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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나이가 사람을 완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공이 사람을 완고하게 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1권에서 로마가 최초로 건국된 기원전 753
년부터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했던 기원전 270년까지의 500년을 다루었습니다.
건국 초기의 왕정과 과두 정으로의 이행, 그리고 각종 위기들과 그 극복들이
주된 내용을 이루었었는데, 이런 2권에선 기원전 262년을 시작으로 기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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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까지의 약 백년을 다룹니다. 이 백년가량이 로마에게 있어서는 정말 중요
한 시기였는데, 로마의 향후 몇 백 년을 결정지어버린 ‘포에니 전쟁’이 이때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2권의 부제처럼, 이 포에니 전쟁은 2차가 진국이었는
데, 우리는 이 전쟁을 ‘한니발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2.한니발 [Hannibal, BC 247 ~ BC 183]
이탈리아를 통일한 로마에게 새로운 변수가 생겼습니다. 가까운 시칠리아
섬에서 문제가 생겨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어쩌라고? 만약 군대를 보낸다면
북아프리카 강국 카르타고와 맞붙게 되는데 페니키아의 후예는 해상강자입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전쟁을 피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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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에 하나 시칠리아 섬이 적에게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로마 본국도 위험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는 파병을 결정합니다. 당시에는 예상을 못했지만 1차
초에니 전쟁은 23년을 했고 결국3차 전쟁까지 120년이 걸렸습니다. 두 강자가
맞붙을 때 최강 육군(로마)vs막강 해군(카르타고)막상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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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려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로마는 강력한 육군들을 다른 배로 이동
시키기 위해 까마귀(corvus)라는 이름의 다리를 설치하여 해상 전에서마저
카르타고를 압도합니다.
카르타고의 정치가·장군. 제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전쟁)을 일으켜 육로로
피레네산맥과 알프스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침입, 각지에서 로마군을 격파한
장군, 그러나 대(大)스키피오가 카르타고를 공격하자 고국에 소환되어 자마
전투에서 대패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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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한니발이란 사람은 대충 이런 사람인데, 본격적으로 한니발 얘기를 하기
전에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대해서 얘기해보시다. 기원전 264년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했는데, 기원전 264년, 그러니깐 기원전 3세기 지중해의
세력 구도를 알 필요가 있어요. 페르시아를 물리친 그리스 문명은 아테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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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를 필두로 꽃을 피웠으나, 그 후 혼란과 분열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는
해가 돼버렸고, 그 위지방의 마케도니아는 한때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동방원정으로 세계최강국의 지위를 누렸으나, 역시나 알렉산더 대왕
사후 분열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니깐 지중해 문명의 중심지였던 발칸반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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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문명들이 그 구심점을 잃어버렸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기원전 3세기
지중해의 주인은 누구였느냐? 한 명은 아니고 두 명이었는데, 하나는 지금의
튀니지 북쪽 해안의 카르트하다쉬트를 본거지로 해서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
서부, 이베리아, 몰타, 발레아레스 제도,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시칠리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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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까지 지배했으며, 서지중해는 “카르타고의 허락 없이는 바닷물에 손을
담글 수도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던 카르타고였어요.
나머지 하나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던 한창 잘나가던 당대 신흥국 로마
이었고. 문제는 시칠리아에서 시작됩니다. 시칠리아에 ‘메시나’라는 작은 도시
국가가 있었는데, 얘가 이웃의 강대국이었던 ‘시라쿠사’에 위협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시칠리아의 대부분은 카르타고의 영향권에 들어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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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메시나가 지리상으로 더 가까웠던 로마에 구원을 요청해요.
로마가 생각하길, ‘만일 메시나가 카르타고의 영향권에 떨어지면 자신들의
본토인 이탈리아 반도와 바로 마주하게 돼요. 이는 로마 동맹국들의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어요.’ 자자, 이런 이유로 로마는 카르타고에 대한 일종의 방파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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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했던 것 같아요. 로마 원로원은 메시나를 구원하기위한 병력을 승인해요.
로마는 강국이었고, 메시나를 위협하면 시칠리아의 강국 시라쿠사도 박살내요.
