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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사이공묘지명-병서(進士李公墓誌銘-幷序) 이국량(李國樑)의 묘지명(墓誌銘))이다. 그의 아들 빙군(聘君)의 부탁으로 썼다. 서(序)에는 빙군이 아버지의 묘(墓)를 이장(移葬)하고 자신에게 묘지명을 부탁한 일.李國樑의 생몰년월일(生沒年月日)‚ 그가 퇴계의 인정을 받았던 일‚ 가손(家系)‚ 후손 등을 기록하고 있다. |
原文(원문) 進士李福崇公墓誌銘 (진사이복숭공묘지명) 皇明萬曆之庚子。李聘君乃移其先君墓于溫溪洞口子坐午向原。旣葬屬余識于石。辭不敢者十有餘年。 황명만력지경자。이빙군내이기선군묘우온계동구자좌오향원。기장속여식우석。사불감자십유여년。 今其言曰吾老而兒且無兒以亡。君若負我宿懇。吾將何以死哉。余於是感而識之曰。噫。聘君之先君。 금기언왈오노이아차무아이망。군약부아숙간。오장하이사재。여어시감이식지왈。희。빙군지선군。 生於正德丁丑正月十四日。歿以嘉靖甲寅五月初五日。凡三十八年于世。稱爲佳士。其粹美之禀。豪逸之調。 생어정덕정축정월십사일。몰이가정갑인오월초오일。범삼십팔년우세。칭위가사。기수미지품。호일지조。 常爲退陶李先生所許。兩中丙午榜司馬。不事家人産業。常卜地洛江上流。自號孤山主人。謀搆小齋而未之究。 상위퇴도이선생소허。양중병오방사마。불사가인산업。상복지낙강상류。자호고산주인。모구소재이미지구。 至今遺址存焉。諱曰國樑。字曰庇遠。通善郞行掌樂院直長諱賢俊其考也。妣則安東權氏。展力副尉守經女也。 지금유지존언。휘왈국량。자왈비원。통선랑행장악원직장휘현준기고야。비칙안동권씨。전력부위수경녀야。 祖欽贈議政府左參贊。行麟蹄縣監。曾祖孝孫贈司憲府大司憲兼同知義禁府事。行通禮門奉禮。 조흠증의정부좌참찬。행인제현감。증조효손증사헌부대사헌겸동지의금부사。행통례문봉례。 高祖坡贈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行義興縣監。其贈皆公叔父孝節公諱賢輔貴也。自始祖大榮顯於永川。 고조파증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행의흥현감。기증개공숙부효절공휘현보귀야。자시조대영현어영천。 至軍器少尹軒移住禮安。少尹於公實六世也。同縣有眞城李公諱寅。公聘其女爲配。後公歿。祔而葬之。 지군기소윤헌이주예안。소윤어공실육세야。동현유진성리공휘인。공빙기녀위배。후공몰。부이장지。 松安君子修後。退陶先生第一兄勵節校尉諱潛其祖也。公之長男順承。娶忠義衛朴洙女。生獨女。 송안군자수후。퇴도선생제일형여절교위휘잠기조야。공지장남순승。취충의위박수녀。생독녀。 以直長琴學古妻之。次女適進士徐千一。兢,兟,競三男爲擧子。二女郞琴胤古,琴夢祥俱有職。季曰永承。 이직장금학고처지。차녀적진사서천일。긍,신,경삼남위거자。이녀랑금윤고,금몽상구유직。계왈영승。 承仕郞軍資監奉事。卽余聘君也。娶花山權氏。忠義衛輥之女。領議政轍其從叔父也。嗣子蕃。室忠義衛張彦輔女 승사랑군자감봉사。즉여빙군야。취화산권씨。충의위곤지녀。영의정철기종숙부야。사자번。실충의위장언보녀 無子而死。擇三從弟生員苙第三子榮係爲後。女歸士人權益民。生赫,喆二子。少女爲余繼配早逝。 무자이사。택삼종제생원립제삼자영계위후。녀귀사인권익민。생혁,철이자。소녀위여계배조서。 忠義衛朴昕爲女壻。男柱宇。十五中進士。末男柱漢始學字。銘曰。 충의위박흔위녀서。남주우。십오중진사。말남주한시학자。명왈。 難得之質。不幸短命。石用識哉。詔後伊永 。 난득지질。불행단명。석용식재。조후이영。 <<13세손 김태동 옮겨씀>> |
(進士李福崇公墓誌銘) 진사 이복숭공 묘지명 서문과 함께[幷序]
명(明)나라 만력(萬曆) 경자년(庚子年 선조 33, 1600)에 이빙군(李聘君:이씨의 장인(丈人)이 그의 선군(先君)의
묘소(墓所)를 온계동(溫溪洞)입구의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언덕으로 옮겼다.
