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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즉문즉답
2022. 6. 11
성경 66권을 간략하게 요약해서 말씀드리겠다.
창세기 1장 1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했는데 바로 2절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앉을 자리가 없어서 물 위에 배회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1장 26절에는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라는 말이 나오고 2장에 가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이 나온다. 창세기의 이 말은 지구과학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창조한 것을 말한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을 무엇인가가 덮어씌웠다는 것이다. 땅은 물에 덮히면 용맹이 없다.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쓸모가 없게 된다. 지금 온 인류는 무엇에 씌여서 사람으로서의 원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역기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지으셨는지 알고 있다.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과 형상으로서의 사람이 연합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있는 내용을 3장에서 깨뜨려 버린 사건을 요약한 것이다. 이것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야기다. 지금 사람들이 기능을 못하도록 무엇이 덮어씌우고 있는가?
세상을 보든지 성경을 보든지 무엇이 덮여씌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말로 콩깍지가 씌였다고 하는데 무엇인가로 덮어쓰고 있다. 많은 사상과 많은 종교와 많은 지식……, 그리고 바벨로 가기 위한 여러가지 지식들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여러분이 잘 보면 아실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 속에서 점점 줄어져가고 있다. 숫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나타내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이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지금 인간이 그러하다. 어디로 갈지 모른다. 바쁘기는 하고 일생을 바치고 있지만 무엇 때문에 하고 있는 모른다.
이 상태를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방법을 내놓으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세대, 4백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를 통해서, 그리고 광야 40년의 과정을 거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얻고 나라를 세운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전혀 하나님이 계획한 나라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31장에서 “그래서 이스라엘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였다. 새 언약이 무엇인가? 옛날에는 바깥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방식이었는데 그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어서 안되니까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하셨다. 생명이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날 이후로는 하나님을 알라 하지 않아도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특수한 사람들만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다. 그런데 그날이 오면 특수한 사람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일상으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일상으로 만나게 되는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도 기독교는 하나님을 그렇게 만나고 있지 못하다. 일상으로 누구나 볼 수 있게끔 나타내지 못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내려오지 못하심으로 사람이 무엇인가를 아주 명백하게 내놓으셨다.
그 전에 우리는 사람이라고 알았는데 이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가 바라든 사람, 우리가 바라는 메시아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아주 놀라운 사람이어야 했다. 십자가에 못박더라도 내려올 수 있는 사람이 그들의 구원자라고 굳게 믿고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정반대로 내려오지 못하고 운명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사람을 버린 것이다. 다 버리고 가버렸다. 사도들까지도 다 버리고 가 버렸다. 이런 사람을 어디 쓰겠는가.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버리고 간 것이다. 쓸데 있으면 다 가져갔지 왜 버렸겠는가.
그런데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셨는데 부활하셨다고 하였다. 그래서 기독교가 생겼다. 안타깝게도 부활은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다. 부활하셨으니까 기독교가 생겼는데 이 부활을 우리가 체감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우선 부활을 알려고 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기 위해서 이 사람이 누군가를 알 필요가 있다.
내가 알아보았더니 이 사람이다.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 진실이 들어있다. 물에 덮혀있지 않은 사람이 드러난 것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덮여 있지 않은 사람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못보았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쓸모없는 것이다. 그래서 다 버렸다. 그런데 이 안에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이 드러났다. ‘이것이 사람이다. 사람의 길이 이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사람 앞에 내놓으셨다.
이것은 어쩌면 원래 지어질 때 운명지어진 그 자리다. 새로운 자리가 아니라 사람은 원래부터 이렇게 되도록 지어졌다. 이렇게 되면 뭐하는가? 이렇게 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렇게 된 사람이 만유를 포함한다. 우리 모두는 말타고 온 사람 속에는 포함될 수 없다. 런 놀라운 사람이 오면 좋을 것 같은데 그 사람 안에는 포함이 안된다.
그런데 모두 버릴 수밖에 없는 이 사람, 아담이 싫어서 버린 사람, 이 사람이 우리를 포함한 사람이다. 아담이 왜 버렸겠는가? 싫어서 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예수 안에 포함되려면 이 사람 안에서만 포함될 수 있다. 또한 만유가 다 포함되려면 이 사람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고 지혜다.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라는 말이 그 말이다. 역설이다.
엄청난 사람이 와서 우리를 포함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천사도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는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람은 천사가 얼마나 부러운가. 너무나 부러운 존재다. 세상 어떤 것보다도 부러운 것이 천사다. 그리고 능력이 하나님과 방불하다. 그러나 천사는 우리를 포함해 줄 수 없다.
개에 비해서 소는 엄청난 힘이 있다. 그러나 개는 소 안에 포함될 수 없다. 우러러 보기는 하지만 소 안에 포함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그런 위대한 존재들에게 전혀 포함이 안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만유를 포함할 사람을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 만유를 포함하니까 그 사람이 싫지만 우리는 그 안에 가야 하나가 된다.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한다고 하고 평등해야 된다고 하고 자유로워야 된다고 하지만 이 안에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진정한 평등, 진정한 자유, 진정한 하나됨은 이 안에밖에 없다. 얼마나 기독교가 하나되자고 애를 썼는가. 얼마나 평등하자고 노래불렀고 얼마나 큰 자유를 요구했던가. 종교를 개혁하고 별 것을 다했다. 그러나 그 안에 평등하게 너와 나로 참여할 수 있는 자리는 이 자리밖에 없다.
내가 발견한 것은 이것 뿐이다. 아직까지 이보다 나은 장소를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혹시 누구라도 발견한 사람이 있으면 나는 거기 가겠다. 이 보다 더 좋은 자리, 더 평등한 자리, 내가 가능한 자리가 있다면 가겠다. 여러분이 혹시 알아보거든 나에게 바로 연락하면 미련없이 이것을 버리고 그리 가겠다.
“된다. 안된다.”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가 없다. 이것밖에 대안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지만 대안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초가집이라도 다른 집이 없으면 거기 살아야 되지 않는가. 아무리 형편없는 차라도 그것밖에 없으면 타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것이 가치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내가 거할 곳은 이 자리밖에 없다.
