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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5월 20일 월요일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8년에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하였다.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교부 시대부터 쓰였는데,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 헌장’을 반포하며 마리아에게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을 부여하였다. 마리아는 성령 강림 이후 어머니로서 교회를 돌보았고,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강조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06년 춘계 정기 총회에서 해마다 ‘청소년 주일’(5월 마지막 주일)까지의 한 주간을 ‘교육 주간’으로 정하였다.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무엇보다도 교육이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이기에 가톨릭 교육에 대한 의식을 높이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마련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 것이다.
말씀의 초대
사람은 자기 아내 이름을 하와라 하였는데,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3,9-15.20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9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20 사람은 자기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하였다.
그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그들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기도에 전념하였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12-14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뒤에
12 사도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 산은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었다.
13 성안에 들어간 그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아, 필립보와 토마스,
바르톨로메오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14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9,25-34
그때에 25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26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27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28 그 뒤에 이미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듬뿍 적신 해면을 우슬초 가지에 꽂아
예수님의 입에 갖다 대었다.
30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시며 숨을 거두셨다.
31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32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33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34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과 독서에서 무엇보다도 자주 등장하는 낱말은 “어머니”입니다. 독서는 “하와”라는 이름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라는 의미를 전하고, 복음은 성모님의 ‘모성’에 대한 두 가지 내용을 강조합니다. 복음의 전반부는 이 어머니의 특징을 아들의 죽음 앞에 묵묵히 ‘서 계셨음’으로 제시합니다. 죽어 가는 아들 곁에 서 계셨던 ‘어머니의 마음’(성모 성심)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두 번째로 강조된 내용은 새로운 모성의 시작입니다.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는 당부로써, 성모님께서는 이제 ‘예수님의 어머니’에서 ‘사도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특별히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음은 복음의 후반부에 나오는 내용, 곧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신 뒤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라는 문장과 연결됩니다.
교부들은 이를 교회의 탄생으로 이해하였는데, 아담의 옆구리(갈빗대)에서 하와가 나왔듯,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 (물을 통하여 세례성사/피를 통하여 성체성사)가 나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모든 ‘모성’은 죽을 만큼의 고통 속에서 생명을 내놓습니다. 아들 예수님을 낳으신 ‘육신의 모성’은 이제,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사도들의 어머니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영적 모성’까지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게 하셨습니다. 아들의 십자가 곁에 서 계셨듯, 이제 성모님께서는 우리가 소외되고 버려져 고통스러워할 때 우리 곁에 서 계십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리라 믿으며 묵묵히, 그 누구보다 굳건히 서 계십니다. 모성은 사랑하는 이들 곁에 서 있는 것입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시며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모성월을 지내는 가운데, 또 다시 우리는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성모님 신앙의 성장 여정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나자렛 산골의 시골 소녀에서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서 성모님은 사도들의 우리 모두의 어머니, 교회 공동체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마침내 승천하신 성모님은 하늘의 어머니, 하늘의 여왕으로 자리매김하십니다.
성인치고 성모 신심이 없거나 부족한 분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우셨던 분, 예수님을 가장 잘 알고 계셨던 분, 예수님과 일심동체였던 분으로서, 오늘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모델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의 성모 신심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돈독한 것이었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입만 열면, 성모님, 성모님이라고 외치셨습니다.
여자 청소년들을 위한 수녀회를 창립하셨는데, 수녀회 이름을 성모님께 봉헌하는 의미에서 ‘도움이신 마리아의 딸회’로 명명하셨습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업적을 칭찬하면, 이 모든 것은 성모님이 하신 것이라며 성모님께 공을 돌렸습니다.
돈보스코 성인께서 돌아가시기 3년 전, 1885년 6월의 일입니다. 당시 살레시오 수녀님들은 프랑스 니짜 몬페라토란 곳에서 총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력이 쇠한 돈보스코 성인께서 수녀님들에게 총회 마무리 말씀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쇠한 돈보스코 성인은 알아듣기 힘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많은 것들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지만, 보시다시피 나는 이미 늙었고 말하기 조차 힘듭니다. 그래서 간단히 한 말씀만 드리자면 성모님께서 여러분을 정말 사랑하신다는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십니까? 성모님께서는 여기 여러분 가운데 계십니다.”
