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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사랑한 사람들
위트컴 장군
선교사의 꿈을 가진 청년 리처드 위트컴
그의 본명은 Richard S. Whitcomb(이하 위트컴). 1894년 미국 중부 캔자스주 캔자스시티에서 출생하였다. 캔자스대법관을 역임한 아버지 조지 허버트 위트컴과 당시 남자대학에서 처음으로 강의를 한 여성법률가이며 대학교수인 어머니 제시 위트컴 사이의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전통적인 청교도 가문의 엘리트 교육을 바탕으로 기독교적 정의와 인간에 대한 기본 사랑을 터득하게 된다. 캔자스주 토피카의 워시본(Washbon)대학 재학 시에는 미식축구 선수로, SVM(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 학생자원선교활동) 멤버로 필리핀 선교사의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6년 ROTC로 임관한 위트컴에게 펼쳐진 시대적 배경은 1차 세계대전(1914-1918)의 발발과 함께 1917년 미국의 참전으로 제2차 마론강 전투에 육군 보병 장교로서 군인의 길을 걷게 한다. 1941년 세계2차대전 시 위트컴은 독일 해군의 이동 감시초소인 아이슬란드 케플라비크 기지건설 참여 후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오마하 전투에서는 5만여 명의 연합군 병력과 군사물자의 수송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6·25 한국전쟁의 영웅, 밴 프리트 장군과 함께 프랑스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1945년, 17만 명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필리핀 상륙작전의 수송, 군수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준장으로 승진하였고 1950년 영하 60도의 그린랜드 공군기지 건설을 지휘하여 당시 미군 최고 군수전문가의 위치에 오른다
[출처] 나를 이 땅에 묻어주오. - 리처드 S 위트컴 장군(1)|작성자 골무ㆍ최상진
체면도 버리고 갓 쓴 한복차림 시내 돌며 병원건립 기금 모금
1954년 7월 29일 부산 메리놀병원 신축 기공식이 위트컴(앞줄 왼쪽 세번째) 장군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다. 클리프 씨·용두산공원 부산타워 제공 |
- 후원 손길 필요한 고아원 등
- 예하부대와 결연 맺어 지원
- 전쟁 후 질병앓는 이들 위해
- 병원 세우는 데 가장 적극적
- "그의 헌신적 노력 없었다면
- 부산 재건은 훨씬 더뎠을 것"
리차드 위트컴 부산 미군군수기지(Pusan Military Post·PMP) 사령관(준장)이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음을 입증하는 선행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위트컴 장군을 재조명하는 데 앞장선 김재호 부산대 문화콘텐츠개발원장(전자전기공학부 교수)과 강석환 용두산공원 부산타워 대표는 18일 "전후 복구로 혼란스러웠던 1953, 1954년 그가 부산에 근무한 것 자체가 부산으로 봐서는 엄청난 행운"이라고 말했다.
위트컴 장군은 주어진 대한미군원조처(AFAK) 기금을 수동적으로 집행하는 차원을 넘어 부산 시민을 위한 일을 발 벗고 찾아다녔다. 기금이 부족하면 그는 예하 부대원의 월급 1%를 병원 신축 기금으로 헌금하도록 하는가 하면 도움이 필요한 부산지역 기관과 미군 부대 간 후원 결연 등 갖은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갓 쓰고 이벤트…조산소 설치
위트컴 장군은 1954년 영도구 피란민촌에 산원(産院·조산소)을 설치했다. 그해 5월 피란민촌을 둘러보던 그는 배부른 산모가 보리밭에서 아기를 낳는 장면을 목격하고 이같이 지시했다. 피란민촌의 7, 8세대 40여 명의 가족이 함께 생활하는 천막 안에서는 아기를 낳기가 곤란했기 때문이다(부산 영도구청 '신문으로 본 영도의 발자취').
병원 건립 기금이 모자라자 그는 한복 차림에 갓을 쓰고 부산 시내를 활보했다. 병원 건립 기금 모금 행사를 홍보하고 부산 시민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미국 격주간지 '라이프' 1954년 10월 25일 자). 그는 부산 시민에게 도움이 된다면 사령관으로서 체면을 구기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후원의 손길이 필요한 부산지역 기관과 88개 예하 부대가 자매결연을 하고 체계적으로 후원하도록 했다. 부대 규모가 크면 두 개 이상의 기관을 후원하도록 했다. 특히 그는 예하 부대원에게 "부산지역 기관을 돕기 위해 자원봉사를 하거나 안 입는 옷, 선물, 돈, 기타 물품을 기부하라"고 지시했다고 미국 '성조지'(Stars and Stripes·1954년 1월 13일 자)가 보도했다.
