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는 신호였을까. 문형철 감독을 만나기로 한 날은 새벽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전날까지 맑던 하늘이 순식간에 장대비가 내리는 날씨로 변해버린 터였다. 약속시간에 맞춰 병원에 들어서자 까무잡잡한 얼굴의 건장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성 환자들이 그득한 대기실, 그는 구석진 곳에 혼자 서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2008 베이징올림픽 한국양궁대표팀의 문형철 감독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돌아선 뒷모습만 보아도 건장한 체육인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문 감독은 “어제까지 충북 보은에서 한국실업연맹회장기 양궁대회를 마치고, 지난 밤 늦게야 서울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6개월마다 있는 정기검사를 받기 위해서였다. 문 감독은 2007년 12월 한국 양궁 국가 대표팀 감독 시절 태릉선수촌의 건강검진에서 갑상선에 있는 종양을 발견했다. 검사를 더 받아보라는 통지를 받고도 그는 ‘설마’라고 생각했다. 암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암, 진단 전 기다림이 더 겁나더라
갑상선암은 2000년대 이후 발병률이 크게 늘어난 암이다. 여기에 한국 여성암 발병률 1위, 남성보다 여성의 발병률이 6배 더 높다. 갑상선은 아주 작지만, 우리 몸에서 대사와 자율신경계를 조절하는 갑상선호르몬을 만들어내는 매우 중요한 기관이다. 목 앞쪽의 아랫부분에 자리하며 혈관 분포가 많고 가까이에 여러 림프절이 지나간다.
최근 갑상선암은 초기에 발견하는 일이 흔하고, 치료기술도 좋아져 거의 모든 환자들이 수술 후 완치가 되고 있다. 그러나 순해도 암은 암. 전이와 재발이 잦은 암세포는 어디에 생겼어도 공포스럽긴 마찬가지다. 문 감독은 이런 갑상선암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사실 진단 후에는 오히려 담담했다”며 “악성인지 양성인지를 알아보는 조직검사를 받은 후 기다리는 시간이 더 초조하고 불안했었다”고 털어놨다. 본인이 아니고서야 그 초조한 마음을 어느 누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마음은 숨긴 채, 조직검사를 받은 후 바로 대표팀 제주도 전지훈련 일정까지 소화한 그였다.
병기도 모른 채 수술에 들어가다
조직검사 결과는 악성이었다. 의사는 얼른 수술을 하자고만 했다. 구태여 다른 설명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를 진단한 의사는 차병원 강남센터 유방갑상선외과 박해린 교수. 아내의 갑상선 결절 수술을 계기로 이미 얼굴을 아는, 믿을 수 있는 의사였다. 문 감독의 병기는 3기였다. 암세포의 크기는 작았지만 피막과 림프절 등에 전이가 발견됐다. 3기였어도 증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건강검진에서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상황이 더 악화됐을 지도 몰랐다.
주치의 박해린 교수는 “수술 전 굳이 3기라고 말해 불안함을 줄 필요는 없었다”고 말했다. 또 “수술만 잘 되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큰 일을 앞둔 만큼 마음의 평정심과 불안함 해소를 위해 일부러 병기를 말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 감독은 이렇게 자신의 병기도 모른 채, 진단 후 보름 만에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 시간을 내는 것도 어려워 병원 문이 열기도 전인 아침 8시에 수술이 진행됐다. 바쁜 문 감독을 위한 박 교수의 배려였다 문 감독은 “의료진을 믿었기 때문에 수술을 앞두고는 별 걱정하지 않았다”며 “다 잘 될 거라는 생각, 이렇게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생기더라”고 회상했다. 베이징 올림픽을 7개월 앞둔, 2008년 1월의 어느 새벽, 문감독은 그렇게 갑상선전절제술과 림프절절제술을 받았다.
한동안 말도 잘 못했지만, 그래도 긍정!
수술 후 열흘 만에 대표팀과 호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목소리가 안나와 말도 못할 때였다. 그는 선수들의 컨디션에 차질이 생길까 싶어 대표팀에는 암이라는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다. 4년에 한번 열리는 올림픽을 위해 기량을 갈고 닦아온 선수들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것이 그의 몫이었다. 문 감독의 회복기는 이렇게 선수들과 부대끼고 치열하게 올림픽을 준비하며 지나갔다.