이후 시라쿠사와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 자체를 조금씩 평정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결국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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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제1차 포에니 전쟁입니다. 왜 이런 명칭이 붙었냐면, 포에니라는 말은
페니키아인을 이르는 말이었는데,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인들을 세운 나라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는 육군으로써는 최강국이었지만, 바다에 배 같은
배를 띄워본 적 없는 나라였는데 반면 카르타고는 육군은 빈약했지만, 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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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대를 가진 해운강국이었어요. 그래도 로마는 막 함대를 건조하면서 카르타고
에 맞섰고, 약 20여 연간의 전쟁 끝에 카르타고를 물리치고 시칠리아를 완전
히 로마의 수중 안에 넣는데 성공해요. 종전 후 카르타고는 거액의 배상금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로마가 지중해의 패자라는 말을 할 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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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었는데, 이는 카르타고가 시칠리아라는 큰 식민지를 잃었다는 것이지, 자신
의 본토에 큰 타격을 입거나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포에니 전쟁에
패한 기원전 3세기 중반의 카르타고는 아직 건재했습니다. 비록 카르타고의
패배로 끝난 제1차 포에니 전쟁이었지만, 그때 시칠리아에서 용병대를 조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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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 전술로 로마군을 집요하게 몰아붙여, 한때 로마를 패배 직전까지 몰고
갔던 카르타고 한 장군이 있었는데, 그 이름 ‘하밀카르 바르카스’입니다. 패전
후 본국으로 넘어가 에스파냐에서 식민지를 일구기 시작했어요, 식민지 사업이
잘됐던 모양입니다. 하밀카르 바르카스의 가문이 바르카 가문이었는데,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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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 식민지를 두고 바르카 왕국이라고 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 위세가
가히 짐작이 갑니다. 근데, 이 분이 포에니 전쟁 당시의 로마를 잊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자기 맏아들을 신전에 데려가 “네가 자라면 반드시 로마를 멸망
시켜야 한다. 신과 아버지 앞에 맹세 하거라.” 라고 말했다고 해요. 맏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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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세를 했고, 이후 하밀카르는 로마의 배후세력에게 227년에 암살당합니다.
그리고 암살당한 아버지의 아들이 바로 한니발이었습니다. 물론, 시오노 나나
미는 하밀카르가 로마의 배후 세력에게 암살당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아요.
그녀는 전쟁에서 전사했다고 짧게 적어 놨을 뿐입니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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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명예와 긍지가 있는 민족으로 그려놓은 시오노 나나미에게 로마가
배후에서 몰래 사주하여 적을 제거하는 비겁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던 걸까?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명예나 긍지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이 국제질서의 냉혹한 불문율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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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얘기를 계속해보자. 아버지의 암살 배후에 대한 진실은 논란이었지만,
이유에 어찌됐든 한니발은 신들 앞에서 로마를 멸하기로 맹세했던 몸이었고,
실제로 로마를 미워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이룩한 에스파냐의 영지
에서 모집한 병력을 데리고 로마를 치기로 결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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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육군은 로마가 강국, 해군은 카르타고가 강국이라고 했던가?
한니발은 이런 발상을 뒤집어버립니다. 육로로 로마를 침공했던 것이지요.
론 강을 건넌 시점에서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4만 6천 명이었으니까,
알프스를 넘으면서 치른 희생이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무려 2만 명이나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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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입니다. 피레네 산맥을 넘은 시점과 비교하면, 뒤에 남기고 온 시체가 3만
3천 명에 이릅니다. 일찍이 아무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이긴 했지만, 치른 희생
도 엄청난 규모였습니다.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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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은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갔어요. 몇 백 년 후에 나폴레옹도
알프스를 넘어 적의 허를 찔렀지만, 원조는 한니발입니다. 신의 장벽에 가까운
알프스를 넘어버린 한니발은 로마의 본토로 진격합니다. 당연히 해상으로 쳐
들어올 줄 알고 군대를 배치했던 로마는 한니발이 본토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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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고 난리가 납니다. 그래도 로마는 강대국이었고, 곧바로 전선에서 군대를
이동시켜 한니발과 맞서게 했고, 추가로 군단을 더 꾸리는 조치를 취합니다.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한니발은 명장이었고, 로마 군단과 만날 때마다 로마
군단을 아주 그냥 씹어 드셨습니다. 티치노, 트레이바, 트라시메노, 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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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년간 이루어진 전투란 전투에서 죄다 패합니다. 그 중에서 칸나이 전투를
로마에게 정말 재앙이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 모든 사관학교에서 이 칸나이
전투를 다룹니다. 거의 포위전의 바이블과도 같은 명성을 얻었는데, 일일이
말로 설명하긴 좀 그렇고, 바로 그림 자료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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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상으로는 ‘양측 전력이 비슷비슷했던 모양이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
데, 아닙니다. 당시 로마는 로마 시민 병 42,400명에 동맹국 병사 44,800명을
합한 총 87,200명으로 거의 9만에 이르는 대군이었고, 한니발은 한니발 정규
병 26,000명에 갈리아 용병이 24,000명을 합한 5만 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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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걸 9만대 5만의 전쟁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한니발 휘하의 병력
절반이 갈리아 용병이었는데, 이들은 정규군이 아니라 말 그대로 용병입니다.
실질 전력을 비교하면 거의 9만대 3,4만의 전투였다고 생각해야 해요.
