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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의 첫 본문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1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러하다.
2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저자의 신념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의 자료를 기초로 아브라함부터 다윗을 통해 예수님까지 이르는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냥 ‘예수의 족보는 이러하다.’ 라고 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이러하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메시아라는 히브리어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라는 뜻입니다.
유대 민족은 왕과 제사장을 세울 때마다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래서 포로기 이후에 장차 다윗의 왕권을 잇는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는 ‘메시아 대망론’이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지금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메시아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7~11절을 보겠습니다.
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모스를 낳고, 아모스는 요시야를 낳고,
11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갈 무렵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아우들을 낳았다.
기독교인이라면 이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어느 정도 친숙할 것입니다. 남왕국 유다의 왕들이니까요. 그러나 이 기록도 구약성서를 기초로 하고 있지만 아주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11절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아우들을 낳았다’고 되어있지만 여고냐는 요시야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입니다. 여고냐는 여호야긴이라고도 하는데, 여호야긴의 아버지는 여호야김이고 여호야김의 아버지가 요시야입니다.
제가 굳이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신약도 구약과 마찬가지로 오류가 없는 책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그 다음부터입니다. 12~17절을 보겠습니다.
12 예루살렘 주민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가 태어나셨다.
17 그러므로 그 모든 대 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으로부터 바빌론으로 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빌론으로 잡혀 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이다.
이 본문에 나오는 족보는 구약에 근거자료가 없습니다. 게다가 누가복음에는 전혀 다르게 나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다윗부터 예수님까지 28대가 되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예수님의 계보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다윗부터 예수님까지 43대가 되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통해 계보가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바로 윗형인 나단을 통해서 예수님의 계보가 이어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 의하면 남왕국 유다의 왕들이 모두 예수님의 직계조상이 되는데, 누가복음에 의하면 솔로몬을 비롯해서 남왕국 유다의 왕들 가운데 예수님의 직계조상은 한 사람도 없는 게 됩니다.
두 복음서에 기록된 족보의 차이에 대해 조금 더 말씀드리면, 마태복음의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예수의 부친인 요셉까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데, 누가복음에는 요셉에서 시작하여 아담과 하나님까지 거꾸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 두 복음서에 기록된 내용이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의 계보는 거의 일치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후손의 이름이 거의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같은 사람이 더러 등장하기는 하지만 세대가 다릅니다.
그러면 이 문제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구약성서에 자세한 기록이 있고 그 본문들을 근거로 했기에 마태와 누가의 기록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가 문제입니다.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는 예언은 구약성서 여기저기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이 남왕국 유다의 왕들만은 아닙니다. 왕이 아닌 다윗의 후손들 가운데서도 메시아가 탄생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상태에서 마태가 참고한 자료와 누가가 참고한 자료가 서로 달랐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직하게 인정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신약성서 역시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오류를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성서 안에는 신구약을 가리지 않고 많은 오류들이 있습니다. 이걸 정확히 알고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성서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 이쯤에서, 아직도 성서에는 오류가 없다고 말하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계보에 나타나는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매우 보수적인 신학자 중에는 마태의 족보는 아버지인 요셉을 따라 가고, 누가의 족보는 어머니인 마리아의 계보를 따라가기 때문에 서로 다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족보가 어머니의 계보라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누가복음의 본문에도 그런 암시는 전혀 없습니다. 무엇보다 이천년 전의 사회에서 어머니의 족보를 따른다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누가복음 3장 23~25절을 보겠습니다.
23 예수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때는 서른 살쯤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여기기로는 요셉의 아들이었다. 요셉은 엘리의 아들이요,
24 그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맛닷, 레위, 멜기, 얀나, 요셉,
25 맛다디아, 아모스, 나훔, 에슬리, 낙개,
이 본문에 분명히 나타나 있듯이, 누가복음의 족보도 마리아가 아니라 요셉의 계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여기기로는 요셉의 아들이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한 사실이 아니라 사람들이 여기기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서를 기록한 저자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기록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된 것이기에 오류가 없다는 그런 생각은 전혀 갖고 있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여기기로는’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복음서 중에 가장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아예 없습니다.
그러면 왜 마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마가복음이 쓰여졌던 서기 70년대에는 아직 예수의 족보에 대한 원자료가 존재하지 않았거나, 마가가 원자료를 알고 있으면서도 싣지 않았다면 이 자료의 내용을 신뢰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어쨌든 마태나 누가가 성령의 음성을 듣고 일점일획까지 받아서 기록했다면 이렇게 매우 다른 족보가 두 복음서에 기록되는 이런 모순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성서를 읽고 연구하는 내내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명제가 있습니다. 성서의 언어는 기본적으로 ‘고백의 언어’라는 사실입니다.
성서는 아기 예수가 누워있는 구유와 같습니다. 언젠가 아기는 구유를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구유 자체를 신성시해서 아기를 구유에 가두고 나오지 못하게 한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구유가 아니라 그 안에 누워있는 아기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하나님과 우리, 예수님과 우리를 이어주는 수단이 되어야지 성서 자체가 목적이 되면 곤란합니다.
이어지는 마태복음 1장 후반부와 2장에는 예수탄생설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1장 18~25절을 보겠습니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므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20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25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마리아와 요셉이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했답니다. 요셉으로서는 황당했겠지요.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남들 모르게 조용히 파혼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천사가 나타나서 아기가 잉태된 것은 성령에 의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사실로 믿어야 할까요?
성서무오설에 의하면 사실로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정자와 난자의 결합이 없이는 아기가 잉태될 수 없다는 현대 과학의 매우 기초적인 상식을 부정해야 합니다.
계속되는 이야기에서, 천사는 요셉에게 말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랍니다.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라면서요. 예수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히브리 이름 여호수아를 그리스어로 옮긴 것이지요. 성서에 등장하는 여호수아, 호세아, 예수아, 이런 이름들이 모두 구원이라는 뜻을 갖고 있고 그리스어로 예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구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라고 말하면서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해당 본문을 보겠습니다.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가 인용한 이 본문은 히브리 원문이 아니라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역입니다. 그러나 70인역이 ‘처녀’라고 번역한 이 단어가 히브리 본문에는 ‘알마’ 라는 단어로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처녀가 아니라 젊은 여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정자와 난자의 결합 없이 숫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이 묘사하는 예수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설화로 이해해야 할 문제이지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할 문제가 아닙니다. ‘처녀잉태설’이라는 교리는 이천년 전의 세계관 아래서 만들어진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교리입니다. 이런 교리를 21세기에도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교회가 말하는 것은 교인들의 삶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교인들을 비합리적이고 원시적인 신화의 세계 안에 가두어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