더 위대한 사람들은 더 좋은 데가 있을지 모르겠다. 예수의 부활은 너무나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내가 있지 못한다. 아무리 있으려고 해도 안된다. 여러분도 해보면 알 것이다. 예수의 부활 안에 있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혹시 누가 된다 해도 소수에 불과하다. 내가 돼도 내 아내는 안된다.
우리 교회도 하나되고 자유롭고 평등하고 싶다. 물론 다른 데 비하면 더 자유롭고 더 하나되고 평등한 교회다. 옛날에 유시형가 나올 때마다 강도와 도둑놈과 판사가 함께 있는 교회라고 말했다. 우리 형제들밖에는 그렇게 못한다. 그 정도로 대단한 교회다. 그렇지만 그것이 만유를 포함할 수 없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좋은 교회다. 하지만 그것으로 다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믿음도 좋고 기대도 좋지만 그것으로는 안된다.
나도 여러분에게는 좋은 사람이다. 여러분이 쉴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그릇이 작다. 작은 뚝배기밖에 안된다. 만유를 포함할 수 없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까지 내려갈 수 없다. 그러니 여러분은 나로 만족하지 말고 더 큰 예수 안으로 와야 한다. 혹시 나만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있어도 예수 안으로 가야한다.
나도 그 안에 있다. 혹시 나와 여러분이 한 자리에 있을 곳이 있다면 그곳은 예수 안이다. 거기서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다.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첫 번째 창조를 하셨지만 그 창조로서는 완성이 안되었다. 두 번째 창조의 주인은 예수다. 그래서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신이라서가 아니라 우리를 구속한 주님이기 때문에 주님이다. 두 번째 창조는 구속으로부터 시작된다. 첫번째 창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작되었고 두번째 창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안된다. 쌀이 없으면 밥을 못짓고 밀가루가 없으면 빵을 못만든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밥이 필요한 데는 꼭 쌀이 있어야 하고 빵이 필요한 데는 꼭 밀가루가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이치다. 예수는 형편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사람을 기대하고 있는데 그것도 못내려오고 죽은 사람이다. 어디 쓰겠는가. 그런데 만유를 포함하는데는 적격자다.
공자도 안되고 석가도 안되고 소크라테스도 안된다. 아무도 될 사람이 없다. 예수외에는 될 사람이 없다. 그래서 예수는 유일하다고 하고 독생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구약 성서를 통털어 말한 것이다. 설명이 길어서 그렇지 간단하게 말하면 창세기는 물에 묻힌 땅을 드러낸 것이다. 땅이 드러나야 식물도 살 수 있고 동물도 살 수 있다. 그 땅으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이것이 무엇을 말한 것인가. 결국 무엇인가에 묻혀 있는 인간을 구원하신 것 아닌가.
지식의 홍수 속에, 능력 속에, 종교의 홍수 속에, 철학의 홍수 속에 사람은 묻혀 있다. 무엇이 참 사람인지 모른다. 돌아갈 곳을 모른다.
여기서 참 사람이 드러난 것이다. 마치 깊은 물 속에서 땅이 드러나듯이 드러났다. 예수는 그 땅이다. 우리가 거할 땅이다. 이것이 오늘 일찍 오신 분들에게 선물이다.
김경수: 물에 덮힌 땅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법은? 특별히 젊은 세대들은 ‘내 인생은 내것이다. 내 결정, 내 권한이다. 내 마음껏 살겠다.’고 한다. 자유와 다양성이 강조되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정하신 용도와 목적을 효과적으로 전할지?
젊은이들의 생각과 하나님의 목적이 대립적인데 어떻게 참 사람을 효과적으로 젊은이들을 향해 전할 수 있는지?
대단히 큰 문제다. 사람이 인지가 발달했다고 할까 전에도 그러했지만 지금은 더 자유로워지니까 확실히 더 개발되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대로 살고 싶어한다. 아담이 그러했는데 지금은 안그렇겠는가. 당연하다. 그런데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죽음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쩔 수 없는 것과 같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있다. 그렇게 만들어져야 할 운명이 있다. 이것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우리가 볼 때 예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것만은 어찌하지 못하고 죽었다. 아무리 자유롭고 싶고 마음대로 하고 싶어도 피조물에게는 안되는 것이 한 가지 있다. 모든 피조물이 한 가지 제한을 갖고 있다.
좋은 자동차가 많아도 자동차에 딱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브레이크다. 브레이크가 없으면 깨져버린다. 차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면 부딪쳐서 깨질 것 아닌가. 무엇이든지 만들어진 것은 다 한 가지 제한이 있다. 그 제한 안에 내가 확실하게 들어가 있으면 다른 모든 데 자유롭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다.
그러나 이 한 가지를 거부하면 우리는 벽돌 공장으로 가야한다. 그러면 성을 쌓는데, 망대를 세우는데, 하나님 같이 되는데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 같이 되는가? 안된다. 되면 좋은데 문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셨다. 그분인들 그렇게 하고 싶었겠는가. 기왕이면 한발짝씩 걸어내려왔으면 만민이 박수를 치고, 도망간 사람도 다시 와서 박수를 쳤을 텐데 그렇게 못하셨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피조물인 인간은 한 가지 제한이 있다. 그 제한 필요한 것이다.’
나는 출발할 때 그렇게 했다. 공중의 하나님을 찾다가 도저히 못찾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알아진 것이 ‘나는 내일 일을 모르는구나.’ 이것을 알았다. 내 마음대로, 내 자유대로 하는데 인간은 내일 일을 모른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 말 외에 한 말도 할 수 없다.
우리가 즉결재판소 2층에 있을 때 어느 중학생이 와서 마음이 심히 답답해 죽겠다며 상담을 청했다. 들어보니 그가 사귀는 여학생과 금요일 날 만나기로 했는데 그 여학생이 다른 남학생을 사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여학생에게 금요일까지 자기와 그 남학생 중에 결정하라고 했는데 그때까지 기다리려니 죽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성경에 이런 말이 있다. 어떤 부자가 농사를 짓고 소출이 너무 많아서 어디 보관할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어리석은 부자야.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셨다.”고 했더니 “그 말이 꼭 나보고 한 말 같네요.”라고 했다.
