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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2:1) "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한편, 또 천상에서 회의가 열렸다. 똑 같은 장면이 펼쳐지면서
신께서 그래도 욥을 사탄에게 자랑하시는 것 같다.
신께서 "그렇게 소유물을 쳤는데도 욥이 신을 원망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지 않느냐?" 이렇게 당당하게 자랑하시는 것
같지만 아직도 참소거리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욥은 자기의 피도 눈물도 없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뉘우치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계속적인 징계 시간인 것이다. 악재가 겹쳤다.
■(욥 2:2)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땅을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 왔나이다"
창조주께서 또 사탄에게 "어디 갔다 왔느냐?" 물으신다.
지난번에 물어보셔서 모하고 왔는지 잘 아시면서 또 물어보시네.
기억력이 없으신가 창조주신은?
사탄은 또 여기저기 땅을 두루 돌아다녔다고 보고 한다.
사탄은 지난번에 잘 알아들으시도록 대답을 해드렸는데
오늘 또 물어보시네? 그래도 물어보시니 대답은 한다.
세 번째 청문회를 열어도 똑 같은 장면이 펼쳐지는 것이다.
매번 회의가 열릴 때마다 똑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이 사탄은 항상 참소거리를 찾아다니는 존재이기 때문에
참소거리를 갖고 창조주의 회의석상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사탄이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다고 해서
김삿갓 방랑기 같이 생각하면 안 된다.
먹이를 향하여 우는 사자같이 돌아다니고 온다.
■(욥 2:3) "신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신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네가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하였어도 그가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켰느니라"
영의세계법으로 이렇게 성경을 쓰셨으니 우리는 헷갈린다.
창조주께서 또 사탄에게 욥을 칭찬하시는 걸로 알게 된다.
"네가 충동질 하여서 내가 까닭 없이 욥을 쳤건만 욥이 입으로
범죄 하지 않고 창조주신을 원망하지 않지 않느냐?
그렇게 정직하고 온전한 자가 세상에 없다!" 하신다.
누구나 이 말씀을 읽으면 당연히 창조주께서는 까닭 없이
사탄의 충동질을 듣고 욥을 치셨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마루타도 그런 마루타가 없는 것이다.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이 말씀은 자녀를 지극히 사랑하는 엄마가 자녀를 때리고
싶지 않지만 자녀의 맞을 수밖에 없는 '잘못'으로 인해
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그 '잘못(죄)' 이란 것이 때리도록 충동질 한다.
영의세계의 모습이다.
이럴 때 육의세계에서는 징계가 임하게 된다.
"사탄(죄)이 충동질 하다"는 영의세계의 모습으로서 우리말로는
"네가 지금 매를 주주하는구나" 라는 뜻이다.
성경에는 "자취(自取)하다"로 되어 있는데 잘하든 잘못하든
자기 스스로 그렇게 되게 만든다는 뜻이다.
"나를 충동하여 까닭 없이 그를 치게" 이 말씀으로 아무 까닭 없이
창조주께서 사람을 치시고 마귀 말만 듣고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절대 아니다.
스가랴 3장에서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참소하는 사탄을 꾸짖으시며
적용시키지를 않으신다. 여기서 사탄을 꾸짖으신다는 것은 잘못된 참소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죽어서 영의세계에 갔을 때는 참소라는
것이 해당이 안 된다.
'참소'는 그 사람이 이 땅에서 살고 있을 때에만 해당된다.
계시록 12장 10절에서도 참소하는 마귀가 쫓겨나간다고 하셨다.
그것은 그 사람은 죽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삶의 값으로 발생됐던
참소라는 영의세계의 존재는 필요없게 된다는 것이다.
욥기에서는 사탄이 창조주를 충동하여서 어쩔 수 없이 욥에게
징계를 내리실 수밖에 없는 창조주로 보였지만 사실은 창조주께서
욥을 혼내시기 위해서 사탄의 참소를 사용하셨고 징계를 명하셨고,
치는 천사가 도구를 가지고 욥의 소유물을 치게 된 것이다.
창조주께서 하신 것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안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나는 너희들에게 그럴 마음이 없다!" "하지만 너희들이
죄를 지어 그 '죄값'이 너를 때려야 한다고 나를 '충동질' 한다!"
라는 것이다.
욥기에서는 영의세계 재판의 모습을 자세하게 표현해 주셨을 뿐이다.
창조주께서 재판을 하시는데 변호사격으로 칭찬도 하시고 검사격으로
참소(죄)를 사용하시는 모습이다.
