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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문학 활동
2013년 12월 27일, 『한울림문학』 12집 출간.
[내용]
- 유지숙 회장 발간사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 …’
불빛이 어둠을 밝히듯 비울수록 채워지는 우리들의 마음을, 나지막하지만 내면의 정체성을 찾아 침묵의 언어를 가슴으로 수신한 회원들의 목소리를 담았습니다.
언어를 통한 자신과의 싸움으로 마음의 등불을 켜며 11번 째 문집을 탄생시키게 되었습니다.
삶이 권태로워지고 싶을 때 상큼한 시 한 편으로 위로가 된다면 …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들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이번 문집에서는 강릉을 대표하는 여류시인 이충희 선생님의 시 세계와 시 창작에 대한 말씀을 특집으로 싣게 되어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 행복해지는 것과 같이 늘 그런 마음으로 정진하는 삶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특집 – 이충희 선생님과의 만남
초대 작품
박순옥 - 춘설 외 1편, 김기옥 – 천만궁 외 1편, 이복재 – 노숙자 외 1편, 정선화 – 맨드라미 외 1편, 정원교 – 메밀꽃 필 무렵그 끝 무렵 외 1편 등.
회원 작품
권오선 – 다도 외, 김정자 – 벚꽃 외, 엄재원 – 구름아 외, 유금숙 – 그날 나는 나이트클럽에 있었다 외, 유지숙 – 부활 외, 이충렬 – 내 거울 같은 그대 외, 임춘자 – 광덕식당 소머리 국밥 외, 최혜리 – 만년 전에도 우리 부부는 외, 화영남 – 삶 외.
신입 회원으로 안금자, 이진서, 이승현, 함경숙 등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단평
이충희 시인의 작품 ‘숨통’에 대하여
남진원
이충희(1938–2021) 시인은 강릉사범학교를 노신 후 줄곧 초등교육에 종사하셨다. 강릉사범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신 륜명 선생님을 만나고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렸던 강릉사범학교 문예반 시절 스파르타식 문학 수업을 받은 윤명 선생님으로부터 본격적인 글쓰기와 진정한 시인의 길을 배웠다고 소회를 밝혔다.
1982년 [현대문학]에서 ‘동해구곡’으로 시 추천을 받은 후 문단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관동ㅁㄴ학회, 해안문학회, 갈 뫼, 산까치 동인등 많은 지역 동인 활동을 하며 문학의 확장성을 넓혀갔다.
강원의 강릉, 삼척 등 영동 지역에서 34년 동안 교편을 잡기도 했으며 강릉도서관 문예창작반, 강릉 YMCA에서 문학 창작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관동문학상(1995), 강원문학상(1997), 강원여성문학상(2005), 강릉예술인상(2012) 등을 받았다. 시집으로는 1989년 [가을 회신], 1995년 [먼 불빛], 2000년에 [겨울 강릉행], 2012년엔 [이순의 달빛]등의 시집을 상재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본인의 시 쓰기 작업에서 작품의 시어 하나 하나는 절대 함부로 들어와 앉을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치열함을 볼 수 있다. 그의 시어들은 시의 느낌 하나 씩을 품고 정갈하게 기다려야 한다. 강우너도민일보 신문 기사에 ‘시어가 적재적소에 자리 잡지 못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퇴고를 반복하는 일이 일상으로 되어 있다’는 기사를 봐도 알 수 있었다.
박명자 시인은 그의 시를 읽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시는 말이 아니고 시가 아니고 한 잔의 피 같은 에너지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손을 대면 손이 대일 듯이 뜨거웠다. 그의 시를 들여다 보면 마치 흐르는 물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하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시인의 시세계에서는 버리고 버리면 가벼워진다는 낮은 음자리표 그리고 조용한 겸허의 자세로 삶에 머문다는 사고의 폭이 더 없이 아름답다고 하였다.
또 엄창섭 교수는 ‘모던포엠’에 <아득한 정신 풍경과 느림의 미학>이란 제목으로 쓴 글의 몇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느림의 시학이라는 틀에서 맑은 영혼으로 한그루 시나무를 돌보며 키워내는 헌신적인 열정이 눈물겨워 그 소회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시가 오면 받아 적고 아니 오시면 마냥 기다리고 그린다는 해명처럼 여유와 너그러움에서 비롯된 느림의 시론에서 꽃처럼 아름답고 바람처럼 자유롭게 시의 꽃을 피워 <이순의 달빛>으로 황홀하게 쏟아내는 그의 지난한 몸짓은 더 없이 신선하고 충격적이다.」
강릉의 후배 문인들에게 곧은 시 쓰기를 위해 일갈을 서슴지 않았던 문단의 시어머니로, 대비마마로 알려지기도 한 이충희 시인, 칼칼하던 일침이 작품 ‘숨통’에서는 난초의 잎처럼 부드라워짐을 느꼈다.
숨 통
이 충 희
가즈런히 길 낸 신단지 빼곡한 상가 모퉁이
잡초 듬성한 공터를 보자
안도 그 비슷한 느슨함 같기도 한
묘한 편안함 훑고 지나간다
사람 사이에도 이런 느낌 헐렁해서
만만해서 갖은 투정 다 너그러이 수용하는
더러는 허접스런 생각들 슬쩍 흘려도
눈 감아 주는 아니지 감쪽 같이 대신 치워주는
그런 공터 같은 숨통 하나 있었으면 참 좋겠네
허름해서 표나지 않는 전혀 거리낌조차 없는
죄라는 자각조차 얼씬 않는 그런
사는 일에 치여 눅눅해진 한 귀퉁이도
열어놓으면 가슬가슬 물기 거둬가는
공터의 청명한 햇살 같은 그런
그런 숨통 하나 있었으면 참 좋겠네
- 강원문학 45집 (강원문인협회 刊, 2013
아파트와 상가 등의 신단지는 건물로 빼곡하다. 숨통이 막힐 정도로 정연하게 서 있다. 모든 게 계획되어 있고 틈이 없어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인위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신단지 상가 모퉁이에 잡초가 듬성듬성한 공터는 신단지 건물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 공터가 오히려 편안함을 준다. 눅눅하고 편안한 것은 ‘듬성듬성함, 느슨함, 공터, 허름함’ 등이다. 선(善)의 지극한 경지는 물과 같다는 노자의 ‘上善若水’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다.
모난 것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하고 허접스런 생각도 대신 치워주는 공터 같은 숨통 하나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고맙고 좋은 일일까. 화로의 불이 뜨거워지다가 최고조에 달하면 파란색으로 변한다. 이를 ‘爐火純靑’이라 하고 무공의 경지가 극에 달했을 때를 말한다. 어찌 무공만을 이르겠는가. 시 또한 최고의 경지에 이르면 ‘노화순청’의 경지라고 한다. 이충희 시인의 작품 ‘숨통’을 읽고 있으면 아주 편안하고 아늑하여 시인ㅇ의 정신이 극도로 좋은 위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강릉 문단의 어른, 이충희 시인!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라는 미당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나는 이충희 시인이다. 일상적인 후배들과의 만남에서도 사랑과 너그러움, 따뜻한 언어로 감싸는 공터의 청명한 햇살 같은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지도 교수 시 – 남진원(엉성헌 현재, 한참 동안, 월대산에 올라, 겨울 월대산에서, 산 비, 우주의 눈치, 눈 날리는 날, 밤 11시의 차 맛은, 쓰레기, 아름다운 독침)
엉성한 현재
남진원
지금 거울 속을 보는 사람
푹 파인 주름살 내보이며 웃는다
늙는구나
주름살 속에다 쑤셔넣은 평생의 아픔 평생의 행복
그 덕분에 웃음이 더 깊어졌다
허허허, 다시 웃는다
늙는 게 고맙단다
엉성한 현재로 살아가는 빛나는 암각화 한 폭이다
한참 동안
남진원
길과 나무와 개울물이 함께 어슴프레해지는 시간
저녁 먹은 빈 그릇을 개수대에 쓸어 담아 넣고 문을 나선다
길과 나무와 개울물이 나를 끼어 넣어 준다
한참 동안 함께 어슴프레해진다
월대산에 올라
남진원
눈(雪)이 좋아
산에 올랐다
茶 향기 같은
달이 떴으니
내일 안부는 잠시 접어두겠네
겨울 월대산에서
남진원
마른 나뭇가지 위로 눈이 내리더니‥‥
四圍가 고요하다
살면서 이런 저런 일로 소스라칠 일이 한 두 번이었던가
눈 덮인 월대산에 오르니 담백하게 사는 맛을 알겠다
산 비
남진원
산 비는 몽롱한 잠이다
새소리 몇 방울 날리고
산 빗소리 들꽃 향기에 휘어지고 만다
나는 멍하니 앉았다가 차 마신다
차 마시다가 멍하니 앉아 있는다
우주의 눈치
남진원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내 몸뚱이만큼은 어찌해 볼 수 없어서 우주가 내 숨구멍으로만 들어갔다 나갔다 한다 그게 내 눈치를 보는 게 아니고 무언가
눈 날리는 날
남진원
산간에서라도 제멋에 겨워 흩날리는 눈 보기가 쉽던가
하던 일을 멈추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정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하염없이
하염없이…
내 외로움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밤 11시의 차 맛은
남진원
밤 11시의 차 맛은
동굴이다
기쁨과 슬픔은
말라붙어
휴먼 상태
어디에도
흠집이 없다
약초 냄새처럼
지긋이
지~긋이 맛보는 ….
無虛
쓰레기
남진원
쓰레기가 나뒹군다고 할 땐 고장난 물건처럼 아무렇게나 버려진 이후이다
쓰레기를 치워놓으면 환해진다
치워져서 모여 있는 쓰레기
얼마나 얌전하냐
쓰레기를 치워놓은 사람처럼
이때는 쓰레기도 예쁘다
아름다운 독침
남진원
새싹이 땅 위 허공 살결에 쑥쑥 침을 박고 향기를 내뿜는다
사람 마음속에도 경이로운 침을 박는다
아름다운 독침이 있다더니, 바로 너였구나
2015년 문학 활동
2015년 4월 황명남, [한국문인]으로 등단.
2015년 12월 이지애 [문학세계]로 등단
2015년 [한울림문학 12집 발간
[수록 내용]
* 발간사 – 행간의 여백이 있어
유지숙
지난 여름은 참 뜨거웠습니다. 가뭄 또한 심해 걱정했는데 모든 것을 풍성하게 했습니다. 일조량이 좋아 단풍은 제 색깔을 마음껏 누린다 싶었는데, 장맛비처럼 내리던 가을비에 짧은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2년이란 행간의 여백이 있어 더 많이 기다렸던 문집입니다.
만물이 움츠러드는 계절에 깨어나는 소리로 그 동안의 수렴과정을 거치며 출간하게 되어 설레임으로 12집이 명찰을 달았습니다.
문학이란 예술과 풍류가 함께 어우러 치유와 흥미로 삶의 윤활유 같은 것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한 문장 한 문장 조심스레 채워가며 남진원 선생님을 비롯 회원 여러분의 심혈로 엮어진 문집이 빛이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또한 초대 시인님들의 보석 같은 스를 함께 엮을 수 있어 감사를 드립니다. 다음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봄물 차오르듯 더 많이 성장하기 위한 시 창작에 매진하겠습니다.
티없이 샛노란
은행잎
엎드려 있다
지금 부화하고 있다
수천 수만의 나비 떼
* 한울림문학 15년의 애정 – 남진원
2001년 한울림문학회가 발족 되었으니 벌서 15년 째가 됩니다. 이번에 내는 책이 12번 째의 회지입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꾸준히 문학 활동을 하여 회지를 발간해 온 회원들의 노고에 대해 존경의 마음이 듭니다.
15명의 회원이 작품을 수록하여 『나뭇잎 만큼 열리는 숲의 말』이라는 창간호를 낼 때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15년이 되었네요. 그 사이에 작고한 문인도 있고 회원들의 얼굴도 모두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회원들이 모여 꾸준히 월례회를 열고 작품 쓰기를 해 왔습니다.
힘들고 험난한 인생길에 글벗 하나를 옆에 두고 사는 일은 어찌 보면 행복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더해 같은 길을 함께하는 문우들이 곁에서 마음을 나누고 힘을 보태면, 사는 게 더 즐겁고 아름답습니다. 한울림문학회는 그런 문학적인 15년의 애정으로 지탱해 왔다고 보여집니다.
기교가 뛰어난 글보다 진실이 앞서는 회원들의 글이 한울림문학을 성숙시켰습니다.
세상을 빛내는 유명한 시인, 뛰어난 시인이 되는 것도 좋겠지요. 그러나 그 보다 문학을 통해 마음을 소통하여 행복을 느끼는 인간다운 시인이 더 필요한 시대입니다. 한울림문학회는 그런 문학회 같습니다.
사람과 사물과 자연이 사랑으로 함께 어우러져 감동이 되는 믿음의 문학인 한울림문학, 열 두 번째 회지 발간에 손뼉을 칩니다. 유지숙 회장님을 비롯한 회원 여러분, 사랑합니다. 고생하시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초대작품 – 기정순: 가시나무 외 1편. 김일남: 인생 외 2편. 유금옥: 춘설 외 2편. 정정하: 진고개 외 2편
회원 작품 – 권오선: 안개 외. 엄재원: 아름다웠던 그날들 외.
유금숙: 꿈꾸는 담벼락 외. 유지숙: 사랑1 외.
이지애: 가을 손님 외. 임춘자: 폭설1 외.
최혜리: 수선화 피던 날 외. 황명남: 허무한 사랑 외.
함경숙: 봄 산행 외.
한울림약사. 회원주소록. 편집후기
*지도 교수 시 25편 – 남진원
졸음, 봄날, 명상, 절 집, 겨울 지나고 나니, 냄새 방울, 귀뚜라미, 절 집 아궁이, 녹차, 목어, 빗소리, 풀, 노인, 옥천동에서, 새싹, 새, 물 잎, 연못가에서, 개구리, 눈 인사, 한낮에, 구름 벗, 봄 절간, 강물, 겨울 대관령
졸음
나비 한 송이
앉을락 말락
그 틈
사이
고기들이 집을 비웠다
봄날
침묵하는
동안
찻물이 끓는다
고요
한 덩이
명상
벽을
보고
앉았다
뼈를 세운
한 자루 촛불
휴휴사 절문 밖에서
산수유가 보고 있다
속수무책 들여다보고 있다
절 집
절 집
한 채
안개 속에서
일 없이
빠졌다 솟구쳤다 한다
겨울 지나고 나니
겨울 지나고 나니 산이 젊어졌다
고무신 신고 뜰에 내려서니 금 긋는 새소리 두엇
풋내가 난다.
냄새 방울
풀벌레 소리
물방울에 스몄다
귀엽고 동그랗다
무소유의 냄새 방울
귀뚜라미
길게 휘어지는 게 부드럽다
읽다 만,
금강경 한 줄
절 집 아궁이
거사의 독경소리
저물어 가는데
나무 타는 불빛
천연스레 환해지고 있다
녹차
차 잎이 물속에 스며든다
물푸레나무 사이로 눈이 내린다
찻물 들여다보던 일도 슬그머니 놓아둔다
목어
천천히
고요를 뒤적이는
풀벌레 소리
그 소리에
깨다가 졸다가 ·······.
빗소리
바람이 한 점도 섞이지
않았다
소리는
텅 비고
내 귀만
두꺼워졌다, 얇아졌다
한다
풀
나무 밑에
앉으니
삐져나오는 풀벌레 소리
나도
풀처럼 헐겁게 앉아 있다.
노인
소나무 아래
앉은 노인
혼자
꾸벅 꾸벅
헌 옷가지
같이.
옥천동에서
새소리가
나무 사이로 날아다닌다, 혹 나뭇가지에
앉기도 한다
가만히
앉아 듣는 재미가 있다.
새싹
흙 위로
새 싹이 돋았다
노스님 잇몸에서도
뽀얀 새 이가 나더니,
제 속 다 허물고 나서야
흙의 잇몸에서
막, 입 열려고 하네.
새
점
하나가
허공을 마음대로
들락
날락
물 잎
바람이 물을 건드린다
물 잎
사이
산이 흔들린다
연못가에서
연잎도 잠잠해지고
나무도 잠잠해지고
연못 옆에 선 나도 심심해졌다
모두 할 일 없어져 우두커니 있다
개구리
공기 방울에 섞여
점점 얇아지는
푸른 글자.......