사람은 다 자기 계획이 있다. 그런데 안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린아이를 키울 때 마음대로 키우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다. 안되는 것도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 어른이 되어 가는 길이다. ‘안되는 것도 있다. 유치원에 가면 안되는 것이 발견된다.’ 집에서는 다 자기 마음대로 되는데 유치원에 가니까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은 그 제한을 확실히 아는 것이 인격이 성숙해 가는 길이다.
그런데 이 제한 속에 만유가 포함된다.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하셨으면 우리가 포함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고 비밀이다. 어째서 다 버린 자리에 만유를 포함시키셨는가! 한 가지에 제한되면 모든 데 자유롭다.
송영소
절에가면 합장하고 “성불하세요.”라고 하는데 목사님이 절에 가서 스님들을 모시고 오라고 하셔서 불교에 대해서 즉문즉설도 들어보고 법문스님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다. 왜 온 세상이 관심을 갖고 집중을 하는가? 유튜브에 법문스님 채널 조회수가 600만 700만이다. 목사님은 이 탁월한 복음을 말씀하시는데 자꾸 인원이 준다. 지난 주에 대박나고 싶다고 하셨는데 법륜스님을 보고 연구를 하셔야 할 것 같다. 잘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 관심이 많은 것은 법륜스님이 기독교를 포함하고 있고 법정스님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어떻게 저 사람이 만유를 포함하는지 관심을 갖는다.
목사님이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하셨는데 지금까지 45년 동안 말씀을 듣다가 갑자기 함께 죽고 함께 산다고 하셨다. 형님들이 어디서 함께 죽는지 명확한 접점을 말씀하시지 않아서 함께 살 수 없었다고 했다. 새로운 복음을 말씀하시는데 함께 죽을 수 있는 접점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자길 형님이 즉시 자리가 옮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혼란이 오고 어떻게 즉시 갈 수 있는지 궁금하다.
베드로는 고기잡다 왔다. 그래서 나를 따라오면 사람낚는 어부가 되리라 하는 말을 들었다. 고기집던 사람은 평생 고기만 잡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즉시 바꿔야 한다. 나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말씀이 들리면 즉시 바꿔야 한다. 나는 ‘내가 내일 일을 모르네.’ 하니까 거품이 빠졌다. 그리고 땅바닥에 엎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절망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부정적이었던 모든 것이 긍정적이 되었다. 사람이 이상하게 변했다. 내내 세례를 안받다가 자원해서 받았다. 주일학교도 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 했다. 남이 안하는 것은 내가 했다. 발견되는 즉시 돌아서야 한다.
지금도 그러하다. 만일 이 복음을 듣다가 더 좋은 복음을 들으면 즉시 돌아서야 한다. 누가 했든 즉시 돌아서야 한다. 나도 여러분보다 먼저 돌아설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줄어든다고 했는데 그분은 오래했지만 나는 이제 두 번째 시간이다. 불교는 처음부터 질문하는 종교다. 거기 들어가면 의문을 제기하라고 한다. 백양산 입구에는 큰 돌에 ‘이 뭐꼬’라고 써놓았다. 의심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그에 비해 기독교는 들어가가마자 믿으면 의롭게 된다고 했기 때문에 그만큼 더 어렵다.
나는 분명히 우리가 하나되려면, 우리 교회만이라도 하나되려면 이 복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하나되려면, 너와 내가 하나되려면 이 복음이 필요하다. 어저께 알라스카에서 사람들이 왔다. 첫 번째 하는 말이 “We are one In Jesus.”였다. 어디서 왔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나는 다 하나로 보인다.
하나로 보여야 할 것 아닌가. 직업 때문에, 지식 때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옷이나 마찬가지다. 필요해서 입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 존재는 같다. 하나님이 지은 사람은 똑같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다 똑같다. 예수 안에는 차별이 없다.
부처님 안에는 차별이 있다. 도통한 사람이 있고 덜 통한 사람이 있다. 스님들끼리도 큰 스님이 있고 작은 스님이 있다. 진정으로 차별은 있어도 하나는 볼 수 없다. 예수 안에는 진정으로 차별이 없다. 이것이 우리 복음이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자. 우리가 하나되는 것인 대단한 축북이다. 하나되면 온 인류가 다 형제가 되는데 이보다 큰 축복이 어디 있는가. 나는 다 하나로 보인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에게 “너와 나는 하나다.” 했더니 좋다는 말을 안했다. 그가 은사를 주장하는 교회에 다니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너와 나는 하나다.”라고 했는데 대답을 안했다. 은사 때문에 안되는 것이다. 은사는 없어질 수 있다. 그런데 내 존재는 은사가 있으나 없으니 똑같다. 그러니까 이 복음만큼 천하의 복음은 없다.
우리는 그들을 만나도 할 말이 있다. “다 위대하고 좋다. 그러나 나는 너 안에 없다. ‘그 너’안에 나는 없다.” 그러면 뭐라고 하겠는가. 도를 닦으라고 하지 않겠는가. 도를 더 닦고 싶으면 그리 가면 된다. 그러나 결국은 안된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운명은 누구도 바꿀 수 없다. 나는 확신한다. 누구를 만나도 이 자리 외에는 온 인류가 함께 할 자리가 없다.
사전 이승국
1. 십못내 구속의 복음이 예수 제자들이 목숨을 걸고 전파한 복음이 맞나요.
2. 죽고 사흘 지나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죽고 부활하신 예수, 얼마나 좋은가. 그 기라성 같은 성현들이 희랍세계에 가서 “나의 주님은 이렇게 저렇게 못난 사람입니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누가 뭐라 하더라도 “부활했어. 예수는 부활한 분이다.”라고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부활한 분을 못보았다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다. 부활을 보여 준다면 말을 안해도 된다.
병만 고쳐져도 사람들은 말을 못한다. 인도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힌두교인들이 수 만명이 모여서 기독교 목사 설교를 듣고 있었다. 병자를 고치니까
나도 그래서 그 유혹을 받았던 것이다. 꿩 잡는 것이 매 아닌가. 그러나 나는 안되었다. 그래서 못했는데 병자를 고친다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병을 고치는 것이다. 물에 덮인 사람을 구원해 내는 것이다. 멀쩡한데 병이 들면 되겠는가. 멀쩡한 사람이 물에 덮여 있으면 거기서 나와야 될 것 아닌가.
