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기 하강식
김한석
등산 갔다 내려오는데 스피커를 타고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널따란 연병장의 군인들이 축구시합을 하다 부동자세로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국기에 주목한다. 군인들의 그 진지한 자세가 매우 듬직해 보인다.
언덕 위를 걷고 있던 나는 모처럼 보는 진귀한(?) 광경에 가슴이 뭉클했다. 등산복 차림의 보잘 것 없는 노인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구부러진 허리를 꼿꼿이 펴고 국기 하강식에 참여하고 있지 않는가. 이게 얼마만인가? 뒤따라오던 등산객이 희끗 쳐다보며 지나친다. 그들도 수없이 경험했을 터, 나와 함께 나란히 보조를 맞춘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얼핏 스친다. 어쩌면 그런 기대보다 나를 얼빠진 사람으로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뭐라던, 나로선 국가를 위해 조그마한 성의 표시라도 했다는 자부심에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옛날에는 오후 5시가 되면 학교나 관공서에서는 어김없이 국기 하강식을 가졌다. 어디에서든 애국가가 들리면 하던 일을 멈추었고, 길을 걷다가도 그 자리에 서서 국기를 향해 경례의 자세를 취했다. 국기를 찾느라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모습들이 정겹게 떠오른다. 그토록 온 국민이 태극기 앞에 하나 되어 애국을 다졌으니 국기(國旗)와 국가(國歌)는 나라사랑의 상징이었다.
언제부터인지 국기 하강식이 슬그머니 사라져버려 이제 어디에서도 그 광경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미래의 주인공을 길러내는 학교에서만은 국기에 대한 존엄과 애국가에 담긴 나라 사랑의 실천이 긴요한데도 말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마지막 보루인 군부(軍部)에서 조차 국기 하강식이 폐지될까 하는 두려움이다. 군인은 나라의 간성(干城), 특히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군인에게는 심리상태가 매우 중요하다. 혹시라도 군내부에 민주화, 자유화의 바람이 더 거세져 단체주의, 국가주의의 잔재라는 논리에 떠밀릴까봐 조바심마저 든다.
이런 사회분위기에 동조라도 하듯, 얼마 전 전국적인 문인단체 행사에서는 국기에 대한 경례만 간단히 했을 뿐 애국가제창은 아예 꼬리를 내렸다. 기성세대의 애국사상마저 희박해지나 싶어 마음이 씁쓸했다.
나는 한 문학단체 모임 행사를 준비하면서 애국가를 부르자고 제안했더니 간부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의 망령이라도 되살아난 것 아니냐는 눈빛이었다.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했더니 다행히 중년, 노년 문인들이 목청이 터져라하고 애국가를 불러댔다. 오랫동안 어디에서도 부를 기회가 없었는데 이토록 신나게 소리 내어 부르니 속이 후련하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 것일까. 속에 감춰진 애국심이 이 기회를 틈타 분출한 것이리라. 나는 그들의 씩씩한 모습에서 나라의 희망을 보는 듯 했다.
요즘 시중에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에서의 한 장면. 베트남 기술자로 떠나는 문제를 놓고 부부간에 심각한 말다툼이 벌어지던 중, 어디선가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주인공 덕수는 재빨리 일어나 부동자세로 가슴에 손을 얹는다. 성에 차있는 아내의 하소연에 시달리고 있던 덕수에게는 애국가 소리야 말로 구세주를 만난 격이었다. 계면쩍어하던 아내 영자도 주위의 분위기에 마지못해 따라 일어선다. 덕수는 국기 하강식으로 인하여 용케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박대통령이 국무회의 중, 영화에 나오는 국기에 대한 경례 장면을 애국심의 사례로 거론한 것을 두고, 일부 논객들이 “국민에게 애국심을 강요하는 발언”이라며 비판했다. 다소 코믹컬한 표현이긴 해도 그 때 분위기는 꼭 그랬었다. 그렇게 살았던 그 시절을 실제로 영화화 한 것에 불과하다. 근대화 이전에는 국가가 국민을 위해 베풀어주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나라 사랑만은 대단했다. 그 애국심이 국가번영의 밑바탕이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지난날, 통일진보당의 모임에서는 태극기도 없었고 애국가도 부르지 않았다. 국민 대다수는 그런 사실조차 몰랐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이(李) 모는 명료하게 말했다. “미국엔 국기가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국기가 없다” 또한 “애국가는 독재정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강요하는 것은 전체주의의 발상”이라며 종북 논란에 더욱 불을 지폈다. 사법부의 심판에 따른 정당 해산이 있기까지 그들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철저히 보호되고 자유롭게 활동해왔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우리에게 국가(國家)란 무엇인가? 국민은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국민이 국가를 위해 힘을 모으지 않는다면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워진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가장 보장되고 있다는 미국에서도 성조기에 대한 존엄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하다.
그런데 참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요즘 보도에 의하면 국기 계양과 하강식을 부활하는 문제를 정부에서 논의 중이라고 한다. 나의 국가관이 잘못되지 않았음이 입증되는 것 같아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머지않아 봄이 올 것이다. 산기슭에 봄기운이 돌면 국기 하강식이 있는 군부대쪽으로 등산길에 나서야겠다.
약력
진주 출생. 진주사범 졸업. 법학박사. 진주 부시장, 삼천포 시장 역임.
<에세이21>2005년 봄호로 등단. 산영수필문학회 회장(전). 남강문학회 회장
수필집 <큰물에서 노이소이>
사진은 별첨 할께요.
첫댓글 역시 회장님다운 글입니다
국가관이 투철하고 애국 애족 애민 사상이 뛰어납니다
남강문학회 전국 총회때 애국가를 부르자고 하셨을때
좀 서먹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부르니 눈시울이 뜨겁고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
언제나 좋은 본을 보여주시는 회장님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안병남
국기하강식 아련한 추억입니다.1975년 부터 경기도에서 교직에 있을 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였습니다.
씨름하다가 샅바를 놓고 국기하강식을 한 적도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