어둠이 점점 또렸해졌다.
눈인사
새가 찾아와
목청을 돋운다
그 소리가 반가와
나도 감나무 아래에 서서
눈인사를 보낸다.
무심한 즐거움
한낮에
다기(茶器)에 찻물 흘러내리는 소리
고요함을 더 한다,
매화 그림자
구름 벗
연못에서
벗을 만났다
흘러가도
소리 내지 않는 구름
텅 빈
벗이다
봄 절간
너무 조용하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돌탑처럼 참해졌다.
강물
강물에
풀잎이 떠내려온다
가을 하루가
떠내려 왔구나
하늘 내려다보는
즐거움도 있네
겨울 대관령
눈 푹푹 내린 골짜기
자부룩이
자부룩이
안개가 떠돈다
한참 만에, 흰 애벌레 같은 자동차 한 대
구물구물 지나간다
모두 어질다
2016년 문학 활동.1
2016년 9월 한울림문학 제13집,『내 안에 또 한 사람』발간
[수록 내용]
유금숙, 유지숙, 엄장섭, 이지애, 임춘자, 함경숙 회원 외 많은 강릉권 관내 기정순, 김령숙, 김찬윤 등의 작가들 작품을 청탁하여 게재하였다.
* 발간사 – 13집 발간을 자축하며
유지숙
우리는 저마다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시심을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는 듯 합니다. 더욱 높고 깊어진 하늘을 보며 개구리 울음소리 들은지가 엊그제인 듯 한 갓을 느끼실 겁니다.
바람은 어느 언덕에 닿기 전에 자신이 어떤 힘이 있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더위와 사력을 다해 싸웠던 것 같은 짧지만 너무 길게 느껴졌던 여름이 순간에 지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간이 그렇게 빠르게 느껴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마음을 열며 시를 낭송하며 맑아지는 자기 성찰과 진정성이 절전 모드가 아닌 활성 모드로 전환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 바다시 낭송회였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습니다. 바다시 낭송회를 통해 일상의 트랙을 벗어나 바삐 돌아가는 생활로 증발되어가는 정서를 잠시라도 머물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소중한 순간들이었습니다.
그런 소중한 시간을 강릉에 계시는 존경하는 시인 선생님들을 모시고 할 수 있어 더욱 의미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동안 함께 해 주신 시들을 문집으로 실어드리게 되어 더 없는 기쁨을 갖게 됩니다. 앞으로도 문학 속에 감동의 시심이 깃들고 행복을 찾아가는 길섶에서 언제나 여러 선생님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곱게 키우신 소중한 시를 내어주신 선생님들께 큰절을 올립니다. 한울림문학회와 바다시 낭송회의 더욱 발전하는 모습 보여드리겠습니다.
( 2016. 9. 22 )
* 축사 – 한울림 문학 발간의 기쁨 {남진원}
봄밤에 가느다란 빗소리 들려오니
눈 녹아 남쪽 시내 불어날 터인데
저 비에 연한 새 잎들 얼마나 또 돋아날까
- 봄밤에 -
고려를 지킨 포은 정몽주의 ‘춘흥(春興)’이란 한시를 시조로 다시 읊은 글이다.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빗소리, 남쪽의 시냇물, 버드나무에서 돋아나는 새 잎들은 모두 대 자연의 음률이다. 저들과 뜻을 통하고 싶은 정몽주의 기쁨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설렘은 봄날 내내 흥겨움 속에서 잠 못 들었을 것이다.
2003년 발족하여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시낭송을 지켜온 강릉 시낭송의 자존심이 배어 있는 [바다시 낭송회] 가족들은 한울림문학회 측에서 보면 정몽주가 읊은 ‘봄날의 자연’과 같은 마음의 벗들이다. 이번에 한울림 문학의 가족이 되어 선뜻 시를 보내주었다. 바다시 낭송회를 이끌어가는 유지숙 회장님의 열정과 의지가 힘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문학 속의 낭만과 풍류가 깃들고 자연과 사람이 함께 마음을 통하여 <한울림 문학 13집>을 발간하게 되었다. 포은이 느꼈던 봄날의 흥취마냥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과 웃음과 기쁨으로 어깨동무하고 싶다. 이번 문집의 제목은 심재칠 시백의 시에서 발췌하여 멋지고 격조 있는 회지가 되었음을 고마워한다. 아울러 문집 빌간의 힘이 되어 준 강릉문화재딘에게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 2016. 9. 22. 동우재 산방에서 )
시, 남진원 편
손톱, 봄 봄, 멋들어지다 우유, 설거지를 하고 나서야, 하나로 4층 창가에서
손 톱
남진원
풀 뽑았더니 손톱 끝이 새까맣다
어릴 때, 산골 소년이 되었다
물이 그헣게 맑고 흔했는데도
씻지 않아 손발이 늘 새까맸지.
깨끗함과 지저분함을 구분하지 않고 지냈던 그 시절이 있었구나
봄, 봄
남진원
매년 입학식 날이면 맵고 추웠는데
금년 봄은 갓 만들어 낸 두부처럼 따뜻하다
아내 세상 떠난 뒤 내 생활은
마음이 빠져버린
‘풍선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교문에서 쏟아져나오는 아이들을 내 눈으로 봄, 봄
오늘부터 내 생활도 부푼 풍선처럼
왁지지껄한 봄 햇살이다.
( 2016. 3. 6. )
멋들어지다, 우유
남진원
TV방송을 보았다. 징기스칸은 금나라와의 싸움에서 10만 대군으로 백만 금나라 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그 전술은 너무도 쉬운 ‘말 젖’. 군사들에게 말의 우유를 먹였기 때문이었다.
세계를 정복한 것이 우유의 힘이었다 …
그러고 보니, 나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시골학교 숙직실에서 중학교 입시공부 할 때 선생님이 우유를 끓어주셨다. 그 우유 덕분에 시골에서 도시의 중학교에 합격하였구나. 23살 수술하고 24살 결혼한 후 아내는 줄곧 우유와 사과를 간식으로 먹였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있었구나.
TV 방송을 본 후엔 마트에 가면 우유 있는 rt을 먼저 찾는다. 각양각색 우유가 이렇게 멋들어지게 보일 수 없다.
멋들어지다, 우유
설거지를 하고 나서야
남진원
그릇을 씻었다. 밥 먹고 나면 늘 하는 일이지만 오늘에야 무엇인가를 깨끗이 한다는 일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를 알았다.
사람들이 하는 많은 일이 그릇 말고도 다른 무엇에게 누군가에게 깨끗이 하는 것처럼 좋은 일이 된다는 것을 여직 생각지 못했다. 살아갈수록 점점 바보였다는 자신을 알게 되었다.
쉬운 사실을 늙어서야 알다니, 그것도 설거지를 하고 나서야 ….
하나로 4층 식당 창가에서
남진원
하나로 4층 식당 창가에서
밥을 먹다가 창밖을 보면
남대천이 내려다보인다
넘실대며 흘러가는 강물
강물 위로 떠가는 대관령 풋풋한 바람
바람결에 떠도는
작고 시고 텁텁한 풍문들
하나로 4층 창가 4층 식당에서 보면
고층 아파트, 쉼없이 오가는 자동차 물결
다리 건너 멀뚱멀뚱 선 교회
모두 내려다보인다
70편생 살면서 쳐다보기만 하다가,
아곳에 오면
세상 한 쪽을
미음 턱 놓고 내려다본다.
( 제17시집 『조그마하게 살기』, 태원, 2023. 5 )
2016년 문학 활동.2
2016년 12월 29일. 한울림문학 제14집,
『나는 가끔 그곳에 간다』발간
[수록 내용]
축시 – 남진원
초대 작품 – 엄장섭: 기도 외 8편.
이충희: 수장에 관한 보고서 외 4
등 …
작품:
권오선 – 갈대 외 9. 김광자 – 매화. 배정순 – 힘센 사과나무
심재칠 – 23번 째 공룡 능선에 올라타고 외 9.
엄재원 – 가슴에 묻은 눈물 외 8
유금숙 – 그 집 외 5
유지숙 – 그 자리 외 5
이지애 – 감자밭의 미소 외 9
임춘자 – 나는 가끔 그곳에 간다 외 7
최혜리 – 고모 외 12
한재성 – 고요 외 9
함경순 – 같은 마음 외 1
황명남 – 너의 눈물 외 9
남진원 – 경포대의 묵묵죄망귀 외
저도 알았나보다
남진원
뻐꾸기가
건넛산에서 울었다.
운치가 있는
녀석.
내 옆에서 계속 울어댔으면
곧 싫증났을 텐데…
풀 뽑는 마당에 풀 풀 내려와 앉는다.
서로 재밌게 지내자는 뜻일 게다.
내 삶은
남진원
맵고 추웠는데
금년 봄은 갓 만들어 낸 두부처럼 따뜻하다.
아내 세상 떠난 뒤 내 생활은
‘마음 빠져버린 풍선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교문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을 내 눈으로 봄,
봄
그래, 내 삶은 이제부터
왁자지껄한 봄! 햇살이다.
집안 일
남진원
집안일을 하니,
‘해도 해도 제자리’
이 말이 실감난다.
새벽부터 ‘이리저리, 왔다갔다’
밤이 되었어도
한 일은 티 나지 않고
애고, 힘 들어라!
안 아픈데 없는데
둘러보니
그냥 그 자리
부지런만 떨었을 뿐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 의상이 당에서 돌아올 때 화엄경 대의를 줄인 글귀 중의 하나인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옛날부터 와도와도 그 자리, 변함없는데 이름 붙이면 부처이니라. )’은 경을 해석한 일부인데 많은 중들이 임종할 때 임종게(臨終偈)로 인용하기도 하였다.
아저씨, 뚜구와요
남진원
왕산 시내버스가 달린다.
버스 안이 뜨굽다(덥다)
맨 뒷자리에 앉은 5, 60대 아낙네들 소리 지른다.
아저씨, 뚜구와요!
사람 쌈느라(뜨거운 물에 옷이나 나물 등을 끓이는 일) 켜놨소?
그 말 해놓고도,
넉살 좋게 웃는다.
호호호, 허허허 …
겨울 아침, 왕산 시내버스 안에는
군불에 달군 것 같은 웃음과 이야기가 마구 굴러다녔다.
경포대의 默默坐忘歸
남진원
樓에 오르면 호수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멀리 초당 마을 저녁 연기 피어오르던 1960년대 호수 주위는 노을 짙은 한 폭의 名畵였지.
요즘
경포대는 늘 왕따이다.
벚꽃이 와르르 필 때나 8월 한가위 때
북작거리지만
이내 사람들은 발길을 돌렸지.
무수한 차들이 경포대 밑을 지나갔다
자동차는 쏜살같이 달렸다, 그림자와 매연만 남기고 …
경포대도 먼 산 보듯 호수만 내려다보았다.
관광객이 물밀 듯 와도 유명하다는 이름 하나만 듣고
그저 위이 – 둘러보고 이내 발길을 돌렸다.
매일 봐도 서로 무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랴
오늘 저녁 경포대 루에 올랐다.
無心見月色 默默坐忘歸
홍장이 달빛 저어 나타날 것 같은 밤
나는 高閣에 스며든 5백년 시간의 낙관과 月色에 취해
마음 빼앗긴 채 돌아갈 것을 잊고 앉았다
( 無心見月色 默默坐忘歸: ‘달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묵묵히 앉아 돌아가는 것을 잊는다’라는 뜻으로 신라시대 최치원의 ‘호중별천’ 시의 일부를 옮긴 글임)
나는 행복하다
남진원
병원 휴게실에서 휠체어에 앉은 여자 환자분이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전혀 모르는 분이다.
이럴 때 참 난감하다.
몰라보면 얼마나 불경한가,
아는 체 하는 것도 위선이고…
그래도 어쩌랴,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해야…
“중앙시장 버섯고을 ….”
그때서야 생각났다. ‘버섯고을 여사장님’
그런데, 얼굴이 그때 그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젊은 여자 분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이다.
집안에서 일하다가 다리를 다쳤다고 한다.
바늘도 안 들어갈 것 같이 단단하던 분인데…
세상일은 모를 일이야,
얼굴이 저렇게 변한 것도 그렇고,
다쳐서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야무진 모습이 평생 병원에 들락거릴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래, 너무 야무진 게 탈이었구나.
병원에 와 보니 걷는 거, 자기 손으로 먹는 거
행복이고 축복인지 알았다.
인생 64년 걷고 먹고 하는 데 불편 없이 살아오지 않았나.
나는 행복하다. 참 행복하다.
누더기 옷
남진원
누더기 한 벌 받았다. 처음엔 옷인 줄도 모르고 입고 다녔다. 그 다음엔 새 옷인 줄만 알고 멋을 부리고 돌아다녔다. 누더기 옷인 줄 요즘에야 알았다.
다듬고 고치고 뜯어내고 덧대기 64년,
더러우면 더러운 대로
깨끗하면 깨끗한 대로
재미가 있다.
더러 들이치고 내치는 추위가 대수랴…
입고 있으니 편안하다.
2017년 - 2019년 문학 활동
2017년 4월. 강릉교육문화관<문화봉사단 참여4월 – 12월>
2018년 6월. 신입회원 박용희, 최혜순
2018년 7월. 강릉시 임당동 벽화 거리 탐방
2018년 11월. 삼일공원 일원 경호 시화전 11월 15일 – 12월 30일
2019년 12월 18일. 「한울림문학 15집」‘그곳에 앉아 보니’ 발간.
[수록 내용]
인사말 – 유지숙
열심히 앞을 보고 가다 보면 부딪치고 넘어지고 다시 걸으며 새로운 길과도 만나게 됩니다. 한 해 두해,, 해가 지나면서 나이테 위에 다양한 문양들을 그리며 올해로 제15집 한울림 동인지를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차분히 걸어온 한울림문학회가 앞으로도 더 선명한 나이테를 그려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회원 모두 직장 일 등으로 바쁘신 가운데 삶의 흔적을 따뜻하고 정감있게 그린 문집이 나오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반드시 그 안에 긍정적인 측면과 반대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을 통해 긍정적 판단을 내리면 행복이라는 마음의 평온함에 도달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리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이들도 행복의 조건은 이성적 판단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성이란 생각하는 능력이기에 자신을 다스리는 것도 글을 쓰면서 자신의 감정을 이성적으로 아스케시스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꾸준히 하다 보면 자신에게 만족하게 되는 글도 쓰고 그 만족이 행복감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이번 동인지 15집을 내면서 행복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곁에서 늘 응원해주시는 남진원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 강릉문학의 원로 시인 심재교 선생님의 ‘시인 탐방’으로 후배 시인들에게 알찬 말씀과 시를 지면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구재 선생님께서도 귀한 시를 주셔서 무엇보다 기쁩니다. 함게 해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년 12월 한울림문학회 회장 유지숙
평론 – 재미로 읽는 역사 이야기 . 남진원
1. 벗에게 청하니
조선시대 백성을 위해 살다간 관리를 들라고 하면 서슴지 않고 잠곡(潛谷) 선생인 김육을 들 수 있다. 김육은 영의정까지 지낸 정치인이다. 김육에 대해 좀 더 알아 보자. 김육은 파탄의 위기 사회로 치달리고 있는 농촌 경제에 대해서 과감히 개혁의 칼날을 세웠던 경제 개혁가이다.
김육이 살던 시대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란이 있었고 백성들은 과중한 조세부담으로 인해 떠도는 유랑민이나 도적 떼가 되었다. 김육은 이처럼 고통 받는 백성의 아픔에 대해 다른 관료들처럼 인색하지 않았다. 국가 재정 역시 파탄의 위기를 맞았지만 그 해결을 위해 노력을 하였다. 그는 기존 권력집단인 관리들과 이익집단인 상인들의 횡포에 맞서서 가난한 백성들을 보호하고 국가 재정을 튼실히 하려고 노력한 관리였다. 그가 내세우고 실천한 경제 정책은 대동법의 실시와 화폐유통이었다.
1580년에 태어난 김육은 인조 16년인 1638년 충청도 관찰사 명을 받고 충청도에 대동법 실시를 왕에게 건의한다. 그러나 기존의 조세 수치 제도에서 큰 이익을 얻던 관료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김육은 이에 주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힘쓴 결과, 뜻을 관철시켜 대동법 시행의 결실을 보았다. 이로써 시장 경제를 싹 틔우는 역할을 하여 경제 발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 정신은 후에 실학 정신으로 이어지고 또한 실학파들에 의해 실천으로 이어졌다.
