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상선 선생님의 수필창작방에 업로드 했었던 글들을 이곳에 다시 옮겨 놓습니다)
송무백열의 친구, 내 삶의 비타민이여!
김정숙 / 수필가
“우리는 부자가 되지 않아도, 관대한 사람은 될 수 있다.
우리는 지혜를 가지지 않아도, 이해하는 사람은 될 수 있다.
우리의 영향력은 위대하지 않을 수 있으나, 선할 수는 있다.
우리의 말이 유창하진 못해도, 진실하고 성실하게 살 수는 있다.
우리의 외모가 아름답지는 못해도, 우리는 착한 양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에 평안을 가질 수 있고, 어떤 사람도 겁낼 필요가 없다.“
′92년 11월 11일, 수요일 오후,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서 한 친구가 나에게 예쁜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 속에는 위의 글귀들이 씌어 있었고, 잔잔한 위로와 격려의 말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편지의 말미에는 < 넌 잘 할 수 있어! 그리고 믿어보자!. 어려움을 같이 하고픈 친구 – 미란이가... > 라고 씌어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 친구가 앞으로의 내 인생에 그렇게 커다란 존재감으로 작용하리라고는 감도 잡지 못했다. 그때 우리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는, 고3 수험생이었고, 대학입시가 목전에 임박한 11월 초순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대학 진학문제로 담임선생님과 갈등하는 사이였기에 마음의 상처가 컸었다. 그래서였는지 그 때엔 주변 친구들을 돌아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는 반에서도 특별히 친한 친구가 없었다. 그저 막막한 현실 앞에서 오직 주님께 의탁하는 기도로, 내 어두운 앞날을 헤쳐 나가기에도 바쁜 마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담임선생님과의 상담이 있는 날엔 울음이 따라다녔다. 선생님 앞에만 서면 뭔가를 말해야 하는 데도, 제대로 된 말을 못하고 얼버무렸다. 바보같이 눈물만 쏟아내는 것이 일쑤 있는 일이었다. 울어서 빨개진 눈을 하고 교실로 돌아온 것이 4일째 반복이었다.
내가 담임선생님과의 갈등이 잦았던 이유를 말하겠다. 담임선생님은 내가 4년제 국립대 시험을 꼭 봐야 한다며 몇 번이나 설득하셨다. 하지만 나는 4년제 대학시험은 포기했다고 말씀드렸다. 2년제 전문대학을 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부모님과 형제들의 뜻이기도 했다. 우리 집은 누구든 고등학교까지 졸업만 하면 그 후엔 각자 알아서 본인의 미래를 헤쳐 나가야만 했다. 이것은 가족 누구나 따라야 할 불문율 같은 거였다.
이런 상황을 담임선생님은 전혀 알지 못하셨기에, 내가 철없는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내 입장을 이해도 못해 주시고, 눈치도 못 채는 선생님이 야속하기만 했다. 사실 2년제 대학도 갈 수 없는 걸, 나의 막무가내식 고집으로 가족들이 할 수 없이 허락한 사실을, 선생님은 전혀 눈치도 못 채셨던 것 같다.
진학을 앞두고 내가 흘렸던 눈물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가난한 집이었기에 4년제 대학은 꿈도 꿀 수 없었고, 꿈을 꿔서도 안 된다는 서러움에서 자주 울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미란이는, 그렇게 냉랭하게 동장군처럼 얼어붙어 있던, 내 마음에 따스한 봄바람이 돼 준 친구였다. 결국 나는 그 친구의 격려와 위로 덕분에, 네 장이나 되는 장문의 편지를 써서 담임선생님께 드렸다. 그 편지를 통해, 대학을 못 보내줘서 미안해하시는, 연로하신 부모님의 심정도 말씀드렸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아야 하는 나의 입장과, 그런 결단을 할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씀드렸다.
담임선생님은 나의 구차한(?!) 사연들을 읽으시더니, 그 애처로운 상황과 마음을 이해해 주셨다. 그리고 빠른 취업을 위해 2년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내 진심을 알아 주셨고, 격려로 다독여 주셨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라도 꼭 네 힘으로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게다가 나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아이라면서 인정하기 힘든 칭찬까지 해 주셨다. 진심으로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우리의 갈등극은 이렇게 어설픈 희극으로 끝났다.
그 힘든 고비들을 이겨내게 한 미란이가 고맙다. 송무백열(松茂栢悅)하는 그 마음과 미란이가 내 마음 속 깊이 자리잡고 있다. 더구나 선생님과의 사건과도 같은 그런 일들이 있기 며칠 전에, 미란이는 내 옆자리에 다가와서는 < 니 옆에 짝꿍으로 앉아도 될까? >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은 진정 기쁨으로 충만돼 있었다. 우리는 중학교 2학년 때에도 같은 반이었는데, 사실 나는 미란이에게 적지 않은 호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미란이 주변에는 친한 친구들이 늘 많아 보였다. 무슨 야릇한 심정이었는지 나는 미란이와 친해지려는 시도조차 해 보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랬기에 미란이에게 짝꿍으로 초청된 내 마음은 마치 신비스러운 축제에라도 초대되는 기분이었다. 같이 힘든 고3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에도 촌뜨기인 나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황송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금란지교(金蘭之交) 같은 우정으로서의 사귐은 세월이 갈수록 더욱 애틋해졌다. 미란이는 목포에서 물리치료과 공부를 했고, 나는 어쩔 수 없는 집안사정으로 대전에서 전자계산과를 다녔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서로를 그리워했다. 그때는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동전만 모으면, 나는 밤마다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가 미란이와의 대화를 즐겼다. 동전이 떨어져 갈 때마다, 나의 아쉬움은 더욱 깊어만 갔다.