■전후 복구 프로젝트
1953년 7월 6·25전쟁 휴전 이후 전후 복구를 위한 AFAK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그해 11월 부산역전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속도를 냈다. 위트컴 장군이 191개 AFAK 사업을 진행했다. 그는 화재 복구를 위해 한미재단으로부터 1만5000달러의 지원을 받아냈다. 국가기록원에서 찾아낸 위트컴 장군이 수행한 주요 AFAK 사업을 보면 ▷메리놀·침례·성분도·복음·독일적십자병원 등 병원 건립 지원 ▷이재민을 위한 후생주택 건립(영도 208동, 동래 210동 등) ▷보육원과 요양원 건립 ▷국제시장과 메리놀병원 주변 도로 개설 등이다.
그는 전쟁 이후 각종 질병에 노출된 아픈 이를 위한 병원 건립에 가장 주력했다. 덕분에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부산 지역 의료시설은 전국 최고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석환 대표는 "위트컴 장군의 헌신적인 전후 복구 노력이 없었더라면 부산의 재건은 훨씬 더뎠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계 유일의 유엔기념공원은 1950년 착공됐지만 위트컴 장군이 완공했다. 그는 자신이 마무리한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영원한 부산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신문 ·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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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박물관
전쟁고아 돕기·장진호 미군 유해 발굴, 일생의 과업으로 삼아
한묘숙 여사가 지난 11일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남편인 위트컴 장군의 사진을 보며 북한 내 미군 유해 발굴작업을 계속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오상준 기자
- 한묘숙 여사, 대외활동 도맡아
- 베이징서 북과 접촉 중 부고 받아
- 위트컴 유지 받들어 25차례 방북
- 매번 사재 털어 발굴·송환 타진
- "장군과의 약속 끝까지 지킬 것"
1953년 11월 27일 부산역전 대화재로 집과 재산을 잃은 이재민에게 미군 군수 물자를 나눠주고 천막촌을 설치한 리차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1894~1982년) 부산 미군군수기지사령관은 준장으로 퇴역하고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 위트컴 장군은 민간 차원의 한국 재건과 부흥 원조를 목적으로 하는 한미재단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전쟁고아를 위해 보육원을 설립하고 후원했다. 그래서 그는 '한국전쟁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위트컴 장군이 부인 한묘숙(87·서울 한남동) 여사를 만나 1964년 결혼한 것도 한 여사가 충남 천안과 서울 한남동에서 고아원을 운영했고 위트컴 장군이 이를 후원한 게 인연이 됐다.
위트컴 장군과 부인 한 여사가 한평생 목을 매다시피 한 일이 있다. 1950년 장진호 전투에서 사망한 미군 해병대의 유골을 미국으로 가져오는 것. 국제신문이 지난 11일 한 여사를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만나 인터뷰한 결과, 위트컴 장군이 미국으로 귀국하지 않고 한국에 남은 까닭은 전쟁고아 돕기와 북한 내 미군 유해 발굴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위트컴 장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으로 경무대(현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백악관과 중요 연락업무를 맡았다.
한 여사가 1991년 북한 정부로부터 받은 노력훈장.
■위트컴 장군 유언
1982년 7월 12일 위트컴 장군이 서울 용산 미8군 기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 한 여사는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미군 유해 발굴을 위해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측 인사와 접촉하고 있었다. 한 여사는 "장군께서 돌아가실 때 '한국전쟁 때 죽어간 미군 유해를 꼭 고향으로 보내 달라', '제2의 고향인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말했다.