한 사람의 훌륭한 가장은 한 가족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든다. 한 사람의 훌륭한 지도자는 한 나라의 부를 일구도 백성을 편안하게 만든다. 김육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김육은 자신이 생각한 정책의 실시가 어려운 백성들에게는 100년 동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는 신념이 있었다. 이런 신념은 그의 시조 ‘자네 집에 술 익거든’에서도 나타나 있다.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날 부르시소
내 집에 곧 피거든 나도 자네 청해 옴세
백년 덧 시름없는 일을 의논코저 하노라
- 김 육(해동가요) -
이 시조에 나오는 ‘곧’은 ‘꽃’을 말하고 ‘백년 덧’은 ‘백년 동안’이란 뜻이다. ‘청해 옴세’는 ‘청해 오겠네’의 뜻이다.
사람들과 서로 교류하는 방법은 가장 좋은 것이 함깨 먹는 일이다. 그리고 두 번 째로 좋은 방법은 같이 일을 하는 것이고 세 번 째로 좋은 방법은 같이 보고 같이 듣는 일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자연히 좋은 친구를 사귀게 된다. 이 시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술이 익거든 자신을 불러 달라고 한다. 꽃이 피면 자신도 친구를 부르겠다고 한다. 서로 만나서 술도 마시고 꽃도 보며 앞으로의 일도 의논하고 싶은 것이다.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면 정도 깊어지고 하고자 하는 일에도 의욕이 생길 것이다.
이 시조에서 김육이 말하는 백년 동안의 시름 없는 일이 무엇일까? 매우 궁금하다. 그런데 앞에서 김육의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대동법의 시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 대동법이야말로 시행이 잘 되면 국민들이 100년 동안 시름 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란 걸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좋은 벗을 사귀는 본래의 목적은 술을 함께 마시는 것, 함께 꽃을 보는 것도 좋지만 나라를 부강하고 백성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의논하고 그 실천을 다짐힐 수 있는 지기를 얻을 때이다. 이러한 일은 역사를 통해 증명되는 일들이다. 우리가 잘 아는 관포지교 역시 두 사람은 나라를 부강하는 데 있어 힘을 합했다. 인상여 이야기에서도 보면 서로 믿음으로 벗이 되는 것 그 속에는 나라에 대한 충정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역시 친구 사이에는 이익보다는 우정이 있어야 하고 같은 곳을 바라 볼 수 있는 기상이 있을 때에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는 왜 서로 친구가 되기 힘든 것일까. 그것은 바로 바라보는 것이 다르고 지켜야 할 믿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유상종이란 말도 생겨난 것이리라.
벗은 어찌 보면 가족에게서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 있다. 가족들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도 그대로 믿지 않거나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에는 매우 실망감이 들기도 한다. 그때 찾는 사람이 벗이다. 친구에게는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으면 친구는 함께 괴로워하며 마음을 위로해 준다. 친구라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를 만날 수 있다. 좋은 친구가 되면 서로 친구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벗이 된다. 그리고 친구에게서 이익을 얻으려 하기 보다는 친구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 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 이런 친구를 한 사람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 친구는 아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무도 병이 드니 …
정승 집의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정승이 죽으면 정승집의 개만도 못하다고 했다.
옛날 중국의 송나라에 왕광원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관리가 된 후에 벼슬이 빨리 높아지기를 바랐다.
‘빨리 출세하는 길은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는 거야!’ 이렇게 생각한 왕광원은 윗사람의 비위를 맞추기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찌나 아첨이 심했는지 옆에서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였다.
어느 날 오후에 관리들이 모여 활쏘기를 하였다. 높은 관리가 활을 쏘는 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관리의 화살은 과녁을 빗나가 멀리 날아가 풀숲에 박혔다. 그러나 왕광원은 옆에서 아첨을 떨어댔다.
“정말 대단한 솜씨입니다. 팔뚝의 힘도 세시구요!”
이 말을 들은 관리는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하여 무척 불쾌하였다.
활쏘기가 끝난 후 술자리가 벌어졌다. 왕광원은 이 자리에서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아첨을 떨어대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까의 관리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네, 내 팔뚝의 힘이 세다고 했는데 얼마나 센지 알아보겠나?”
그러자 왕광원은 속으로 높은 관리가 자신에게 이제야 관심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알려주시면 영광으로 알겠습니다.”
“체찍으로 자네를 좀 때려보고 싶은데, 어떤가?”
왕광원은 순간 몹시 당황하여 어쩔줄을 몰랐다. 그러나 출세를 위해서라면 견뎌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리십시오. 손수 때리시는 매라면 즐겁게 맞겠습니다.”
그러자 관리는 채찍으로 왕광원의 등을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왕광원은 매를 맞으면서도 싫은 내색도 못하고 비굴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왕광원은 아첨을 잘 하는 사람으로 이미 소문이 나 있었고 아첨으로 인해 위의 글처럼 큰 욕을 보기도 했다.
나무도 병이 드니 정자라도 쉴 이 없다.
호화豪華히 서신 제는 올이 갈이 다 쉬더니
잎 지고 가지 꺾인 후는 새도 아니 앉는다
( 정철, 송강가사 )
위의 시조는 송강 정철이 쓴 작품이다. 나무가 병이 들어 죽으면 정자를 지을 재목으로도 쓰지 못한다. 나무가 건장하고 무성하게 서 있을 때에는 오고 가는 사람이 모두 그늘에 쉬었다 간다. 그런데 병들어 잎이 지고 가지가 꺾인 후에는 많이 날아오던 새조차 앉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익을 보려고 찾아들지만 권력의 자리에서 떠난 사람들에겐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는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시조이다. 왕광원처럼 권세를 탐하거나 권력에 아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한탄하는 심정이 스며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나 송강 정철의 시조에는 임금에게 사랑받기를 바라는 간절한 시조 작품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송강 정철은 1535년에 태어나 1593년에 졸하였다. 중종과 선조시대의 사람이다. 선조 때의 명신으로 시인이며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거봉이라 할 수 있다. 예조판서 대사간 등의 벼슬을 지내었고 서인의 거장으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파란곡절을 겪은 사람이다. 저서로 송강집, 송강가사 등이 있고 시조 80여수가 남아 전한다. 그의 시조에는 부모에게 효도, 임금에 대한 그리움의 정, 형제간의 화목, 근면 협동을 권장, 권세에 아부하는 것에 대한 한탄 등이 내용을 이룬다.
아첨이나 칭찬은 그 경계가 불분명할 때가 있어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 아첨은 자신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겉으로 하는 과장된 칭찬이다. 칭찬은 말 그대로 순수한 생각에서 잘된 점을 강조하여 드러내 주는 말이다. 칭찬은 듣는 사람을 기쁘게 하지만 아첨은 왕광원의 경우처럼 듣는 사람의 기분을 거스를 수가 있고 자칫, 화를 당하기 쉽다.
칭찬을 할 때에도 아첨으로 들리지 않게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말을 하면 좋을 듯하다.
일자천금
손곡 이달이 어느 날 한 여인과의 사랑에 빠졌다. 손곡은 여인에게 비단치마를 입히고 싶었다. 그러나 주머니엔 비단을 살만한 돈이 없었다. 부득이 벗인 최경창에게 시를 써서 그 사연을 알렸다. 최경창은 손곡의 글을 받고 비단 옷감을 끊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보냈다. 아름다운 우정이었다.
아래의 글은 손곡 이달이 최경창에게 보낸 시 한편이다.
금대곡중고죽사군錦帶曲贈孤竹使君
손곡 이달
商胡賣錦江南市 (상호매금강남시)
朝日照之生紫煙 (조일조지생자연)
美人欲取爲裙帶 (미인욕취위군대)
手探囊中無値餞 (수탐낭중무치전)
손곡 이달이 쓴 한시 7언 절구이다. 문우인 고죽 최경창에게 치마살 돈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시로 써서 전한 것이다. 위의 한시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한 상인이 강남의 시장에서 비단을 팔고 있는데
아침 해가 비추니 자줏빛 색감이 너무 황홀할 지경이라네
사랑하는 여인에게 비단치마를 선물하고 싶다네
그런데 주머니를 뒤져보니 돈이 없구려
이달은 조선 중기 선조 때의 시인이다.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양반인 이수함이고 어머니는 홍성의 관기였다. 시문에 능했지만 신분이 미천한 관계로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였다. 젊은 시절에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방황을 하였고 신분에 대한 불만이 늘 자리했다. 이달의 시는 감정을 중시하여 있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나타내는 시풍이었다. 이러한 시풍은 당나라 시풍을 닮았다하여 삼당시인으로 불려졌다. 삼당시인은 이달 이외에 친구인 최경창과 백광훈 등이었다. 이달은 저 유명한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스승이었고 허난설헌의 동생인 허균도 그의 문학에서 시문을 익혔다. 허균이 쓴 ‘홍길동전’은 스승인 손곡 이달의 아픔을 덜어내려는 뜻도 담겨있다. 손곡 이달은 벼슬길이 막히자 나이 들어서는 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에 은거하여 제자들을 양성하며 세월을 보냈다. 손곡 이달이 머물렀다고 하여 지명 이름도 손곡리이다.
고죽 최경창이 영암군수로 있을 때였다. 이곳에 들른 이달은 예쁜 관기에게 반하였다. 그래서 좋은 비단치마를 선물하려고 했으나 수중에 돈이 없어 고죽 최경창에게 시로 그 마음을 전했던 것이다. 고죽 최경창은 그 시를 읽고 나서 말했다. 손곡의 한시는 천금처럼 귀하다고 하면서 한 글자에 비단 세필씩 값을 쳐서 비단 여든 여덟 필 값을 손곡에게 주었다고 허균의 <학산초담>에 전한다.
돈보다 귀한 것이 있다면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정일 것이다. 돈이 많아도 사람사이의 정이 없이 살아간다면 불행할 것 같다. 돈 때문에 가족 간에 싸우고 죽이고 돈 때문에 친구사이가 멀어지기도 한다. 모두 사람보다 돈을 더 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글자 한자가 천금보다 귀하다는 일자천금, 돈보다 사람이 중하다는 것을 은연중에 말하고 있다.
손곡과 고죽의 우정
귀한 게 있다면야 돈이라 말하지만
돈 욕심에 가족 간은 남보다 못해지고
친구도 금이 가는 건 돈 때문에 그렇지
그러나 돈보다도 우선한 것 있었으니
이달과 최경창의 아름다운 정이었네
고죽은 벗의 어려움 내일처럼 여겼구나
손곡의 여인 사랑 가슴 마구 떨리던 날
고운 비단 치맛감을 선물하고 싶었지만
가난한 시인의 사랑 근심만을 더했지
손곡의 ‘사랑 사연’ 고죽이 알아채고
손곡의 글자는 일자천금 버금가니
한 글자 비단 세필씩 값을 쳐서 주었네
일자천금에 관한 이야기로는 고죽 최경창과 손곡 이달의 이야기 말고도 중국에서 전해지던 이야기가 있다.
춘추시대를 지나고 전국시대, 대단한 장사꾼이 있었으니 계략가 여불위이다. 여불위를 알려면 ‘자초’란 사람을 알아야 한다. 자초는 진나라 왕자로 조나라에 인질로 붙들려 와 있었다.
‘나의 야심을 펴게 해 줄 사람이 자초이다!’ 여불위는 자초에게 접근하였다. “내가 당신에게 왕이 되게 도울 수 있소.” 자초는 그 말에 귀가 솔깃했다. 두 사람은 서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들자, 손을 잡았다. 여불위는 자초의 전폭적인 후원자가 된 것이다.
끝내 자초는 여불위의 계략이 성공하자 진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 공으로 여불위는 진나라의 실권자가 되었다. 자초는 진나라의 장양왕이 되었으나 일찍 세상을 뜬다. 그의 아들 영정이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진시황이다. 진시황이 왕위에 오르면서 여불위는 국부로 추대되었다. 여불위가 실질적인 권력을 쥐면서 많은 사람을 부릴 수 있었다. 그때 만든 책이《여씨춘추》이다.
이 책이 발간되자 여불위는 진나라 수도 함양의 거리에 책을 진열해놓고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한 후 상금을 내걸었다.
“ 이 책에서 글자가 하나라도 틀린 글자를 찾아내는 사람에게 천금을 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일자천금’이란 유명한 말이 이미 전국시대에 생겨났던 것이다.
소춘풍, 한 시대를 풍미하다
아주 미색이 뛰어나고 재예가 있는 여류 시조 여인이 있었으니 ‘소춘풍’이다.
소춘풍은 함경도 영흥부 소속 관기였지만 성종 임금이 아껴서 자주 한양에 올라와 연회에 참여하여 노래를 불렀다.
그녀의 연회에서 시조 세 수가 불러 대신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였다.
당우唐虞를 어제 본듯 한당송漢唐宋을 오늘 본듯
통고금通古今 달사리達事理하는 명철사明哲士를 엇덧타고
제설 데 역력歷歷히 모르는 무부武夫를 어이 조츠리
어느 날 성종은 소춘풍에게 악부의 노래를 쓰지 말고 직접 지어서 노래를 부르라고 하며 연회에서 술을 따르게 하였다. 그녀는 금 술잔에 술을 부어 임금에게는 가지 못하고 영의정이 있는 앞까지 가서 술잔을 들고 노래를 하였다. 그 노래가 바로 위의 시조이다.
‘당우唐虞’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요순시대를 말하며, ‘한당송漢唐宋’은 문화가 번성했던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를 뜻한다.
요순시대를 어제본 듯 한,당,송 시대를 오늘에 본 듯 고금을 통해 통달한 밝은 선비를 어떻다고 따르지 않겠는가. 제가 설 데를 잘 알지 못하는 무인들은 어떻게 내가 따를 수 있으리오. 위 시조는 이런 뜻이다.
이 노래는 선비를 칭찬하고 무인을 욕하는 꼴이 되었다. 그러자 병조판서와 무인들이 노여워했던 것. 소춘풍은 다시 또 술잔을 들고 무인들 앞에 나아가 시조로 노래를 하며 무마하였다.
전언은 희지이戱之耳라 내 말삼 허물 마오.
문무 일체인 줄 나도 잠간 아옵거니
두어라 규규무부赳赳武夫를 아니 좆고 어이리.
‘전언前言’은 ‘앞에 한 말’이란 뜻이다. ‘희지이’는 농을 했을 뿐이라는 뜻이다. 전에 한 말은 농으로 한 말이오. 내 말에 허물하지 마시오. 문관과 무관이 같은 걸 나도 알고 있소이다. ‘규규무부’는 ‘용감한 무인’이란 뜻이다. 두어라 용감한 무인들을 아니 따르고 어찌하리오. 이런 뜻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문관들이 또 좋아하지 않았다. 소춘풍은 다시 세 번 째 노래를 불렀다.
제齊도 대국大國이오 초楚도 역대국亦大國이라
됴고만 등국騰國이 간어제초間於齊楚여시니
두어라 하사비군何事非君가 사제사초事齊事楚리라
간어제초間於齊楚는 ‘맹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중국의 전국시대에는 강력한 일곱 나라가 패권을 다투었는데 이들을 전국 7웅이라고 한다. 그 나라들은 제齊, 초楚, 연燕, 진秦, 한韓, 위魏, 조趙이다. 등나라는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있던 작은 나라이다. 두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어느 날 맹자가 등나라에 머물게 되자 등나라 문공이 맹자에게 살 방도를 물으니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꼭 방법을 말하라 한다면 성을 높이 쌓은 후 그 밑에 연못을 깊이 파고 백성과 더불어 죽기를 각오하고 지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뜨는 편이 나을 것이라 말하였다.
위의 시조는 제나라도 큰나라, 초나라도 큰 나라. 그 사이에 조그만 등나라가 끼어있으니 두 나라를 다 섬기겠다는 뜻이다. 이 노래를 듣고서야 문무백관이 모두들 좋아하였다고 하였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자유롭고 멋지게 산 시인이 소춘풍이다.