부활은 진짜 좋은 것이다. 세상을 덮을만큼 좋은 것이다. 문제는 내가 체험이 안되고 모른다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
사도들은 예수의 사도들이니까 예수밖에 안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는 무엇인가? 여러분은 다 잘 알 것이다. 기독교에서 나타난 결과가 무엇인가. 성경에 나타난 결과만 해도 유명한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귀신을 쫓아낸 사람, 병 고치는 사람, 성령이 충만한 사람, 불 받은 사람, 방언한 사람이 많다. 그런데 그것은 그 사람으로 끝나고 전 인류의 것이 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목숨을 걸고 전한 복음인데 몇몇 사람만 되고 안면 되겠는가. 나도 그 속에 못들어가서 이것을 찾은 것이다. 나도 만일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이것을 찾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못된다. 해보니 안되었다. 그래서 ‘예수를 만나야 할 텐데 어디서 만나는가.’ 하고 다니다가 여기서 만난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감사하다. 내가 만일 그 중 하나라도 얻었다면 거기서 멈췄을 것이다. 나는 삼각산으로 좇아다녔다. 만일 그때 내가 원하는 것을 만났다면 그쪽으로 빠졌을 것이다. 그쪽으로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이것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은사는 있다가 없을 수도 있다.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정해진 위치는 영원히 변치 않는다.
사도들은 그런 복음을 전하지 않았겠는가. 그래도 결과는 이렇게 되었다. 어떻게 전했는지는 모른다. 서신서밖에 없으니까 그때 그때 상황에 맞는 편지를 썼을 뿐이지 전체를 다 썼다고 볼 수 없다. 바울의 생각을 다 써놓은 책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모르던 새로운 예수, 어쩌면 버려버린 예수, 그 예수밖에는 내가 가져올 예수가 없다. 다른 예수는 다 가져갔어도 나는 참여가 안된다. 다 가져갔는데 결과는 그렇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니 나는 내게 맞는 주님을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
여자가 세상 남자와 다 결혼하겠는가. 신랑은 한 사람밖에 없다. 그래서 심사숙고 하는 것이다. 오늘은 이 사람과 결혼하고 내일은 저 사람과 결혼할 수 있으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사도들이 무슨 복음을 전했든 내가 알아듣기는 성경에 쓰여진 것밖에 모른다. 그러니까 지금 내게 무엇이 구원이 되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좋은 신랑감을 만나면 부모가 반대해도 결혼하지 않겠는가.
염경선 자매가 그랬다. 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인데 결혼을 결사반대했다. 그래도 재승형제가 좋으니까 결혼했다. 결혼식장에 아버지가 오시지 않았다. 아무것도 도와주지 않았다. 드레스도 못입고 결혼했다. 결혼식을 하고 나서도 배낭 메고 설악산에 갔다. 그래도 좋으면 누가 뭐래도 결혼한다. 좋으면 하면 된다. 좋으면 받아들이면 된다. 이것저것 생각이 많으면 결혼을 못한다.
이 남자와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야 하는가, 혹시 병신을 낳으면 어쩌나 하다가는 평생 결혼을 못한다. 그러니 처녀들은 용기를 내야 한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에 그런 말이 있다. “사랑이 네게 손짓하거든 그 품에 비수가 있을지라도 거기로 달려가라.” 예수가 손짓하는데 그것이 절대적이면 그 품에 비수가 있을지라도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용기도 필요없다. 보면 안다. 나도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보니 알았다. 이것은 물을 필요도 없다. 그 날에는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알기 때문에 알라고 할 필요도 없다. 그 날이 왔다.
서울 이복련 자매
십자가에 내려오지 못한 예수 문서로 체계화 하면 좋겠는데 목사님 생각은?
정말 좋은 말이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 내가 힘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 누가 쓰기를 바란다. 간단하다. 기독교를 다 알려면 끝이없다. 철학자 하나가 쓴 책이 이렇게 두껍다. 언제 그것을 다 보겠는가. 다 봐도 얻어진 것이 없다. 그런데 아주 작게, 간단하게 이 책을 꼭 내고 싶다. 기도해 주시기 바란다.
대전 류경미
흙으로 지은 창조와 내려오지 못하는 인격창조의 다른 점은?
모든 것은 먼저 모양과 상징이 있다. 그 다음에 실체가 만들어진다. 희랍 사람들의 생각은 이데아다. 책상을 만들려면 책상에 대한 이데아 먼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책상을 만든다. 마찬가지로 구약이 그와 비슷하다. 아직 답이 안되니까 그림자라고 하기도 그렇지만 그때 당시로는 전부였다. 그렇지만 신약을 알고 나면 그림자로 보인다. 그때 당시로는 전부였지만 햇빛을 보고 나면 달빛으로 보인다.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비유한 사람들이 있다.
옛날에는 등잔불을 켜놓고 공부했다. 어두우면 공부하겠는가. 그런데 전기불을 보고 나니까 등잔불이 그렇게 답답할 수 없었다. 그때는 백열등 전구에 버큼이 많았다. 여러분은 상상이 안될 것이다. 전등을 켜면 바닥이 어른어른했다. 그것을 보고 왔는데 램프 불을 보니 어찌나 답답한지! 빛을 보면 빛을 알게 된다. 안보고는 모른다. 왜냐하면 전기불이 없을 때는 램프불도 밝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말씀도 마찬가지다. 보기 전에는 그것이 최고다. 그런데 실체를 보고 나면 ‘그것은 그림자였구나.’라고 알게 된다. 실체를 더 보고 나면 ‘그것도 그림자였구나.’라고 알게 된다. 어느날 지금 이 복음이 어느 날 그림자로 보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최고는 램프불이었듯이 지금은 이 복음밖에 없다. 그때 전기불이 최고라고 알았으면 램프불을 켤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켜지 말라 해도 저절로 켜게 된다.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전 중심부 성기원 자매
목사님은 부활한 사람을 못봤다고 했는데 장사한지 사흘만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은 예수님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그리고 우리도 예수의 운명 안에 포함되어 있다면 예수와 같이 될 텐데 이것도 의미적인 해석인가요?
