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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달래던 아이들, 점심시간의 아린 기억
남진원
돌아보면 참 별난 세상이 되었다. 요즘은 살이 쪄서 죽겠단다. 그래서 살들을 빼려고 야단이다. 병도 못 먹어 얻는 병이 아니라 너무 잘 먹어 얻는 병들이다. 고혈압 당뇨, 고지펼증 등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 1960년대는 내가 국민 학교에 다닐 때였다. 그러나 가난했어도 너무 너무 행복했었다. 쌀밥은 먹지 못했어도 밤하늘이 별을 보기도 하고 산에 나는 머루 다래 등이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산 과일과 열매를 먹으며 자라났다. 검정 쇠솥에 감자 섞인 검정 보리밥을 퍼 먹기도 하고 옥수수와 메밀 등응ㄹ 주식으로 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밀가루 원조를 받아 연일 국수를 삶아 먹기도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 교사로 처음 근무할 때가 1970년대 초였다. 봉급을 타서 돈을 만져보니 신가하였다. 나는 딴 나라에 이사를 온 사람 같았다. 그래도 점심시간은 기다려졌다. 왜 그렇게 점심시간이 기다려졌는지 모름다. 네 시간을 하면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아이들은 좋아서 함성을 질렀다. 소풍을 가서도 즐겁게 노는 것 보다는 점심시간이 더 기다려졌던 것이다.
먹는 것이 귀한 시절이어서 더욱 그랬는지 모른다. 점심시간이면 모두 도시락을 싸지기고 학교에 왔다. 그러나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아이들은 배고픔을 참고 교실에남아잇기 보다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아디들이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보면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풍을 가도 몰래 굶는 아이들도 있었다. 형편이 괜찮은 학부모는 도시락을 두 개 정도 더 싸서 가져왔다. 선생님이 드실 모시락과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이 작품은 초창기 1975년도 후반기에 쓴 작품이다. 강릉교대 회지에 작품을 보냈는더니 발표가 된 작품이다. 내가 첫 부임한 황지읍의 화전 국민 학교는 매우 가난한 아이들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소풍날에도 점심을 못 싸 오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 생각을 하면서 쓴 작품이다.
점심시간
남진원
종소리에
와!
지르는 함성들
여기 저기
점심밥 풀어페친다
미순이는 계란
은정이는 멸치 볶음
구수한
풋고추장 내음
자꾸 자꾸
침이 …
그만
창밖을 본다.
먼 산
나무들이
점점 흐려진다.
( 『경포』제4호. 1976. 2.10)
당시의 많은 아이들은 밥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이 아니라, 가난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이었다. 마을 이름도 우스웠다. 내가 사는 곳은 화전이었다. 처음에는 아름다운 이름이라 생각되었다. 풀이하면 ‘곷밭’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자로 꽃 화자가 아니고 벼화 자였다. 밭에다가 밭벼를 심었던 모양이었다. 또 ‘초막’, ‘싸리밭’, 굴거렁‘ 들의 이름도 있었다. 초막은 말 그대로 풀로 움박을 지어 살던 곳이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싸리밭은 마을이 싸리밭이 들어차 자랐기 때문이고 굴거렁은 굴속에서 뭄리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고향 마을에도 ’갈밭‘이나 ’건천리‘가 있었다. 갈밭은 갈대들이나 작은 나무 덩굴이 자라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건천리‘는 하천이 늘 말라있기에 붙여진 마을 이름이었다. ’토산‘이나 ’갈전‘ 들도 모두 이런 이름들이었다.
내가 첫 발령을 받고 간 화존리는 날이 맑을 때는 온통 검은 석탄 먼지로 가득차 있었고 비가 오면 길은 검은 석탄부스러기로 인해 검은 죽같은 길이 되었다.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있으면 한나절도 안 되어 소매가 검게 변했다. 맑은 물은 간 곳 없고 시커먼 물이 하천을 흘러다녔다. 가장 환경이 좋지 못한 곳으로 발령을 받은 것이었다.
그래서인가? 문학에 대한 열기는 더욱 강렬해졌다. 늘 마음속에는 맑은 고향의 하늘과 공기, 아름다운 산천과 마을 어른들의 인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