일개 기생이 부르는 노래의 내용을 문제 삼아서 웃다가 화내다가 하는 관리들의 모습이 애처롭다. 대범하게 넘기지 못하고 속을 드러내는 속 좁은 무리들 같기 때문이다. 소춘풍은 자신의 마음을 제나라와 초나라사이에서 어려움을 겪는 등나라에 비유하여 관리들을 어루고 달래었다. 마치 마음 넓은 어머니가 떼쓰는 아이를 달래주는 모습이었다. 이런 노래를 즉석에서 창작하여 부르는 여인을 어찌 일개 기생이라 없신여길 수 있으랴. 창조적 사고도 뛰어나고 기지와 지식도 벼슬아치들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오늘날 소춘풍이 살아있다면 우리 문화예술 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을 것 같다.
물을 다스려 천하를 얻다
물은 인간에게 생명수이지만 때로는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물을 만져보면 한없이 부드럽다. 또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부드러움과 겸손함을 배우게 된다.
물
세수를 하기 전에 손을 가만 담가 본다
물의 감촉은 한없이 부드럽구나
그런데 소용돌이치면 대 참변도 순식간.
이기적 욕망에 혼탁해진 사람들이
물마저 혼탁하게 만들어 놓은 지금
우리가 얻을 것들은 위협받는 목숨 뿐.
이러한 물이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에 의해 오염되고 극지방의 빙하가 빠른 속도로 녹아 해수면의 상승과 각종 물로 인한 재난을 겪게 되었다. 폭풍과 폭우는 엊그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도시를 망가뜨리고 인명을 앗아갔다.
노자의 도덕경 8장에는 물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었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 최고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의 뛰어남은 무엇인가. 만물을 이롭게 하며 서로 다투지 않는 것이다. 도덕경에는 물의 본질을 인간의 성품에 비유하여 설명하였다.
물은 지화풍地火風과 함께 물질을 이루는 4대 원소이다. 이 중에 물은 생명 창조의 근원이 된다. 생명의 출현은 물에서 나왔지만 예부터 지구는 물 때문에 대 참변을 겪었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도 대홍수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중국 고대사에서도 대홍수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의 경우에는 2002년 태풍 루사와 2003년의 태풍 매미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본 적이 있다. 특히 강릉은 태풍 루사 때 시간당 100.5mm 강수량을 보였다. 하루 동안 870.5mm의 물폭탄이 쏟아져 오봉댐 붕괴의 위험이 있었다. 시민들은 밤중에 대피하는 소동을 벌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고대 중국의 태평성대라고 하는 요순시대에는 9년 대홍수, 13년 대홍수가 있었다.
요나라 때 요임금은 물을 관리하기 위해 물의 전문가를 찾았는데 그 사람이 하마을의 사곤姒鯤이었다. 사곤은 성이 사씨이고 이름이 곤이다. 곤에서 보듯 ‘곤鯤’은 큰 물고기를 뜻한다. 그만큼 물에 능숙하고 물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사곤은 물을 관리하는 중책을 맡자 물을 잘 다스리는 방법을 찾았다. 그 방법이 ‘제도새매堤堵塞埋’였다. 그러나 9년 대홍수에는 이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제도새매의 방법은 거대한 물은 제방을 쌓아 막고 침수지에는 흙으로 매몰하는 방법이었다.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비가 쏟아져 불어난 황하의 거대한 물줄기를 제도새매로 다스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 프로젝트는 실패로 돌아갔다. 사곤은 치수 실패의 책임을 추궁 당했고 우산羽山으로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굶어죽었다.
요임금에 이어 순임금이 나라를 다스리자, 또 홍수를 대비하여야 했다. 이번에는 사곤의 아들 사문명姒文命에게 책임을 맡겼다. 사문명은 아버지의 죽음을 보았기에 자신도 실패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문명은 13년 동안을 바깥 생활을 하며 치수의 방법에만 골몰하였다. ‘어떻게 하면 홍수를 관리할 수 있단 말인가?’ 밤낮을 고심하고 천지를 돌아다니며 뛰어난 사람을 찾아다녔다. 밥 먹는 것도 잊고 수염도 깎지 못해 마치 모습이 들짐승 같았다. 아이를 밴 아내가 있는 집 앞을 세 번이나 지나갔지만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야만 했다. 후일 전국시대의 학자, 맹자는 「三過其門不敢入」이라 하며 인내와 인욕으로 일에 몰두한 사문명(나중에 하나라 임금이 된 하우씨)을 칭송하였다.
이렇게 하여 찾아낸 방법이 아버지가 한 방법과는 정 반대의 방법인 인장소도湮障疏導였다. 이 방법은 넘치는 물은 잘 흐르도록 물길을 터주고 막히는 물은 터널을 뚫어서 통과 시키는 방법이었다. 이러한 방법의 토목 수로공사는 전국 구주에 물길을 터서 물의 흐름을 원만하였다. 그 결과 지긋지긋한 13년 대홍수도 막아내게 되었다. 물길을 잘 다스린 토목공사의 성공은 사문명의 권력 기반이 되었다. 그는 물을 잘 다스렸기에 천하를 얻어 요순시대 이후, 하나라를 세운 ‘하왕조’가 된 것이다.
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한 자원이고 권력의 기반이 되는 것임을 은연중 알 수 있다.
요즘 환경파괴가 심해지고 있다. 환경이 망가지면 지구는 병들고 인간은 위태롭다. 요즘 뉴스를 보면 각 나라는 폭우와 폭풍, 태풍 등으로 많은 자연재해와 인명 피해를 당하고 있다. 이를 줄이는 방법과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지구와 인류의 앞날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 지가 궁금하다. 저, 옛날 물을 다스려 천하를 얻은 그 지혜가 아름답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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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탐방 – 심재교 선생님
초대시 – 심재교. 이구재.
회원 작품
- 권오선: 바람 외. 김기순: 가을 녘 외. 박용희: 바다의 몸짓 외.
서용숙: 가시연 습지 외. 유지숙: 넥타이의 회고록 외.
이지애: 문을 열어! 외. 임춘자: 어머니의 기도 외.
전린: 그리움의 자리 외. 최상덕: 꽃길 외.
최혜순: 소리라도 지르려무나 외. 한재성: 번개 시장 외.
함경순: 고사목 외. 황명남: 나의 인생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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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원: 커피를 마신다 외.
커피를 마신다
남진원
커피를 마신다
바쁜 일과 속
커피는
내 인생의 달콤한
커피 한 잔
커피를 마신다
가을볕
남진원
가을볕이
들깨 대궁과 마른 옥수수를 쓰다듬는다
미동도 없이 돼지감자의 노랑 꽃들이 보고 있다
내린 커피를 마시던 중
커피 향이 조용히 떠 있다
방안에 층층이 쌓인 서책들도
가만히 가만히 …
흰구름은
산마루에 걸린 채 그대로
이미 한계에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간
이
한적함
물 소 리
남진원
눈을 비비고 나와 주방에서 수돗물을 트니
쏴아– 쏟아지는 물소리
물소리는 오래 전,
일시에 다가와 풋풋함으로 나를 움직이게 했던
우주의 숨결이었다.
(산꼭대기에서 흐르는 작은 물줄기가 바다의 근원이었던
것처럼 신명나는 내 몸의 원류는 그 물소리에서였다)
어릴 때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제일 먼저 새벽 물소리를 퍼 오셨다. 결혼을 한 후에는 아내가 신선한 음악처럼 새벽 물소리를 날마다 들려주었다.
이제는 내가 직접 새벽 물소리를 꺼내든다.
그날 물소리를 듣던 때처럼 …
눈을 비비고 나와
쏴아 -
오늘의 물소리를 튼다.
밤 빗소리
남진원
밤 빗소리에 귀가 번쩍,
잠결에 후드득 후드득
자연발성법이란 저런 게야
잠이 더 느긋해진다
단 풍
남진원
꼼짝 않던,
그리고 긴 시간의 흐름
내색 않던 앞산이 하룻밤 사이에
달라졌다
못 이기는 척
돌아섰구나,
- 은은하게 물들어버린 모습이라니.
물 건
남진원
늘 거울을 볼 땐 무심히 지나다가
기다란 거울을 파는 가게 앞에서
그리고 기다란 거울 앞에 섰네
내 길쭉한 모습이 그 물건들처럼 서 있네
그렇네,
나도 공장에서 만들어진 저 물건 같은
물건이라는 것.
움직이는 물건이 지금 서 있는 물건을 보고 있네.
배춧국
남진원
배춧국을 끓였다
배추 + 마늘 + 파 + 양파 + 당근 + 된장 + 매운 고추 3개 + 토마토 + 감자 + 물
배춧국 끓이는 재료이다
여기에 뜨거운 불을 지펴 배춧국을 끓였다.
내 노랫가락도 불 지피고 맛있는 마음까지도 소금처럼 몇 숟가락 넣었다네. 그렇다네. 흙덩이에 스민 햇빛도 맛으로 담긴 배춧국이었다네.
알아맞혀 보게, 그러니 맛이 어떻겠는가.
멋쟁이 여인
남진원
멋쟁이 여인이 우리 집에 산다
호박꽃, 해바라기, 코스모스 등 우리 집에 사는 꽃들이 멋쟁이 여인이다.
나비와 벌의 눈길을 사로잡게 하더니, 색색의 빛깔로 내 마음을 꼭 붙들어놓았다.
잎을 만져보면 1g도 안 되지만 내 삶을 지탱하게 하는 무한 무게들이다.
서산대사 한시를 시조로 쓰다
남진원
깊은 밤 산 가을 빛, 내 귀를 적시더니
외로운 나그네 꿈속에서 꿈을 깨고
낙엽은 오동나무에서 빗소리를 떨군다
반야명산우(半夜鳴山雨) 어젯밤 산에 비가 내리더니
처연객몽경(悽然客夢驚) 처연히 객몽을 놀래 깼더라
개창견정수(開窓見庭樹) 창을 열고 뜰에 있는 나무를 보니 만엽일추성(萬葉一秋聲) 이파리마다 한 가을소리더라.
서산대사 - 庭梧
이제 머리 세어져도
남진원
젊을 때는 멋모르고
산을 찾아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잘 되게 해 달라고
빌고 빌었지
그때 산에 있는
나무 풀 꽃 새소리 …
이런 모든 사물에게 빌었다
그냥 어떤 힘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였다
이제 머리가 하얗게 세어졌어도
산을 보면서
손을 모은다
나무 풀 꽃 새소리 바람소리
발에 밟히는 낙엽까지
그저 한량없는 고마움에
머리 숙인다
處處에 다 계신 부처님이여
만상으로 나투신(나오신) 경이로운 부처님들이여
2020년 문학 활동
* 2020. 11. 유지숙 제17회 강원여성문학 우수상 수상
* 2020. 12. 유지숙 강릉예총 제27회 예술인상. 강릉시장 표창.
2020년 12월 25일. 한울림문학 제16집 『달빛 문자』발행.
[수록 내용]
인사말 – 유지숙
평론 – 익살스러운 흉내 (남진원)
시학(詩學) – 익살스러운 흉내
남진원
한울림문학회 2020년 회지를 발간하는데 회장님께서 문학평론 같은 글도 한 편 보내달라고 하여 생각다가 글을 정리하여 ‘시학’이란 글을 보내고자 하였다. 덕분에 앞으로 ‘시학’ 글을 계속 이어서 쓰면 나름대로 글쓰기에서 내 개인적인 문학에 대한 생각도 자리 잡을 것이라 여겨져 고맙기 그지없다.
1.
글다듬기를 추고推敲라고도 한다. 글을 쓰고 난 후에는 고치고 다듬어야 한다. 고치고 다듬는 것을 뜻하는 말을 ‘추고推敲라 하였다.
이 말은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가 말을 타고 가면서 지은 시의 한 구절에서 비롯 되었다.
鳥宿池邊樹 僧推月下門 조숙지변수 승추월하문
☞ 鳥宿池邊樹 僧敲月下門 조숙지변수 승고월하문
새들은 집을 찾아 숲으로 돌아가고
달빛 아래 스님은 문을 두드린다.
이 시를 지어놓고 추推자가 마음에 안들어 말위에서 고敲자로 할까 추推자로 할까 망설이다가 마침 경윤京尹의 행차에 부딪쳤지요. 가도賈島는 불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 사유를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경윤京尹은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하며 ‘추推’자 보다는 ‘고敲’자가 더 낫다고 하였지요. 그 경윤京尹은 당대의 유명한 문장가인 한유韓愈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두 사람은 친교를 맺었다고 합니다.
이 시에서 ‘두드린다(敲)’를 넣을 때와 ‘민다(推)’의 글자를 넣을 때 시가 주는 느낌은 매우 다릅니다.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밀고 들어간다’는 것은 여운이 없습니다. 그러나 ‘스님이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는 구절은 여운을 남기고 시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유명한 문장가치고 이 추고를 게을리한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톨스토이한테 문장이 주옥같다고 칭찬을 받은 체홉도 하루는 잡지사 편집자에게 자기의 원고를 주며 “빨리 가져 가게, 오래 두었다간 자꾸 깎여서 문장이 없어질 것 같네.” 라고 했답니다.
또 ‘적벽부赤壁賦’를 지은 소동파蘇東坡도 하루는 친구가 와서 ‘적벽부赤壁賦’를 며칠 만에 지었느냐고 물으니까, “며칠은 무슨 며칠 지금 단번에 지었지.” 하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하더랍니다. 그런데 소동파가 잠시 밖으로 나간 사이 자리 밑을 보니 초고草稿가 한 삼태기나 나오더랍니다. (※)
이처럼 글을 일차 쓴 후에 ‘추고’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추고시 생각해 볼 점은?
1.낱말이 문법에 맞게 쓰여져 있는가.(文法性)
2.반복하여 강조할 이유가 없이 중복된 낱말이나 구, 문장이 없는가.(單一性)
3.글의 내용이 일관되게 이어져 있는가.(一貫性)
4.나타내고자 하는 주제가 담겨 있는가.(主題性)
5.의도가 인상적으로 드러나 있는가.(印象性)
6.개성적인가.(個性)
7.문맥의 흐름이 조화되어 있는가.(調和性)
8.자기 감상에 치우쳐 있지 않는가.(沒感傷性)
9.낱말이나 시어가 적절한가(詩語의 適切性)
10.함축적으로 드러나 있는가.(含蓄性)
11.반드시라고 할 수는 없어도 관념적인 언어는 구체적인 언어로 바꾼다.(시어의 구체성)
추고 작업은 중심사상이나 중심이미지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해야 할 것이다.
낱말(한 덩어리의 생각을 나타내는 낱낱의 말)이 잘못 쓰이면 문장이 어색하여 좋은 글이 되기가 어렵다.
따라서 낱말의 쓰임이 문장이나 구에 적절하게 쓰여야 한다.
문장이나 시의 구절에서 똑같은 말이나 뜻이 같은 말이 거듭 나오게 되면 뜻을 약화시키게 되고 웃음거리가 되기 쉽다.
(※이성교,한영옥:現代文章作法,성신여자대학교출판부,1993.P.154-157.)
추고를 다 했다고 하여도 그 다음에 다시 읽어 본다. 만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고쳐야 한다.
추고에 심혈을 기울인 시인 맹교孟郊는 평생 좋은 시를 쓰기 위해 다듬는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추고에 대한 시를 쓰기도 했다. 이는 시를 쓰는 사람들이 마땅히 본받을 태도이다. 그러나 그의 시가 향기를 전하지 못하는 것은 생각의 편협된 틀을 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음苦吟
生應無暇日 생응무가일
死是不吟詩 사시불음시
살아서는 편안한 날 없다
죽어서는 시를 짓지 않을 테니까
맹교(孟郊. 751-814):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이고 자는 동야東野이다.
그는 일생 동안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의 시에는 근심에 겨운 생활과 불평이 담겨있다. 그는 당대의 대문장가 한유보다도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추고에 대한 평가만을 받은 이유는 근심과 고통을 약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생각의 폭을 넓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고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가도賈島가 지은 한시 한 수를 감상해 보자.
松下問童子 소나무 아래에 있는 아이에게 물으니
言師採藥去 스승은 약초캐러 가셨다 하네
只在此山中 이 산중 어디엔가 계시겠지만
雲深不知處 구름 깊어 계시는 곳 모른다하네.
- 松下問童子 -
당대 약 300년간 과거에 시가 과제課題로 되었기에 2천 2백여명(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작자 수)의 시인을 배출했다.
