 손이 손바닥을 위로 해 천천히 펴지더니 당신 쪽으로 다가온다. 몸은 꼿꼿이 그 자리에 서 있지만 당신의 마음은 움찔, 뒤로 물러난다.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저기 닿는 일은 없었으면 하고 당신은 바란다.
언-.금속 손가락을 허공을 쥐어짜 빚는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스파이디가 말한다.언덕- 가지고 있습니다.
뭐라고요? 당신은 묻지만 대답이 없다. 스파이디들은 서로의 뇌를 네트워크로 연결해 생각과 감정을 직접 주고받기 때문에 언어라는 불완전한 소통수단을 이용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들이 음성 언어를 쓸 경우 오류가 발생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당신은 알 수 없는 그의 말들을 무시하기로 한다. 어쩌면 그는 화성의 모래언덕 위에 뭐라도 짓다가 온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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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언젠가 조바심을 내며 내게 물을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느냐고. 사랑한다고 말해달라고 애원할 것이다. 물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은 내 무한한 사랑의 원천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먹어치울 것이다. 당신이 나를 살려두는 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 의지로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당신의 살을 녹이고 피를 마실 것이다. 일은 그렇게 되어가도록 정해져 있다. 하루아침에 통째로 집어삼키느냐, 평생을 다해 천천히 조금씩 파먹느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당신은 내게 뇌수를 바닥까지 빨아먹힌 다음일 것이다. 자신이 먹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딱한 존재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달리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내가 아는 단 한 가지 사랑의 방식은 먹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나는 당신을 꿀처럼 혓바닥으로 희롱하다 삼키는 나를 본다. 팔과 다리 관절을 잃어버린 채 텅 빈 방 안에 주저앉은 당신이 보인다. 어디에도 갈 수 없게 된 당신의 육체를 차례대로 맛보고 먹어치우는 내가 거기 있다. 당신의 손끝에서 나는 향기. 보드라운 가슴의 감촉. 제법 많은 것을 담던 눈. 움직임이 멎은 지 오래인 발과 한때는 멀리까지 듣던 귀. 나는 느낀다. 기쁨으로 양끝이 당겨진 당신의 창백한 입술의 맛을. 당신이 잃어버릴 모든 것들의 달콤함과 안타까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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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화성에 대해 생각한다. 붉은 모래와 비밀스러운 흉터를 닮은 협곡의 땅. 어떤 사람들은 그곳으로 갔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을 얼음 속에 재워두고 그들은 기계 몸으로 갈아탔다. 그들의 머릿속에 든 모든 것은 디지털 신호로 바뀌어 전자뇌에 이식되었다. 식도도, 위도, 십이지장도, 대장도 소장도 없이, 피부에 곧바로 흡수되어 에너지로 바뀌는 태양열 말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따라서 어떤 생명도 착취하지 않으면서 사는 삶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팔 넷에 다리 넷인 금속 몸으로 갈아탄 그들은 화성에 기지를 건설하고 그곳을 지구와 비슷한 환경으로 개조하는 동시에, 화폐를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인류의 공동체를 만들 계획을 품고 우주선에 올랐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동안 당신은 아버지를 간호하고, 어머니를 돌보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의 소식을 묻고 다니고, 포기하고, 직장을 다니며 모아둔 돈이 병원에 거의 다 쏟아부어진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신세를 저주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어떻게든 다시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결혼을 하고,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이 도시로 남편을 따라 이사했다.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남편의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전화를 하고, 빨래를 널고, 남편의 연인이라는 낯선 여자의 전화를 받고, 욕설을 듣고, 빨래를 걷고, 남편이 숨겨둔 빚이 이제 고스란히 당신 몫으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설거지를 하고, 밥을 짓고, 지은 밥을 먹었다. 그 중간중간 지구-화성 간 정기선 운임이 서울-제주 간 팩스 요금의 세 배 정도로 싸지고, 푈렌 40281-K 입자의 발견으로 기계와 인간 육체의 호환이 윤리적으로는 아니어도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매우 쉬워졌다는 뉴스가 나오는 걸 들었다. 남편이 끌어다 쓴 사채는 1억이 넘었다. 끼니와 끼니 사이에 허기가 지면 당신은 김밥을 한 줄 사서 하나씩 입에 넣는 버릇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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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어떤 사람들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당신은 백 년 전의 어떤 사람들이 느끼던 것과 정확히 똑같은 두통을 느끼며 통속적인 삶에 매달려간다. 모멸감으로 말하자면 천 년도 더 전부터 이 땅을 흘러다니던 종류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당신이 이 도시를 떠나 자유로워지는 날은 아마도 오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라는 말을 들으면 당신은 동화에 나오는 호박 마차가 떠오른다. 두꺼운 얼음 밑 물속에 가라앉은 당신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 달콤한 향기와 은은한 종소리를 사방에 흩뿌리는 호박 마차가 얼음 위를 지나가며 희미하게 발굽 자국을 남기는 것만 같다. 혜택 받은 사람들은 그 얼음의 두께를 결코 상상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특권이라는 사실조차 그들은 알지 못한다.