당시 돈보스코 성인을 수행하던 보네티라는 사제가 돈보스코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그분의 말을 받아 수녀님에게 큰 소리로 통역 아닌 통역을 해드렸습니다.
“돈보스코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여러분의 어머니시고 여러분을 보시며 기도하고 계십니다.”
보네티 신부의 전언이 마음에 안 들었던 돈보스코 성인께서는 그게 아니라며 안간힘을 다해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게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바로 이 집에 계시며 여러분들에게 흡족해하고 계십니다.”
보네티 신부가 다시 돈보스코 성인의 말을 전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정하겠습니다. 돈보스코께서 말씀하시길, 여러분이 항상 잘하신다면 성모님께서 여러분에 대해 만족하실 것입니다.”
또다시 엉뚱한 말을 전하는 보네티 신부에 화가 난 돈보스코 성인은 젖먹던 힘까지 다해 크게 외치십니다.
“성모님께서 바로 여기 여러분 가운데 정말로 계십니다. 성모님께서 이 집안을 거닐고 계시며 당신의 망토로 이곳을 덮고 계십니다.”
돈보스코 성인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의 성모님은 도움이신 성모님이십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와 구성원들을 극진히 사랑하십니다.
그 표시로 성모님께서는 항상 우리 옆에 현존하시며 우리의 일생을 동반하십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를 보호하시고 우리의 모든 걸음에 함께 하십니다. 결국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시며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맹모삼천(孟母三遷)’이란 고사가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 맹자를 위해서 3번 이사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간 곳은 ‘장의사’ 옆이었습니다. 아들 맹자는 망자를 위해서 ‘곡’을 하면서 놀았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상가가 즐비한 ‘시장’ 옆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아들 맹자는 물건을 파는 ‘흉내’를 내면서 놀았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글공부하는 ‘서당’ 옆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아들 맹자는 글공부 ‘흉내’를 내면서 놀았습니다. 그제야 맹자의 어머니는 만족하였다고 합니다.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3번이나 이사 하였다는 맹자의 어머니 이야기를 두고 ‘맹모삼천’이라고 합니다. 한국 어머니들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맹모삼천에 절대로 뒤지지 않습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태평양을 건너서 기러기 엄마가 되기도 합니다. 자녀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온갖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다른 지출을 줄일지라도, 자녀의 교육비에 대한 지출은 줄이지 않습니다. 지하자원이 풍족하지 않은 대한민국이 가난을 딛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교육에 대한 열정도 큰 몫을 하였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배우자의 외모, 재력, 능력을 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배우자의 ‘학력’을 보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배움의 기회를 놓친 어머니는 많이 배운 배우자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사범학교를 나온 배우자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어머니는 가난도 참아 낼 수 있었습니다. 사상의 검열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능력만 있다면 모두 대학에 보내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쌀장사, 밥장사, 파출부 일도 하면서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헌신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야학에 다니면서 한글을 배웠습니다. 신앙에 대한 열정으로 성서를 필사하였고, 구역장과 반장으로 봉사했습니다.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구역장들에게 선물로 주신 ‘신발’을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많은 예비자를 입교 권면하였고, 기꺼이 대모가 되어 주었습니다. 제가 사제가 되었을 때 저보다 먼저 제가 가야 할 성당에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아들 사제가 잘 지낼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처음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는 3년 동안 식사 준비를 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와 잠시 헤어지는 슬픔도 기꺼이 감수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늘 말없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4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어머니는 이제 천국에서 아들 사제와 동생 수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심을 믿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교회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 오니 그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의 능력과 인간의 지혜에서 길을 찾지 않았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길을 찾았습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였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지혜를 찾기 전에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식별해야 합니다. 성모님은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들이어야 합니다. 성모님은 ‘포도주가 없구나.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모님은 무엇이 필요한 것인지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조직과 건물이 있어야 합니다. 신학과 교리가 있어야 합니다. 제도와 전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제자입니다. 우리는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온다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교회는 성모님을 어머니로 존경하고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교회를 위해 전구 하시고 있습니다. “마리아께서는 티 없는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여 동정의 몸에 잉태하시고 교회의 창설자 그리스도를 낳으시어 교회의 시작을 도우셨나이다. 마리아께서는 십자가 곁에서 아드님의 유언에 따라 모든 사람을 당신 자녀로 받아들이셨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들은 천상 생명을 받아 새로 태어났나이다. 비오니, 성모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가 주님께 간구하는 모든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하소서.”