수많은 시인군에 따라 초당(初唐618-709) 성당(盛唐710-765) 중당(中唐766-835) 만당(晩唐836-906)의 4기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당 시대에는 사회 비판 정치 비판의 시인 그룹이 있었다. 백거이는 사회파 시인의 중심적 인물이었다. 이들은 두보의 사회시를 발전시켰다.
사회파 시인에 대항하여 표현 면에 연구를 한 고음파苦吟派 시인에 한유를 중심으로 맹교 가도 이하 등이 있다. 이 그룹은 두보가 고심한 표현 연구의 전통을 계승했다.
가도賈島의 시 ‘소나무 아래’와 흐름을 함께 하는 율곡의 시 또한 감상해 볼 필요를 느낀다.
山 中
李 珥
採藥忽迷路 캘 채 약 약 갑자기 홀 잃을 미 길 로 千峰秋葉裏 일천 천 봉우리 봉 가을 추 잎 엽 속 리
山僧汲水歸 뫼 산 중 승 물길을 급 물 수 돌아갈 귀
林末茶烟起 수풀 림 끝 말 차 차 연기 연 일어날 기
약초 캐다 갑자기 길을 잃었는데
가을 낙엽 자욱히 덮인 산속에
스님은 물 길어 돌아가고
숲 속 저 편에서 차 닳이는 연기가 피네
2.
시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시를 쓰는 행위나 노동을 하는 행위나 음악을 하는 행위나 모두 인간의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다. 우리는 음악을 듣고 노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며 일상을 지속해 나간다. 그러한 삶의 일면을 진솔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것을 생활의 탐색이라 한다. 생활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관조하기도 하고 궁구하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활을 즐겁게 행복하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것들 앞에 희망이란 요소가 필요하다. 이 희망을 잃으면 삶의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생활에 대한 탐색은 먼저 희망을 찾는 탐색이다.
여기서는 우선 행위의 중요성이 전제된다. 그리고 ‘나의 무엇이 이러한 행동을 가져오는가?’ 를 살펴보고 그것을 시로 엮는 작업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시를 쓰기위해 시 자체에 너무 매달려 왔다. 그러다보니 시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망각하고 그저 시인이란 이름을 얻기에만 급급해왔다. 시는 나의 생활에 중요한 요인이다. 시가 생활의 전부가 될 수 없지만 시적 생활은 중요하다. 따라서 우리의 행위를 시로 엮을 때에 나의 가치가 드러날 수 있다. ‘행위의 시’ 는 시각적 이미지가 중심인 ‘바라보기 시’ 보다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활의 탐색이 없는 시는 생명력이 없다. 나의 삶을 시로 건져올릴 때에, 내가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행위를 시로 표현할 때, 진정한 시의 본질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역할 중에 하나는 무엇인가? 미나리처럼 연못에 뿌리를 내리고 세상을 정화시키는 일을 해내는 몫이다. 시인은 시인이 걸어가는 땅, 거대한 자유에 의해서만 책임질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시인의 행동은 위대하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나 또는 우리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시인의 자유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3.
시는 독특한 인격이 빚어내는 언어의 조형물이다. 시를 쓰는 시인은 매력적인 개성의 소유자이다. 설령 그렇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런 방향으로 끼어들게 된다. 시가 언어의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또한 예술적 속성을 지닌다.
시인이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란 말 속에는 독특한 문체와 특징이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이전의 시인들이 갖는 문체 속에는 서정적 자아가 중심을 이루는 경향이 보였다. 점차 사회가 산업화되면서 외래 지향과 사회적 자아의 확대로 번졌다. 우리 사회가 변증법적으로 이동되듯이 한국의 현대시도 전통적 서정시에서 새로운 변화와 모색을 하여왔다. 또한 우리의 삶이 서정보다는 치열한 생존, 즉 ‘살아남기’ 에 급급하여 시 또한 서정적 요소가 배제된 모더니즘 적이거나 해체시 쪽으로 달려가기도 하였다.
우리가 쓰는 문학 작품은 새로운 도전과 전통의 보전이라는 이중적 문제를 안고 문화적 충격을 감내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시를 다섯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다.
1.전통성 서정시: 자연친화적이며 감정이 중심이 된다.
2.현대성 서정시: 생활에 묻어나는 구체적 정서를 이미지로 재현시키고 자연과의 교감도 적극적이다.
3.지성시: 환상적 언어의 사용이 빈번하고 은유를 통하여 이야기 하고자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현상은 모순에 대한 비판과 자기 개혁 내지 자기 파괴에 이르는 길마저 모색한다.
4.생활시: 관념적인 성향을 배제하고 반성적 자기 발견을 중시하고 구체적 삶을 드러내는데 치열하다.
5.철학시: 관념적 세계를 구체적 이미지로 드러낸다.
4.
시를 쓰는 시인은 적어도 작품에 대한 치열한 자기 탐구가 있어야 한다. 당나라 시인 맹교孟郊는 시를 잘 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그는 평생 동안 좋은 시를 쓰기 위하여 고치고 또 고치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았다. 무척 노력형의 시인이었다. 후일 그의 시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生應無暇日 살아서는 응당 한가한 날 없으리라
死是不吟詩 죽어서는 시를 짓지 않으니.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1.노력을 해야 한다.
2.이미지나 상징에 참신성이 있어야 한다. 이미지는 사물에 대한 형상화라고 하겠다. 여기에는 생동감이 있어야 하고 현대적 감각의 이미지 표출에 노력해야 한다.
3.구성력이 뛰어나야 한다.
4.시 자체가 생물 같은 것임을 알고 부단한 자기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5.
시詩란 무엇인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시란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편안하여서 시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자연에 있는 동물, 식물, 사람 무생물로부터 아름다움을 찾는다. 그리고 시에 나타난 작품을 통해 아름다움을 찾고 느낀다.
시인은 자신이 좋아하고 아름다워 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을 표현하면 독자는 향유한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눈 내리는 것’이라고 하면 눈 내리는 모습을 나타내면 될 것이다.
함박눈 내리는 산골의 밤
하얀
눈이 옵니다.
눈에 안겨
마을이
포근히 잠이 드는
동화 속처럼
아름다운
밤
부엉이 소리도
멀어지고
모두가
백옥 이불을 덮고
꿈을 꿉니다.
위의 글은 작자가 눈 내리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눈 내리는 모습을 의인화하여 표현하였다.
이처럼 시 창작은 자신이 보고 느끼고 경험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6.
시도詩道라고 하니 거창한 이름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말 그대로 시를 쓰는 길이다. 여기엔 시를 쓰는 방법과 행위가 포함되어 있다. 여러 가지 방법과 행위가 있겠지만 나는 다섯 가지를 생각해보았다.
첫 번째, 시 읽는 것을 좋아하자.
두 번째, 시 듣는 것을 좋아하자.
세 번째, 시 모으는 것을 좋아하자.
네 번째, 시적 접근 방법에 의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자.
다섯 번째, 시 쓰기를 좋아하자.
시를 좋아하면 시인이 된다. 작품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시인을 만들어준다.
시 읽기를 좋아하자. 시를 읽으면 재미를 느낀다.
시 듣는 것을 좋아하자. 시를 들으면 즐거움을 느낀다. 시 낭송회에서 낭송하는 시를 들으면 정신이 맑아지고 행복해지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시 모으는 것을 좋아하자. 시를 모으는 것을 취미활동으로 삼으면 그것은 지극한 즐거움이 된다.
시적 접근 방법에 의해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자.
시 쓰기를 좋아하자. 시 쓰기는 고통의 연속이라고 한다. 시를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인간 내면의 고통을 직시하면서 그 속에서 건져내는 울림의 미학이 ‘詩’이다. 그래서 윤동주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 시를 쉽게 쓰는 것에 대해 아파하였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 작품은 ‘쉽게 씌어진 시’에 나오는 대목이다. 시 쓰기가 버릴 수 없는 아픔이라면 차라리 즐기자. 시 쓰기를 좋아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7.
현대 서정시는 서정 즉 인간의 감정이 중심이 된 시이다.
아름다움의 의미
세상살이가
무시로
억울함에 취해 울고 있나니
더러는 시름에 겨워
잠들다 깨다가 하거니
인생은
나무옹이 같은 것
가슴에 박힌 옹이를
쓰다듬는 사람아
슬퍼하지 마라
우리는 완행열차의 흔들림처럼
그렇게 흔들리며 가는 거라네
그렇게 흐르며 가는 거라네
아름답지 않은가
8.
시의 다양성이 요구되는 현대사회에서 시인의 인격과 무관한 작품에 대한 찬사는 문제가 되기도 한다.
시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시인의 개성이 존재하는 것이며 인격이 존재한다는 말과도 같다. 한 시인이라면 그 시인만이 가지고 있는, 가질 수밖에 없는 인격이 시 속에 묻어 나와야 한다. 그것은 자제할 수 없는 감정의 찌꺼기를 배출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언어와 언어의 관계가 긴밀한 서정의 세계로 몰아가는 것이 특유한 서정성이다. 또한 새로운 서정의 세계로 안내해주는 역할은 중요한 시인의 몫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작위적인 흠을 없애기만 한다면 말이다.
글을 쓸 때 주관성이 진하면 감정의 여울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누구나 자신의 감정을 절제 없이 그냥 흘러 보내고 싶은 경우가 많다. 이는 글을 쓸 때에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종류의 글이다. 이런 작품은 감정의 개입이 너무 지나쳐서 아름다움이 한결 퇴색되고 있다.
*
쓸쓸한 가야금 소리
이 밤 슬피 울고
못 내 타는 내 가슴은
한잔 술에 취해 흐느적거린다.
*
우리들 가슴 속 사랑은 이글거리고
감미로운 선율의 파도
당신의 뜨거운 입김이여
내 정열과 함께 불탄다.
그대를 사랑하는 내 마음
그리움의 흐느낌을 아는가.
서정의 불꽃은 겉으로 드러나기보다 속에서 타오르고 그 열기와 빛이 주위를 밝혀주는 것이 아름답다. 속을 갈무리할 줄 아는 사랑은 항상 가야금 소리처럼 울림이 크다. 정서의 객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少年
윤동주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저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놓고 나무가지 우에 하늘이 펼처있다. 가만이 하늘을 들여다 보려면 눈섭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손으로 따뜻한 볼을 쓰서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속에는 사랑처럼 슬픈얼골 ---아름다운 順伊의 얼골이 어린다. 少年은 황홀이 눈을 감어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얼골 ---아름다운 順伊의 얼골은 어린다.
이 작품은 1948년 초간본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윤동주 시집에 실린 글이다.
순이라는 대상에 대해 그리움의 느낌을 단풍잎, 가을, 하늘 등의 시어 속에 담아놓았다. 소년이란 객관적 자아를 설정하여 놓은 것도 특징이다. 이 시에서 정서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파란 물감과 맑은 강물이다. 사랑처럼 슬픈 얼굴로 보여 지는 그리움의 대상 순이는 파란 물감과 맑은 강물의 이미지로 환치되면서 격앙되는 정서를 차분하게 바라보고 음미하게 한다. 맑고 깨끗한 서정시이다.
9.
서정시에 대한 변화는 필연적이라 보여진다. 이는 서정성의 표현 문제가 중요한 변화의 몫이라고 생각된다. 아직도 감정의 흐름을 그대로 드러내어 시를 치졸한 감정풀이로 생각하는 시인들이 있다는 것은 한국시의 앞날을 매우 어둡게 하고 있다. 몇몇(?) 시인들의 너무 안이한 작시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아동문학의 경우는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동시의 시적 변화를 위해 유경환 시인께서는 지금도 꾸준히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일부 사람으로부터 욕을 먹으면서도 앞장서서 선도하는 그런 분이 계시기 때문에 아동문학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보여진다. 시의 경우에는 말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것 같아. 시를 평하는 경우에도 서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작품을 칭찬해주는 정도라고 여겨진다. 그리고 어찌해서 월평이나 계평을 보면 손꼽을 만한 사람들 이름만 일년 내내 들먹거리고 있는지 참 한심스러울 때가 많다. 시 잘 쓰는 한국의 시인들이 그리도 없다는 말인가? 이 말은 반어적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한국 서정시의 시쓰기는 문학에 대한 열정 못지않게 시의 기술적 문제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해야 되리라고 본다.
포스트모던 쪽의 시를 쓰는 시인 중에서는 간혹 우월주의에 빠져 있는 시인을 본다. 서정시를 쓰는 시인을 폄하하고 현대시라고하면 모던해야 된다고 착각하고 있다. 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한 시인이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하였다.
다양한 시적 패턴을 요구하는 시대에서 일정한 방향만을 고집하는 것도 문제가 되겠지만 한쪽만을 옳다고 고집하는 것은 더욱 못난 짓이다. 그렇게 되면 언어만 있고 시는 실종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의미와 이미지에 관한 논의는 계속되는 시적 담론이어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형식주의의 틀을 변화 발전시키면서 서정성이 스민 아름다운 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옷을 입은 신선한 서정시 같은 경우는 어떨까 싶다.
10.
서정시는 기본이 되는 시이며 가장 많은 독자를 형성하고 있는 시의 한 종류이다. 서정시는 인간의 생활이 시작되면서 구비적 형태로 전해왔다고 보여진다. 사람의 감정이란 시대에 따라서 정서가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역사를 말할 때에 서정시를 빼놓고는 말하기 어렵다.
70년대와 80년대에 서정시는 외면을 받았다. 어려운 시, 모던한 시들이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정시는 이제 본래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정서의 새로운 환기는 감정을 정화시켜주고 인간의 마음을 위로해준다.
이제는 서정시가 서자 취급을 받지 않게 하기 이해서도 서정시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서정시가 지니고 있는 서정성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해도 그 모습은 이제 변해야 한다. 서정의 지적 모습이 있어야 하겠고 지성시에 서정성이 내포되어야 한다.
서정의 모습(감정, 자아, 꿈 등)에서 사랑은 논리적인 것 비논리적인 모든 것을 초월하여 있다.
사랑은 인간의 감정 중에서 으뜸이다. 사랑이 없는 삶을 생각해 보자. 이 세상의 부귀가 있어도 사랑이 없다면 쓸쓸한 황무지일 따름이다.
멀리 있기에 더욱 그립고 절실한 사랑은 외로움의 바다에서 별이 되어 날아오른다.
사랑의 정신적 합일은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가치에 이른다. 합일은 고요하고 아름다운 환희를 낳게 한다. 사랑의 힘은 파도의 거센 자태를 인간의 열정적인 사랑으로 표현하여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사물을 바라볼 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 사람의 환경과 환경을 받아들이는 감정, 성격, 독서량 등 종합적 인격과 무관하지 않다. 시를 쓰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드러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인간의 생활 중에 사랑을 빼고 얘기한다면 얘깃거리가 없을 정도이다. 사랑은 우리들 삶의 본질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노래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쪽에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인다.
임이여, 청산에 꽃 되오소
그리운 이가 그리운 날에
임이여 꽃 되오소
나는 한 마리
나비 되오리다.
가다가 곤하면
길섶에서 잠이 들고
잠들면 꿈속에서
임의 꽃 가르쳐주오소
그리운 이가
그리운 날에
임이여 꽃 되오소
나는 한 마리
나비 되오리다.
가다가 힘 들면
아무 꽃잎에 앉으리까
아무 풀잎에나 앉으리까
그리운 이가 그리운 날에
임이여
가는 길도
임의 향기로 가르쳐 주오소
임의 향기로 붙들어 주오소.
11.
서정의 깊은 구렁에는 한이 도사리고 있다. 2500년을 긴 강물처럼 굽이굽이 흘러내려온 限, 그 한의 표출은 다양한 형태로 민중의 가슴에 심어졌다. 그 한 모습을 한국의 시인들은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다.
봄은 서정의 한 가운데에 있다. 봄은 만물의 시작이다. 봄은 생명의 몸짓이 싱싱하게 표현되는 계절이기에 많은 시인은 봄을 노래하기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은유는 서정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데 흔히 쓰인다. 직유나 직서법 보다 한층 감정의 농도를 진하게 만들기 때문이고 품격이 있기 때문이다.
봄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은유의 표현을 담은 시를 찾아 읽어보자.