호주훈련을 마친 후에는 남은 갑상선 암세포를 모두 없애기 위해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를 받았다. 방사성 동위원소는 일정기간 동안 갑상선호르몬의 원료인 요오드의 공급을 차단했다가 시간이 지난 후 방사선과 함께 요오드를 체내에 주입해 미세하게 남아있는 갑상선암세포까지도 모두 없애는 치료다. 문감독은 체내에서 방사선이 모두 배출될 때까지 3박 4일 동안 혼자서 납으로 된 차폐실에서 있어야 했다. 문 감독이 이 시기에도 입원한 내내 상대 선수들의 전력을 분석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유명한 일화다.
그의 이런 노력 덕분이었을까? 우리 양궁 대표팀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남녀모두 단체전 금메달, 남자 개인 은메달, 여자 개인 은메달과 동메달 등 총 5개의 빛나는 메달을 거둬 들였다. 그는 “자신감과 긍정적인 생각이 이 시기의 버팀목이 돼 주었다”며 “명대로 살겠지 싶은 초연한 마음도 내가 해야 할 일에 더 몰입하게 만드는 계기였다”고 말했다.
지도자로의 변신, 완벽주의에 매달리다
문 감독은 26살 때부터 충북 예천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우리 나라는 올림픽 양궁 종목에 선수를 출전시키지 않았고, 양궁이란 스포츠의 입지도 작았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선수생활보다는 후배들을 키우는 일이 더 의미 있다고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지도자로서의 삶은 그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선수를 판단하고 분석하는 예리한 눈과 틀린 부분은 바로잡아줄 수 있는 지식을 그는 모두 갖추고 있었다. 1989년에 처음 국가 대표팀과 연을 맺었다. 당시에는 코치로 시작해 2008년 올림픽을 앞두고 감독직을 수락했다. 코치 시절부터 2년에 한 번씩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거쳤고 그 외에도 굵직한 국제대회를 수도 없이 치렀다. 상대 선수 분석과 우리 선수의 관리까지, 문 감독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는 “암에 걸리기 전까지 너무 틈 없이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뭐든지 완벽해야 하는 완벽주의 성격이지만 정작 제 건강에는 무심했었죠. 1등의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스트레스와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고민이 늘 함께 했던 것 같아요.” 때로는 양궁을 함께 해온 선배로,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엄한 교육자와 감독으로 선수들과 십 수년을 함께 해온 문 감독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끝으로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나길 결심했다.
이제 5년, 암이 나를 바꿨다
문 감독은 이제 수술한 지 만 4년 7개월이 지났다. 암에 있어 완치를 말할 수 있는 5년이 이제 코 앞인 셈이다. 요즘 그의 관리법은 정기적인 검사를 빼먹지 않고, 몸에 좋고 건강한 음식을 잘 챙겨먹는 것이다. 또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운동과 취미에도 정성을 들인다. 현미로 떡을 만들어 아침 삼아 먹고, 흑마늘은 직접 마늘을 사다가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 능이버섯도 좋아하고, 제철과일도 늘 챙겨먹고 있다. 운동은 골프도 하고 자전거도 탄다. 스킨스쿠버, 낚시 등도 즐기는 취미다. 아마추어 무선에도 한동안 빠져 지냈다. 양궁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도 눈을 돌리며 완벽주의 삶에서 작은 틈을 허락한 것이다.
물론 요즘도 한가하지는 않다. 대표팀에서만 물러났을 뿐, 현재도 예천군청 양궁단의 감독과 함께 한국 양궁연맹 부회장과 양궁협회 심판, 아시아 양궁협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이 때문에 겨울을 제외한 3월에서 11월 사이에는 거의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쁜 와중이지만 그가 절대 빼놓지 않는 것. 바로 정기 검사다. 시간이 오래 흘렀다고, 컨디션이 좋다고 자만하는 일은 없다. 6개월에 한 번씩은 추적검사를 받고 1년에 한번씩은 PET 검사를 받는다.
재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닌, 건강에 더 자신감을 갖기 위해서 열심히 검사를 받고 관리하고 있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 가운데, 암이라는 사실을 알고 삶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긍정적인 면이 아니냐고 묻는 그의 얼굴에서 가을 하늘을 닮은 편안함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