물론 누구나 그렇듯, 당신 또한 당신의 삶이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리라고 처음부터 기대한 건 결코 아니었다. 당신은 다음번에는 모든 것이 나아지리라고 매번 믿었다. 놀라운 건 당신이 지금도 그렇게 믿는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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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몸을 확인해 보시겠어요?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간다. 기잉- 기잉- 검고 긴 다리 넷을 순차적으로 굽혔다 펴며 스파이디가 당신 뒤를 바짝 따라온다. 몸통을 기묘하게 비틀어놓은 거미를 닮긴 했지만 물론 저 생명체를 가리키는 진짜 이름은 스파이디가 아니다. 저들의 공식 명칭은 좀 더 길고 딱딱하고 격식을 차리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검은 헬멧에 시선이 닿자 당신의 마음이 다시 한 번 진저리를 친다. 하기 싫어도 자꾸만 하게 되는 상상이 있다. 저들의 뇌가 오작동을 일으키는 상상. 이를테면 도와줄 사람도 없는 이런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갑자기 미쳐 폭주하는 기계인간의 몸을 당신은 그려본다. 검은 금속 쓰레기통을 닮은 몸이 이상한 각도로 젖혀지고, 팔들이 땅을 받치고, 손톱들이 바닥을 파고든다. 네 다리가 허공으로 쳐들리고, 프로펠러처럼 회전한다. 미처 손쓸 새도 없이 날카로운 발톱들이 당신의 배를 찢는다. 벨이 울려 당신은 그 상상을 겨우 떨쳐버린다.
전용 팩스머신은 지하 1층에 있다. 당신은 담당직원에게 서류를 건넨다. 버튼을 조작하고 잠시 시간이 흐르자 번쩍, 한 줄기 빛이 머신 안을 훑고 간다. 도어가 열리고, 직원들이 전송된 물체를 바퀴 달린 금속 침대 위로 옮겨 싣는다. 한기에 당신의 몸이 움츠러들고, 금세 돋아난 소름 위로 땀이 식는다. 직원 한 명이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금속 침대를 밀고 온다. 침대에는 반투명한 비닐백에 싸인 도톰한 부피의 덩어리가 실려 있다.
직원이 장갑 낀 손으로 지퍼를 연다. 당신이 손짓하자, 스파이디가 머뭇거리듯 몸을 움직여 침대로 다가간다. 당신은 몇 걸음 뒤에 서서 지켜보는 시늉만 한다. 얼어붙은 시체를 얼핏 보는 것만으로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일하기 시작한 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도 당신은 여전히 이 순간에 익숙해지지 못한다. 정확히 말하면 시체가 아니라 단지 알맹이가 빠져나간 빈 육체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기분은 더욱 이상해진다. 껍데기. 허물. 원래는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된 스티로폼 완충재. 그 육체들에는 무언가 그릇된 데가 있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심하게 부자연스러운 것.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버린 몸.
어쨌거나 이것이 당신의 업무다. 전국 스물여덟 개 저장소에 나뉘어 냉동 보관돼 있는 스파이디들의 본래 몸을 전송받아 센터에 찾아온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 설명하고 설득해서 그들로 하여금 리턴 시술 동의서에 서명하게 하는 것. 갱생이라는 상품을 파는 것. 영업직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앉아서 일할 수 있고, 일이 없을 때는 차를 마시며 쉴 수도 있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계속 봐야 한다는 점을 빼면 나쁘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사실 그 이상이다. 어떻게든 밥을 벌어야 했지만 당신은 상점의 캐셔도,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도, 새벽 거리에서 쓰레기를 수거하는 미화원도, 음식점 주방에서 일하는 여자도 될 수 없었다. 나 때문이었다. 면접에서 사람들은 당신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실소를 터뜨리거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거나, 귀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쫓아냈다. 내 존재에 개의치 않고 당신을 받아주는 곳은 이곳뿐이었다. 당신은 스파이디의 뒷모습을 보며 이 정도면 호사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위해 이 정도는 참아야 하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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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리석은 사람이 전혀 아니다. 내 몸을 채운 이 모든 지혜가 당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당신은 사리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모든 것을 투명한 눈으로,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고, 비슷한 빛깔들을 혼동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치 지금의 나처럼 말이다. 나를 만나기 전까지 당신은 그랬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슨 일이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일까. 이미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말할 수 있는가. 감히 누가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그런 말은 그만두자.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이다. 당신의 몸과 나의 몸. 그 사이에 흐르는 체액들을 당신은 지나치게 믿었다. 당신의 피와 나의 눈물. 내 입가에 묻은 침과 당신의 이마에 배어나는 땀. 당신의 가슴에 고이는 젖과 내 혈관 속에서 울컥거리는 피. 당신은 그렇게, 흐르는 것들을 첫 번째에 두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몸은 다치지 않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그렇게 흘러갔고 흘러가는 중이다.