나는 따로 부활한 것을 못보았다. 승천이라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승귀(昇貴)라고 해석한다. 귀하게,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뜻이다. 승천(昇天)이라고 하면 푸른하늘을 연상하게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높이, 귀하게 영광스럽게 되셨다는 뜻이다. 십자가에 죽을 때는 천했는데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귀하게 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귀한 분이 되셨다는 것이다. 세상이 볼 때는 귀하게 안보인다.
이제 우리가 예수 안에 포함되면 그 다음은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가! 호산아 산부인과 4층에서 집회를 할 때 길을 건너려고 신호등 앞에 서 있었는데 나이가 꽤 드신 어떤 사람이 다짜고짜로 “이 목사님은 내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내세도 모르고 천당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예수 안에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알아듣고 “그러면 됐네요.” 하고 가셨다. 그분은 내가 천당이 없다고 알았는지 그것을 물어본 것이다.
지금 만유를 포함한 예수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한 사람만 창조했으니까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야 할 것 아닌가. 만민을 종류 대로 따로따로 지은 것이 아니라 딱 한 사람만 지으셨다. 바울은 이 사실을 “한 사람 안에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 안에서 의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전했다. 아주 놀라운 발견이다. 내가 70억을 어떻게 보겠는가. 다 못보아도 다 한 사람이다. 아담 한 사람이 이탈한 것은 모든 사람이 이탈한 것이다. 예수 한 사람이 구속일 때 우리 모든 사람이 구속이 된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 안에 있다. 개인이 따로 없다. 한 사람이다.
최영의
마태복음 하실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다가 십자가의 길로 가게 되어서 신적인 존재에서 사람의 자리로 가게 되었는데 본래부터 하나님의 각본에 있었는지 아니면 하다 보니 예수를 십자가로 가게 하셨는지?
이적을 행하다가 마지막에 십자가로 가신 것 때문에 헷갈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연관성을 듣고 싶습니다.
큰 질문이다.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메시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우리를 대표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는 예수를 기대했다. 그러나 안되고 말았다. 그래서 죽인 것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나와서 무슨 힘으로 그런 일을 하셨는가? 나는 하나님과 연합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런 경우가 있다. 모세를 바로 앞에 보낼 때 “내가 누구기에 바로 앞에 가겠습니까.” 하며 사양했다. 그렇지 않은가. 바로가 누군가. 모세가 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래서 극구 사양하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바로 앞에 신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다. 바로가 모세를 볼 때 신으로 보지 않았으면 이백만이나 되는 백성을 내보냈겠는가. 바로는 모세를 신으로 본 것이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신이라 했다고 하셨다. 우리는 형상이니까 신이 아니지만 신으로 나타내실 수 있다는 뜻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없다. 큰 경험은 아니지만 나를 신으로 보고, 내 말을 절대적인 말로 알아듣고 받아들이는 것을 보았다. 너무나 놀랐다. 나도 잘 아는데 나 같은 인간을 보고 어떻게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였겠는가. 그때 순천에 박은주 자매 어머니가 간암에 걸려서 바깥으로 불거질 정도였다. 대구에 아버님이 재승 형제와 같이 계셨는데 나보고 가보자고 하셨다. 가봐야 신유의 은사도 없고 죽으려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지 걱정이 되었지만 어른이 가자고 하시는데 못가겠다고 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따라갔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생각을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꼬?’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부딛치게 되었는데 가니까 재승 형제의 큰 누님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누워계셨다.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병에 들어서 이러저러했는데 이렇게 살아있다고 하면서 내 얘기를 잠깐 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는데 남편 박 원장이 일찍 쪽지 하장을 들고 오셨다. “어젯밤에 목사님 말씀을 듣고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없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별말 안했는데 어떻게 이런 반응을 하셨을까.’ 우리가 분명히 인간인데 어떤 경우에 어떤 사람에게는 신이 될 수 있다. 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쓰셨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신은 아니다. 사람도 이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도 원하는 것이 달랐다. 다른 것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였다. 그러니 병 고치는 것이 안중에 있겠는가. 세례요한이 옥중에서 사람을 보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세례요한은 의로운 사람이다. 백성에게 인기가 대단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 정도의 인물이다. 그런데 헤로디아의 일로 목이 잘려 죽었다.
세례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은 “가서 본 대로 말해라.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장님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는다.”라고 대답하셨다. 그것이 대답이 되었겠는가. 그리고 시골로 내려가셨다. 여기서 세례요한과 예수의 길이 전혀 달랐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불의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회복을 위해서다. 구속을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이 돼야 되지 하나님 나라가 따로 있겠는가. 구속받은 사람들이 있는 사회가 하나님 나라다.
그 기적의 사건은 하나님과의 연합의 사건이다. 우리가 그분을 보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아무리 봐도 그 사람을 찾을 수 없다. 나와 만나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곳밖에는 만날 데가 없으니까 거기서 만난 것이다.