<떠남이 아름다울 수 있기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요한 19,27)
아들이 떠나신다
어머니에게
당신의 벗을
아들로
남겨 놓고
벗이 떠나신다
벗에게
당신의 어머니를
어머니로
남겨 놓고
나도 그리 떠날 수 있기를
떠남은
사라짐이 아니라
새롭게
피어남이니
모두 그리 떠날 수 있기를
오늘의 성인
성 아우스트레지실로 (Austregisilus)
활동년도 : +624년
신분 : 주교
지역 : 부르주(Bourges)
같은 이름 : 아우스뜨레지실로, 아우스뜨레지실루스, 아우스트레지실루스, 우뜨릴, 우트릴
프랑스 부르주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서 국왕 군트람누스(Guntramnus)의 샬롱쉬르손(Chalon-sur-Saone) 궁에서 지내던 성 아우스트레지실루스(또는 아우스트레지실로)는 중대한 문제로 결투를 해야 할 입장에 놓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자가 말에서 떨어져 죽어버렸다. 이때 그는 이 사건을 세속에서 자신을 빼내려는 주님의 섭리로 생각하여 왕에게 궁을 떠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평소 수도생활에 대한 성소를 느끼고 있던 그는 친구인 성 아이테리우스(Aetherius)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마침내 리옹(Lyon)의 생 니지에(Saint Nizier)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후에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영적인 지혜로 유명했던 그는 612년에 고향인 부르주의 주교로 선출되어 12년 동안 봉사하다가 선종하였다. 그의 제자 중에는 성 아만두스(Amandus)가 유명하다. 그는 우트릴(Outril)로도 불린다.
성 베르나르디노(Bernardino)
신분 : 신학자, 설교가
활동지역 : 시에나(Siena)
활동연도 : 1380-1444년
같은이름 : 베르나르디누스, 베르나르딘
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 또는 베르나르디노)는 1380년 9월 8일 이탈리아 시에나 근방 마사 마리티마(Massa Marittima)에서 정치가였던 아버지 톨로 델리 알비체스키(Tollo degli Albizzeschi)와 어머니 네라 델리 아베두티(Nera degli Avveduti)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3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다시 3년 뒤 아버지마저 여의고 고아가 되어 친척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1391부터 1397년까지 시에나에서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그곳 대학에서 3년 간 교회법을 배운 그는 라틴어 고전뿐만 아니라 성경과 신학에도 심취하였고 신심의 실천에도 열의를 보였다.
1400년 흑사병으로 온 나라가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을 때, 그는 약 4개월 동안 시에나의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Santa Maria della Scala) 병원에서 흑사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병에 걸리기도 하였다. 1402년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 그는 이듬해 9월 8일 콜룸바요 수도원에서 허원을 하였고, 1404년에 사제품을 받고 다음해에 세지아노(Seggiano)에서 설교를 시작한 이래 죽기까지 설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성 베르나르디누스는 1408년부터 다음해까지 페라라(Ferrara)에서, 1410년에는 시에나와 파비아(Pavia)에서 설교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예수 성명에 대한 설교를 시작함으로써 롬바르디아(Lombardia) 지역의 복음화에 기여하였다. 1417년부터 그는 밀라노(Milano)에서 대중 설교가로서 활동하면서 뛰어난 웅변술과 정열적인 설교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걸어서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 지방을 순회하며 정열적으로 설교하였는데, 그의 주된 설교 주제는 예수 성명에 대한 공경과 참회와 사랑의 실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도박, 고리대금업, 마술, 미신 등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한편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정치적 권력 투쟁을 그 시대의 근본적인 악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특별히 예수 성명의 신심을 전파했는데, 이 신심은 교회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그 신심의 깊은 신학적 기초를 깨닫도록 그리스어 예수(ΙΗΣΟΥΣ)의 첫 세 글자를 로마자로 표시한 ‘IHS’를 고안하였다. 그가 만들어 낸 이 모노그람마(Monogramma)는 ‘이 표징 안에서’(in hoc signo),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표징으로’ 혹은 ‘인간의 구원자 예수’(Jesus hominum Salvator)라는 뜻이다.
