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
윤관장군 묘역
사적
323호 명 칭 윤관장군묘(尹瓘將軍墓) 1988.02.27 소재지 경기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4-1 관리자 파주시
윤관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으나, 조선 영조 23년(1747)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임을 주장하여 영조 40년(1764)에 공인되었다. 윤관 장군묘 주변에는 후대에 세워진 비석과 석등이 있다. 위패는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셔졌고, 고려 태조와 충의공신을 모신 숭의전에서 함께
배향되었다.
전문설명
이곳은 고려중기(高麗中期)의 명신(名臣)이며 한때 구성(九城)을 축조(築造)한
윤관장군(尹瓘將軍)의 묘역(墓域)이다.
윤관장군(尹瓘將軍)( ?∼예종(睿宗) 6,
1111년(年))의 자(字)는 동현(同玄)이며, 본관(本貫)은 파평(坡平)으로 시조(始祖) 신달(莘達)(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의
4대손(代孫)이다. 문종(文宗) 때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어사대부(御使大夫),
지추밀원사겸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 등에 이르렀고 요(遼)와 송(宋)나라에 사행(使行)하기도 하였다. 숙종(肅宗)
9년(年)(1104) 2월(月)에 이르러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으로 임명(任命)되어 여진(女眞)을 정벌(征伐)하였는데
소기(所期)의 성과(成果)를 달성(達成)하지 못하고 돌아와
별무반(別武班)(신기(神騎) 신보(神步) 경궁(梗弓) 발화(發火) 등 11개(個)의 특수부대(特殊部隊))을 조직(組織)하여 후일(後日)의
여진정벌(女眞征伐)에 대비(對備)하였다.
일찍이 문종대(文宗代)부터 동여진(東女眞)(완안부족(完顔部族))이 세력(勢力)을
증대(增大), 내침(來侵)하였으므로, 거듭 정벌(征伐)하였지만 이 무렵에도 동북방(東北方)에 자주 내침(來侵)하므로 예종(睿宗)
2년(年)(1107) 10월(月)에는 윤관(尹瓘)을 원수(元帥), 오근총(吳近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任命)하여 크게 여진정벌(女眞征伐)을
행(行)하였다. 장군(將軍)은 17만(萬)의 대군(大軍)을 이끌고 4군(軍)으로 편성(編成), 수륙양면(水陸兩面)에서 일대공격(一大攻擊)을
감행(敢行)하여 함흥평야이북(咸興平野以北)의 여진(女眞)의 근거지(根據地) 135개(個) 촌락(村落)을 점령(占領)하고 선춘령(先春嶺)에 이르러
경계(境界)를 삼았다. 각지(各地)에 장수(將帥)를 두어 성(城)을 쌓아 방비(防備)를 엄(嚴)히 하는 한편, 남방(南方)으로부터 백성(百姓)을
대거(大擧) 이주(移住)시켜 다음해 봄에 이르는 동안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공험진(公 鎭)의
6성(城)과 통태(通泰) 숭녕(崇寧) 진양(眞陽)의 3성(城)을 구축(構築)하고, 4월(月)에 개선(凱旋)하여
추충좌리평융탁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리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에 봉(封)해졌다.
그러나
여진(女眞)은 물러서지 않고 곧 9성(城)에 대한 반격(反擊)을 강화(强化)하였으므로 윤관(尹瓘)은 그 해(예종(睿宗) 3, 1108)
7월(月)에 다시 출정(出征)하였지만 익년(翌年)에 걸친 공방(攻防)의 결과(結果)는 여의(如意)치 않았다. 이 같은
정세(情勢)(여건(與件))하(下)에서 여진(女眞)은 다시 북반(北叛)하지 않겠다는 조건(條件)아래 9성(城)의 환부(還附)를 강력(强力)히
요구(要求)하였으므로 고려(高麗)에서는 예종(睿宗) 4년(年)(1109) 7월(月)에 이를 받아들여 9성(城)은 2년만에 되돌아갔다.