그 죄는 그 칭찬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다.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혼내시기 위해서 다윗 왕에게 실수하도록
하시는데 사탄이 다윗 왕에게 '자랑'을 충동질하는 것으로 쓰임 받는
것을 본다(사무엘하 24:1 / 역대상 21:1).
사탄이 일방적으로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없다.
오직 창조주신의 명령에 의해 움직인다.
■(욥 2:4) "사탄이 주께 대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의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이번 판결은 욥의 몸을 치는 것이다.
욥의 몸을 치면 욥은 자기 몸을 낫게 하기 위해 온 갖 약을
다 찾아보는데 자기 소유물을 쓸 것이다.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고 이것도 발라보고
저것도 발라보고 어디가 좋다하면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신께서는 욥이 아직 그렇게 온전하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자기 몸은
아직 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신다. 욥의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
소유물만 없어졌을 뿐, 그 소유물은 또 다시 생산하면 되는 것이다.
아직 욥의 왕 같은 품위는 떨어지지 않았다.
욥이 몸으로 누렸던 잘못된 영광과 잘못된 권세의 징계 값이
아직 남아있었던 것이다.
주께서는 불의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에 사탄의 불의한 참소도 없다.
인간이 마루타냐? 창조주께서는 사탄의 말에 꼼짝을 못하시나?
사탄이 말하면 무조건 옳다 하시나? 그렇다.
꼼짝 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그 참소를 창조주 뜻으로 하고
다니는 것이라서 다 옳은 것이다.
참소하는 마귀는 그렇게 사람이 잘못하는 것을 꼬집어서
신께 고하는데 신의 전지전능하신 만큼 퍼펙트하게 합당한
것을 참소한다.
이 부분도 사탄이라는 존재가 따로 있어서 각 개인의 죄를
찾아서 적었다가, 아니면 기억했다가 신께 브리핑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각 개인이 살면서 '죄 값'으로 계산되어
형성된 영체일 뿐이다.
영의세계는 어떤 느낌이든 단어든 형상으로 존재하고
그영체가 스스로 무언가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나는 죄가 없는데 사탄은 나쁜 존재라서
창조주 앞에 나를 나쁘게 만들고 벌을 받게 만든다고 그렇게
교육까지 받아왔는데 "절대로 아니다".
사람의 심장과 폐부를 살피시는 신께서는 그 사람이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나보다 더 잘 아신다.
내가 잘했는데, 나는 아무 죄가 없는데 사탄의 말만 듣고
나를 징계하셨다면 그 신은 사람만도 못한 신이다.
사탄만도 못한 신이다. 뇌물을 받고 징계를 거두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는 멍청한 신이다.
착하고 아무생각 없었던 하와에게, 창조주와도 견줄 수 있는 거대한
사탄 이라는 존재가 어떤 뱀 가죽을 빌려 입고 와서 '선악과'를 먹으라고
꼬드겨서 먹게 한 후, 창조주께서 만드신 인간 이라는 존재도 별거
아니라고, 내가 이렇게 선악과를 먹게 성공시켰다고 자랑하면서
저 인간들은 내 것이라고 창조주께 대항한 것인가?
"절대로 아니다"
욥의 잘못된 삶으로 인해 징계가 온 것이다.
욥이 몰랐었던 것이고 우리도 모를 뿐이다.
■(욥 2:5)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남이 아픈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자식이 아프면 그래도 보통 부모는
차라리 내가 아프자, 차라리 내가 죽자 하지만 그 정도의 부모라면
자식을 끔찍히 사랑하는 부모다.
그 정도의 부모라면 자식이 10명이 한꺼번에 죽으면 미쳐버리든지
자살을 하던지 우울증 걸려 식음을 전폐하다 죽든지 할 것이다.
그러나 욥은 10명의 자녀를 보내고도 강건하게 살 던 사람이다.
하지만 자기의 몸이 직접적으로 아플 때는 모든 상황이 달라진다.
내가 무슨 죄가 있나, 나만 죄가 있나, 저 사람들은 죄가 없나,
내가 태어나고 싶다고 했나 왜 나를 낳았나, 죽고 싶다 등
모든 푸념을 하고 불평을 하게 된다.
갑자기 사고 나서 죽든지 인사불성으로 있다가 죽든지 하면
그나마 이런 불평을 할 시간이 없다.