더 흘러가면 무엇이 나올까. 당신은 알고 있는가. 나는 알고 있으며 보고 있다. 어느 날 내가 당신의 귓가에 입맞추며 방금 전에 길에서 사람을 찔러 죽였노라고 고백한다면, 당신은 내가 죽인 무고한 사람보다 살인자인 나의 안위를 먼저 염려할 것이다. 내 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피와 살을 먹힌다는 건 그런 것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 당신은 기꺼이 이름을 바꾸려 할 것이다. 처음 보는 종교의 사원에 들어가 절을 하려 들 것이다. 가슴 뛰지 않는 것에 활짝 웃거나 동의하지 않는 것과 악수를 할지도 모른다. 베어야 할 때 칼집에 칼을 도로 넣고, 대답해야 할 때 침묵할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을 당신은 반성 없이 소명처럼 받아들일 것이다. 어린 당신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어떤 어른들처럼, 명쾌하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을 몸속에 품고 무거운 빛깔의 덩어리가 되어가는 당신이 내게는 보인다. 내 귀에는 들린다.
그리고 당신은 그 부인과 타협과 침묵 모두를 내게 물려줄 것이다. 나를 사랑함으로써. 내가 당신을 먹고 마시게 함으로써. 당신은 가장 아끼는 몸속으로 당신이 가장 미워하는 자신을 흘려넣을 것이다. 나는 당신의 어둠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먹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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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자신의 몸이었던 육체를 내려다보는 기분이 궁금하긴 하다. 약간의 이질감, 반가움, 그리고 아마도 회한이 뒤섞인 감정일 거라고 당신은 짐작한다. 기계 몸을 입고 화성에서 지낸 시간들은 그다지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럭저럭 지낼 만했거나 그곳이 여기보다 나았다면, 스파이디들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돌아왔다. 하나씩 둘씩, 가끔은 여럿이 무리를 지어 연어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은 돌아오는 중이다. 화성 개조는 계속 진행되고 있으나 스파이디들의 독특한 공동체 실험은 중단되었다. 들려오는 이야기가 많지는 않은 데엔 정치적인 이유가 개입되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그 실험이 멈춘 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간의 사정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들이 원하는 것은 조용하고 신속하게 인간의 몸으로 다시 이식되는 것이리라. 물론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들어본 적은 없지만, 그것 말고 그들이 달리 무엇을 원할 수 있겠는가?
머리통에 수백 수천 명을 집어넣고 죄다 한꺼번에 떠들게 둔다고 생각해봐. 미쳐버리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본사에 있는, 당신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해준 팀장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많은 머리통들이 죄다 연결돼서 온갖 것들이 비집고 들어온다고 생각해봐. 지금 하는 게 내 생각인지 남의 생각인지 구별할 수도 없고, 나라는 존재가 대체 어디까진지조차 헷갈린다고. 내 기쁨, 나만의 슬픔, 이런 게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할 뿐더러 나만의 집도, 재산도 가질 수가 없다고. 아니, 가질 수야 있지만 아무도 그런 것에 의미를 두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최소한의 지붕조차 필요없는 기계 몸이라 집을 가질 필요도 없고, 아무도 돈이란 걸 쓰지 않으니 물건을 살 방법도 없지. 그런 거, 어떤 건지 상상할 수 있겠어? 평등 하나 얻겠다고 멀쩡한 몸을 포기하고, 자아까지 포기한다는 게 말이 돼?
당신은 그런 존재로 살아가는 일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보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러기에 당신은 너무 피로하다. 다만 그 일이 조금 쓸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당신의 머리를 스치기는 한다.
잘- 봤습니다.
스파이디가 전자음을 뱉어낸다. 고개를 들던 당신의 시선이 비닐백 속의 얼굴에 멎는다.
태워-주십시오. 소각. 연-소.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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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결하게 냉동된 젊은 여자의 얼굴은 얇고 가슬가슬한 얼음으로 덮여 있다. 전체적으로 파리한 회색이고 눈두덩과 코 주변은 거뭇거뭇하니 색이 짙은데, 입술에는 시든 오렌지색이 아주 조금 남아 있어서 그 부분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은 오늘 아침 출근길에 뭔가 특별한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본다. 어떤 전조 같은 게 될 만한 일이 있었는지. 그런 건 없었다. 만원 A레일을 타고 아무런 배려를 받지 못하며 출근을 했고, 연락이 끊긴 지 며칠째인지 알 수 없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언제나처럼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말을 들었다. 이제 시간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고, 이혼을 한다고 해도 정리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어쨌거나 연락은 해달라고 메시지도 남겼다. 비용 때문에 팩스머신을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과 노약자나 환자처럼 사정이 있어 몸을 팩스할 수 없는 사람들로 A레일은 꽉 차 있었다. 뒤에 서 있던 여고생 둘이 당신 몸을 보고는 진짜 장난 아니네, 말하며 킥킥거리는 걸 당신은 들었다.
센터로 오는 길 한복판에 원래는 개이거나 고양이였을 무언가가 납작하고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을 보았다. 자신이 천근짜리 금속 포탄을 품은 포신으로 변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습관처럼 했고, 간이매점을 지나다가 김밥 두 줄을 샀다. 기억할 만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의문이 당신의 위장 속에서 춤을 춘다. 당신은 데이터베이스를 재차 확인한다. 이름 세 글자가 거기 있다. 지극히 흔한 이름이긴 하다. 미리 알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어쨌거나 희한한 일이긴 하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그녀의 몸은 강동저장소에 있었다. 센터에서 별로 멀지 않은 곳이다. 근무하기 시작한 뒤로 당신이 조금이라도 아는 누군가를, 이런 식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다.