서정의 모습(감정, 자아, 꿈 등)에서 한발 물러나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단아하고 행복하기까지 하다. 시인의 마음이 호수처럼 고요하고 그윽하면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즐거움에 있을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의 일이 더 없이 중요하고 즐거운 일이란 것을 시인은 시로써 보여주어야 한다.
12
큰 것과 작은 것 중 어느 것이 더 대단한가 하고 물으면 큰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큰 것은 큰 대로 하는 일이 있고 작은 것은 작은 대로 하는 일이 있으니 어찌 公平하다고 하지 않을 것인가.
큰 것이 작은 것을 비웃지 않고 작은 것이 큰 것을 부러워하지 않으니 이를 일러 太平이라 한다.
수백 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민들레 꽃씨가 나는 모습을 볼 때, 느티나무와 민들레 꽃씨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것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고 가벼운 민들레와 크고 우람한 느티나무를 통해 삶의 무게를 가늠해본다는 것은 참으로 가벼우면서도 깊은 思惟이다.
사람이 사는데 크고 우람한 일은 무엇이며 작고 가벼운 일은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일은 분별을 떠나 있음(存在)을 생각하게 한다.
함께 어울려 사는 아름다움은 가벼운 미소와 무거운 고뇌가 서로 이름을 불러주며 다독이는 모습이 아닐까?
13.
일상적인 삶에서 얻는 감동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 그것은 생활을 아름답게하며 진실되게 한다. 너무도 아름답거나 참담함에 놓여진 현실 때문에 진실 혹은 그리움에 대한 무의미를 탄생시킨다. 마음 아파하며 살아가는 것은 존재의 겨드랑이를 간지르는 삶의 가벼움이며 또한 진통이다.
14.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작업은 신비롭다. 바람의 세계를 꺼내지 않더라도 초월적 달관의 세계는 그윽하다.
바람의 사전적인 뜻은 기압의 변화에 따라 일어나거나 사람이 일으키는 공기의 흐름이다. 그러나 문학의 세계에 들어오면 바람은 다양하게 변신을 한다.
우리 민족의 개국신화를 보면 바람의 상징성은 창조적 숨결 또는 창조적인 발산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우주를 지배하는 요소가 된다.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환인 천제에게 환웅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환웅은 인간세상을 다스려보고 싶어 한다. 아버지 환인은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그때 바람의 신, 구름의 신, 비의 신을 부하로 내려 보낸다. ‘바람’은 세상을 움직여 가는 생명의 숨결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5.
시어가 갖는 상징성을 알아보자. 예를 들어 ‘빛바랜 모자’는 오랜 생활이 숨
쉬고 인간의 정이 묻어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그러면 ‘쓸쓸한 나무 의자’는 어떤 상징을 띄고 있을까? 인간 존재의 삭막함, 공간 속에서 받는 공허감, 삶과 죽음의 공간, 인간 존재의 실존적 물음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람들은 내놓고 싶지 않은 놀라운 일을 당하면 숨기려고 한다. 의롭지 못하거나 떳떳하지 못한 일에 의해 이루어진 일들이 속으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나 겉으로는 모두들 그런 일을 누가 한 것이 드러나면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는데 앞장선다. 부정한 짓을 한 사람이 그런 일에 더욱 앞장 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람들이 즐거운 일이나 희망적인 일도 직접 드러내지 않고 다른 무엇으로 나타내는 것은 그 기쁨을 깊숙이 하기 위함이다. 색채를 나타냄으로써 그 깊은 의미를 더하고자 하는 것도 상징에 있어서는 중요한 표현 방법이다.
흑색은 허무 절망 정지 침묵 견실 부정 죄 주검 암흑 밤 등을 의미하다.
보라색은 이별 가을 방황 삶에의 연민 쓸쓸함을 상징한다.
연두색은 봄을 나타내고 우울하지 않으며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젊은이에게는 싱싱한 건강함이요 나이든 사람에겐 삶의 재생이요, 생의 확충이다.
이런한 상징도 시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아침노을’은 부지런함을 나타내지만 ‘저녁노을’은 슬픔을 띈다.
16.
서정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노력이 난해한 현대시를 낳게 하였다. 꿈, 자아, 감정에서 탈출하여 규범적인 세계를 지향하고자 한다. 감정의 흐름에서 자유로운 시쓰기는 시를 단백질이 함유한 식품처럼 맛갈스럽게 만든다. 시각적 회화성 뿐만 아니라 청각 미각 취각등을 자연스러운 표상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이른바 모더니티라고 자처하는 혹자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그 표현의 어지러움은 자못 피해가 심각하다. 교묘하게 꾸민 말은 겉으로 보면 멋스러운 것 같지만 진실성이 없고 말재간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전달의 힘이 약하고 사물에 대한 지적 수준을 저하시킨다. 따라서 현대시는 감동 이전에 저항감을 먼저 받는다.
‘언령言靈’이란 말이 있다. 말에 깃든 신령스러운 힘이란 뜻이다. 언어 사용의 조심성과 신중성을 기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말이 비록 서툴고 어눌하여도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 깨끗한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 또한 언령이 있기 때문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시와 반시에 대한 생각도 분분하다.
시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경우, 시는 시일 뿐이다. 시와 예술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고 존재의 가치를 지니기를 희망한다. 시의 순수성이 내포된 말이다.
반시 적인 경우, 사람이 쓰는 시가 사람의 문제를 다루고 역사와 현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사유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시는 시 존재 가치 이외의 무엇을 위하여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에 두고 있다.
다양한 시적 논의는 필요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대시의 의미가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현대시는 인간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서정과 지성이 조화되고 뜻이 고양된 언어의 집이어야 될 것이다.
17.
사물 앞에 몇 장의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방법이다. 단조로운 이미지에서 보다 복합적이고 다중적 이미지를 탄생 시킨다.
햇살은 밝음, 기쁨 , 환희 등의 상징을 갖고 있다. 즐거운 느낌을 표출하는 이미지들이 있다.
▷아무리 비춰도 바래지 않는 달의 물결
섬처럼 하나 씩 띄운다
▷둥글둥글 네 얼굴
가슴 가득히 멍멍한 귀울림이다
물기 머금고 반짝이는 흰 섬유질이다
▷침묵처럼 날아드는 별
▷하얗고 작아서 작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은빛 뿔
▷온갖 산새소리 실타래처럼 풀어 트리는 바람
▷흐르면서도 보이지 않는 바람
화성에서 온 아이처럼 웃는 햇살 [직유의 표현]
눈부신 꽃으로 온 햇살 [은유의 표현]
봄이 스며든다.
연두색 아지랑이 스멀스멀
옆구리 생채기 나도록 간질이며…
봄이 스며든다.
매화꽃
환한 차가움 속으로
수런대며 수런대며…
내가 앓고 있는 그리움의 밭에 누웠다.
18.
글은 그냥 되는 게 아니다. 묘사 되어야 한다.
몸의 여기저기 한 뭉텅이 씩 털이 빠졌다.
눈빛이 어둡다
어디서,
다쳤나?
꼬리가 잘려나가고
목이 비뚤어져 한쪽으로 기울어졌는데
다리마져 상이용사이다.
- 개 -
느닷없이 배가 아프고 피부가 거칠어진다. 벌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어도 기침이 난다. 건너지 못하는 사랑의 강 앞에서 가난을 울부짖었다. 미욱한 바보 온달이 무시로 부럽다.
- 온달 -
19.
닮음의 관계에서 더 나아가 동일시한 표현이 은유적隱喩的 방법이다. 은유隱喩는 ‘A’라는 존재와 사물 ‘A'’라는 존재를 동일시하여 나타낸 방법이다.
시에서 은유는 단순하게 시에 쓰이는 여러 가지 비유 가운데 하나라는 의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은유(Metaphor)는 그리스어의 Metaphor에서 나왔는데 이는 meta(초월) pherein(전한다.운반한다)에서 유래되었다. 어원적인의미를 보더라도 은유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의 의미를 초월한 새로운 의미를 나타낸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은유는 새로운 하나의 판단이며 단정인 만큼 보다 직관적이고 주관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럴수록 은유가 독단적이 되지 않고 참신하면서도 보편적 의미, 보편적 생명성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사물과 사물 사이, 관념과 관념 사이, 사물과 관념 사이의 새로운 발견을 위해 보다 예리한 통찰의 힘이 필요하다.*(1)
또한 은유는 말 뜻 그대로 숨겨진 비유(hidden figure)로써 기존의 의미세계에 숨겨져 있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그 이미지를 신선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은유에 의하여 언어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고 표현력을 증대해 간다. 그것은 기존의 언어와 의미를 바탕으로 재생(再生)됨으로써 시의 세계를 더욱 창조적인 것으로 상승시켜 주는 것이다. *(2)
은유는 시 기법에서 꽃이라 부를 수 있는 가장 드는한 표현이다. 직유가 대상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고, 간접 접근의 방식을 사용한다면 은유는 직접 접근의 방식을 사용하여 자아와 타아가 일물(一物)이 되는 것이다. 즉 은유는 나와 맞는 님을 찾는 일이다. “내 님은 누구일까, 어디 계실까?” 찾아나서자.
님을 찾는 것처럼 은유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모습이 강렬하며 품위를 높여준다. 다만 두 사물 사이의 간격이 크면 클수록 시적 포괄성은 커지지만 난해의 숲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즉 이혼율이 높다.
*(1):홍문표,「현대문장론」,綜合協同硏究社,1973.P.147.
*(2):김용직,박태상,정한모,조남철, 앞의 책, P.77.
20.
문장과 문장 사이에 담는 것 중에 심층적 이미지가 필요하다.
그녀가 내 앞에 산소 나무가 되어 걸어온다. 걸어오는 그의 발자국에 햇빛이 가득 묻어있다. 그의 어깨에서도 햇살이 떨어진다. 그녀는 그대로 꽃이다.
- 그녀 -
내면의 풍경을 위해서는 실제로 쓰는 서술어에는 ‘젖는다, 흐른다, 탄다, 피었다’ 등 움직임과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 대부분이다. ‘시냇물이 흐른다’는 표현은 ‘구상’이고 ‘즐거움이 흐른다’는 표현은 비구상이다.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표현이다.
바다는 젊은 아이들
숲처럼 깊은 숨소리가 들린다
하늘빛이 꿈틀거린다. 새벽이 오고 있다.
- 바다 -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파란 하늘 사이로 흐른다
언뜻언뜻 놓여진 구름의 무늬는
움직이는 물고기 떼
희고 부드럽게
빛나는 것들, 은빛 고기가 있어서
더욱 상쾌하다.
- 구름의 여행 -
횡단보도 앞에 섰다.
멈춘 바닥 위에
시간에 썩은
열쇠 하나가
버려져 있다.
버려진 채 눈을 뜨고 있다.
- 열쇠 -
21.
패러디는 ‘익살스러운 흉내’라는 뜻이다. 창작의 한 요소인 패러디 기법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은 모방에서 비롯된다’는 함축적 의미에서 그 토대를 마련한다.
패러디를 활용하면 막연한 것들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안내하여 상상력을 높인다. 또한 원래의 사물이나 형상을 조롱하기 위해서도 많이 쓰인다.
22.
인식과 행위는 사람의 외형적 인체조직과 마음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다. 행위가 표출되는 원인은 지금까지 이어온 습성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새로운 생각으로부터 시작되기도 한다.
생각은 인간의 의식세계와 무의식 속에 담겨있는 표출 입자이다. 우리의 생각은 몇 겹의 막으로 쌓여있다.
단순한 인간의 행위는 생각의 막 중에서 제일 바깥에 있는 생각의 막이다. 생각의 막은 겉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생각의 막이 겉으로 나올수록 구체적이고 명확하다.
시를 쓰는 것도 행위이다. 시를 쓰는 행위는 언어적 행위이다. 시가 출현되는 현상을 보면 체험적 진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지만 추상적 생각의 구체화 작업도 긴밀하게 이루어진다.
생각이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 부분을 관념적 인식의 세계라 하고 더욱 깊숙이 들어가면 무의식의 세계에 닿게 된다.
시 읽기는 무의식의 세계에 닿기 전 인식의 세계에 대한 작품을 읽기 위해서이다. 인식의 요소에 담겨있는 요소는 희망, 기쁨, 뜨거움, 절망, 욕구, 조용함, 안타까움, 아득함 같은 비구체적 관념의 표상들이다.
이러한 관념을 시적 언어로 그리는 작업은 인식의 형상화이다. 인식의 형상화는 사물과의 긴박함이나 절박한 만남에서 효과가 크다. 그것은 강열한 욕구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그 효과가 입체적이다.
시 쓰기에서 우리가 고심하는 일이 있다면, 사물에 대한 대상을 항상 새롭고 비판적인 안목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것은 시의 장래를 위해서 매우 행복한 일이다.
23.
사람들은 글쓰기의 과정을 흔히 물길에 비유하기도 한다. 특히 시조의 경우에는 기승전결의 방법이 요즘도 많이 쓰이는데 이는 시조가 갖는 흐름 때문이다.
시조는 3장이란 특수성이 있으며 특수성은 기승전결의 보편적인 흐름이 있다. 물길이 처음 시작될 때를 ‘기’라고 하며 물길의 유유한 흐름을 ‘승’이라 한다. 그러다가 변화의 수를 만나는데 당황스럽고 긴장감이 서리고 헤쳐 나가야 할 결단이 서는 곳, 이것이 ‘전’이다. 마치 물길이 폭포수를 만나 곤두박질쳐야 하는 경지가 그런 것이 아닐까. 그 다음에 다시 평온을 찾아 조용히 흐르며 잦아드는 것, 이것이 시조의 흐름이다. 시조를 창작할 때에는 기승전결에서 ‘전’의 묘미를 불러와야 한다.
24.
화담집 의 ‘동유록(東儒錄)’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그 옛날 서경덕 선생은 화담에서 살았는데 화담의 물은 성거산(聖居山)으로 물이 항상 검푸르고 많이 고여 있었다고 한다. 작은 봉우리 아래 집을 짓고 즐거움으로 소요하며 사는 것이 마치 속세를 벗어난 것 같았다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말년에는 얼굴에 덕성이 흐르고 피부가 맑아 세상의 높은 경지를 궤뚫은 듯 하였다고 하였다. 항상 달을 보고 바람소리를 들으며, 귀를 씻고 마음을 닦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런 모습은 향기 나는 시 한편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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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시 – 휜 책장, 선반에 대한 쓸쓸함으로 외 2편
회원 작품
박용희 – 어머니표 김장김치 외. 변정연 – 욕심 외.
서용숙 – 백년 만에 피는 가시연꽃 외.
심제칠 – 소나무에 대한 경배 외. 유지숙 – 꽃 2 외.
이지애 – 눈이 준 선물 외.
임춘자 – 시 한 편에 사랑 한 번 외
전 린 – 복사꽃 자리 외. 최상 덕 - 박 외.
주대중 – 쏘찌아따 강릉 방문
한재성 – 호박과 나 외.
함경순 – 연인산 장상에서 외. 황명남 – 나무 외.
2020년
남진원 – 존재의 이유 외.
존재의 이유
그 어렵던 교육대학시절을 끝내고 발령을 받았다
27,200원
첫 봉급액이었다.
얼마나 고맙고 신났던 일인가!
그런데도 무엇인가 늘 부족했다 마음이 떠돌았다
글이란 것을 쓰면서 마음이 안정되었다 사는 즐거움을 알았다 글 속에서 아름다웠던 모든 것을 다시 찾아냈다 글속에서 희망이란 거, 사랑이란 것 모두를 찾아냈다
지금 집도 절도 없이 살지만
글을 쓸 수 있어 마냥 좋다
2020년 꽃들의 침묵
저 6월의 침묵은 하얀 누군가의 잊혀 진 신경이다
미모를 뽐내는 데 보아 주는 이 없으니 그리움의 눈빛 하나 전할 수 있으랴
코로나 19로 끊어진 발자취
꽃들의 화사함이 오히려 무거운 날
사회적 거리두기로 모두는 스쳐가는 행렬
「감염 병 장례식장」으로 들어서는 행렬 같은 검은 마스크 흰 마스크 …
2020년, 산과 들 일시에 침묵하고
밀랍 인형들, 멀찍이 거리를 둔 채 흘러 다닌다.
일원짜리 할머니
봄이면 민들레꽃이 피었다. 민들레 피는 길 따라 옆구리에 보퉁이를 낀 일원짜리 할머니가 나타났다.
