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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Review (2007, 6월)
화가, 만화학 박사 이순구
『미술美術』은 아름다운 기술이다. 기술은 현대적인 용어의 테크닉technology이지만 예술은 인간이 수행하는 많은 활동 가운데 사물의 '창작'과 같은 특수한 활동을 지시하는 개념이고, 미美는 진眞·선善과 더불어 인간이 추구하는 많은 가치 가운데 하나를 지시하는 개념이다. 미가 진이나 선과 구별되고, 예술은 과학이나 도덕과 구별되는 고유한 가치의 활동으로서 하나의 독립된 영역을 이루고 있다는 가정아래 성립된 근대적 사고의 소산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는 일의적인 것이 아니며, '예술'이라는 말과 그 말이 대변하는 체제는 18세기에 확립되었다. 예술로 번역해서 쓰고 있는 영어의 'fine arts'가 프랑스어인 'beaux-arts'를 번역한 말임을 고려할 때 예술은 'beauty'와 'arts'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합성어이다. 이 같은 사실은 18세기 이전에는 '예술藝術'이라는 말도 없었을 뿐더러, 현재 그 말로 부르는 인간의 활동, 즉 시·음악·회화·조각·건축 등과 미와의 관계가 그다지 긴밀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고전적 고대로부터 18세기 전까지는 미의 개념에 관련하여 위의 활동이 언급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미가 예술만을 통해서 실현되는 가치라는 의미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유독 한국의 미의식은 비슷한 방향으로 치우쳐진 현상이다.
현재의 한국미술은 무엇을 지향하는가는 여전히 심도깊이 생각해야할 과제지만, 아직도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관습화하는 동일한 방향에 따른 강요성의 무모함은 여전하다. 지는 황혼의 찬란한 색채와 풍경에 대해 '그림 같다'는 감각의 일관성이 아직도 통한다. 미의 감각도 전염되는 것인가. 아니면 일관성 있는 교육의 '효과'인가. 이제 개별적 '느낌'의 감각을 일깨우고 그 많은 본능을 일으켜야할 시간이다.
1.개와 고양이의 이야기
대전시립미술관 2007.5.3-7.8
그림을 그리는 대상은 다양하다. 그중 주변사물들의 다양한 양태가 그림의 주제와 소재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대전 시립미술관에서 열린「개와 고양이의 이야기」전은 인간과 가장 가까이 오랜 세월을 같이한 애완동물이라는 점에서 그 습성과 교감의 부분을 잘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다. 때로는 주인의 희로애락과 감정이입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관조자가 되기도 한다. 개와 고양이는 동서양의 회화사에 오래전부터 등장한다. 그림 속에 구도의 일환으로, 때로는 해학적인 의미로, 또는 실험적인 움직임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이번 전시회에서 보여주는 대상들도 마찬가지이다. 서정적 기억의 대상으로 풀어낸 권진수, 다양한 방법으로 고양이를 통해 어찌할 수 없는 일본의 특성을 예리한 관찰력에 의해 부각시킨 사마야 야스히로, 선묘禪描적인 출발에 의한 이강욱의 색채드로잉은 실생활의 기억과 그곳에서 편린처럼 모아지는 기억에 대한 표현들이다. 작가의 반려로서 사실적으로 그린 이경미, 그러나 작가의 개인사는 알 수 없지만 '바닷가로 통하는 문'의 설치와 고양이는 왠지 주제의 '끼워넣기식' 방법으로 보인다. 반면 이김천은 해학과 풍자의 기지가 번득인다. 개와 인간 사이에는 많은 설화나 비유가 있어온 것에서 알듯 어느 부분의 행동에서는 인간과 동질부분이 보인다. 그 지점을 그려내는 그림에는 비아냥거림과 따스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미니어처 형식의 조각품으로 작품을 만든 이유미는 작품의 크기는 작지만 전시장의 벽면공간을 이용하여 밤하늘과 넓게 펼쳐진 수평의 공간을 유유히 흘러간다. 화랑가에서 익숙하기 시작한 임만혁은 바닷가의 정서와 가족들의 잔잔한 이야기를 전형적인 구성적 요소로 재미있게 그려내지만 어딘지 모르게 베르나르드 뷔페(Bernard Buffet1928-1999)의 직선들을 연상하게 한다.
[그림 1)] 이강욱, <개와 고양이의 이야기>전시장면, 2007 [그림 2)] 이김천, 전시전경 [그림 3)]사야마 야스히로,
2.서사의 도입, 꽃비와 텍스트
이종협 전 2007. 6. 1 - 6. 6 우연갤러리
텍스트는 본보기가 되는 유형의 표본을 지칭하기도하고, 내용을 순서대로 나열하여 묶은 것을 말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책의 형태이겠지만 현시대의 텍스트는 다양하다. 가장 진일보된 텍스트는 하이퍼텍스트라 불리는 컴퓨터와 인터넷에 의해 만들어진 텍스트이며, 그 용량이 무한할뿐더러 지금도 계속 진화하고 있다.