이미 이장(移葬)을 마치고 나에게 묘지명(墓誌銘)을 부탁하였는데 감히 사양하지 못한 지가 10여 년이 되였다.
금년에 와서 그가 말씀하기를, 내가 늙었는데 아들이 또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죽게 되고 그대가 나의 여러해 동안
간곡히 부탁한것을 저버린다면 내가 어떻게 죽을 수 있겠는가? 하셨다.
내가 여기서 감동하여 기록한다.
아아!
빙군(聘君:장인)의 선군(先君:아버지)은 정덕(正德:명나라 무종(武宗)의 연호) 정축년(丁丑年 중종12, 1517)
정월 14일에 태어나서 가정(嘉靖:명나라 세종의 연호) 갑인년(甲寅年 명종9,1554) 5월 초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무릇 38년 동안 세상에 사셨다.
그러나 훌륭항 선비로 일컬어졌으며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성품과 호협하고 뛰어난 조화는 항상 퇴도 이선생
(退陶 李先生)의 인정을 받았다.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응시하여 병오년(丙午年 명종 1, 1546)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집안의 산업(産業)은 일삼지 아니하고 늘 낙동강(洛東江) 상류에다 한 지역을 골라 스스로 고산 주인(孤山主人)
이라고호(號)를 짓고 조그마한 서재(書齋)를 지으려고 도모하였으나 완성시키지는 못하였는데 지금까지 그 터가 남아있다.
그의 휘(諱)는 국량(國樑)이고,
자(字)는 비원(庇遠)이며,
통선랑(通善郞:正5品) 행 장악원 직장(行掌樂院直長:예조의 從7品) 이였다.
그리고 휘(諱) 현준(賢俊)은 그의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전력 부위(展力副尉:서반(西班:무관(武官)從9品))인 수경(守慶)의 따님이시다.
조부(祖父) 흠(欽)은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행 인제현감(行麟蹄顯監)에 추증(追贈)되었고,
증조(曾祖) 효손(孝孫)은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행 통례문 봉례(行通禮門奉禮)에 추증되였으며,
고조(考祖) 파(坡)는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 참찬관(兼經筵參贊官) 행 의흥현감(行義興縣監)에 추증되였는데,
그 추증은 모두 공(公)의 숙부(叔父)이신 효절공(孝節公) 휘(諱) 현보(賢輔)가 존귀(尊貴)하게 되였기 때문에서이다.
시조(始祖) 대영(大榮)에서부터 영천(永川)에서 드러났는데 군기소윤(軍器少尹) 헌(軒)에 이르러 예안(禮安)으로 옮겨와
살았으니 군기소윤이 공 에게는 실제로 6세(世) 이;시다.
같은 고을에 진성 이공(眞城李公) 휘(諱) 인(寅)이 있었는데 공이 그의 딸을 맞아다 배필(配匹)로 삼으셨으며,
공(公)보다 뒤에 세상을 떠나 묘(墓)에 부장(祔葬)하였는데 송안군(松安君) 자수(子修)의 후손(後孫)이고,
퇴도선생(退挑先生)의 맏형인 여절 교위(勵節校尉) 휘(諱) 잠(潛)이 그의 조부(祖父) 이시다.
공의 장남(長男) 순승(順承)은 충의위(忠義衛) 박수(朴洙)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외동딸만 두셨는데,
직장(直長) 금학고(琴學古)의 처(妻)가 되였으며 차녀(次女)는 진사(進士) 서천일(徐千一)에게 시집갔고,
긍(兢), 신(兟), 경(競) 세 아들은 거자(擧子:과거 공부하는 선비)가 되였으며,
외손(外孫)은 금윤고(琴胤古), 금몽상(琴夢祥)으로 모두 직함(職銜)이 있다.
둘째 아들 영승(永承)은 승사랑(承仕郞)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인데 바로 나의 장인(丈人) 이시다.
화산 권씨(花山權氏) 충의위(忠義衛) 곤(輥)의 따님에게 장가드셨는데,
영의정(領議政) 철(轍)이 그의 종숙부(從叔父)이시다.