동냥을 할 때 1원만 주면 좋아했기에 그 뒤로 별명이 ‘일원짜리 할머니’였다. 아이들은 그 할머니를 부를 때면 ‘할머니’란 말은 빼고 ‘일원짜리’라고 목청을 높여 불렀다. 동에 어귀 민들레 길에 그 할머니가 나타나면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가서 웃음소리와 고함소리가 뒤섞여 묘한 노래가 되었다.
“일원짜리, 일원짜리, 일원짜리, 일원짜리 …”
할머니가 돌아보며 손을 들어 쫓는 시늉을 하면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돌아섰다가 다시 졸졸 따라가며 노래를 불렀다. “일원짜리 일원짜리 …”
한겨울 밤, 집 뒷길 옆 샘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꽁 얼어붙었다. 바람이 문풍지를 세차게 흔들며 난리치는 밤, 바람소리와는 또 다르게 세차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추운 밤중에 누구고?
할머니가 문을 열었다. 그 앞에는 얼어붙은 듯 일원짜리 할머니가 보퉁이 하나를 움켜 든 채 벌벌거리고 서 계셨다.
아랫목에 보퉁이를 꼭 끌어안고 잠이 든 일원짜리 할머니, 숨쉴 때마다 ‘새액새액’ 풍선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일원만 받으면 좋아라 하던 할머니,
겨울 지나고 봄이 되어도 일원짜리 할머니는 마을에 나타나지 않으셨다. 민들레꽃만 일원짜리 할머니가 지나간 길 옆에 노랗게 피어났다.
오고 갈 곳이 없다는 게 이 말이야
방에 들어서면 조용히 방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책을 정리하고 보니 방을 휘둘러 볼 여유가 생겼다.
물건이고 가구고 책이고 어느 것 하나 내 숨결 안 닿은 것 없고 내 모습 아닌 게 없다.
모두가 다 나였구나.
먼 후일 사람은 가도 강원도 강릉시 방터길 53-20 번지의 방은 남진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걸 누가 기억하지 않아도, 남진원은 이미 남진원으로 이 방이 되었다. 그렇구나 집 밖으로 나가 시내로 들어가던 길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는 그 길도 남진원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우주와 숨을 쉬는 이 세계의 공간이 모두 남진원의 모습 아닌 것이 없네.
돌아보니 자네 역시 자네의 모습 아닌 것이 없네.
그래, 너도 그렇고 저 분도 그렇고 모두 모두 그렇구나.
오고 갈 곳이 없다는 게 이 말이야.
나무와 난로 …
여름 한 철 가을 한 철, 방 한구석에 있는 난로가 밉상이기만 하더니
이 겨울에 큰일을 해주는 구나
한 움큼 나무로 추위를 몰아내고
열기를 구석구석까지
마음 속 한기까지 몰아내네
어느 벗이 있어 너처럼 온기를 전했나
내 홀로 사는 방안에 외로움도 녹이고
절로 편안함과 웃음을 짓게 하니
사람의 情도
이 보다 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겠다
버려져 쓸모없어 보이던 나무와 멀뚱멀뚱 죄지은 듯 묵묵히 있던 난로야
너희가 가끔 사람보다 낫구나.
목조건물에서 들리던 풍금소리
비현실적 이미지가 현실속의 그야말로 뒤죽박죽이 된 피카소의 강렬한 의식처럼 멍뚱멀뚱해지는 존재와 시간들의 물결 속에서도,
나는 67년의 새로운 날을 보내는구나
지난날이 아무리 환희로웠다고 해도 지금 살아가는 날은 환희로움으로는 말할 수 없는 푸른 시간들
지금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들끓어 모두들 마스크로 입을 닫고 멀찍이 거리두기로 살아가는데도
방터골 들어가는 길 옆 어린 나무들은 청청한 아니, 청순한 잎, 잎을 꺼내들고 기쁨을 노래한다.
‘ 그래도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우냐고… ’
그래, 나는 늘 저 나무들로부터 유년의 목조건물에서 들리던 풍금소리를 듣는다.
때로는 슬퍼도 가끔은 괴로워도 아름다운 아름다운 삶이구나.
강릉 바다에 뜨는 보름달
늘 사람 살아가는 일상은 기울어지고 흔들리고 주저앉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하지만,
우리 일어날 수 있는 건, 걸어갈 수 있는 건, 달려갈 수 있는 건
정월 보름날, 경호鏡湖 정자亭子에 올라 보면 알 수 있으니,
둥글고 커다란 달덩이 한 채, 젖은 물비늘 떨구며 두둥실 강릉 바다에서 떠오르는 걸 보면 알 수 있으니,
고요한 침묵으로
쏟아내는 은빛 언어들의 광채를,
듣는가 …
아름다운 선율은 구부러진 것을 펴고 기울어진 것을 세우고
흔들리는 것들을 포용하는
광활한 자유의 숨결
바다에서 하늘로 날아오른 강릉의 달은
바다에 달 하나를 다시 남겨두고, 호수에 달 하나를 또 내려놓고 경호의 정자에 다가와서 향기로운 달 하나 술 잔에 띄우고,
사랑하는 임이여,
임의 눈 속에는 청송 같은 그리움의 달 하나를 새겨놓았구나,
다섯 개로 뜬 달은, 새 날 용서의 빛, 새 날 화해의 빛, 새 날 소망의 빛, 새날 믿음의 빛, 새 날 환희의 빛임에랴.
늘 사람 살아가는 일상은 기울어지고 흔들리고 주저앉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하지만,
저 달이 있어, 해마다 희망을 꿈꿀 수 있어 행복하네.
저 달이 있어, 해마다 사랑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하네.
천사의 눈물
내가 몸이 아팠다
응급실에서 엑스레이 촬영, CT 촬영까지…
얼마 후, 병실 입원
1인실 비 대면에 문밖 일체 출입금지
이게 무슨 병이라서?
폐결핵일수도 …
기막힌 일이 벌어질 것 같아도 평온 했는데,
그녀가 그 이야기를 듣다가
통곡의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내,
한 평생 살아오면서
나를 위해 이처럼 아프게 운 눈물을 들어 본 적 있었던가!
내 아픔을 곁에서 맑은 눈물로 쏟아내던 이 있었던가,
그녀가 그날 전화 속에서
터뜨린 눈물,
천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아, 천사의 눈물이었던 것을.
( 2020. 8. 23. )
전설의 시대.1
- 행복 보고서
팔베개에 그녀가 있다
삶의 고단한 부분 여기쯤에서
만나는 경이로운 얼굴
작은 미소는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는 걸 알았다.
팔베개에 그녀의 마음이 있었다.
고독한 길 저기쯤에서부터
짙어지던 녹색의 숨결
살며시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녀는 가장 소중한 평화가 되어 다가왔다.
나는 지금 행복보고서를 쓴다.
내 팔에 드리워진 검은 머리카락, 하얀 목, 두근거리는 숨결…
그녀의 치아에서 뿜어내는 뜨겁고 하얀 언어들…
내 인생의 여백에
빛나는 삶이 된 그녀, 이 모두를 보고서에 쓰고 있다.
전설의 시대.2
- 우리들의 포옹
가슴을 맞댄다는 것은
마음을 가까이 대는 것
두 손으로 서로를 안는다는 건
두근거림을 사랑으로 듣는다는 것
이럴 땐 아픔마저도
찬란하여라
어쩔거나,
이제 이별은
그리움을 남겨놓으려 하는데,
눈감은 그대 이마 위에
그윽하게 새겨지는
빙점
사는 건 늘 허망하다해도
사는 게 늘 미혹된 것이라 해도
나는 네게로, 너는 내게로
오늘, 이 순간만은
온전한 기쁨이 되었네.
2023년 12월 . 한울림문학 제18집
남진원 작품
허깨비 짓
내가 하는 글 짓거리, 허깨비짓,
그런들 어떠리 저런들 또 어떠리
여기에 즐거움이 있으면 그만 인 것
세월 탓인가
세월 탓인가,
고요하게 사는 게 편하니 말이다
방에서 글 쓰다가 텃밭에 풀도 뽑고
빨래하고
서성거리다가 밭일도 하다가 …
다시 방에 들어와 조용히 숨 쉬며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이제는 이 재미가 최고다.
도인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요즘도 가끔 도인 흉내를 낸다
앉아 있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꽤 그럴듯해 보일 거다.
라디오도 꺼져 있고 TV도 켜지 않은 채다
분주하게 울리던 휴대폰도 어디 뒀는지 자취 없다
그런데
이 생각 저 생각 …
불안만 만근이다.
그러니 버러지 같은 중생일 뿐인데
도인처럼 흉내나 내며
지내고 있다.
老翁
비
내리는
들깨 밭
한 가운데
우산 쓴
늙은이
한
옆에
풀처럼 쌓이는
고요 더미
인간 이외에는
식물은 모두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안다
경이로워라, 무념의 법으로 살다가 스스럼없이 죽어가는 것들아
인간 이외에는 모두가 붓다였구나
나이 탓이겠지
사람 만나기가 서툴다
나이 탓이겟지,
쓰잘데기 없는 말을 끈처럼 길게 늘어놓는 사람과 만나면 얼마나 피곤하던가
숲속의 나뭇잎 냄새를 맡거나
그냥 조용히 앉아 있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다는 걸
늙어가니 알 것 같다.
풀
언제 이리 자랐나
며칠 사이에 껑충 자랐다
뽑아도 뽑아도
어디 숨어 있었는지
또 솟아 푸르르다
이 강인한
현장감
내가 배워야 할
스승이다.
폭염
활활 타는 듯
무쇠라도 녹일 것 같더니
저녁 6시
폭염도
어쩔 수 없구나
맹렬하던 기세는
다 어디로 가고
한껏 풀 죽어 저물어가네
사는 이치가 이 같구나
나무에게 묻다
나무야 나무야 이 많은 파란 잎을 어디다 숨겨 놓았다가 꺼내놓은 거니?
나무야 나무야 요, 꽃잎들은 어디서 또 만들어낸 거나 몰라
맑은 산소 주머니는 어디에 또 숨겨놓았는지 알려 주겠니?
고민 많은 사람들은 너를 찾아와서야 미소 짓다가 간단다. 힘든 노인네는 편안히 쉬다가 가고 병든 사람은 네 곁에 머물러 지내면서 병도 고친다고 하네
어느 날 네 향기를 맡은 내가 무슨 다짐을 하며 돌아가는지 아니? 이렇게 다짐하면서 돌아간단다
나도 사람 향기 내며 한번 살아봐야지.
볼품없어져 가니
젊은 날
향기에 취해
허둥대기 얼마였던가
나이 들어
볼품없어져 가니 외려 좋아라
그렁저렁
주위의 무심한 것들이랑
가까워진다
편안함을 주니
이리 좋을 수 없다.
늙는다는 게 복이구나.
거울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에
전에는 없던
웬 낯선 노인이
내 대신 들어앉아 있다.
서랍을 정리하다가
중요하다고 여겼던 물건들
이제는
소용없는 것들이다
무심히
쓰레기 봉지에 넣는다
내가 가는 날에도,
오늘처럼
물건이 자연스레 쓰레기 봉지에
담기듯이
간단히
무심히
그렇게 가면
좋겠다.
서재에서
둘러봐도 온 방안이 책으로 가득하다
이 많은 책의 지식 다 알면 그 얼마랴
그러나 다 안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나
마음이 편한 것 말고는 그 어느 지식과 지혜가 더 필요하겠는가 말이다.
아름다운 인생
땀 흘려 일하고 난 휴식 시간에
커피를 마신다
커피를 마신다는 생각만으로도
나를 즐겁게 하는 이 시간
행복이란 이런 것이구나
가을이 되자
코스모스 꽃이 유난히 맑게 피었다
코스모스 꽃을 보러 오라고
그대에게 전화를 걸 생각만 해도
기쁨에 들뜨는 이 마음
행복이란 이런 것이구나
아득한 전설 같은
풀벌레 소리 들리고 …
정녕 아름다운 인생이구나
2023년 한울림문학 원고
[시 창작의 방법]
시, 그냥 써라. 행복해지도록!
시를 쓰는 행위, 내 인생의 행복
70여 년 살아온 세월. 돌이켜보면 무상한 세월이다. 허나 그래도, 나는 내가 선택한 시 쓰기를 생각할 때에는 나에게 스스로 고마워한다. 글을 쓰는 행위는 내가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생명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내가 쓴 작품을 읽고 남들이 ‘잘 썼다, 못 썼다’ 한들 내게는 의미 없는 일들이다.
그리고 ‘잘 썼다 못 썼다’, ‘그 게 시 작품이냐’ 주위에 본인이 아끼는 그저 무난한 몇 시인을 대단한 듯 치켜세우며 ‘좀 봐라’ 하고 떠들어대는 부류들을 통렬히 경멸한다. 글을 대하는 격이 떨어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부류는 글을 깊이 모르거나 글에 대한 전문 지식이 얕은 자들이다. 무예를 조금 배워 아는 자들이 고수라도 되는 듯이, 칼 하나를 둘러메고 돌아치는 ‘망나니의 도법’과 같은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임자를 바로 만나 온전히 깨져봐야 안다. 그리고 또 몇 수십 년, 피나는 검술 연마를 했을 때에야 그는 다른 사람의 검법에 대해 ‘잘 한다 못 한다’라고 말하는 입을 스스로 옭아맬 것이다.
종교나 철학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한 수도자가 나를 찾아왔다. 자신이 믿는 종교의 팜플렛을 손에 들고 있었다. 내게 그 팜플렛을 건네려고 할 때에 말했다. “아무 소용 없는 일이라오. 나는 그 서류를 보지 않는다오. 오히려 버려질 물건이 되기 쉬우니 필요한 이에게 주시오.”
이 세상에 종교나 철학이 없기에 사람들이 갈팡질팡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옛날보다 더 많은 지식과 종교 철학이 어지러울 정도로 많다. 올바른 지식이 무엇인지, 지혜가 왜 중요한지는 목사나 스님, 철학가들이 늘 떠들어댄다. 간혹 자신의 대단함을 과시하기 위해, 남에 대한 비방을 늘어놓기도 한다. 남을 비방하는 자의 이야기를 듣지 말라. 그자는 분명 다른 곳에서 당신의 비방도 늘어놓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잘 변화되지 않는다. 왜일까? 이웃은 죽거나 말거나 자신의 욕심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욕심과 이기심은 종교와 철학을 초월한 듯, 무가치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들의 정신이 초월된 것은 아니다. ‘전쟁터에서 무 신앙자는 없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그냥 착하게 참다운 이치를 따라 실천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문학 역시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꾸준히 읽고 쓰면 본인 스스로 행복해질 것이다. 시 창작의 방법 따로 있지 않다. 시, 그냥 써라. 행복해지도록! 어느 날 그대 스스로 그대에게서 위대한 작가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종교이면서 시가 될 것이다.
즉 진리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즘은 사랑도 돈 앞에서는 무력無力화 되어가는 생각도 든다. 돈을 앞에 내세우고 하는, 그런 비루한 사랑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옛 사람들의 깊은 정이 밴 사랑이야기를 보게 될 때마다 감동에 젖는다.
6세기 말엽 중국의 남북조 시대. 북주의 승상 양견은 어린 황제 정제(靜帝)를 죽이고 스스로 황위에 올라 수나라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남조(南朝)의 최후 왕조인 진(陳)나라를 공격하였다. 진나라 황제인 후주(後主) 진숙보는 나라는 돌보지 않고 주색에만 골몰하던 때였다. 그러니 수나라에 의해 진나라가 멸망할 때였다.
진나라 태자의 사인(舍人)이었던 서덕언(徐德言)! 그에게는 사랑하는 미모의 아내가 있었다. 바로 진나라 황제 진숙보의 누이동생인 낙창공주였다.
어느 날, 수나라 대군이 왕궁으로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나라가 망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서덕언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아내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당시는 전쟁에 지면 망국의 여인들은 점령군의 여인이 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서덕언은 수나라 대군이 도성 가까이 오자 아내를 불렀다.
“이제 나라가 멸망의 지경에 이르렀소. 나라가 망하니 당신이 무사하지 못할까 걱정이오. 적의 눈에 띄면 어느 장수의 집으로 갈지 모르겠구려. 다시 만나기 어렵겠지만 만일을 위해 이 거울을 둘로 쪼개어 간직합시다. 그리고 내년 정월 보름날 도성의 시장에 내다 팔도록 하시오. 만일 살아있게 되면 그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도성의 시장으로 찾아갈 것이오. 내 말 알겠소?”