대전지역에 판화의 활성화를 가져오게 한 장본인으로 중요한 작가인 이종협의 이번 전시는 콜라주와 그라피티를 범주로 한 작품과 동백꽃을 디지털 프린트한 작품, 그리고 활자를 이용한 요철에 의한 작품으로 제시되었다. 세 가지 방법의 표현에 의한 제시는 모두 커다란 화면의 텍스트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꽃의 형상에 의한 작품은 이른바 「꽃비」로 지칭되는 서술방식이다. 문자가 텍스트에 순차적으로 나열될 때 나타나는 '정리된' 현상을 꽃잎에 의해 원고지에 써내려간 또박또박한 글자체처럼 자리하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단일계열의 모노크롬 상태의 과거 한국미술사속의 작품들을 떠올린다. 서사敍事는 순차적으로 서술되며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은 이야기를 뜻한다. 인간생활의 모든 것은 이야기와 사건으로 만들어진다. 인간은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의 방법으로 서사를 택했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역사처럼 큰 범주의 이야기도 있고 일기처럼 한 개인에 이르는 서사가 있다. 현실적인 서사도 있고 개인의 판타지에 의한 이야기도 있다. 미술에서 형태를 가진 대상을 그리는 것과 심상의 정신적인 요소를 그리는 경우가 있다.
「꽃비」는 꽃잎의 반복에 의한 개인의 알고리즘algorithm에 의한 서정적 이야기가 이번작품에서 읽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천연꽃잎에 의한 색채는 시간의 경과에 의해 공기 속으로 흐려지기도 한다. 작가는 시간을 굳이 매어두려고 하지 않고 그 변색과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입장을 취해 그가 자연관에 의한 작품들을 발표하기도하는 작가임을 알 수 있다.「꽃비」의 서정은 이러한 자연관에 대한 작가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단초가 된다.
「텍스트의 흔적」에는 종이위에 나타난 흔적과 납판에 만들어진 유형이 제시되었다. 인위적인 활자의 배열과 '천天', '산山', '강江' 등의 자연을 지칭하는 활자체가 요철에 의한 판화의 원판과 같은 형식의 본질을 나열시키므로 제시하고자 하는 의미론적인 현상을 보여준다. 인류의 지난 텍스트들에는 글자와 그림이 같이 등장한다. 글과 그림의 형식은 보여주고자 하는 전달요소를 가장 적절하게 나타내줄 수 있음은 현대에도 마찬가지이다. 글과 그림이 분리된 시기는 그리 오래지 않으며 하이퍼텍스트에서는 오히려 그림과 글이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이는 시각이 차지하는 감각의 비중이 크며 시각은 구체성과 뚜렷한 인식체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이종협의 작품에는 활자를 이용한 형식에서는 크기가 커진 전형적인 텍스트형식이지만 내용에서는 다분히 개념적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山' 과 '江'이라는 상형의 글자를 제시할 때 감상자들은 제각각의 산과 강을 떠올릴 것이다. 개인의 감성과 경험에 의한 산과 강을, 때로는 보기 좋았던 영상이나 사진, 그림들을 떠올릴 수 있다. 따라서 텍스트는 직접적인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보다 감상자의 감각적 지층을 일깨우는 현상으로 경과는 나타난다. 개념적인 미술이 지향하는 바가 바로 이러한 면에 중점을 둔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현대판화는 다양한 기법들이 제시된다. 전형적인 판화기법과 원판자체를 제시하는 종류도 있으며, 프린트기법의 다양하고 손쉬운 이용에 의한 포토그라피의 이중교배에 이르기까지 그 원형은 폭넓게 이용되고 제시된다. 이종협의 이번 전시회는 판화의 간접성과 직접성을 모두 이용하여 서정의 개념적인 서사구조를 제시하였으며 기존 판화의 영역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기분 좋은 경험을 이끌어낸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림 5] 이종협,<Camellia on the paper>,2007 [그림 4]이종협, <Camellia on the paper>부분,2007
3.'아직도 한국화 인가, 비로소 한국화인가'
갤러리 이안 개관 1주년 기념전 2007. 5. 30 - 7. 4
근래에 이 지역에 전시공간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그 운영방향 설정과 어떤 마인드를 가지고 운영하며 전시회를 기획하느냐에 따라 전시공간의 성패가 좌우된다. 경제적 여건을 비롯해 운영에 따른 여러 제반사항들이 문제이겠지만 갤러리「이안」은 차근한 출발의 면모를 보인다. 물론 이 지역에 위치하므로 기획전시의 유치가 지역작가의 측면에서는 서운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기획자의 시각과 내용에 따라 넓은 범위를 포용하는 기획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외부작가들에 의해 점유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에 의한 다각적인 효용을 생각해볼 시점이다.
