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금요일의 밤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눈이 부셔 부시시 눈을 뜨니 해는 중천에 있습니다.
너무 늦게 일어났습니다.
요즘 몸상태가 엉망입니다.
아직 제대로 물들지 못한 남부의 가을산에서
맑은 바람 더불어 홀로이고자 했던 계획은 빗나갔습니다.
창가를 서성입니다.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가만히 있질 못합니다.
머릿속은 온통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는
남부의 능선과 골짜기만 가득합니다.
떠나야겠습니다.
이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산기슭 흙먼지라도 밟고 와야겠습니다.
후다닥 서둘러 꼬불꼬불 도래재를 넘습니다.
줄창 오르기만 하는 애마는 힘든가 봅니다.
헐떡이는 소리가 요란합니다.
주린 배를 채워야겠습니다.
재약산 일원의 산나물과 자연 그대로의 푸성귀를
한 상 내어놓는 [사자평명물식당]을 향합니다.
이 곳의 밥상은
옛날 사자평의 화전민들이 먹던 그대로라고 합니다.
사자평은 신라 화랑들의 수련장이었고
불과 사십 년 전까지는
약초꾼과 화전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고 합니다.
사자평을 품은 재약산은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신라 때 약산으로 부를 만큼
약초가 많았고 약효가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러한 맥을 이어온 재약산 일원의
산나물과 약초를 버무려 올린
수십 년 전통의 할머니 밥상을 만나러 갑니다.
도회지의 잘 차린 현대식 밥상같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맛은 정말 일품입니다.
입안에 고이는 자연을 넘기는 맛입니다.
먹고 나면 아련한 그리움이 피어 오르는 묘약의 밥상입니다.
사진의 밥상은 정식 밥상입니다.
좌로부터 삼색나물(고사리, 묵나물, 콩나물),
된장찌개, 곤달비나물, 묵은 김치, 고추 2종류,
열무김치, 고추튀각, 콩잎, 산초나물, 멸치볶음, 콩,
그 앞의 도토리묵은 별도 주문 요리입니다.
밥은 기름이 좌르르 흐르며 갓 지은 찰진 밥이었습니다.
어느 하나 뒤지지 않는 맛이었습니다만
그 중에 곤달비가 최고였습니다.
된장과 고추장이 조화를 잘 이뤄
먹을 때의 맛도 일품이지만
먹은 뒤에 입안에 고이는
삽상한 곤달비 향이 있어 더욱 좋았습니다.
주린 배를 채웠으니
가까이 밀양댐이나마 둘러 보러갑니다.
배내재에서부터 시작되는
단장천의 물길을 가로막아 이룬 호수입니다.
사람의 이로움을 위하여
물길의 맥을 잘라 틀어 막은 문명의 이기입니다.
댐 콘크리트둑 위에서
아래의 생태계 공원과 저 멀리 향로산을 바라봅니다.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콘크리트둑 위에는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밝은 얼굴들로 기념사진이나마 남기기 위해 분주합니다.
오늘은 구름이 너무 많은
뿌연 날씨라 물빛이 에머랄드가 아닙니다.
물이 파란 하늘을 품어야
에머랄드 빛으로 살아날 것입니다.
온 산이 붉게 물들면
물빛 또한 붉은 산그림자를 베어 물겠지요.
산정에서 바라보던 밀양댐이 여울져옵니다.
그러나, 오늘의 이 모습 또한 아름다움입니다.
‘갔던 곳에 뭐 하러 자꾸 가냐?’고
행여 누군가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장소 똑같은 모습일지라도
언제나 다른 모습의 아름다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판기 커피나마 한잔 들고
머릿속을 물에 풀어 놓습니다.
아마도 이 물속엔 무수한 사람들의
머릿속이 풀어져 있을 거라고 믿어 봅니다.
그러고 보니 탁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념으로 한장 남기고 발길을 돌립니다.
언제나 그러하듯 돌아가는 길은 허전하고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