이렇게 서로 굳게 다짐을 한 두 사람은 각각 깨어진 거울 한쪽씩을 간직하고 헤어졌다.
이윽고 진나라는 수나라에게 망했다. 서덕언의 아내는 붙잡혀서 수나라의 중신(重臣) 양소(楊素)의 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로 양소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몰래 반쪽 거울을 꺼내어보며 항상 남편을 그리워했다.
한 편, 서덕언은 난리 속에 겨우 몸만 빠져나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집 저집 밥을 걸식하며 숨어 지냈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고생을 참아가며 도성에 들어왔다.
보름날이 되자, 도성에는 한 사내가 깨어진 거울을 손에 높이 들어, 팔고 있었다. 깨어진 거울 한 쪽을 비싼 값으로 파려고 하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고 모두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었다. 서덕언은 그 사내를 불러 몰래 외진 곳으로 가서 사연을 물어보고 자신의 거울과 맞추어 보았다. 딱 맞았다. 낙창공주가 보낸 사람이었음을 알았다. 그는 거울을 보며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맞추어진 거울의 뒷면에 그리움의 시를 적어 다시 그 사내에게 주어 돌려보냈다.
破鏡(파경)
鏡與人俱去 경여인구거
거울은 사람과 함께 가더니
鏡歸人未歸 경귀인미귀
거울만 돌아오고 사람은 돌아오지 않네
無復姮娥影 무부항아영
항아의 그림자는 다시 만나기 어렵고
空留明月輝 공유명월휘
밝은 달만 헛되이 비추는구나.
낙창공주의 하인인 사내는 서덕언의 시가 써 있는 거울 두 쪽을 가지고 낙창공주에게 갖다 주었다. 서덕언의 아내도 깨어진 거울을 맞추어 보니 똑 맞았다. 그리운 남편이 돌아온 듯 반갑고 설움에 목이 메었다. 서덕언의 시를 보며 눈물을 주루룩 주루룩 흘렸다.
그날 이후 서덕언의 아내는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양소는 두 사람의 깊은 애정에 감동받아 서덕언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 둘에게 후한 재물을 주어 평생토록 잘 살 수 있도록 하였다. 두 사람은 강남땅으로 내려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 일로, 이별한 부부가 다시 만나는 것을 파경중원(破鏡重圓)이라 하였다. 이 이야기는 중국의 설화집인 태평광기(太平廣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사를 쓰든, 농사를 짓든, 노동을 하든, 사랑을 하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의무요 권리가 아니겠는가. 나는 말한다. 시를 쓰는 행위, 내 인생의 행복이라고….
한울림문학 시 원고 10편 // 남진원
내 인생의 행복
남진원
나이 들어 행복은 딴 게 아니다
그저 소소한 것들, 그게 다 행복이지
저녁 간단히 먹고 편히 잠들 수 있으면 그건 큰 행복이다
49년의 문학 생활에서 내가 진짜 좋아하는
몇 편의 시들이 있어서
그게 내 인생 최대의 행복이란 걸 알았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시들이 시경이지
이제 분명히 알 것 같다
몇 편의 시들이 있어서
내 인생을 이렇게 행복으로 이끌어가는구나.
( * 2017. 2. 27. ‘몇편의 시들이 있어서’의 시를 2023. 11. 27 ‘내 인생의 행복’으로 바꾸고 추고하다)
저녁 들길
남진원
저녁 들길은 보기만해도 평화롭다
반가움이,
부끄러움 같은
날의
저녁
들길
하루 동안
법석대던 것들이
가라앉아
조용한 휴식이 된다
내 마음 한 켠에서
움 돋는
작은 기다림
따스한 저녁 햇살이
함께 기대고 섰다
(1981년 ‘물레문학’ 창간호에 실린 ‘저녁 들길에 서면’의 시를 2023. 11. 27. 개작)
온화한 活力
남진원
雨水지나고 나니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이 새롭다
봄 채비를 하는 나무들이
조용해 보여도 다부지고
뿌리들은 얼마나 바쁠까
휘어지는 능선 마냥
가벼운 듯해도
산은 莊重하고
조선 검의 洗法같이
허공을 빗겨 날아오르는
새 떼들의 무리
삶이란 저런 것이어야 하는구나
온화한 活力
풍경이,
움직이는 수채화처럼
빛난다.
( 제목 ‘우수 지나고’를 ‘온화한 활력’으로 고침. 2023. 11. 27.)
다시 설날 전야에
남진원
예순다섯 번째 맞이하는 설날이다
아내가 만두를 빚고 제사상 차림을 하느라
꼬박 하루를 보냈지
아내가 만두를 빚는 동안에는
월대산을 오르는 발걸음에 신바람이 났지
이제
방안 이곳저곳 눈을 둘러봐도
아이들도 애들 엄마도 없다
그렇게 부지런히 싸웠어도
미운 생각은 하나도 나지 않고
그리움 뿐이다.
금방이라도 주방에서 도마질 소리 들려올 듯한데
사진 속에서만 아이들과 함께 웃는구나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다.
속절없어라,
그대와 함께한 36년의 세월이 번갯불처럼 흘러갔구나.
(2023. 11. 27. 수정)
내 마음의 柱聯
남진원
눈비 내리고
폭풍우 치던 날
몇 날이었던가
살가죽은 소금처럼 아픔에 절여지고
내 마음의 주련
낡은 高閣처럼 색바랜 세월이었구나
그대와 우리,
인생의 살가운 부분들은 어디 숨었나?
돌아보니
꼬집어도 감각 없는 긴 시간 속에 있었네
간 못 맞추고 짙어지기만 했던
내 삶의 영혼을 되짚어보다가
허세의 검은 머리카락 대신
은발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다시 바라보는
산과 하늘, 그리고 사람들
이제는 미움도 아픔도 비애도 절망도
사랑임에랴,
삶은 신비의 바다였구나, 모두가 아름다워라.
아름다움의 의미
남진원
세상살이가
더러는 시름에 겨워
잠들다 깨다가
하거니
때로는 울컥 토해내고도 싶고
가다가
털썩 주저앉아 울고도 싶지만
슬퍼하지 마라
인생은
한그루
나무 옹이 같은 것
가슴에 옹이를 쓰다듬으며
세월 속에 흔들리며
가는 거라네
그렇게 흐르며 가는 거라네
아름답지 않은가
평범한 미소의 시간들
남진원
삶이 무엇인가
때로는 그저,
흐르는 물의 한 부분이었구나
어느 날은 그저,
떠도는 시간의 한 조각이었구나
흐르다가 氣化하고 머물다가 風化하는 …
요란하려고 발버둥쳤던 내 인생의 살과 뼈들의
무게를 바라본다.
미련 때문에, 집착 때문에, 애증 때문에
버리지 못했던
허망과 탐욕, 이 허접한 것들
안쓰러워서 애처로와서, 그렇기에 이들이 진짜 사랑스러워서
고마움이여!
내 하루하루는 이제,
이들을 껴안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미소의 시간들이구나.
하나로 4층 창가에서
남진원
하나로 4층 식당 창가에서
밥을 먹다가 창밖을 보면 남대천이 내려다보인다
넘실대며 흘러가는 강물
강물 위로 떠가는 대관령 풋풋한 바람
바람결에 떠도는
시고 텁텁한 風聞들
하나로 4층 창가에서 보면
고층 아파트, 쉼 없이 오가는 자동차 물결
다리 건너 멀뚱멀뚱 선 교회
모두 내려다보인다
70 평생 살면서 쳐다보기만 하다가,
이곳에 오면
세상 한쪽을
마음 턱 놓고 내려다본다.
한 잔의 커피
남진원
한 잔의 커피를
마주하면
내 고독의 사간이 용해됩니다
한 잔의 커피와 마주 하면
무채색의 고요로움과
내밀을 꿈꾸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맛난 삶이야 없어도
무상의 기쁨이 만드는
이 따뜻함
한 잔의 커피를
마주하면
씁쓸한 향기가 좋아
수묵화 같은
사랑 하나 띄웁니다.
달력을 넘기며
남진원
달력 한 장을
마저 넘기니
마지막 잎새처럼
매달린 12월
한 해가 또 다 가는구나
해마다
보람보다는
아쉬움이 크다
달력 한 장을 뜯어내지 않는다고
시간이
그대로 붙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넘기고 싶지 않다
몇 남은 숫자를 짚어가다가
눈을 감으니
회한과 반성, 그리움으로
다가서는 사물과 사람들
모두가 따뜻해진다.
[詩作 餘滴]
49년의 문학 활동 중에 내 마음에 드는 10편의 시편들을 골라 보았다. 대부분 전에 쓴 작품들을 다시 손 보았다.
이 시들이 있으니 어찌, 최고의 부자가 아니랴!
살면서 삶에 묻어나는 편린과 생각들을 정리하고 이제 그들을 내 영혼과 살을 섞어 한 편의 시, 시로 엮었으니 나와 시들이 바로 不二구나.
2024년 한울림문집 제19집
목차
인사말 – 함경숙 회장
특집 – 초대 시인 공계열 외.
작고문인 – 황명남
[회원 작품]
권오선 – 고래책방 . 김옥경 – 감사한 마음 외.
박용희 – TV 인간극장을 보고 외.
서용숙 – 갈매기의 꿈 외. 신정규 – 70년 외
유지숙 – 방전되지 않기 외. 이지애 – 심장꽃 외.
임춘자 – 봄 외. 주대중 – 라이프 파라다이스 외.
최혜리 - 時時한 저녁 외. 한재성 – 가을 여행 외.
함경순 – 무서운 치매 외.
남진원 – 지나온 길 아련한 그리움입니다 외.
2024한울림문학 시원고
남진원
지나온 길,아련한 그리움입니다
남진원
돌아보니 어느새 흘러온70여 년의 세월
참 많이도 걸어온 걸 알았습니다
너그러움과 속 좁음,번뇌와 평온,기쁨과 슬픔의 행간에 스며있는
고마움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요,감사함 뿐이었습니다
온통 따스한,당신의 모습 뿐이었습니다
어느 하나 기적이 아닌 일상이 없었습니다
고요히
머리 숙일 뿐이었습니다.
어느새 이리 흘러온70여 년의 세월
지나온 길,
모두가 아련한 그리움입니다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사랑이었습니다
허공처럼 지낸다오
남진원
지난 밤 창문을 여니
작은 아기 이처럼
빛나는 별들이 있어
세상은 구부러져도 아직 살만한 가 보다
바람 부는 들길에 나가니 코스모스가 예쁘다
길옆에 흐르는 물소리는 또 얼마나 맑은지…,
이럴 때 누군가 묻는 말
요즘 어찌 지내오?
그러자,
가을날 오후가 내 대신 햇볕을 가르킨다
골짜기 물속 물방개와 가재를 비추던 햇볕
같은,
가을날 오후의 햇볕을 말이다
이날,
햇볕 옆에 둥둥 떠가는 구름 한 덩이를 보았다
흰색 허름한 바지 저고리를 입고
허공처럼 앉아있는
노인의 모습이었지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은 졸다가 깨다가 하는 한 채의 구름 같은 것이지요
그저 졸다가 깨다가 하는…
또,덧붙여 말했다오
요즘 저렇게,
허공처럼 지낸다오
고요한 평화
남진원
가을이다
들끓던 여름이 떠난 자리에
반가운 손님처럼
가을이 들어섰다
잠자리 날아다니고
작고 아름다운 풀벌레
귀뚜라미 소리의 음률…
방터골
아늑한 집 주위로
기쁨이 조금씩 삐어져 나온다
풀과 나무들
고요한 평화가 되어
작은 우주를 돌보고 있다
귀여운 그 내면이,
밀회하는 듯 하면서도 장엄한
모습이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남겨 두자
남진원
사람들아,
너로 인해 또,나로 인해
살면서 서로의 가슴 속에 상처 낸 자국이
얼마이더냐
한순간의 분노도 참지 못하여 큰 후회가 된 일들을
보아 왔음이니,
오늘 가을 앞에
고개 숙임을,
머리 숙임을,
무겁게 휘어진 알찬 벼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 곳간에 들어있는 죄로써 얻은 부끄러움의 무게는 더 무거운데,
이런 가운데서도
진실함의 흔적은
숨겨진 보석 같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놀라워라
사랑의 흔적이
숨겨진 은혜 같이 존재하고 있었다니
이 가을에
지나온 길은 더러 서러울지라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게 남겨 두자
지나온 길은 더러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리운 것들은 오롯이 그리워할 수 있게 남겨 두자
그래,
상처도 더러는 아름다운 것이지
아름다운 상처도
홀로 눈물처럼 빛나게 남겨 두자
사는 일,아이 좋아라
남진원
부자가 아니어서 편안하고
귀하지 않아서 자유롭고
영화를 탐하지 않으니 담백한 즐거움이 있네
굳이 높은 깨달음이 무엇에 필요할까
사는 일,
그저 해 뜨면 일하고 해지면 잠 자리애 드는 일인데
이 평범한 생활에서 늘 안온한 기쁨을 만나니
무심하면서도
사는 일,아이 좋아라
초가을
남진원
밤에 잠들기 전
한 쪽 문을 열어둔다
내 잠속에서도‘풀벌레들이
놀러 오게 말이다
요즘,맛있는 꿈을 꾸는 것도
풀벌레들 덕분이다
어디 그 뿐이랴
열린 문밖에서
별들이 들여다보며
정겨운 눈짓을 한다
요즘은
정말,별과 풀벌레로 행복한 날이다.
살맛 나는 일
남진원
버스 칸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밭에 뭘 심었냐고 묻는다
“심지는 않고 키우기만 했어요”
“무엇을 요?”
“풀입니다.”
사람들은 웃지만 나는 진심으로 대답한 것이다.
초가을 풀밭에 나가면
기분이 좋다
메뚜기 여치 풀무치들이
마구 뛰어 다닌다
풀밭을 만들어줘서
반갑다는 인사를 그렇게 하는 모양이다
저들의 모습을 보니
살맛이 났다
코스모스
남진원
집 가에 몇 그루 과일나무 묘목 심듯
코스모스
모종을 하였다
그랬더니,
나도 몰래 가을 초입,
하양 꽃잎을 피웠다
내게 보내는
함빡,
웃음 웃음…
저물녘
가벼운 바람 불어
이리저리 흔들리니
한결 싱그러워진 모습이다
한결 멋진 모습이다
문밖에 얼른 의자를 놓고
앉았다
오래도록
너희를 보고 지내는 게
요즘 내 삶이란다
2024,여름
남진원
최악의 폭염에
초열대야까지…
힘들지만
새벽녘 뒷산 숲을 흔드는
매미소리
그 어느 때보다 힘차고 화려하다
유년의 고향 집 새벽
눈뜰 때 듣던
그 소리의 빛깔보다 더 빛나는
싱싱하고,
쟁쟁한
여름 아침을 물들이는
싱그러움싱그러움싱그러움싱그러움…
폭염에 몸은
힘들고 어려워도
그 어느 여름을 보낸 해보다
기쁘게 맞이하는
행복한 여름이다
밤이면 쏟아부을 듯 빛나는
별들을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뛴다
우리네 삶,늘
흔들리며 살아도
남진원
흔들리며 사는 일이
어제,오늘의 일이었던가
내 인생은 늘4.8의 지진이 일어났으니
삶의 곳곳이 허기진 채
수차례 여진도 다반사였지
선반의 그릇 흔들리듯 자네도
흔들리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오늘 전북 부안 땅 엉덩이에4.8의 지진이 났을 뿐인데도
전국 곳곳,
비틀
비틀
그래,
정치도 교육도 문화도 곳곳에서
이미 지진 수치4,8도를 넘어
비틀거리고
우리네 삶,늘
흔들리며 살지 않느냐.
세상살이가 무시로
억울함에 취해 울고
더러는 시름에 겨워
잠들다 깨다가 하거니
인생은 나무 옹이 같은 것
가슴에 박힌 옹이를 쓰다듬는 사람들아
슬퍼하지 마라
우리는 완행열차의 흔들림처럼
그렇게 흔들리며 가는 거지만
그렇게 흐르며 가는 거지만
우리네 삶,
흔들리며 살아간다는 게
아름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