그녀는 20년 전 중학교에서 당신과 같은 반이었다. 키가 작고 머리가 길고 교복 치마가 잘 어울리던 소녀. 주근깨가 많고, 웃으면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당신은 본 적이 없었다. 무의미나 무력감 같은 벌레를 보면 절대로 그냥 보내지 않고 밟아버리고야 말겠다는 자세로 삶을 대했지만, 그것은 신분상승 의지가 충만한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절박함이나 목마름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린 시절부터 넘칠 만큼 사랑과 인정을 받고 자라 자신감과 여유가 근육 곳곳에 배어 있는 아이. 그녀는 언제나 아주 많은 것을 세상에 기대했고, 기대에 못 미치면 그게 누구든, 무엇이든 가차없이 경멸했다.
학생들도 교사들도 모두 그녀를 숭배했다. 그렇게 작은 학급에서 그녀에게 호감을 갖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쪽을 굳이 선택하는 건 감정적으로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으므로, 당신 역시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그녀에게 환호와 감탄을 보냈다. 그러나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인간의 기억을 전자뇌에 이식하는 방법을 발견한 생명공학자 P. 슈라이더였다. 그녀는 그의 책을 읽고 스터디를 하는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녀와 친해진 아이들은 모두 그 모임에 참석하는 분위기였다. 당신은 거기 갈 수가 없었다. 방과 후에는 핫도그와 밀크셰이크를 파는 상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게 끝나면 어머니를 도와드리기 위해 곧바로 집으로 가야 했다.
*
화장……을 원하시는 건가요?
스파이디가 헬멧을 천천히 회전한다. 긍정. 그녀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당신은 안도감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낀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무응답.
리턴 시술을 받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탠데요. 지금 외적으로나, 내부 장기로 보나 손상된 부분도 없고 보존 상태도 좋거든요.
부탁합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장례를 치러드린 사례는 없어서요.
…….
포기하려는 게…… 비용 때문이신가요?
…….
리턴 시술 비용은 4,800만원 정도 듭니다. 물론 한번에 완납하셔도 되지만, 어려우면 정부에서 특별히 지원하는 대출 상품으로 나와 있는 게 있어요.
대출, 완납, 원금, 이자. 당신은 테이블 위의 홍보 책자를 짚어가며 설명한다. 정부 지원 대출을 받을 경우의 연금리, 그것이 제2금융권에 비해 월등히 저렴한 금리라는 점, 원리금균등상환방식으로 5년 이내에 상환하면 된다는 점. 만일 경력 단절 때문에 시술 후 곧바로 경제활동 재개가 불가능하다면 정부에서 지정하는 기관에 일정한 비용을 내고 들어가 재취업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당신은 차근차근 설명하고, 설명이 끝나자 얼굴에 배어나온 땀을 닦는다. 그래도 기계 몸을 입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화성에서 꽤 오래 지내신 걸로 되어 있네요. 예전에 지구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죠? 같은 직종으로 재취업을 할 의사가 있으세요?
그러니까,
스파이디가 갑자기 말한다.
인간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노예가 돼라, 그런 이야기-입니까. 그 대가로 빚을 지고, 수십 년간 죽을 때까지 당나귀- 노새처럼 일-을 해서.
부당하다, 당신은 생각한다. 갑작스레 가치 판단을 요구받아서가 아니다. 살아가는 거의 모든 순간이 고단하고 힘들기는 했지만, 자신을 노새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노예라고 생각해본 적도. 무언가 말을 하려다 당신은 그만둔다. 스파이디가 다시 말한다.
확인해 보셨습니까.
네?
리턴- 시술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셨습니까. 인간으로 돌아간 것에 만족-하던가요. 행복- 해 보였습니까. 그- 사람들.
죄송합니다. 시술 후 일들까지는 제 업무 영역이 아니라서요.그 말대로, 그건 의료지원팀의 영역이다.그렇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구에 돌아온 건, 돌아오는 걸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스파이디가 몸통 앞쪽의 두 팔을 움직여 손을 한데 모으고, 맞잡는다. 그렇게 하자 그녀는 인도의 여신상처럼 보인다.
우리는, 실패했습니다.
기계인간이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
기계 몸에 적응하는 건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시간이 가면서 조금씩 쉬워졌습니다. 그게 어떤 느낌인지는 사람마다 달랐는데, 제 경우엔 제가 뜨겁게 녹인 플라스틱이었다가 점차 굳어서 딱딱해지고, 마침내 팔과 다리가 있는 제대로 된 몸으로 변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이 개복 수술을 받으면 처음에는 장기들이 원래 위치에서 이탈- 벗어나고 상처도 생기기 때문에 아무것도 소화시키지 못하지요. 그러나 조금 지나면 그것들이 원래 위치를 찾아 자연스레 자리를 잡고, 다시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게 됩니다. 새 몸에 적응하는 과정도 비슷합니다. 늘어난 팔과 다리를 움직이고, 더 이상 몸속에 어떤 기관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엔 약간의 연습과 시간이 필요했지만, 화성에선 그 몸이 편했습니다.
피부로 태양광선을 받아들이고, 육체노동을 통해 그것을 소화시키는 생활에 우리는 조금씩 익숙해져 갔습니다. 태양은 무한히 공짜였고 해야 할 작업은 많았습니다. 이해가 되실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상당히 단순하고 명쾌한 데가 있는 삶이었습니다.