사자(嗣子) 번(蕃)이 충의위(忠義衛) 장언보(張彦輔)의 따님을 아내로 맞았으나 자식이 없이 죽었으므로,
삼종제(三從弟) 생원(生員) 입(苙)의 셋째 아들 영(榮)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맏 딸은 사인(士人) 권익민(權益民)에게 출가(出家)하여 혁(赫), 철(喆) 두 아들을 두었으며,
둘째 딸은 나의 후처[계배(繼配)]가 되였는데,
일찍 죽은 충의위 박흔(朴昕)이 사위이고,
아들 주우(柱宇)는 열다섯 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막내 아들 주한(柱漢)은 이제야 글자를 배울 정도이다.
難得之質 난득지질 얻기 어려운 자질을 지녔지만, 不幸短命 불행단명 불행하게도 명이 짧으셨네. 石用識哉 석용식재 돌에다 그 사실 기록하여, 詔後伊永 소후이영 영원토록 후손에게 알리노라. |
감찰김공처영인이씨묘지명-병서(監察金公妻令人李氏墓誌銘-幷序 1618. 친구인 김율(金瑮)의 어머니 진성이씨(眞城 李氏)의 묘지명(墓誌銘))이다. 김율(金瑮)의 부탁으로 썼다. 서(序)에는 생몰년월일(生沒年月日)‚ 44세에 남편을 여의고 71세에 죽은 사실‚ |
原文(원문) 監察金公妻令人李氏墓誌銘 (감찰김공처영인이씨묘지명) 令人李氏。係出眞城。吾友金君瑮先妣也。嘉靖戊申六月十六日而生。歿以萬曆戊午八月十八日。方十六歲而家。 영인이씨。계출진성。오우김군율선비야。가정무신육월십육일이생。몰이만력무오팔월십팔일。방십육세이가。 四十四而寡。從其子二十有八年。壽凡七十一。退溪李先生叔父有嘉善大夫行戶曹參判諱堣。卽其曾祖考也。 사십사이과。종기자이십유팔년。수범칠십일。퇴계이선생숙부유가선대부행호조참판휘우。즉기증조고야。 祖壽苓爲宣務郞黃山道察訪。老憑爲奉政大夫禮賓寺僉正。娶成均生員贈戶曹參判金綏女。生令人。遴其適。 조수령위선무랑황산도찰방。노빙위봉정대부예빈사첨정。취성균생원증호조참판김수녀。생영인。린기적。 得聞韶金相公宇宏子得可爲天。仕至司憲府監察。男則瑮。室鳳城顯姓琴氏。女歸生員鄭而龍。鄭內外。 득문소김상공우굉자득가위천。사지사헌부감찰。남칙율。실봉성현성금씨。여귀생원정이룡。정내외。 先令人俱歿。其二子曰憲世榮世。瑮之後秋任蚤捷司馬。有子女。秋吉未冠。生員李掔,司果李一圭爲姊妹郞。 선영인구몰。기이자왈헌세영세。율지후추임조첩사마。유자녀。추길미관。생원이견,사과이일규위자매랑。 寔蕃其兒。瑮泣請余誌墓。其狀以爲令人性行慈明。治壼有法。越辛卯七月。監察公以喪亡。令人盡淸改哀。 식번기아。율읍청여지묘。기상이위영인성행자명。치곤유법。월신묘칠월。감찰공이상망。영인진청개애。 奠祭以禮。十月克葬于尙州鷹村先相公墓下。猝値壬辰倭亂。背負神主。避來禮安溫溪村。脫禍仍居。 전제이례。십월극장우상주응촌선상공묘하。졸치임진왜란。배부신주。피래례안온계촌。탈화잉거。 鄕而僻故也。敎子必欲以義。有若嚴父然。監察有妾子玹。撫恤無間於己出。疾病言尙是大路傍名邑。 향이벽고야。교자필욕이의。유약엄부연。감찰유첩자현。무휼무간어기출。질병언상시대로방명읍。 亂世居之非計。子孫宜以溫溪爲住。瑮泣。令人曰母。人豈有長生之理。第汝出入常呼母。此後又將誰呼。 란세거지비계。자손의이온계위주。율읍。영인왈모。인기유장생지리。제여출입상호모。차후우장수호。 仍朦墻外作殯。其衣衾旌帛皆所手備而預置云。嗚呼。余甞卜其隣升其堂。以余耳目。子之狀。圍矣非張也。 잉명동장외작빈。기의금정백개소수비이예치운。오호。여상복기린승기당。이여이목。자지상。위의비장야。 噫父母同穴。固人子所願欲者。而情勢有長短。心力不相稱。則孝子仁人之異其邱。亦所不得已焉。 희부모동혈。고인자소원욕자。이정세유장단。심력불상칭。칙효자인인지이기구。역소불득이언。 然則今子之葬令人。不於尙而於禮。不能也。非不爲也。其原曰老谷。子午其坐向。去溫溪四里許。 연칙금자지장영인。불어상이어례。불능야。비불위야。기원왈로곡。자오기좌향。거온계사리허。 其葬則歿之年十月三十日乙酉也。銘曰。 기장칙몰지년십월삼십일을유야。명왈。 生大賢門。長里之仁。于歸于金。族鉅疇倫。內事有則。厥室攸宜。夫先其歸。克家是依。况有科孫。歿亦伊光。 생대현문。장리지인。우귀우금。족거주륜。내사유칙。궐실유의。부선기귀。극가시의。황유과손。몰역이광。 而不同藏。匪孝之傷。 이불동장。비효지상。 <<13세손 김태동 옮겨씀>> |
