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김붕래]

                                            입춘 / 김붕래

입춘 절기 좋은 철에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공덕(救難功德)하였는가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越川功德)하였는가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活人功德)하였는가

부처님 전에 공양드려 염불공덕(念佛功德)하였는가

향도가(香徒歌) - 꽃상여 나갈 때 요령(鐃鈴)을 흔들며 부르던 노래는 구슬프면서도 아름답습니다. 헐벗은 이에게 옷을 주었으니 극락으로 천도해 달라. 입춘 절기 그 추운 날 월천공덕 한 영혼이니 천당으로 보내 달라. 소박한 소망입니다.

이런 향도가 다음에 이어지는 무덤을 다지며 부르는 달공소리(회다지소리)는 경쾌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죽음조차 어찌 그리 넉넉하였을까요?

입춘이 정월대보름과 함께 왔네요. 저는 무슨 공덕이라도 쌓아야 염라대왕님께 혼나지 않을까요? 그런데 딱히 제가할 일이 별로 없네요. 우리 문학 카페에 댓글이라도 열심히 올리면 그것도 지장보살께서 공덕으로 알아주실까요?

입춘 날은 글방에 다니는 아이는 천자문(天字文)을 아홉 번 읽고, 나무꾼은 아홉 짐 나무를 하며, 노인은 아홉 발 새끼를 꼽니다. 계집아이들은 나물 아홉 바구니를, 아낙들은 빨래 아홉 가지를, 길쌈을 해도 아홉 바디를 삼고, 실은 감더라도 아홉 꾸리를 감습니다. 밥을 먹어도 아홉 번, 종아리를 맞아도 아홉 번을 맞았습니다.

이것은 입춘이나 정월 대보름날 각기 맡은 바 소임에 따른 공덕 쌓기입니다.

아홉 번 한다는 뜻은 우리 조상들이 ‘9’라는 숫자를 가장 좋은 양수(陽數)로 보았기 때입니다. 삼 세 번이 세 번 있는 길한 숫자입니다. 그래서 9가 두 번 겹치는 ‘구구 팔십일’도 길한 숫자입니다. 9는 완성의 숫자입니다. 저는 중고서점 ‘알라딘’에 가서 책이나 9 권 사올까요?

선비들은 동짓날 붓으로 81송이 난을 그려 창가에 붙이고 하루에 한 송이씩 붉게 칠해 갑니다. 대충 양력 3월 12일쯤이면 81송이 모두 붉게 칠해집니다. 그날 창문을 활짝 엽니다. 창 밖 화단에는 막 핀 홍매가 진한 향기를 풍기고 만개해 있습니다. 이것은 줄탁동시(啐啄同時)의 감격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立春大吉 建陽多慶)

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수여산 부여해 (壽如山 富如海)

소지황금출 개문백복래 (掃地黃金出 開門百福來)

입춘첩 중 흔하게 보이는 대련(對聯)입니다. 대문 좌우에 여덟팔 자(八) 형태로 써 붙이면 일 년 내내 길하다는 일종의 자기 암시이자 언어가 주는 주술성이겠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일곱 살 때 써 붙인 입춘첩을 보고 당대의 명재상 채제공이 대문을 두드리고 누구의 글씨냐고 크게 칭찬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건양다경(建陽多慶)’이란 글귀는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습니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더 이상 중국 연호를 쓰지 않게 됩니다. 그냥 <개국(開國)>이라 하다가 1896년에 <건양(建陽)>이란 정식 연호를 씁니다. 자주독립국이 되었다는 감격으로 그해 전국방방곡곡에는 <건양다경(建陽多慶) 국태민안(國泰民安)> 이란 대련이 붙었습니다. 이 전통이 이어져 지금은 그 뜻도 잊은 채 봄맞이 휘호의 대명사가 된 것 같습니다.

우수도/ 경칩도/ 머언 날씨에

그렇게 차가운 계절인데도

봄은 우리 고운 핏줄을 타고 오고

호흡은 가빠도 이리 뜨거운가?

산은/ 산대로 첩첩 쌓이고/ 물은/ 물대로 모여 가듯이

나무는 나무끼리/ 짐승은 짐승끼리/ 우리도 우리끼리

봄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 신석정. <봄을 기다리는 마음>

우리들에게 봄의 개념은 다양합니다. 일 년을 4등분 해 봄을 정하면 봄은 3월 1일부터입니다. 천문학적으로 따져서 밤낮의 길이가 같은 날인 춘분으로 봄이 정한다면 3월 23일 무렵부터가 봄입니다. 그러나 기상청의 정의는 또 다릅니다. 설명이 복잡하지만 “9일 동안 평균 기온이 5도 이상 올랐다가 다시 떨어지지 않는 첫날”이 봄입니다. 이런 계산법으로 기상청이 산출해낸 서울의 봄은 대충 3월 12일, 황매가 만발한 날이 됩니다. 이렇게 보면 입춘은 아직 분명히 봄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시인들은 우수 경칩 훨씬 전부터 봄을 예감합니다.

문득 25시의 작가 게오르규의 ‘시인은 잠수함 속의 토끼와 같다’란 말이 생각납니다. 구식 잠수함에는 토끼를 키웠다고 합니다. 사람보다 산소에 민감한 토끼가 괴로워하면 우리는 모르지만 잠수함 속에 산소가 다 소진되었다는 뜻입니다.

봄을 기다린다는 것은 떠나간 연인을 기다린다는 말과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청진 I 이미영]

봄을 기다리듯 글의세계 부활을 기다리고 연인을 기다리듯 필진을 기다립니다 ^*^

[김붕래]

꽃이 피면 벌 나비 동산에 가득하겠지요.
우리 모두 편집장이 펼쳐놓은 멍석 위에서 한마당 흥겹게 춤춰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