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 가는 가을밤, 나는 한 잔의 소주를 생각한다. 아울러 빛나는 거리 광화문을 추억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옆에서 코를 골면서 자고 있는 아내의 엉덩이가 산만큼이나 크다. 애를 둘씩이나 뽑았으니 그럴 만도 하지, 라고 이해하면서도 영 마음에 차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다.
원래 아내는 엉덩이가 예쁜 여자였다. 성웅 이순신 장군이 위용을 뽐내며 큰 칼 옆에 차고 버티고 서 있는 빛나는 거리, 광화문에서 나는 아내의 우윳빛 엉덩이를 처음 봤었다.
대학교 2년을 마치고 입대를 한 나는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휴가를 맞이하였다. 육 개월 만에 밟아보는 서울의 거리는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환상적이었다. 매연이 가득한 뿌연 하늘도 보기에 참 좋았다.
부모님께는 건성으로 인사를 드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삼총사로 이름을 날렸던 상구와 홍석이 녀석에게 부리나케 전화를 때렸다.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나를 혈육처럼 살갑게 맞아주었다.
우리는 일단 종로서적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종로,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종로서적 뒤에 있는 주단 가게들과 쏘노라마, 선비촌과 반쥴이라는 이름의 커피숍과 낙원상가 밑에 자리 잡고 있는 돼지족발들이 떠나간 애인처럼 그리웠다. 나는 종로에서 처음 술을 배웠고, 그 뒷골목에서 지구를 벗 삼아 오바이트를 했었다.
종로서적 앞은 책을 사러 나온 사람보다는 사람을 만나러 온 인파들로 북적댔다. ‘사람을 읽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독서다.’ 라는 명언을 생각해보면, 종로서적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셈이었다.
숱한 사람들 틈에서 서로를 발견한 우리는 손짓을 해대고, 소리를 질러가며 겨우 해후할 수 있었다. 서로의 손을 붙잡고 펄쩍펄쩍 뛰면서, 우리는 계집애들처럼 신이 났다. 오랜만에 만난 놈들이 너는 군복이 잘 어울리니, 말뚝이나 박는 게 어떠냐고 썰렁하기 그지없는 농담을 해대도 마냥 즐거웠다. 그렇게 종로에서의 나는 무조건 행복했다. 에비 죽인 원수를 만나도 그냥 웃지요,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날의 나는 그랬다.
상구의 제안에 따라서 우리는 낙원의 상가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결코 부유한 족속들이 아닌,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라는 경제학도 상구의 주장에 홍석이와 나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돼지의 발이 그렇게 맛났던 적은 아마 내 생애에 다시는 없을 것이다. 돼지발과 소주, 그 환상적인 콤비를 한번 상상해 보시라. 어찌 가슴이 뛰지 않겠는가!
1차로 낙원상가를 끝내고, 다시 종로거리에 선 우리는 다음 계획을 수립하는데 골몰하게 되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부유한 종족이 절대 아닌, 우리로서는 다음 차를 준비한다는 게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특히 민간인 신분인 내 친구들의 고민은 꽤나 심각해 보였다. 명색이 첫 휴가를 나온 군인 친구에게는 필수적이랄 수 있는 여자를 조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고민의 핵심이었다. 휴가병에게 여자 하나 얹어줄 수 없는 자신들의 경제적인 무능이 한스러워 푹푹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내가 됐으니 어디 가서 소주나 한잔 더 하자고 달래도 그들의 처진 어깨는 도저히 펴질 줄을 몰랐다.
마침내 홍석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한 사발’이라는 별명답게 묵직한 그의 위아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우리, 광화문으로 가자.”
상구와 나는 광화문으로 가자는 홍석이의 제안을 따르기로 했다. 뾰족한 대안도 없는 주제였다. 상구와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로 마냥 홍석이의 뒤꽁무니에 붙었다. 아무래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홍석이를 필두로 해서 셋이 도착한 곳은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는 사직동으로 통하는 좁은 골목 어귀의 다 쓰러져가는 오래된 감자탕 집이었다.
“야, 인마. 진즉에 감자탕 먹을 거면 와이.엠.씨.에이 뒷골목이 훨 낫지, 뭐 지랄할 일이 있다고 여기까지 기어 오냐? 싱거워 빠진 놈 같으니라구…….”
도착할 때까지 아무 불평 없이 묵묵히 홍석이의 뒤를 따랐던 상구의 분노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입은 다물고 있었지만, 내 속마음도 상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뭐 특별한 이벤트라도 있는 것처럼, 광화문으로 가자고 외쳤던 게 겨우 흔한 감자탕 하나 먹자는 시추에이션이었다니, 기가 막혔다.
“여긴 좀 달라…….”
잔뜩 뿔이 난 상구에게 홍석이의 천근만근 같은 입술이 움직여서 겨우 만들어낸 말이었다.
여긴 좀 다르다는 흥석이의 말을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상구와 나는 곧 알게 되었다. 이곳 감자탕 집에는 공공연한 비밀이 하나 숨겨져 있다는 것을. 그 비밀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었다. 남자용 소변기 옆에 여자용 화장실이 나란히 붙어있었고, 놀랍게도 여자용 화장실의 문틈이 대단히 넓어서 안을 힘들이지 않고 훤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감자탕 집에 오는 남자 손님들은 여자 손님이 볼일을 보러 가면 경쟁을 하듯이 지린 걸음으로 뒤를 쫓아간다는 것이 홍석이의 설명이었다. 홍석이는 그것이 아무래도 주인의 탁월한 상술일 거라는 나름의 분석까지 내놓고는 군인 친구인 나를 쳐다보고 씩 웃으면서 자신의 우정을 과시해 보였다. 심지어는 내 귀를 바싹 당겨서, 네가 우리 중에서 일 번 타자야, 라고 속삭이기까지 했다.
아무튼 친구들의 눈물 나는 우정 덕택에 졸지에 일 번 타자가 된 나는 마침내 소변기 앞에 서고야 말았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그녀의 적당히 살찐 아담한 아이보리 색깔의 엉덩이를……. 나는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나는 얼굴도 보지 못한 그녀의 엉덩이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우정의 친구들까지 내버리고 그녀의 엉덩이를 쫓아서 방황하던 나는 그날 밤에 생애 최고의 휴가를 보낼 수 있었다. 빛나는 거리, 광화문의 가을밤이 저대로 깊어가고 있었다.
아내의 산만큼 커진 엉덩이 위를 등반하는 개미 한 마리를 발견한 나는 놈을 용서치 않는다. 아내의 엉덩이에 묻은 작디작은 혈흔을 정성스레 닦아주고 난 나는 내일, 아내와 함께 광화문을 순례할 것을 결심한다. 이제 결혼 10주년 전야에 품어본 작은 추억 한 토막의 막을 내리고자 한다.
*참, 추신 하나! 남자들이여, 기대하지 마라. 세종문화회관 뒤에 있던 그 감자탕 집은 지금은 세븐 일레븐으로 변모하였노라. 행운은 나 하나로 족하노라!
첫댓글 눈이 아픕니다. 12포인트로 키워주사이다.....ㅎ
회장님 말씀대로 12로 했더니, 보기가 훨씬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