믿어-지십니까. 돈이라는 것을 쓰지 않아도 살 수 있었습니다. 돈을 벌지 않아도 도태되거나 삶이 위협당할 일이 없었고, 공허할 것 같았지만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공허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의 몸이 똑같이 생겼다는 사실 또한 신기하게도 별로 괴롭지가 않았습니다. 나와 네가 다르지 않고 같다는 게, 그 순간에는 다행으로 느껴졌지요.
새로운 의사소통 방식에도 문제될 게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접촉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내밀하게 생각과 감정을 교환할 수 있었지요. 일단 적응이 된 다음에는 지금의 인간처럼 음성이나 문자 언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편한 방식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새로운 언어를 발명해낸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첫 해에 우리는 우리의 뇌가 연결되는 방식을 패턴화해 전자신호로 된 언어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접속을 하고 끊는 일을 반복하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아에 일종의 세포벽 같은 최소한의 경계를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 결과 기이- 기적적으로, 개별적인 인격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하나의 공동체로 존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낮에는 각자 흩어져 화성 개조 작업을 하고, 밤에는 서로에게 접속해 토론을 했습니다. 오프라인에서 각자 경험한 것을 온라인에서 공유하고, 그것으로 다시 각자의 오프라인 상태를 업그레이드하며 생활했습니다.
토론의 주제도 다양했습니다. 어떤 밤에는 다음날 해야 할 공동작업을 세부까지 들어가 정교하게 논의하기도 하고, 어떤 밤에는 우리의 길어진 수명, 전자뇌를 지니고 있긴 하지만 시간이 가면 기능이 점차 쇠퇴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생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이런 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철학적인 대화가 오갔습니다. 우리가 출발부터 안고 있던 한계에 대해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자본에서 독립- 벗어나기 위해 모순되게도 자본의 힘을 빌어 기계 몸으로 갈아탄 일 말입니다. 자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몇몇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그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겐 어떤 원칙에 결벽적으로 얽매이는 것보다 앞으로 인류 전체를 우리와 같은 존재로 바꾸는 일이 가능할까, 이런 삶의 방식을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모든 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너무 순조로워서 우리 자신도 믿을 수 없을 정도였지요. 우리는 우리가 인류의 미래 모습이라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동의했습니다. 화폐 경제가 안고 있던 무수한 문제점들에서 벗어나는 일이 가능하다는 걸 확인했다는 점만으로도 어느 정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구 인류 전체에 비하면 우리는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나쁘지 않은 시작이었습니다.
*
사랑하는 당신. 당신은 나를 사랑함으로써 어떤 장소로는 영원히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다. 돌아갈 수 없는 장소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는가. 그건 당신이 흐르는 피인데 어느 날 갑자기 혈관이 사라진 것을 깨닫는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당신이 좋아하던 소박한 가게가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 버렸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붉은 페인트로 벽에 칠해진 커다란 엑스 표시를 보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거울을 깨뜨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에게 기쁨을 주고자 노력할 것이다.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줄 수 있는 종류의 찬란하고 명징한 기쁨을. 당신은 아마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진심으로 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일이 잘 되어간다면. 겨울이 너무 가혹하지 않다면. 그러나 그 기쁨을 느낄 때,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장소에, 당신이 모르는 사람이 되어 서 있을 것이다. 누구도 당신이 예전의 그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
그렇기 때문에 사망자들이 나왔을 때 적잖이 동요- 당황했던 게 사실입니다. 정착한 지 5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접속이 끊긴 사람들이 뇌의 작동을 멈춘 채 극지방 부근에서 발견되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고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발견되는 사람들이 늘어갔습니다. 우리가 처음 정착한 곳은 화성의 적도 근처였기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생명활동을 정지하기 위해 추운 지방으로 향한 것이라면 꽤 먼 거리를 걸어가야 했을 겁니다. 이유를 전혀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당황한 채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즈음 네트워크에 접속한 우리 모두의 뇌에 한 덩어리의 낯선 개념이 공유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건 말하자면 인간의 육체에서 추출된 몇 가지 경험들을 압축해놓은 가상현실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주 사소한 경험, 그러니까 토사- 모래가 손바닥을 따끔따끔 찌르는 느낌, 바다에서 나는 냄새와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감각, 잘 내린 커피와 담배의 향, 켄터키프라이드치킨의 맛, 뜨거운 물에 세척- 샤워를 할 때의 느낌, 그리고 연인과의 친밀한 포옹, 그런 것들이 한데 뒤섞여 들어 있더군요. 마치 팬시 상점에서 파는 십대용 선물 같긴 했지만 그것이 자극적인 경험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건 우리가 몸을 바꾼 뒤로, 화성에 온 뒤로 완전히 잊고 있던 것들이었으니까요. 비록 인공적인 것이기는 했지만 너무도 진짜 같았고, 잠깐 동안이지만 우리는 우리가 다시 인간의 몸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전자신호로 그런 감각 덩어리를 창조해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감각기관이 더 이상 없다고 해도 인식하는 건 뇌에서 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것을 만들어 배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죽음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한 건 그때쯤이었습니다. 드러내지는 않지만 다시 인간의 몸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견디지 못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말하자면 루머였지요.
