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갇힌 날의 생각 한줌
며칠 전 태풍에 견줄만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이 어찌나 센지 사흘 동안 계속하여 배를 묶어 두었습니다. 아무리 바람이 세게 불어도 하루나 이틀이면 주의보가 해제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무려 근 사흘 동안 이곳 주민들은 꼼짝달싹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늘 일기예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어딘가를 다녀오려면 늘 긴장을 해야 하는 것이 이곳 신안 사람들의 필수적인 삶이며, 그래서 때로는 갇힌 것 같은 느낌을 받기 쉬운 것이 바로 섬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마침 딸의 결혼식 때문에 출타를 하였다가 이번 바람에 들어오지 못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미리 따로 피로연을 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동행하지를 않았기에 망정이지 차를 대절하였더라면 큰 낭패를 보아야 할 뻔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배가 묶여 있는 동안 목포에서 머무는 경비를 다 지불해야 할 상황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 왈 “육지에 갇혀 있으려니까 참 답답해버려라”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섬에 갇힌 것이 아니라 육지에 갇힌 것이라니 ... 순간 갇히고 안 갇히고는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상황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이 집사님에게는 갇히고 안 갇히고의 문제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섬은 갇힌 곳이고, 육지는 열린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육지도 갇히기는 매 일반입니다. 육지라고 해 봐야 휴전선으로 가로막혀 있고, 좀 더 넓게 본다고 하더라도 중국과의 국경으로 막혀 있으며, 더 넓게 보아도 지구라는 울타리에 막혀 있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가 갇힌 것이냐 열린 것이냐를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좁은 곳에 있어도 넓게 보면 열린 것이고, 넓은 곳에 있어도 좁게 보면 갇힌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넓게 보아야 할 기준은 무엇입니까? 모름지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의 기준은 나그네로써 우리 모두가 이 땅을 거쳐서 도달해야 할 영원한 나라, 곧 영원의 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원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 어느 세대를 막론하고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영적 열림의 키워드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영성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는 또다시 영성의 렌즈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모든 인생사에 매여 있는 자신을 영원의 렌즈로 재조명하여 집착을 버리고 스스로를 열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사순절과 고난 주간을 보내며 우리는 또다시 십자가의 협소한 공간에서 자신을 열어 영원한 천국으로 향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모략과 중상과 아우성의 틈바구니 속에서 의연히 걸어가며 침묵으로 무한한 사랑의 문을 여신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갇혔으되 갇히지 아니하고, 매였으되 매이지 아니하고, 죽었으되 죽지 아니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번 부활절에 찬 204장의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하고 외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부디 이번 부활절이 그저 아무런 의미 없는 무감각의 절기가 아니라 모든 구속과 매임에서 자유함을 얻는 참된 열림의 기폭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정녕 기뻐 춤추고 노래할 영원한 해방의 축제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나온 100년의 감격을 나누며, 시작된 100년의 미래를 힘차게 펼쳐 다시 살아오르는 2007년 성결의 휘몰이가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거센 세파에도 요동하지 않는 영원한 열림의 북소리를 울리는 우리 모두의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