"언제가 장군은 북한 장진호에 수천 구의 미군 해병대 병사 유해가 있을 거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중공군에 밀려 남하하면서 거기서 얼어 죽었다는 거예요. 1990년대 초 제가 북한에 들어가 장진호 근처에 간 적이 있습니다. 북한 사람에게서 한국전쟁 당시 미군 병사들이 죽을 때 '마미(Mommy)'하고 외치더라는 증언을 들었어요. 북쪽 사람이 저에게 '마미'가 뭐냐고 물어 엄마라는 뜻이라고 대답해줬어요. '미국놈들이 오마니를 찾다가 죽어갔구나' 하더라고요. 장군의 유언이 사실임을 확인하는 순간 이역만리에서 엄마를 찾으며 죽어간 불쌍한 영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어요."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한 군수물자 보급 전문가로 통하는 위트컴 장군은 장진호 전투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현지에서 미 해병대 1사단의 군수품 보급에 간접적으로 관여했거나 다양한 경로로 장진호 전투 상황과 피해를 보고받아 미군 유해 발굴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한묘숙 여사 북한 25번 방문
한묘숙 여사는 미군 유해 발굴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1990년부터 25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남 몰래 이런 활동을 하다 보니 '마타하리' '이중 스파이' '대북 로비스트' 같은 별의별 소리를 다 들었다. 한 여사는 북한에 들어가기 위해 1970년대부터 홍콩과 중국을 수백 번도 더 오가며 북한 측 인사와 만났다. 미군 장성 출신의 위트컴 장군은 대외적으로 알려져 직접 나설 수 없어 한 여사가 이런 활동을 대신했다. 위트컴 장군은 주 프랑스 미국대사관에서 무관으로 일할 때 사귄 중국 고위층을 소개해주며 측면 지원했다.
한 여사는 1989년 허담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의 초청장을 받아 1990년 6월 북한 땅을 처음 밟을 수 있었다. 첫 북한 방문에는 고초가 뒤따랐다. "당시 허담은 김신(백범 김구 선생 아들), 김복동(당시 노태우 대통령 처남), 저 이렇게 세 명을 초청했습니다. 김신은 김일성이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다고 초청했어요. 둘은 안 간다고 해서 저만 들어갔어요.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서 나와 절 조사했습니다."
한 여사는 미국 시민권자인 데다 미군 장군의 미망인인 덕분에 사흘 만에 무사히 풀려났다. 한 여사는 북한에 갈 때마다 사재를 털어 의약품을 마련해 미군 유해 발굴과 송환을 타진했다. 1991년 11월 북한에서 주는 노력훈장을 받기도 했다. 미군 유해 발굴 성과는 별로 없었다. "탈북자나 조선족을 상대로 미군 유해에서 나오는 '도그태그(군번 줄)'를 가져오면 500~1000달러를 줬어요. 군번 줄 300여 개를 모았지만 전부 가짜였죠. 간혹 미군 유해라며 뼈를 들고 오는데 확인해 보면 소 뼈다귀였어요."
한 여사는 집에 있는 위트컴 장군 사진을 보며 "장군과 약속한 만큼 죽을 때까지 미군 유해 발굴을 계속하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장진호 전투
1950년 11월 26일~12월 13일 영하 40도가 넘는 혹한 속에 미군 해병대 1사단 1만여 명과 중공군 7개 사단 12만여 명이 18일간 벌인 치열한 전투. 함경남도 개마고원 일대 장진호에서 미 해병대 절반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남하는 2주간 지연됐고, 피란민 등 20여만 명이 그 유명한 '흥남 철수'를 할 수 있었다.
# 위트컴-한묘숙 러브스토리
- 고아원 후원 인연… 31살 나이 차 극복
위트컴 장군과 부인 한묘숙 여사의 러브스토리는 두 사람의 인생 못지않게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6·25전쟁 이후 전쟁고아를 위한 활동을 하면서 서로 알고 지내다가 1964년 결혼했다. 31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을 이루었다.
한 여사는 남편 대신에 '우리 장군'이라는 호칭을 썼다. "항상 한복을 입고 다녔는데 1964년 어느 날 장군이 양장을 하고 오라는 거예요. 양장하고 미국대사관에 갔는데 그날 결혼식을 올렸어요."
한 여사는 재혼이었다. 전 남편과 이혼한 뒤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유학에 관한 정보를 위트컴 장군에게 요청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좋은 일과 나쁜 일은 없는 것 같아요. 그때 불행이 없었으면 장군과 결혼하지 못했을 거예요. 장군께서 전쟁고아를 위해 활동하는 저를 쭉 예쁘게 보신 것 같아요."