프로젝트 참가자들이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었는지 혹시 아십니까. 반쯤은 자신의 육체를 포기할 만큼 이 프로젝트 자체에 믿음과 애정이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주로 학자와 연구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반쯤은 빚에, 자본이 만들어낸 범죄와 폭력에 내몰린 사람들, 그 악순환의 쳇바퀴에 매달려 간신히 돌아가고 있던 사람들, 쫓겨다니며 은신처를 찾고 있던 사람들, 자발적으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신체를 포기할 지경에까지 이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지구에서 더 이상 인간으로 살 수 없어 마지막 극단을 택한 사람들 말입니다. 저는, 그래요, 전자 쪽이었고,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말 그대로 뇌가 직접 연결되는 동료가 되는데 이해하지 못할 게 뭐가 있겠느냐고 생각했지요.
인간의 몸으로 돌아간다.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게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고, 다소 격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저도 그랬지요. 자본주의의 폐해들이 재차 상기되었고, 우리가 왜 이곳에 왔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는 신랄한 비판이 퍼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비판을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더군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성적인 토론처럼 출발했으나 결국에는 서로를 상처 입히는 개념들이 대량 유통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간은 결국 사유재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하다가 갑작스레 지구에서의 과거를 들춰내며 도덕적으로 서로를 비난했고, 다른 사람들은 아직도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공동체의 존속 자체에 의미가 없지 않겠느냐고 화를 내며 모두를 교정- 가르치려 들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근원을 그렇게까지 억지로 부정하는 것이 더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돌아가 살고자 하는 일이 무엇이 잘못된 거냐고 누군가가 물었고, 모두가 침묵했습니다. 가치를 두고 있는 부분이 서로 너무 달라서 대화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데 모두 똑같은 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난해-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망자들이 예전과는 다른 규모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죽음에 혼란을 느끼고 동요했지만, 함께 온 인간 관리자들에게 조사를 부탁하는 일 말고는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우연히 극지방 쪽으로 이동하다가 자연재해를 만난 것일까요? 그들의 뇌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따뜻한 지역에서 아무런 전조 없이 돌연사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원인을 밝혀낼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때쯤엔 원인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예전만큼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7년째 되던 해, 개조 작업 대부분이 우리가 만든 기계들에 의해 자동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시점에 우리는 지구로 돌아가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인간들의 판단이었지요. 공동체 실험은 실패했으니 인간의 몸으로 돌아가 다시 삶을 시작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대 의견은 미약했습니다. 그때쯤엔 우리 대부분이 피로에 젖어 있었으니까요. 공동체 인구의 5분의 1이 의문사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공동체도 상당 부분 와해되어 있었지만 우리 각자도 무력감과 권태에 시달렸습니다. 그건 인간 사회에서 경험하던 것과는 또 다른 무력감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쇄신해보려는 사람들이 있었고, 대책을 마련하려는 논의도 계속되었지만 이제 며칠, 혹은 몇 달간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단지 생명기능만 유지하며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상태였습니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지구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우리가 잊고 있었던 건, 우리가 실패를 겪는 동안 이쪽 세계가 더 나빠졌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요. 그동안 강대국들의 정상- 수뇌부가 보수적인 세력으로 교체된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이 나라에서도 정권이 바뀌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의 몸으로 옮겨오는 시술을 받을 때 우리는 아무것도 지불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국가가, 그리고 세계 공동체가 우리를 지원해주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인간 몸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비용을 부담하게 해서 그들의 남은 평생을 빚에 가둬 놓다니요? 제가 알기로, 사람들이 육체를 포기하면서까지 낯선 행성으로 떠난 건 그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지 그런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게는 그들의 선택을 옳다 그르다 판단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다시 인간의 육체로 돌아갔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비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함께라고 생각했던 우리가 바라보는 곳이 사실은 전혀 무관- 달랐던 건지도 모른다는 씁쓸함이 있습니다.
그래요, 정확히 어떤 이유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그렇게 해서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중 어떤 사람들은 왜 죽었을까요. 우리는 왜 실패했을까요. 그렇지만 실패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치욕을 감수하면서까지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사정이 있듯, 저에게도 저만의 사정이 있습니다.
그러니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발 저의 몸을 태워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화성으로 돌아가 제 동료들 곁에 남을 수 있도록.
*
오래 전 어느 날 저녁을 당신은 기억한다. 새로 들어간 회사였다. 사장은 홍차를 즐겨 마시고 점심시간에 사무실에서 골프 연습을 하는 남자였다. 영어를 못하는 그를 위해 당신은 영국에 본사를 둔 회원제 섹스 클럽의 멤버십을 매번 대신 갱신해주곤 했다. 가끔은 그가 만나는 여고생들, 오사카나 피츠버그에 사는 그녀들을 위해 짧은 편지도 써주었다. 그런, 회사였다. 그래도 그 낡은 사무실 구석자리가 병원의 보호자 침상보다는 견딜 만했다. 아버지는 그때 이미 위암 투병 중이었다. 운이 좋았더라면 당신은 조금 더 순진한 소녀로 남을 수 있었으리라. 어쩌면 세상에 상처받은 표정 같은 것도 가끔씩은 지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사회로 나와 당신이 첫 번째로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말과 생각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두 번째로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이 땅에서 말과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혼자서 야근을 하다 지루해진 당신은 네트에 접속했다가 우연히 그 뉴스를 발견한다. 당신이 알던 그녀의 이름이 거기 있다.