(監察金公妻令人李氏墓誌銘) 감찰 김공 처 영인 이씨 묘지명 [幷序] 서문과 함께
영인(令人:4品 외명부(外命婦)의 품계.) 이씨(李氏)의 세계(世系)는 진성(眞城)에서 나왔으며,
나의 친구 김군(金君) 율(瑮)의 선비(先妣:돌아가신 어머니) 이시다.
가정(嘉靖) 무신년(戊申年 명종 3, 1548) 6월 16일에 태어나서,
만력(萬曆) 무오년(戊午年 광해 10, 1618) 8월 18일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열다섯 살에 출가(出家)하여 마흔넷에 과부(寡婦)가 되였으며,
자식을 따르기를 스물 여덟 해였으니 무릇 71년을 향수(享壽) 하셨다.
퇴계 이선생(退溪李先生)의 숙부(叔父)이신 가선 대부(嘉善大夫) 행 호조 참판(行戶曹參判) 휘(諱) 우(堣)가
바로 영인의 증조고(曾祖考) 이시다.
조부(祖父) 수령(壽苓)은 선무랑(宣武郞) 황산도 찰방(黃山道察訪)이고,
아버지 빙(憑)은 보정 대부(奉政大夫) 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인데,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된 김구(金綏)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영인을 낳으셨다.
출가시킬 곳을 물색하다가 김 상공 우굉(金相公宇宏)의 아들 득가(得可)의 처(妻)가 되게 하였으며,
부군(夫君)의 벼슬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正6品)에 이르렀다.
아들 율은 봉성(鳳城)에 드러난 성씨(姓氏)인 금씨(琴氏) 집안에 장가 들었으며,
딸은 생원 정이룡(鄭而龍)에게 출가하였는데 정이룡 내외(內外)는 영인보다 먼저 죽고,
그들의 두 아들 헌세(憲世), 영세(榮世)가 있다.
그리고 율의 아들 추임(秋任)은 일찍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아들과 딸이 있으며,
추길(秋吉)은 관례(冠禮)를 치르지 않았다.
그리고 생원 이견(李掔), 사과(司果) 이일규(李一圭)는 사위인데 집안이 번창하다.
그의 아들 율이 울먹이며 나에게 묘지명(墓誌銘)을 청원하였는데 그 장록(狀錄)에 이르기를,
영인의 성품과 행실은 자상(慈詳)하고 분명하며 집안을 다스리는 법도가 있었다.
신묘년(辛卯年 선조 24, 1591) 7월에 감찰공(監察公)이 세상을 떠나 영인이 인정과 슬픔을 다하였고,
치전(致奠)과 제사(祭祀)는 예(禮)대로 하였으며,
10월에 상주(尙州)의 응촌(鷹村) 선상공(先相公) 묘소(墓所)아래 장사 지냈다.
그러나 갑자기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나 신주(神主)를 등에 지고 예안(禮安)의 온계촌(溫溪村)으로 파난을 왔다가,
그 화(禍)를 벗어나게 되자 그대로 머물러 살게 되였는데 시골의 구석진 곳이였기 때문이였다.
자식을 교육함에 있어 반드시 의(義)로서 하려고 하기를 마치 엄격한 아버지처럼 하였다.