회군(回軍)하게된 윤관장군(尹瓘將軍)은 모함(謀陷)하는 자(者)도 있고 하여 패전(敗戰)의 책임(責任)을 지고 공신호(功臣號)와
관작(官爵)을 삭탈(削奪)당하였으나 곧 예종(睿宗)의 배려(配慮)로 수태보문하시중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의
벼슬이 내려졌다.(예종(睿宗) 5년(年) 12월(月)) 예종(睿宗) 6년(年)(1111년(年)) 5월(月)에 졸(卒)하니 이곳에
안장(安葬)하였고, 처음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나 후일(後日) 문숙(文肅)으로 고쳤으며, 인종(仁宗) 8년(年)(1130)에 예종(睿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고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고려태조(高麗太祖)를 모시는 숭의전(崇義殿)에 배향(配享)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평생(平生) 책(冊)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장상(將相)이 되어 비록 진중(陣中)에 있으면서도 경서(經書)를 갖고
다녔으니 '호현요선(好賢樂善)'함이 당대(當代)에서 제일(第一)이라 일컬어졌다 한다.
이곳 윤관묘(尹瓘墓)는 장후(葬後) 약(約)
500년(年)인 임진왜란(壬辰倭亂)(선조(宣祖) 25, 1592∼동왕(同王) 31, 1598) 전후(前後)에는 후손(後孫)들에게도 그
소재(所在)가 확인(確認)되지 않고 봉분(封墳)과 묘역(墓域)이 제대로 유지(維持)되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인조조(仁祖朝)에 영상(領相)을 지낸 심지원가(沈之源家)의
묘소(墓所)가 광해군대(光海君代)부터 지금의 장군산소(將軍山所) 후강(後崗)에 들어서게 되고, 현종(顯宗) 13년(年)(임자(壬子),
1672)에는 심지원(沈之源)의 묘(墓)가 현(現) 묘역(墓域)(곡장(曲墻))의 바로 뒤에 자리잡게 되었다.
약(約) 백년(百年)을 지난 영조(英祖) 23년(年)(정묘(丁卯),
1747)부터 윤장군(尹將軍)의 후손(後孫)들이 현위치(現位置)가 장군(將軍)의 묘소(墓所)임을 주장(主張)하게되고 동왕(同王)
39년(年)(계미(癸未), 1763)에는 윤씨(尹氏)와 심씨(沈氏) 사이에 분쟁(分爭)이 크게 벌어졌다. 익년(翌年)(40년(年) 갑신(甲申),
1764) 5월(月)에 이르러 영조(英祖)는 부근(附近)에서 윤장군구비(尹將軍舊碑)의 잔편(殘片)이 발견(發見)되었다는 보고(報告)를 받고
봉분(封墳)을 새로히 조성(造成)케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함으로써 이후(以後) 윤관묘소(尹瓘墓所)임이 공인(公認)되게 되었다.
2년후(年後)(영조(英祖) 42, 1766)에는 묘전(墓前) 좌측(左側)에 현존(現存)하는 묘비(墓碑)를 세워 산소(山所)를 찾게된 경위(經緯)를 새겨 넣었다.
8·15광복이후(光復以後) 1966년(年)에
신도비(神道碑)(이은상(李殷相) 찬(撰))를 세우고 1969년(年)에는
심씨(沈氏)와 합의하(合意下)에 묘소(墓所) 뒤편에 곡장(曲墻)을 설치(設置)하고 (현재(現在)의 곡장(曲墻)은 1978년에 개축(改築)한
것임) 문관석(文官石) 망두석(望頭石) 양마석(羊馬石) 동자석(童子石) 장명등(長明燈)을 새로이 설치(設置)하여 (상석(床石)은
교체(交替)) 묘역(墓域)의 풍모(風貌)를 일신(一新)케 하였다.
1973년(年) 7월(月)에 경기도(京畿道)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 제(第)12호(號)로 지정(指定)되고 1979년(年)에는 사우(祠宇) 여충사(麗忠祠)(장군(將軍)의 영당(影堂))를
묘역(墓域) 좌측(左側)에 신축(新築)하는 한편, 신도비(神道碑)를 현(現) 위치(位置)로 옮기고 주위(周圍) 민가(民家)를 철거(撤去),
묘역(墓域)을 확장(擴張)하여 금일(今日)의 면모(面貌)를 갖추었으며, 1988년(年) 2월(月)에 사적(史蹟) 제(第)323호(號)로
지정(指定)되었다.