한 여사는 결혼 이후 친정 가족과 생이별했다. 당시로는 이혼이 드문 데다 외국인과의 재혼으로 가족들은 여사와의 연락을 끊었다. 가족들은 '노랑머리 아기가 나올 수 있다'며 반강제로 한 여사를 병원으로 데려가 자궁적출수술을 받게 했다.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자녀는 없다. 위트컴 장군은 한 씨가 데려온 1남1녀를 끔찍이 사랑했다. "딸이 미국 유학 중일 때 장군은 매일 아침 일어나 딸에게 편지를 쓰는 것으로부터 일과를 시작했어요."
위트컴 장군과 한 여사 모두 부산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위트컴 장군은 1953, 1954년 부산 미군군수기지사령관을 지냈고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잠들었다. 한 여사 역시 아버지의 직장 관계로 부산에서 4년간 살면서 해방되던 1945년 부산고등여학교(현 부산여고)를 졸업했다.
한 여사의 친언니는 작고한 유명 여류소설가 한무숙 씨다. 한무숙 씨는 1948년 국제신문 장편소설 모집에 '역사는 흐른다'로 당선되면서 화가에서 소설가의 길을 걸었다.
# 용두산공원 해병대사령부 기념비
- 해병대, 장진호 전투 측면 지원
6·25전쟁 당시 부산 용두산공원에 해병대사령부가 주둔했다는 사실을 아는 부산시민은 많지 않다. 낙동강 전선(부산교두보선)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을 때 해병대는 부산에서 인천상륙작전 준비를 마치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을 감행했다. 해병대는 여세를 몰아 원산에 상륙해 북진하다가 원산·고성·함흥지구 전투 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부산과 진해로 철수했다.
위트컴 장군이 평생 과업으로 삼은 북한 내 미군 해병대 유해 발굴 작업과 관련 있는 장진호 전투를 해병대가 측면 지원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용두산공원 해병대사령부 기념비(사진)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해병대는 장진호 전투로 피란민 20만 명을 구한 '흥남 철수' 작전에도 관여했다.
해병대가 1951년 1·4 후퇴 때 재반격 작전을 펼치는 동안 해병대사령부는 1951년 5월 20일~1955년 3월 26일 4년 가까이 부산 용두산공원에 주둔하면서 '무적 해병' '귀신 잡는 해병대'의 전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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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박물관
역사 속 인물 이야기
리차드 위트컴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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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위트컴 장군은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서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던 우리 국민의 손을 굳게 잡아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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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전 전사자 추모의 벽' 착공식 중
리차드 위트컴 장군을 언급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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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트컴 장군이 부산으로 오게 된 것은 전쟁 막바지였던 1953년.
미 2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부임한 그는
폐허가 된 우리나라를 재건하는 일에 헌신했던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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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부산 역전 대화재 구호활동
1953년 11월, 피난민 판자촌에서 시작된 불이 부산역까지 번진 대형 화재로
6000여 가구가 피해를 입고 29명의 인명피해, 3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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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군수사령관이던 위트컴 장군은 이 사건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망설임 없이 군수창고를 개방해
이재민들을 위해 천막을 짓도록 했고, 음식과 의복을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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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메리놀병원 등 의료시설 건립 지원
또한 피난민과 전쟁고아를 치료할 의료시설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위트컴 장군은
직접 한복을 입고 거리로 나가 모금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으며,
메리놀병원 등 부산의 여러 병원은 이때 모금한 기금 덕분에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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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부산대 장전캠퍼스 조성 지원
위트컴 장군은 구호, 의료뿐만 아니라 교육여건 개선에도 힘썼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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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을 설득하여 캠퍼스를 조성할 50만여 평의 부지를 제공받았고,
건축자재를 지원했으며, 휘하 공병부대를 동원하는 등 공사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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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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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희생의 정신으로 한국을 도왔던 위트컴 장군,
그의 신념은 오늘날 한미동맹의 토대가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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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7월 12일 작고한 위트컴 장군은
"내가 죽으면 한국에 묻어달라"는 당신의 유언에 따라
부산 유엔기념공원 내 미국 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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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퇴역한 위트컴 장군은 한국에 남아 재건을 도왔습니다.
한미재단을 설립하여 전쟁고아를 지원했고, 북한지역 미송환병사 유해 발굴에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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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리차드 위트컴 장군,
그의 노고를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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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oto Credits (@부산 유엔기념공원): @jihyeon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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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국을 사랑한 장군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