하지만 죽지도 않고 장기적으로 계속 되면서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다면 누구든 이런 푸념과 불평을 할 것이다.
(계시록 9:5~6) "그러나 그들을 죽이지는 못하게 하시고
다섯달 동안 괴롭게만 하게 하시는데 그 괴롭게 함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에 괴롭게 함과 같더라,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저희를
피하리로다"
이런 판결을 받은 것과 같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 버리는 때가 많다.
성경은 중요하지 않은데 넣은 말씀이 없다. "어디로 갔다" "무엇을
어떻게 했다" 하는 평범한 것 같은 저런 말씀은 무엇하러 써놓으셨을까?
우리가 이해를 못할 뿐이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받으셨다고 하시는 공관복음의
말씀에서 "성령에 이끌리어" 라는 말씀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리고, 사탄의 뜻대로 사탄의 생각대로 사탄의 판단대로 사탄의
규정대로 막가파식 시험을 받으시고 성령님은 그냥 예수님을 이리
데리고 가시고 저리 데리고 가시고 하셨다로만 읽는다. 아니다.
그 사탄의 시험거리들이 모두 성령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성령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탄이 쓰임 받은 것이고.
사탄이 창조주의 손을 펴서 욥의 건강에 징계를 내리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지만 이것은 창조주의 뜻, 창조주의 판결문 이다.
창조주의 펴신 손 만큼 혼나는 것이다.
욥의 몸에 징계를 내려라.
잘 못된 왕 같은 품위를 떨어뜨려 버려라!.
"주의 손을 펴서" 라는 것은 그냥 창조주께서 "네 이놈" 하고 손만
들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께서 손을 펴셔 욥을 때렸다는 것이다.
'주의 손을 펴서'가 얼마큼 펴신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모습 그대로가
징계의 모습과 강도와 재판의 결과라는 것이고 그것이 육의세계에서는
참변으로 우환질고로 아비규환으로 전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사야 10:4).
'욥기' 에서는 영의세계에서 그렇게 창조주께서 재판도 하시고,
검사가 반론도 제기하고 검찰이나 경찰이 죄인을 처벌하러 가는
절차도 밟으시는 것처럼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지만, 육의세계에서
보면 그냥 어느 날 뜬금없이 사건이 막 벌어지는 것이다.
어느 날 교통사고도 나고, 건강검진을 아무 생각 없이 받았는데
암 말기라든지, 폭풍이나 해일이 일어나고, 태풍이 몰아쳐 오고,
대형우박이 떨어지고, 화산이 터지고, 전쟁이 터지고, 홍수가 나거나
가뭄이 들든지, 대형사고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던지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것을 '자연재해' 라고 부른다.
우리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뿐이다.
욥도 몰랐던 것처럼.
사탄이 신께 말하기를 그의 소유를 치면 신을 욕하지 않겠냐고 한다.
그런데 이때는 ‘주신이도 신이시요 가져가시는 이도 신이시요’ 하고
입으로 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재산이야 또 사업으로 불어나면 되는 것이고
자녀야 또 낳으면 되는 것이고,
종들이야 또 사오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나.
하지만 일단 종기로 온몸을 두들겨 맞고 제 몸이 죽을 만큼 아프니까
그때서야 신을 간접적으로 원망하면서 욕을 돌린다.
죄도 없는 나를 때리시니 기쁘시냐?
까닭 없이 나를 왜 때리시냐?
나는 죄도 없는데 창조주신이 절대적으로 잘못하신 것이다.
내가 뭐라고 말한들 들으시겠냐? 무작정 왜 때리시냐?
신이 화살을 쏘시고 나는 그 독을 마셨다.
신이 빼앗겠다시는데 내가 어쩔 것이냐?
내가 아무리 의로워도 신은 나를 때리실 것이다.
힘세고 강하신 신께서 나를 심판하시겠다는데 내가 어쩔 것이냐?
신은 온전한 자나 악한 자나 똑 같이 멸망시키신다.
신이 어그러진 재판을 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바르게 살고 삶을 고쳐먹는다 해도 나를 계속 때리실 것이다.
신께서 지으셨다고 마음대로 부수시냐?
강도의 장막이 형통하고 신을 진노하게 하는 자들이 오히려 평안 하구나
그들에게는 신이 후히 주셨구나 해가면서 원망하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내 몸이 아프기 전에야 고통이 직접적이지를 않으니 상관이 없다.