나도 아마 그때 몸이 아팠다면 예수 앞에 가서 한방에 고쳤을 것 아닌가. 그러나 그랬다 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차피 죽을 것 아닌가. 예수님이 우리를 헷갈리게 한 점이 이것이다. ‘저 사람은 신처럼 저러는데 우리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고, ‘저렇게 신처럼 된 사람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는가?’ 하는 것이 우리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때는 그렇게 쓰셨는데, 결정적인 자리에 가서 이분은 신성이 없고 완전하게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 순간이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순간이 신과 인간이 완전히 갈라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지금 세상은 신인 사람, 신성을 가진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이것이 아담의 생각이다. 신성을 가진 인간, 내 속에도 신성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아담의 소원이다. 그러나 사람이 신성이 있으면 사람도 아니고 신도 아니다. 그래서 혼란인 것이다. 왜 모두 혼란인가? 신과 인간이 구별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자가 사건을 인해서 신과 인간이 완전히 구별되었다. ‘사람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것인가를 확실하게 보게 되었다. 아담 이후로 사람들은 모두 은연 중에 신이 되기를 바랐고 그런 지도자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것이 갈라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만 남았다.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없는 사람만 남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우리의 구속자가 된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어떤 위대한 존재가 우리를 부른다고 그에게 가면 되겠는가? 가도 안된다. 위상이 다르고 격이 다르고 성질이 다른데 되겠는가. 천사가 우리를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안된다. 천사와 결혼할 수 있겠는가. 어떤 여자는 자기보다 지체가 높은 사람과 결혼했다가 버림받는다. 동산 간대 출신으로 ‘미스 능금아가씨’에 선발될 정도로 예쁜 자매가 있었다. 너무 예뻐서 최고 학벌 남자와 결혼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예뻐서 좋았는데 남편이 맨날 바보 취급을 하면서 “이 바보야, 이 바보야.” 했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자살했다. 지체높은 사람을 좋아하면 될 줄 알지만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 이 둘 사이가 갈라져 있어야 한다.
워싱턴 교회 신태섭
나도 그랬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사업을 하고 계획을 하면서 기도를 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어떤 형제가 사업을 할 때 그 일이 내가 볼 때는 교회에 덕이 안될 것 같아서 반대했지만 그 형제는 교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계속 추진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내가 하려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인가?”라고 물을 때 답을 하기가 어려워서 나는 “그 일을 하고자 할 때 내가 형제라면 이것을 교회 안에 성숙된 생명, 영적으로 지도해 줄 분에게 상담을 해서 동의가 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겠는가.”라고 답을 한다. 나도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인지 어떻게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아주 좋은 질문이고 난처한 문제다.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이런 고민을 한 번씩 한다. 나는 처음에 워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을 1, 2, 3권을 보고 우리가 영적으로 한다고 해도 혼으로 한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는 선교를 해도 혼으로 할 수 있다. 그 전에는 선교는 영으로 하고 돈벌이는 혼으로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책에는 사람이 혼으로 한 것과 영으로 한 것을 갈라놓았다. 나는 거기서 큰 감동을 받았다. ‘아, 내가 했던 일도 혼으로 한 일이 많았구나.’라고 알았다. 그런데 학생들은 그 책을 일고 맨날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까 혼적인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했다. 나는 영과 혼이 다르다는 것만 캐치했다. 그래서 소화가 안되면 그 책을 보지 말라고 했다.
영으로 하는가 혼으로 하는가? 이것이 많은 기독교인들의 고민이다. 좋은 일은 하나님의 뜻이고 나쁜 일은 악마의 뜻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정확하게 구별해서 꼭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업을 하기는 불가능하다. 그 판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판을 옮겨야 한다. 판을 옮기려면 예수판으로 옮겨야 한다. 기도해서 물어 보면 어느 때는 맞아도 어느 때는 틀려버린다. 열번 중에 아홉번이 맞아도 마지막 한 번이 틀리면 다 틀린 것이다. 교회들이 하는 일이 많다. 목적을 세우고 기도하고 하는 일들이 많다. 그래서 성취되면 성령이 도우셨다고 한다. 모르니까 그 일을 계속 반복하고 되풀이 한다.
거기서 헤매지 말고 판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 생각이 바뀐다. 십자가에 못박혀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판으로 옮겨 버리면 생각 자체가 달라진다. 혼이니 영이니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판을 안바꾸고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나 어렵다. 정확하게 맞춰서 하기는 어렵다.
나도 살아오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다고 생각하고 했던 일도 아닌 것이 많았다. 그래도 그 중에 제일 나은 것은 교회에 물어보는 것이다. 상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하면 괜찮을 것을 망하고 보면 후회한다.
구자길 형제가 그러했다. 연금을 반을 잘라서 누구에게 투자를 했던 것이다. 아직도 못받고 있다. “왜 그랬느냐? 한 번이라도 얘기하고 하지 왜 안했느냐?”라고 물으니까 말을 하면 못하게 할 것 같아서 말을 안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 누구든지 자기가 꼭 하고 싶은 것은 물어보기 싫어한다.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예를 여러번 들었다. 물어보는 것이 좋은데 어떤 경우에는 안물어본다. 물어보면 자기 뜻대로 안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판을 옮겨야 한다. 그 자리에서 하기는 어렵다. 연탄장사를 하면서 하이칼라로 살려고 하면 되겠는가. 아예 생각을 안하는 것이 낫다. 근묵자흑이라고 먹 가까지 있으면 검어진다. 그런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기 보다는 판을 옮기는 것이 훨씬 쉽다. 그럴 필요가 없는 판으로 옮기면 된다. 그러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중심부 이지숙
구속의 복음이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고 단지 중간에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이 사람을 놓친 것뿐이고 이 길을 계속 걸어왔다고 하셨다. 그러나 내가 볼 때 이 구속의 복음은 전혀 새판이다.
그렇다면 전에는 왜 이 복음을 강하게 말씀하지 않았는지, 혹여나 교회가 시끄러울까봐 염려가 되서였는지요?
말씀을 전할 때는 그때 상황과 관계가 있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가 중요하다.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없고 필요도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항상 최종적인 데 오는 것이 좋다. 모든 것이 정리된 후가 최종적인 자리다.
지금 내 인생에 내 믿음이 정리된 것이 이것이다. 이것을 먼저 알면 다른 것이 다 해결된다. 짚신을 신을 때 이야기도 재미있고 나무 게다를 신을 때 이야기도 재미있고 운동화 신을 때 이야기도 재미있지만 그렇다고 짚신이나 게다를 신을 필요가 없다. 나이키가 나왔으니 나이키를 신으면 된다.
늘 마지막이 있다. 내 인생의 마지막이다. 내 인생을 알려면 여기오면 된다. 이것만 알면 된다. 다른 것은 몰라도 된다. 언제 다 알고 오겠는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다 알면 좋지만 급한데 언제 다 알겠는가. 일단 결론부터 얘기하고 나면 훨씬 쉽다.
나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들을 때 너무 좋았다. 그것이 나에게 길이 되었다. 나는 그런 과정을 다 겪었다. 그렇지만 내가 또 그런 과정을 겪을 필요는 없다.
