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의 학자로서 경주최씨의 시조입니다. 자는 고운·해운이며, 아버지는
견일로 숭복 사를 창건할 때 그 일에 관계한 바 있습니다. 경주 사량부출신입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본피부출신으로 고려 중기까지 황룡사와 매탄 사 남쪽에 그의
집터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최치원 자신이 6두품을 '득난'이라 하고, 5두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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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두품은 "족히 말할 바가 못 된다"라고 하여 경시한 점과, 진성 왕에게 시무책을
올려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관등인 아찬을 받은 점 등으로 미루어 6두품
출신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18세의 나이로 예부시랑 배찬이 주시한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습니다. 그 뒤 동도에서 시작에 몰두했는데, 이때 금체시 5수 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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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 부 30수 1권 등을 지었습니다. 876년(헌강왕 2)
강남도 선주의 표수현위로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공사 간에 지은 글들이 후에
중산복궤집 5권으로 엮어졌습니다. 877년 현위를 사직하고 박학굉사 과에 응시할
준비를 하기 위해 입산했으나 서량이 떨어져 양양 이위의 도움을 받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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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회남절도사 고변에게 도움을 청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했습니다.
879년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이 되어 황소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으로
서기의 책임을 맡아 표장. 서계 등을 작성했습니다. 880년 고변의 천거로
도통순관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에 임명되고 비은어대를 하사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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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군무에 종사하면서 지은 글들이 뒤에 계원필경 20권으로 엮어졌습니다.
특히 881년에 지은 “격황소서” 는 명문으로 손꼽힙니다. 이듬해 당나라에서 지은
저술들을 정리하여 왕에게 헌상했으며, 대숭복사비명 ·진감국사비명 등을 지었습니다.
이처럼 문장가로서 능력을 인정받기는 했으나 골품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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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에서 배운 바를 자신의 뜻대로 펴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외직을 청하여
대산·천령·부성 등지의 태수를 역임했습니다. 당시 신라사회는 극도의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하대에 들어 중앙귀족들의 권력쟁탈과 함께 집권적인 지배체제가
흔들리면서 지방 세력의 반발과 자립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889년(진성 왕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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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이 궁핍하여 주군에 조세를 독촉한 것이 농민의 봉기로 이어지면서 신라사회는
전면적인 붕괴의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891년 양길과 궁예가 동해안의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에는 견훤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습니다.
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재직 중이던 893년 당나라에 보내는 하정사로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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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으나 흉년이 들고 각지에서 도적이 횡행하여 가지 못했습니다.
그 뒤 다시 입조 사가 되어 당나라에 다녀왔다. 894년 2월 진성 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습니다. 그가 올린 시무책의 내용을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집권
체제가 극도로 해이해지고 골품제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심화됨에 따라 야기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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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진성왕은 이를 가납하고 그에게 아찬의 관등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신라는 이미
자체적인 체제정비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으므로 이 시무책은 실효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897년 진성왕의 양위로 효공왕이 즉위했는데, 이때 진성왕의 양위표와 효공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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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위표를 찬술하기도 했습니다. 그 뒤 당나라에 있을 때나 신라에 돌아와서나 모두
난세를 만나 포부를 마음껏 펼쳐보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함을 한탄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 산과 강, 바다를 소요자방하며 지냈습니다. 그가 유람했던 곳으로는 경주
남산, 강주 빙산, 합주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 별서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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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함양과 옥구, 부산의 해운대 등에는 그와 관련된 전승이 남아 있습니다.
만년에는 가족을 이끌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모형인 승려 현준 및 정현사와
도우를 맺고 지냈습니다. 904년(효공왕 8) 무렵 해인사 화엄원에서 법장화상전을
지었으며, 908년 신라수창군호국성팔각등루기를 지었고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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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고려 태조 왕건이 흥기할 때 비상한 인물이 반드시
천명을 받아 개국할 것을 알고 "계림은 황엽이요 곡령은 청송"이라는 글을
보내 문안했다고 합니다. 이는 후대의 가작인 것으로 보이나 신라 말에 왕건을
지지한 희랑(希朗)과 교분이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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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스스로 유학자로 자처했답니다.
그러나 불교에도 깊은 이해를 갖고 있었고, 비록 왕명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선사들의
비문을 찬술하기도 했습니다. 선종뿐만 아니라 교종인 화엄종에도 깊은 이해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화엄종의 본산인 해인사 승려들과 교유하고 만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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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은거한 사실로부터 짐작할 수 있는 바입니다. 도교에도 일정한 이해를
지니고 있었는데, 삼국사기에 인용된 난랑비서문에는 유·불·선에 대한 강령적인
이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편 문학 방면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으며 후대에
상당한 추앙을 받았습니다. 그의 문장은 문사를 아름답게 다듬고 형식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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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된 변려 문체였으며, 시문은 평이 근아 했습니다. 당나라에 있을 때 고운·나은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문명을 널리 떨쳐 신당서 예문지에 사륙집·계원필경이
소개되었습니다. 고려의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당서 열전에 그가 입전되지
않은 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그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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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저술로는 문집 30권, 제왕연대력· 부석존자전·석순응전·석이정과
조선시대에 들어와 진감국사·낭혜화상· 지증 대사의 비명과 대숭복사비명을
묶은 사산비명이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으로는 계원필경, 사산비명·
법장화상전이 있으며, 동문선에 실린 시문 몇 편과 후대의 사적기 등에 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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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 글의 편린이 전합니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에
배향, 문창 후에 추봉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태인 무성서원, 경주의 서악서원
등에 종향되었습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 진감국사비, 지증대사적조탑비,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 사산비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 중산복궤집, 석순응전,
법장화상전 등이 있습니다.
2015.8.23.sun. 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