그 동안은 간접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제 몸에 직접적으로 고통이 오니, 그것도 곧 죽게 생겼는데
몇 달을 이것 저것 다 먹어보고 다 발라보고 천리길 만리길도 마다않고
좋다는데 다 가보고 치료도 해봤지만 치유도 안 되고 죽고 싶을 만큼
아프고 세월만 가고 있으니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게 된다.
■(욥 2:6)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맡기노라
다만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창조주께서 사탄에게 욥의 몸에 대한 징계의 판결을 하시면서 목숨은
살려주라고 하신다. 이런 영의세계의 판결에 의해 사람이 다치기도 하고,
병에 걸리기도 하고, 사고도 나고, 일도 안 되고, 실직도 당하기도 하고,
입사가 되기도 하고, 구조조정이 되기도 하고, 사업이 번창 하거나
망하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는 것이다.
욥은 몸의 고통까지 있지만 죽지는 않는다는 것.
■(욥 2:7) "사탄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한지라"
한국 역사에도 보면 왕들이 거의 걸렸던 병 중에 하나가 종기다.
잘못된 권위를 휘두를때 걸리는 병인 것인지.
본래 창조주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사람을 너무 너무 사랑하시는데 불순종 한 사람들을 그냥
둘 수는 없으시고,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창조주의 말씀을
안 들은 사람들을 '인생' 이라는 시스템을 통해서 죽이셔야 했고,
인생이라는 시스템 속에서도 말을 안 들으니 매는 드셔야겠고,
거기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루게 하시는데 중간매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입장에서 볼 때 좋은 일에는 천군 천사가 쓰임 받고
있다고 알고 있고, 나쁜 일에는 마귀들이 쓰임 받고 있다고 알고
있고, '징계' 라는 것이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나쁜 일' 이라는
것인데, 징계를 집행하는 존재가 마귀로 보이는 것이고 나쁜 일
자체가 마귀로 보이는 것이다.
쓰나미로 인해 거대한 해일이 일때 누군가 그 뒷편에 있는
마귀의 형상을 볼 수도 있다. 그래서 그 해일은 마귀가
일으켜서 인간들을 죽이는 것이라고 떠들 수도 있다.
하지만 창조주 신이 손을 펴서 때리시는 무서운 모습일
뿐이다.
창조주의 기본적인 몸에 대한 징계가 종기인가보다.
대부분 피부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본다.
그런데 이 종기는 고름이 조금 나오는 우리가 알고 있는
종기가 아니라, 계속 가려워서 긁어야 하는 피부병인 것이다.
얼마나 심한지 욥인지 못 알아볼 정도이다.
지금의 아토피인 것인지. 긁을수록 가려운 무좀균인지.
■(욥 2:8)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이스라엘 민족이 회개할 때는 재 가운데 앉아서
티끌을 머리로 날리고 머리를 밀고 베옷을 입고가
기본적인 것 같다.
이것을 글로 써서 그렇지 땅바닥에 앉아서 땅을 긁고
흙을 흩뿌리고 머리를 쓸어올려 쥐고 뜯고의 모습이다.
욥은 이스라엘 사람도 아닌데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다. 땅바닥에 앉아서 긁고 있었을
것이다. 손으로 되지 않을 정도이니.
'재' 라고 하면 우리는 무언가를 태우고 남은 찌꺼기를
연상할 수 있지만 그냥 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때는 아스팔트가 아니라 흙 위에서 살았기 때문에.
(요나 3:6)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스가랴 3:2 후반절)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하실 때에"
성경에는 흙에 앉아서 흙을 날리는 것을 ‘재’라고 표현하신다.
이 ‘재’ 라는 것은 무언가를 태우고 남은 것을 말하는데 매일
무엇을 태우고 나서 그 위에 앉아서 괴로워하고 그 재 가루를
날리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의 세계는 완전 퍼펙트한 자동의 세계인데, 그 세계에
비해 이 육신의 세계는 무언가를 매일 만들어서 먹어야 하고
무언가를 만들어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씻어야 하고 닦아야
하고 일을 해야 하고 하는 수동적인 삶이나, 형벌을 받고 있는
삶이기 때문에 창조주께서 영의세계에서 보시는 관점에서는
이 땅의 모습을 불로 태우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재.
■(욥기 5:7)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그냥 놀기 위해서 편하게 앉아있는 것은 땅이나 흙이라고
하시고, 회개를 하기 위함이나, 괴로운 일을 당했을 때 땅에 앉아
있는 것은 '재' 위애, '재' 가운데 있다고 표현하신다.