이상(以上)과 같으므로 현재(現在) 윤관묘(尹瓘墓)에 설치(設置)된 대부분(大部分)의 시설(施設)은
8·15광복이후(光復以後)의 것이며 봉분(封墳)(고(高)1.5m, 직경(直徑)5.5m)도 영조(英祖) 40년(年)(1764) 이후(以後)에
조성(造成)한 것이다. 다만 묘전(墓前) 좌측(左側)의 묘비(墓碑)가 영조(英祖) 42년(年)(1766) 건립(建立)이고,
묘역우측하단(墓域右側下端)에 있는 교자총비(轎子塚碑)가 철종(哲宗) 12년(年)(1861) 건립(建立)인 바 교자총(轎子塚)은 출정시(出征時)에
윤관장군(尹瓘將軍)이 하사(下賜)받은 교자(轎子)를 사후(死後) 이곳에 부장(附葬)한 것이라 한다.
묘소(墓所)의 좌측(左側)
곡장(曲墻)밖에 있는 큰 비(碑)는 심치원(沈之源)의 신도비(神道碑)이다. 따라서 윤관묘(尹瓘墓) 사적지정(史蹟指定)의 의의(意義)는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분묘(墳墓)라는 고고학적(考古學的) 측면(側面)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高麗時代)의 뛰어난 명신(名臣)이며 명장(名將)인 윤관장군(尹瓘將軍), 그 중에서도 특히 그가 견지(堅持)하고 실행(實行)하였던
북방강토(北方彊土) 수호(守護) 내지 개척(開拓)의 위대(偉大)한 사실(史實)을 오늘날에 되새겨 높이 천양(闡揚) 계승(繼承)하고져 하는데서
추구(追求)되어야 한다. (문화재청 경기도 파주시 자료에서 인용)
윤관장군의
묘택이다.
윤관장군의 영당이다 사적 제323호. 고려 예종시대. 광탄면 분수리 소재. 고려 중기의 명신이며 장군으로
여진정벌에 공을 세운 윤관장군의 묘택이다. 묘역전체 규모가 상당히 크고 웅장하며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다. 봉분아래는
장대석 보양의 호석(護石)을 두르고 봉분뒤로 담장을 둘러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봉분정면에 상석(床石)이 놓여있으며 왼쪽에 모비가
서있다. 한계단 아래에 양쪽으로 망주석과 상석 전면에 사각의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장명등을 중심으로 각각 양편에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마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묘역 아래에는 윤관장국의 영정이 봉안돼 있는 여충사(麗忠祠)가 자리하고 있는데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 찾아오는 길 불광동터미널에서 322(좌석), 32(일반)버스를 타고 윤관장군묘 입구에서
하차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에 있는 윤관 장군 묘는 묘역이 넓고 시원스러워 아이들 손을 잡고 찾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다. 사적 323호인 윤관 장군 묘
안내판은 찾기도 힘들 뿐더러 내용 또한 이해하기 어렵다.
“이곳은 고려 중기의 명장 윤관 장군의 묘소이다. 윤관 장군은 고려
태조의 창업을 보좌한 삼한공신 윤신달의 현손으로 자는 동현, 시호는 문숙, 본관은 파평이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했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영병마도총으로서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 정벌에 나섰으나 군세가 부진하여 강화를 맺고 회군하였다. 그 뒤 별무반을 창설하여 3년간 훈련시킨
뒤 대원수가 되어 오연총과 더불어 예종 2년(1107)에 정병 30만을 거느리고 북변을 침범한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의주, 함주, 영주, 복주,
웅주, 길주, 평술, 동태진, 공험진)을 설치하여 수비케 하였다. 장군은 되찾은 옛 강토에 고려 정계비를 세우고 남방의 백성 75,000여호를
이주시키고 다스리던 중 조공을 바치겠다는 여진의 간계와 나약한 문신들의 시기 모함을 받아 벼슬과 공신의 호를 삭탈당했으나 예종 5년(1110)에
다시 수태보 문하시중에 승작 복관되었다. 공은 문무겸전한 공신으로 예종 6년(1111)에 돌아가자 이곳에 안장하였는데 위패를 예종의 사당에 함께
모셨고, 조선조에서는 고려 태조와 충의 공신을 모신 숭의전에 함께 배향하였다.”