워싱턴 소냐 박물관에 가면 공업의 발달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내연기관의 발달을, 처음부터 어디까지 왔는지 현물로 전시해 놓았다. 인공위성도 실물로 전시해 놓았다. 아이들은 꼭 보면 좋겠다. 그것이 공업발전에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용할 사람은 그런 것을 알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몰라도 자동차를 잘 타고 다닌다.
구미 임경순
십못내 예수 안에 내 죽음도 포함돼야 죽은 예수와 결혼하고 하나될 수 있는가요?
그런 말이 돌아서 혼란이다. 내가 지금 어디 와 있는가. 십자가에 못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안이다. 그런데 거기 내 죽음 네 죽음이 있겠는가? 그러면 또 죽음에도 등급이 생긴다. 그 말은 옛날에도 하던 말이다. ‘내가 죽어야지, 자아가 죽을 때’라는 말이 있었다. 그런대로 깨우치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 들어와 있는가?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그 자리다. 그러면 자기 죽음을 시인하지 않고 여기 왔겠는가. 거기 온 사람은 다 자기 죽음을 시인한 사람이다. 예수의 한계는 내 한계다. 그러니까 내가 보고 ‘아차, 만났구나.’라고 했지, 거기서도 내 죽음을, 내 한계를 생각해야 되겠는가.
내가 왜 그 예수를 만나고서야 비로서 만났다는 말을 했겠는가. 공통점이 있어서다. 그분이 한계가 있으면 나도 한계가 있다. 그분이 한계가 없으면 나는 그분을 못만났다. 그분이 한계 안에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내가 한계 안에 있는 것을 본 것이다. 그분을 발견한 것은 나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내 문제지 예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예수를 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전하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못내려오고 있는 예수를 전하는 것은 나를 전하는 것이다.
내려올 수 없는 사람이 그것을 전하겠는가? 뛰어내릴 수 있는 사람이 창피하게 못내려왔다는 말을 뭐하러 하겠는가.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왜 부끄럽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부활을 전하는데 왜 부끄럽겠는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전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니까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예수를 전할 수 있다. 그러려면 그가 나라야 한다. 십자가에서 못내려온 예수가 나다. 내가 못내려온 사람이다. 그러니까 못내려온 그가 만유를 포함한 것이다. 이것이 나는 너무나 기쁘다.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람이고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리를 전하는 것은 나 외에 다른 것을 전하는 것인데 예수를 전하는 것은 나를 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여러분에게 나를 말했다. 그러니 내가 안 것만큼밖에 말을 못했다. 내가 모르는 예수를 내놓지 못했다. 내가 언제 기적을 전한 예수를 기적으로 전했는가. 나는 기적이 아닌 다른 것을 전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것은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서 잔치집을 기쁘게 하셨다는데 내가 아는 것은 예수께서 오시면 가난한 잔칫집이 풍성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물이 포도주가 되는지, 어떻게 항아리에 넣은 물이 좋은 포도주가 되었는지는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니까 내가 아는 것만큼 전한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전하면 거짓말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에게 행복이 안된다. 내가 아는 예수를 전해야 행복이 된다.
나는 예수를 전하면 너무나 신난다. 옆에서 건강을 염려해도 나는 더 하고 싶다. 어제도 사람이 많이 있으니 너무나 좋았다. 이 말을 하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뛰어내릴 수 있는 예수를 생각하면 뛰어내릴 수 없는 예수는 전할 수 없다. 부끄러운 일을 계속 말하는 것은 지겨운 일이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부끄러움을 말하는 것은 창피하고 지겨운 일이다. 그런데 예수를 전하는 것은 축복이다. 해도 해도 끝없이 즐겁다. 끝이없다. 누구를 만나도 똑같다. 옛날에는 이 말도 하고 저 말도 했는데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고 재미도 없다. 한 말을 해도 이 말을 해야 한다.
오늘도 집회하기 전에 한 마디라도 먼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니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을 하고 싶었다. 창세기 1장 1절과 2절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것이다. 물로 덮여 있는 인간을 거둬내서 흙이 되게 하시지 않았는가!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엇엔가로 덮여 있었는데 이 인간을 십자가에 못박혀 내려오지 못한 예수의 운명으로 확 벗겨놓지 않았는가. 깨끗하게 벗겨놓아서 아무것도 숨을 것이 없다.
사상, 지식, 교리, 종교, 철학……, 아무것도 거기는 없다. 어떤 것으로도 이유를 달 수 없다. 완전하게 까발려 놓았다. 이제는 더 이상 유혹을 받을 일도 없고 더 이상 갈 데도 없다. 그런데 거기 복음이 들어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고 비밀이다.
김성식
예수님은 세상과 종교로부터 배척을 받고 결국은 십자가에 죽었다. 예수님이 그러하시다면 지금 예수를 따르는 우리도 같은 운명이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우리 교회가 기독교라는 종교로부터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그러나 예수를 따르면 결국 그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자기 소원을 절대자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서는 도움을 받고 죽어서는 천국에 가는 것인데 우리 교회는 이미 출발부터가 종교와 너무 다르다. 그래서 목사님에게 묻고 싶다. 우리 교회는 예수를 따르는 모임이기 때문에 종교와 출발 자체가 다르다. 그래서 이단이라는 소리는 들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차라리 종교가 아닌 것을 미리 선포하는 것이 어떤지?
두 번째는 천국이 있니 없니 할 때 확실하게 대답을 해서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이 좋은 사람만 오고 천국 가서 복을 받고 싶은 사람은 다른 데 가도록 우리 교회의 정체성을 완전히 커밍아웃하자고 건의하고 싶다.
아주 예리한 질문이다. 다 그렇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이 좋지 틀렸다는 말을 듣고 싶겠는가. 우리는 종교를 떠나 어떤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기독교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불교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한 사실을 말한 것이다. ‘인생은 이렇다.’ 이 말이다. ‘인생은 누구나 예수의 운명 안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인을 만나도 예수고 불교인을 만나도 예수다.