육의세계에서 볼 때는 ‘흙’ 위에 앉아 있는 것인데,
영의세계에서 볼 때는 ‘재’ 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욥 2:9)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창조주신을 욕하고 죽으라"
그런데 욥의 아내가, 신을 원망하지 않으려고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욥에게 "너의 신을 욕하고 죽어라" 라고 한다.
이 말씀만 읽고 욥의 아내는 악처인가보다 하면 안 된다.
욥이 그렇게 혼나게 된 것이 시간이 많이 흐른 것도 아닌데 벌써
욥의 아내가 욥에게 진력이 났나? 할지 모르지만 욥의 그 동안의
남편으로서 행실이 못됐던 것이다.
아내에 대한 어떤 사랑도 없고 자녀에 대한 어떤 사랑도 없이
신께만 철두철미 하려고 제사를 드리고 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아내는 오히려 신을 싫어하게 됐으며 제사를 싫어하게
됐으며 남편까지 싫어하게 됐다.
■(욥 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창조주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 하지 아니 하니라"
“이 어리석은 여자여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인 것 같지만,
현대판으로 보자면 “이 생각도 없는 멍청한 여편네가 무슨 막말을
그렇게 해!” 라는 말투인 것이다.
욥이 욕도 안하고 소리도 안 지르고 화도 안내고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가 않다. 엘리바스 어른도 분노하지 말라고
충고하고, 엘리후도 분노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욥은 그동안 화를 잘 내고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나의 온 몸이 가려워 손으로도 안 되고 기왓장으로 벅벅
긁고 있는데 그것도 시원하지 않아 성질나 죽겠는데 신을
욕하고 죽으라고 아내가 소리 지르니, 욥의 입에서 말이 곱게
나갔을 리가 없다.
어떻게 그 무서우신 신을 욕하고 죽으라고 할 수가 있냐?
그것은 그냥 남편이 꼴도 보기 싫다는 것이다.
욥의 아내가 신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제사를 지냈겠나?
무서운 남편이 신을 두려워 하면서 드리라고 하니 드렸지.
정말 신을 알고 신이 두려운 줄 알면 아무리 남편이 미워도
남편만 욕하지 신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토록 신을 잘 섬긴다고 제사를 금쪽같이 드렸는데
니 몸의 고통은 뭐냐? 그런 신은 섬기지도 말라는 뜻이다.
욥은 이때도 입술로 신을 원망하는 죄를 범하지는 않았다.
아직 덜 아프다. 아픈 시간이 오래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까지 아프다가 말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직은 절망스런
말을 하지 않았다. 돈도 많았으니 온갖 약도 써보고 주치의도 불렀을
것이다.
신께서 치시는 질병 중에 약으로 치료 가능한 징계가 있고,
약으로도 치료가 안되는 희귀병이 있는데 지금도 이름도
알 수 없는 그런 휘귀병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누구는 때리시고 싸매시고의 법칙을 쓰시지만
누구는 때리시고 싸매시지 않는 법칙을 쓰신다.
그 때 당시도 이 종기는 약으로도 치료가 안 되는 희귀병인 것이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을 먹고 산다는 말이 있는데, 욥이 그렇게 거부였는데
당장 한 푼도 없이 망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 현재 자기가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하는 기독교인이라고 착각을
하는 상태에서, 그 인물에 대해 올바르지 않게 판단하고 정죄하는
오산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욥의 아내에게처럼.
■(욥 2: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지금이야 전화도 있고 하니 연락을 빨리 취할 수가 있지만, 이때는
말을 타고 낙타를 타고 나귀를 타고 걸어서 뛰어서 다녔을 때인데
그 세 사람에게 연락을 취할 정도면 얼마나 시간이 걸린 것인지는
모르겠다.
금새 나을 병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고, 치료를 받아보겠다고
노력해본 시간도 있었을 것이지만, 어쨌든 데만에서 수아에서 나아마라는
지역에서 욥하고 가까이 지냈던 사람이 위로하러 온다.
친척일 수도 있고, 부모의 친구일 수도 있고, 같은 동네에서 살다가
도움을 받았던 사람일 수도 있다. 병문안 하러 올 정도이면 가깝게
지냈던 사이이다. 이들의 논쟁에서 보면 학술적인 관계들 같다.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가족 친척관계이다.
하지만 아무리 친척이라도 오래 멀리 떨어져 있으면 남이 된다.