감찰공에게 첩(妾)의 자식 현(玹)이 있었는데 어루만지며 불쌍히 여기기를 자신이 낳은 자식과 차별이 없으셨다.
병(病)이 들자 말씀하시기를 상주(尙州)에는 큰 길가의 이름 있는 고을이라서 세상이 어지러울 때에 그곳에 사는 것은
계책이 아니니 자손(子孫)들을 온계(溫溪)에 살도록 하는 것이 적합하다. 고, 하시기에,
율이 울먹이자 영인이 말씀하시기를, 울지마라 사람이 어찌 죽지 않고 사는 이치가 있겠느냐?
단지 내가 드나들면서 항상 이 어미를 불렀는데 이 뒤로는 누구를 부르겠느냐? 하고,
이어서 동쪽 담장 밖에가 빈소(殯所)를 만들도록 명하고 그의 옷이며 이불 그리고 명정(銘旌)에 쓸 명주 등
모두 손수 준비한 것을 미리 그곳에다 두게 하셨다. 고, 하셨다.
아아!
내가 일찍이 친구의 이웃에 터를 잡아 살면서 영인이 계신 당(堂)에 올라 내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논 한다면
자네가 쓴 장록(狀錄)은 겸손하게 쓰였고 과장한 것은 없었다.
아!
부모(父母)를 같은 묘혈(墓穴)에다 안장(安葬)하는 것은 진실로 남의 자식된 자들의 소원이고 하고 싶어하는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정과 형세에는 장단(長短)이 있기 마련이고 마음과 재력이 서로 걸맞지 않아 효자(孝子)와 인인(仁人)이
그 부모 산소를 다른 곳에다 쓰는 경우 또한 어쩔 수없어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자네가 영인을 상주(尙州)에다 장사지내지 않고 예안(禮安)에다 지내는 것은 할 수 없어서이지 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는데 그 언덕은 노곡(老谷) 자좌 오향(子坐午向)이니 온계와의 거리는 4리(里) 쯤 된다.
영인의 장례는 돌아가신 해 10월 30일(乙酉) 에 지냈다.
生大賢門 생대현문 대현의 집안에 태어나서, 長里之仁 장리지인 어진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성장하셨고, 于歸于金 우귀우김 의성 김씨 집안에 출가 하셨으니, 族鉅疇倫 족거주륜 거대한 집안 그 유가 드물도다. 內事有則 내사유칙 집안의 일도 다스리는 법칙이 있으니, 闕室攸宜 궐실유의 영인이 잘 조화를 이루게 하셨도다. 夫先其歸 부선기귀 부군께서 먼저 세상을 떠나자, 克家是依 극가시의 살림살이를 잘 꾸려나가 의지하게 하였도다. 况有科孫 황유과손 더구나 소과에 합격한 손자 있으니, 歿亦伊光 몰역이광 돌아가셔도 빛이 나도다. 而不同藏 이불동장 내외분 같은 묘혈에 뫼시지 못함은, 匪孝之傷 비효지상 효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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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위권공묘갈명-병서(忠義衛權公墓碣銘-幷序) 권환(權懽:1544-1616)의 묘갈명(墓碣銘)이다. 서(序)에는 가계(家系)‚ 생몰년(生沒年)‚ 후손(後孫) 등을 기록하고 있다. |
(忠義衛權公墓碣銘) 충의위 권공 묘갈명 [幷序] 서문과 함께
관향(貫鄕)이 안동(安東)인 권응화씨(權應和氏)의 이름은 환(懽)인데,
아버지[고(考)] 는 충의위 사과(忠義衛司果) 곤(輥) 이고,
비(妣)는 황씨(黃氏)이니, 진사(進士) 빈(彬)의 따님이시다.
조부(祖 父) 칙(勅)은 별제(別提)이며,
증조(曾祖) 교(僑)는 숭정 대부 좌찬성 행 군수(崇政大夫左贊成行郡守)에 추증(追贈)되였고,
고조(高祖) 마(摩)는 자헌 대부 좌참찬 행 현감(資憲大夫左參贊行縣監)에 추증(追贈)되였으며,
5 대조(代祖)는 문경공(文景公) 제(踶)이고,
그 위로 문정공(文正公) 보(溥)와 문충공(文忠公) 근(近)이 있다.
태사(太師) 김행(金幸)이 권(權)이란 성(姓)을 받았으니 바로 그가 시조(始祖)이시다.