나는 스님을 만나도 말할 수 있다. 뭔가를 벗어버리고 초연해지고 싶어서 도닦고 있는 사람에게 “간단한 길이 있소. 옷벗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소, 그냥 가면 벌거벗겨진 데가 있소.” 그렇게 말하고 싶다. 어디 가도 이것은 사실이다.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으면 내려오지 못한다. 이 사실의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분이지 사실이다.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용쓴다고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누구에게든지 이 말을 하고 싶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다. 불교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니다. 사실은 내가 그런 사람이니까 나를 전하는 것이 좋다. 마음놓고 나를 예수 안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좋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가. 내가 평생 사모하던 분인데 진짜 신랑을 만난 것 아닌가. 그러니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아들을 낳아도 좋고 못나도 좋다. 병신 아들을 낳아도 좋다. 신랑이 좋으니까 다른 것을 생각할 이유가 없다.
우리 집 사람은 나밖에 모른다. 자식도 모른다. 내 불만이 그것이다. 자식좀 챙기라고 대도 자식도 안챙기고 나만 챙긴다. 그래서 티격태격한다. 알콩달콩 사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사람 속에는 나밖에 없는 것을 안다. 티격태격하지만 그 속을 아니까 스트레스 해소라도 하라고 둔다.
우리가 부끄러워할 것은 부끄러워해야 하지만 부끄럽지 않은데 왜 부끄러워하겠는가. 그리고 내가 그런데 왜 나를 부끄러워하겠는가. 나는 행복한데 왜 부끄럽겠는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배짱이 커져서 큰일이지만 나보다 더 잘난 사람, 더 행복한 사람이 있으면 와 보라.
대구 우점덕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했는데 구속이 되어도 사람은 이성이 있는데 어떻게 정죄가 안되나요? 사랑방만 열면 판단이 일어나 괴롭습니다.
나도 그 성경구절을 좋아했다. 로마서 7장에서 죄가 어쩌니 하다가 8장에서 갑자기 ‘그러므로’ 하면서 바뀐다. 앞에서 곤고한 사람이 갑자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로 바뀐다. ‘그러나’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이 ‘그러므로’는 6장 마지막에서 바로 온 것이다. 그런데 왜 7장을 넣어놓았는가? 아직은 거기까지 못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7장을 삽입해 놓은 것이다. 6장 마지막에서 8장 1절에 오면 ‘그러므로’가 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말이 얼마나 좋은지 지금 생각하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도 아닌데 모르면서 좋아했던 것이다. 성령의 감동이었을까?
이제 와서 보니까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 확실하게 알아진다. 그렇지 않은가! 그 안에 포함되면 내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이 무엇을 해 주는 것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는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하였다. 그분 자신이 구속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 안에 있어야 그렇게 되지 그 안에 있지 않고 구속이 되겠는가. 내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그가 나의 구속이다.
이제는 로마서 8장이 나의 말이 되었다. 그리고 여러분의 말이 될 것이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 세계는 세계 자체가 정죄가 없는 세계다.
죄가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이탈한 것이 죄다. 우리 운명을 이탈한 것, 하나님이 정해 주신 영역을 비켜 나간 것이다. 죄라는 말은 과녘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갈 곳으로 안가고 빗나갔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끊어진 것이 죄다. 그러므로 이 안에 있는 것이 바로 로마서 8장 1절의 말씀이다.
옛날에도 말씀은 좋았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렇다. 그 안에 있으니 정죄함이 없다. 왜 정죄함이 없는가? 이 세계는 정죄함이 없는 세계, 그런 문제가 없는 세계다. 돌아오지 않았는가. 돌아왔으면 됐지 돌아온 사람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가 없다. 그래서 판을 옮기라는 것이다. 미국 말을 못하거든 한국 비행기를 타라는 것이다. 판을 옮기면 쉬운데 돈좀 아끼려고 외국 비행기를 타면 물 한모금 얻어먹기도 어렵다.
술판에서, 노름판에서, 아편판에서 안하기는 어렵다. 라스베가스에 가면 저절로 노름을 하게 되어 있다. 리노로 가자는 말이 있다고 한다. 리노에 가면 마음대로 이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혼하고 싶으면 판을 옮기면 된다. 미국은 복잡한 나라다. 그래서 사막 한복판에 멀리 못달아나게 도시를 만들어 놓았다. 죄를 지으려면 마음대로 지으라고, 일부러 스트레스 해소하러 오라고 만들어 놓은 도시가 가르베가스다. 한판 마음대로 살아보라는 것이다. 진짜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으면 라스베가스에 가면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In Christ)’, 이것이 신약 성경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말이다. We are one In Jesus.
마지막
새 생명 안에서 행하려면 판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어머니가 밥맛이 없다고 하시면 해결방법을 모색해도 방법이 없어서 어머니가 원망이 된다. 그래도 지금은 그렇게 생겼으니 어쩔 수 없다. 안고 가자. 밥맛 없어도 죽지는 않는다 하고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지낸다.
그런데 여기서 판이 바뀌는 것은 어떤 것인가?
식판을 바꾸라고 하기는 곤란한데 내가 병원에서 나올 때 입에서 침이 나오지 않아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침이 없어서 씹어도 안넘어갔다. 그래도 메밀국수 국물은 들어갔다. 그래서 그 국물을 마셨다. 지금도 죽을 많이 먹는데 전혀 입맛이 없어도 국물을들어간다. 한번 그렇게 시도해 보기 바란다. 그 할머니는 틀림없이 입이 마를 것이다. 그러면 밥을 못먹으니까 국물이 있어야 한다. 더 좋은 방법은 소고기를 푹 삶아서 기름을 걷어내고 육수를 만들어서 드리면 된다. 탄수화물은 안들어가는데 고기국물은 들어간다. 식판을 바꿔야 한다.
돌아가실 때 밥을 못먹는 것은 입맛이 없어서가 아니다. 돌아가실 때가 되면 밥 생각이 전혀 없어진다.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먹을 생각이 없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못먹으면 돌아가신다. 억지로 먹일 수도 없고 링켈을 꼽아도 고생만 한다. 먹을 수 있는데도 맛이 없어서 못드시면 식판을 바꾸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