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조여래좌상과 벽담사(碧潭寺)
♣창건연도 : 1950년대
♣창건주: 송병문
♣소재지: 거제시 사등면 오량리 74번지
♣찾아가는 길: 거제대교⇢오량→오량성지→ 벽담사(현 신광사로 개칭)
♣관광포인트: 입구 예조판서 유여림 병조판서 유기창 추모비, 정문입구 ‘석돌탑’ 좌우, 절터 내에는 동굴속 석조여래좌상, 연못, 해수관음불상, 용왕각, 나한전 등
벽담사는 석조여래좌상이 있기 때문에 알려진 사찰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지금은 신광로 개명되었음.
거제대교를 지나 첫 마을인 오량 마을에 있는 벽담사는 오량성과 폐왕성이 가까이 있어서 찾는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 사찰은 송병문씨가 창건하여 오량마을 주민에게 기증했다고 한다. 1950년에 석불암 앞 산 밑의 논을 개간하던 사람들의 괭이에 받쳐 출토되어 고성의 안정사로 운반하고자 했다고 한다.
이에 안정사 스님들은 인부 육 명을 대동하고 석조여래좌상을 현 절터에서 마을로 운반하려 했다 현재 벽담사에서 10여 미터를 내려오다가 휴식을 취하고 다시, 운반하던 중에 그 불상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이에 놀란 안정사 스님들은 그 자리에서 불공과 축원제를 드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안정사 스님들은 돌아갔다.
그 뒤에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현 위치에 봉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돌부처는 팔조각의 연꽃봉우리의 대좌 위에 불상이 새겨져 높이 9.2미터의 큰 돌 좌상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이라는 일설도 있다. 조각의 일체감이 비교적 잘 표현되어 있으나 하반신의 조각이 소홀한 감이 있고 옷의 무늬가 퍽 형식화한 점 등은 고려시대 불상이라는 공통된 견해이다.
그러나 거제에도 이러한 큰 석불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1170년의 고려 의종이 거제도의 폐왕성을 쌓고 거림에서 살았음으로 그 폐왕성 바로 밑에 있는 암자인지라 그때에 조각하고 절이 있었다는 설도 부인할 수 없다. 다른 문헌의 기록에는 각호사터라는 설도 있다.
이처럼 벽담사에는 석굴법당 외에도 나한전, 명부전, 산신각, 용왕각같은 부속건물과 연못과 조화를 이룬 팔각정, 최근에 불사한 해수관음상, 역사여래불, 일주문, 설법전, 교육관 등이 있다. 그리고 장애인들을 위한 자비원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48호 석조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앞에서 열심히 목탁을 뚜디리며 설법을 외고 있는 주지스님
오른쪽 벽화---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벽화의 내용은 물어보지 못했음.
왼쪽의 벽화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동굴 입구
위의 산은 백암산이고 그 바로 옆에 폐왕성이 있다.
산신각의 산신령
진야원---차를 마시는 곳인가?
연못 위에 세워진 해수관음보살상
명부전의 벽화---
입구에 있는 석돌탑--거제에는 몇군데 있다.
예조판서 유여림, 첨지중주부사 유기창의 추모비 ---거제도에 귀향하여 살았음. 유기창(첨지충주부사)--아들 유여림(예조판서)--아들 유관(증영의정)--아들 유홍(우의정)
#유여림(兪汝霖)
1476(성종 7)∼1538(중종 3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계옥(啓沃), 호는 정당(政堂).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기창(起昌)이며, 어머니는 능주구씨(綾州具氏)로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 안우(安愚)의 딸이다. 1498년(연산군 4) 사마시에 합격, 1504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의 검열·봉교, 성균관의 전적·직강을 거쳐 단양과 한산의 군수를 지냈다.
그뒤 홍문관직제학·전라도관찰사·도승지 등을 역임하고, 1526년(중종 21)사헌부대사헌이 되고 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529년 형조판서가 되었으나 2년 뒤인 1531년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1537년 김안로가 축출되자 예조판서에 복직되었다. 시를 잘하여 남의 애송하는 바가 되었다. 비인의 청절사(淸節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