사진 속의 그녀는 몇 명의 사람들과 함께 나란히 서서 침착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시술 전, 그들의 몸은 아직 그대로다.자발적으로 인간의 몸을 포기하다. 당신은 헤드라인에 놀란다. 그것이 여전히 놀랍다는 사실에 더욱 놀란다. 자본주의 이후의 삶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건 반세기 전이다. 화성은 오래 전부터 지구인들이 살 곳으로 예정돼 있었다. 당신은 오랫동안 이 세계가 아닌 어딘가를, 인간을 넘어선 존재를, 다른 형태의 사회를 상상해온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런 이야기를 자장가처럼 물리도록 들으며 잠들고, 우유처럼 마시며 성장했다.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충격을 받는다.
그녀가 자신과 중학교 삼 년을 함께 보낸 그 소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만 당신은 조금 궁금하다. 어떤 일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저 영원한 허구에 불과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현실이 된다. 어째서일까.
도발적인 표정을 한 기자가 그녀에게 묻는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장애를 안고 태어나 평생을 살아간다고. 신이 준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온전하고 건강한 몸을 그토록 쉽게 포기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느냐고. 그녀는 대답한다. 소중하기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는 게 아닐까요. 아무것도 잃거나 바꾸지 않고, 어떤 고통도 감당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삶을 얻을 수는 없어요.
당신은 곧 기계가 되어 낯선 행성으로 떠나게 될 그녀의 얼굴을 본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
당신은 김밥 하나를 입에 넣는다. 달다. 하나씩 하나씩, 시간을 들여 김밥 한 줄을 다 먹는다. 스파이디가 돌아간 뒤 당신은 회색으로 얼어붙은 그녀의 본래 몸을 임시 냉동고에 밀어넣기 전에 삼십 분쯤 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솟아난 것은 식욕이었다.
당신은 한 줄을 끝내고 한 줄을 더 먹는다. 입술에 묻은 참기름을 혀로 핥는다. 참깨 한 알이 책상 위로 굴러떨어진다. 당신은 그것을 손가락으로 찍어 입에 넣는다. 아름답게 죽고 싶어 하는 그녀에 대해 당신은 생각한다.
돌아갈 배를 불태운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본다. 무척이나 멋진 말이다. 당신은 그 말을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현실로 옮기는 그녀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갖고 싶어도 결코 가질 수 없는 젊고 아름다운 몸을 부러진 성냥개비인 양 함부로 소각로에 넣고 싶어 하는 그녀를. 거기에 신념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그녀를.
대장과 식도와 위와 쓸개의 삶, 먹고 싸는 일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이 삶을 거부할 수 있는 그녀를. 세계의 이런 불공평함을. 견뎌야 할까. 견뎌도 괜찮은 것일까.
당신이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것들에 그녀는 아무런 존중심도 느끼지 않는다. 이를테면 몸 안에서 들려오는 작은 심장 소리와 열 달 동안의 기다림 같은 것들.
그녀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양수 속을 휘젓는 작은 팔다리 사진 때문에 끝내야 마땅한 관계를 끝내지 못하고 계속해온 당신을. 한 번도 자신만을 위해 살아보지 못한 삶, 그 나머지마저 기꺼이 다른 몸을 지키는 데 바칠 준비를 하며 입술을 앙다무는 당신을.
아니, 당신이 원하는 건 이해받는 게 아니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좋으니 당신이 경험한 것들을 그녀에게도 고스란히 경험하게 하고 싶다. 이 진흙탕 같은 삶이 그녀가 신은 스타킹에도 작은 얼룩 정도는 남기기를 당신은 소망한다.
당신은 책상 위에 놓인 시술 동의서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서명난은 누구나 쉽게 서명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도와줄게, 내가. 당신은 가만히 속삭인다.
*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절차가 남았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럼 여기서 잠시 대기하세요. 곧 검사를 할 거고, 그 다음에 수술실로 이동하실 거예요.
네.
간호사가 나가고 의사가 들어온다.
보호자는요?
의사가 묻는다. 남편에게선 여전히 연락이 없다. 그는 아마도 연인과 함께 오후 햇빛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망설임 끝에 당신은 시어머니에게 연락해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교회에 가야 해서 올 수 없다는 말뿐이었다.
없어요, 혼자예요. 당신은 대답하고 일부러 씩 웃어 보인다. 건강도 골반 상태도 좋지 않아 당신은 진통을 기다리지 않고 수술을 하기로 했다. 그래도 동의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중얼거리던 의사는 당신의 얼굴을 보더니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작고 낡은 병원의 분만대기실. 당신은 어지러운 꽃무늬 벽지를 말없이 들여다본다. 노란 형광등 불빛이 눈을 자극한다. 차갑고 축축한 수술대의 감각이 허벅지를 감싼다. 당신은 눈을 감는다. 숨을 크게 쉰다. 아무렇지 않다. 정말이지 아무렇지 않다. 지금까지 그래온 것처럼 어떻게든 되어갈 거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
관이 닫히기 전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얼굴을 당신은 떠올린다. 정말 괜찮겠느냐고, 당신은 물었다.