경제적 여유가 별로 없었던 나는, 무거운 가방(그 시절에는 대학 캠퍼스 안에 개인 사물 보관함이 없었음.)을 메고 대학, 집, 그리고 도서관만을 주로 반복하며 학교도 거의 매일 걸어 다녔다. 그렇지만, 나를 잘 모르는 친구들은 우리 집 형편이 조금은 잘 사는 아이로 오해되기도 했었다. 이유는 큰오빠가 많은 대출을 받아 갓 분양받은 새 아파트에 내가 먼저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시절 나는 생일축하 초대를 하는 친구들 모임에도 애써 참석하지 않았다. 술을 전혀 못하는 게 이유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작은 선물이나 식사비 분담을 하기에도 부담스러운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은 정말 친한 단짝 친구 외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굳이 숨긴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시시콜콜 말하고 싶은 내용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라도 사투리를 썼던 나는 대전에 와서도 당연히 낯선 이방인의 모습을 물씬 풍겼기에 어떤 이들은 그런 나의 말투를 따라하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 속에서도 내가 대전의 낯선 삶들을 조금이나마 용기 있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은, 때때로 전해 오는 미란이의 우편엽서나 편지들 덕분이었다. 대학 새내기로서 첫 학기를 보낼 때는, 미란이가 일주일 내내 하루에 한 장씩 엽서를 보내왔다. 중간고사 시험을 잘 보라는 응원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그때는 정말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그 친구도 똑같이 중간고사 시험기간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우리 두 사람의 20대 청년시절의 편지와 엽서들을 잘 보관하고 있다. 그 손편지들을 세어보니 대략 80통이 넘었다. 누가 보면 우리더러 < 니네 사귀냐? >라며 오해할 만한 숫자 같다. 물론, 그 뒤로도 많은 이메일들을 주고받았지만, 오히려 그때의 이메일들은 제대로 보관하지를 못했다. 미란이는 문학적인 감성도 풍부하여 늘 편지마다 좋은 글귀들을 함께 보내주었다. 그 글들은 타지생활에 지친 내 마음을 위로해 주기에 충분했었고, 낯선 삶에 잔뜩 긴장되어 있는 정서를 많이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미란이의 응원으로, 나는 쾌활하고 멋진 성격의 친구를 같은 학과에서 만날 수 있게 되었고, 마음씨 좋은 착한 벗들도 여럿이나 사귀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때로는 캠퍼스 내에서 나의 촌티를 놀리는 남자 아이들이 있어도, 마음속으로는 전혀 개의치 않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미란이는 늘 그렇게 송무백열(松茂柏悅)하는 친구의 모습으로 내 곁을 지켜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감미로운 청춘시절을 보냈다. 이따금씩은 어린왕자와 별똥별에 대해서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되었고, 어떤 날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선생님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때로는 헤르만 헤세의 글들을 음미하기도 했다. 미란이의 고향집이 있는 목포 항구 근처에는 ‘노인과 바다’라는 커피숍도 있어 은근히 시적인 분위기를 만들며 함께 커피를 즐기기도 했다. 그 친구와 함께 하는 모든 날들은 행복하고, 아쉽고, 애틋했었다.
지금은 그 친구도 나도, 세월의 흐름 속에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느라 많은 시간들을 함께하지 못하고 있다. 친구는 평택에서 살고, 나는 대전에서 생활하며 서로 떨어져 지낸 지 오래다. 그래서 그런지, 그 옛날 순수했던 청춘의 정서들은 세월 세파 속에 많이 퇴색된 느낌이다. 허나 이따금씩 그 시절에 오고갔던 편지들을 새삼스레 꺼내어 읽어보면, 어느 덧 그 때의 그 순수했던 감정들이 다시금 되살아나곤 한다.
지금으로부터 5개월 전쯤이었던가? 어느 날 내 책상위의 동양란이 예쁜 꽃들을 피우면서, 그 고급스럽고 은은한 향기로 내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친구가 생각나고 무척 그리워했다. 정말 ‘미란(美蘭, 아름다운 난초)’의 향기가 내 방을 가득 채우며, 며칠째 나와 함께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나는 거의 온종일 난초의 은은한 향에 젖어 친구 미란이를 한껏 놓지 못했다. 정말 달콤한 시간이었다.
송무백열의 친구, 내 삶의 비타민이여!
그 청초하고 은은한 지란의 향이
우리 둘의 온혈가슴에 똬릴 트는 우정 나눠 보자
우리 서로의 비타민과 장갑이 되어
사람냄새 곱게 수놓는 꽃길 만들어가며 살아보자.
황금보다 소중한 친구여 !
우리 관포지교의 주인공, 관중과 포숙으로 살아보자.
이 풍진 세상 우정의 향기로 코를 벌름거리며,
너는 소나무, 나는 잣나무 되어, 송무백열의 친구로 살아보자.
첫댓글 송무백열이라 할 수 있는 오랜 친구와의 우정이 참 아름답습니다. 실제로는 평택-대전만큼 떨어져 있어도, 마음 만큼은 바로 옆집 같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