공(公)은 가정(嘉靖) 갑진년(甲辰年 중종39, 1544)에 태어나서 만력(萬曆) 병진년(丙辰年 광해군 8, 1616)에
세상을 떠나니 73년 동안 향수(享壽) 하셨다.
우계 이씨(羽溪李氏)를 배필(配匹)로 삼으셨는데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분저동(紛儲洞) 신산(辛山)에 장사지냈으며,
공은 옛날의 순흥부(順興府) 부석리(浮石里) 남목곡(南木谷) 감좌(坎坐)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분저동과의 거리는 10리(里) 쯤 된다.
장자(長子) 건(謇)은 규(揆), 윤(掄) 두 아들과 김여욱(金汝煜), 이섭(李聶)에게 각각 출가(出家)한 두 딸이 있었으며,
김여욱은 생원(生員),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하였다.
차자(次子) 기(諅)의 세 아들은 어리고 딸은 사인(士人) 안이유(安以遺)에게 출가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公宗旣遠 공종기원 공의 집안 내력은 이미 오래되었고, 公器猶厚 공기유후 공의 기국은 오히려 후덕하도다. 有赫其先 유혁기선 그 선대가 빛이 나고, 克綿厥後 극면궐후 그 후손들 잘 계승하도다. 積善伊幾 적선이기 선행을 쌓은 것이 얼마인데, 衰緒宜興 쇠서의흥 쇠미한 나머지 부흥되는 단서도다. 不朽宜識 불후의식 없어지지 않는 덕은 기록해야 마땅하니, 慶發或徵 경발혹징 경사로 나타남이 더러는 징험이 되도다. |
참의송공묘갈명-병서(參議宋公墓碣銘-幷序) |
原文(원문) 參議宋公墓碣銘 (참의송공묘갈명) 宋君大振。於吾族而友也。爲王大父參議公。屬以碣銘。余不敢辭。若稽其狀而有述曰。參議乃冶爐縣望族。 송군대진。어오족이우야。위왕대부참의공。속이갈명。여불감사。약계기상이유술왈。참의내야로현망족。 冶城君宋孟英。卽其始祖。而嗣有顯官。至十世諱吉昌。又襲其封。其孫縣令綸。於公爲曾祖。是生生員碩忠。 야성군송맹영。즉기시조。이사유현관。지십세휘길창。우습기봉。기손현령륜。어공위증조。시생생원석충。 是生通政儼。高麗太師權幸之裔習讀億齡女。爲通政配。生公於正德辛巳。娶永川李氏。李亦韻姓。 시생통정엄。고려태사권행지예습독억령녀。위통정배。생공어정덕신사。취영천이씨。이역운성。 縣監希樑孝節公賢輔。其考其祖也。公男有五。曰沉訓導。曰潛判官。曰淵。曰涵奉事。曰泳。女有四。 현감희량효절공현보。기고기조야。공남유오。왈침훈도。왈잠판관。왈연。왈함봉사。왈영。여유사。 曰邊慶應判事。曰張大鳴。曰蔡衎。曰權行可進士。沉之長子大振而大起其次。長女適權尙中。次適進士金遇秋。 왈변경응판사。왈장대명。왈채간。왈권행가진사。침지장자대진이대기기차。장녀적권상중。차적진사김우추。 潛無子。女歸縣令朴楣淵。三子曰大有,大脩,大亨。女曰生員申瓛。涵四子曰大任,大信,大庭,大觀。 잠무자。녀귀현령박미연。삼자왈대유,대수,대형。여왈생원신환。함사자왈대임,대신,대정,대관。 大庭中丁巳司馬。女曰南炦。泳二子曰大臨,大防。女曰柳仁壽。慶應三子三女曰鍵,銑,鏸,文科朴, 대정중정사사마。여왈남발。영이자왈대림,대방。여왈류인수。경응삼자삼녀왈건,선,혜,문과박 , 生員金慶遠,忠衛李厚培。大鳴二子曰逸翰,鵬翰。衍三子曰元俊,挺俊,時俊。行可二子曰中正,守正。噫。 생원김경원,충위리후배。대명이자왈일한,붕한。연삼자왈원준,정준,시준。행가이자왈중정,수정。희。 赫世蟬聯。以至于公。公雖未克立揚一時。而內外子孫多至三十有三人。布列鄕隣。無一人無嗣。其積德之厚。 혁세선련。이지우공。공수미극입양일시。이내외자손다지삼십유삼인。포열향린。무일인무사。기적덕지후。 盖亦無愧於後其先矣。萬曆丙子。方公之五十六歲。何其卒之遽也。始卜靈芝山以窆。及夫人歿。 개역무괴어후기선의。만력병자。방공지오십륙세。하기졸지거야。