이 안내문에는 고려 중기 관직 이름 세 개가
나온다. ‘동북면행영병마도총’과 ‘대원수’ 그리고 ‘수태보 문하시중’이다. 현재의 비슷한 직책을 함께 써놓았더라면 아이들에게 설명해주기 쉬울
것이다.
두번째로 지적할 것은 어려운 한자어를 많이 썼다는 점이다. ‘군세가 부진하여’라든지 ‘승작’ ‘복관’ ‘문무겸전한 공신’
그리고 ‘배향하였다’ 같은 말을 좀 쉽게 풀어 쓸 수 있지 않았을까. ‘군세가 약해’ ‘작위가 높아짐’ ‘관직을 다시 받음’ ‘학문과 무예를
갖춘 공신’ ‘모셔서 제사지냈다’로 바꾼다면 많은 사람들이 윤관 장군의 행적을 더 잘 알게 되지 않을까.
특히 다섯번째 문장의
‘조공을 바치겠다는 여진의 간계와…’ 부분을 이해하려면 깊은 역사적 지식이 필요할 것 같은데 아무런 설명이 없다. 게다가 다음에 이어지는
‘나약한 문신들의…’ 부분에서는 문신에 대한 편견을 심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한 문장이 너무 긴 것도 문제다. 넷째 문장인 ‘그 뒤
별무반을…수비케 하였다’와 다섯째 문장인 ‘장군은 되찾은…승작 복관되었다’는 한꺼번에 많은 내용을 전하려다 보니 한 주어에 성격이 다른 풀이말이
줄을 이어 이해하기 어렵다.
숫자 표기도 잘못하고 있다. 문장에서 숫자를 표기할 때는 만
단위로 띄어 쓰게 되어 있다. 따라서 ‘75,000여호’는 ‘칠만 오천여 호’로 적거나 ‘7만5천여호’로 적는 것이 옳다.
(제보자·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화정동 달빛마을 210동 203호 안성주)
윤관장군
일대기 영정
친필
동상 瓘(관)은 文武(문무)를 겸비한
名將(명장)으로 外交術(외교술)에
능하여 宋(송)나라와의 外交關係(외교관계)에서
특출한 才能(재능)을 발휘하였고, 어려서부터 詩才(시재)가 비범하여
일곱살의 어린 나이에 뽕나무를 글제로 하여 지은 詩(시)가 아래와 같이
전해지고 있다.
뽕잎은 누에를 길러 추위를
막게 하고 가지는 굳센 활로 오랑캐를 쏠 수
있다. 이름은
비록 초목이나 참으로
국보일세 베거나
자르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타일러야 되리
또한 주전도감(鑄錢圖監:주전을 맡아보던 관청)을 설치케 하여「해동중보(海東重寶)」 「동국통보(東國通寶)」 등의
동전(銅錢)을 처음으로 만들어 내는데 힘썼으며 만주(滿洲) 대륙을 점령하여
정계비(定界碑)까지 세우는 등 고려조(高麗朝)에 우뚝 솟은
인물이다.