<아직도 한국화 인가, 비로소 한국화인가>의 기획은 '한국화'라는 범주와 유형에 대해 끝임 없는 질문의 골자이기도하다. '한국회화'와 '한국화'에 대한 용어지칭의 논의는 현재에 불거져 나온 개념은 아니다. 지필묵 작가들의 그림에 '동양화'란 용어를 사라지게하기 위한 '한국화'의 개념은 한쪽에서 고집할만한 개념이 아니다. 이 전시회를 기획한 박정구 큐레이터가 서문에서 자세히 밝혔듯이 그 맥락은 재료적 측면뿐 아니라 전통과 현대의 계승, 그리고 새로움의 발견 속에서 '한국회화'가 갖은 논리와 이념의 분리된 상관관계에서 주장된다고 생각된다. 젊은 작가들에게 주어진 여건이란 '한국화'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다. 그렇다고 전통을 무시하거나 소멸시킨다는 의미는 아님이 분명하다. 전통은 지나간 시간을 묶어 놓을 때 그 의미가 뚜렷하다. 과거의 현상 모두를 전통이라 할 수 없다. 현재의 젊게 시도되는 작가들의 태도에는 이미지의 범람 속에 자라도록 문화현상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전형적인 풍경이 눈앞에 다가 올수 없다. 다만 그들이 자라난 환경에서 그들의 눈에 들어오는 현상을 재인식하여 그릴 뿐이다. 때로는 키치적이고 복합적인 이미지의 총체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룬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이라 했던가.
이번 전시회에 참여한 작가는 이 지역에 토대를 두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일부 검증되고 있는 작가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형적인 산수화나 민화를 변형시키거나, 디지털에 의한 합성적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한다. 또는 '그린다'는 기본적인 서술방식을 고수하기도 한다. 다만 그 관점을 '재미'와 개인의 '관심사'에 눈을 돌리기도 한다는 점에서 달리 보이는 것이다. 이전 세대가 가졌던 전통에 대한 부담을 신속하고 거리낌 없이 벗어나 그들의 시각으로 재해석한다는 점에서 유쾌하며 경쾌하다. 반면 때로는 현대사회의 이면을 예리하게 비판하는 폭로자적 시선도 한 부분을 차지한다. 아직도 '한국화'의 정체성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하지만 이처럼 시대적 변화와 세대의 시선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수용과 비평적 요소를 같은 시각으로 참여해 보아야 할 때이다.
이번 전시회에 대한 큐레이터의 기획의도를 빌리면 "적어도 재료나 기법, 혹은 작가의 전공으로 한국화냐 아니냐를 따지는 시절은 지났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아직도 '한국화'에 매어있을 것인가, 아니면 비로소 '한국화'를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해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기획전은 새로운 주제는 아님에도
[그림6]<아직도 한국화 인가, 비로소 한국화인가> 전시장면
4.김선태 전
갤러리 성 2007.6.1 - 6.30
갤러리 하나가 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 필력에 의한 작품들이 큰 화면을 채우고 있다. 동양화를 전공하고 파리에 유학하고 활동한 범위가 영력하다. 그를 소개하는 글들에는 '동양적 화법','한 획의 검은 선은 화가가 보기에 본질적인 것의 역동성', 엄정한 요구는 테크닉의 선택에서 드러나는 정교한 예민성과 결합'(1997.마리-오딜 앙드라드), '자유롭기 어려운 인간의 콤플렉스', 숨바꼭질 같은 인간내면의 이중구조'(2000. 후배가), 「간이역」,'동참해보고 싶을 정도의 매력적이고 섹시한, 한편으로 가슴 저리는'(2004. 선배가) 등의 문맥들이 보인다. 먹물과 아크릴릭, 오일을 혼용하고, 회색과 황토색, 깊이 있는 적색등은 대지의 느낌이 든다고도 했다.
감수성에 의한 색체의 붓질과 비벼냄과 흘러내림, 거기에 동양적 사유를 가미하고 때로는 벽으로 또는 대지로, 공기로, 호흡으로, 인간의 정신으로 자아를 발견하는 그림, 繪畵, 영혼이란 것은 아마 눅눅하고 부드러우며, 묘연한 유럽적인 동양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림5)]김선태 개인전, 갤러리 성,2007 [그림6)]김선태 개인전, 갤러리 성,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