시복령지산이폄。급부인몰。 改其葬合封于平恩驛里先祖塋下震坐之山。少公五歲生。多公三十三年于世。李氏之壽凡七十有四。 개기장합봉우평은역리선조영하진좌지산。소공오세생。다공삼십삼년우세。이씨지수범칠십유사。 余少與大振往來。屢昇其堂。閨品之秀。婦德之純。余無異辭於大振。公配如此。公可想矣。 여소여대진왕래。루승기당。규품지수。부덕지순。여무이사어대진。공배여차。공가상의。 所謂剛毅寬厚正直固竆者。豈不信哉。公名福崇字彦嚮。以其老於儒。禾免爲鄭虔冷官。則訓導其實踐。 소위강의관후정직고궁자。기불신재。공명복숭자언향。이기노어유。화면위정건랭관。칙훈도기실천。 而値亂應募。納布蒙恩。有此參議追加。孝子仁人之顯其親。誠無所不爲也歟。銘曰。 이치란응모。납포몽은。유차참의추가。효자인인지현기친。성무소불위야여。명왈。 匪公無德。胡不公鄕。以公遐福。而促其生。德報伊永。寔繁其後。福膺未艾。餘慶世有。配同其藏。職孤之孝。 비공무덕。호불공향。이공하복。이촉기생。덕보이영。식번기후。복응미애。여경세유。배동기장。직고지효。 石焉斯鐫。久而爲詔。 석언사전。구이위조。 <<13세손 김태동 옮겨씀>> |
(參議宋公墓碣銘) 참의 송공 묘갈명 [幷序] 서문과 함께
송군 대진(宋君大振)은 나에게 인척이면서 친구이다.
그가 그의 왕대부(王大父) 참의공(參議公)을 위하여 나에게 묘갈명(墓碣銘)을 부탁하였는데,
내가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그 행장(行狀)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참의는 바로 야로현(冶爐顯)의 명망이 있는 집안이며,
야성군(冶城君) 송맹영(宋孟英)이 바로 그의 시조(始祖) 이시다.
그리고 잇달아 높은 벼슬을 지낸 분이 있었고,
10세(世) 휘(諱) 길창(吉昌)에 이르러서는 또 그 봉군호(封君號)를 세습(世襲)하였는데,
그의 손자(孫子)인 현령(縣令) 윤(綸)이 공에게 증조(曾祖)가 된다.
현령공이 생원(生員) 석충(碩忠)을 낳으셨고,
생원공이 통정대부(通政大夫) 엄(儼)을 낳으셨는데,
고려 태사(高麗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인 습독(習讀) 억령(億齡)의 딸을 통정의 배필(配匹)로 맞아
공(公)이 정덕(正德:명나라 무종(武宗)의 연호) 신사년(辛巳年 중종16, 1521)에 태어나셨다.
그 뒤 영천 이씨(永川李氏) 집안에 장가 드셨는데 영천이씨 역시 드러난 성씨(姓氏)로,
현감(縣監) 희량(希樑)과 효절공(孝節公) 현보(賢輔)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이시다.
공(公)이 다섯 아들을 두셨으니,
침(沈)은 훈도(訓導)이고,
잠(潛)은 판관(判官)이며,
다음은 연(淵)이고,
함(涵)은 봉사(奉事)이며,
그리고 영(泳) 이다.
딸은 넷을 두셨으니,
변경응(邊慶應)은 판사(判事)이고,
장대명(張大鳴)과 채간(蔡衎)이며,
권행가(權行可)는 진사(進士)이다.
침(沈)의 장자(長子)는 대진(大振)이고,
차자(次子)는 대기(大起)이다.
장녀(長女)는 권상중(權尙中)에게 출가(出家) 하였고,
차녀(次女)는 진사(進士) 김우추(金遇秋)에게 출가(出家) 하였다.
잠(潛)은 아들이 없고 딸은 현령(縣令) 박미(朴楣)에게 출가(出家) 하였다.
연(淵)은 아들이 셋 이니 대유(大有), 대수(大修), 대형(大亨)이고,
딸은 생원(生員) 신헌(申瓛)에게 출가(出家) 하였다.
함(涵)은 아들이 넷 이니, 대임(大任), 대신(大信), 대정(大庭), 대관(大觀) 인데,
대정(大庭)은 정사년(丁巳年 광해군9, 1617)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다.