본관 파평(坡平). 자 동현(同玄). 시호 문숙(文肅).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습유(拾遺) ·보궐(補闕)을 거쳐 1095년(숙종 즉위) 좌사낭중(佐司郞中)으로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추밀원지주사 ·어사대부
·이부상서 등을 거쳐 1104년 추밀원사로서 동북면
행영병마도통사(東北面行營兵馬都統使)가 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뒤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1107년(예종 2) 여진 정벌군의
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진, 이때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공험진(公咽鎭) ·숭녕(崇寧)
·통태(通泰) ·진양(眞陽)의 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이듬해 봄에 개선, 그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서이부판사(尙書吏部判事) ·군국중지사(軍國重知事)가 되었다. 그뒤 여진은 9성의 환부를 요청하며 강화를 요청해오자,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정세가 바뀌자 여진정벌의 실패로 모함을 받아 벼슬을 빼앗기고 공신호마저 삭탈되었으나,
예종의 비호로 1110년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병부판사(兵部判事) ·상주국(上柱國)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아래 글은
한국의 인물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1. 가계와 관직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三韓功臣) 신달(莘達)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檢校小府少監)을 지낸 집형(執衡)의 아들이다. 문종 때에 등과,
습유(拾遺)·보궐(補闕)을 지냈고, 1087년(선종 4)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로서 출추사(出推使)가 되어 광주(廣州)·충주·청주를
시찰하였다. 1095년 숙종이 즉위하자 좌사낭중(左司郎中)으로 형부시랑 임의(任懿)와 함께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숙종 3) 동궁시학사(東宮侍學士)로서 조규(趙珪)와 함께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숙종의 즉위를
통고하였다. 1099년에 우간의대부 한림시강학사(右諫議大夫翰林侍講學士)가 되었으나 당시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이던 임의와 친척이어서
간원(諫院)인 어사대(御史臺)에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중서성(中書省)의 상서에 따라 해면되었다. 2년 뒤인 1101년에는 추밀원지주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왕명에 의하여 이굉(李宏)과 함께 진사시를 주관하였으며 이어 어사대부가 되었다. 다음해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吏部尙書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 겸 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가 되었다.
2. 여진을 정벌하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1104년 2월
동북면행영도통(東北面行營都統)이 되어 처음으로 여진정벌의 임무를 띤 때부터 1111년(예종 6) 죽을 때까지의 약 7년간이다. 고려가 처음으로
동여진을 대규모로 정벌하기 시작한 것은 1080년(문종 34)으로 이때 여진의 세력을 크게 꺾은 바 있다. 그러나 새로 일어나는 동여진
완안부족(完顔部族)은 더욱 성장하여 그 부족장 영가(盈歌)에 이어 1103년(숙종 8)에 우야소(烏雅束)가 그뒤를 이었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충돌 직전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완안부의 기병이 정주관(定州關)
밖에 쳐들어오게 되었다. 왕은 무력으로 여진정벌을 결심하고 문하시랑평장사 임간(林幹)을 시켜 이를 평정하게 하였으나 여진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때에 윤관은 왕명을 받고 여진에 대한 북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해 2월 21일 당시 추밀원사로 있던 그는
동북면행영병마도통이 되어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고려군은 여진의 강한 기병에 부딪혀 그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을 당하였다. 이에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의 원인은 적의 기병을 우리의 보병으로는 능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왕에게
보고하고,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윤관은 1104년(숙종 9) 12월부터 여진토벌을 위한 준비확장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별무반(別武班)이라고 하는 특수부대의 창설을 보게 되었다. 1107년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하지 않다는 한 변장(邊將)의 긴급보고를
접하자 원수가 되어 부원수인 지추밀원사 오연총(吳延寵)과 17만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한편, 여진추장에게 거짓통보를 하여
고려가 앞서 잡아둔 허정(許貞)·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낸다고 하자 여진족 400여명을 보내왔는데, 이때 이들을 유인하여 거의 섬멸시키고
사로잡았다. 5만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중군(中軍)은 김한충(金漢忠), 좌군(左軍)은 문관(文冠), 우군(右軍)은
김덕진(金德珍)으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하게 하였으며, 수군(水軍)은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송07) 등이 2, 600명으로
도린포(都鱗浦)의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막강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이 동음성(冬音城)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石城)은 척준경(拓俊京)을 시켜 패주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태반을 섬멸하였다.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무찌른
곳은 135개처, 적의 전사자 4, 940명, 생포 130명의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조정에 전승의 보고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획정하고 9성을 축조하였다.
