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Title) : 십계명 해설(Ten Commandments Explanation)
부제(Sub-Title) : 십계명의 배경-2 (the Background of Ten Commandments)
성경 본문(Bible Text) : 신명기(Deuteronomy) 5장 1절에서 22절
지난번 글에서 요리문답(Catechism) 형식으로 십계명에 대한 다섯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형식으로 글을 썼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십계명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답하는 요리문답(Catechism) 형식으로 계속 글을 써 나갈까 합니다.
지난번 마지막 질문의 번호는 5번이었으니 이번에는 질문 번호가 6번으로 시작하겠습니다.
6.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을 하나님은 어디에 두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을 언약궤(법궤) 속에 보관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좀더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 들어서서 시내산 아래에 진을 치고 임시로 거주하게 됩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과 성막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구체적인 내용을 지시받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신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지시를 받게 됩니다. 그 법궤와 두 돌비에 대한 기록은 출애굽기 25장 10~22절에 나타나며, 두 돌비에 대해 명확히 나타나는 구절은 25장 16절과 21절입니다.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25:16)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25:21)
16절에 나타난 궤는 법궤 혹은 언약궤라고 합니다. 그리고 21절에 나타난 속죄소는 언약궤 윗부분이며 그 속죄소(혹은 시은소) 양쪽 가장 자리 부분에는 각각 천사(그룹)가 날개를 서로 연결한 모습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두 그룹(천사)의 날개 아래 그리고 궤 위쪽 부분을 속죄소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일차 대속죄일에 그 속죄소 위에 짐승의 피를 부어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은 두 그룹(천사)의 날개 아래에 있는 속죄소, 그리고 그 속죄소 판 아래 궤 속에 놓였습니다.
7. 왜 하나님은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을 언약궤(법궤) 속에 두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약궤 속에 십계명을 두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여호와(야훼)를 유일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섬기며 그의 백성으로서 그의 율법(십계명)을 지킨다는 언약의 표징으로 두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그들의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섬겨야 하며 또한 그의 백성들로서 십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은 유다 나라가 바벨론에 함락되기 전이나 혹은 함락된 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활동했던 예레미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가 이 땅에서 번성하여 많아질 때에는 사람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는 말하지 아니할 것이요, 생각하지 아니할 것이요, 기억하지 아니할 것이요, 찾지 아니할 것이요, 다시는 만들지 아니할 것이며”(렘 3:16)
그리고 역대하 36장 18~19절에서 “또 하나님의 전의 대소 그릇들과 여호와의 전의 보물과 왕과 방백들의 보물을 다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또 하나님의 전을 불사르며 예루살렘 성벽을 헐며 그들의 모든 궁실을 불사르며 그들의 모든 귀한 그릇들을 부수고”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렇게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쳐서 함락한 후에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법궤와 그 안에 있던 십계명의 두 돌판도 사라져버렸습니다. 비록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어 성전이 파괴되었지만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과 같이 70년이 흐른 후에 유다 백성들의 일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에는 언약궤와 그 안에 들어있던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 법궤와 두 돌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과거에 저에게 신학을 가르쳐 주셨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의 김희보 교수님은 그의 강의에서 두 돌판이 들어있는 이 법궤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파괴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찌되었든 그 법궤와 두 돌판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되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후에 해리슨 포드의 레이더스라는 영화가 법궤를 찾아 추적하는 이야기로 만들어진 적이 있습니다. 법궤와 두 돌비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만들어진 영화라고 하겠습니다.
8. 신약시대에도 십계명을 지켜야 합니까?
우리는 십계명을 지켜야 하느냐 지키지 않아도 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알아보기 이전에 율법에 대한 배경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율법은 아주 협소(狹小)한 의미로 십계명을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범위를 넓혀 보면 모세오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모세오경을 사람들은 토라(Torah)라고 하며 율법으로 칭하였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이 율법이라는 의미가 확대되어 구약 성경전체, 즉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서, 그리고 대선지서, 소선지서등 구약 성경전체를 율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율법을 어떤 것으로 여겼을까요? 우선 사도 바울이 활동했던 시대가 구약 성경전체가 율법이라고 생각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율법은 구약 성경전체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사도 바울은 율법을 십계명에 한정지어 언급하는 구절이 나타납니다. 특별히 고린도후서 3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은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의 조문”이라는 언급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의 조문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당연히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서 돌에 쓴 율법의 조문은 십계명이 유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율법은 십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장차 오실 좋은 일의 그림자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율법은 예수님과 그가 하실 대속사역을 예표로 혹은 그림자로 증거하고 예언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체가 되신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율법을 완성하고 성취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가르치시고 대속사역을 완벽히 행하심으로 율법의 본질은 성취된 반면 율법의 외양은 폐해졌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한편으로는 성취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폐하여 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율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도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폐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십계명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고 할 수 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계명에 대해 해석하시면서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주셨습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십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완성 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조문을 하나하나 얽매여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행하면 자연스럽게 십계명, 즉 율법은 지켜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조항 하나하나를 가지고 따지고 들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인양 바리새인과 같은 외식하는 태도를 버려야만 합니다.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 날에 내려오신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라는 것을 마음에 확실히 새기며 살아가야 합니다.