딸은 남별(南別)에게 출가(出家)하였다.
영은 아들이 둘이니, 대림(大臨)과 대방(大防) 이며,
딸은 유인수(柳仁壽)에게 출가(出家) 하였다.
변경응(邊慶應)은 아들 셋 딸 셋 인데 아들은 건(鍵), 선(銑), 혜(鏸)이며,
혜(鏸)는 문과(文科)에 급제 하였고,
딸은 생원(生員) 박한(朴垾), 충의위(忠義衛) 김경원(金慶遠), 이후배(李厚培)에게 각각 출가(出家)하였다.
장대명(張大鳴)은 아들이 둘이니, 일한(逸翰)과 붕한(鵬翰) 이다.
채간(蔡衎)은 아들이 셋이니, 원준(元俊), 정준(挺俊), 시준(時俊) 이다.
권행가(權行可)는 아들이 둘이니, 중정(中正), 수정(守正) 이다.
아아!
빛나는 세대(世代)가 연속이 되다가 공(公)에게 이르렀다.
공이 비록 한 시대에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내외(內外)의 자손이 33명이나 많은데 이르러
향린(鄕隣:근처(近處)에 퍼져 있으며 한 사람도 후사(後嗣)가 없는이가 없으니 그가 쌓은 두터운 덕(德)은 역시
그 선조(先祖)의 후손이 되기에 부끄러운이 없다고 하겠다.
만력(萬曆) 병자년(丙子年 선조9, 1576)에 공의 연세가 바야흐로 56세 였는데 어찌 그렇게도 빨리 돌아가셨는가?
처음에는 영지산(靈芝山)에 터를 잡아 장사를 지냈다가 부인이 돌아감에 이르러,
평은역리(平恩驛里)의 선조의 산소 아래인 진좌(辰坐)의 산(山)에다 옮겨 합장[합봉(合封)]하였다.
부인(夫人)은 공보다 5년 뒤에 태어나서 공보다 33년을 더 사셨으니 이씨(李氏)의 수(壽)는 74세 였다.
내가 젊어서 대진과 왕래하면서 여러 차례 그분이 계신 마루에 올라가 절하고 뵌 적이 있는데,부녀(婦女)의 품위(品威)가
뛰어나고 부인의 덕(德)이 순수하여 나 또한 대진이 기록한 그의 행적(行跡)과 다른 말이 있을 수 없다.
공의 배위(配位)가 이와 같으니 공을 상상 할수 있다고 하겠으며 이른바 굳세고, 의젓하며, 너그럽고 후하며,정직하고,
곤궁(困窮)을 잘 견뎌냈다고 하는 것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공의 이름은 복숭(福崇)이고 자(字)는 언향(彦嚮)이시다.
그가 선비로 늙으면서 정건(鄭虔) 의 벼슬이 승진되지 않고,
침체된 경우와 같음을 모면하지 못하였으나 실천하면서 훈도(訓導)하다가 난리를 당하여 곡식과 면포 바치는데 응하여,
면포를 바치고 임금의 은혜를 입어 참의(參議) 벼슬을 추가(追加)하게 되였으니,
효자(孝子)와 인인(仁人)이 그 어버이를 드러내려는 정성은 못할 일이 없다고 하겠다.
[정건(鄭虔: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사람으로.
가난한 가운데서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博士)로 발탁이 되어 광문선생(廣文先生)으로 알려졌으나,
재능에 비하여 더 이상의 승진을 못한 불우한 관료 생활을 하였음.]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匪公無德 비공무덕 공에게 덕이 없는 것이 아니였는데, 胡不公卿 호불공경 어찌 공경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였는가? 而公遐福 이공하복 공의 큰 복이, 而促其生 이촉기생 공의 수명을 단축 하였던가? 德報伊永 덕보이영 덕을 갚아줌이 영원하여, 寔繁其後 식번기후 그의 후손이 번창 하도다. 福應未艾 복응미애 복은 응당 다함이 없으리니, 餘慶世有 여경세유 남은 경사는 대대로 있으리로다. 配同其藏 배동기장 내외분 같은 묘혈에 뫼셨음은, 職孤之孝 직고지효 아드님의 효성에 말미암았도다. 石焉斯鐫 석언사전 돌에다 이 사실을 새겨서, 久而爲詔 구이위소 오래도록 알리려 하노라. |
<<13세손 김태동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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