3. 9성을 설치하다
그리고 남쪽으로부터 백성을 이주시켜 남도지방의 이주민들이
이곳을 개척하여 살게 되었다. 새로 성을 구축한 곳은, 함주(咸州)에 이주민 1, 948가구, 영주(英州)에 성곽 950칸과 이주민 1,
238가구, 웅주(雄州)에 성곽 992칸과 이주민 1, 436가구, 복주(福州)에 성곽 774칸과 이주민 680가구, 길주(吉州)에 성곽
670칸, 이주민 680가구, 공험진(公#험02鎭)에 이주민 532가구를 이주시켰다. 이 6성 외에 이듬해에는
숭녕(崇寧)·통태(通泰)·진양(眞陽)의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윤관의 9성 설치가 완결되었다. 특히 함흥평야의 함주에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어
이곳이 가장 요충이 되었다. 고려군이 이렇게 함경도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가 반발하여 1108년초에
군사를 이끌고 정면으로 대결하게 되었다. 가한촌(加漢村)의 전투에서 포위당하였으나 척준경 등의 역전으로 겨우 구출되었으며, 영주성의 공방전에서는
역시 척준경의 용맹과 기지로써 여진군을 겨우 물리치게 되었다. 또다시 여진군 수만명이 웅주성을 포위하자 역시 척준경의 지략과 용기로써 적을
패주시켰다. 그해 3월 30일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00두를 노획하여 개경으로 개선하여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에 봉하여졌다.
4. 여진정벌, 실패로 끝나다
서쪽에 강력한 요나라와 접경하고 있던 여진은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매우 필요하게 되었으나, 윤관의 9성 축조와 농업이주민으로 말미암아 농경지를 빼앗긴 토착 여진족으로서는 강력히 반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길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원하였다. 드디어 여진은 적극적인
강화교섭을 개시하였으며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환부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평장사 최홍사(崔弘嗣) 등 28명은 찬성하고 예부낭중(禮部郎中)
한상(韓相)은 반대하였으나 당시 조정은 화평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 이유는 여진을 공략함에 있어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의 예측이 맞지 않았고, 근거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으며,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거리가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무리한 군사동원으로 백성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 등이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하여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윤관이 장병들과 더불어 생명을 걸고 경략하였던 9성 일대의 땅이 다시 여진에게 환부되었다.
뒤에 아골타(阿骨打)가 금나라를 세워 강대한 국가가 된 데에는 그들이 9성을 다시 찾은 데 그 원인이 있었다고 본다. 9성의 환부로
여진정벌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조차 삭탈당하였다. 명분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하였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도 대두되었으며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못한 채 사제(私第)로 돌아갔다. 그러나 처벌을 하여야 한다는 재상이나 대간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그를 비호한 예종의 덕으로 1110년 다시 수태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1130년(인종 8)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시호는 처음에
문경(文景)이었으나, 후에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女眞關係의 始末과 尹瓘의
北征(金庠基, 국사상의 제문제 4, 1959) 公#험02鎭과 先春嶺碑(金九鎭, 白山學報 22, 1976) 尹瓘九城考(方東仁, 白山學報
22, 1976) 尹瓘九城의 範#위07와 朝鮮六鎭의 開拓(金九鎭, 史叢 21·22 合輯, 1977) 女眞征伐의 將相―尹瓘―(金庠基,
韓國의 人間像 2, 新丘文化社, 1980). 〈李熙德〉
사돈이란 말의 태생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단어인 "사돈" 맺자는 말은 고려조 오연총과 윤관장군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윤관과 오연총은 같이 여진족을 정벌한 장군으로서 사이가 돈독하여 그들 자녀를 서로 혼인시켰 다고 합니다. 항상 술을 좋아하여 두 장군이 늘상
술을 같이 마셨답니다. 하루는 윤관장군이 술을 들고 오연총장군 집으로 가던중 폭우가 쏟아져 넘쳐나는 개울을 건너지 못하자 이를 멀리서 기다리면서
보고 있던 오연총장군이 나무위로 올라가 거기서 고개를 숙이면서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라도 술을 마셔야 하겠습니다"하며 개울 건너편에 있는
윤관장군에게 말하자 윤관장군 역시 그곳의 나무에 올라 같이 머리를 숙이며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사돈이란 나뭇가지 사,머리숙일 돈이라는 뜻으로,
후세에 사람들이 자식들을 혼인시키고자 할때 이들의 고사를 떠올리며 "우리도 사돈해볼까"라고 말하게 되었답니다 (오 안토니오
홈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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