전투에 있어서 어떤 전략이라는 것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던 시대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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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당시 전투의 승패는 병력들 머릿수에 달려있었습니다. 로마는 당연히
이길 줄 알았어요. 그리고 이런 로마에게 처음으로 전략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것이 바로 한니발이었어요. 기원전 216년의 칸나에 전투에서는 로마군 8만
명 중 5만 명을 살육했으며, 이는 1916년 솜 전투 이전까지 서양에서 하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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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많은 인원이 전사한 전투로 남아요. 이건 전투라기보다는 학살에 더
가까웠다고 봐야 합니다. 이렇듯 한니발은 거의 재앙 급 악당입니다. 오죽하면
제2차 포에니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고, 한니발 전쟁이라고
부를까? 기원전 211녀 한니발이 수도 로마까지 진군해온 일이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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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로마인들에게 최악의 트라우마로 남았던 모양입니다. 이후 로마인
들은 아이를 야단칠 때 “문간에 한니발이 와 있다”라고 말하게 됐다고 합니다.
그래도 한니발은 결국 로마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그는 로마의 동맹국들을
완전히 로마로 분리시켜 로마를 고립시킨 다음에 로마를 무너뜨릴 생각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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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로마의 동맹은 무너지지 않았어요. 이는 로마의 개방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어요. 로마는 상대 부족과 전쟁을 하고도 그들이 항복을 한다면
그들에게 자치권을 줬을 뿐만 아니라 시민권까지 부여했어요. 한마디로 아주
Cool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엔 자신들이 시민권을 준 외국인 중에서 집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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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최고의 관직. 수장 격.)이 나오기까지 해요. 이렇듯 로마는 동맹국들에게
공평한 권리와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한니발이 재앙이었지만, 동맹국들은 끝
까지 로마를 믿었어요. 그리고 이는 결국 한니발의 패배로 이어집니다.
‘전투에는 졌지만 전쟁에는 이겼다.’ 라는 말이 있는데 로마가 딱 이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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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맞아요. 로마는 카르타고에서의 모든 지원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한니발을
조였어요. 한니발 전쟁 16년 내도록 한니발이 본국에서 지원을 받은 게 두
차례인가? 그뿐이었다고 하니 로마의 포위 전략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국에선 절대 한니발을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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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집정관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대 한니발 전략으로 철저한 지구전을
전개합니다. 절대적으로 큰 회전을 피하고, 오직 견제만 했던 것이다. 일명
말려죽이기 작전이었습니다. 보급로 차단 작전은 대성공이었어요. 이후
아프리카를 평정했다는 명예로운 칭호 ‘아프리카누스’를 받은 스키피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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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합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이 로마의 본토를 침공한 것처럼 자신도 로마
군단을 이끌고 카르타고 본토로 쳐들어갔고, 카르타고의 본토를 박살냅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카르타고는 급히 한니발을 송환 조치했고, 16년 동안
10만 명이 넘는 로마군을 전사시키고, 10명이 넘는 집정관급 사령관들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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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몰아넣은 로마의 재앙 한니발은 기원전 205년 카르타고로 돌아갑니다.
당시 그의 심정을 알려주는 사료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역사는 아이러니로
가득해요. 이후 한니발의 전략을 그대로 배운 스키피오는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을 괴멸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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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수제자가 카르타고가 아닌 로마에서 나온 것은 한니발 인생 최대 비극
이었어요. 이후 한니발은 여기저기 망명을 다니다 기원전 183년 자기를
잡으러 문 앞까지 병사들이 온 것을 알고 독약을 마시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참……짓궂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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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가 평하길 로마의 궤멸을 생애의 소원으로 삼았던 한니발은
결국 로마가 강대해지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어느 나라보다도 많이 도와준
셈이라고 했어요. 맞는 말 같아요. 한니발에게서 배운 군사전략은 이후
그리스, 마케도니아, 카르타고를 멸망시키는 로마군의 원동력이 됐고, 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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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력이었던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로마는 지중해를 평정하면서부터 제국주의적
정책을 펴기 시작합니다. 이는 팍스 로마나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듭니다. 카르타고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최대 원인이었던 국론 분열에 대한 일이나, 한명의 이탈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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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16년 동안 군대를 이끈 한니발의 리더십, 또는 이 한니발을 상대로 굳은
의지로 전쟁을 수행한 로마의 자세 같은 것들 말입니다. 한니발의 장점을
그대로 배워 써먹은 스키피오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이런 로마인의 지혜를
벤치마킹해 삶의 지혜로 삼아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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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은 건, 재앙에 가까웠던 한니발 전쟁동안 로마의 동맹
들이 로마를 배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선정과 공평한 대우의 위력이 이
정도였을까? 보통 위기상황이 닥치면 인간의 진짜 모습이 나온다고 하지요.
나는 이 말을 그냥 인간은 누구나 다 추악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 따위로 이해
했지만, 아무래도 이런 이해를 수정해야할 듯싶어요. 팍스 로마나 리스펙트!
2023.2.18.sat.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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