그는 빛나는 태양의 중앙에 이 글자를 새긴 문장을 사용하여 설교를 마무리할 때마다 공경 예절을 행하였다. 그는 이 문장으로 어떤 미신적인 상징이나 특정 파벌의 훈장 등을 대체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예수의 성명을 성경의 요약이요 일치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 그 후 성 베르나르디누스와 그의 제자들의 사도직을 통해서 예수 성명에 대한 공경은 널리 확산되었고, 이 문장은 교회와 가정, 공적인 건물 등에도 사용되게 되었다.
반면에 당시의 일부 인문주의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러한 그의 활동을 불신하고, 이 기도를 위험한 혁신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1424년 볼로냐(Bologna) 대학에서 예수 성명 신심에 대한 공식적인 반발이 시작되었다. 무려 8년 동안 그는 교도권과 신학계로부터 숱한 고발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1432년 1월 7일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의 칙서 “아포스톨리케 세디스”(Apostolicae Sedis)를 통해 논쟁의 종지부를 찍고 그의 활동이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 교황으로부터 시에나의 주교로 임명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설교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1430년부터 12년 동안 프란치스코회 엄률회의 총대리로 활동하면서 프란치스코회의 보다 엄격한 규칙을 회복하자는 수도회 내부의 개혁 운동에서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439년에는 피렌체(Firenze) 공의회에 참석하여 그리스 정교회와의 일치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1444년 고향에서 설교를 마친 후 그는 고령의 나이와 쇠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나폴리(Napoli) 왕국을 복음화하기 위해 출발하였으나, 아브르초(Abruzzo)의 라퀼라(L'Aquila) 부근에서 열병에 걸려 라퀼라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 머무르다가 그곳에서 5월 20일 사망하여 그곳 성당에 묻혔다.
그의 문장은 IHS가 새겨진 평판(平板) 혹은 태양이고, 광고업자들의 수호성인이다. 그는 1450년 5월 24일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에 의해 시성되었다.
복녀 골룸바 (Columba)
활동년도 : 1467-1501년
신분 : 동정녀,3회원
지역 : 리에티(Rieti)
같은 이름 : 골롬바, 꼴롬바, 꼴룸바, 콜롬바, 콜룸바
콜룸바(또는 골룸바)는 이탈리아 중부 리에티 태생으로 그녀의 부모는 양복 짓는 사람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생활을 하다가 딸을 낳게 되자, 천사처럼 보인다하여 안젤리카(Angelica)라고 불렀으나 세례 때에 콜룸바로 개명하였다. 그녀는 몸과 영혼이 매우 아름답게 성장하였다. 콜룸바는 그녀에게 읽기를 가르쳐 준 도미니코 수녀회 수녀로부터 성 도미니코(Dominicus, 8월 8일)와 시에나(Siena)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4월 29일)에 대한 신심을 배웠고, 그녀의 일생 동안 위의 두 성인 성녀가 자신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10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어느 부유한 청년과 약혼하기를 강요했고, 결국 콜룸바는 자신의 머리를 자르면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 몸과 마음을 드렸다고 선언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성녀 카타리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기회를 엿보았다. 한 번은 거의 5일 동안이나 죽은 상태에 있었는데, 후일 그녀는 그때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성지를 둘러보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19살 되던 해에 그녀는 도미니코 수도회 재속 3회원이 되었다. 그 후 콜룸바는 자주 감옥을 방문하여 죄인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고해성사를 받도록 하였다.
그녀의 일생은 온갖 기적들로 장식되었다. 비테르보(Viterbo)에서는 마귀 들린 사람을 고치는 등 수많은 치유의 기적도 보였다. 물론 이런 이상한 기적들로 인해 교회 당국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하였으나, 그의 고해신부이자 전기 작가인 세바스티아누스 안젤리 신부는 그녀를 적극 옹호하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가 페루자(Perugia)를 방문했을 때 그녀를 직접 대면하였는데, 놀랍게도 그녀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게 되자 그녀의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얼마 후에 그녀가 마술을 한다는 소문으로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하였다. 차츰 차츰 그녀는 온갖 병에 시달리다가 34세를 일기로 주님 승천 대축일 아침에 운명하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교회 당국은 그녀의 공식적인 장례를 허용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1625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