이 때 당시도 '에서'라는 사람에 의해 형성된 부족관계이다.
자녀들을 낳고 번성하면서 한 곳에서 오래 같이 살 수도 있고
결혼이라는 것을 하면서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을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연락을 받고 온 것이다.
■(욥 2: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얼굴까지 못알아볼 정도로 피부병가 심한 것 같다.
세 사람이 욥이 살고 있는 곳에 왔을 때 누군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고통 받는 욥의 모습을 보고 일제히 소리를 지르고 울고불고 했다.
그만큼 친하게 지냈던 사이이다. 나쁘게 지냈던 사이이면 병문안 오지도
않았겠지만, 온다 해도 그 꼴 보기 싫었던 놈이 어떻게 혼나고 있는지 좀
보겠다고 올 수는 있겠다.
그러면 속으로 고소하다고 깨소금 맛이라고 하면서 울지 않게 된다.
"그렇게 떵떵거리고 살더니 참 잘 됐네. 고소하다. 아주 속이 다 후련
하네" 했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상대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 불쌍하게
여길수도 있겠다.
"내가 건강하게 살아 있을 때 어떻게 했냐"의 평가는 그 사람이 아플 때
나타난다. 제대로 보통으로 잘 산 사람은 동정도 받고, 도움도 받고,
위로와 격려도 받고, 장기 기증도 받고, 수술비로도 도움 받고,
십시일반이라는 도움도 받고, 병간호로 도움도 받고 한다.
"고소하다 쌤통이다 잘 됐다" 할 정도면 그동안 나쁘게 살았다.
그런데 '침을 뱉었다'는 그것은 그의 삶은 '최악'이다.
그것도 친척이나 동네 사람이나 젊은이나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멀리하고 놀리고 침을 뱉었다는 것은 최악 중에 상 최악이다.
더 이상 그렇게 나쁘게 살 수가 없다.
한국 사람이 죽어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원수 같은 일본인을 대하는 것과 같다.
■(욥 2:13)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그래도 그들은 욥을 동정하는 마음은 있었다. 울고불고 했었다는 것은
그동안 그 사람들은 욥에게 마음에 상처를 받을 정도로 도움을 처절하게
받은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욥이 왜 그렇게 처절해야 하는지 그들도 아직은 모르겠다.
욥의 고통만 보이지 욥의 참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그들은 서로 대화를 많이 하고 살았었다. 토론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욥하고 대화를 많이 하고 살았다는 것은 그래도 사는 것이 괜찮았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욥을 보면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잘돼서 이사를 갔던 어쨌든 다른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긴 것이다. 떨어져서 산지 좀 됐다.
왕 같이 거대하고 위엄 있고 품위 있고 멀쩡했던 모습을 보았다가
어느 날 아프다고 해서 만나봤는데 몰골이 말이 아닌 것이다.
옛날의 멋있었던 모습은 간데없고 알아보지도 못할 몰골이 앞에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전에 학문을 논했던 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놀라고 슬플 수밖에.
일주일간을 서로 할 말을 못하고 그냥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이다.
욥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위로의 말도 없고 얼마나 아프냐고 물어볼 수도 없다.
기왓장으로 피가 나도 계속 긁고 있으니.
우리도 가려움증을 겪어 봤을 것이다.
가렵다고 긁는데 시원하지 않으면 성질을 부려가면서
피가 나도록 벅벅 긁게 된다는 것을.
욥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대고 얼마나 가렵냐고 얼마나 아프냐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보는 것만도 서로가 힘들다.
다 죽게 생겼는 그 때도 그렇게 신에 대해서, 지혜에 대해서
논쟁을 하는 것을 보니 그들은 아마도 학식 적으로 뛰어났던
사람들인 것 같다. 그렇지 않고 병문안 와서 신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그렇게 논쟁을 할 수가 없다.
어느 한 사람이 격려차 위로차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면서
자기 의견을 쏟아내고 있다. 죽을 만큼 아픈 욥조차도.
그들은 그래도 지혜에 있어서 지식에 있어서 학문에 있어서
내로라 하는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기독교적으로 볼 때 그들은 아마도 성경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교회에 오래 다닌 그래도 믿음이 뛰어나다고 하는 사람들이고,
누구를 가르칠 정도의 성경지식이나 세상 학문이나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다.
모든 일을 믿음으로 풀어보려고 나름 애쓰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서로 지지를 않으려고 한다.
남의 주장보다 자기주장을 펼치려고 한다.
거의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완고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