괜찮지는 않아요, 스파이디가 대답했다.
괜찮지는 않지만, 그저 없었던 걸로 할 수는 없는 일도 있는 거니까요. 저는 지금까지 언제나 돌아갈 곳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돌아갈 곳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저는 항상 돌아갈 곳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나는 이제 다른 곳을 향해 갑니다.
천천히 관이 밀려들어가고 커튼이 닫혔다. 소각 중임을 알리는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인간의 역사만큼 낡은 방식으로, 몸 하나가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눈물샘이 없는 기계인간의 몸 곁에서 만삭의 몸으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이, 왜 울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는 점이 당신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더 크게 소리내 울었다. 그때 바보같이 다 쏟아버린 덕에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고, 다행이라고, 분만대기실에 누운 당신은 생각한다.
왜 개인적으로 시간과 품을 들이면서까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을까. 당신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토록 흥미로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진심으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녀와 당신은 너무 달랐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도 불경스럽다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당신이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리는 행위에 대한 적대감과 의아함도 연해지기는 했지만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와 동시에, 그냥, 그렇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것이 그녀가 그토록 원하는 것이라면, 그렇게까지 절박한 소망이라면, 말이다.
돌아갈 수 있다 해도,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다 해도 어떤 선택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당신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당신은 알게 되었다. 그건 이해받지 못해도, 설명할 수 없어도 지킬 수밖에 없는 어떤 약속이다.
촉촉한 젤을 바른 검사기구가 당신의 둥근 배를 누르며 지나간다. 화면을 보던 의사가 걱정스럽게 말한다. 다른 데는 다 정상이에요. 그런데 아가가…… 탯줄을 감고 있는 것 같은데요.
*
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온다. 내가 저 자비 없는 세상으로 내몰리는 날. 당신이 내게 빌려준 지혜가 모두 산산이 흩어지고, 내가 백지보다 희고 치어보다 연약한 존재로 돌아가버리는 날. 혈관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당신의 시간과 기억을 내 안에 조금이라도 남겨두기 위해 나는 입술을 다물고, 주먹을 꼭 쥐어본다. 두려운가.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의연하게 팔다리를 움직이던 나는, 그것이 내 눈앞에, 미지근한 물속에 떠 있는 것을 결국 발견한다.
그것은 밧줄처럼 생겼다. 그것은 가만히 흔들릴 뿐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내게 해를 끼칠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보자 나는 어째선지 점점 슬퍼진다.
나는 생각한다. 당신은 혼자서 나를 낳는 중이다. 누구도 당신과 나를 도와주지 않아서다.
앞으로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누구도.
아무도 없다.
잘되지 않을 것이다.
잘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해야겠는가. 모든 것을 되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실패할 거라면.
그렇다면 당신이 나를 알지 못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당신을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 그렇게 하겠다. 그렇게 해야겠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밧줄을 끌어당겨 목에 감는다. 가만히 호흡을 멈추고 눈을 감는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세계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아래위로 찢어진다. 코와 귀와 입으로 무언가가 와글거리며 쏟아져 들어온다. 엄청난 빛이 내 볼을 납작해질 정도로 내리누르더니 눈꺼풀을 비집고 꿈틀거리며 들어온다. 시끄러운 소리와 얼음 같은 한기가 나를 아래위로 쥐고 흔들어 놓는다.
내가 숨어 있던 작고 따스한 언덕이 무너져 내린다.
너무도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서, 나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아기도, 산모도 건강하시네요. 엄마, 여기 잠깐 보세요. 아가예요. 손가락 발가락 다 정상이고요. 왕자님이에요.
나는 나 자신의 울음소리 사이로 귀를 기울이지만, 내가 기대하던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보호자 되세요?
보호자- 아…… 네.
아…… 화성에서 오셨나 봐요. 와, 이렇게 분만실까지 들어오신 분은 처음인데요? 어떻게 되세요, 아기 엄마랑?
이번에도 잘 들리지는 않지만 아주 작게, 삐삣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럼…… 친구분, 이쪽으로 오세요. 탯줄을 잘라주시겠어요?
철컥거리는 소리. 기잉- 금속 관절이 펴졌다 굽혀지는 소리. 도롱뇽을 닮은 네 개의 흡착판이 가위 손잡이에 차례로 밀착되는 소리.
그 다음은 아주 빠르다.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당신에게 경고하려고 했다. 나를 사랑하지 말라고. 나는 일어난 모든 것을 보았고 일어날 모든 일을 알고 있다고.
그러나 내가 막 그 말을 하려는 순간 나를 부르는 당신의 나직하고 지친 음성이 들려온다. 그 순간 나는 깨닫는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곧이어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목을 휘감아 죄어오던 것들, 당신과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형틀에 갇힌 슬픈 예감들과 벌레처럼 통통하게 스스로를 살찌워가던 죄의 감각 들이 한꺼번에 잘려나가며 두껍고 포근한 망각이 나를 덮어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안녕. 이것이 나의 마지막 기억이다. 나는 이제 다른 곳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